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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dro II de Aragón | ||
가문 | 바르셀로나 왕조 | |
생몰년도 | 1178년 7월 ~ 1213년 9월 12일 | |
출생지 | 아라곤 왕국 우에스카 | |
사망지 | 툴루즈 백국 뮤레 | |
재위 기간 | 아라곤 왕국 국왕 | 1196년 - 1213년 |
아버지 | 알폰소 2세 | |
어머니 | 카스티야의 산차 | |
형제 | 콘스탄사, 알폰소 2세, 레오노라, 라몬 베렝게르, 산차, 페르디난도, 둘시아 | |
배우자 | 몽펠리에의 마리 | |
자녀 | 하이메 1세, 페드로 델 레이(사생아), 콘스탄차(사생아) | |
종교 | 기독교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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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 왕국 8대 국왕.왕호는 스페인어로는 '페드로 2세', 아라곤어로는 '페로 2세'이다.
2. 생애
1178년 7월경 아라곤 왕국의 수도 우에스카에서 아라곤 국왕 알폰소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7세의 딸 산차의 아들로 출생했다. 형제로 콘스탄사, 프로방스 백작 알폰소 2세, 레오노라, 라몬 베렝게르, 산차, 페르디난도, 둘시아가 있었다. 1196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라곤 국왕에 오른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카스티야 국왕의 딸이었던 점을 살려 카스티야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사촌인 알폰소 8세가 레온 왕국과 나바라 왕국에 대항하는 것을 지원했다.1198년, 무와히드 왕조의 봉신이 된 나바라 국왕 안초 7세가 무와히드 칼리파 야쿱 알 만수르의 부름을 받고 마그레브로 향했다. 이에 페드로 2세는 알폰소 8세와 칼라타유드에서 만나서 안초 7세가 없는 사이에 나바라 왕국을 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알폰소 8세는 1199년 페드로 2세가 보내준 병력과 합세한 뒤 가스테이스(현재 스페인 바스크 지방 알라바 주의 주도 비토리아)를 포위 공격해 1200년 1월에 공략했으며, 뒤이어 알라바, 두랑갈데와가, 기푸스코아 지방을 빼앗았다. 안초 7세는 마그레브에서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듣고 급히 귀국했지만, 무와히드 왕조가 내전에 시달리던 중이어서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기에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을 상대로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200년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의사 셰흐트 벤 아이작 벤 요셉 벤베니스테(Sheshet ben Isaac ben Joseph Benveniste)를 무와히드 왕조에 보내 카탈루냐 해안을 연이어 습격하여 황폐화시키는 바르바리 해적을 단속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응답을 얻지 못했다. 1201년에는 성 호르디 알파마 기사단을 창설해 토르토사 인근 영지를 주고 그곳을 깁간으로 삼아 무슬림에 맞서 싸우게 했다. 1204년 몽펠리에 백작 기욤 8세의 딸 마리와 결혼하여[1] 외아들 하이메 1세를 낳았다.
1210년 카탈루냐 해안을 끊임없이 침략하는 무슬림들을 무력으로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링콘 데 아데무즈로 쳐들어가 알 다무스와 카스텔파비를 공략했다. 또한 1212년 카스티야 왕국-아라곤 왕국-포르투갈 왕국-레온 왕국-나바라 왕국-성전 기사단 연합군이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무함마드 앗 나시르의 군대와 맞붙은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 참전해 기독교 세력의 완승에 기여했다.
한편, 피레네 산맥 이북의 프로방스 백작령은 페드로 2세의 형제 알폰소 2세가 관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프로방스와 그 주변 일대에 관심이 많았고, 1204년 자신과 동맹을 맺은 포르칼퀴에 백작과 갈등을 벌이는 동생을 꾸짖는 서신을 보냈으며, 1206년 몽펠리에 주민들이 아라곤 왕국의 통치에 반기를 들자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진압했다. 그러던 1209년 시몽 4세 드 몽포르[2]가 베시에와 카르카손을 공략하고 랑그도크의 영주들을 복속시키고 툴루즈, 코망주, 푸아 백국의 조공을 받는 등 위세를 떨치자, 그는 아들 하이메의 후견인을 시몽 드 몽포르로 삼기로 했다. 또한 여동생 레오노라와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약혼을 주선했다.
1213년, 시몽 4세 드 몽포르가 이단인 카타리파를 보호하는 툴루즈 백국을 응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툴루즈로 쳐들어가서 레몽 6세를 몰아냈다. 레몽 6세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은 페드로 2세는 시몽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툴루즈로 진격했다. 그해 9월 10일 뮤레에 도착한 그는 레몽 외 남부 프랑스 영주들이 이끄는 랑그도크 부대와 합세했다. 그는 툴루즈 민병대에게 뮤레 성벽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기고, 본대는 인근 언덕에 배치해 장차 뮤레 성을 구하러 오는 시몽을 상대하기로 했다.
시몽은 기병대를 이끌고 진군하던 중 적과 마주치자 기병대를 3개의 전열로 나누고 자신은 3번째 대열에 섰다. 페드로 2세는 이에 맞서 2개 대열을 편성하고 자신은 2열에서 빌린 갑옷으로 변장한 채 부하들과 함께 섰다. 이윽고 시몽의 이복형제인 바레스의 기욤이 이끄는 카타리파 십자군 선두 부대가 적 중앙 대열을 향해 달려들었고, 두 번째 십자군 대열이 뒤를 따라갔다. 아라곤-랑그도크 연합군 선두 대열은 십자군의 돌격에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십자군은 두번째 대열로 진격했다. 이와 동시에, 몽포르는 3번째 대열을 이끌고 적 좌익을 측면에서 요격해 격파한 후 적 후방을 향해 질주했다.
아라곤-랑그도크 연합군은 강력한 전투력과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이는 십자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고, 페드로 2세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전사했다. 동시대의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왕이 여기에 있다!"고 외쳤지만 적 기사들이 알아듣지 못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시몽은 2개 대열에게 적 추격을 맡긴 뒤, 자신은 포위된 뮤레로 이동해 그때까지 성을 공격하고 있던 툴루즈 민병대를 섬멸했다. 이후 아라곤 왕국은 랑그도크 일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페드로 2세의 유해는 툴루즈 수도자들에게 수습되어 인근 교회에 매장되었다가 1217년 9월 30일 산타 마리아 대 시센나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사후 5살된 아들 하이메 1세가 아라곤 왕위에 올랐다.
3. 가족 관계
- 몽펠리에의 마리(1182 ~ 1213): 몽펠리에 백작 기욤 8세의 딸.
- 하이메 1세(1208 ~ 1276): 아라곤 국왕.
- 사생아
- 페드로 델 레이(? ~ 1254): 레리다 대성당의 수도자, 하이메 1세의 공증인 및 섭정.
- 콘스탄차(? ~ 1252): 바르셀로나의 세네샬(Senescal: 최고 관리)인 라몬 2세 데 몬카다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