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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아 정원과 1401-07년에 세워진 트리니다드 다리
| 발렌시아 시 (발렌시아 주) València | ||
1. 개요
스페인어: Valencia카탈루냐어/발렌시아어: València
지중해에 면한 스페인 동부의 항구 도시로, 같은 이름의 발렌시아 주의 주도이다. 광역권 인구는 156만명으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 이은 스페인 제3의 도시이다. 카탈루냐 남부의 중심지로, 스페인어 외에 카탈루냐어의 주요 방언인 발렌시아어가 통용된다. 15세기 지중해 교역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어 번영했고, 무데하르 및 르네상스 양식의 옛 건물이 다수 남아있다. 또한 이비사 등 발레아레스 제도로 이어지는 항로가 있어 관광객이 많이 왕래한다. 특산물로 오렌지가 유명하며, 역사적 위인으로는 엘 시드가 유명하다.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이 강하며,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파 최후의 거점 중 하나였다. 중남미에는 이곳에서 유래한 동명의 도시들이 여럿 있다.
2. 역사
| 알모니아 광장 지하에 남아있는 로마 시대 목욕탕 유적 |
기원저 4세기부터 이베리아인의 일파인 에데타니 부족이 마을을 세웠고, 고대 그리스 및 카르타고 공화국의 지배를 받았다. 기원전 138년, 로마 공화국의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칼라이쿠스가 루시타니아 전쟁에 참전한 로마 병사들에게 토지를 주며 식민 도시를 세우고 '용기'란 뜻을 지닌 발렌티아 (Valentia)라 명명했다. 발렌티아는 이탈리아 반도 밖에 세워진 로마의 첫 식민 도시였다. 당시 도시는 하중도에 위치했고 아우구스타 가도로 로마와 연결되었다. 시가지는 중심 도로가 교차하는 격자 형태였고 포룸도 있었다.[1]
다만 기원전 1세기 초반 세르토리우스 전쟁 당시 발렌티아는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편에 섰다가 기원전 75년 진압군 사령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 의해 파괴되었고, 기원전 20년경 로마 제국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치세에 재건되었다. 서기 1세기 중반 이탈리아 출신 이주자들이 정착하여 발렌티아는 중견 도시로 성장했고, 점차 기독교화가 진행되어 4세기에 완료되었다. 5세기 들어 발렌티아는 서고트 왕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큰 간섭 없이 주교가 사실상 통치했다. 그러던 554년 동로마 제국령 스파니아 속주의 중요한 군사 거점으로 여겨졌으나 625년 서고트 왕국이 재정복했다. 이후 옛 로마 극장이 요새화되었고, 서고트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2.1. 알 안달루스 (이슬람 시기) : 발란시야
| 이슬람 시기 건물 유적 |
714년 도시는 우마이야 왕조에 의해 정복되었고, 아랍어로 발란시야 (بلنسية)라 불리게 되었다. 756년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우는 아브드 알 라흐만 1세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곧 그의 차남 압둘라가 총독으로 봉해져 재건되었다. 압둘라는 기존 도시 남쪽에 시리아 풍의 궁성인 루사파를 세워 거주했고, 지금도 루사파 (Ruzafa) 구역으로 남아있다. 당시 발란시야는 '흙의 도시'란 뜻인 마디나트 앗-투라브 (مدينة التراب)로도 불렸다. 10세기의 안정기에 도시는 종이, 비단, 가죽, 유리, 도자기, 은공예품 등을 다루는 교역이 발달하며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렸다. 이때 도시를 두르는 성벽, 목욕탕 (함맘), 대사원, 발디그나 거리 등이 조성되었다.
2.1.1. 발렌시아 타이파국 (아미르 왕조)
| | |
| 이슬람 시기 (11세기 중엽) 성탑 유적 | 로마 (노랑), 이슬람 (빨강), 아라곤 (파랑) 시대의 성벽 |
1008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권신 압둘 라흐만이 피살된 후 내전이 터지며 안달루스는 분열되었다. 혼란을 틈타 당시 4살이던 압둘 라흐만의 아들 압둘 아지즈는 사라고사로 피신해 성장했다. 한편 압둘 라흐만의 부친 알 하지브 알 만수르에게 고용되었던[2] 슬라브 노예 군인 무바라크와 무자파르 앗 사클라비 형제는 1010년 무렵 발란시야의 관개 수로 담당관이 되어 도시의 물과 식량을 공급했는데, 곧 정변을 일으켜 아미르가 되었다. 형제는 매달 12만 디나르의 가혹한 세금을 거두었고, 1018년 무바라크가 낙상 사고로 사망한 후 무자파르가 계승했지만 민중 봉기로 살해되었다. 그리고 1019년 토르토사 (투르투샤)의 아미르 라빕 알 파타와 데니아 (다니야)의 아미르 무자히드 알 아미리가 함께 발란시야를 장악했다. 바르셀로나 백국에 복속해 안정을 추구하던 라빕은 1020년 무자히드에게 축출되었다.
다만 무자히드 역시 1021년에 사라고사 토후국의 지원으로 정변을 일으킨 압둘 아지즈 알 만수르에 의해 축출되었다. 집권 당시 17세였지만 압둘 아지즈는 능숙하게 통치했고, 40년에 달하는 그의 치세에 발란시야는 안정을 누리며 번영했다. 압둘 아지즈는 도시에 반원형의 성탑과 7개의 성벽을 지닌 새로운 성벽을 둘렀고[3], 투리아 강 건너편에 왕궁을 세웠다. 1061년 그의 사후 계승한 아들 압둘 말리크 알 무자파르는 어렸기에 재상 아부 압둘라 아흐마드 (이븐 루와이쉬)[4]가 섭정을 맡았고, 1064년 후자의 사후 아들[5] 아부 바크르가 계승했다. 그러던 1065년 봄, 사라고사 토후국을 격파해 복속시킨 레온 왕국의 페르난도 1세가 발란시야마저 복속을 요구하며 포위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복종을 거부하며 결사 항전했고, 방어 태세가 삼엄하다 여긴 페르난도 1세는 회전으로 끌어내기 위해 거짓으로 후퇴했다.
이에 압둘 말리크는 수비대와 성을 나와 추격에 나섰는데, 서북쪽 4km 지점인 파테르나에서 레온-카스티야 군대의 매복 공격에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다. 압둘 말리크는 빠른 말을 타고 있었기에 겨우 도주할 수 있었다. 그후 페르난도 1세는 재차 발란시야를 포위했으나 중병에 걸려 철수했고, 레온에 당도한 후 사망했다. 한편 재상에게 정사를 맡기고 유흥을 즐기던 압둘 말리크는 즉위 전후에 톨레도 (툴레이툴라)의 아미르 야흐야 알 마문의 딸과 결혼했었는데[6] 아내를 존중하지 않고 종종 모욕했다. 이에 복수를 꾀하던 야흐야는 파테르나 전투 직후 사위의 구원 요청을 기회로 남하했다. 1065년 11월 발란시야에 당도한 알 마문은 재상 아부 바크르[7]를 설득해 방탕한 생활을 이어가던 압둘 말리크를 폐위하게 했다. 이후 압둘 말리크는 유배지에서 죽었고, 발란시야는 톨레도 토후국 령이 되었다.
알 마문은 아부 바크르를 그대로 총독에 봉했고, 후자는 선정을 펼치며 안정적으로 통치했다. 그러던 1075년 7월, 주군 알 마문이 코르도바에서 독살되자 아부 바크르는 톨레도로 보내던 세폐를 중단하며 자립했다. 다만 1076년 사라고사의 아미르 알 무크타디르가 남쪽의 데니아 토후국을 병합하며 발란시야 토후국을 남북으로 압박하자, 아부 바크르는 레온-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에게 파리아스 (연공)를 바치며 보호를 청했다.[8] 다만 알폰소가 톨레도 공략에 집중하자 아부 바크르는 1085년 초엽, 사라고사의 아미르 알 무타만의 아들이자 후계자 알 무스타인 2세에게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타협했다. 그리고 같은해 6월, 아부 바크르는 사망하고 아들이자 카디 (법관)인 아부 아므르 우스만이 계승했다. 한편 그 무렵 알 마문의 아들인 톨레도의 야흐야 알 카디르는 발란시야를 대가로 알폰소에 항복했다.
1086년 2월, 알 카디르는 알폰소가 파견한 카스티야 귀족 알바르 파녜스의 원군과 함께 발란시야로 진군해 아부 아므르 우스만을 살해하고 아미르로 등극했다. 그후 카스티야 군대는 발란시야를 약탈했는데, 무라비트 왕조의 유수프 이븐 타슈핀이 안달루스에 개입하자 그에 맞서기 위해 회군했다. 사그라하스 전투를 앞두고 알폰소는 봉신인 알 카디르에게 원군을 요구했으나 후자는 생색만 내고 중립을 지켰다. 무라비트 왕조의 승리로 레온-카스티야 왕국이 약화되고 그에 저자세를 보이던 알 카디르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1087년 레리다 & 토르토사 & 데니아의 아미르 알 문디르가 동맹인 바르셀로나 백작 베렝게르 라몬 2세와 동맹한 후 인구 1만 5천의 부유한 발란시야의 점령을 위해 남하했다. 이에 알 카디르는 주군인 알폰소와 숙부 알 문디르와 경쟁하던 사라고사의 알 무스타인 2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알폰소는 막 화해한 장군 엘 시드를 사라고사로 보냈고, 그와 알 무스타인 2세가 남하하자 알 문디르는 철수했다. 다만 곧 알 문디르는 발렌시아 동북쪽의 사군토 (무르바타르)를 점령하며 다시 발란시야를 위협했고, 이에 카스티야로 돌아가 알폰소에게서 증원 병력을 받은 엘 시드는 1088년 여름에 돌아와 알 카디르와 알 문디르 모두에게서 연공을 받아냈다. 그러자 원래 연공을 받아야 할 대상자였던 알폰소와 베렝게르 라몬이 분노했고, 그들은 알 무스타인 2세와 함께 엘 시드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베렝게르 라몬은 발란시야를 포위했다. 이에 엘 시드는 알 문디르를 통해 협상하여 베렝게르 라몬을 철수시켰다. 엘 시드는 돌아가지 않고 사군토 동북쪽의 부리아나에 머물며 토르토사 인근을 습격하는 등 자체적인 공국 건설에 나섰고, 1089년부터 알 카디르는 평화를 대가로 그에게 연공을 바쳤다.
1090년 여름, 알 문디르는 베렝게르 라몬과 연합해 테바르 전투에서 엘 시드와 맞섰으나 패했다. 엘 시드에게 사로잡힌 베렝게르 라몬은 알 무스타인 2세의 중재로 다시 안달루스 동부에 개입하지 않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로써 엘 시드는 발란시야, 토르토사, 데니아, 알바라신, 사군토 등지에서 연공을 받게 되었다. 1092년 여름 알폰소는 피사, 제노바 공화국의 해상 지원 약속과 함께 발란시야로 진격해 포위를 준비했다. 하지만 함대의 합류가 지연되자 지출을 감당할 수 없던 알폰소는 곧 철수했다. 지속된 기독교 세력의 위협으로 발란시야는 공포와 혼란에 빠졌고, 법관 아부 아흐마드 자파르 (이븐 주하프)와 유력자들은 유수프 이븐 타슈핀의 아들이자 무라비트령 무르시아 총독인 무함마드 이븐 아이샤에게 서신을 보내어 엘 시드와 알 카디르 모두를 축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2.1.2. 발렌시아 영주령 (엘 시드)
| | |
| 발렌시아의 에스파냐 광장에 있는 엘 시드 기마상 | 발렌시아 영주령 (1094 ~ 1102)의 영토 |
1092년 10월, 무함마드의 부관 이븐 나스르가 이끄는 무라비트 군대가 접근하자 자파르의 저택에 모인 군중이 봉기했다. 자파르가 이븐 나스르를 맞이하자 소수의 카스티야 병력을 포함한 발란시야의 기독교도들은 도시를 떠났고, 알 카디르는 궁전에서 농성하며 주군 엘 시드에게 구원을 청했다. 다만 중과부적이라 여긴 알 카디르는 여장을 한 후 빈자의 집에 숨었다. 하지만 알 카디르는 곧 발견된 후 처형되었고, 그의 수급은 거리에서 조리돌림되었다. 다음날인 10월 29일, 자파르는 발란시야 총독으로 선포되었다. 한편 11월에 사라고사에서 급보를 접한 엘 시드는 남하, 발란시야 북쪽의 엘 푸이그를 포위해 이듬해 여름에 함락한 후 그를 거점으로 발란시야를 봉쇄했다. 엘 시드가 도시 근교 마을들을 불태우고 곡물을 압수하자 자파르는 연공을 재개하고 이븐 나스르의 무라비트 군대를 돌려보내며 휴전을 맺었다.[9]
하지만 엘 시드가 떠나지 않고 도시 점령의 야망을 드러내며 남쪽[10]에 주둔하며 포위에 나서자 자파르는 무라비트 조의 유수프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1093년 9월, 유수프의 조카 아부 바크르 이븐 이브라힘이 이끄는 무라비트 군대가 진격해 발란시야 남쪽 20km 지점에 이르렀으나 유수프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자파르에 대한 보복으로 철수해버렸다. 고립된 발란시야의 주민들은 개, 쥐, 동물 사체에 이어 시신을 먹으면서까지 버텼으나 한계에 다다르자 자파르는 협상에 나섰다. 엘 시드는 자파르가 알 카디르의 보물을 넘기는 대가로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달라는 조건을 수용했고, 결국 1094년 5월에 도시는 항복했다. 6월 17일에 발란시야에 입성한 엘 시드는 스스로 왕공 (프린켑스)을 칭했고, 약속과 달리 자파르를 사로잡아 공개 화형으로 처형했다. 그는 또한 시내의 모스크 9개를 성당으로 개조했다.[11]
이후 엘 시드가 데니아 인근을 습격하며 영토 확장의 의지를 보이자 유수프는 반격을 지시, 기병 4천과 보병 5천의 원정군[12]을 세우타에 집결시킨 후 동생 무함마드 이븐 타슈핀에게 지휘를 맡겼다. 이에 도시 남쪽에 요새들을 세우고, 도시 성벽을 강화하며 무슬림도 포함한 수비대를 구성한 엘 시드는 주민들의 봉기를 우려해 무기와 철제 도구를 모두 압수한 후 친무라비트 인원들을 의심되는 자까지 추방했다. 8월 중순 안달루스에 상륙한 무함마드는 그라나다에서 일부 병력과 합세했다.[13] 이후 레리다의 술라이만 사이드 앗 다울라[14]와 알바라신의 아부 마르완 압둘 말리크[15]의 기병대와도 합류한 무함마드는 무르시아를 거쳐 9월 중순에 발란시야 서쪽의 쿠아르트에 진영을 세운 후, 도시를 포위했다. 당시는 라마단이었기에 한 달의 단식이 끝난 10월 중순부터 무라비트 군대는 북과 나팔을 울리며 맹렬히 공격했다.[16]
식량을 아끼기 위해 여성과 아이들을 무라비트 진영으로 보내고 전투원만 남긴 엘 시드는 무슬림들에 처형 위협을 하며 내부를 단속했고, 조류 점술을 통해 승리를 예언해 사기를 다졌다. 또한 그는 알폰소에게 구원 요청을 한 후 아직 원군이 출발한 정도임에도 카스티야와 아라곤 군주들이 원군과 함께 오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포위군 내에서 일부가 탈영하는 등 혼란이 일었다. 이로써 포위망의 서남쪽이 느슨해지자 라마단 후 일주일이 지난 날에 엘 시드는 새벽에 일부 병력과 남문인 바이탈라 성문을 통해 출격, 포위망을 크게 우회하여 무라비트 진영으로 향했다. 그러는 동안 동틀 무렵에는 서문인 하나쉬 성문을 통해 기병대가 나서 무라비트 주력군을 유인했고, 이후 엘 시드가 뒤에서 공격을 가하자 무라비트 진영은 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엘 시드가 말한 원군이 당도한 것이라 믿은 무라비트 군대는 쉽게 무너졌다.
철수하는 기병대를 추격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힌 무라비트 주력군도 후방의 패전보에 흩어졌고, 결국 포위는 풀렸다. 정오 무렵 승리를 확인한 엘 시드는 군대가 흩어질 것을 우려해 추격하지 않았고, 대신 적진을 약탈해 무기와 병마 등 많은 전리품을 얻었다. 한편 나머지 안달루스에서 고립된 사라고사 토후국은 빠르게 아라곤 왕국에게 영토를 잃었고, 엘 시드는 아라곤과 동맹을 맺었다. 1096년 말엽 샤티바 태수 알리 이븐 알 핫즈가 3만 병력과 발란시야 남쪽의 페냐 카디에야 요새를 포위하자 엘 시드는 아라곤 군주 페로 1세와 함께 구원했고, 후퇴했던 무라비트 군대는 발란시야로 회군하던 엘 시드를 매복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바이렌 전투, 1097년 1월) 뒤이어 반격에 나선 엘 시드는 3개월의 포위 끝에 엘메나라[17]를 함락한다. 다만 얼마 후 엘 시드의 아들 디에고가 알폰소를 도와 무라비트 군과 싸우다 전사한다.
뒤이어 무라비트 군대는 엘 시드가 보낸 병력을 격파한 후 발란시야 인근을 약탈했다. 1098년 엘 시드는 사군토를 점령해 옛 발란시야 토후국의 영토를 확보했고, 발란시야 대사원을 산타 마리아 성당으로 개조해 축성했다. 다만 현지 모사라베 기독교도들과 대립한 끝에 그는 프랑스인 수도사 제롬을 주교로 삼았다. 1099년 7월, 엘 시드는 발란시야에서 사망했고 아내 히메나가 영주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 무라비트 군대가 도시를 포위한 상황에서 엘 시드가 야습을 가해 승리했으나 중상을 입어 알폰소의 문안과 함께 눈을 감았고, 사후 아내 히메나가 그의 애마 바비에카 위에 그의 칼인 티소나를 움켜 쥔 엘 시드의 시신을 앉히자 사기를 잃은 무라비트 군대가 패퇴했다 한다.[18] 그러던 1101년 8월, 유수프의 6촌인 코르도바 총독 아부 무함마드 마즈달리 이븐 틸란칸이 도시를 포위했다.
사위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3세의 도움으로 버티던 히메나는 주교 제롬을 보내 알폰소에게 도움을 청했고, 1102년 3월 알폰소가 접근하자 마즈달리는 남쪽의 쿠예라로 철수했다. 알폰소는 쿠예랄 나아가 마즈달리와 전투를 벌였으나 승자 없이 끝났다. 이후 발란시야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알폰소는 도시를 포기하기로 결심, 4월 말부터 철수 준비를 했다. 카스티야 군은 가축, 무기, 가구, 전리품, 엘 시드의 시신 등을 챙긴 후 발란시야에 불을 지르고 떠났다. (1102년 5월 4일)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무라비트 군대는 카스티야 군이 완전히 떠난 후 다음날이 되서야 불타버린 도시에 입성했다. 산타 마리아 등의 성당들은 다시 모스크로 환원되었다. 이에 발란시야 남쪽의 알시라 (자지라 샤크르) 출신 시인 아부 이샤크 이븐 카파자는 '해방자' 유수프를 찬양하는 시를 썼다.
2.1.3. 무라비트 & 무와히드 왕조
40여년간 이어진 무라비트 시기에 발란시야는 재건되었고, 중견급 도시로 유지되었다. 1140년대 무라비트 조가 쇠퇴하자 안달루스 각 도시들이 자립하며 2차 타이파 시대가 열렸고, 코르도바에 이어 발란시야에서도 반무라비트 여론이 득세했다. 당시 발란시야 총독이던 유수프의 증손자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는 이를 통제하지 못했다. 결국 1145년 3월에 발란시야의 법관 마르완 이븐 압둘 아지즈가 안달루스 병사들에 의해 라이스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다만 마르완이 봉급을 제대로 주지 못하자 11월에 군부는 그를 폐위하고 장군 압둘라 이븐 이야드를 추대했다. 다만 정통성이 결여되었던 압둘라는 1146년 1월, 카스티야 궁정에 망명 중이던 사라고사 왕가의 후예 자파돌라 (사이프 앗 다울라, 혹은 이븐 후드)를 군주로 추대했다. 이를 수락한 자파돌라는 발란시야와 무르시아를 장악하고 칼리파를 칭했다.다만 바에사, 우베다, 하엔의 반란에 직면한 자파돌라는 주군이던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에 도움을 청했다. 다만 카스티야 군대가 샤티바를 약탈했고, 주민들의 하소연에 자파돌라는 그 진영을 방문해 포로와 전리품을 내놓으라 요구했다. 하지만 카스티야 귀족들이 거부하자 자파돌라는 알바세테에서 그들과 맞섰으나, 도중 압둘라가 도주하며 패배하고 사로잡힌 후 처형되었다. (1146년 2월)[19] 8월에는 압둘라 역시 카스티야와 싸우다가 전사했고, 그의 사위이자 부관인 무왈라드 (개종자) 출신의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마르다니쉬)가 발란시야의 아미르가 되었다. 무함마드는 바르셀로나 백작 겸 아라곤 섭정인 라몬 베렝게르 4세 및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와 휴전을 맺었고, 후자에게 연공을 바쳤다. 1148년 토르토사의 함락으로 발란시야는 기독교 세력과의 전방 도시가 되었다.
따라서 동생 유수프에게 발란시야를 맡기고 더욱 후방인 무르시아로 본거지를 옮긴 무함마드는 1157년 알폰소 7세를 도와 알메리아 방어전에 나섰으나 신생 무와히드 왕조에게 패했다. 1160년 하엔을 점령한 무함마드는 뒤이어 코르도바와 세비야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1161년 무함마드는 카르모나를 점령했으나[20] 이듬해 무와히드 조가 수복했고, 그라나다 공격도 실패한다. 1165년 가을, 파흐스 알 잘라브 전투에서 무와히드 군에게 대패한 무함마드는 위축되었고 하엔 총독이던 이브라힘이 항복했다.[21] 1172년 3월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아들 힐랄이 계승했으나 곧 무와히드 조에 복속하며 안달루스는 재통합되었다. 무함마드와 유수프 형제의 후손들은 무와히드 조에 협력하며 발란시야의 지역 유지로 남게 되었다. 1212년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의 패배로 약화된 무와히드 조는 1228년 안달루스에서 철수한다.
2.1.4. 발렌시아 함락 (123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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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비대가 항복의 징표로 내건 아라곤 국장 | 알카니스 성채에 묘사된 발렌시아 수비대의 항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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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5년에 묘사된 차이메 1세의 발렌시아 입성 상상화 (프라도 미술관 소장) | |
13세기 초엽 발란시야 총독은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였는데, 1220년 무렵 사망하고 조카 아부 자이드 압둘 라흐만 (자이드 아부 자이드)가 계승했다. 무와히드 내전을 틈타 압둘 라흐만은 사실상 자립했고, 동전에 새기진 않았지만 왕을 칭하기도 했다.[22] 한편 1224년에 레콩키스타 재개를 선포한 아라곤 왕국의 차이메 1세는 이듬해 여름, 토르토사 남쪽의 페니스콜라 성채를 공격했으나 격퇴되었다. 압둘 라흐만은 1225년 3월 쿠엥카로 찾아가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에게 복속했고, 같은해 아라곤에도 복속한 후 평화를 대가로 발란시야 및 무르시아의 세금 1/5를 연공으로 바쳤다. 한편 1228년 5월에 무와히드 주력군이 철수하자 무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후드)는 빠르게 데니아, 간디아, 샤티바, 알시라 등을 점령한 후 발란시야를 포위했으나 카스티야의 개입 의사에 철수했다. 한편 기독교 세력에 대한 굴복에 반발하던 발란시야의 무슬림들은 압둘 라흐만이 이슬람을 배신했다 여겨 근처에 거주하던 유수프의 손자인 자얀 빈 무다파 (이븐 마르다니쉬)를 아미르로 추대했다. 이에 압둘 라흐만은 아라곤으로 망명했고, 1229년 겨울 자얀은 환대를 받으며 발란시야에 입성했다. 그는 전임자와 달리 왕을 칭하지는 않았고[23], 명목상으로 압바스 칼리파에 복속했다. 1230년 기준 발란시야는 안달루스에서 유일하게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후드)의 통치 하에 있지 않은 도시였다. 같은해 마요르카르를 정복한 차이메 1세는 발란시야로 눈을 돌렸고, 망명해 온 압둘 라흐만에게 군대를 주어 일대를 습격하게 했다. 한편 1233년, 발란시야에 망명했다가 아라곤으로 돌아온 구호 기사단장 위고 드 포흐칼키에와 발라스는 도시의 부유함을 들어 차이메 1세에게 점령을 설득했다.
같은해 출정한 차이메는 사군토 동북쪽의 보리아나를 2달간 포위한 끝에 7월에 함락했다. 또한 그는 아라곤 왕국 북부의 몬손에 아라곤, 카탈루냐, 칼라트라바 기사단, 차이메의 프랑스 왕국 내의 영지인 몽펠리에 출신 병력을 집결시켰다. 1235년 아라곤 군대는 발란시야 동북쪽 근교인 알발라트와 남쪽의 쿠예라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6월, 차이메가 직접 출정해 알발라트 옆의 포이오스 요새를 포위하자 더 북쪽 엘푸이그 (아니사)[24] 의 수비대가 성벽을 파괴한 후 남쪽으로 철수했다. 1236년 5월 차이메는 테루엘에서 압둘 라흐만과 만나 발란시야 정복을 도와주는 대가로 기존 자이얀의 영토 중 1/4를 그와 그의 후손들에게 영지로 주겠다고 서약했다. 압둘 라흐만 역시 차이메 1세와 그 후손들에 대한 복속을 다짐했고, 기독교로 개종했다.[25] 그해 10월 중순, 몬손의 아라곤 보병 중 일부가 발란시야를 공격했다.
그 무렵[26] 레리다에 있던 차이메는 발란시야가 정복된다면 대사원을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하고, 현지 주교는 타라고나 대주교구로부터 자립할 것이며 도시 자체를 그에게 헌정할 것이라 서약했다. 또한 군사적 도움을 대가로 템플 기사단의 현지 지부장에게 자체적인 동전 주조권을 주기로 약속했다. 1236년 10월 28월, 몬손에 발란시야 원정군이 모이자 차이메는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십자군 인정 칙령을 요청해 이듬해 2월에 얻어냈다. 그 무렵 차이메는 와 일부 카스티야 병력도 데려와 아라곤 왕국 남부의 테루엘에 집결시킨 후 1237년 봄부터 팔란시아 강을 따라 남하하며 알메나라 등을 점령했다. 그러던 6월 25일, 수비대가 도주한 엘푸이그를 점령한 차이메는 성벽을 재건한 후 돌과 진흙으로 바다에 이르는 장성을 쌓아 발란시야의 북쪽 포위망을 이루게 했다.
역사가 이븐 칼둔에 따르면 차이메는 도시 주변에 7개의 주둔지를 세워 완벽히 봉쇄했고, 그중 가장 큰 2개는 알시라와 하티바로 향하는 길에 세워졌다 한다. 50여 일에 걸쳐 장성 및 주둔지 건설이 끝나자 차이메는 프라가 영주이자 몽펠리에 가문원이며 자신의 외삼촌인 베르나 기옘 휘하의 기사 1백 및 더 많은 보병을 엘푸이그에 배치해 봉쇄의 중심 거점으로 강화한 후 레리다로 회군했다. 그러자 8월 중순, 자얀은 하티바와 후카르에서 기병 6백과 보병 수천[27]의 병력을 모아 엘푸이그로 진격했는데, 베르나 기옘이 50인의 기사와 1천의 보병으로 반격해 대패를 안겼다. (아니사 전투) 자얀의 서기 이븐 알 압바르에 따르면 정오 무렵에 벌어진 전투에서 성직자 아불 라비아 이븐 살렘 등이 전사했다 한다. 전투 소식에 돌아온 차이메는 며칠간 엘푸이그에 머물며 병사들을 치하한 후 다시 아라곤으로 향했다.
다만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베르나 기옘이 곧 사망하자, 상심한 일부 귀족들은 엘푸이그를 포기할 것을 주장했으나 차이메는 이를 거부하고 포위 지속을 명했다. 1238년 1월 말에 엘푸이그로 돌아온 차이메는 불과 10-11세에 불과했던 베르나 기옘의 아들 기옘 2세를 진영으로 데려와 귀족들과 병사들 앞에서 기사로 섬임하고 부친의 작위와 영지를 계승하게 했다. 또한 같은 가문원인 베렝게르를 엘푸이그의 새 지휘관으로 봉했다. 그럼에도 차이메가 다시 떠날 무렵 수비대 상당수가 성채를 포기하려 하자, 성내의 도미니코회 수사 중 하나가 이를 밀고했다. 이에 차이메가 다시 귀족들을 모아 설득과 위협을 가해 임무 지속을 약속시켰다. 한편 자얀은 차이메에게 서신을 보내 (당시에는 도시 북쪽을 흐르던) 투리아 강[28] 이북 지역을 할양하고, 차이메를 위한 호화로운 궁전을 세워주겠다 제안했다.
여기에 매년 1만 베잔트의 연공을 바칠테니 발란시야 공격을 멈춰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차이메는 기존과 달라진 상황을 언급하며 거부하고 봉쇄를 이어갔다. 1238년 4월 22일, 투리아 강 하구인 그라우에 상륙한 차이메는 발란시야 동남쪽의 루사파에 진영을 세우고 도시를 본격적으로 포위했다. 한편 작년 교황의 십자군 칙령 후 프로방스,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잉글랜드 등지에서 자원병이 몰려들어 병력이 늘었다. 그해 여름 타라고나 대주교 페레 달라바트가 5천 마르크의 은을 기부하며 여러 기사들과 함께 포위망에 합류했고, 그의 동생 베네트는 지휘관으로 선임되었다. 한편 자얀은 안달루스와 모로코 등지에 구원 요청을 보냈지만 실패하자 발란시야 출신의 시인으로 유명했던 재상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알 압바르)를 신생 하프스 왕조의 수도 튀니스로 보내 복속을 표하며 구원을 요청하게 했다.
아름다운 안달루스의 절망적인 상황을 묘사한 무함마드의 시조에 감탄한 하프스 군주 아부 자카리야 야흐야 12척의 함대를 보냈고, 이들은 8월 17일 발란시야 근해에 당도했으나 카탈루냐 함대가 순찰 중이고 이미 성벽이 공격을 받던 상황이기에 감히 상륙하지 못하여 남쪽의 데니아로 철수했다. 성내의 식량이 떨어져 가고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자얀은 무함마드의 중재 하에 차이메와 항복 협상에 나섰다. 협상 결과 차이메는 남고자 하는 이들을 존중하고, 도시를 떠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5일간 재산을 챙길 시간이 주어진 후 자신의 보호 하에 쿠예라 항구를 통해 후카르 강 남쪽으로 떠나도록 허가했다. 9월 28일, 발란시야 주민들은 알리 부파트 성탑에 아라곤 깃발을 내걸며 항복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10월 9일[29] 일요일에 차이메가 입성했고, 이후 도시는 스페인 식으로 '발렌시아'라 불리게 되었다.
2.2. 아라곤 왕국령 발렌시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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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2년 ~ 1356년에 주요부가 세워진 발렌시아 대성당 | 성당 내부의 화려한 제실 (apse) |
| 1300년을 전후로 세워진 산토 도밍고 수도원 | |
차이메의 입성 당일 대사원에서 예배가 열렸다. 다만 타라고나 대주교 페레 달바트는 대사원을 성당으로 개조한 후 차이메의 서약과 달리 발렌시아 주교구를 타라고나 대주교구 하에 두었다. 도시는 정복자들에게 분배되었고, 차이메는 푸르라 불리는 자치 법령을 제정했다. 한편 5만에 달하던 무슬림 주민 대부분이 떠났고, 그 자리에 3만의 카탈루냐 기독교도가 정착했다.[30] 발렌시아 남쪽의 요새들을 영유하던 자얀은 1239년 4월에 정변을 일으켜 무르시아의 아미르가 되었고, 1240년 쿠예라와 비예나를 점령하며 압박하는 아라곤 왕국에 대항해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에게 보호를 청하며 접근했다. 비록 1241년 자얀은 무함마드 (이븐 후드)의 숙부 바하 앗 다울라 무함마드에게 축출되었으나, 후자도 결국 카스티야에 복속했다. 하프스 왕조로 망명한 자얀은 1270년에 튀니스에서 사망했다.[31]
정복을 이어간 차이메는 1242년 알시라, 1244년 샤티바 & 데니아, 1245년 비아르 등을 점령하며 기존 발란시야 토후국 전역을 확보해 발렌시아 왕국으로 편성했다. 다만 이미 1243년에 무르시아 토후국이 카스티야에 복속한 상태라 더 이상 남하하지는 못했고, 이로써 아라곤 왕국의 영토가 사실상 확정되었다. 한편 예루살렘으로의 십자군을 계획하던 차이메는 1245년 데니아 배후 산지의 알칼라 일대의 무슬림 호족 아부 압둘라 무함마드 이븐 후다일 (알 아즈라크)가 복속하는 대가로 그에게 자치권을 주는 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무슬림들에 대한 차별에 분노한 알 아즈라크는 1247년에 반란을 일으켰고, 분노한 차이메는 12월에 자신의 영토 내의 모든 무데하르 무슬림들에 대해 추방령을 내렸다. 성직자와 평민들은 이에 찬성했으나, 농민과 임차인들의 이탈을 원하지 않던 귀족들은 반대하며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이에 차이메는 독단적으로 수만명의 무데하르들을 카스티야 왕국과 그라나다의 나스르 왕조로 추방했다. 다만 아라곤 왕국의 성장을 견제하던 카스티야와 그라나다는 무데하르들을 무장시켜 돌려보내며 반란을 도왔고, 발렌시아 북쪽의 전투에서 3천의 토벌군 중 5백여가 전사하는 등 아라곤 왕국의 피해가 커졌다. 1248년 여름에 직접 진압에 나선 차이메는 루센테와 샤티바 등의 무데하르 도시들을 포위하고, 공격받는 요새들을 구원했다. 그 과정에서 반군 지도자 중 하나인 이븐 바살이 전사했다.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이 전쟁에 십자군 칙령과 사면권을 부여했다. 한편 알 아즈라크가 기독교 개종 의사를 밝히자 차이메는 소수의 기병과 함께 그가 있는 루가트 성으로 향했는데, 매복을 당해 겨우 죽음을 면했다. 1251년과 1258년 2월에 카스티야의 중재로 휴전이 성립되며 차이메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러던 1258년 4월, 차이메에게 매수된 알 아즈라크의 참모가 본거지인 알칼라의 곡물을 황금을 대가로 팔았다. 곧 차이메는 알 칼라를 ㅍ위했고, 수세에 몰린 알 아즈라크는 7월에 항복하며 알리칸테와 데니아 등지를 넘긴 후 북아프리카로 망명했다. 이후 차이메는 알칼라 근처에 기독교도로만 구성된 새 도시인 알코이를 세운 후 요새화했다. 차이메는 기존 아라곤 왕국의 수도인 사라고사보다 발렌시아를 선호해 자주 머물렀고, 종종 군사 원정의 거점으로 삼았다. 한편 정복 후에도 20년 넘게 쿠란 구절까지 그대로 있던 '대성당'은 1262년 6월부터 기존 모스크 건물을 철거하며 고딕 양식으로 새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1265년 차이메는 발렌시아에서 남하하여 역시 무데하르 반란이 일어난 무르시아를 포위, 이듬해 정복한 후 약속대로 카스티야 왕국에 넘겨주었다.
발렌시아 일대의 무슬림들을 개종시키는 데에 주력하던 차이메는 1260년 안달루스로 돌아온 알 아즈라크가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1276년 7월, 발렌시아에서 출정을 준비하던 중에 사망했고 사후 아들 페로 3세가 계승했다. 얼마 후 알 아즈라크는 알코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1277년 페로 3세는 몬테사를 함락하며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페로 3세는 피폐해진 발렌시아 지방의 재건을 위해 카탈루냐에 증세했다가 그 귀족들에 반란에 직면했고, 1280년에야 진압에 성공한다. 1285년과 1291년에는 각각 1265년과 1267년 발렌시아에서 출생한 알리폰소 3세와 차이메 2세가 아라곤의 왕으로 즉위한다. 차이메 2세는 카스티야 내전을 틈타 1296년 알리칸테, 1298년 무르시아와 카르타헤나, 1300년에 로르카를 점령하며 아라곤 왕국의 육상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그중 무르시아와 카르타헤나는 1304-05년에 반환된다.[32]
2.2.1. 정치적 격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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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초엽에 세워진 알미란테 (해군 제독) 궁전 | 궁전 옆에 1313-20년에 세워진 목욕탕 |
| 1392-98년에 세워진 세라노스 성문 | |
1319년 차이메 2세는 아라곤 왕국, 발렌시아 왕국, 발렌시아 백국을 단일 군주가 통치해야 하는 정치체로 통합했다. 1327년에 즉위한 그의 아들 알리폰소 4세의 치세에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과 흉년으로 카탈루냐는 피폐해졌고, 귀족들은 풍요를 유지했던 발렌시아에서의 이권을 얻기 위해 다퉜다. 이에 알리폰소 4세는 1329년에 발렌시아의 관할권을 귀족들에게 분배했다. 1333년 발렌시아 귀족 평의회는 기존 후계자 페로 4세 대신 그의 이복동생 페란도에게 알리칸테, 사군토, 보리아나 등을 넘기려 했던 알리폰소 4세를 저지했다. 페로 4세는 1344년 7촌이 지배하던 마요르카 왕국을 정복했지만 아들이 없었음에도 우르헬 백작인 동생 자우메를 해임했고, 후자는 사라고사에서 반란을 일으키려 하다 사면을 받았으나 급사했다. 그의 독살 소식에 1347년 발렌시아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 샤티바를 포위했다.
반군은 페로 4세의 이복동생 페란도를 군주로 추대했고, 토벌군을 격파했다. 1348년 4월, 협상을 제안한 후 발렌시아로 향한 페로 4세는 연회에서 귀족들과 다툰 후 모르베드레에 억류되었다. 다만 곧 흑사병이 발렌시아 지역을 엄습하며 도래한 혼란을 틈타 테루엘로 빠져나가 반격에 나섰고, 에필라 전투와 미슬라타 전투에서 아라곤과 발렌시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뒤이어 발렌시아에 입성한 페로 4세는 도시 전체를 불태우고 소금을 뿌리라 명했지만 신하들의 거듭된 만류로 주모자들을 그들이 회의 소집을 위해 울렸던 종을 녹인 물을 목에 붓는 방식으로 잔혹히 죽이는 것으로 대체했다. 1362년 발렌시아에서는 1261년에 설립된 코르트 (귀족 회의)를 대표하여 세금의 징수 및 운용을 맡는 기관인 헤네랄리타트 (Generalitat)가 설립되었고, 삼부회와 같은 세 신분의 대표가 모여 논의하며 자치 행정에 나섰다.
한편 왕권을 회복한 페로 4세는 카스티야 내전에 있어 발렌시아 영유권을 주장하는 페드로 1세 대신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엔리케 2세를 지지하며 개입했다. 이에 페드로 1세가 1363년과 1364년 발렌시아를 침공했고, 주민들은 서둘러 확장된 시가지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성벽을 세웠다. 이에 페드로 1세는 성 밖의 왕궁을 약탈하고 방화했다. 또한 페드로 1세를 지지하는 그라나다 군대가 발렌시아 왕국 남부를 황폐화시켰다. 다만 아라곤 왕국의 도움으로 즉위한 엔리케 2세는 약속했던 무르시아 할양을 거부했고, 이에 양국은 다시 싸웠다가 현상 유지로 휴전한다. 한편 카스티야에 비해 아라곤 왕국은 종교적으로 관대했다. 따라서 14세기 후반에도 발렌시아의 구도심에는 동부와 북부 강변에 유대인, 모센 소렐 시장을 중심으로 한 북서부에 무슬림 주민이 계속해서 거주하며 주류인 기독교도 주민들과 공존했다.
하지만 1391년 7월 9일, 세비야에서 시작된 반유대인 폭동이 성직자들의 주도 하에 발렌시아에서도 벌어졌다. 기독교도 청년들은 '카스티야의 대보제가 십자가와 올 것이니, 모든 유대인들은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구호와 함께 행진했다. 뒤이은 유대인 구역 습격으로 유대계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강제 개종되었다. 쫓겨난 이들은 오스만 제국령 발칸 반도로 향하여 대부분 블로러와 테살로니카에 정착했다. 한편 1404년 발렌시아의 코르트 (의회)는 헤네랄리타트 (삼부회)에 32인의 인원을 배정하고 왕실, 성직자, 군대, 시민 계급에서 각각 8명씩 대표자를 보내게 했다. 그러던 1410년 페로 4세의 아들 마르틴 1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자 이번에는 아라곤 왕국이 내전에 돌입, 페로 4세의 외손자인 카스티야 왕자 페란도 1세와 알리폰소 4세의 증손자이자 마르틴 1세의 처남인 우르헬 백작 자우메 2세가 경쟁했다.
아라곤, 발렌시아, 카탈루냐 (바르셀로나)의 귀족들은 각각의 코르트에서 논의했지만 의견을 통일하지 못했다. 본국인 카스티야 왕국의 지원을 받은 페란도 1세는 1412년 2월, 발렌시아 왕국으로 향해 모르베드레 전투에서 귀족 군대를 격파했고, 이로써 발렌시아는 그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교황 베네딕토 13세의 제안으로 아라곤, 카탈루냐, 발렌시아가 각각 3인씩 대표를 보내 알카니스에서 회담했다. 같은해 6월, 투표를 통해 페란도 1세는 카스티야 왕의 겸임하지 않고 세 지역의 개별적인 자치를 인정하는 조건 하에 왕으로 선출되었다. 사라고사, 바르셀로나를 이어 1413년 초엽 페란도 1세는 발렌시아에서 충성 서약을 받으려 했지만 자우메 2세의 후속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행할 수 있었다. 공위기 동안의 부패와 치안 불안을 해소한 페란도 1세는 해상 무역을 강화한 후 1416년에 사망, 장남 알리폰소 5세가 계승한다.
2.2.2. 15세기의 황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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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21 ~ 1593년의 헤네랄리타트 (삼부회) 궁전 | 1482년 ~ 1533년에 걸쳐 세워진 로차 델라 세다 (비단 거래소) |
| 1499년에 세워진 발렌시아 대학교 | |
14세기 말부터 안정이 찾아오며 발렌시아는 경제, 문화적으로 크게 번영하게 된다. 특히 안달루스 시기에 시작된 비단 제조를 필두로 한 직물업은 서유럽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고, 이탈리아 및 프랑스 상인들이 자주 왕래하며 구매했다. 1401년 바르셀로나에서 설립된 은행인 타울라 데 카브니는 1408년 발렌시아에 첫 지점을 두었다. 상인 계층의 성장과 함께 그들이 소속된 헤네랄리테의 중요성 역시 증대되었다. 1418년 알리폰소 5세는 헤네랄리테를 코르트의 부재 시 발렌시아 왕국의 자금 운용 기구 및 최고 결정 기구로 삼았는데, 농촌에 흩어져 있어 자주 소집되기 어려운 코르트 특성상 도시 중산층 중심의 하원 성격인 헤네랄리테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동시에 상설 기구가 된 헤네랄리테를 위해 1421년부터 그 회의 장소가 될 헤네랄리테 궁전이 세워지기 시작했고, 그 이에도 시내에는 많은 새 건물들이 들어섰다.
경제적 번영과 함께 도시 안밖에는 세레노 성탑, 쿠아르트 성탑, 미겔레테 종탑, 성체 성혈 왕립학교 등이 세워졌다. 지로나 출신의 건축가 페레 콤테는 1460년대 들어 발렌시아에서 활동하며 헤네랄리타트 궁전, 로차 델라 세다, 발렌시아 대성당 등을 설계했고 말년에는 보르자 가문에게 고용되었다. 그를 비롯한 여러 카탈루냐 건축가들의 활약으로 도시는 르네상스의 도래 후에도 유지된 '발렌시안 고딕'[33]이라 불리는 독특하고 화려한 건물들로 가득 찼다. 미술에 있어서도 루이스 달마우, 곤살로 페레스, 다미아 포르멘트 등의 화가 및 조각가들이 배출되었다. 1442년 나폴리 왕국을 병합한 알리폰소 5세는 투르바도르의 오크어 대신 발렌시아어로 시를 쓴 아우시스 마르크와 이사벨 데 비예나 등의 문학가들을 후원했다. 발렌시아는 또한 보르자 가문을 통해 갈리스토 3세, 알렉산데르 6세의 두 교황을 배출했다.[34]
| 황금기의 도시 구성이 표현된 1563년의 발렌시아 전경 |
| 1591-99년 투리아 강에 세워진 푸엔테 델 마르 (바다 다리) |
1456년에는 반무슬림 폭동으로 무슬림 구역이 피해를 봤으나 크진 않았다. 1460년 무렵 발렌시아 출신의 작가 호아노트 마르토렐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로맨스 소설인 티란테 엘 블랑코를 집필했다. 이는 후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영감을 준다. 한편 1458년 추안 2세의 즉위 시에 발렌시아는 카탈루냐와 달리 그를 지지했다. 발렌시아의 국제적 위상을 상징하듯 1473년 시내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첫 인쇄소가 설립되었고, 1478년에는 카르투시오회 수도사 보니파시 페레르의 번역으로 첫 카탈루냐어 성경이 발간되었다. 유럽 각지의 상인들이 비단 거래를 위해 발렌시아로 몰려 들며 1482년 ~ 1533년에는 화려한 고딕 양식을 자랑하는 비단 거래소인 로차 델라 세다가 세워졌다. 막대한 자본을 운용하게 된 발렌시아 은행가들은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에 자금을 댔다.
1499년 4월에 발렌시아에는 1246년에 세워진 학교를 기반으로 한 발렌시아 대학교가 설립되었고 1501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승인을 받았다. 15세기 말엽 기준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를 넘어 아라곤 왕국 최대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다만 발렌시아의 경제는 아직 비옥한 토지를 활용한 농업이 우세했고, 따라서 봉건 귀족제가 유지되었다. 도시 내에서는 수공업에 종사하는 장인들이 길드인 제르마니에스를 형성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외 교역은 발렌시아 인들이 주도하기 보다 육로 및 해로로 방문하는 외부 상인들에게 비단 등의 물품을 파는 형태로, 수동적이 편이었다. 그리고 16세기 들어 서반구 무역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이동하고, 아메리카 진출은 카스티야 인에게만 국한되며 발렌시아의 성장세는 꺾이게 되었다. 이러한 상항에서 역병, 홍수, 기근 등이 거치며 발렌시아 경제는 위기에 직면한다.
2.2.3. 제르마니에스[형제단] 반란 (1519-23)
1492년 레콩키스타를 완성한 페란도 2세는 1504년 카스티야의 섭정도 맡게 된 후 나바라 왕국 병합, 이탈리아 전쟁 등 여러 대외 원정을 감행하며 유럽 각지에 군대를 배치했다. 알푸하라 무슬림 반란 후 그라나다 왕국에도 많은 병력이 배치되었고, 이로써 1513년 하이레딘 (바르바로사)가 항구를 습격해 선박 4척을 나포하는 등 발렌시아는 바르바리 해적의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이에 페란도 2세는 제르마니에스의 장인들에게 무장을 허가해 민병대를 구성하게 했는데, 기본적으론 군인인 귀족들은 일개 시민인 그들의 무장에 반대했다. 그러던 1516년 페란도 2세가 사망한 후 플랑드르 출신인 그의 외손자 카를로스 1세가 카스티야와 아라곤 왕위를 계승했다.[36] 그는 1518년 5월에 바르셀로나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후 1년 넘게 머물렀지만 (역시 즉위식이 필요했던) 발렌시아는 방문하지 않았다. 1519년 카를로스는 친조부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자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을 위해 독일행을 준비하며 배후 안정을 위해 발렌시아의 귀족들을 압박, 제르마니에스의 무장을 관철시켰다. 같은해 발렌시아에는 역병이 퍼져 여러 중요 귀족들이 죽었고, 다른 귀족들은 시골로 피신했다. 시민들은 역병이 부도덕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여겼고, 군중은 동성애자로 의심가는 이들과 무슬림들을 공격했다. 이로써 초래한 권력 공백기에 제르마니에스가 발렌시아 조정을 장악했고, 각 조합에서 1명씩 선출한 13인 위원회로 통치했다. 그중 후안 로렌스가 지도자로 떠올랐고, 제노바와 비슷한 공화정 수립을 추진했다. 동시에 제르마니에스는 비조합원이 장인이 되는 것을 금지하며 독점적 지위를 강화했다. 1520년, 독일에 있던 카를로스는 제르마니아스 무장 허가령을 취소하는 조치에 그쳤으나 그마저도 가볍게 무시되었다.그러자 같은해 4월 카를로스는 카스티야 장군 디에고 우르타도 데 멘도사를 발렌시아 부왕에 봉해 상황을 통제하려 했는데, 13인 위원회가 이끄는 제르마니아스 민병대가 정변을 일으켜 그를 축출하고 알시라 등 발렌시아 왕국의 상당 부분을 장악했다.[37] 그 무렵 그나마 중도적인 후안 로렌스가 사망하고 급진파인 빈센테 페리스가 지도자가 되며 반군은 급진화되었다. 빈센테는 토지 개혁으로 봉건제 혁파에 나섰고, 귀족들 및 무슬림들을 적대했다. 여름부터 반군은 각지의 귀족 저택들을 공격했고, 발렌시아에서는 무슬림들이 귀족들과 협력한다는 소문에 군중이 무슬림 구역을 습격해 방화했다. 한편 데니아로 피신한 발렌시아 부왕 디에고는 로스 벨레스 후작 페드로 파하르도가 이끄는 안달루시아 왕당파 병력과 함께 반격을 준비했고, 발렌시아 북쪽에서는 세고르베 공작 알론소가 토벌군을 모았다. 북부 전선에서 반군은 두 차례 패했지만 빈센테가 이끈 남부 전선에서는 샤티바를 점령하고 1521년 7월의 간디아 전투에서 디에고 부왕을 격파했다. 승리 후 반군은 간디아와 주변 농지를 약탈했고, 무슬림들을 강제 개종시켰다. 다만 그후 반군은 협상을 주장하는 발렌시아 부르주아지 (자본가)와 전투 지속을 주장하는 민병대로 분열되었다. 그 여파로 불과 일주일 후 오리올라 전투에서 반군은 4천 이상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고, 발렌시아 왕국의 남부 대부분이 왕당파 수중에 들어갔다. 이에 13인 위원회는 자신 사임의 형식으로 해산되었고, 11월 1일 발렌시아는 왕당파 군대에 항복했다. 다만 샤티바에서 버티던 빈센테는 1522년 2월에 밤을 틈타 발렌시아로 침투, 시민 봉기를 유도하려 했으나 추종자들이 배신해 당국에 알렸다. 노상 전투 끝에 그는 자신의 집에 숨었다가, 당국이 불을 지르자 연기를 피해 나와 체포되었다.
그해 3월 빈센테는 발렌시아의 광장에서 다른 동지들과 척장분지형[38]으로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남은 반군은 왕자였지만 엘리야와 에녹과 소통하며 숨겨져 자랐다 주장하는 '숨겨진' (엘 엔쿠비에르토)을 지도자로 삼았다. 발렌시아 구원을 외치며 반란의 방향을 기존의 사회 혁명 대신 메시아적 종교 혁명으로 전환한 그는 농촌 귀족들과 부농들을 섭외해 농장을 약탈, 성들을 습격하고 무슬림들을 강제 개종시켰다. 다만 당국이 그의 수급에 막대한 현상금을 걸었고, 1522년 5월에 돈을 노리는 사람이 그를 죽였다. 이후로도 여러 인물이 '숨겨진'이라 주장했지만 아무도 그 카리스마를 발휘하지 못했고, 지도자가 없는 반군은 디에고가 사면을 약속하자 대거 항복했다. 12월에 마지막 거점인 샤티바와 알시라가 함락되며 제르마니에스 반란은 진압되었고, 1523년에는 마요르카로 확산된 반군도 진압되었다.카를로스의 의붓 외할머니인 우르술라는 1백여 반군 가담자들의 처형에 서명하는 등 강경한 처벌에 나섰고, 디에고의 관대한 처분 약속이 무색하게 8백여명이 처형되었다. 비록 실패했지만 제르마니에스 반란은 발렌시아가 더욱 근대적이고 중앙 집권화된 체제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되었다. 다수의 귀족들이 역병을 피해 낙향한 덕에 반군의 기세에 비해 피해가 적었지만 그럼에도 반란을 거치며 민중의 힘을 경험한 발렌시아의 귀족층은 약화되었고, 반란 진압 때처럼 왕권에 의지해야 했다. 반군이 자행한 무슬림들의 강제 개종도 귀족들이 '이교도'란 이유로 착취할 수 있었던 저렴한 노동력을 앗아가며 귀족들의 세력 약화에 기여했다. 이후 발렌시아의 주도권은 부를 축적한 자본가들에게 넘어갔다. 또한 제르마니에스란 이름은 대중의 심리에 깊게 세겨져 1693년 카탈루냐 농민 봉기가 그 후예를 칭하기도 했다.[39]
2.2.4. 안정 속 쇠퇴와 회복
| 도시의 북쪽 근교에 1548년부터 17-18세기에 걸쳐 세워진 왕들의 산 미구엘 수도원 |
| 1609년 9월, 발렌시아의 그라우 항구를 통해 북아프리카로 추방되는 모리스코 주민들 (1616년 묘사) |
1522년 들어 반왕정 & 반봉건 성격의 자치 요구 봉기인 발렌시아의 제르마니에스 (형제단), 카스티야의 코무네로 반란을 모두 진압한 압스부르고 왕조는 스페인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후 발렌시아는 이따금씩 발생하던 바르바리 해적의 습격 외에는 안정을 누렸다. 건축에 있어 16세기 중반 들어 기존의 발렌시아 고딕 양식은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양식이 가미되며 더욱 정교해졌다. 1550년 5월 오스만 해군 제독 투르굿 (드라구트) 레이스가 남쪽의 쿠예라를 함락하고 약탈했지만 스페인 군은 반격하지 못하고 발렌시아를 지켜내는 것에 그쳤다. 한편 1609년 모리스코 추방은 아라곤 왕국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라곤 왕국 전체 인구의 1/5, 발렌시아 왕국의 경우 전체 인구의 1/3이 무어인 출신의 모리스코 기독교도였기 때문이다. 갑자기 30% 가 넘는 인구를 상실한 발렌시아의 경제는 말 그대로 붕괴했다.
1613년에는 타울라 데 칸비 은행의 발렌시아 지점과 여러 귀족 가문들이 파산했다. 이에 왕실은 귀족과 자본가들의 손실 상환에 나서 사태를 일단락시켰다. 30년 전쟁 중 프랑스의 지원과 함께 1640년에 벌어진 카탈루냐 반란 당시 발렌시아 왕국은 펠리페 5세에게 자금과 민병대를 제공했다. 다만 바르셀로나 진격을 위한 거점이 된 발렌시아에 스페인 각지에서 모여든 병력이 주둔하며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그나마 서아프리카 및 북아프리카에서 납치해온 노예를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의 탄광과 사탕수수 플렌테이션으로 중개무역하는 노예시장이 활발히 유지되며 발렌시아 경제는 버틸 수 있었고, 17세기 후반이 되어서야 회복했다.[40] 1693년에는 샤티바 등지의 소작농들이 귀족 지주들에게 납세를 거부하며 봉기, 2차 제르마니에스 반란을 선포하며 발렌시아로 진군했으나 손쉽게 진압되었다.[41]
2.3. 근대
압스부르고 왕조의 단절로 벌어진 스페인 왕위 계승전쟁 당시 발렌시아는 아라곤 및 카탈루냐 지방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을 지지했다. 1706년 1월, 피터버그 백작 찰스 모던트가 이끄는 영국 기병대가 바르셀로나에서 남하해 사군토를 함락한 후 기습적으로 발렌시아를 점령했다. 싸늘한 여론에 보르본 왕조의 카스티야 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영국군은 카스티야 군의 반격을 수 차례 격퇴하며 마드리드 방면으로 진격을 시도했으나 테루엘 남쪽의 레케나를 점령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던 1707년 4월, 발렌시아와 알바세테 사이의 알만사 전투에서 프랑스-카스티야 군이 승리한 후 영국군은 16개월만에 도시에서 철수했다. 5월 6일, 발렌시아에 입성한 프랑스-카스티야 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행동하며 수비대를 본보기로 학살했고 도시를 대대적으로 약탈한 후 불태웠다.2.3.1. 자치권 박탈 (1707년)
그후 발렌시아는 (공식 문서 상으로) '산 펠리페'라 명명되었다. 이는 사라고사에 기반한 아라곤, 바르셀로나에 기반한 카탈루냐 지역과 달리 중심지와 지역 및 왕국명이 동일하여 독자적인 정체성 구성에 더욱 중요했던 발렌시아의 자치성을 억누르려는 목적이었다. 또한 펠리페 5세는 카를 대공을 지지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차이메 1세의 푸르 (자치법령)를 폐지하며 발렌시아의 자치권을 박탈했고, 헤네랄리타트는 해산되었다. 압스부르고 왕조 시절부터 유명무실 했던 발렌시아 왕국 역시 아라곤 왕국과 역시 폐지되었고, 스페인의 한 지방으로 격하되어 카스티야 법령에 의해 통치되었다. '발렌시아 학살'에 분노한 샤티바 등의 도시들에서 보르본 왕족들의 사진이 공공 장소에서 거꾸로 메달리자, 카스티야 군은 샤티바 역시 불태워버렸다. 발렌시아에 남은 것은 부왕과 코르트 정도였다.도시를 불태우고 자치권을 박탈한 것도 모자랐는지 펠리페 5세는 발렌시아 부왕령의 치소를 보르본 왕조를 계속 지지하며 1707년 발렌시아에 대한 포격과 약탈에 동참했던 기존 발렌시아 왕국 남쪽 끝의 오리우엘라로 옮기라 명령했다. 이에 발렌시아 부왕인 추기경 루이스 데 벨루가가 무르시아 왕국의 치소인 무르시아와 불과 15km 거리로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반발하며 사임했다. 그 후에야 펠리페 5세는 승복하고 명령을 취소했다. 보르본 왕조 하에서 발렌시아는 더 이상 자체적으로 시민 대표를 선출하지 못했고, 마드리드에서 파견된 (때때로 외국인인) 관료들이 통치했다. 산토 도밍고 수도원 근처의 성채에도 카스티야 병력이 주둔했고, 발렌시아의 번영을 상징했던 로차 델라 세다 역시 병영으로 개조되어 1762년까지 군대가 주둔했다. 이러한 암울한 상황에서도 발렌시아 인들은 결국 극복에 나섰다.
2.3.2. 부흥기
| 1750년 경에 세워진 세관 건물인 정의 궁전 (Palace of Justice) |
18세기 후반 카를로스 3세의 치세에 발렌시아 경제는 비단과 도자 타일 생산으로 반세기 이전 수준을 회복했다. 그 무렵 유럽의 계몽주의 사조가 발렌시아에도 영향을 주며 그레고리오 마이안스, 페레스 바예르 등의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1776년에는 계몽주의 단체인 '국가의 경제적 친우회' (Societat Econòmica d'Amics del País)가 설립되었고, 주민들에게 선진 농업 및 산업 기술을 전수했다. 또한 서서히 문화, 경제 기구와 더불어 시민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발렌시아의 평화는 1세기 만에 나폴레옹 전쟁과 함께 깨지게 된다.
2.3.3. 이베리아 반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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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환이 박힌 쿠아르트 성문 | 1812년 1월, 발렌시아에 입성한 프랑스 제국군 |
1808년 봄, 프랑스 군이 사실상 스페인을 장악하자 각지에서 여론의 반발이 있었다. 특히 5월 2일 마드리드 봉기가 잔혹히 진압되자 5월 23일 발렌시아 주민들은 '가난한 파예테르가 나폴레옹에 선전포고 한다. 페르난도 7세 만세, 배신자들에게 죽음을!'을 외친 빈센테 도메네츠 (엘 파예테르)의 주도 하에 콤파니야 광장에서 봉기를 일으켜 도시를 장악했다. 봉아드리앙 자노 드 몽세가 이끄는 9천의 프랑스 군이 6월 26일에 발렌시아를 포위하자 주민들은 2만의 민병대를 구성, 투리아 강의 제방을 허물어 홍수를 내며 프랑스 군의 공격을 지연시켰다. 또한 수비대는 성채의 대포를 끌어와 배치했고, 성문은 바리케이드로 막아버렸다. 이에 드 몽세는 두 차례 공격이 실패하자 1천여 전사자를 남기고 마드리드로 철수했다. 그리고 1811년 10월, 루이가브리엘 쉬셰 원수가 2만 5천여 프랑스 군과 재차 발렌시아를 포위했다.[42]
| 1810년 프랑스군의 포위 당시 적에게 거점으로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파괴한 투리아 강 건너편의 왕궁 |
발렌시아의 수비를 맡은 호아킨 블레이크는 2만 8천의 병력을 투리아 강을 따라 배치했는데, 성탄절 밤을 틈타 주력군과 강을 건넌 쉬셰는 예비 병력에게 스페인 군의 주의를 끌게 한 후 주력군과 적의 후방을 공격했다. 분전에도 불구하고 패배한 스페인 군은 발렌시아 성으로 피신해 농성했다. 당시 공성전에 대비가 안 되어 있던 발렌시아는 10만에 달하는 주민을 한 달 이상 먹일 식량이 부족했고, 28일 블레이크는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빠져나간 5백여 기병대를 제외하면 실패했다. 1812년 1월 들어 쉬셰는 도시를 두른 참호를 판 후 대대적인 포격을 가한 끝에 외곽 방어선을 장악했다. 거센 포격에 시달리던 블레이크는 식량 부족까지 겹치자 결국 1월 9일에 항복했다. 일련의 전투 결과 프랑스 군은 2천여가 전사했지만 스페인 군은 4천이 전사 혹은 병사하고 1만 6천여명이 포로가 되었으며 대포 4백여 문을 상실했다.
쉬셰는 배상금으로 발렌시아에서 5300만 프랑을 징수했고, 반봉건적 개혁을 단행했다. 발렌시아 주민들은 카디스의 코르트에 대표단을 보내 자유주의적 국민 헌법을 작성했다. 뒤이어 쉬셰가 더 남진해 데니아를 점령하자 나폴레옹은 그를 발렌시아 남쪽의 석호에서 이름을 딴 알뷔페라 다 발랑시아 공작에 봉했다. 다만 곧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을 위해 스페인 주둔군을 철수시키고 쉬셰가 몸져눕자 스페인 군은 타라고나 방면에서 반격에 나섰고, 몇 차례 패배를 겪었지만 1812년 7월의 살라망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8월에 스페인 왕으로 군림하던 조제프 보나파르트 (호세 1세)가 마드리드를 떠나 아직 쉬셰가 있던 발렌시아로 피신, 보나파르테 왕조의 임시 수도로 삼았다. 다만 1813년 6월의 비토리아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대패하자, 7월에 쉬셰는 잔여 병력과 함께 철수했다.
2.3.4. 절대왕정과 저항
| 1814년 4월 16일 감금지에서 풀려난 후 발렌시아를 방문한 페르난도 7세 |
1814년 3월, 프랑스의 연금에서 풀려나 스페인으로 돌아온 페르난도 7세는 1812년 코르트에서 제정된 자유주의 헌법 준수를 거부한 후 마드리드 대신 발렌시아를 방문했다. (4월 16일) 결국 자유주의 헌법은 폐지되었고, 절대 왕정 체제가 부활했다. 다만 1820년 자유주의 군부가 정변으로 집권한 후 절대왕정을 지지하던 장군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데 엘리오는 1822년 9월 발렌시아에서 교살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1823년 페르난도 7세는 프랑스의 도움으로 다시 독재에 나섰고, 이단 심문이 재개되었다. 이단 심문의 마지막 희생자는 1824년 이신론자 및 프리메이슨 혐의로 발렌시아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가이에타 리폴리였다.
1833년 페르난도 7세의 사후 카를로스 (카를리스타) 전쟁과 거듭된 쿠데타로 스페인은 불안정했고, 발렌시아에서도 일부가 카를로스주의에 가담했다. 1836년 카를로스주의 반군이 발렌시아로 진격했으나 도시 서쪽의 치바 전투에서 격퇴되었다. 1840년대 초엽 발도메로 에스페라테로의 집권기에 발렌시아의 자본가들은 교회 영토를 사들여 사회 주류층이 되었다. 한편 카탈루냐의 카를로스주의 장군 카브레라가 도시를 위협했고, 주민들은 자유주의와 공화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2.3.5. 발렌시아 르네상스
| 1832년 무렵 발렌시아 전경 |
19세기 중반 들어 스페인은 다시 안정을 회복했다. 부르주아 (자본가) 계층은 도시에 식수 공급, 도로 포장, 가스 공급 등을 투자했다. 지주들은 오렌지 생산 및 포도 과수원 확대로 부를 축적했다. 1840년 가스 가로등이 설치되었고, 자금난으로 수 년이 걸리긴 했지만 도로가 자갈로 포장되었다. 1850년에는 수도 시설이 구축되었고, 1858년에는 성벽의 철거 및 시가지 확장 계획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당시 인구는 약 14만명이었고, 그라우 항구가 근대적으로 개발되었다. 구도심을 두르던 성벽은 1866년에 대부분 철거되었다. 경제 성장과 함께 1707년 이후 억제되었던 시민 사회와 자치 조직이 부활했고, 사용이 자제되었던 발렌시아어도 공공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발렌시아 르네상스 분위기 속에서 테오도르 요렌테, 콘스탄티 롬바르트 등 낭만 문학가들이 활동했다.
스페인 제1공화국 시기인 1873년 7월, 발렌시아는 스페인 각지의 도시들이 연방제를 요구하며 일으킨 칸톤 반란에 동참했다. 이에 카탈루냐 군사령관 아르세니오 마르티네스 캄포스가 진압에 나서 폭격을 퍼붇자 민병대는 2주간 저항하다가 결국 8월 7일에 항복했다. 1874년 12월 알폰소 12세가 추대되며 왕정 복고가 이루어졌고, 그는 1875년 1월 11일에 마드리드로 향하며 발렌시아를 방문했다. 한편 반란 진압 후에도 발렌시아 지방 정부는 왕당파와 공화파로 반씩 구성되었다. 왕정복고 후 다시 안정이 이어지며 근대화 추진이 재개되었고, 1882년에는 시가지 각지에 전기가 보급되었다. 1890년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후 치러진 선거에거는 빈센테 블랑코 이바녜스가 이끄는 공화파가 지방 의회의 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1894년에는 발렌시아 순수 예술 협회가 설립되었다.
2.4. 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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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건물을 20세기 초엽에 신고전주의로 개조한 시청사 건물 | 1914-28년에 세워진 중앙시장 (Mercado Central) 건물 |
| 1852년에 세워진 발렌시아 북부역 | |
1900년 기준 발렌시아 인구는 21만명이었고, 스페인 제3의 도시였다. 그 무렵 발렌시아 은행, 콜럼버스 시장, 기차역 등이 세워졌다. 1909년에는 알폰소 13세의 주관 하에 지역 박람회가 열렀고, 발렌시아의 번영상을 드러냈다. 기존 비단 산업은 가죽, 모피, 목재, 금속, 포도주와 오렌지를 비롯한 식품 등을 생산하는 경공업으로 대체되었다. 소규모 사업체들 중에 일부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산업화와 함께 아트 누베우 양식의 근대 건물들이 세워졌다. 한편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조합을 구성했고, 블라스코 이바녜스의 공화당은 1901년부터 1923년까지 지방 의회를 주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렌지 수출이 큰 타격을 입으며 발렌시아 노동계는 흔들렸고,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정권 설립 후 더욱 급진 좌파로 결집되었다. 한편 발렌시아의 우파는 지방 자치 확대에 나섰다.
2.4.1. 스페인 내전: 공화파의 임시 수도
| 15세기 중반에 세워진 보르자 궁전. 1936년 11월 ~ 1937년 10월까지 스페인 공화국 청사로 쓰였다. |
1931년에 설립된 스페인 제2공화국 시기 좌우 갈등은 심각해졌고, 1936년 스페인 내전 개전과 함께 1936년 7월 18일 군부가 봉기했으나 안달루시아 도시들과 달리 발렌시아에서는 진압되었다. 그해 11월 6일, 국민파 군대가 마드리드 포위에 나서자 보나파르테 왕조 때처럼 공화파 정부는 발렌시아로 천도했고 기존 보르자 (베니카를로) 궁전을 정부 청사로 삼았다. 이에 국민파 군대가 공중, 해상으로 도시를 폭격하자 주민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2백개가 넘는 방공호가 세워졌다.
1937년 1월에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동맹인 베니토 무솔리니의 명으로 해상 봉쇄를 하고 있던 이탈리아 해군이 발렌시아에 함포 사격을 가했다. 내전 기간 동안 발렌시아에는 442회의 폭격으로 프랑코 정권 하에서 집계된 인원만 2831명이 사망하고 847명이 중상을 입었다. 10월 31일, 공화파 수도는 바르셀로나로 이전되었다. 1939년 1월 바르셀로나의 함락 후 전세는 급격히 국민파 쪽으로 기울었고, 3월 28일에는 마드리드가 함락되었다. 이후로도 버티던 발렌시아 역시 3월 30일에 항복했고, 다음날 알리칸테를 마지막으로 전쟁은 끝났다.
2.4.2. 스페인국 (프랑코 정권)
36년에 걸친 프랑코 독재 치하에서 발렌시아어 사용과 교육은 금지되었고, 정당 활동 역시 중지되었다. 전후 스페인의 고립으로 발렌시아 경제는 암시장이 중심이 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1949년과 1957년에는 투리아 강이 범람하는 대홍수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후자의 경우 공식 집계된 사망자 수만 81명이었다. 이후 1961년부터 투리아 강의 하도를 도시 남쪽으로 이전하는 대사업이 진행되었고, 기존 하도에 대해 프랑코 정권은 도로 건설을 추진했으나 여론의 압도적인 반대로 무산되었다. 사라고사 협정으로 서방국들과의 교류가 재개되며 1960년대 들어 발렌시아 경제는 회복하기 시작했고, 이촌향도로 인구가 크게 늘었다.2.5. 현대
| 파일:예술 과학 도시.jpg |
| 1996년 ~ 2009년에 걸쳐 투리아 정원 일부에 조성된 예술 과학 도시 (Ciutat de les Arts i les Ciències) 복합단지 |
1975년 민주화 후로도 스페인의 정국은 안정되지 않았다. 1981년 프랑코주의 군부의 23-F 쿠데타 시도 당시 마드리드의 국회의사당 점거에 호응하며 제3 군단장 하이메 밀란스가 2월 23일 밤에 발렌시아 시내에 전차 부대를 투입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다만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쿠데타 반대 성명 후 다른 장성들이 쿠데타 세력에 넘어가지 않으며 그대로 사태는 종료되었다. 발렌시아에서 버티려 했던 하이메 밀란스도 결국 24일 오전 5시에 항복했다. 이듬해인 1982년 발렌시아 자치주가 설치되며 40년에 가까운 문화 탄압을 극복하고 발렌시아의 자치권이 회복되었다. 또한 프랑코가 금지했던 발렌시아어 교육이 허용을 넘어 각 학교들에서 의무화되었다. 그후 도시는 빠르게 발전했다. 1986년 구 하도는 투리아 정원이 되어 도시의 랜드마크 겸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 했고, 1988년에는 첫 도시철도가 개통했다.
1990년대 들어 발렌시아는 스페인의 주요 관광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2000년 기준 발렌시아의 인구는 74만명이었다. 2006년 7월 3일, 발렌시아 지하철 1호선 탈선 사고로 43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을 당국이 제대로 수사하지 않으며 여론의 공분이 일었고, 결국 2013년에 재수사가 이루어졌다. 한편 사고 직후인 2006년 7월 9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ㄷ시를 방문해 미사를 집전했다. 2007년과 2010년 발렌시아는 아메리카 컵 요트 대회를 개최했다. 역사적으로 좌파 성향이 강한 발렌시아에서는 1991년 ~ 2015년의 모든 선거를 인민당이 승리했다. 2022년 기준 발렌시아는 지하철 10개 노선을 지닌 대도시이다.
3. 기후, 산업
주위에 농업 지대가 펼쳐져 있어 쌀, 오렌지, 올리브 등이 재배되고 캘리포니아 못지 않은 오렌지 산지로 알려져 있다. 발렌시아 오렌지 100% 음료같은 소리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 터. 여기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은 항구를 통해 운반되고 농업 이외에 조선업이 발달해 있기도 하다. 발렌시아항은 남부의 알헤시라스항과 함께 스페인 최대의 항구로, 두 항구는 매년 스페인 국내 화물 처리량 순위에서 1, 2위를 나눠먹고 있다.쾌적한 기후로 관광지로도 유명한데 묘하게 여름 날씨가 매우 긴 편이다. 10월에도 간혹 한낮에는 30도를 훌쩍 넘는 살인적인 기온을 자랑하기도 한다. 여러 개의 성당과 종탑이 도시를 상징한다. 주요 건축물로는 '발렌시아 대성당'이 있고 매주 목요일 정오에 이곳에서 '트리부날 데 라스 아과스(Tribunal de las Aguas)'라는 일명 '물 재판'이 열린다. 이 재판은 10세기 이후부터 계속되어 온 역사를 갖고 있고 벼 농사를 많이 짓는 지역답게 농부들이 모여 관개수와 관련된 분쟁을 심리해 그 자리에서 심판을 내린다. 모든 절차가 지역 고유어인 발렌시아어로 진행된다.
1월 평균 기온은 11.5℃로 사실상 겨울이 없는 수준이고, 8월 평균 기온은 26.2℃. 대구와 비슷하다. 위도는 북위 39º 28'. 함경남도 고원군, 평안남도 숙천군, 톈진, 아키타현과 이와테현의 중남부와 비슷한 위도로 날씨 대비 꽤나 높은 위도대에 있다.
4. 정치
5. 인구
- 발렌시아(스페인)/인구 참조.
6. 관광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문화유산 | 1984년 코르도바 역사 지구 Centro histórico de Córdoba | 1984년 그라나다 : 알함브라, 헤네랄리페, 알바이신 Alhambra, Generalife y Albaicín de Granada | 1984년 부르고스 대성당 Catedral de Burgos |
| 1984년 마드리드의 에스코리알 수도원 유적 Monasterio y sitio de El Escorial en Madrid | 1984년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 Obras de Antoni Gaudí | 1985년 알타미라 동굴과 스페인 북부의 구석기시대 동굴 예술 Cueva de Altamira y arte rupestre paleolítico del norte de España | ||
| 1985년 세고비아 옛 시가지와 수도교 Ciudad vieja y acueducto de Segovia | 1985년 오비에도와 아스투리아스 왕국 기념물군 Monumentos de Oviedo y del reino de Asturias | 1985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옛 시가지 Ciudad vieja de Santiago de Compostela | ||
| 1985년 아빌라 옛 시가지와 대성당 Ciudad vieja de Ávila e iglesias extramuros | 1986년 아라곤의 무데하르 건축 Arquitectura mudéjar de Aragón | 1986년 톨레도 역사 도시 Ciudad histórica de Toledo | ||
| 1986년 카세레스 옛 시가지 Ciudad vieja de Cáceres | 1987년 세비야 대성당, 알카사르, 인디아스 고문서관 Catedral, Alcázar y Archivo de Indias de Sevilla | 1988년 살라망카 옛 시가지 Ciudad vieja de Salamanca | ||
| 1991년 포블레트 수도원 Monasterio de Poblet | 1993년 메리다 고고 유적군 Conjunto arqueológico de Mérida | 1993년 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 왕립 수도원 Real Monasterio de Santa María de Guadalupe | ||
| 1993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 : 카미노 프란세스와 스페인 북부 순례길 Caminos de Santiago de Compostela : Camino francés y Caminos del Norte de España | 1996년 쿠엥카 성곽 도시 Ciudad histórica fortificada de Cuenca | 1996년 발렌시아의 라 론하 데 라 세다 Lonja de la seda de Valencia | ||
| 1997년 라스 메둘라스 Las Médulas | 1997년 바르셀로나의 카탈라냐 음악당과 산트 파우 병원 Palau de la Música Catalana y hospital de Sant Pau en Barcelona | 1997년 산 밀란 유소와 수소 수도원 Monasterios de San Millán de Yuso y de Suso | ||
| 1998년 시에가 베르데와 코아 계곡 선사시대 암벽화 Sitios de arte rupestre prehistórico del Valle del Côa y de Siega Verde | 1998년 이베리아 반도 지중해 연안의 암각화 Arte rupestre del arco mediterráne de la Península Ibérica | 1998년 알칼라데에나레스 대학과 역사 지구 Universidad y recinto histórico de Alcalá de Henares | ||
| 1999년 산 크리스토발 데 라 라구나 San Cristóbal de La Laguna | 2000년 타라코 고고 유적군 Conjunto arqueológico de Tarragona | 2000년 엘체의 야자나무 숲 Palmeral de Elche | ||
| 2000년 루고의 로마 시대 성벽 Muralla romana de Lugo | 2000년 발 데 보이의 카탈루냐 로마네스크 교회 Iglesias románicas catalanas de Vall del Boí | 2000년 아타푸에르카 고고 유적 Sitio arqueológico de Atapuerca | ||
| 2001년 아랑후에스 문화경관 Paisaje cultural de Aranjuez | 2003년 우베다 ・ 바에사의 르네상스 기념물군 Conjuntos monumentales renacentistas de Úbeda y Baeza | 2006년 비스카야 대교 Puente de Vizcaya | ||
| 2009년 헤라클레스의 탑 Torre de Hércules | 2011년 트라문타나 산맥의 문화경관 El Paisaje Cultural de la Serra de Tramuntana | 2012년 알마덴과 이드리야 수은광산 Patrimonio del mercurio (Almadén e Idria) | ||
| 2016년 안테케라 거석묘 유적 Dólmenes de Antequera | 2018년 메디나 아자하라의 칼리프 도시 Ciudad califal de Medina Azahara | 2019년 리스코 카이도와 그란 카나리아의 신성한 산맥 문화 경관 Paisaje cultural del Risco Caído y montañas sagradas de Gran Canaria | ||
| 2021년 파세오 델 프라도와 부엔 리테로, 예술과 과학의 경관 Paseo del Prado y el Buen Retiro, paisaje de las artes y las ciencias | 2023년 메노르카 섬의 탈라요티카 선사시대 유적지 Menorca talayótica | |||
| <colbgcolor=#c60b1e> 자연유산 | 1986년 가라호네이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de Garajonay | 1994년 도냐나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de Doñana | 2007년 테이데 국립공원 Parque Nacional del Teide | |
| 2017년 카르파티아 및 유럽의 기타 지역에 생육하는 고대 및 원시 너도밤나무 숲 Bosques antiguos y primarios de hayas de los Cárpatos y otras regiones de Europa | ||||
| 복합유산 | 1997년 피레네 산맥 : 몽 페르뒤 산 Pirineos - Monte Perdido | 1999년 이비사의 생물 다양성과 문화 Ibiza, biodiversidad y cultura |
| 1238-62년에 세워진 구도심의 발렌시아 대성당 | |
|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로차 델라 세다 (비단 거래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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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쪽 외곽의 16세기 건축물인 산 미구엘 수도원의 외벽 | 1586년에 지은 발렌시아 대학[43] 부속 예배당 |
| 투리아 정원의 복합 단지인 예술 과학 도시 | |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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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한국어 | 발렌시아의 라 론하 데 라 세다 |
| 영어 | La Lonja de la Seda de Valencia | |
| 스페인어 | Lonja de la seda de Valencia | |
| 프랑스어 | La Lonja de la Seda de Valence | |
| 국가·위치 | 스페인 발렌시아 |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 등재연도 | 1996년 | |
| 등재기준 | (i)[44], (iv)[45] | |
| 지정번호 | 782 | |
| 구도심 지도 |
관광지는 구시가지 일대에 몰려 있는데 비르헨 광장을 중심으로 발렌시아 대성당, 도시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미켈레테탑, 레이나 광장, 중앙 시장,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라 론하 데 라 세다(비단 거래소) 등이 있다. 현지인들이 놀러 가는 곳으로는 한국의 코엑스몰이나 벡스코과 비슷한 '예술 과학 도시'라는 문화 단지가 있는데 세계적인 건축가인 산티아고 칼라트라바가 설계했다. 독특한 건축 형태의 건물들이 인상적이고 수족관, 과학관, 놀이시설, 컨벤션 센터 등이 있다. 발렌시아 동물원(Bioparc Valencia)도 스페인에서 인기 있는 편이다.
발렌시아 중앙시장은 발렌시아식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자체가 볼거리다. 물론, 유럽에서 가장 큰 시장 중 하나로 꼽히는 만큼 상점들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발렌시아의 해변은 상당히 넓게 펼쳐져 있지만 관광 중심부에서 다소 거리가 있어서 바르셀로나의 바르셀로네타 해변처럼 바글거리지 않는다.[46] 물가도 바르셀로나보다 저렴한 편이다. 대도시임에도 관광지로서의 인지도는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 비해 현저하게 낮기 때문에[47] 혼잡도가 덜하고 치안에 대한 불안도 덜하다. 시내 중심부인 성당에서 좀 벗어나면 그냥 사람 사는 도시같은 느낌이다. 뚜리아강을 메워서 길게 조성된 공원에는 현지인들이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전시장(컨벤션센터)인 페리아 발렌시아가 위치해 있다. 페리아 발렌시아는 1917년 개장하여 2017년 개장 100주년을 맞았다.
중국계 이민자가 많은 듯하다. 시내 곳곳에서 중국 상점이나 식당이 눈에 띈다. 물론 관광객이 아닌 현지인인 그들은 유창하게 스페인어를 구사한다. 한국인이 지나가다가 중국어로 말을 거는 사람을 마주칠 수도 있다.
2007년 '발렌시아 시가지 서킷'이라는 F1 서킷이 개장되었고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유럽 그랑프리로 F1을 개최하였다. 2021년부터는 포뮬러 E 경기가 리카르도 토르모 발렌시아 서킷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이외에 매년 3월 열리는 라스 파야스(Las Fallas)라고 불리는 '발렌시아 불꽃놀이 축제', 8월 말에 부뇰(Buñol)이라는 마을에서 열리는 토마토 축제 라 토마티나도 유명하다. 라스 파야스 축제 기간에는 불꽃놀이와 폭죽이 내내 이어지고 800개에 육박하는 니놋(Ninot)이라 불리는 대형 인형들이 발렌시아 시내에 세워지고 축제 마지막 날에 이 인형들을 모두 불태우는 것으로 축제를 마무리한다. 토마토 축제날이 되면 아예 토마토를 트레일러 째로 가져다 놓고 사방에서 상당히 많이 던져대는지라 온 도시가 토마토 범벅이 된다. 이때 쓰이는 토마토들은 소위 잉여 생산물 수준인 거의 먹기 힘든 수준의 토마토를 던진다고 하니 그렇게까지 자원 낭비는 아닌 듯하다.[48] 토마토가 주식 작물은 아니고 이 행사는 원래 똥값이 된 토마토 값 책임지라고 농민들이 토마토 던지며 시위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철권 6 BR의 랜덤맵 중에도 있다.
발렌시아 교통은 노선 자체는 버스, 지하철, 트램 등이 잘 짜여진 편이다. 어지간한 도시 규모로 잘 깔려있고 노선도도 친절하게 그려져 있어 여행객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다. 다만 트램을 탈 때는 티켓 구매가 다소 욕 나올 수 있는데 티켓 구매 후 티켓을 들고 트램을 타는 게 아니라 역에 있는 간이 개찰기에 찍고 타야 한다. 버스와 지하철 트램까지 다 탑승 가능한 10회 회수권(Bono 10)이 시내 A구역 기준 9유로다. 최초 구매시 카드값 2유로를 추가로 받으니 11유로를 내고 충전은 역내 충전기에서 하면 된다. 1회 탑승시에는 버스든 지하철이든 1.5유로다. 가장 열받을 부분은 공항철도를 이용할 때.[49]
이곳을 연고로 하는 축구단으로 발렌시아 CF, 레반테 UD가 있다.[50] 위 2개가 정통 발렌시아 팀이고 그 외로는 비야레알 CF, 에르쿨레스 CF, 엘체 CF 등이 있는데 에르쿨레스를 제외하면 전부 1부 리그팀이고 에르쿨레스 또한 2부 리그에서 승격 가능성이 높은 팀 중 하나기 때문에[51] 스페인에서도 강력한 축구 도시다. 이 중 가장 유명하고 인기 있는 팀은 발렌시아 CF인데 홈 구장 메스타야에서 매우 열정적인 응원을 경험 할 수 있다.
이 곳의 명물로는 오르차타(Horchata), 빠에야(Paella),[52] 사프란, 오렌지,[53] 도자기 타일 등이 있다. 포드가 발렌시아에 현지 공장을 차려서 포드 쿠가 등을 생산해 유럽에서 판매하고 있다. 기존의 벨기에 겡크에 있던 현지 공장을 폐쇄하고 발렌시아로 사실상 이전했다.
참고로 스페인 국내와 외부에서 인식이 상당히 엇갈리는 도시인데, 외부에선 발렌시아는 당당한 스페인 제3의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엘시드 제외하면 딱히 유명하지도 않고 많이 방문하지도 않는 반면[54], 스페인 내에서는 마드리드와 가까운 해변가 휴양지면서 백화점이나 문화시설 등 있을건 다 있는 대도시면서 물가도 막 비싸지 않은 상당히 인기 많은 국내 휴양지로 통한다. 특히 요즘 들어선 스페인에선 물론이고 전 유럽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유흥과 관광의 도시인 바르셀로나의 젠트리피케이션을 비롯한 과개발, 난개발 문제가 너무 심해지고, 또 정치적으로도 분위기가 가끔 좀 알싸해지면서 반대급부로 발렌시아는 같은 카탈루냐어 문화권이면서도 물가가 훨씬 더 싸고 관광지 개판 난개발도 덜하며, 산업화가 덜 됐던 만큼 해변 수질 비롯한 자연환경도 대도시치곤 그럭저럭 괜찮은 혜자 관광지로 뜨고있다. 카탈루냐어권의 문화에 관심 있으며 해변 휴양지를 좋아하지만 바르셀로나 일대의 높은 물가와 관광객 과포화에 따른 각종 소매치기, 각박해진 인심 같은 문제에 지친 스페인 여행자라면 대안으로 발렌시아를 고려해볼만하다.
또한 인근에 있는 관광지들로는 발렌시아 주 남부로 펼쳐진 코스타 블랑카 해변과 북부, 바르셀로나로 가는 길목에 있는 페니스콜라가 있다.[55]. 페니스콜라는 해안가에 삐져나온 반도의 바위에 세워진 도시로 성벽에 둘러싸인 구시가지와 그곳의 페니스콜라 성이 유명하다.
7. 투리아 정원(Jardín del Turia)
| 투리아 정원 |
| 정원 내의 예술 과학 도시 |
본래 투리아 강이 지중해와 만나는 지역이었지만 1957년도에 대홍수 피해를 입은 이후 강을 우회시켰다. 그 자리는 1986년에 시민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서쪽 끝과 동쪽 끝은 각각 인기 관광지인 발렌시아 동물원과 예술 과학 도시까지 뻗어 있다.
[1] 현재까지 십자형 도로 형태가 남아있다[2] 정확히는 그의 노예 출신 마디나 앗 자히라의 경찰국장 무파리스의 노예였다.[3] 이로써 구도심 (시우타트 베야)의 경계가 확정되었다.[4] 혹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아지즈[5] 혹은 사촌[6] 이때 많은 톨레도의 명사와 학자들이 참석했다.[7] 기존 재상 무함마드가 1064년에 사망한 후 계승함[8] 한편 세비야 토후국령 무르시아 총독 아부 바크르 이븐 암마르와 대립하던 아부 바크르는 무르시아의 첩자를 통해 이븐 암마르가 알 무타미드의 애첩 에티마드 루마이키야에 대해 나쁘게 쓴 편지를 입수해 고발했다.[9] 또한 무라비트 조에 도시를 넘기지 않기로 약속함[10] 현재의 라 로퀘타[11] 기존 대사원은 산타 마리아 성당이 되었다.[12] 그중에는 정예 병력인 흑인 노예 부대, 기독교 측과 유사하게 중무장했던 안달루스 기병대가 있었다.[13] 말라가 거쳐 5일만에 당도, 총독 알리 이븐 알 학크가 수비대 일부와 옛 지리 왕조 군대를 내어줌. 상륙 후 22일 지나 무르시아 당도.[14] 3천 미만의 기병대 데려옴[15] 무려 1045년엣 1103년까지 집권함. 1백 미만의 기병대 이끌고 옴. 그외에 세고르베의 아미르 이븐 야신, 헤리카의 아미르 이븐 암룰도 합류했다고도[16] 함성을 지르며 도시를 두른 과수원을 약탈한 후 성벽을 공격함[17] 사군토 북쪽에 위치함[18] 당시 알폰소는 카스티야 본토에 있었고, 무라비트 군대는 당시 톨레도 방면 공세에 집중했기에 역사적 근거가 없다. 아마도 1102년 공성전 시에 히메나가 수비대를 이끈 것이 와전되었을 것이다. 혹은 발렌시아를 포기하고 카스티야로 향하며 히메나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라고도 한다.[19] 이 소식을 들은 알폰소 7세는 유감을 표했다 한다.[20] 내부 지도자 압둘라 이븐 샤라힐이 협조함. 다만 무와히드 조가 1년간 포위해 수복함[21] 이후 1171년 이브라힘은 무와히드 군대와 함께 로르카, 알메리아, 알시라 등을 점령한 후 무르시아를 포위한다.[22] 코르도바에서는 그의 사촌인 압둘라 알 바야시가 자립했다.[23] 다만 일부 사료는 자얀의 집권을 1227년 혹은 1228년으로 설정하고, 이븐 후드의 발렌시아 포위도 자얀의 집권 후로 기록한다. 일각에 따르면 이븐 후드의 압박으로 자얀은 일시적으로 도시를 버리고 도피했다고. 또한 남아있던 무와히드 군대도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24] 스페인측 기록에 '에네사'로도 표기됨[25] 개종 후 이름은 빈센스 벨비스로, 사라고사 출신의 이사벨라 롤단 (혹은 마리아 페란디아 혹은 도민가 로페스)과 결혼해 아들 페르난도를 남겨 Sierra de Espadán의 영주인 벨비스 가문의 시조가 된다. 다만 복속 서약은 차이메 1세와 그가 정실 부인인 헝가리 공주 욜란과 낳은 후손들에만 국한되었다. 한편 이때 압둘 라흐만이 서약문에 찍은 독수리 도장 자국은 지금도 남아있다.[26] 정확히는 10월 28일과 11월 13일에 반포한 칙령[27] 기독교 연대기에는 1만 1천으로 기록됨[28] 1969년 이전까지는 발렌시아의 북쪽을 지났다. 다만 대홍수 후 남쪽으로 이설되었다[29] 지금도 발렌시아 주의 공휴일이다[30] 일부 기록에서는 5만명이 '일부'라 하는데, 당시 도시 규모들을 볼 때 가능성이 적은 말이다. 어쩃든 카스티야 왕국이나 아라곤 왕국 본토와 달리 발렌시아 왕국에는 15세기까지 많은 수의 무어인 인구가 모리스코 형태가 아닌 무데하르 형태로 남아있던 것은 맞다[31] 한편 1260년 무함마드 이븐 알 압바르는 튀니스에 우둔한 이가 통치한다는 시를 썼다가 그의 시집들과 함께 화형되었다[32] 1304년 토랄레스 조약에서 무르시아, 1305년 엘체 조약으로 카르타헤나 반환[33] Valencian Gothic. 스페인어로는 고티코 발렌시아노 (Gótico valenciano)[34] 둘다 발렌시아 출신이며, 각각 1455-58년과 1492-1503년에 재임. 갈리스토 3세는 신실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정치 교황으로 평가된다. 그외에 체사레 보르자 등의 인물로도 유명하나 그는 이탈리아 태생이다[형제단] [36] 카를로스는 카스티야보다 더 뜯어낼 것이 적던 아라곤에 더 많은 자치를 주었다[37] 데 멘도사는 도주했다[38] 내장 적출 후 사지가 잘림[39] 그들은 2차 제르마니에스, 즉 형제단 반란이라 일컫었다. 다만 1차 때와 달리 자본가나 기술자들이 참여하지 않았고, 반무슬림 성향도 없었다 (이미 무슬림들이 거의 사라진 때이긴 했다)[40] 노예제는 스페인 본토에서는 18세기까지 유지되었고, 쿠바와 같은 식민지에서는 1886년까지 합법이었다.[41] 무장 상태가 빈약했고, 민병대 수도 1천 5백 수준에 불과했다. 15명 정도가 전사하고 귀족 군대는 하나도 죽지 않았다. 진압 후에도 주모자 몇 명만 처형되고 나머지 수십명이 갤리선 노예가 되는 정도로 마무리되었다[42] 그 전에 스페인 장군 호아킨 블레이크가 사군토에서 프랑스 군과 맞섰으나 패배했다.[43] 정확히는 발렌시아 대학 바로 옆의 성체 성혈 왕립학교[44]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4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6] 발렌시아 주에서 바르셀로나 해변 분위기가 나는 곳으로 가려면 알레칸테 근처의 베니도름이라는 리조트 도시로 가야한다.[47] 스페인 제3의 도시지만 남부의 세비야나 그라나다가 더 잘 알려져 있을 정도다.[48] 실제로 이런 쪽에서 완숙 토마토는 탁월하다. 일단 투척하기 쉽고 걸죽하면서 진득한 느낌이라 맞았을 때 기분이 더러우면서도 맞은 사람에게 충격이 약하다. 여기에 붉은 색에 맞으면 파편이 비산하는 점이 임팩트도 강하다. 문제는 잘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물론 비난용으로 사용하는 경우라면 이것도 장점이 된다. 때문에 썩은 계란과 더불어 양대 투척물로 인기를 끌고 있다.[49] 바로 전 역인 로사스 혹은 그 이전인 마니세스까지는 2존 요금을 받지만 공항은 5존 요금을 받는다. 그렇다고 먼 것도 아닌 것이 로사스 역에서 10분 가량 걷다가 고속도로 같은 큰 도로 하나만 건너면 바로 공항이다. 그런데 횡단보도가 따로 없는게 함정이다.[50] 우라칸 발렌시아(Huracán Valencia)라는 2011년에 창단된 신생 팀이 있었으나 지금은 재정문제로 파산 후 해체되어 더이상 찾아볼 수 없다.[51]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13/14시즌은 대차게 말아먹고 있다. 승격 도전은 커녕 강등권 탈출도 힘들어 보일 정도다.[52] 쌀을 많이 재배하는 지역이라 쌀 요리가 발달해 있다. 또 항구 도시다 보니 해산물도 풍부하다. 발렌시아 사람들은 빠에야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해서 아로스(arroz)라는 이름의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까딸루냐식 빠에야는 인정하지 않는다.[53] 스페인에 관심없는 사람도 '발렌시아산(産) 오렌지'라면 들어봤을 정도다.[54] 유럽인 관광객들은 주로 좀 더 본격적인 휴양도시 말라가나 라스팔마스를 더 많이 찾는 편이다.[55] 발렌시아 시에서 약 120km, 바르셀로나에서 190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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