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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feeee><colcolor=#000000> 룩셈부르크 공작 벤첼 1세 Wenzel I von Luxemburg | |
출생 | 1337년 2월 25일 |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 | |
사망 | 1383년 12월 8일 (향년 46세) |
룩셈부르크 공국 룩셈부르크 | |
재위 | 룩셈부르크 공국의 공작 |
1354년 3월 13일 ~ 1383년 12월 8일 | |
브라반트 공국과 림부르크의 공작 | |
1355년 12월 5일 ~ 1383년 12월 8일 | |
배우자 | 잔 드 브라반트 (1352년 결혼) |
아버지 | 얀 루쳄부르스키 |
어머니 | 부르봉의 베아트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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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룩셈부르크 공국의 공작.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국왕 카를 4세의 이복형제다.브라반트 공국의 여공작 잔 드 브라반트의 남편으로서 브라반트 공동 공작을 겸하기도 했다.[1]
2. 생애
1337년 2월 25일 보헤미아 왕국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국왕 얀 루쳄부르스키와 부르봉 공작 루이 1세 드 부르봉의 딸인 베아트리스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복형제로 마르가레테[2], 보나[3], 카를 4세, 오타카르[4], 요한 하인리히[5], 안네[6], 엘리자베트[7]가 있었다.얀 루쳄부르스키가 부르봉의 베아트리스와 결혼할 때 맺은 조약에 따르면, 이 결혼에서 아들이 태어날 경우 룩셈부르크 백국과 그에 속한 토지가 아들에게 전해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346년 8월 26일 아버지가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한 뒤, 벤첼 1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바이에른 공작 루트비히 4세의 비협조로 인해 룩셈부르크 백국을 상속받지 못하고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1347년 10월 11일 루트비히 4세가 사망했고, 이복형 카를 4세가 독일 유력 제후들의 지지에 힘입어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카를 4세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한 종조부[8] 트리어 대주교 발두인이 그 대가로 룩셈부르크 백국의 주권을 행사했기 때문에, 벤첼 1세는 여전히 룩셈부르크 영주로서 통치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1354년 1월 21일 발두인이 사망하면서 비로소 룩셈부르크 백작으로 인정받았으며, 1354년 3월 13일 카를 4세에 의해 첫번째 룩셈부르크 공작으로 선임되었다. 새로운 룩셈부르크 공국은 기존의 룩셈부르크 백국에 뒤르뷔 백국, 라로슈 백국, 아를롱 변경백 및 소규모 자치령들로 구성되었다. 한편, 벤첼 1세는 1352년 브라반트 공국과 림뷔르흐 공국의 상속녀인 잔 드 브라반트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1288년 보링겐 전투 이후 쭉 이어졌던 룩셈부르크 가문과 브라반트 가문 사이의 분쟁이 종식되었다.
1356년 12월 5일 브라반트 공작 장 3세 드 브라반트가 사망한 뒤, 잔 드 브라반트의 남편 자격으로 브라반트와 림뷔르흐의 공작이 되었다. 1356년 1월 3일, 벤첼 1세는 브라반트 공국 신민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아내의 두 누이인 마르그리트, 마리와의 분쟁을 피하기 위해 <즐거운 입성(Joyeuse Entrée)> 헌장을 반포했다. 이에 따르면, 브라반트 공작은 동맹, 전쟁 선포, 영토 양도 및 조약 등 외교 정책을 위해 브라반트 주교, 대수도원장 11인, 브라반트 각지의 영주, 남작, 뢰번, 브뤼셀, 안트베르펜 시민 대표 등으로 구성된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브라반트인들 전원이 법 앞에서 평등함을 보장하고, 현행범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법 명령 없이는 체포하지 않아야 하며, 각 도시의 특권을 보장했다. 만약 공작이 이 헌장을 존중하지 않을 경우, 신민들은 공작에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는 벤첼 1세와 잔 드 브라반트 부부의 집권을 그대로 용인하지 않았다. 루이 2세는 잔의 여동생인 마르그리트와 결혼한 뒤 받기로 한 지참금 지불을 요구했지만 벤첼 1세가 거부한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브라반트와 플란데런간의 분쟁지인 메헬렌이 브라반트에게 넘어가는 대가로 지불하기로 했던 돈이 아직도 들어오지 않은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었다. 1356년 군대를 일으킨 루이 2세는 메헬렌을 접수한 뒤 브뤼셀로 진군했고, 1356년 8월 17일 슈트 전투에서 브라반트군을 격파하고 브뤼셀을 점령했다. 브라반트인들은 이에 맞서 1356년 10월 24일부터 29일까지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었다. 이후 니더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제일란트, 홀란트 백작 빌헬름 1세의 중재로 아트 평화 협약이 맺어졌다. 루이 2세는 브라반트 공국을 벤첼 1세와 잔 드 브라반트에게 돌려주는 대가로 메헬렌을 되찾고 안트베르펜을 플란데런 백국에 편입했다.
이후 벤첼 1세는 브뤼셀 궁정에 거주했고, 프랑스 궁정 문화를 도입했으며, 1368년 황실 대리인에 선임되었다. 1371년,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측에 고용되었던 대규모 용병 집단이 라인강과 뫼즈강 사이 지역을 배회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프랑스 용병들이 율리히 공국 영토에서 활동하던 브라반트 상인들을 약탈했지만, 율리히 공작 빌헬름 6세는 보상금 지급을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벤첼 1세는 복수를 결심하고, 나무르 백작 기욤 1세의 지원을 받아 율리히 공국으로 진군했다. 빌헬름 6세는 이에 맞서 헬러 공작 에두아르트 판 헬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371년 8월 22일, 아헨 바로 북쪽 마일인 바이스와일러에 도착한 벤첼 1세와 기욤 1세의 군대가 율리히 6세를 몰아붙였다. 그러던 중 에두아르트가 전장에 도착해 역공을 가해 적군을 순식간에 무너뜨렸고, 벤첼 1세와 기욤 1세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생포되었다. 그 후 벤첼 1세는 옥고를 치르다가 1372년 봄 카를 4세가 그의 몸값으로 50,000 길더를 제공한 후 풀려났으며, 황실 대리직을 포기해야 했다. 그 후 몸값을 지불한 황실에게 보상금을 바쳐야 했지만, 재정이 바닥나서 곤경에 처했으며, 룩셈부르크 내에서 폭동이 빗발쳤다.
1378년, 카를 4세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바츨라프를 룩셈부르크, 브라반트, 림뷔르흐 공국의 상속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다. 벤첼 1세는 친프랑스주의자였으며 아비뇽에 거주한 대립교황 클레멘스 7세를 지지했다. 반면 바츨라프는 잉글랜드에 우호적이었고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의 지지자였다. 그러던 1383년 12월 8일, 벤첼 1세가 지난날 옥살이를 한 여파로 사망했다.[9] 바츨라프는 룩셈부르크 공국을 상속받았지만, 벤첼 1세의 미망인인 잔 드 브라반트가 브라반트와 림뷔르흐 공국의 행정권을 이어받았다. 벤첼 1세는 생전에 잔 드 브라반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