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6 23:58:05

빌헬름 6세 폰 율리히

이름 빌헬름 6세 폰 율리히
Wilhelm VI von Jülich
출생 1327년
율리히 백국
사망 1393년 12월 13일
율리히 공국
아버지 빌헬름 5세 폰 율리히
어머니 에노의 잔
형제 게르하르트, 리차디스, 필리파, 요한나, 이사벨라
아내 마리아 판 헬러
자녀 빌헬름 7세, 레이날트 4세, 요한나
직위 율리히 공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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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율리히 공작. 저지대 국가들과 지속적으로 갈등을 벌이면서 공국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2. 생애

1327년경 율리히 백국에서 율리히 백작 빌헬름 5세 폰 율리히와 에노 백작 기욤 1세 드 에노의 딸인 잔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게르하르트[1], 리차디스[2]. 필리파[3], 요한나[4], 이사벨라[5]가 있었다.

1343년부터 공동 통치자로 선임되었지만 아버지와 갈등을 빚다가 1349년 아버지의 전제 정치에 반감을 품은 율리히 기사단의 봉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아버지를 2년간 감금했다. 그러나 민중의 반발이 거세자 1351녀에 불어줬다. 이후 수년간 질란트에 대한 율리히 공국의 소유권을 관철하려 애썼지만, 질란트를 소유한 에노 백국이 비타협적으로 나오면서 실패했다. 1361년 2월 26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율리히 공작이 되었다. 당시 헬러 공작위를 놓고 레이누드 3세 판 헬러에두아르트 판 헬러 간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그는 에두아르트를 지원해 그가 레이누드를 페위하고 헬러 공작이 되는 데 기여했다.

1371년,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측에 고용되었던 대규모 용병 집단이 라인강과 뫼즈강 사이 지역을 배회하며 약탈을 자행했다. 이때 프랑스 용병들이 율리히 공국 영토에서 활동하던 브라반트 상인들을 약탈했지만, 율리히 6세는 빌헬름 6세는 보상금 지급을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벤첼 1세는 복수를 결심하고, 나무르 백작 기욤 1세의 지원을 받아 율리히 공국으로 진군했다. 빌헬름 6세는 이에 맞서 헬러 공작 에두아르트 판 헬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1371년 8월 22일, 아헨 바로 북쪽 마일인 바이스와일러에 도착한 벤첼 1세와 기욤 1세의 군대가 율리히 6세를 몰아붙였다. 그러던 중 에두아르트가 전장에 도착해 역공을 가해 적군을 순식간에 무너뜨렸고, 벤첼 1세와 기욤 1세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하고 생포되었다. 그 후 벤첼 1세는 옥고를 치르다가 1372년 봄 이복형제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카를 4세가 몸값으로 50,000 길더를 제공한 후 풀려났다.

율리히 6세를 도와준 에두아르트는 전투 막바지에 화살을 맞고 이틀 후에 사망했으며, 폐위되었던 레이누드 3세가 복위했지만 3개월 만에 병사했다. 그 후 헬러 공작위를 놓고 에두아르트와 레이누드 3세의 이복누이인 마리아 판 헬러, 메흐텔트 판 헬러가 대립했다. 율리히 6세는 아내인 마리아를 지원했고, 메흐텔트는 이에 대항해 블루아 백작 장 2세 드 블루아샤티옹과 결혼했다. 그는 아들 빌헬름 2세를 사망한 이복형제 에두아르트의 약혼자였던 카타리나[6]와 결혼시킴으로써 하바이에른 공국과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국의 지원을 받아내고자 했다. 여기에 후크파와 대구파가 각각 메흐텔트와 마리아를 지지하며 서로 대립했다.

1372년 봄, 블루아 백작 장 2세는 벨루웨로 진군해 후크파와 연합한 후 여러 성을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이후 여세를 이어가 겔데른 시를 포위했지만 16주에 걸친 공방전 끝에 공략에 실패했다. 율리히 공작 빌헬름 6세는 이에 맞서 루르몬드, 벤로 등 헬러 공국의 상부 지역을 확보했다. 장 2세를 추종하는 후크파의 지도자 고스윈 폰 바릭이 티엘을 공략했지만, 곧 율리히 공작에게 패퇴했다. 이후 빌헬름 6세는 위트레흐트를 침공해 아메롱겐, 도른, 자이스트 등지를 약탈했고, 장 2세는 이에 대응해 잘트보멜을 공략하고 도시를 철저하게 약탈했다.

1373년, 아르눌트 판 호른이 메흐텔트를 위해 하르데르베이크를 공략했다. 1373년 2월 6~9일 양측간의 평화 회담이 게르트루이덴베르크에서 열렸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1374년, 레이누드 1세 판 브레데로데가 메흐텔트를 위해 티엘을 수복했다. 1347년 4월 28일, 슈트탈렌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헬러 공국은 두 부분으로 분할되기로 했다. 라인 강 우측 지역과 발강 북쪽 지역은 메흐텔트가 소유하고, 라인강 좌측과 발강 북쪽 지역은 마리아가 소유하기로 했다. 단, 메흐텔트가 상속인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 율리히 공국에게 계승되기로 했다. 그러나 양자 모두 이 합의에 만족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 이어갔다.

1377년 4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개입했다. 그는 마리아와 빌헬름 6세의 아들인 빌헬름 7세가 이제 성인이므로 그에게 헬러 공국을 다스릴 권한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과 척질 생각이 없었던 블루아 백작 장 2세는 내전에 더이상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메흐텔트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후크파의 지원에 힘입어 항전을 이어갔다. 1378년 4월 18일, 티엘의 후크파가 마리아를 지지하는 대구파가 교회에서 통행세 징수소로 가려 할 때 습격해 집단 학살했다. 이 사건은 '사악한 부활절(kwade Paasdag)' 사건으로 일컬어졌다.

1378년 10월 19일, 대구파가 후크파의 지도자 레이누드 1세 판 브레데로데의 본거지인 겐넵 성을 포위해 한 달만에 함락하고 파괴를 자행했다. 1379년, 대구파는 여세를 이어가 젠와인 마을을 점거하고 교회와 수도원을 포함해 모든 건물을 파괴했다. 그해 2월 23일, 티엘의 통행료 징수소가 빌헬름 7세의 군대에 의해 점거되었다. 그리고 3월 24일, 메흐텔트가 이끄는 군대가 회네펠 전투에서 빌헬름 7세의 기습 공격으로 참패했다. 결국 메흐텔트는 더 이상의 항전은 소용이 없다고 판단하고 헬러 여공작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고, 여공작 칭호를 계속 쓰는 것도 허락받았다.

이리하여 헬러 공작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한 뒤, 율리히 6세는 카를 4세가 정한 대로 헬러 공작위를 빌헬름 7세에게 맡기고 본인은 율리히 공국을 계속 다스렸다. 1393년 12월 13일에 사망했다.

3. 가족



[1] 1325 ~ 1360, 베르크 백작 및 라벤스베르크 백작.[2] ? ~ 1381, 마크 백작 엥겔베르트 3세의 부인.[3] ? ~ 1390, 하인스베르크 영주이자 룬 백작 고트프리트 3세의 부인[4] ? ~ 1367, 이젠부르크 백작 빌헬름 1세의 부인[5] ? ~ 1411, 켄트 백작 존[7]의 부인.[6] 하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인 알브레히트 1세의 장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