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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1446년 알폰소 5세(Alfonso V)의 영토 | |||||
(1035[1])1162[2] ~ 1707 | |||||
성립 이전 | 이베리아 재통합 이후 | ||||
아라곤 왕국 | 스페인 왕국 | ||||
바르셀로나 백작령 | |||||
위치 | 이베리아 반도, 이탈리아 반도, 그리스 | ||||
수도 | 하카(1035~1096) 우에스카(1096~1118) 사라고사(1118~1516)[3]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하이메 1세(1213~1276) 페드로 3세(1276~1285) 알폰소 5세(1416~1458) 추안 2세(1458~1479) 페르난도 2세(1479~1516) | ||||
면적 | 120,000 km2 (1300년) | ||||
인구 | 1,000,000 명 (1300년) | ||||
민족 | 카탈루냐인, 아라곤인, 무데하르 등[4] | ||||
언어 | 카탈루냐어, 아라곤어, 라틴어 등 | ||||
종교 | 가톨릭 (국교), 수니파, 세파르드 유대교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 ||||
현재 국가 |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스 |
언어별 명칭 | |
아라곤어 | Corona d'Aragón |
카탈루냐어 | Corona d'Aragó |
라틴어 | Corona Aragonum |
스페인어 | Corona de Aragón |
포르투갈어 | Coroa de Aragão |
프랑스어 | Couronne d'Aragon |
이탈리아어 | Corona d'Aragona |
영어 | Crown of Arag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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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레네 산맥 중부 아라곤 지방과 카탈루냐, 발렌시아에 걸쳐 존재했던 국가. 1162년부터 아라곤 연합 왕국이 정식 명칭이다. 통합 스페인 왕국이 성립될때 카탈루냐 지방의 구성국으로 알려져 있다.2. 역사
2.1. 건국 배경
778 ~ 779년, 카롤루스 대제가 이끄는 프랑크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 원정을 치르면서 피레네 산맥 너머의 일부 영토[5]를 확보했다. 카롤루스는 이 영토에 변경백령을 설치해 알 안달루스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쳐들어오는 것을 저지하게 했다. 9세기 전반에 프랑크 왕국의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에서 쇠락한 후에는 팜플로나 왕국(후에 나바라 왕국)의 속국이 되었다.917년 아라곤 백작 갈린도 2세 아즈나레스가 아들을 낳지 못한 채 사망하자 팜플로나 국왕 안초 1세가 곧바로 아라곤을 완전히 병합하고 갈린도 2세의 딸 안드레고토 가린도이츠와 아들 가르체아 1세 사노이츠를 결혼시켰다. 그 후 아라곤 백국은 대대로 팜플로나 왕국의 지배가문인 히메네스 왕조의 왕자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러던 1035년, 팜플로나 왕국의 전성기를 일궜던 안초 3세가 사망했고 그가 생전에 확보한 영토는 자식들에게 분할되었다. 이때 아라곤 백작위는 라미로 사노이츠의 수중에 들어갔고, 얼마 후 아라곤 왕을 자칭했다. 이리하여 아라곤 왕국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2. 히메네스 왕조
2.2.1. 라미로 1세
아라곤 왕을 처음으로 자처한 라미로 1세는 1043년 자신이 가진 영역을 확장하거나 이복형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가 소유한 팜플로나 왕위를 빼앗을 의도를 품고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등 무슬림 토후국들과 함께 팜플로나로 쳐들어갔다. 가르체아 3세 사노이츠는 카스티야 백작이자 레온 국왕 페르난도 1세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했다. 양측은 타팔라에서 맞붙었고, 가르체아 3세-페르난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가르체아 3세는 수많은 무기와 보급물자를 노획했는데, 그 중 라미로가 타고 다녔던 검은 말을 노획해 자신에게 바친 알페레스(alférez: 중세 이베리아의 왕실 고위 관리) 오르티 사노이츠에게 오로비아 마을을 하사했다.타팔라 전투에서 완패한 뒤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자의 국왕을 맡고 있던 형제 온잘루 사노이츠에게 피신한 라미로는 얼마 후 온잘루가 사망하자 그 땅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이후 계모 무나이도나의 중재 하에 가르체아 3세와 화해하고 아라곤 백작으로 복귀했다. 1054년 페르난도 1세와 동맹을 맺고 무슬림들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한 가르체아 3세에 대적했다. 양군은 아타푸에르카 계곡에서 맞붙었는데, 전투 도중에 가르체아 3세가 전사했다. 다만 팜플로나군은 해질 무렵까지 전투 대열을 유지했고, 왕의 시신을 수습한 뒤 팜플로나로 이송하여 안장했다. 그 후 팜플로나 왕국의 서쪽에 있던 많은 영주들이 페르난도에게 귀순했다. 이에 가르체아 3세의 뒤를 이어 팜플로나 왕위에 오른 안초 4세는 때마침 아라곤 왕을 칭하고 있던 라미로와 동맹을 맺고 페르난도와 대립했다.
한편 바르셀로나를 거점으로 삼고 세력을 키워가는 카탈루냐 백작 라몬 베렝가르의 위세가 갈수록 강해지자, 라미로는 위협을 느끼고 딸 산차와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3세를 결혼시키고, 아들 산초 라미레스를 에르멘골 3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이리하여 우르헬 백국과 아라곤 왕국은 이중 결혼 동맹을 맺었고, 라미로는 이를 토대로 카탈루냐 백국을 몰아붙여 라구아레스, 라스콰레, 카펠라, 카세라스, 팔체스, 루자스, 비아캄프, 베나바레 등지를 공략할 수 있었다.
1055년, 라미로는 신카 계곡의 최북단 무슬림 전초기지인 그라우스를 공략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063년에 다시 그라우스를 포위 공격했다. 이에 사라고사 토후국이 고용한 용병대장 엘 시드가 300명의 기사들과 함께 그라우스로 달려가 포위를 풀려 했다. 1063년 5월 8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라미로 1세는 엘 시드가 내지른 창에 찔려 그라우스 성문 앞에서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아들 산초 라미레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라곤 국왕에 즉위했다.
2.2.2. 산초 라미레스
라미로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산초 라미레스는 1064년 공성 기술을 갖춘 프랑스인들을 포함한 원정대를 파견해 킨카 강과 베로 강이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잡은 바르바스트로(Barbastro) 시를 공략한 뒤 장인인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3세에게 맡겼다. 1065년 4월 사라고사 에미르 아흐마드 알 무콰디르가 지하드를 선포하고 바르바스트로로 쳐들어오자, 에르멘골 3세는 이에 맞서 항전해 도시를 지켜냈지만 그 과정에서 병사했다. 이후 산초 라미레즈가 반격에 나서 1067년 이전에 부에라, 콜룽고, 아다우에스카 마을을 포함한 알케자르 일대를 공략했다.1068년 2월 14일, 로마를 방문해 교황 알렉산데르 2세를 알현하고 아라곤 왕국을 교황청에 봉헌한 뒤 연간 500만 금화를 교황에 바치기로 했다. 교황은 그에 대한 대가로 아라곤 왕국을 정식으로 승인하고 성직자들을 아라곤에 파견해 주교구를 신설하게 했으며, 유럽 각국에 무슬림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아라곤 왕국을 도우라는 교령을 반포했다. 이후 많은 이탈리아 성직자들이 아라곤에 들어오면서, 아라곤에 로마 가톨릭 의식이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다.
1067년 레온과 카스티야의 산초 2세가 팜플로나 왕국 국경지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팜플로나를 위협하자, 팜플로나 국왕 안초 4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라곤에 구원을 요청했다. 산초 라미레스 역시 산초 2세의 확장 정책에 위협을 느끼던 터라 팜플로나 왕국을 돕기로 했다. 이리하여 발발한 "세 명의 산초 전쟁"은 엘 시드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안초 4세는 부레바, 알타 리오하, 알라바 일대를 카스티야에 넘겨줘야 했다.
1076년 6월 4일, 안초 4세는 나바라 마을 인근의 페날렌에서 사냥하던 중 형제 라몬 가르세이츠가 고용한 암살자가 내지른 단검에 찔려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라몬 가르세이츠는 팜플로나 왕국의 새 국왕이 되려 했지만, 귀족들이 형제를 살해한 그를 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하자 사라고사 궁정으로 도주했다. 이후 팜플로나 귀족들의 추대를 받으면서, 산초 라미레스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위를 겸임했다. 그는 레온-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의 승인을 받아내는 대가로 비즈카이아, 기푸스코아 등 팜플로나 왕국의 서쪽 영토를 넘겨줬다.
1077년 푸에로 데 자카(Fuero de Jaca)를 반포해 카미노 데 산티아고 마을을 도시로 승격하고 아라곤 왕국과 주교 본부의 수도로 삼았으며, 자크 대성당의 건설을 명령했다. 이는 피레네 산맥 반대편의 가스코뉴 등 프랑스인들과의 무역 활동을 용이하게 수행해 국부를 늘리기 위한 조치였다. 1078년에는 사라고사에서 20km 떨어진 에브로 강둑에 엘 카스텔라 요새를 건설하여 사라고사를 압박했다.
1083년 지난날 아버지가 공략에 실패하고 목숨을 잃었던 그라우스를 공략했고 뒤이어 아예르베(Ayerbe)를 제압했다. 이로써 아라곤 왕국이 킨카 강변과 우에스카 저지대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에스카의 남서쪽에 자리잡은 알 무데바르, 바르뷔에스, 상가렌, 타베르나스, 비시엔을 포함한 12개 마을들은 아라곤 왕국에 복속되어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1084년 4월 5일에는 투델라 시에서 15km 떨어진 아르게다스(Arguedas) 시를 공략했다. 그는 새로 확보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로아레(Loarre) 요새를 재건했으며, 오바노스(Obanos), 가리사(Garisa), 몬테아라곤(Montearagón), 아르타소나(Artasona)에 요새를 건설했다.
1087년 킨카 강과 에세라 강이 교차하는 지점인 에스타다를 새로 공략했으며, 1092년 프라가에서 12km 떨어진 자이딘(Zaidín)을 공략했다. 이렇게 확보한 영토 일부는 리바고르사를 관장하고 있던 장남 페드로 1세의 소유로 귀속되었다. 한편 1086년 10월 23일 알폰소 6세가 이끄는 레온군과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맞붙은 사그라하스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알폰소 6세에게 지원군을 파견했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다. 1094년 6월 4일 우에스카 시를 포위해 맹공을 퍼붓던 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몬테아라곤 수도원으로 옮겨졌다가 나중에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2.3. 페드로 1세
산초 라미레스 왕이 전사한 후, 장남 페드로 1세가 장병들의 추대를 받아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교황청에 왕국을 봉헌한 아버지의 서약을 준수하겠다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이에 교황은 아라곤의 왕과 왕비는 교황의 허락 없이는 파문을 받을 수 없음을 보장하는 교령 <쿰 유니버시스 상크테(Cum universis sancte: 모든 성도들)>를 반포했다.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레콩키스타를 전개했다. 1095년 나발과 살리나스 드 트리요를 공략하여 바르바스트로와 우에스카로 진출할 발판을 마련했으며, 1096년 우에스카를 재차 포위했다. 1096년 11월 15일 알코라즈 전투에서 우에스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사라고사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 빌라흐를 격파했다. 11월 27일 우에스카 공략에 성공한 뒤 이 도시를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한편, 페드로 1세는 보리아나에서 발렌시아에 거점을 삼고 할거하던 엘 시드와 동맹을 맺었다. 1096년 엘 시드를 만나고자 발렌시아로 떠난 그는 발렌시아 왕국의 국경지대인 베니카델에서 엘 시드와 대면했다. 이후 발렌시아로 나아가다가 바이렌에서 알 무스타인의 조카인 무함마드의 습격을 받았지만 격퇴하고 엘 시드와 함께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그는 몬순의 영주 라미로와 엘 시드의 맏딸 크리스티나를 결혼시킴으로써 엘 시드와의 동맹을 돈독하게 다졌다.
1100년, 페드로 1세는 에브로 계곡에서의 공세를 재개하여 1099년부터 포위 공격을 받고 있던 바르바스트로를 정복한 뒤 여세를 몰아 사리녜나를 공략했다. 이 무렵 제1차 십자군 원정이 선포되자, 그는 이에 가담하려 했다. 하지만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간곡한 요청을 받은 교황 파스칼 2세는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을 상대하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만큼의 가치가 있다"며 아라곤 왕의 예루살렘 순례를 막았다. 그 대신, 사라고사를 조속히 공략할 것을 촉구했다. 페드로 1세는 교황의 뜻에 따라 1101년 프랑스-카탈루냐 기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사라고사를 공격해 그해 6월부터 포위 했다. 그러나 사라고사의 방비가 강건했고 병력도 부족했기에 더 이상 몰아붙이지 못했고, 단지 사라고사 인근에 쥬시볼(Juslibol) 요새를 짓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페드로 1세는 정복한 영토에 인구를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 여러 주요 도시에 특권을 부여했으며, 가스코뉴 등 아라곤 왕국과 가까운 국가의 민중들에게 이주를 권장했다. 점령지에 이주한 주민들은 현지에서 방위 임무를 수행하되 원정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혜택을 누렸다. 또한 교황청에 주교들을 현지로 보내 가톨릭을 전파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기독교를 왕국 전역에 전파해 통치를 원활하게 하는 동시에 우르헬 교구의 확장을 저지한다는 목적이 담겨 있었다.
1103년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쉬핀이 엘 시드가 세웠던 발렌시아 왕국을 재정복한 뒤 아라곤에 쳐들어왔다. 무슬림들은 아라곤 왕국의 남부 일대를 석권한 뒤 우에스카를 위협했다. 그는 이에 맞서 페랄타 데 칼라산츠를 장악했고, 우르헬 백작 아르멘골 6세와 함께 피라세를 포위해 공략에 성공했다. 1104년에는 사라고사를 재포위했으나 이번에도 공략에 실패했다.
1104년 9월 28일, 페드로 1세는 사라고사 공략에 실패한 뒤 우에스카로 귀환하던 중 발다란에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아키텐 공작 기욤 8세의 딸인 아그녜스와 결혼했고, 1097년 아그네스가 사망한 뒤 베르타[6]와 결혼했다. 아그네스와의 사이에서 피에르, 아그네스를 낳았지만 각각 1103년과 1104년에 사망했고, 베르타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페드로 1세가 이렇듯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기에, 아라곤과 팜플로나 왕위는 이복형제인 알폰소 1세에게 넘어갔다.
2.2.4. 알폰소 1세
이복 형 페드로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알폰소 1세는 즉위 직후부터 선왕이 공략에 실패했던 사라고사를 반드시 함락시키겠다고 선포했고, 1105년에 왕국 전역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 해 타우스테를 공략했고, 1106년 말 아라곤 왕국 남서쪽 국경과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인 마디나(현재 에헤아 데 로스 카바예로스)를 공략했다. 또한 사라고사 주변의 엘 카스텔라, 폴라, 산타 이네스 등 산초 라미레스와 페드로 1세가 지은 요새들을 보강하게 해, 사라고사 토후국을 지속적으로 압박했다.1106년 중반 우르헬 백국이 무슬림으로부터 발라게르를 공략했다. 이리하여 레리다 북쪽의 무슬림 방어선이 뚫렸고, 알폰소는 이를 잘 활용해 라 호야 데 우에스카 일대를 평정하는 등 동쪽에서 사라고사 토후국을 압박했다. 다만 에브로 강 북쪽의 일부 지역은 여전히 무슬림의 손에 남아 있었다. 특히 프라가와 메퀴넨자는 아라곤 왕국의 공세를 번번이 격퇴하면서 사라고사 토후국과 레리타 토후국간의 연결망을 보장했다. 여기에 사라고사 북쪽의 갈리고 강둑에 자리잡은 주에라, 알무데바르, 구레아 데 갈레고 등지는 사라고사의 방위를 책임졌다. 알폰소 1세가 사라고사를 도모하려면 이들을 별도로 평정할 필요가 있었다.
1109년, 알폰소 1세는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의 딸 우라카와 결혼했다. 이때 우라카와 알폰소는 결혼 계약서를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알폰소는 우라카에게 상당한 땅을 양도하며, 파문이나 친족 관계로 인해 그녀를 버리지 않곘다고 약속했다. 또한 양자는 상대방의 영토에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알폰소가 죽으면 우라카가 알폰소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이 그의 영지를 물려받고 우라카가 먼저 죽으면 역시 자식들이 그녀의 영지를 물려받기로 했다. 하지만 알폰소와 우라카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할 경우, 우라카가 이전 결혼에서 낳은 알폰소 라이문데스(Alfonso Raimúndez)가 두 사람의 영지에 대한 상속권을 가지기로 했다.
그러나 이 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우라카가 첫번째 남편 레이몽과 결혼한 뒤 산티아고로 돌아갔을 때 함께 했던 부르고뉴 출신의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이 결혼으로 인해 약화될 것을 우려했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매사에 엄격하다는 평을 받던 아라곤 군주를 섬기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부르고뉴 출신 성직자들은 교황 파스칼 2세에게 알폰소 1세와 우라카는 팜플로나 왕국의 선왕 안초 3세의 증손자이니 근친상간이므로 결혼을 무효화해달라고 청원했다. 여기에 지난날 우라카에게 구혼했지만 알폰소 6세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했던 고메스 곤잘레스 백작은 우라카가 알폰소와 결혼한 후에도 그녀와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이렇듯 반대가 심했지만,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알폰소 6세는 이베리아 반도 기독교 세력이 승승장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군사적 역량을 갖춘 알폰소 1세 아래 통합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성사시켰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의 결혼을 성사시킨 직후인 1109년 7월 9일,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6세가 숨을 거두었다. 알폰소 1세는 자신이 장인의 직위를 그대로 승계받았다며 알폰소 6세가 생전에 누렸던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자기 것으로 삼아 '전히스파니아의 여제' 우라카의 공동 황제가 되었다. 그 직후 콤포스텔라의 대주교 헬미레스와 알폰소 라이문데스의 가정교사를 맡던 트라바 백작이 귀족들을 선동해 알폰소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군대를 이끌고 레온으로 진군해 몬테로소 성에서 반란군을 물리치고 주동자들을 체포해 사형에 처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더해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 기사들에게 레온과 카스티야의 여러 요새와 성채를 접수하게 했으며, 1110년 내내 우라카의 영지인 레온과 카스티야를 돌며 공물을 받았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알폰소 1세가 발바네라, 산토 도밍고 데 라 칼하다, 산살바도르 데 오냐 등 여러 수도원에 기부한 것에 대해 그들의 지지를 받아내어 우라카를 따르는 귀족들을 견제하게 하려는 수단이라고 추정한다.
우라카는 남편의 이같은 행보에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 여기고 분노했다. 그녀는 비스카야와 하로의 영주이자 가르시아 오르도녜스의 후계자인 디에고 로페스 데 하로에게 특권을 부여해 알폰소 1세에 적대하는 세력에 힘을 실어줬다.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은 귀족들은 알폰소 1세가 자기들 영지 내에 있는 도시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자기들에게 바쳐야 하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던 터라, 우라카의 지원에 반색하며 알폰소 1세를 몰아내기 위한 음모를 본격적으로 꾸몄다.
사라고사 토후국의 타이파 알 무스타인은 알폰소 1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통합 문제에 전념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군대를 일으켜 타우스테를 탈환하고 에브로 강 북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알폰소 1세는 즉각 대응에 나섰고, 1110년 1월 24일 발티에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궤멸시키고 알 무스타인을 처단했다. 이후 사라고사 토후국은 쇠락했고, 그동안 사라고사 토후국의 지배를 받았던 도시들 상당수가 알폰소 1세의 봉신을 자처했다.
발티에라 전투의 승리로 알폰소 1세의 위세는 한층 더 강력해졌지만, 그와 우라카와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졌다.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에서 집필된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가 우라카를 손과 발로 허구헌날 구타했다고 서술했다. 이 연대기들은 알폰소 1세에게 반감을 품은 인사들이 저술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우라카와 알폰소 1세 부부간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1110년 여름 두 사람의 결혼은 근친상간이니 인정하기 어렵다는 교황청의 메시지가 도착하자, 카스티야 백작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을 비롯한 반 알폰소 세력은 우라카의 친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를 레온과 카스티야의 왕으로 받들고 우라카와 알폰소의 결혼을 무효로 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대응해 우라카를 긴급 체포한 뒤 그녀의 정신 상태가 통치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며 아라곤의 엘 카스텔리아 성채에 투옥시킨 뒤 레온과 카스티야의 반란자 토벌에 나섰다. 그는 몇 주 만에 팔렌시아, 부르고스, 오스마, 사하군, 아스토르가, 오렌세 등 레온 왕국의 여러 요충지를 장악했다. 그러나 점령지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바람에 민중들이 분노해 곳곳에서 봉기를 일으키면서 진군이 지연되었다. 그 사이에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은 엘 카스텔리아 성채를 습격해 우라카를 석방시킨 뒤 사하군 수도원에 이송시켰다가 다시 카스티야의 수도 부르고스로 데려왔다.
이 소식을 접한 알폰소는 군대를 돌려 고메스 곤살레스 백작의 영지가 있는 카스티야 남부로 진격했다. 1111년 4월 13일 교황에게 두 사람의 혼인 무효를 요청했던 톨레도 대주교 베르나르도를 축출한 뒤 아라곤 수비대를 톨레도에 배치했다. 이 무렵 포르투갈 백작이며 알폰소 6세의 또다른 딸인 테레사 데 레온의 남편인 엔히크 드 보르고냐가 우라카를 돕기 위해 진군하자, 알폰소는 엔히크에게 사절을 보내 갈리시아와 포르투갈 일대를 가지게 해줄 테니 자기 편을 들라고 설득했다. 엔히크는 이에 혹해 알폰소를 지지하기로 했다.
1111년 10월 15일, 엔히크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이 카데스피나 전투에서 고메스 곤살레스를 처단했다. 우라카는 패전 소식을 듣자 부르고스에서 탈출한 뒤 또다른 지지자인 페드로 곤살레스 데 라라와 합류했다. 그 후 우라카 측은 엔히크에게 "우리 편을 들면 카스티야의 일부 영토와 레온의 사하군 북쪽에 있는 사모라, 케이아 등지를 추가로 갖게 해주겠다"고 제안했고, 엔히크는 이를 받아들여 우라카와 연합하여 알폰소를 공격했다. 알폰소는 엔히크의 갑작스러운 배신에 상당한 피해를 입고 페냐피엘로 후퇴한 뒤 엔히크와 우라카 연합군의 포위공격을 받았지만 끝까지 버텨냈다.
얼마 후, 우라카는 엔히크가 더 많은 영토를 달라고 요구한 것에 반감을 품고 알폰소 1세와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엔히크가 자모라를 접수하기 위해 출진한 사이, 우라카는 알폰소 1세와 내통해 팔렌시아를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알폰소는 즉시 팔렌키아로 진군하다가 사하군에서 우라카 및 엔히크의 아내 테레사와 마주쳤다. 사하군은 곧 함락되었고, 테레사는 알폰소 1세의 마수로부터 가까스로 탈출했다. 한편 우라카는 남편과 잠시 합류했다가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나머지 갈리시아 산맥으로 도피했다.
한편, 우라카의 지지자인 페드로 프루엘라스 데 트라바 백작과 대주교 디에고 헬미레스가 조직한 군대가 우라카의 어린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와 함께 레온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알폰소가 1110년 원정 당시 공략했던 루고를 탈환한 뒤 수비대를 배치한 후 레온으로 계속 진군했다. 알폰소는 이 소식을 듣자 군대를 돌려 비아당고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페드로 프루엘라스는 체포되었고, 디에고 헬미레스는 어린 알폰소를 데리고 포르티 카스텔로 오르질리오네(forti Castello Orzilione)로 도주해 그곳에 숨어있던 우라카와 합류했다.
우라카가 갈리시아 산맥 깊숙히 숨은 뒤, 알폰소 1세는 레온, 카스티야 등지를 돌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려 했다. 그러나 1112년 5월 아스토르가로 찾아갔다가 엔히크의 갑작스런 급습을 받았다. 짧은 공성전 끝에 아스토르가가 함락되었고, 그는 케리온 강변으로 물러났다. 하지만 엔히크는 아스토르가 공성전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아스토르가에서 사망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물러났다. 이후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1112년 여름 동안 휴전을 맺고 양자가 동의할 수 있는 평화 협약을 맺으려 애썼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커서 협의에 실패했다. 알폰소 1세는 어떻게든 레온과 카스티야를 장악하고자 아라곤 수비대들을 곳곳에 배치했지만, 현지인들의 비협조로 인해 좀처럼 통제하지 못한 데다 아라곤 귀족들마저 본국 귀환을 종용했다.
1112년 9월, 알폰소와의 협상이 무익하다고 여긴 우라카는 전쟁을 재개했다. 그녀는 케아 성을 공략하는 것으로 시작해 케리온 강 서쪽의 카스티야 영역을 탈환했다. 부르고스 남쪽의 두에로 상류 영토 역시 우라카의 권위를 받아들였다. 알폰소 1세는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다수의 병력을 곳곳에 배치했기 때문에 그녀의 공세를 저지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전히스파니아의 황제로 인정받기 위해 우라카와의 결혼을 이어가려 했으며, 교황 특사의 중재 제의를 거절했다.
1113년, 우라카는 갈리시아 귀족군과 함께 또다시 공세를 개시해 사하군과 카리온을 공략하고 부르고스를 포위했다. 알폰소 1세는 이에 맞서 라 호야로 진군해 반란 세력을 제압했고, 4월에 로스 아르코스로 진군해 부르고스에 포위된 지지자들을 도우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기에 남쪽에서는 알바르 파녜스가 이끄는 반란군이 톨레도를 공략했다. 이렇듯 기독교도들이 내전을 일삼자, 사라고사 토후국은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했다. 무슬림군은 오레하 성을 공략하고 톨레도 주변 시골 지역을 약탈했다.
1113년 6월, 우라카는 부르고스를 손에 넣은 뒤 무슬림군의 위협에 시달리는 톨레도 구원에 착수했다. 이후 양자는 무슬림에 맞서 단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1114년 팔렌시아에서 열린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우라카와 알폰소 1세는 교황청의 뜻에 따라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했고, 알폰소 1세는 아라곤과 팜플로나의 왕으로 군림하되 레온과 카스티야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바스크, 라 리오하, 부르고스, 소리아, 세고비아, 과달라하라, 및 툴레도 등 자신이 일전에 점령했던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고, 우라카와 결별한 후에도 전히스파니아의 황제 칭호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 알폰소 1세는 무슬림과의 전쟁에 전념했다. 우선 툴레도를 포위했던 무슬림군을 격퇴했으며, 1117년에 피테로, 코렐라, 신트루에니고, 무르칸테, 몬테아구도, 카산테 일대를 공략했다. 1118년 툴루즈 공의회가 사라고사 정복을 지원하기 위한 십자군을 선포하면서 많은 프랑스인이 아라곤군과 합세했다. 그는 이를 활용해 알무데바르, 구레아 데 갈레고, 쥐라를 점령하고 그해 5월 말부터 사라고사를 포위했다. 6개월간 이어진 공성전 끝에 12월 18일 사라고사가 마침내 함락되었고, 알폰소는 사라고사에 입성한 뒤 이곳을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치하에 들어간 무슬림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그들이 세금을 바치는 한 이슬람교를 그대로 믿도록 허용하고 신변의 안전을 보장했다.
1119년 세르베라, 투데옌, 카스텔론, 타라소나, 아그레다, 마갈론, 보르하, 알라곤, 노비야스, 말렌, 루에다, 에필라를 공략하고 소리아로 진군한 뒤 칼라타유드를 포위하다가 1120년 무슬림들이 사라고사를 탈환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포위를 거두고 그들을 향해 진군해 쿠탄다 전투에서 격파했다. 얼마 후 칼라타유드를 공략한 그는 여세를 이어가 부비에카, 알하마 데 아라곤, 아리사, 다로카를 공략했다. 1123년에는 바르셀로나 백국을 공격해 레리다를 공략했다. 이후 1124년 겨울부터 1125년 9월까지 알 안달루스 깊숙이 침입해 그라나다 인근까지 진군하여 많은 현지 기독교도들을 생포한 뒤 아라곤으로 귀환했다.
1125년부터 1126년까지 그라나다와 코르도바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고, 1127년 롱가레스를 재정복했다. 한편 1126년 우라카 여왕이 사망한 뒤, 우라카의 아들 알폰소 라이문데스가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로 즉위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1127년 알폰소 7세가 자신이 무슬림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바쁜 사이 카스티야 전역을 석권해버리자 현실을 받아들여 1128년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국의 경계를 확정지은 타마라 평화협약을 체결했다.
1129년 몰리나 데 아라곤과 몬손을 공략한 뒤 엘 시드 사후 무슬림에게 넘어갔던 발렌시아를 포위했다. 그러다가 피레네 산맥 너머 아키텐에서 공작 승계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자, 그 여파가 아라곤 왕국에 미칠 것을 염려해 군대를 물렸다. 이후 1130년 10월에서 1131년 초 사이에 피레네 산맥을 건너 아키텐으로 가서 바욘을 포위 공격한 끝에 아키텐 귀족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아라곤으로 귀환한 뒤, 알폰소는 무슬림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1133년 메퀴넨차를 공략했으며, 1134년 프라가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1134년 여름 가스코뉴에서 온 프랑스 병사들이 그들의 땅으로 한꺼번에 돌아가는 바람에 프라가 요새 포위전에 투입된 병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발렌시아 총독이 이끄는 무슬림군이 이 때를 틈타 프라가 구원에 나섰다. 1134년 7월 17일, 알폰소 1세는 수적으로 우세한 무슬림군의 급습을 받았다. 그는 이 전투에서 패한 뒤 병력을 가까스로 수습해 철수했지만, 그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이후 사라고사로 귀환하다가 9월 7일 폴레니노 마을에서 부상이 악화되면서 숨을 거두었다.
알폰소 1세는 바욘 공방전을 전개하던 중에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성묘 기사단에 왕국을 맡기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기고 수도 생활을 하던 알폰소의 형제 라미로를 속세로 끌어내 아라곤 왕 라미로 2세로 즉위시켰다.
2.2.5. 라미로 2세와 페트로닐라
형 알폰소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라미로 2세는 팜플로나 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라곤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아타레스 가문의 일원인 페드로 데 아타레스를 왕으로 추대하려했지만, 그가 무척 거만한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들을 깔보자 마음을 바꿔 가르체아 라미리츠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라미로 2세가 이에 반대하면서 양국간 내전이 벌어질 조짐이 보였지만, 1135년 1월 양자는 바돌루엥고 조약을 통해 화합했다. 가르체아는 아라곤 왕국이 팜플로나 왕국의 주권자임을 인정하며 라미로를 아버지로 모시기로 했고, 라미로 2세는 그가 팜플로나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르체아는 1135년 7월에 입장을 바꿔 자신이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의 봉신이라고 선언하고 알폰소 7세의 보호를 받았다. 알폰소 7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가르체아에게 사라고사를 봉토로 내줬다.한편, 아라곤 왕국내 귀족들은 오랜 수도원 생활로 인해 통치 경험이 전무한 왕이 막 즉위한 터라 자신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틈을 타 세력 다툼을 벌였다. 이로 인해 왕위를 잃을 위기에 몰린 그는 베살루 수도원으로 피신한 뒤 그곳의 수도원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수도원장으로부터 "왕국의 미래를 위해 잡초를 뽑아라"라는 조언을 받고 돌아온 라미로 2세는 왕국 전체에서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종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귀족들이 그의 어리석은 행위를 비웃기 위해 그 종을 보러 오자, 왕은 종이 있다는 방으로 한 명씩 들어오게 했다. 잠시 후, 방안에서 귀족들이 목 베이면서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울러퍼졌다. 왕은 충격으로 얼어붙은 귀족들을 돌아보며 한 마디 했다.
"들어보라, 들어봐! 종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들어보라!"
이날 학살된 귀족들은 휴전 기간에 무슬림 캐러밴을 공격해 약탈을 일삼고 사병을 길러서 왕의 명령을 무시한 자들이었다. 이후 귀족들은 다시는 라미로 2세를 거역하지 못했다고 한다.
라미로 2세는 수도자로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가톨릭 교리에 어긋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아라곤 왕위가 후계자 없이 남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1135년 11월 13일 자카 대성당에서 아키텐 공작 기욤 9세의 딸 아그네스와 결혼했다. 아그네스는 1117년 투아르 자작 아이메리 5세와 결혼해 1127년 에이메리 5세가 사망할 때까지 기욤 1세, 가이, 제프리 4세를 낳았다. 라미로는 출산 경험이 많은 그녀가 후계자를 생산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그녀와의 결혼을 감행했다. 그는 이에 대해 공식 문서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육체적 욕망 때문이 아니라 왕실의 혈통을 잇기 위해 아내를 얻었다."
1136년 8월, 아그네스는 딸 페트로닐라를 낳았다. 그 후 아그네스는 1136년 10월 산 페드로 데 안테프 루엔초 수도원에 남편과 함께 방앗간과 말을 공동으로 기증한 것을 끝으로 더이상 기록에서 전해지지 않는데, 얼마 안가 죽었거나 남편의 권유에 따라 수도원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1137년 8월 11일, 당시 1살이었던 페트로닐라는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약혼했다.
이때 작성된 약혼 계약문서가 현재까지 전해지는데, 이에 따르면 라미로 2세는 왕권을 라몬 베렝게르에게 넘기고 베렝게르가 실질적인 통치를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되 아라곤 국왕은 딸 페트로닐라가 선임되며,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페트로닐라는 퇴위하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오르기로 했다. 이는 여성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지만 왕국의 소유나 양도할 권리를 부정하지 않은 아라곤 왕국의 법을 준수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그 후 1137년 11월 13일 라미로 2세는 왕위에서 물러나 산 페드로 엘 바에흐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딸 페트로닐라가 1살의 나이로 아라곤 여왕이 되었고 실권은 약혼남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주관했다. 페트로닐라는 14살 때인 1150년 정식으로 라몬 베렝게르 4세와 결혼했으며, 1152년 4월 4일 자신이 출산하던 중 사망할 경우 왕국을 남편에게 넘겨준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렇지만 5명의 자녀를 무탈히 낳을 수 있었고, 남편이 통치를 행사하는 동안 궁궐에 조용히 지냈다. 다만 1156~1157년 남편이 프로방스에 가 있는 동안 바르셀로나에 들러서 신하들을 접견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걸 보면 아예 정치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닌 듯하다.
1162년 남편이 사망한 후 바르셀로나 백국과 발 데 리브스 일대를 상속받았다. 이후 2년간 아라곤 왕국을 홀로 통치하던 페트로닐라는 1164년 6월 18일에 아라곤 왕국과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7살된 아들 알폰소 2세에게 맡기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 후 아직 어린 아들을 대신해 섭정을 맡았다. 1166년 프로방스 후작이자 라몬 베렝게르 4세의 조카였던 라몬 베렝게르 3세가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니스를 포위하던 중 사망하고 딸 둘세만 남았다. 이에 페트로닐라는 프로방스 백작령을 라몬 베렝게르 3세의 사촌인 알폰소 엘 카스토에게 넘겼다. 툴루즈의 레몽 5세가 이에 반발하여 지지자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자, 1167년 몽펠리에, 프로방스 주교관, 보 가문의 지원을 받은 아라곤군이 프로방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레몽 5세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시키지 못했다.
한편, 라몬 베렝게르 4세는 1157년 레온-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알폰소 7세가 레리다 협약을 이행하기 전인 1157년 8월 2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뒤를 이어 카스티야 왕위에 오른 산초 3세 역시 1158년 8월 3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갓난아기였던 알폰소 8세가 왕위에 올랐으며, 라몬 베렝게르 4세 역시 1162년에 사망했기에 레리다 협약은 제때에 실현되지 못했다. 이에 페트로닐라는 나바라 왕국을 적대하는 대신 화해하기로 하고, 1168년 안초 6세와 13년간의 휴전을 맺었다. 이때 앞으로 무슬림으로부터 정복한 땅을 나바라 왕국과 분할하기로 했다.
1173년 10월 15일, 페트로닐라 여왕이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히메네스 왕조는 단절되었고, 라몬 베렝게르 4세와 페트로닐라의 아들 알폰소 2세가 개창한 바르셀로나 왕조가 아라곤의 지배가문이 되었다.
2.3. 바르셀로나 왕조
2.3.1. 알폰소 2세
1173년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비로소 친정을 시작한 알폰소 2세는 1174년 1월 18일 16세의 나이에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전 국왕 알폰소 7세의 딸이자 현 국왕 알폰소 8세의 고모인 산차와 결혼했다. 이후 무슬림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 알폰소 2세는 발렌시아를 포위 공격한 끝에 그곳의 타이파로부터 공물을 2배 더 받기로 합의하고 물러났다. 뒤이어 자티바와 무르시아를 공격하던 중 안초 6세가 아라곤 왕국 국경지대를 습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군대를 돌렸다.1174년 7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함께 나바라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알폰소 2세는 밀라그로 성을 공략하고 파괴했으며,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군을 격파한 뒤 안초 6세가 있던 르귄 성을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다. 안초 6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산골짜기로 도주했고, 양군은 나바라 각지를 파괴한 뒤 철수했다.
알폰소 2세는 1177년 카스티야 왕국의 쿠엥카 정복전에 협력했으며, 1179년 카솔라 협약에서 알폰소 8세로부터 아라곤 왕국이 무르시아를 공략하는 것을 허용하게 하는 대가로 발렌시아에 대한 주권 주장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한 뒤 무르시아로 진군해 그곳의 타이파로부터 그동안 자신에게 바치지 않은 공물들을 납부하라고 강요했다.
한편 1176년 프로방스 일대의 패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던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와 타라스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툴루즈 백작은 이 조약에서 3만 리브르의 은화를 받는 대가로 프로방스, 가발다, 카라데스에 대한 주권을 포기했다. 이후 프로방스의 지배력 확대에 관심을 가진 그는 프로방스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 대항하는 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구엘프파를 지지했다.
그러나 1181년, 프로방스 일대에 대한 아라곤 왕국의 입지는 위기에 처했다. 먼저 툴루즈 백작 레몽 5세가 이끄는 군대가 나르본을 침공했고, 프로방스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이에 맞서다 몽펠리에 인근에서 살해되었다. 알폰소 2세는 동생 산초를 프로방스 새 백작으로 임명했지만, 1185년 툴루즈, 제노바를 상대로 자신의 허락없이 비밀 협상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를 해임했다. 하지만 레몽 5세는 툴루즈에서 일어난 반란 토벌에 애를 먹으면서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못했고, 1189년 양자는 1176년에 맺었던 타라스코 협약과 동일한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이후 알폰소 2세는 프로방스, 밀하우, 가발다, 로에르가 등 피레네 산맥 북부의 영토를 공고히하는데 힘을 기울였으며, 부라케스 델 피에몬테, 몽펠리에, 라세즈, 푸아, 비고라, 님스, 베지에, 카르카소나, 그리고 베른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 무렵 라 리오하 공략에 성공한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를 분할하고 동맹을 맺기로 했던 협약을 파기하고 아라곤 국경지대의 상당수가 자기 영토라고 주장했으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와 손잡고 아라곤 왕국을 도모하려 했다. 이에 아라곤 2세는 1190년 카스티야 왕국의 적국인 나바라 왕국, 레온 왕국, 포르투갈 왕국과 사신을 교환해 반 카스티야 동맹을 결성하려 했다.
1192년 제3차 십자군 원정에서 돌아온 잉글랜드 국왕 겸 아키텐 공작 리처드 1세는 알폰소 2세에 맞서 툴루즈 백작 라몬 5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알폰소 2세는 아들 알폰소를 레몽 5세의 이전 동맹이었던 포르칼퀴에의 기욤 6세의 딸인 가르센다 데 사르단과 결혼시키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하지만 양자간의 큰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고, 1195년 알폰소 2세와 레몽 5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레몽 6세 사이에 평화 협약이 다시 맺어지면서 갈등이 종식되었다.
1195년 7월 19일 알라르코스 전투에서 카스티야 왕국군이 야쿱 알 만수르가 지휘하는 무와히드 왕조군에게 참패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내 기독교 세력이 약화되자, 교황 첼레스티노 2세는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나바라 왕국에 공동으로 힘을 합쳐 무슬림을 무찌르라고 권고했다. 그는 이에 따라 반 카스티야 동맹 결성을 미루고 알폰소 8세와 함께 무슬림에 대한 합동 공격을 계획했지만 실행되지는 못했다.
2.3.2. 페드로 2세
1196년, 알폰소 2세가 프로방스 지역의 페르피냥에서 사망했고 장남 페드로 2세가 아라곤 국왕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카스티야 국왕의 딸이었던 점을 살려 카스티야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사촌인 알폰소 8세가 레온 왕국과 나바라 왕국에 대항하는 것을 지원했다.1198년, 무와히드 왕조의 봉신이 된 나바라 국왕 안초 7세가 무와히드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의 부름을 받고 마그레브로 향했다. 이에 페드로 2세는 알폰소 8세와 칼라타유드에서 만나서 안초 7세가 없는 사이에 나바라 왕국을 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알폰소 8세는 1199년 페드로 2세가 보내준 병력과 합세한 뒤 가스테이스(현재 스페인 바스크 지방 알라바 주의 주도 비토리아)를 포위 공격해 1200년 1월에 공략했으며, 뒤이어 알라바, 두랑갈데와가, 기푸스코아 지방을 빼앗았다. 안초 7세는 마그레브에서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듣고 급히 귀국했지만, 무와히드 왕조가 내전에 시달리던 중이어서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기에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을 상대로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200년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의사 셰흐트 벤 아이작 벤 요셉 벤베니스테(Sheshet ben Isaac ben Joseph Benveniste)를 무와히드 왕조에 보내 카탈루냐 해안을 연이어 습격하여 황폐화시키는 바르바리 해적을 단속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얻지 못했다. 1201년에는 성 호르디 알파마 기사단을 창설해 토르토사 인근 영지를 주고 그곳을 깁간으로 삼아 무슬림에 맞서 싸우게 했다. 1204년 몽펠리에 백작 기욤 8세의 딸 마리와 결혼하여[7] 외아들 하이메 1세를 낳았다.
1210년 카탈루냐 해안을 끊임없이 침략하는 무슬림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링콘 데 아데무즈로 쳐들어가 알 다무스와 카스텔파비를 공략했다. 또한 1212년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포르투갈 왕국-레온 왕국-나바라 왕국-성전 기사단 연합군이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의 군대와 맞붙은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 참전해 기독교 세력의 완승에 기여했다.
한편, 피레네 산맥 이북의 프로방스 백작령은 페드로 2세의 형제 알폰소 2세가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프로방스와 그 주변 일대에 관심이 많았고, 1204년 자신과 동맹을 맺은 포르칼퀴에 백작과 갈등을 벌이는 동생을 꾸짖는 서신을 보냈으며, 1206년 몽펠리에 주민들이 아라곤 왕국의 통치에 반기를 들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했다. 그러던 1209년 시몽 4세 드 몽포르[8]가 베시에와 카르카손을 공략하고 랑그도크의 영주들을 복속시키고 툴루즈, 코망주, 푸아 백국의 조공을 받는 등 위세를 떨치자, 그는 아들 하이메의 후견인을 시몽 드 몽포르로 삼기로 했다. 또한 여동생 레오노라와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약혼을 주선했다.
1213년, 시몽 4세 드 몽포르가 이단인 카타리파를 보호하는 툴루즈 백국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툴루즈로 쳐들어가서 레몽 6세를 몰아냈다. 레몽 6세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페드로 2세는 시몽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툴루즈로 진격했다. 그해 9월 10일 뮤레에 도착한 그는 레몽 외 남부 프랑스 영주들이 이끄는 랑그도크 부대와 합세했다. 그는 툴루즈 민병대에게 뮤레 성벽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기고, 본대는 인근 언덕에 배치해 장차 뮤레 성을 구하러 오는 시몽을 상대하기로 했다.
시몽은 기병대를 이끌고 진군하던 중 적과 마주치자 기병대를 3개의 전열로 나누고 자신은 3번째 대열에 섰다. 페드로 2세는 이에 맞서 2개 대열을 편성하고 자신은 2열에서 빌린 갑옷으로 변장한 채 부하들과 함께 섰다. 이윽고 시몽의 이복형제인 바레스의 기욤이 이끄는 카타리파 십자군 선두 부대가 적 중앙 대열을 향해 달려들었고, 두 번째 십자군 대열이 뒤를 따라갔다. 아라곤-랑그도크 연합군 선두 대열은 십자군의 돌격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십자군은 두번째 대열로 진격했다. 이와 동시에, 몽포르는 3번째 대열을 이끌고 적 좌익을 측면에서 요격해 격파한 후 적 후방을 향해 질주했다.
아라곤-랑그도크 연합군은 강력한 전투력과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십자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페드로 2세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동시대의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왕이 여기에 있다!"고 외쳤지만 적 기사들이 알아듣지 못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시몽은 2개 대열에게 적 추격을 맡긴 뒤, 자신은 포위된 뮤레로 이동해 그때까지 성을 공격하고 있던 툴루즈 민병대를 섬멸했다. 이리하여 아라곤 왕국은 랑그도크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2.3.3. 하이메 1세
페드로 2세가 뮤레 전투에서 전사한 뒤, 5살된 아들 하이메 1세가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군영에 머물렀다가 시몽 4세 드 몽포르에게 붙잡혀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이 소식을 접한 어머니 마리는 아라곤 왕국의 궁재 시메노 코르넬 1세, 아라곤 왕국에 있는 성전 기사단의 기사단장 기욤 드 몽트레돈 등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로마에 보내 시몽이 아들을 돌려주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인노첸시오 3세는 피에트로 디 베네벤토를 파견해 시몽에게 아이를 몽펠리에로 돌려보내라고 요구했다.시몽은 즉각 동의했고, 1214년 4월 18일에서 25일 사이에 어린 하이메를 특사에게 넘겼다. 이후 교황 특사단은 하이메와 함께 아라곤 왕국으로 가서 아라곤과 카탈루냐 귀족들의 영접을 받았다. 1214년 8월 중순 레리다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서, 팜플로나 주교인 아스파레그 데 라 바르카는 모두를 대표하여 하이메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세르다냐의 산초 1세와 전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의 셋째 아들 페르난도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하이메의 어머니 마리는 아들과 재회하지도 못한 채 1213년 4월 21일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성전 기사단장 기욤 드 몽트레돈을 아이의 가정교사로 삼고 교황 특사에게 섭정을 맡기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에 따라 아라곤 왕국의 섭정으로서 국정을 도맡게 된 피에트로 디 베네벤토는 먼저 유대인 아이작에게 아라곤 왕국과 이베리아 반도의 무슬림들과의 평화 협약을 맡겼다. 이것이 성사된 후, 피에트로는 정식으로 아라곤 왕국의 섭정을 맡을 이를 모집했다. 그 결과 1214년 11월 로셀로, 프로방스, 세르다냐 백작 산초 1세가 섭정에 선임되었다. 하이메의 삼촌이며 몬테아라곤 성의 수도원장이었던 페르난도는 자신이 왕의 가장 가까운 혈육이니 마땅히 섭정이 되어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216년 1월 23일,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어린 왕을 보좌할 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위원회에는 타라고나 대주교 가르시아 프론틴 1세, 세메노 코르넬 1세, 팜플로나 주교를 맡다가 타라고나 대주교로 승진한 바르카의 에스파라고스, 카르도나 자작 기욤, 기욤 드 몽트레돈 등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유력 귀족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섭정을 맡은 산초 1세에게 조언을 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산초 1세는 뮤레 전투의 패배를 복수하고 피레네 산맥 북부의 옥시타니 지역에 대한 아라곤 왕국의 지배력을 강화하고자 군대를 그곳으로 파견해 시몽에 맞서는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를 도왔다. 그러나 시몽 4세 드 몽포르에게 연이어 패해 오히려 많은 영역을 상실한 데다 새 교황 호노리오 3세가 카타리파 십자군을 자처한 시몽을 지지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의 사이가 나빠졌다. 몬테아라곤 성의 수도원장 페르난도는 이 때를 틈타 교황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기를 원하는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끌여들어 산초 1세에 대적했다.
1217년 12월 28일과 29일, 호노리오 3세는 두 개의 교령을 반포해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와 섭정 산초 1세를 각각 파문하며, 그들이 카타리파의 수괴로 규탄받는 레몽 6세를 계속 돕는다면 그들의 영역에 대한 십자군을 승인하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대내외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산초 1세는 1218년 9월 섭정에서 물러난 뒤 프로방스 백국으로 이동했다. 이후 1219년 타라고나 대주교 가르시아 프론틴 1세가 이끄는 새로운 왕립 평의회가 수립되어 하이메 1세 대신 국정을 돌봤다.
1220년, 소몬타노의 영주 로드리고 데 리카나가 사소한 실수를 저지른 기사 로페 달베로를 체포해 리카나 성에 가둬버린 뒤 로페가 다스리던 알베로 성을 약탈했다. 로페의 사위인 펠레그린 다트로실로는 아라곤 왕국의 수도 우에스카에 이 사실을 고발했고, 가르시아 프론틴 1세가 이끄는 왕립 평의회는 로드리고 데 리카나에게 로페를 즉시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로드리고는 이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1220년 5월 토벌대가 리카나 성을 포위해 수 개월간 맹공을 퍼부은 끝에 공략에 성공하고 로데 달베로를 석방시켰다. 이후 토벌대는 로드리고 데 리카나가 피신한 알바라시 영주령으로 향했다. 이후 2달간 공방전이 이어졌지만, 토벌전에 참여했던 귀족들이 중앙 정부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해질 것을 우려해 로드리고와 내통하는 바람에 공략에 실패했다. 그 후 왕립 평의회는 알바라시 영주 페로 페르난데즈와 로드리고가 왕에게 사죄하고 왕은 두 사람을 용서하는 형식으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1221년 2월 6일, 하이메 1세는 13세의 나이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의 딸 레오노르와 결혼했다. 이로써 하이메 1세의 입지가 다져지는 듯했지만, 1222년 중반 몽카다 백작 기욤 2세가 하이메 1세의 사촌이자 아라곤 왕국의 전 섭정 산초 1세의 아들인 누누 산체스의 영지 일부를 침탈하고 1223년 양자간의 전쟁이 벌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하이메 1세는 누누 산체스를 돕기 위해 귀족들을 소집했다. 그러나 왕을 따라 프로방스로 향한 귀족들은 몽카다 백작 기욤 2세와 내통하여 왕을 배신하기로 마음먹었다. 심지어 누누 산체스 마저 그들에게 회유되어 왕을 배신하기로 했다.
하이메 1세는 긴밀히 아뢸 이야기가 있으니 알라곤(Alagón)에서 만나자는 누누 산체스의 요청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는 귀족들에게 대다수 병력을 알라곤 인근 마을에 머물게 하고 4~5명의 기사만 거느리고 알라곤에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날 밤 누누 산체스는 400명의 기사와 함께 알라곤에 몰려든 귀족들을 들여보냈고, 하이메 1세는 순식간에 레오노르 왕비와 함께 체포되었다. 귀족들은 왕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는 질나쁜 조언자들로부터 왕을 분리시키기 위해 취한 조치라면서, 왕과 왕비를 사라고사 인근의 수다 성으로 이송시켰다. 그 후 1년간 연금되던 그는 20,000 모라베틴(morabetin)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타라고나 대주교 가르시아 프론틴 1세는 이 일로 실각했고, 오랫동안 권력에 눈독을 들였던 몬테아라곤 성의 수도원장 페르난도가 실권을 잡았다.
1225년, 당시 17세였던 하이메 1세는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페니스콜라 성을 포위했다. 그러나 귀족들이 소집령에 응하지 않는 바람에 병력이 충분하지 않아 공략에 실패했다. 1226년 다시 발렌시아 원정을 계획했지만 귀족들이 이번에도 소집 명령에 응하지 않자 원정을 취소했다. 하지만 아라곤 국왕의 위협적인 행동에 부담을 느낀 발렌시아 타이파 자이드 아부 자이드는 아라곤 왕국과 휴전을 맺는 대가로 발렌시아와 무르시아에서 얻은 수입의 1/5를 매년 지불하겠다는 협약을 제시했고, 하이메 1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1227년 초, 실권자 페르난도가 왕이 자이드 아부 자이드와 맺었던 휴전 협약을 파기하고 공세를 벌이려 하는 것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많은 귀족들이 전횡을 일삼은 페르난도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하이메는 병력을 원활하게 확보한 뒤 페르난도를 몰아붙였다. 그러던 중 교황 호노리오 3세가 파견한 사절의 중재에 따라, 양자는 1227년 3월 22일 알칼라 협약을 체결했다. 페르난도를 비롯한 반란 귀족들은 왕에게 용서를 구해 사면을 받고 앞으로는 왕을 위해 싸우기로 맹세했으며, 교황청은 무슬림과의 전쟁에 앞장서겠다고 서약한 하이메 1세의 권위를 인정했다.
1228년 우르헬 백작 에르멘골 8세가 딸 아우렘비아이스(Aurembiaix)를 남긴 채 사망했다. 그러자 카브레라 백작 게라우 4세가 "여자는 영지를 상속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우르헬로 쳐들어가서 그녀를 축출했다. 아우렘비아이스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하이메 1세는 "충직했던 가신의 자녀를 보호하고 군주의 허락없이 영지를 빼앗은 부덕한 신하를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게라우 4세를 공격했다. 게라우 4세는 바르셀로나 백작과 손을 잡고 대항했지만 패배한 뒤 다시는 이웃 영지를 무단으로 침략하지 않고 왕에게 복종하겠다는 서약서를 작성해야 했다. 이후 아우렘비아이스는 레리다를 아라곤 왕국에 넘기는 대가로 우르헬 여백작이 되었다.
1229년 9월 5일, 하이메 1세는 155척의 전선과 1,500명의 기병, 15,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마요르카 공략에 착수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병사 대부분은 카탈루냐인이었다. 원정군은 9월 7일 마요르카 섬의 해안지대인 팔로메라와 드래고네라에 상륙한 뒤 9월 10일 산타 폰사 전투와 9월 12일 포르토피 전투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했다. 이후 마요르카 섬의 주도인 마드나 마요르카를 석달간 포위 공격한 끝에 12월 31일에 함락시켰다. 이후 카탈루냐에 살던 주민들을 마요르카 섬에 이주시키고 가톨릭 주교구를 설립해 마요르카 섬을 단시일에 기독교화시키고자 노력했다.
1231년 6월 17일, 하이메 1세는 메노르카 섬의 지도자 아부 아브드 알라 무함마드와 카프데페라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협약에서 무함마드가 섬을 계속 점유하는 것을 허용하되 자신에게 공물을 바치게 했다. 이후 1235년 야비차와 포르멘테라를 정복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이 소식에 기뻐하며 두 도시를 정복한 카탈루냐 원정대에게 십자군 칭호를 수여했다. 또한 1232년부터 발렌시아 토후국을 상대로 공세를 펼친 끝에 1238년 9월 28일 마침내 발렌시아 공략에 성공하고 수도를 우에스카에서 발렌시아로 이전했다. 다만 발렌시아 공방전 도중 아라곤 사령관이며 하이메 1세의 사촌인 베르나트 굴렘 1세 엔텐사가 전사하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아라곤 왕국의 지배에 놓이게 된 발렌시아 무슬림들은 자신들을 차별대우하고 개종을 강요하는 것에 반감을 품었다. 1244년, 그들은 알 아즈라크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알 아즈라크는 반란을 일으킨 직후 암브라 성, 알칼라 성 등을 공략했고, 이듬해에는 사티바, 데니아, 알리칸데 성을 공략했다. 여기에 아라곤 왕국이 지나치게 강성해지는 것을 우려한 그라나다 술탄국이 반란을 지원했고,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 역시 이베리아 반도의 경쟁자인 아라곤 왕국의 약화를 노려 반란을 지원했다.
게다가 하이메 1세가 "십일조를 면제해줄 테니 무슬림을 추방하라"는 교황 클레멘스 4세의 압력에 굴복해 아라곤 왕국의 모든 영토에서 무슬림을 추방하는 칙령을 내린 뒤 추방된 이들 상당수가 반군에 합류하면서, 반란 진압은 더욱 힘들어졌다. 하이메 1세는 반란 진압을 위해 루첸테 성을 포위 공격하다가 적의 매복에 걸려 죽을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그동안 알 아즈라크는 베니카델 성을 공격했으나 수비대의 결사적인 항전을 뚫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 양자는 잠정적으로 휴전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1248년 하이메 1세가 세비야를 포위하고 있던 카스티야 왕국을 돕기 위해 일부 병력을 파견하자, 알 아즈라크는 이때를 노려 아라곤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전쟁 초기에는 알 아즈라크가 아라곤 왕국의 정복지를 모조리 탈환할 기세로 몰아붙였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아라곤 왕국군의 거센 반격으로 차츰 밀렸다. 1251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중재에 따라 휴전을 맞고 수년간 불안한 평화를 이어갔다. 그러던 1258년 알 아즈라크의 고문이 성에 저장되어 있는 곡물들을 하이메 1세에게 모조리 팔고 황금을 잔뜩 챙기는 사건이 벌어졌고, 하이메 1세는 적이 식량 궁핍에 빠진 틈을 타 공세를 개시했다. 그 결과 알리칸테의 플레인, 페고, 카스텔 드 카스텔스를 공략했다. 그 후 알 아즈라크는 항복했고, 알칼라, 임브라, 데니아, 알리칸데 등 나머지 요새들을 넘긴 뒤 추방되었다. 이후 하이메 1세는 그곳에 사는 무슬림들을 모조리 몰아내라는 교황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그들을 개종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 하이메 1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코르베유 조약을 체결해 피레네 산맥 이북의 옥시타니아 영지를 몽펠리에, 칼라데스, 오멜리스를 제외하고 프랑스 왕국에 양도하기로 했다. 그는 아라곤 왕국이 그 지역에서 통치력을 행사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여겼고, 프랑스 왕국과 공연히 전쟁을 벌이는 것을 피하고 무슬림과의 전쟁에 집중하고 싶었기에 이 조약을 맺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 왕국이 카탈루냐에 대한 어떠한 주권을 행사하는 것을 포기하게 했다.
1264년, 카스티야 왕국의 속국이었던 무르시아의 무슬림들이 그라나다 술탄국의 지원을 받아 카스티야 왕국에 반란을 일으켰다. 카스티야 왁국의 지원 요청을 받은 하이메 1세는 귀족들을 소집했다. 아라곤 귀족들은 어떤 종류의 보상도 없이 카스티야를 돕기 위한 군사 작전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지만, 카탈루냐 귀족들은 잠시 주저한 끝에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하이메 1세의 아들 페드로가 이끄는 카탈루냐군은 무르시아로 진격해 반란군 지도자 무함마드 이븐 후드 비하 알 다울라를 격파하고 그라나다군을 물리쳤다. 그 후 카탈루냐 수비대와 민간인들이 무르시아에 대거 정착했고, 하이메 1세는 이 영토를 카스티야 왕국에 그대로 양도했다.
1267년, 하이메 1세와 교황 클레멘스 4세는 하이메 알라리크 데 페르피냥을 일 칸국의 아바카 칸에게 파견해 무슬림을 대상으로 십자군 원정을 단행하라고 촉구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했다. 1269년 아바카 칸의 답신을 가지고 돌아온 하이메 알라리크는 칸이 십자군을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알렸다. 이에 흥분한 하이메 1세는 그해 9월 바르셀로나에서 조직된 함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많은 배가 흩어졌고, 그는 몽펠리에 인근의 에그모르트 항으로 피신했다. 다만 하이메 1세의 사생아 페드로 산체스가 11척의 배는 시리아의 기독교 항구도시인 아크레에 도착했다. 이후 아크레를 포위 공격한 바이바르스에 맞서 싸워 아크레를 지켜내는 데 일조한 뒤 시칠리아를 거쳐 본국으로 돌아갔다.
하이메 1세는 1274년 5월 7일부터 7월 17일까지 프랑스 리옹 대성당 에서 열린 제2차 리옹 공의회에 참석했다. 공의회가 6년 동안 기독교계의 모든 이익의 10분의 1을 십자군에 사용하는 안건을 내걸자, 그는 즉시 시행하자며 찬성 의사를 표명했지만, 다른 참석자들이 머뭇거리면서 결론이 나지 않자 아래의 말을 남긴 뒤 교황과 작별인사한 후 자리를 떴다.
"Barons, anar nos ne podem que huy es honrada alle España"
"남작들이여, 우리는 스페인에서 명예롭게 도망칠 수 없다."
"남작들이여, 우리는 스페인에서 명예롭게 도망칠 수 없다."
1275년, 카르도나의 라몬 폴크 5세, 로카베르티의 조프레 3세, 팔라르소비라의 아르나우 로제 1세, 에스푸리의 위그 5세 등 카탈루냐 귀족들이 아르탈 데 루나, 페리즈 데 리차나, 페레 코르넬, 시메노 도레아 등 아라곤 귀족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하이메 1세의 사생아인 카스트로 남작 페르난도 산체스를 지도자로 받들었다. 페르난도 산체스는 아크레에서 바이바르스를 상대로 상당한 용맹을 떨쳤으나, 하이메 1세에게 반항하는 귀족들 편을 자주 들었고, 만프레디를 제압하고 시칠리아를 장악한 카를루 1세와 접촉해 병력과 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러다가 하이메 1세의 장자인 페드로가 자신과 귀족들이 반역을 도모했다고 고발하면서 하이메 1세로부터 출두 명령이 내려지자, 이대로 끌려가서 죽음을 맞이하느니 저항하기로 마음먹고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는 즉시 토벌군을 이끌고 산치스를 격파한 뒤 1275년 6월에 포마르 드 싱카( Pomar de Cinca) 성에 가둬놓고 공성전을 벌였다. 성이 곧 함락되려 하자, 산치스는 양치기로 변장한 뒤 탈출을 시도했지만 싱카 강을 건너려던 중 체포되었다. 페드로는 이복 형제를 강에 던져 익사시키라고 명령했다.
1276년, 발렌시아 사라센들이 알 아즈라크의 지휘하에 아라곤 왕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발렌시아 전역을 초토화했다. 사라센들은 여세를 이어가 루첸트(Llutxent)를 파괴한 뒤 알바이다 계곡을 통과하여 바르셀로나로 진격했다. 이렇듯 상황이 위급해지자, 하이메 1세가 이를 토벌하고자 출진했지만 알지라에서 병으로 쓰러졌다. 그는 국왕에서 물러난 뒤 포블레 수도원으로 은퇴하려 했으나 그해 7월 27일에 사망했다. 이후 아라곤 본토와 발렌시아, 카탈루냐는 1276년 11월 사라고사에서 페드로 3세로 즉위한 페드로에게 돌아갔고, 마요르카와 피레네 산맥 너머의 카탈루냐 영역은 페드로 3세의 친동생인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아갔다.
2.3.4. 페드로 3세
하이메 1세 사후 왕위에 오른 페드로 3세는 즉위 직후 아라곤 왕국으로 쳐들어온 사라센들을 격파하고 발렌시아로 진격해 1277년 반란군이 농성하던 몬테사 시를 정복해 발렌시아 반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사라센 봉기로 인해 발렌시아가 황폐해지면서 국고가 큰 손실을 입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귀족들의 동의를 얻지 않고 카탈루냐에 특별세를 부과했다. 이에 카탈루냐 귀족들이 분노하여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페드로 3세는 발렌시아와 카탈루냐의 충성스러운 귀족들을 소집한 뒤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 전쟁은 3년간 이어지다가 1280년 반란군의 최후의 근거지인 발라게르를 공략하면서 페드로 3세의 승리로 종식되었다.귀족들을 성공적으로 제압한 뒤, 페드로 3세는 바르셀리나 왕실 조선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 조선소는 모서리에 4개의 탑이 있는 직사각형 평면의 큰 벽으로 둘러싸인 건물로 구성되었는데, 이중 2개의 탑이 현존한다. 그는 이 조선소를 통해 강력한 해군을 육성하여 장차 지중해에 영향력을 행사할 야망을 품었다. 특히 시칠리아가 그의 주요 목표였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멸족시킨 카를루 1세에게 원한을 품은 왕비 쿠스탄차는 남편에게 시칠리아를 도모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고,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카를루 1세에게 축출된 인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시칠리아 원정을 은밀히 준비했다.
페드로 3세는 먼저 시칠리아로 갈 때 왕국에 이상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 국가들과 친선 관계를 맺었다. 1279년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와 페르피냥 조약을 맺음으로써, 그가 자신을 주권자로 받드는 선에서 광범위한 자치권을 누리도록 허용했다. 여기에 1281년 알폰소 10세의 후계자 산초와 아그레다 조약을 맺음으로써 양국간의 동맹을 더욱 굳건히 했으며, 포르투갈 왕국의 디니스 1세와 자신의 딸인 아라곤의 이사벨의 결혼을 주선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하려는 카를루 1세에게 위협을 느낀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제공받고, 이를 통해 함대를 건조하고 용병을 끌어모았다.
1282년 초, 사라센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튀니지로 출진했다. 그 후 그곳에 정박하면서 시칠리아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해 3월 말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발발하면서 시칠리아 전역이 카를루 1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시칠리아 귀족들은 처음엔 아라곤 왕을 주군으로 섬기는 것에 마뜩치 않아 했다. 그들은 오직 교황만이 자신들을 이끌 수 있다며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자신들을 이끌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교황 마르티노 4세는 충실한 동맹자인 카를루 1세와 갈라설 이유는 없다고 여기고 단호히 거부했다. 이에 그들은 카를루 1세의 보복을 두려워한 끝에 튀니지 해안에 주둔 중이던 페드로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상황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자, 페드로 3세는 곧바로 시칠리아로 진군해 1282년 8월 30일 트라파니에 상륙했다. 이후 팔레르모에 입성해 9월 4일 시칠리아 왕으로 선포되었다. 카를루 1세는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시칠리아로 진격해 메시나를 포위했으나, 페드로 3세가 이미 시칠리아를 장악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폴리로 퇴각했다. 이후 카를루 1세는 교황청에 "이단인 정교회를 토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십자군을 저지한 아라곤 왕을 정죄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르티노 4세는 이를 받아들여 페드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 십자군을 선포했다. 카를루 1세의 조카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3세도 이에 호응해 아라곤 왕국에 선전포고했다.
페드로 3세는 임박한 전쟁에 대비해 길렘 갈세란 데 카르텔라(Guillem Galceran de Cartellà)를 알모가바르 보병, 석궁병, 창병으로 구성된 육군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해군 사령관으로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를 선임했다. 두 장군은 육상과 해상에서 동시에 공세를 개시해 1283년 2월 칼라브리아 해안 지대의 대다수 도시를 장악했다. 이에 카를루 1세는 페드로에게 "결투로 분쟁을 해결하자"고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페드로는 이를 받아들이고, 양자는 6월 1일 보르도에서 100명의 기사를 대동한 채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또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가 결투를 중재하기로 했다. 페드로는 아라곤 왕비이자 시칠리아 공동 여왕인 쿠스탄차 2세에게 시칠리아를 맡긴 뒤 아라곤으로 돌아간 후 변장한 채 보르도로 잠입했다. 그러나 결투는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고, 페드로는 아라곤으로 귀환했다.
한편,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칼라브리아 해안지대를 공략한 뒤 몰타를 공략하고 몰타 인근의 앙주-프랑스 연합 함대를 섬멸했다. 이후 1384년 나폴리 만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앙주 해군 전체를 격멸하고 42척의 적선을 포획했으며,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를 생포했다. 호엔슈타우펜 추종자들은 콘라딘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카를로를 처형하자고 주장했지만, 쿠스탄차는 거부했다. 그 대신, 그녀는 카를루 1세에게 "아들을 돌려받고 싶으면 나의 이복 누이인 베아트리체를 보내라"고 요구했고, 카를루 1세는 받아들였다. 쿠스탄차가 베아트리체 외의 다른 형제들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은 까닭은 기록이 미비해 불확실하지만, 그들이 돌아오면 남편의 시칠리아 왕위를 위협할 수도 있다고 여겼기에 돌려보내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베아트리체가 돌려보내졌지만, 카를로 왕자는 1285년 카를루 1세가 사망한 뒤 몸값이 지불되지 않았기에 옥고를 계속 치러야 했다.
한편, 교황 마르티노 4세는 페드로 3세를 파문하면서 아라곤 왕위를 필리프 3세의 형제인 발루아 백작 샤를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다. 샤를은 즉시 군대를 소집해 아라곤으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했다. 여기에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가 프랑스에 가담하면서, 프랑스군이 발레아레스 제도와 루시용을 자유롭게 통과할 수 있게 했다. 1284년, 프랑스 왕 필리프 3세와 샤를 백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루시용에 입성했다. 이후 지역 주민들의 거센 저항을 무릅쓰고 그 일대를 약탈한 그들은 1285년 지로나를 포위 공격해 아라곤군의 거센 저항을 물리치고 지로나를 공략했다. 샤를은 그 곳에서 임시로 제작된 아라곤 왕관을 썼다. 그러나 이탈리아 전선에서 스페인으로 달려온 라우리아의 루지에로가 프랑스 함대를 습격해 레 포르미게 해전에서 섬멸했다. 여기에 프랑스 진영에서 이질이 유행하면서 수많은 병사가 죽어갔고, 필리프 3세 역시 병마에 시달렸다.
결국 필리프 3세와 샤를은 철수를 결심하고 페드로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얌전히 돌아갈 테니 피레네 산맥을 통과하는 길목을 내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페드로 3세는 단호히 거부하고 퇴각하는 적을 추격해 콜 드 파니사르 전투에서 대파했다. 필리프 3세는 자기를 쫓아오는 페드로 3세를 피해 마요르카의 페르피냥으로 피신했다가 그곳에서 병사한 뒤 나르본에 묻혔다.
1285년 11월, 페드로 3세는 프랑스와 손잡은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를 응징하기 위해 원정을 준비하다가 급병에 걸리자 빌라프란카 델 페네데스의 별궁에 실려갔다. 임종을 눈앞에 두자, 포로로 잡힌 모든 프랑스인을 석방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이 시칠리아를 공략한 것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십자군을 막으려 한 게 아니라 가족의 명예를 위해서였다며 교황청에 사면을 요청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11월 11일 성 마르틴 축일에 사망했다. 2010년에 발굴된 그의 유해에 대한 법의학 연구에 따르면, 사인은 폐질환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와 대적한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와 교황 마르티노 4세 역시 같은 해에 사망했다. 마르티노 4세 이후 신임 교황에 오른 호노리오 4세는 페드로 3세를 사면했다.
2.3.5. 알폰소 3세
페드로 3세는 아버지 하이메 1세가 그랬던 것처럼 왕국을 아들들에게 나누었다. 아라곤을 장남 알폰소 3세에게, 시칠리아를 차남 하이메 2세에게 물려줬다. 마요르카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 귀환하던 알폰소 3세는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1286년 2월 2일 발렌시아에 도착해 아라곤 국왕으로서 즉위식을 거행했고, 남동생 하이메 2세를 시칠리아 총독으로 삼았다. 이후 1231년 하이메 1세에게 굴복해 공물을 바치는 대가로 자치를 인정받았던 메노르카 토후국을 공략하기 위한 원정대를 준비했다. 1286년 10월 18일 우에스카에서 회의를 소집해 메노르카 토후국이 겉으로는 봉신으로 굴고 있지만 실제로는 카탈루냐 해안가를 끈질기게 습격하는 무슬림 해적들의 은신처를 제공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들을 응징하겠다고 선포했다.1286년 11월 21일 2만 병력과 100척 이상의 카탈루냐, 아라곤, 시칠리아 선박을 이끌고 마요르카에서 출발한 원정대는 1287년 1월 5일 마혼 항구에 도착했다. 무슬림들은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밀린 끝에 센트 아가이즈 성으로 후퇴한 뒤 며칠간 공격당한 끝에 평화 협약을 맺어달라고 요청했다. 1월 20일, 섬의 주민들은 아라곤 국왕의 백성이 되어야 하며 6개월 동안 정해진 금화를 납부하지 못하면 옷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압수당한다는 내용의 센트 아가이즈 협약에 체결되었다. 납부할 능력이 없는 자들은 트리폴리 등 북아프리카의 노예 시장에 노예로 팔렸다.
메노르카의 지도자 아부 우마르는 아버지 사이드 이븐 하킴의 유골과 200명의 친척, 50개의 검과 서적들을 가지고 모로코로 떠났다. 메노르카 영지는 귀족들에게 분배되었고, 카탈루냐, 발렌시아, 아라곤 등지에서 이주민들이 들어왔다. 또한 시우다델라의 오래된 모스크 위에 대성당 건설을 명령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건설된 시우타데야 데 메노르카 대성당은 그가 사망한 후인 130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했다.
알폰소 3세는 북아프리카와 동방에도 눈독을 들였다. 1286년 틀렘센의 술탄을 가신으로 삼았고 모로코의 술탄과 동맹을 맺어 튀니스 술탄을 압박했다. 1290년에는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와 무역 협약을 체결하여 알폰소 3세가 지배하는 영토에 거주하는 상인들이 동로마 제국과 자유롭게 무역하는 대가로 3%의 세율을 납부하기로 했다.
한편, 알폰소 3세는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가 지난날 프랑스의 침략에 맞서는 아라곤 왕국을 돕겠다고 해놓고 실제로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에 불신을 품고 반 카스티야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1288년 9월 전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손자 알폰소 데 라 세르다를 카스티야와 레온의 국왕으로 옹립해 산초 4세에 대적하게 했다. 이로 인해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수차례 벌어졌지만 큰 전쟁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알폰소 3세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확보한 시칠리아 왕국을 나폴리 왕국, 교황령, 프랑스 왕국의 공세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3국과의 전쟁으로 소모되는 전쟁 비용이 과도해지는데다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여파로 성직자들과의 갈등도 생기자, 그는 전쟁을 조속히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시칠리아에 포로로 잡혀 있던 나폴리 왕국의 국왕 카를로 2세를 1289년에 석방시키는 대가로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양도받기로 했고, 나폴리로 돌아온 카를로 2세 역시 약속을 이행하려 했지만, 교황 니콜라오 4세는 파문당한 자와 약속한 것은 무효라며 석방을 위해 맺었던 약속을 준수할 의무를 면제하고 시칠리아를 한시바삐 정벌하라고 독촉했다.
이후 알폰소 3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요청에 따라 카를로 2세 대신 인질로 잡았던 카를로 마르텔 왕자를 카를로 2세의 다섯번째 아들 레몽 베렝가르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석방했다. 이후 알폰소 3세와 카를로 2세간의 전쟁이 재개되었을 때, 에드워드 1세는 일전에 맺은 평화 협약을 준수하라고 촉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니콜라오 4세는 아라곤과 나폴리 왕국의 화해를 막기 위해 2명의 추기경을 보냈지만, 두 왕은 교황보다는 에드워드 1세 쪽을 따르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2년간의 휴전에 합의했다. 이후 프랑스, 나폴리 왕국, 아라곤 왕국, 교황의 사절단은 페르피냥에서 잉글래드 대표단의 중재하에 협상을 벌였다.
1291년 2월, 아라곤 왕 알폰소 3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 나폴리 왕 카를로 2세, 그리고 교황 니콜라오 4세는 브리뇽 협약을 맺었다. 프랑스, 아라곤, 나폴리는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고, 알폰소 3세와 하이메 2세의 파문은 해제되었다.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간의 평화 협약은 정식으로 체결되지 않았고, 아라곤 왕국은 시칠리아에게 더 이상 군사 지원을 하지 않기로 했다. 교황청은 알폰소 3세가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이끌겠다고 약속하자 조약을 승인했다. 이에 시칠리아 귀족들이 반발했고,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하이메 2세 역시 시칠리아를 내줄 수 없다며 버텼다.
1291년 6월 15일, 이집트로의 원정을 준비하던 알폰소 3세는 갑작스러운 경색증으로 쓰러졌고 사흘 만인 6월 18일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딸인 엘레오노르와 약혼했지만 결혼식을 치르기 전에 사망해서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 그는 죽기 전에 아라곤, 발렌시아, 마요르카 왕국과 카탈루냐 백작령을 하이메 2세에게 물려주고 또다른 동생인 페데리코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양도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2.3.6. 하이메 2세
형 알폰소 3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한 하이메 2세는 즉각 바르셀로나로 이동해 그해 7월 즉위식을 거행했다. 그는 시칠리아 왕위를 동생인 페데리코에게 물려주라는 형의 유언을 무시하고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위를 겸임했다. 페데리코는 그저 총독 자격으로 시칠리아를 대리 통치해야 했다. 또한 일전에 프랑스와 손잡고 페드로 3세에 대항했다가 알폰소 3세에게 축출된 후 앙주에 피난가 있던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발레아레스 제도를 넘긴다고 합의했던 브리뇽 조약의 이행을 거부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아라곤 왕국의 필수적인 영토이니 절대로 넘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니콜라오 4세는 하이메 2세를 재차 파문했고 전쟁이 재개되었다.1292년 4월 4일 교황 니콜라오 4세가 선종한 후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2년간의 공백기가 있었다. 그 사이, 카를로 2세는 1293년 말 카스티야 국왕 산초 4세의 중재를 통해 아라곤 궁정에 인질로 잡혀있는 아들들을 보내주면 교황청과 아라곤 왕국간의 평화 협약을 주선하겠다고 제안했다. 1294년 오랜 공백기 끝에 비로소 선출된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카를로 2세의 제안을 지지했지만 얼마 안가 사임했고, 뒤이어 선출된 보니파시오 8세는 카를로 2세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하이메 2세와의 평화 협약을 지지했다.
그 결과 1295년 6월 12일 아나니에서 평화 협약이 체결되었다. 하이메 2세는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교황의 왕좌로 양도하고, 발레아레스 제도를 사르데냐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마요르카의 하이메 2세에게 돌려줬다. 그러면서 카를로 2세의 아들들을 석방시켰다. 카를로 2세의 딸 블랑카는 하이메 2세의 동생인 페데리코와 결혼하고, 교황은 시칠리아와 칼라브리아를 카를로 2세에게 양도하고 블랑카에게 막대한 지참금을 주며, 하이메와 페데리코를 파문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루 1세의 압제에 맞서 봉기한 바 있던 시칠리아인들은 이제와서 카를루 1세의 아들 카를로 2세를 왕으로 받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들은 1296년 몇 년간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던 페데리코를 시칠리아 왕으로 추대했다. 페데리코는 증조부 프리드리히 2세와 자신과의 연관성을 강조하기 위해 왕호를 프리드리히 3세라고 칭했다. 하이메 2세는 이 소식에 분노해 앙주 가문과 동맹을 맺고 시칠리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왕위에 오른 직후 신속하게 공세를 개시해 칼라브리아를 침공해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나폴리 왕국 내부의 불만 세력을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게 했으며, 토스카나와 롬바르디아의 기벨린 파(친 황제파)와 협상했고, 보니파시오 8세의 정적인 콜론나 가문을 지원했다. 하이메 2세는 이런 동생을 응징하기 위해 그동안 시칠리아의 해군 지휘관으로서 탁월한 활약을 선보였지만 이번에는 하이메 2세를 지지하기로 했던 라우리아의 루지에로에게 함대를 맡겨 시칠리아를 치게 했다. 1299년 7월 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올랜도 곶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격파했다. 또한 카를로 2세의 아들 로베르토와 필리포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카타니아를 포위했다. 필리포는 트라파니를 포위하기 위해 별동대를 이끌고 진군했지만, 팔코나리아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3세에게 패배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1300년 6월 14일, 라우리아의 루지에로는 폰자 해전에서 시칠리아 해군을 재차 격파했고, 프리드리히 3세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 1302년, 샤를 드 발루아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요청으로 이탈리아로 내려와서 시칠리아에 상륙했지만, 역병이 도는 바람에 군대가 궤멸되다시피하자 시칠리아군에게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의했다. 왕이 사로잡혀 있던 시칠리아군 역시 이에 동의하면서, 8월 19일 칼타벨로타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시칠리아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카를로 2세 역시 시칠리아의 왕으로 자처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다만 프리드리히 3세가 사망하면 시칠리아 왕위는 앙주 가문에 돌아가기로 했다. 1303년 5월, 보니파시오 8세는 프리드리히 3세로부터 공물을 받는 대가로 조약을 비준했다. 여기에 프리드리히 3세와 카를로 2세의 딸 엘레오노르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한편, 하이메 2세는 카스티야 왕국이 산초 4세와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Fernando de La Cerda) 왕자의 내분으로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 무르시아 공략을 시작했다. 1296년 4월, 그는 알리칸테를 점령한 뒤 엘체, 오리우엘라, 과르다마르 델 세구라를 공략했다. 1298년에는 알하마 데 무르시아와 카르타헤나가 아라곤 왕국의 수중에 넘어갔고, 1300년에는 로르카가 아라곤 왕국에 넘어갔다. 여기에 나스르 왕조의 무함마드 2세와 연합하여 카스티야 왕국을 협공하려 했지만, 무함마드 2세가 1303년 초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무함마드 2세의 뒤를 이어 타이파에 오른 무함마드 3세는 아라곤 왕국과 계속 손을 잡고 카스티야 왕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잇따르는 반란에 직면한 무함마드 3세는 카스티야 왕국과 협상하기로 했다. 페르난도 3세가 파견한 사절단의 대표 페르난도 고메스 데 톨레도는 그라나다가 점령한 영토를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고, 무함마드 3세는 그 대가로 자신이 카스티야 국왕의 봉신이 되고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조했다.
이후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페르난도 4세가 군대를 국경지대에 집중시킨 뒤 무르시아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자, 하이메 2세는 협상에 나섰다. 1304년 두 국왕은 토랄레스 협약을 체결했다. 이 협약에 따르면, 아라곤 왕국이 1296~1300년 사이에 카스티야 왕국의 내전을 틈타 빼앗아갔던 무르시아 주요 지역을 카스티야 왕국이 돌려받되 카르타헤나, 오리후엘라, 엘체, 카우데테, 엘다, 알리칸테 등지는 아라곤 왕국으로 귀속되었다. 그럼에도 국경 분쟁이 여전히 지속되자, 1305년 5월 19일 토랄레스 협약을 수정한 엘체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협약에서는 카르타헤나가 아라곤 왕국의 영역에서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가며, 양국의 경계는 세구라 강으로 정하기로 했다. 또한 알폰소 데 라 세르다는 알바, 베야르 및 지브랄레온 일대의 영주권을 확보하는 대가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더이상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
1313년 아란인들이 마요르카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종용을 무시하고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것에 보답하고자 행정적, 정치적 자치권을 부여했다. 1317년에는 사라센의 침략에 대비해 왕국의 남쪽 국경을 강화하기 위해 몬테사 기사단을 설립한 뒤 사라센과의 국경에 위치한 몬테사 성을 관장하게 했다. 1319년 아들 알폰소 4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면서, 아라곤 왕국과 발렌시아, 바르셀로나는 분리할 수 없는 왕실의 소유물로 선언하는 법령을 반포했다.
1321년 프랑스 나병 환자들이 유대인들과 짜고 우물을 독이나 가루로 오염시켜서 일반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병에 걸리게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을 덮어놓고 믿은 프랑스 민중들이 폭동을 일으켜 나병 환자와 유대인들을 대거 학살했다. 이때 많은 환자와 유대인들이 박해를 피해 아라곤 왕국으로 달아나 은신처를 제공해달라고 호소했다. 하이메 2세는 처음에는 나병에 걸린 자들을 체포하고 추방하라고 명령하면서도 유대인들은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질병에 걸린 자들을 체포해 고문을 가할 뿐만 아니라 나병에 걸리지 않은 외국인들까지 체포하고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만레사, 에제 데 로스 카발레로스, 우에스카, 몽블랑, 타라조나, 바르셀로나에 외국인들을 조사하는 기관이 설립되었고, 자신이 나병 환자라고 자백하거나 그들의 가루를 가지고 있다고 한 자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1322년, 아모난트(Amonant)라는 이름의 의사가 가스코뉴에서 아라곤으로 이주했다가 우에스카에서 체포되어 물에 나병 가루를 넣으려던 나병 환자로 기소되었다. 아모난트는 하이메 2세의 아들 알폰소 4세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알폰소 4세는 지역 의사들로부터 검사를 받게 한 뒤 그가 무고하다고 밝혀냈다. 하지만 이후에도 의심을 받자, 아모난트는 견디지 못하고 아라곤을 떠났다.
1323~1324년, 하이메 2세의 아들 알폰소가 1295년 교황이 그에게 부여했던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정복했다. 하이메 2세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327년 11월 2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고, 아들 알폰소가 알폰소 4세로서 아라곤의 새 왕으로 등극했다.
2.3.7. 알폰소 4세
알폰소 4세 재위 초기, 아라곤 왕국은 심각한 곤경에 처했다. 먼저, 제노아 함대가 사르데냐를 공격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에서 해상운송되던 밀을 막아버렸다. 제노아와의 전쟁은 그가 사망한 1336년까지 이어지며 아라곤 왕국의 경제를 황폐화시켰다. 여기에 자연재해도 여러 번 벌어져 수확량이 급격히 떨어져버려서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다. 그 결과, 바르셀로나 시에서 한 해에 10,000명에 달하는 시민이 굶어죽는 등 카탈루냐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반면 발렌시아 일대는 풍요로움을 유지했기에, 이곳의 관할권을 얻기 위한 암투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이에 알폰소 4세는 1239년 국왕이 발렌시아의 관할권을 분배한다는 내용의 헌장을 공포했다. 이후 1329년에서 1330년 사이에 많은 귀족이 그로부터 발렌시아의 관할권을 받았다.한편, 알폰소 4세는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의 딸이자 형 하이메와 결혼했던 레오노르와의 결혼을 진행했다. 이보다 앞서,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와 카스티야 국왕 페르난도 4세는 양국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하이메 2세의 장남 하이메와 페르난도 4세의 딸 레오노르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했다. 하이메 왕자는 수도자가 되기를 갈망했기에 이를 거부했지만, 아버지의 강압을 못이겨 1319년 10월 18일 레오노르와 결혼했다. 그러나 하이메는 하이메 2세에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수도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전달하고 1319년 12월에 타라고나의 산 프란시스코 수도원에 들어갔다. 졸지에 붕뜬 처지가 되어버린 레오노르는 토른토사, 사라고사, 칼라타유드, 아티카 등 여러 도시를 떠돌다 카스티야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왕이 된 알폰소 4세는 불안한 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카스티야 왕국과 결혼동맹을 맺기로 하고 레오노르를 아라곤 왕국에 도로 불러들였다.
1329년 1월, 알폰소 4세와 레오노르는 아그레다에서 약혼식을 거행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2월 5일에 산 미겔 데 타라고나 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알폰소 4세는 새 아내에게 우에스카 시와 아라곤 왕가에 속하는 다른 마을들과 성들을 수여했다. 그 후 레오노르는 알폰소 4세가 전 아내 테레사에서 낳은 아이들보다 자신의 아이들이 더 많은 영지와 권력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차기 국왕에 자기 아들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었다. 알폰소 4세는 레오노르의 거듭된 설득을 받아들여 1329년 12월 28일 레오노르의 아들 페르난도에게 토르토사 후작령과 알바라신, 오리우엘라, 칼로사 단 사리아, 과르다마르, 알리칸테, 몬포르테, 엘다, 라몰라, 노벨다, 아스페 등의 도시들을 하사했다. 여기에 5년 후에 태어난 레오노르의 작은 아들 후안 역시 갓난 아기일 때 엘체, 비엘, 볼사 등지를 수여받았다.
이에 테레사의 장남이며 왕위 계승자로 공인되었던 페드로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왕실 내 불화가 조성되었다. 귀족들 역시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한 쪽은 레오노르 왕비와 그녀의 아들들을 지지했고, 다른 한 쪽은 페드로와 그의 친형제들의 특권을 옹호했다. 1333년, 알폰소 4세는 레오노르의 아들 페르난도에게 야티바, 알키라, 모르베드레, 사군토, 알리칸테, 모렐라, 카스텔론 및 부리아나 등지를 양도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이 자기들 의사를 묻지 않고 페르난도에게 관할권을 넘긴 그에게 반발했고, 알폰소 4세는 발렌시아 평의회의 경고를 받자 명령을 취소했다.
알폰소 4세는 사람들의 관심을 외부의 적으로 돌려서 이러한 불화를 잠재우고자 그라나다 십자군 원정을 감행했지만, 알메리아 공방전에서 패하고 오리우엘라, 엘체 등 남부 영토 일부를 상실했다. 결국 그는 1335년 그라나다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인 1336년 1월 24일 바르셀로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장남 페드로가 페드로 4세로 즉위했다.
2.3.8. 페드로 4세
페드로 4세는 아버지가 사망하자마자 사라고사에서 왕족들과 귀족, 사제들을 소집하여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때 그는 사라고사 대주교에게 왕관을 씌워지는 관례를 거부하고 스스로 왕관을 썼고, 교황에게 왕국을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았다. 이후 발렌시아로 가서 아버지가 계모에게 현혹되어 너무 많은 영지를 이복형제들에게 양도했다고 비판하면서, 레오노르의 아라곤 왕국 내 수입을 박탈하고 그녀를 지지했던 귀족들의 영지를 몰수했다. 레오노르는 페드로가 자신의 두 아들 페르난도와 후안을 해칠 것을 우려해 자식들을 데리고 카스티야 왕국으로 도주했다. 이때 그녀는 남편이 물려준 많은 양의 금, 은, 보석을 가지고 갔지만, 도중에 페드로 4세가 보낸 부관에 의해 이것들을 모조리 빼앗기고 맨몸으로 달아났다.이러한 숙청 정책에 반발한 귀족들은 각지에서 반기를 들었는데, 특히 제리카(Jérica)의 하이메 3세의 세력이 강성해 페드로 4세가 쉽사리 억누를 수 없었다. 게다가 모로코를 평정한 마린 왕조의 아불 하산 알리가 알안달루스를 복원하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로 쳐들어올 준비에 착수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페드로 4세는 제리카 백국과 화해하고 레오노르가 아라곤 왕국에 소유하고 있는 영지의 수입을 받을 수 있게 해줬다.
이후 나바라 공동 왕 필리페 3세와 호아나 2세의 딸 마리아와 결혼했고, 1339년 5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와 동맹을 맺고 아불 하산 알리의 영토를 선제 공격하려 했지만 1339년 10월 알헤시라스 부근에서 마린 해군에게 참패하고 조프레 길리베르 제독이 전사했다. 1340년 4월 8일, 아불 하산 알리의 제독 무함마드 알 아자피는 51척의 카스티야 함대 중 35척을 나포하고 적장 알폰소 조프레 테노리오를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에 고무된 아불 하산 알리는 공성병기와 조정 전체, 부인들까지 대동하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알헤시라스에 상륙한 뒤 타리파를 포위했다. 하지만 1340년 리오 살라도 전투에서 카스티야-포르투갈 연합군에게 참패한 뒤 바다 건너 세우타로 도주했다.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와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4세의 활약 덕분에 한시름 덜게 된 페드로 4세는 여동생 콘스탄사의 남편인 마요르카 국왕 하이메 3세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하이메 3세는 봉건 군주인 페드로 3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식을 2번이나 연기했다가 1339년 많은 양보를 받은 뒤에야 경의를 표했고, 이후로도 아라곤 국왕의 지시에 불순종하곤 했다. 그러던 1341년, 하이메 3세는 몽펠리에 백작령의 소유권을 놓고 프랑스 왕국과 갈등을 벌이다가 페드로 4세에게 "프랑스 왕국이 아라곤을 공격할 지도 모르니 원군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페드로 4세는 이 문제를 좀더 자세히 논의하고 싶으니 바르셀로나로 출두하라고 명령했지만, 하이메 3세는 이에 대해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았다.
하이메 3세나 대리인이 올 기미가 없자, 페드로 4세는 자신이 하이메에 대한 군주의 의무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하이메 3세가 주조한 마요르카 금화가 후쓸리용(Roussillon), 세르다냐(Cerdagne)에 유통되는 것은 아라곤 국왕의 주화 독점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두 도시에서 마요르카 금화가 유통되는 것은 오래 전부터 아라곤 국왕이 허용한 관행이었기에 이는 억지였지만, 페드로 4세는 이참에 마요르카 왕국이 독자적으로 주화를 생산하고 프랑스 왕국과 이탈리아 도시국가들로부터 무역 특혜를 받는 등 지나친 권세를 누리는 상황을 근절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에 교황 클레멘스 6세가 개입해 마린 왕조와의 전쟁이 한창인데 같은 기독교 국가끼리 싸우지 말라며, 바르셀로나에서 교황 특사가 주관한 바르셀로나 회의에 하이메 3세가 출두하라고 권고했다. 하이메 3세가 이를 따라 바르셀로나로 향하자, 페드로 4세는 일부러 "하이메 왕이 페드로 왕을 잡으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하이메 3세는 페드로가 이 소문을 빌미삼아 마요르카를 침공하려 들 것을 우려해 섬으로 돌아가 방어에 전념했다. 1343년 2월, 페드로 4세는 교황 특사가 주관한 회의에도 참석하지 않은 하이메 3세를 불충한 가신으로 단죄하며 그의 왕국과 영지를 몰수하겠다고 선포했다.
1343년 5월, 알헤시라스를 봉쇄하던 아라곤 함대는 왕의 명령을 받들어 마요르카에 상륙한 뒤 뒤이은 산타 폰사 전투에서 하이메 3세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에 발레아레스 제도 전역이 아라곤 왕국에 복종했고, 페드로 4세는 섬의 특권을 확인했다. 하이메 3세가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고 교황 클레멘스 6세도 중재를 시도했지만, 페드로 4세는 후쏠리용과 세르다냐를 마저 공략하기로 하고 듣지 않았다. 1344년 두 도시가 함락되자, 하이메 3세는 프랑스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마요르카는 아라곤 왕국의 직할지가 되었다.
이 무렵 아불 하산 알리가 재차 군대를 일으켜 알 안달루스로 파견하자, 페드로 4세는 마요르카를 정복한 함대를 지브롤터로 파견했다. 1344년 12월 12일,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은 팔모네스 전투에서 마린군을 격파했고 알헤시라스에 대한 포위망을 굳혔다. 결국 심각한 기아와 전염병에 시달린 알헤시라스 시가 1345년 3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1세에게 항복하면서, 21개월간 이어진 알헤시라스 공방전은 종결되었다.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1349년 지브롤터에 대한 공략을 시도했으나 이번에는 격퇴되었다.
이 무렵 페드로 4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형제인 우르헬 백작 하이메 1세가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그러나 페드로 4세는 동생 대신 장녀 콘스탄사를 여왕으로 세우기로 마음먹었다. 페드로 4세가 하이메 1세의 직위를 해임하자, 형이 자신을 숙청하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하이메 1세는 사라고사로 도주한 뒤 추종자들을 결집하여 반 아라곤 연합을 결성했다. 이로 인해 내전이 발발할 기미가 보였고 여러 가신과 성직자들이 자제할 것을 호소하자, 페드로 4세는 동생의 직위를 복원하고 콘스탄사를 차기 후계자로 세우려던 계획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에 하이메 1세는 안전해졌다고 여기고 형과 화해했지만, 1347년 바르셀로나 궁정에서 형을 접견한 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에 페드로 4세가 동생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것이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1347년 11월, 하이메 1세가 페드로 4세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을 접한 발렌시아 연합이 페드로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왕을 여전히 지지하던 샤티바 성을 포위하면서, 레오노르 전 왕비의 아들인 페르난도를 지도자로 추대했다. 페드로 4세는 토벌대를 파견했지만 푸에블라 라르가 전투와 베테라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자 자신이 직접 발렌시아 연합과 협상하기로 하고 바르셀로나에서 발렌시아로 향했다. 1348년 4월 6일 페드로 4세가 왕비와 함께 발렌시아 시에 이른 뒤 연회가 개최되었을 때, 왕의 하인 한 명이 발렌시아 연합을 반역자들의 모임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격분한 사람들은 왕궁에 달려들어 왕의 고문과 하인들을 무차별 구타했다.
페드로 4세는 페르난도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할 테니 물러나라고 명령했지만 무시당하고 모르베드레에 억류되었다. 그러다가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발렌시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탈출했고, 테루엘로 가서 군대를 조직한 뒤 발렌시아 연합에 반격했다. 1348년 에필라 전투와 미슬라타 전투에서 아라곤과 발렌시아 연합을 대파하고 발렌시아에 입성했다. 그는 처음에는 발렌시아 전체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리라고 명령했지만 신하들의 간곡한 만류에 뜻을 접었다. 그 대신 관계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발렌시아 연합이 회의를 소집하기 위해 울렸던 종을 녹인 뒤, 종에서 나오는 녹은 금속을 연합 지도자들의 목구멍에 붓는 방식으로 죽였다고 한다. 이때의 흑사병으로 레오노르 왕비가 사망하자, 그는 시칠리아 국왕 페트루 2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재혼하여 두 아들 후안, 마르틴, 딸 레오노르를 낳았다.
1349년, 마요르카 전 왕 하이메 3세는 마요르카 왕국을 되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칼라데스, 오멜라데스, 몽펠리에 등 옥시타니에 남은 영지들을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모조리 양도하고 그 대가로 받아낸 돈을 활용해 용병대를 모집해 마요르카로 출진했다. 그해 10월 25일. 하이메 3세가 이끄는 용병대와 아라곤군이 뤼크마요르에서 맞붙었다. 그 결과 하이메 3세는 전사했고, 그의 아들 하이메 4세는 바르셀로나의 지하 감옥에 억류되었다가 1362년에 석방되었다.
1351년, 제노아가 사르데냐의 반 아라곤 봉기를 선동하자, 페드로 4세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고 제노아와 전쟁을 벌였다. 1354년 아라곤 함대가 사르데냐 내 제노바인 거주지인 아겔로를 공략하고 제노바인들을 모조리 추방했다. 이후 카탈루냐인들이 이 도시로 대거 이주했고, 현재까지도 아겔로 시에서는 카탈루냐 어가 흔히 쓰이고 있다. 그러나 그 외의 성과는 없었고, 페드로 4세는 사망할 때까지 샤르데냐 섬의 만성적인 반란에 시달렸다.
이 무렵, 카스티야 왕국은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엔리케 2세와 보르고냐 가문의 페드로간의 왕위 분쟁에 시달리고 있었다. 페드로 4세는 발렌시아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페드로 왕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에 엔리케 2세를 지지했다. 페드로는 이에 대항해 제노아와 손을 잡고 아라곤 왕국을 괴롭했다. 이리하여 양자의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다가 1356년부터 일명 '두 페드로의 전쟁'이 발발했다. 카스티야의 페드로는 포르투갈,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아라곤의 페드로 4세는 프랑스 왕국과 손을 잡고 맞섰다.
아라곤 왕국은 이 전쟁에서 많은 패배를 당하고 타라고나, 아리제, 엘체, 모로스, 세티나 등지가 짓밟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페드로 역시 아라곤 왕국의 반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은 데다 엔리케 2세 지지자들의 준동으로 인해 아라곤과의 전쟁에 전념하기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중세 흑사병이 창궐했고 가뭄과 메뚜기떼의 습격 등 여러 자연재해가 벌어지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교황 사절 장 드 라 그랑주는 두 왕을 화해시키기 위해 노력한 끝에 1363년 7월 2일 모르베데 평화 협약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양국은 이후에도 전쟁을 이어가며 크고 작은 전투를 연이어 치렀다.
1366년 페드로에게 축출되었던 엔리케 2세가 흑태자 에드워드의 지원에 힘입어 카스티야 국왕에 복위했다. 페드로는 포르투갈로 망명한 뒤 갈리시아에서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계속 대항했다. 그라나다 왕국은 카스티야의 페드로를 지원하고자 발렌시아 남부를 침공해 상당한 파괴를 자행했다. 1369년 페드로 왕이 마침내 엔리케 2세에게 제압당하고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엔리케 2세는 지난날 자신을 복위시켜주면 아라곤 왕국에 넘겨주기로 했던 무르시아를 양도하기를 거부했고, 페드로 4세는 이에 분개해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다 1375년 알마잔 평화협약이 맺어지면서 전쟁은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카스티야는 몰리나 영주권 등 아라곤 왕국의 통치하에 있던 카스티야 왕국의 영지를 돌려받았고, 페드로 4세의 딸인 레오노르와 엔리케 2세의 후계자인 후안 1세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1378년 가을, 페드로 4세의 맏아들이자 지로나 공작인 후안 왕자의 아내가 사망했다. 이에 카탈루냐 출신 시칠리아 귀족들은 마리아를 후안과 결혼시키자고 주장했다. 아라곤 왕국이 언제 시칠리아에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했던 다른 시칠리아 귀족들도 동의했고, 시칠리아 사절단은 1380년 봄에 아라곤 왕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후안은 같은 바르셀로나 왕가끼리 결혼하는 것은 근친상간이라 여기고 바르 공작의 딸과 약혼했다. 페드로 4세는 그 대신에 이제 갓 4살된 손자 마르틴과 마리아를 짝지어주기로 했다. 이 약혼은 1380년 7월 24일 시칠리다 사절단 대표 굴리에모 라몬 데 몬카다와 엔리코 로소가 바르셀로나 대성당에서 여왕을 대신하여 협약서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아라곤 왕 페드로 4세는 마리아와 마르틴 모두 어리다는 이유로 둘째 아들이자 마리아의 남편 마르틴의 아버지인 마르틴의 섭정을 받게 했다.
2.3.9. 추안 1세와 마르틴 1세
1387년 1월 6일, 페드로 4세가 67세의 나이로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사후 장남 추안 1세가 아라곤 국왕으로 등극했다. 1389~1390년 마요르카를 빼앗으려는 아르마냐크 백작 장 3세 다르마냐크의 공세에 직면하자 동생 마르틴에게 이들을 막게 했다. 침략자들은 1390년 지로나에서 마르틴이 이끄는 아라곤군에게 참패했다. 그러나 사르데냐의 반란 진압에 애를 먹었고, 오스만 술탄국에 의해 아테네 공국과 네오파트라스 공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1391년 반유대주의 열풍이 왕국 전역에 휩싸이면서 지로나,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페르피냥, 마요르카, 레리다 등지에 거주하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박해받았다. 그들은 강제 개종을 강요받았고, 이를 거부한 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후안 1세는 폭동을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사형에 처했다.1396년 5월 19일, 후안 1세는 푸아샤에서 사냥하던 중 갑작스런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바르셀로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가 산타 마리아 데 포블렛 왕립 수도원으로 옮겨졌다. 이때 후안 1세의 미망인 욜랑드 드 바르가 자신이 태아를 임신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많은 귀족들은 욜랑드가 아들을 낳을 경우를 고려해 당시 시칠리아에 있던 마르틴을 새 왕으로 세우기를 주저했다. 같은 시기에 후안 1세의 딸 후아나는 남편인 마티외 드 푸아카스텔봉을 부추겨 아라곤을 침공해 왕관을 손에 넣으라고 독촉했다. 푸아 백작은 그 말에 따라 아라곤을 침공했지만 아라곤 귀족들에게 패퇴했다.
국내에 남아있던 마르틴의 아내 루나의 마리아는 마르틴에게 아라곤으로 돌아와서 이 불안한 정국을 수습해달라고 요청했다. 마르틴은 시칠리아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전념하고 싶었기에 몇 달간 망설였다. 그 사이에, 마리아가 욜랑드의 건강을 지켜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녀를 한 성채로 옮김으로써 그녀의 지지자들로부터 고립시켰다. 곧, 욜랑드의 임신이 거짓이라는 게 드러나자, 마리아는 군대를 소집해 욜랑드와 마티외의 추종자들을 모조리 체포해 지하감옥에 가두고 영지를 몰수했다. 1397년 비로소 아라곤으로 돌아온 마르틴은 마르틴 1세로서 아라곤 국왕에 즉위했다.
마르틴 1세는 즉위 후 대규모 병력을 시칠리아로 파견했고, 1398년 시칠리아 귀족들이 모조리 제압되면서 난이 진정되었고, 왕실은 팔레르모로 귀환했다. 아들 마르틴은 1398년 초 마르티누 1세로서 마리아와 함께 공동 왕으로 등극했고, 마리아는 1398년 11월 17일 아들 피에트로를 낳았다. 마르틴 1세는 1398년과 1399년에 북아프리카에서 무어인들을 상대로 십자군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00년 11월 8일, 마르티누 1세와 마리아 여왕의 아들 피에트로가 마상창시합 도중 날아온 창에 맞아 죽었다. 아들이 허망하게 죽어버리자, 마리아는 절망에 빠져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1401년 봄 카타니아에 전염병이 창궐하자 렌테니 성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역병에 걸려버린 그녀는 독방에 갇혀 지내다가 5월 25일 새벽 2시경에 숨을 거두었다. 당시 바르셀로나에 있던 마르틴 1세는 그해 6월 14일에 마리아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채 아들에게 "마리아와 다시 관계를 맺어서 자식을 낳으라"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한편, 마르틴 1세는 서방교회 대분열에 깊이 개입했다. 그는 아비뇽 교황의 지지자로, 1403년 포위된 아비뇽을 구원하고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앙주 공작 루이의 영지로 호송시키는 데 깊이 관여했다.
1409년 사르데냐가 아라곤 왕 마르틴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마르틴 1세는 아들 마르티누 1세에게 사르데냐 진압을 명령했다. 마르티누 1세는 원정군을 이끌고 출진해 그 해 6월 30일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드 나르본이 지휘하는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해 7월 25일 칼리아리에서 사망했다. 아들이 허망하게 죽어버린 후, 마르틴 1세가 '마르티누 2세'로서 시칠리아 왕위를 겸임했다. 마리아 왕비는 그보다 전인 1406년에 사망했다.
마땅한 후계자가 없던 마르틴 1세는 1409년 9월 17일 엔첸차 남작 페드로의 딸 마르게리타와 결혼해 후계자 생산에 힘쓰는 한편, 마르티누 1세의 사생아인 페데리코를 정식 후계자로 삼고자 노력했다.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표하면서 성사되는 듯했지만, 그가 1410년 5월 31일에 돌연 사망하면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리하여 바르셀로나 왕조는 단절되었다.
2.4. 트라스타마라 왕조
2.4.1. 왕위 쟁탈전과 페르난도 1세
마르틴 1세 사후, 2년간 6명의 후보가 아라곤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이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카스티야 국왕 후안 1세와 아라곤 국왕 페드로 4세의 딸 레오노르의 아들. 어머니 레오노르가 아라곤 왕 페드로 4세의 딸인 점을 근거로 왕위를 주장했다.
-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 아라곤 국왕 알폰소 4세의 부계 증손자이며 마르틴 1세의 처남이었다. 마르틴 1세에 의해 왕실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 앙주 공작 루이 3세: 아라곤 국왕 후안 1세의 모계 후손.
- 간디아 공작 알폰소 1세: 아라곤 국왕 하이메 2세의 부계 후손. 후보들 중에서 아라곤의 역대 왕들과 혈연관계가 가장 가까웠다.
- 후안 데 리바고르자: 간디아 공작 알폰소 1세의 형제. 알폰소 1세가 1412년 2월에 사망한 후 형의 뒤를 이어 아라곤 왕위를 주장했다.
- 루나 백작 페데리코: 마르틴 1세의 아들이자 시칠리아 국왕인 마르티누 1세의 사생아.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마르티누 1세의 정식 아들로 인정받았다.
후보들은 의회를 열어서 왕을 결정하는 데 동의했지만,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의회 간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에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의 지지자였던 안톤 데 루나가 사라고사 대주교 가르시아 페르난데스 데 에레디아를 암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후보들 중 아라곤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이메 2세의 위신이 손상되었다. 여기에 더해 아라곤과 발렌시아 사이에 무력 충돌이 빗발쳤고, 각지에서 독자적인 회의가 열려 자기들 입맛에 맞는 후보를 왕으로 추대했다.
1410년에서 1412년 사이, 페르난도는 군대를 이끌고 아라곤과 발렌시아에 진군해 우르헬 백작의 지지자들과 맞붙었다. 1412년 2월 27일 모르베드레 전투에서 우르헬 지지자들을 격파하면서, 발렌시아는 페르난도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때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가 9명의 협상가로 구성된 중재 위원회를 세우라고 권고했다. 이에 14명의 아라곤계 인사들과 5명의 카탈루냐 사절단들은 1412년 2월 15일 알카니즈 의회를 열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며칠간 논의 끝에 3명의 아라곤 인사와 3명의 카탈루냐 인사, 3명의 발렌시아 인사를 협상가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이에 앙주인들이 자기들을 제외시킨 것에 불만을 제기했지만 무시당했다.
선출된 협상가들은 왕을 지명하기 위해 카스페에 모였다. 1412년 6월 24일 금요일에 투표가 실시되었고, 다음날인 6월 25일에 페르난도를 아라곤 왕으로 선출하되 그가 카스티야 왕을 겸임하는 것을 금지하고, 발렌시아, 카탈루냐 등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협정을 발표했다. 그해 9월 3일, 페르난도는 사라고사에서 왕으로서 정식 선서를 했고, 우르헬의 하이메 2세, 루나 백작 페데리코, 후안 디 리바고르자 등 경쟁자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이후 토르토사로 가서 교황 베네딕토 13세와 만난 뒤 베네딕토 13세가 대립 교황 알렉산데르 5세, 요한 23세와의 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아라곤으로부터 병력 지원을 받는 대가로 자신을 아라곤, 시칠리아, 코르시카, 사르데냐의 왕으로 인정하게 했다. 11월 19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카탈루냐 의회를 소집한 뒤 카탈루냐 귀족들의 관습과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맹세했다.
이제 발렌시아에 들러 그곳 귀족들의 충성 서약을 받을 차례였지만, 1413년 봄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를 진압하느라 지체되었다. 페르난도 1세는 우르헬로 진격해 반란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하이메 2세를 빌라구에르 성에 가두고 공성전을 벌인 끝에 10월 31일 항복을 받아냈다. 하이메 2세는 모든 직함과 소유물을 박탈당하고 일가족과 함께 카스티야의 우루에냐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사라고사로 가서 1414년 알하페리아 궁전에서 대관식을 치르고 발렌시아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페르난도 1세는 왕이 된 직후 1410년부터 1412년까지 2년간의 공위기 동안 발생한 극심한 인플레이션, 행정 체계 마비, 치안 마비, 소요 사태 등 여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재무부를 재조직하고, 강도와 도둑들을 모조리 때려잡고 각 도시에 군대를 배치해 치안을 바로잡았으며, 부패한 관료들을 해고하고 정부의 신뢰도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여기에 의회에 상당한 권한을 줘서 귀족들의 지지를 이끌어냈으며, 해상 무역을 활성화시켜서 경제를 재건하고자 노력했으며 유대인에 대한 폭력사태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대관식, 순행, 경쟁자들에 대한 경제적 보상 등으로 인해 왕실 국고가 바닥나버려서, 후대 왕들에게 큰 부담을 안겼다.
아라곤에서 입지를 어느정도 굳힌 페르난도 1세는 시칠리아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당시 시칠리아는 1409년 마르티누 1세가 사망한 뒤 마르티누 1세의 미망인인 블랑슈(수리아 1세)와 사생아인 페데리코 간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는 4명의 대표로 구성된 위원회를 시칠리아로 파견하고 군대를 별도로 보내 상황을 진정시키게 했다. 1415년 위원회가 시칠리아의 평화를 이뤄내자 둘째 아들인 추안 2세를 시칠리아 총독으로 보냈다. 한편 사르데냐에서는 우르헬 백작 하이메 2세의 부추김을 받은 레오나르도 데 쿠벨, 후안 데 오리스타니가 1415년 5월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이들과 협상해 하이메 2세의 영지 일부를 두 사람에게 넘겨줌으로써 반란을 멈추게 했다. 또한 제노아와 휴전 협정을 맺었고, 이집트 술탄과 우호 조약을 맺어 알렉산드리아에 아라곤 영사관을 복원하게 했다.
한편, 페르난도 1세는 서방교회 대분열을 수습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1414년 11월 5일 콘스탄츠 공의회는 지금까지 분쟁을 벌이는 모든 교황을 퇴위시키고 새 교황을 세우기로 했다. 그레고리오 12세와 발다세라 코사는 교황 직에 사임하는데 동의했지만,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는 물러나기를 거부했다. 이에 로마왕 지기스문트는 1415년 9월 20일 페르피냥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페르난도 1세는 베네딕토 13세에게 퇴위를 권고했지만, 베네딕토 13세는 끝까지 사임을 거부했다. 이에 콘스탄츠 공의회는 베네딕토 13세를 분열주의자로 선언하고 파문에 처하고 마르티노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했다.
1416년 초, 페르난도 1세는 공물 납부를 거부한 바르셀로나 의회를 설득해 귀족들로부터 공물을 받아냈다. 이후 사라고사로 돌아가던 중 이구알라다에 들렀다가 1415년 중반부터 앓던 병이 악화되면서 1416년 4월 2일에 사망했다. 사후 장남 알폰소 5세가 아라곤, 발렌시아, 마요르카, 시칠리아, 샤르데냐, 코르시카의 왕을 맡았고, 둘째 아들 추안 2세는 아버지가 카스티야 왕국 내에 가지고 있던 영지와 직위를 물려받았다. 또다른 아들 엔리케는 알부르케르케와 레데스마 공작위를 물려받았고, 페드로는 타라사, 발라그라사, 타레가 등 카탈루냐 도시와 마을, 그리고 발렌시아의 엘체와 클레빌렌테를 물려받았다.
2.4.2. 알폰소 5세와 추안 2세
알폰소 5세는 아버지 페르난도 1세의 뒤를 이어 아라곤 왕위에 오른 이래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1419년, 성년이 된 카스티야 왕 후안 2세는 페르난도 1세의 후계자인 알폰소 5세와 후안의 영향력을 없애려 노력했다. 후안 2세는 알바로 데 루나에게 권력을 위임해 이들을 축출하게 했다. 이리하여 양 진영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알바로 공과 소수의 카스티야 귀족들이 후안 2세를 지지했고, 후안과 다수의 귀족들은 알폰소 5세의 지원하에 후안 2세에게 대적했다. 내전은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아 오랫동안 간혈적으로 벌어졌다. 그는 동생을 지원하기 위해 카탈루냐 귀족들에게 군자금을 좀더 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들은 정부 직책에 역임한 카스티야 귀족들이 너무 많다며 그들을 줄이지 않는다면 돕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카스티야 출신 귀족들이 반발했고, 그는 이를 수습하느라 카스티야 쪽에 전력을 다하지 못했다.한편, 페르난도 1세가 사망한 후 시칠리아인들 사이에서 아라곤 왕국의 지배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알폰소 5세는 즉각 군대를 보내 이를 진압한 뒤 여세를 몰아 사르데냐 공략에 착수했다. 1420년 5월 24척의 갤리선을 이끌고 친히 샤르데냐로 진군해 그곳의 주민들을 복속시켜서 샤르데냐의 지배권을 온전하게 가져간 뒤 코르시카 섬으로 분견대를 보내 칼비 시를 공략하고 보니파치오 시를 포위했지만 공략에 애를 먹었다. 그러던 1421년,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가 앙주 공작 루이 3세의 맹공에 시달린 끝에 그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알폰소 5세는 보니파치오 시 포위를 풀고 나폴리로 진군해 그곳을 포위하던 루이 3세를 몰아냈다. 당시 아들이 없었던 조반나 2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고 칼라브리아 공작에 지명했다. 이리하여 알폰소 5세가 나폴리 국왕을 자처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
그 후 알폰소 5세는 아라곤 통치를 아내 마리아에게 위임한 뒤 나폴리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브라치오 다 몬토네를 용병대장으로 고용해 경쟁자인 앙주의 루이 3세와 밀라노 귀족 아텐돌로 스포르차의 연합군을 상대하게 했다. 로마 교황 마르티노 5세가 스포르차를 지원하자, 그는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진정한 교황으로 받들기로 하고, 당시 콘스탄츠 공의회로부터 파문된 뒤 입지가 위태롭던 베네딕토 13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다.
얼마 후 전세가 불리해진 스포르차 가문이 루이 3세를 더 이상 지원하지 않기로 하면서, 알폰소 5세의 입지는 굳건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갈수록 커지자 위협을 느낀 조반나 2세는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던 것을 철회하려 했다. 그는 낌새를 눈치채고 1423년 5월 여왕의 연인이자 나폴리 궁정의 유력한 인물인 잔니 카라촐로[9]를 체포하고 여왕 역시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조반나 2세는 아텐돌로 스포르차에게 아라곤인들을 몰아내달라고 요청했다. 스포르차는 군사를 일으켜 아라곤군을 기습공격해 크게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의 요새인 카스텔 누오보로 피신했다. 그 후 조반나 2세는 카스텔 누오보를 포위 공격했지만 아라곤군의 반격으로 패배한 뒤 아베르사 요새로 퇴각했고, 알폰소 5세를 양자로 들였던 것을 취소하고 앙주의 루이 3세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했다.
알폰소 5세는 라퀼라에서 조반나 2세의 군대를 포위하고 있던 브라초 다 몬토네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별다른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 동생 엔리케가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에게 구금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일단 귀국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바르셀로나로 귀환하던 중 루이 3세가 소유한 마르세유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분풀이를 했다.
아라곤 왕국에 도착한 알폰소 5세는 엔리케가 모라 성에 구금되고 그의 재산이 몰수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카스티야와의 국경지대에 배치했다. 이에 후안 2세는 알폰소 5세의 동생 후안 왕자를 알폰소 5세에게 보내 협상하도록 했다. 1425년 9월 3일, 양국은 토레 데 아르시엘 조약을 체결했다. 엔리케는 이 조약에 따라 석방되었고 체포 후 압수된 모든 재산과 수입을 돌려받았으며, 산티아고 기사단장으로서의 지위도 회복되었다.
1423년 말, 제노바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반 알폰소 동맹에 가담한 뒤 남부 티레니아 해로 진군해 가에타, 프로키다, 카스텔람마레, 소렌토를 공략했다. 형 알폰소 5세를 대신하여 나폴리 내 아라곤 영토를 지키고 있던 페드로는 1424년 제노바와 나폴리 연합군의 공격에 맞서 카스텔 누오보에서 저항했지만, 1424년 8월 요새가 함락되려 하자 시칠리아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아라곤군은 나폴리 왕국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조반나 2세와 루이 3세가 나폴리 왕국의 권좌에 올랐다.
한편,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알폰소 5세는 카스티야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던 동생 후안을 지원했다. 1429년에서 1430년 사이에 카스티야로 친정해 자드라케(Jadraque)에서 후안 2세와 알바로 공작의 군대와 대적했다. 이때 알폰소 5세의 왕비이자 카스티야 왕 후안 2세의 누이인 마리아가 개입했다. 그녀는 같은 기독교인이고 친척인데 서로를 해쳐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설득했고, 알폰소 5세와 후안 2세는 그 말이 옳다고 여기고 휴전을 맺기로 했다. 이후에도 양자간 무력 충돌이 몇차례 벌어졌지만,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1432년, 나폴리 왕국의 권신 잔니 칼라촐로가 조반나 2세가 고용한 암살자에게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나폴리 왕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나폴리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시가 군사 동맹을 맺고 그를 압박해오자, 어쩔 수 없이 1433년 조반나 2세와 10년 휴전 협약을 맺었다. 이후 예르바 섬에 대한 군사 원정을 감행했고, 1434년 트리폴리 공략에 착수하는 등, 한동안 북아프리카에 관심을 기울였다.
1434년 앙주의 루이 3세가 사망했다. 조반나 2세는 루이 3세의 형제인 르네를 나폴리의 새 후계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승인하지 않았고, 여왕은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가 대외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인 1435년에 사망했다. 알폰소 5세는 드디어 나폴리 왕국을 공략할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동생 후안, 엔리케, 페드로와 함께 남부 이탈리아로 진군해 카푸아를 공략한 후 가에타를 포위했다. 그러나 1435년 8월 4일 폰차 해전에서 제노바 함대가 아라곤 함대를 격파했고, 알폰소 5세는 후안, 엔리케와 함께 포로로 잡혀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에게 넘겨졌다.
알폰소 5세는 밀라노에서 교양있는 태도를 보여 비스콘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아라곤 세력이 나폴리를 공략하는 것을 막는 것은 밀라노에 어떠한 이득도 안 된다고 설득했다. 때마침 아라곤에서 남편을 대신해 통치를 행사하던 마리아 왕비도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며 남편을 석방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비스콘티 공작은 1436년 알폰소 5세와 형제들을 풀어주고 앞으로는 아라곤 왕국과 적대하지 않기로 했다.
1436년 2월, 알폰소 5세는 시칠리아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남부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카푸아를 탈환하고 가에타에 군사 기지를 세웠다. 1438년 5월 19일 조반나 2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르네가 나폴리에 도착하여 '레나토 왕'으로서 나폴리 왕을 자처했다. 알폰소 5세는 1439년 9월 나폴리를 포위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고, 동생 페드로가 전사했다. 그 후 르네가 이끄는 앙주 용병들이 맹공을 가하자 아라곤군은 점점 밀려났다. 그러나 르네의 편에 선 바리 공작 야코포 칼도라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앙주 용병대의 기세는 약화되었다. 알폰소 5세는 이 때를 틈타 반격을 개시해 아베르사, 살레르노, 베네벤토, 만프레도니아, 비톤토를 공략했다. 르네는 교황으로부터 1만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알폰소 5세는 교황군 지휘관인 조반니 비텔레스 추기경을 매수해 교황령으로 돌아가게 했다.
1441년 11월 10일 나폴리를 포위한 아라곤군은 수개월간 맹공을 퍼부은 끝에 1442년 6월 2일 공략에 성공했다. 르네는 앙주로 도피했고, 알폰소 5세는 나폴리에 입성한 뒤 나폴리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리하여 1282년 시칠리아의 만종 이래로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은 아라곤 왕국에 의해 통합되었다. 교황 에우제니오 4세는 알폰소 5세가 스포르자 가문과 맞서고 있는 교황군을 지원하는 대가로 나폴리의 왕으로 인정했다. 알폰소 5세는 마요르카의 건축가 기옘 사그레라(Guillem Sagrera)에게 카스텔 누오보 요새에 궁정을 세우게 한 뒤, 다시는 아라곤으로 돌아가지 않고 나폴리에서 통치를 행사했다.
한편, 아라곤 왕국은 알폰소 5세의 형제 후안 왕자가 대리 통치했다. 그는 자기 아들 카를로스가 아내이자 나바라 여왕이었던 수리아 1세의 뒤를 이어 나바라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단지 나바라 총독으로 세우고 자신이 나바라 왕위를 독차지했다. 몇 년 후, 후안은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알바로 데 루나와 격돌했다. 그는 초기엔 아티엔자와 토리하를 점령했지만, 1445년 올메도 전투에서 참패하고 아라곤 왕국으로 도주했다. 이후 아라곤 왕국은 다시는 카스티야 왕을 상대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 했다.
1447년, 후안은 카스티야 대귀족인 파드리케 엔리케스의 딸인 후아나 엔리케스와 재혼했다. 4년 후, 후아나의 꼬드김에 넘어간 그는 현 나바라 총독인 카를로스를 해임하고 후아나를 총독으로 삼기로 했다. 이에 분노한 카를로스는 나바라 귀족들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1451년 10월 23일, 에이바르에서 양측이 맞붙었다. 그 결과 카를로스가 참패하고 포로로 붙잡혔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후아나 엔리케스는 사라고사로 떠났고, 그곳에서 아들 페르난도를 낳았다. 1453년 카를로스는 석방되었지만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왕을 칭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강요당했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석방된 후 맹세를 어기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레린 백작 루이스 데 보몽과 손잡고 아버지에 대항했다. 그러다가 1453년 12월 7일 카스티야 왕비 마리아[10]의 중재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바야돌리드에서 1년간 휴전 협약이 맺어졌을 때, 카를로스 역시 아버지와 휴전하기로 했다. 1년간 휴전이 끝난 후 양자간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1455년 3월 27일 보몽 가문의 사병대가 산 후안 데 피에 데 푸에르토를 공략했으며, 1455년 8월 4일에는 토랄바 전투에서 아라곤 왕국군을 격퇴했다. 이에 분노한 후안은 1455년 12월 3일 바르셀로나에서 카를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여동생 수리아 2세의 나바라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막내딸 레오노르를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카를로스는 1456년 투델라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한 데다 푸아 백국으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아라곤군의 반격이 거세자 나폴리에 있는 삼촌이자 아라곤-시칠리아-나폴리 국왕 알폰소 5세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그해 5월에 나바라를 떠나 나폴리로 향했다. 이후에도 보몽 가문을 비롯한 나바라 귀족들은 카를로스를 위해 아라곤군과 격전을 치렀고, 1457년 3월 16일 카를로스를 나바라 국왕으로 선포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후안 2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국왕에 오른 엔리케 4세는 바야돌리드 협약에서 합의된 대로 아라곤 왕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기에 나바라 귀족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1454년에 후안을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대리 통치자로 임명했던 알폰소 5세는 조카를 위해 아우와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후안과 카를로스의 갈등을 해결해주기 위해 발렌시아 귀족이며 자신의 측근이었던 루이스 데스푸이그를 중재자로 보내 양자를 화해시키게 했다. 카를로스와 후안 모두 이에 동의해, 1458년 3월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알폰소 5세가 합의안을 제시할 예정이었지만, 그가 1458년 6월에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후 후안은 추안 2세로서 아라곤, 시칠리아, 샤르데냐, 코르시카의 왕위에 올랐다. 다만 나폴리 만은 알폰소 5세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가 물려받았다. 이때 후안 2세의 장남 카를로스는 카탈루냐의 통치자로 선임되었고, 페르난도 왕자는 몽블랑 공작에 선임되었다. 1460년 9월, 후안 2세는 레리다에서 카탈루냐 궁정을 소집하고 아들 카를로스에게 카스티야 공주 이사벨과 결혼하지 말고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공주와 결혼하라고 권고했다.[11] 그러나 카를로스는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의 사절과 비밀리에 만났고, 그의 수행원들은 후안 2세가 페르난도 왕자에게 나바라 왕위를 주기 위해 그를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을 첩자를 통해 전달받은 후안 2세는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 사실인 게 분명해지자 고뇌했다. 그러다 아내 후아나의 부추김에 따라 1460년 12월 2일 카를로스를 체포해 아라곤의 어느 요새에 가두었다.
그러자 카탈루냐와 아라곤, 나바라 등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봉기의 규모에 경악한 후안 2세는 1461년 카를로스를 석방하고 왕위 상속인으로 인정했지만, 페르난도 역시 계승권이 있다고 못박았다. 그러던 1461년 9월 23일, 카를로스가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카탈루냐인들은 후안 2세가 미워하는 장남을 독살했을 게 분명하다며 그와 후계자 페르난도의 권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여겼다. 후안이 바르셀로나에 가서 그들을 달래려 했지만, 카탈루냐인들은 끝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후안 2세는 아라곤, 발렌시아, 시칠리아 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뒤 카탈루냐 정벌에 나섰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후안 2세는 외세를 끌여들어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1462년 초, 후안 2세의 사위인 푸아 백작 가스통 4세의 중재 하에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와 후안 2세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후안 2세는 프랑스로부터 나바라의 왕으로 인정받았고, 가스통 4세는 그의 후계자로서 나바라를 통치할 권리가 주어졌다. 그해 5월 초, 루이 11세는 가스통 4세에게 프랑스군을 맡겨 카탈루냐 봉기를 진압하게 했다. 후안 2세는 그 대가로 루시용과 세르당을 프랑스에 담보로 넘겼다.
한편, 카탈루냐 반란군은 팔라스 소비라 백작 로제 3세의 지휘하에 후아나 엔리케스 왕비와 페르난도 왕자를 지로나 요새에 몰아넣고 공성전을 벌였다. 하지만 후아나 왕비가 철저히 방어해 공략에 실패했고, 4개월 후 프랑스군이 인근에 당도하자 곧바로 철수했다. 카탈루냐인들은 후안 2세의 조카이자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에게 바르셀로나 백작에 추대할 테니 구원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엔리케 4세는 굳이 프랑스와 싸울 이유를 못 느끼고 개입하지 않았다. 1463년, 카탈루냐인들은 코임브라 공작 페드로를 왕으로 추대했다. 페드로는 카탈루냐 대부분과 바르셀로나, 아라곤 일부 지역을 다스리며 후안 2세에 대적했다. 여기에 프랑스 왕국과 대립하던 부르고뉴 공국의 이사벨라가 프랑스군과 맞서는 카탈루냐인들을 지원했다.
1465년 페드로가 그라놀러스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이에 카탈루냐인들은 지난날 나폴리 왕위를 놓고 알폰소 5세와 대적했다가 패배했던 앙주의 르네를 카탈루냐 왕으로 추대했다. 르네는 아들 장을 카탈루냐로 보내 자신을 대신해 그곳을 다스리게 했지만, 장은 1470년 12월 16일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이렇듯 카탈루냐인들이 계속 왕을 세우며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후안 2세는 전쟁을 이어갔다. 1472년 거의 실명 상태였던 그는 반란군을 최종적으로 물리치고 바르셀로나에 입성했다. 그는 내전이 또다시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부하들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보복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패자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 후 프랑스에게 담보로 넘겼던 루시용과 세르당을 탈환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한편, 후안 2세는 1469년 바야돌리드에서 후계자인 페르난도와 카스티야의 왕 후안 2세의 딸이자 왕위 계승자이며 자신의 조카인 이사벨 1세의 결혼식을 주선했다. 페르난도와 이사벨 1세는 6촌이었기에 반드시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했는데, 톨레도의 대주교가 교황의 결혼 허가서를 위조했다. 이 사실이 훗날 드러났지만, 교황청은 특별히 문제삼지 않고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결혼을 통해 통합되는 것을 용인했다.
1479년 1월 19일, 후안 2세는 80세의 나이로 바르셀로나에서 노환으로 사망하고 포블렛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페르난도 2세가 아라곤의 국왕으로 등극했다.
2.5.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통합
1479년 아버지 추안 2세가 사망하면서 아라곤 왕이 된 페르난도 2세는 1474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여왕이 된 아내 이사벨 1세와 함께 양국의 공동왕이 되었다. 두 사람은 명목상 동등한 위치에서 상호 합의하에 연합 왕국을 다스렸지만, 카스티야 연합 왕국이 영토, 인구 등 국력에서 아라곤 왕국을 압도했고, 이사벨 1세가 강인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페르난도 2세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이사벨 1세는 남편에게 자신이 왕비가 아닌 여왕이라고 주지시키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내정에 일체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1492년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가 합동 공격을 가해 그라나다에 잔존한 마지막 무슬림 왕조인 나스르 왕조를 무너뜨리면서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제패했다. 그들은 '카스티야-아라곤 연합 스페인 왕국'을 선포했으며, 스페인에 남아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를 추방하고 스페인의 종교 재판을 집행했다. 한편, 나폴리 국왕 페데리코는 프랑스 왕국의 침략이 두려워서 시칠리아도 관장하고 있던 페르난도 2세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1500년 11월 11일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그라나다 비밀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프랑스는 나폴리 왕국의 수도 나폴리를 포함한 북쪽의 아브루치, 캄파냐를 영유하고,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은 남쪽의 칼라브리아, 풀리아를 점유하기로 했다.
1501년 프랑스 왕국군이 나폴리 왕국의 변경지대에 접근하자, 그라나다 비밀 협약이 맺어진 것을 까맣게 몰랐던 페데리코는 페르난도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페르난도 2세가 즉시 함대를 이끌고 오자, 페데리코는 칼라브리아 요새들을 개방했다. 그러나 그라나다 협약 내용이 곧 공개되고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나폴리 왕국을 북쪽과 남쪽에서 동시에 협공하자, 친족의 배신에 깊은 충격을 받은 페데리코는 프랑스군에 귀순한 뒤 메인 백작에 선임된 후 프랑스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이리하여 프랑스 왕국과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이 나폴리 왕국을 양분하는 형태로 종결되는 듯했지만, 1503년 페르난도 2세가 곤살로 데 코르도바 장군을 앞세워 프랑스군을 요격해 체라놀라 전투, 가릴리아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했다. 결국 루이 12세는 1504년 1월 나폴리 왕국을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에게 양도하되 밀라노 공국의 소유를 인정받는 내용의 리옹 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리에서 최종적으로 철수했다.
1504년 11월 26일, 이사벨 1세가 5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사벨 사후에는 차녀 후아나 1세가 카스티야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녀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페르난도 2세와 후아나의 남편 펠리페 1세가 각자 섭정, 공동 왕이 되려고 대립했다. 카스티야인들은 네덜란드 출신이며 후아나를 박대하는 펠리페 1세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가 단독 통치하는 것이 더 싫었기에 펠리페 1세를 공동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펠리페 1세는 왕위에 오른 지 불과 2달만인 1506년 9월 24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페르난도 2세는 후아나 1세의 섭정 자격으로 카스티야-레온 연합 왕국의 통치권을 확보했다. 펠리페 1세가 속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펠리페 1세의 장남 카를의 왕위 계승을 주장했지만, 페르난도 2세는 카를이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했다. 또한 1507년 딸 후아나 1세의 정신병이 극심하다는 이유로 토르데시야스 성에 유폐시키고 자신에게 반항하는 카스티야-레온 귀족들을 잇따라 숙청했다.
그 후 페르난도 2세는 나바라 왕국 마저 병합하려 했다. 나바라 공동왕 호아네스 3세와 카탈리나는 자신들의 아들 헨리케 2세를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딸과 결혼시켜서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얻어내려 했지만, 페르난도 2세는 나바라 왕국이 프랑스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는 것을 좌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512년 7월 25일, 페르난도는 알바 공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게 군대를 맡겨 나바라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아라곤군은 순식간에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를 함락하고 피레네 산맥 이남의 상(上) 나바라를 휩쓸고 아라곤 왕국의 영토로 삼았다. 카탈리나와 호아네스 3세는 적의 공세에 압도되어 피레네 산맥 너머로 도주한 뒤 파우, 오르테즈, 타르베 등 피레네 산맥 이북의 하(下) 나바라만 겨우 건졌다. 페르난도 2세는 한동안 나바라 왕을 자칭하다가 1513년 3월 23일 팜플로나에서 회의를 소집해 모든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낸 후 1515년 나바라 왕국 자체를 없애고 아라곤 왕국의 직할지로 삼았다.
페르난도 2세는 1506년 제르멘 드 푸아와 재혼하고 아들을 낳아서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아들이 끝내 태어나지 않으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1515년 외손자 카를이 성년이 되자, 합스부르크 가문은 페르난도 2세에게 카를을 정식으로 후계자로 지명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페르난도 2세는 순순히 권력을 외손자에게 내주려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국제 분쟁이 벌어질 기미가 보이던 1516년 1월 23일 페르난도 2세가 사망했다. 이제 카를이 스페인 국왕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지만, 대다수의 스페인 국민들과 귀족들은 외국 출신에다 스페인어를 할 줄 모르는 이가 새로운 국왕이 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저항감을 표출했다.
스페인 귀족들은 같은 합스부르크 가문이더라도 스페인에서 출생한 카를의 동생 페르난도를 옹립하려 했다. 하지만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부르고뉴 공국, 교황 레오 10세 등 막강한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압력을 행사하자, 결국 아라곤 귀족들은 카를을 단독 군주로 받들기로 했으며 카스티야 귀족들 역시 그를 모친 후아나와 함께 공동왕으로 지명했다. 이리하여 카를은 카를로스 1세로서 아라곤과 카스티야 모두의 국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대에 이르러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연합 왕국은 스페인 왕국으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그 후 압스부르고 왕조의 역대 국왕들은 아라곤 국왕을 자처했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집권한 보르본 왕조는 1707년~1716년 "모든 이베리아 구 행정부를 마드리드 행정부에 편입하는" 누에바 플란타 법령을 반포하면서 아라곤 왕국을 정식으로 폐지했다.
3. 역대 국왕
자세한 내용은 아라곤 국왕 문서 참고하십시오.4. 관직
아라곤 왕국의 관직은 레콩키스타를 거치면서 안달루스와 프랑스, 그리고 지중해 교역을 통한 이탈리아 남부의 영향을 받으면 형성되었다.- 궁정직 및 행정직
- 아라곤 왕국 대법원(Cancelleria Reyal)
아라곤 왕국의 행정 기구로, 1218년 아라곤의 차이메 1세(Jaime I)에 의해 설립되었다. 모든 문서들은 카탈루냐어, 아라곤어,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아라곤 왕국의 모든 기관들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시청과 공증인들도 같은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왕립 대법원은 대법원장이 관리하는 사무실로, 왕가, 귀족, 그리고 성직자들과 관련된 모든 왕립 문서들을 복사하고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1494년에 아라곤 의회(Consello d'Aragón)에 속하게 되었으며, 1707년 보르본 왕가의 새 왕인 펠리페 5세에 의해 제정된 누에바 플란타 칙령(Decretos de Nueva Planta)으로 해체되었다. - 아라곤 왕국 문서보관소(Archivo d'a Corona d'Aragón)
중세 및 근대 아라곤 왕국의 정부 기관에서 비롯된 문서 자료들을 보관하는 장소로, 다른 출처에서 온 자료들도 포함하고 있다. 이 기록보관소의 본부는 중세부터 바르셀로나에 자리 잡았으며, 현재는 바르셀로나의 알모가바르스 거리(Carrera de los Almogávars)에 있는 현대적인 건물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바티칸 기록보관소 이후로 중세 시대 최고의 기록보관소로 평가받는다. 13세기부터 아라곤 왕국의 왕들은 바르셀로나 왕궁에 문서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려 했지만, 1318년까지는 안정적인 조직 구조가 없었습니다.
이후 18세기까지 이 기록보관소는 행정 문서들을 관리하는 역할을 했으며, 현재는 역사적인 기록보관소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기록보관소 관리자였던 프로스페로 데 보파룰(Próspero de Bofarull)은 문서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목록을 작성했으며, 스페인 역사 미공개 문서 시리즈(Colección de Documentos Inéditos para la Historia de España)를 통해 많은 문서들을 출판했다.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은 왕립 대법원(Reyal Cancillería)으로, 13세기 중반부터 누에바 플란타 칙령(Decretos de Nueva Planta)이 발효되기까지 왕의 사무처를 드나들었던 모든 문서를 복사해 보관한 기록물로 약 6,000권 이상의 필사본이 있습니다. 또한 아라곤 왕국에 도착한 서신들, 왕의 회계 문서, 아라곤 왕국 내 모든 지역에서 온 사법 기록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 기록보관소에는 카탈루냐 자치정부(Generalitat de Catalunya), 아라곤 의회(Consello de Aragón), 해체된 카탈루냐 수도원 문서들, 그리고 사스타고 백작 가문(Contes de Sastago)의 문서들과 같은 다양한 출처의 자료들이 추가로 보관되고 있다. 이 기록보관소는 현재는 스페인 문화체육부(Ministerio de Cultura y Deporte)에 속해 있으며, 2007년 1월부터 문화체육부가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 대표들이 모인 관리위원회와 협력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탈루냐와 다른 지역들 간의 통제권 문제에 대한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카탈루냐 정부는 적어도 전체 아라곤 왕국에 해당하지 않는 문서들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 Baile
만들어진 시기는 불명이나 프랑스 왕국의 Baillis와 어감이 비슷하기에 대무관장과 동일한 시기에 프랑스 왕국의 영향을 받고 신설된 것으로 보인다. 해당 관직은 봉건 영주의 대표자로서 정의를 집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특정 봉건 영지에서는 평범한 판사(chudez ordinario)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라곤의 영향이 남아 있는 투델라(Tudela)와 케일레스(Queiles) 계곡 지역에서는, 지금도 'baile'라는 단어가 물을 관리하고 각 농장이 물을 공급받을 때의 관개를 담당하는 직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라곤 왕국의 Baile General은 왕실의 직책으로, 아라곤 지역 내 왕실 전유 재산을 관리하는 왕의 대표자가 맡은 직무였다. - 바일레 제네랄(Baile General)
아라곤 왕국에서 왕실 소유의 재산 관리를 담당하는 왕가의 관리로 왕을 대신하여 통행료, 채굴권, 왕실 토지, 벌금 및 상속 재산을 징수했다. 또한 그러한 권리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판사이기도 했다. 1291년 차이메 1세의 헌장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으먀, 이 임무는 아라곤 영토 내에서 왕의 재산 관리를 담당했다. 차이메 1세는 왕실 수입의 관리자이자 정의의 수호자로 정의되다. 실제로 그 관할권은 왕실 자산과 관련된 분쟁 해결과 화폐 위조 기소로 제한되었다. 차이메 1세 통치 기간과 페로 3세 통치 초기에는 유대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지만 일반 특권에서는 이를 금지했다. - 아라곤 왕국의 집사장(Mayordombre d'o Reino d'Aragón)
아라곤 왕실의 최고 관리였으며, 통치와 사법 행정의 집행을 담당하는 역할을 가졌다. 이 직책의 기원은 1164년 아라곤 왕국에서 비롯되었으며, 바르셀로나 백국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직책이 있었다. 12세기와 13세기에 이르러 아라곤의 "후스티시아" 제도가 아라곤 왕국의 마요르돔보 직책을 대신하여 사법 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는 아마도 마요르돔보들이 주로 정치적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1265년 에헤아 의회에서 아라곤의 후스티시아를 왕과 귀족 간의 중재자로 선출하는 것이 선호되었다. - 카프데과이타(Capdeguaita)
현재의 시 경찰 상사와 동등한 역할을 했지만 1707년 부르봉 가문의 펠리페 5세가 반포한 Nueva Planta 칙령으로 사라졌다. 사라고사 도시에는 세 명의 카프데과이타가 있었으며, 각각 10명의 데세나(hombres d'a decena)라 불리는 수행원과 함께 거리를 순찰했다. 바르셀로나에서도 세 명의 카프데과이타가 활동했다. 이 용어는 "경비"를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했으며, 라틴어 문서에서는 "caput exubiorum"이라 불렸다. 사라고사의 카프데과이타는 추첨을 통해 선발되었고, 15세기에는 각각 연봉 500수알도(sueldos)를 받았다. 1442년에는 알리폰소 카누도(Alifonso Canudo), 미겔 데 아루에고(Miguel d'Aruego), 차이메 팔레라(Jayme Palera) 등의 인물이 카프데과이타로 임명된 기록이 있다. - 심사원상(Churau en cap)
아라곤 왕국에서 심사원상은 시의회에서 추첨을 통해 선출된 공직자를 일컫는 명칭이었다. 우에스카(Huesca), 하카(Jaca), 발바스트로(Balbastro) 같은 일부 도시에서는 프리오르 데 초라우스(Prior de churaus)라 불리기도 했으며, 발렌시아 왕국에서는 후라트 엔 카프(Jurat en cap)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 직위는 1707년 부르봉 가문의 펠리페 5세에 의해 Nueva Planta 칙령과 함께 아라곤 법령(푸에로)이 폐지되며 사라졌다. 이후 시의회 직위가 레히도르(regidor)나 콘세할레스(concejales)로 변경되었으며, 초라우 엔 카프는 장관(regidor decano) 또는 시장(alcalde)로 계승되었다. - 콘술라두 데 마르(O Consulau de Mar)
아라곤 왕국의 해상법 기관으로, 해상 및 상업 문제를 다루고 형사 관할권을 행사했다. 이 기관은 두 명의 해상영사(cónsuls de mar)와 한 명의 항소 재판관이 독립적으로 관할했다. 콘술라두 데 마르의 기원은 바르셀로나 항구법(Carta Consular de Barcelona, 1258)에서 비롯되었으며, 바르셀로나의 전통적인 해상 및 상업 관습을 기반으로 한 법원으로부터 발전했다. 이 법률 규범들은 처음에는 카탈루냐의 해상법을 규제하는 역할을 했으며, 이후 지중해 전역에서 상업 및 항해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대서양까지 그 범위가 확장되어 국제법으로 자리 잡았다. 콘술라두 데 마르는 상인법(ius mercatorum) 시대에 탄생했다. 상인법은 당시 상인들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률로, 봉건적이고 농업 및 농촌 중심이었던 사회에서 상인들이 모이는 도시, 특히 바르셀로나와 같은 도시에 적용되었다. 상인법은 오늘날 상법의 뿌리로 볼 수 있으며, 상인을 위한 법이자 상인에 의한 법으로, 이를 적용받기 위해서는 상인 단체에 등록해야 했던 조합법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 메스트레 라시오날(Mestre Racional)
아라곤 왕국의 재정 기관으로, 재무관과 그 대리인들의 업무를 감독하는 역할을 했다. 이 기관은 1285년 차이메 2세에 의해 아라곤 왕국 전체를 위해 설립되었다. 이후, 15세기 초에 이르러 아라곤 왕국 내 여러 지역에 따라 역할이 분리되었고, 이를 통해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지역마다 각각의 메스트레 라시오날이 설립되었다. 발렌시아에서는 1419년에 설립되었으며, 아라곤에서는 1420년 3월 8일 알폰소 5세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기관은 1707년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Felipe V)에 의해 제정된 누에바 플란타 칙령(Decretos de Nueva Planta)으로 폐지되었다. - 법무장관(Procurador cheneral)
아라곤 왕국의 모든 측면에서 왕을 대표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법무관 협의회의 조언을 받았다. 초기에는 권한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으나, 1309년에 아라곤 왕국 전체를 대표하는 단일 법무장관이 임명되었고, 이는 왕의 후계자 직책으로 자리잡았다. 법무장관은 중요한 사법적 권한을 가졌기 때문에 독립된 법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아라곤 왕국에 속한 각 왕국마다 법무장관의 대변인(Portavoz del Procurador Real)이 있었다. 이 직책명은 1363년부터 총독(Gobernador General)으로 변경되었다. - 사욘(Sayón)
잘메디나(zalmedina)의 사법 행정에서 하위 관리로서 활동하는 직책이었다. 의례적인 행사에서는 잘메디나를 앞서면서 두 개의 토초(tochos)를 들고 나왔는데, 이 토초는 각각 두 팔목 반(palmos)의 길이를 가지고 있으며, 왕실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1414년의 사라고사의 규정에 따르면, 사욘은 총 다섯 명이었으며, 그들은 소송 당사자를 법정에 호출하고, 명령서를 통지하며, 사형을 제외한 집행을 담당했다. 사형 집행은 클라마우(executor de penas)가 맡았다. - 신디코(Síndico)
조합(Corz)과 같은 의회나 개인(왕 등) 앞에서 도시를 대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사라고사 도시의 경우, 신디코는 총 다섯 명이었다. 이들은 도시의 이익을 대변하고, 관련된 문제를 협의하는 자리에서 도시를 대표하여 목소리를 내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 알무타자프(스페인어: almotacén)
아라곤 왕국에서 시장의 감시를 담당한 중요한 직위로 아랍어 al-Musthasib에서 유래하며, "책임자"라는 의미를 가졌다. 이 직위는 선출직으로 연임 기간은 1년이었다. 알무타자프는 여러 중요한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상업 거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기를 예방하고 감지하는 역할을 했고, 시장에서 판매되는 제품의 안전성을 감독하여, 판매되는 식품이 안전하고 건강한지를 확인했으며, 상업 규정을 준수하도록 하고 거래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도록 보장했다. 처음에는 차이메 2세의 규정에 따라 3명의 알무타자프가 있었으나, 1418년부터 이 숫자는 2명으로 줄어들었다. 각 알무타자프는 페사도르스 알무타자프(pesadors d'almutazaf)라 불리는 3명의 보좌관과 함께 작업했다. 또한, 무게와 측정 검사를 전담하는 알무타자프도 있었으며, 이를 알무타자프 드 알체즈(almutazaf de l'alchez)라고 불렀다. 이 직위는 왕국 내 상거래의 무결성을 보장하고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군사직
- 대무관장(constable)
한때 같은 국가였던 나바라와 함께 만들어진 시기는 미상이나 동쪽의 카스티야가 14세기 말에 대무관장직을 신설할 때를 기점으로 늦어도 14세 초/중으로 추정된다. 다른 국가들과 동일하게 일반적으로는 군대를 지휘하고 특별 법정을 통해 기사와 귀족들 간의 문제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영국에는 기사 법정인 Court of Chivalry가 있었고, 프랑스에는 Point d'honneur 관할권이 있었다. 때로는 치안 유지 권한도 갖고 있었다. 콘스터블은 한 명 이상의 원수의 보좌를 받았다. 아라곤 왕국의 대무관장(Gran Conestable)의 지위는 카르도나(Cardona) 가문에 속했지만, 16세기에 왕권에 의해 몰수되었다. 아라곤 왕국의 무관장 지위는 이샤르 공작(Duques de Ixar) 가문에 세습되었고, 이후 베르윅(Berwick) 공작 가문인 피츠차이메(Fitzjames)로 이어졌다. 현재도 이 가문은 이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 아라곤 왕국의 기수(El Alférez del reino de Aragón)
왕의 기수(abanderado del rey de Aragón)로도 불리며 카스티야의 왕실 기수와 동일하게 아라곤 군대 내에서 가장 높은 위엄을 지닌 지위였으며, 군사 작전 중 아라곤 왕 기수를 운반하고 지키는 일을 담당했다. 도입 배경 또한 동일한 것으로 보이며, 12세기에 카탈루냐-아라곤 궁정에 왕실 신호원의 지위가 나타났으며, 이는 군주의 개인 근위대장이자 전장에서 왕실 깃발을 기수로 두는 역할을 모두 수행했고, 또한 의례적인 행사에서 왕의 검을 엄숙하게 바치는 일도 맡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인 중세 말 대무관장직이 신설되면서 권력과 위엄을 잃었고, 왕의 기수 역할만 수행했다. - 제독(Admiral)
1230년경 차이메 1세에 의해 카탈로니아와 마요르카의 해군을 지휘하기 위한 직책으로 신설되었고, 첫 번째 제독을 카로스 가문의 일원으로 임명했다. 13세기와 14세기에 제독은 선박 지휘권 외에도 코르스 특허 부여, 왕실 조선소 관리 등 새로운 권한을 부여받았으며 심지어 3명의 중장을 두게 되었다. 이때 콘라드 란사, 루제리오 디 라우리아, 라몬 마켓, 베르나트 2세 데 카브레라가 눈에 띄었다. 1364년에 아라곤 제독의 직함은 Hug Folc II de Cardona 자작에게 평생 주어졌고 , 그때부터 1543년 까지 세습되었다. 그러나 1471년에 이 칭호는 사실상 명예로운 칭호가 되었다. 그 후 75년 동안 실질적인 지휘권은 소위 나폴리 제독이 맡았다.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일부 유명한 제독은 Bernat de Vilamarí 또는 Gonzalo Fernández de Córdoba였다.
[1] 아라곤 왕국 건국[2] 아라곤 연합 왕국 건국[3] 명목상 수도였으나 왕들은 주로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나폴리에서 통치했다.[4] 이때는 아직 스페인인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 시절이었다.[5] 현재의 하카 시(Jaca) 주변 지역[6]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름이 이탈리아어인 '베르타'인 것으로 볼 때 이탈리아인 부모를 둔 것으로 추정된다.[7] 페드로 1세는 처음에는 예루살렘 여왕 마리아와 결혼하여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고 싶어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8]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와 에드워드 1세에 맞서 싸우며 모범의회를 출범시킨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다.[9] '조반니 카라촐로'라고도 하는데, 잔니(Gianni)는 조반니(Giovanni)의 애칭이다.[10]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딸이자 후안의 여동생이었다.[11] 카를로스의 아내 아그네스는 1448년에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