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세기 종교 개혁 주요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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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령(統一令, Act of Uniformity)[1]은 잉글랜드 왕국 내의 국교회의 의식과 전례를 통일시킨 법령이다. 에드워드 6세 시기인 1549년과 1552년 2차례의 통일령이 반포되었고, 1559년 엘리자베스 1세의 주도로 통일령이 반포되었으며, 왕정복고 후인 1662년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폐지되었던 통일령이 부활했다. 1974년 잉글랜드 국교회 총회 조치로 폐지되었다.2. 1549년 통일령
153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카탈리나와의 결혼 무효를 좀처럼 허락해 주지 않는 교황청과 결별하고 잉글랜드 국교회의 독립을 선포하고, 잉글랜드 국왕이 잉글랜드 국교회의 수장이라는 내용의 수장령(首長令, Acts of Supremacy)을 발령했다. 하지만 영국 국교회는 루터교나 기타 개신교와는 달리, 신학 관련 이견 때문이 아니라 그저 국왕의 이혼 문제 때문에 교회의 독립을 선포했을 뿐인지라 기도나 의식, 전례 등은 기존 가톨릭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2][3]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가 사망한 뒤, 9살의 에드워드 6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어린 왕을 대신해 국정을 책임진 호국경을 역임한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는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자신의 영적 지도자인 토머스 크랜머에게 깊은 영향을 받아서 잉글랜드 국교회에서 가톨릭 색채를 좀 더 빼내고 개신교 교리를 수용하기로 했다. 그해 8월, 위원 30명이 잉글랜드 교회를 순방해 국법으로 금지된 가톨릭 의례를 행하는 교회를 처벌하고, 숭배나 헌신의 대상으로 남용된 성상을 철거하도록 했으며, 성모 마리아 상 위에 놓는 양초를 불법화했고, 묵주기도를 하는 것 역시 비난받았다.
이 명령은 1547년 가을에 전국적으로 성상 파괴의 물결을 일으켰다. 에드워드 시모어의 명령은 숭배나 헌신의 대상으로 남용된 성상만을 비난했지만, 사람들은 모든 성상과 유물의 파괴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스테인드글라스, 신사, 조각상, 성좌는 훼손되거나 파괴되었고 성인을 묘사한 그림이 그려졌던 교회 벽은 하얗게 칠해진 뒤 우상 숭배를 비난하는 성경 구절이 그 위에 적혔다. 전통 교리를 최대한 수용하기를 바랐던 보수파 주교 에드먼드 보너와 스티븐 가디너는 이에 항의했다가 둘 다 체포되어 플릿 감옥에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1547년 11월에 소집된 의회는 헨리 8세 치세 동안 전통 종교를 보호하기 위해 통과되었던 법률을 폐지하기 시작했다. 우선, 1539년 토머스 하워드의 주도로 제정되었던 전통적인 교리를 확인하는 내용의 6개 조항법이 폐지되었고, 성체성사에서 예수의 실체적이고 물리적인 현존을 부인하는 것이 비범죄화되었다. 또한 이단법도 폐지되어 종교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었으며, 12월 평신도가 빵과 포도주 두 가지 종류로 성찬을 받는 것을 허용하는 <성찬법>이 통과되었다. 1548년 1월 18일, 추밀원은 캔들마스에 촛불을, 재의 수요일에 재를, 종려주일에 종려나무 가지를 사용해야 한다는 법안을 폐지했다. 2월 21일, 추밀원은 모든 교회 이미지를 제거하라고 명령했다.
이렇듯 잉글랜드에서 전개되는 교회 개혁을 확고히 하기 위해, 토머스 크롬웰의 주도로 공통 기도서[4]가 집필되었다. 그동안 라틴어로만 진행되던 예배가 본격적으로 영어로 진행되었고, 요크 전례, 헤레퍼드 전례 등 여러 지역 라틴어 전례를 영어 전례로 대체했다. 기도서에는 일일 사무실, 일요일 및 축일의 성경 낭독, 친교, 공개 세례, 확인, 결혼, 병자 방문, 매장, 여성 정화 및 성 수요일을 위한 예배에 관한 조항이 있었고, 서품 예배를 위한 서품서는 1550년에 추가되었다.
기도서는 전통적인 전례력의 계절 또는 임시 달력을 거의 변경 없이 보전했다. 교회 연도는 대림절로 시작하여 성탄절과 주님 공현 대축일로 이어졌다. 사순절은 재의 수요일로 시작해 성주간, 부활절, 승천절, 성령강림절, 삼위일체 주일로 이어졌다. 기도서에서는 1544년에 공식적으로 공인된 최초의 영어 예배인 면서와 연도를 사용했고, 이 예배가 열리는 날에 성찬식을 거행하게 했다. 또한 기도서에는 해당 날짜에 적합한 기도문과 성경 낭독이 있는 성인 달력 또는 성소 기도가 포함되었지만, 성인의 날은 181일에서 25일로 줄어들었으며, 모든 성인의 날을 제외하고 신약 시대의 성인만 기념되었다. 승천 대축일과 성체 성혈 대축일과 같은 다른 축일은 제거되었다. 토머스 크랜머는 성인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중재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지만, 성인 자체에 기도하는 것은 반대했기에, 성인을 부르는 기도문을 성인만을 기리는 새로운 기도문으로 대체했다. 이 기도서에 따라 기념될 성인과 기념일 목록은 아래와 같다.
1월: 그리스도의 할례 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바울로의 회심.
2월: 성모 마리아와 마티아의 정화.
3월: 수태고지.
4월: 복음사가 성 마르코.
5월: 사도 필립보와 소야고보.
6월: 바르나바, 세례 요한의 탄생, 베드로.
7월: 마리아 막달레나와 대야고보.
8월: 사도 바르톨로메오.
9월: 마태오와 미카엘과 모든 천사.
10월: 루가, 사도 시몬, 유다 타대오.
11월: 모든 성인 대축일과 사도 안드레아.
12월: 사도 토마스, 스테판, 사도 요한, 그리고 무고한 아이들의 날.[5]
2월: 성모 마리아와 마티아의 정화.
3월: 수태고지.
4월: 복음사가 성 마르코.
5월: 사도 필립보와 소야고보.
6월: 바르나바, 세례 요한의 탄생, 베드로.
7월: 마리아 막달레나와 대야고보.
8월: 사도 바르톨로메오.
9월: 마태오와 미카엘과 모든 천사.
10월: 루가, 사도 시몬, 유다 타대오.
11월: 모든 성인 대축일과 사도 안드레아.
12월: 사도 토마스, 스테판, 사도 요한, 그리고 무고한 아이들의 날.[5]
달력에는 현재 성서 일과라고 불리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는 각 예배에서 읽어야 할 성경의 부분을 지정했다. 모든 사람이 성경에 익숙해지길 희망했던 크랜머는 회중이 1년 안에 성경 전체를 읽기를 원했다. 일일 기도의 성경 독서는 일정 기간 성경을 차례대로 읽는 관행인 '렉시오 콘티누아(Lectio continua)'를 따르도록 했다. 일일 기도는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로 축소되었고,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 그리고 매달 연속해서 읽히는 시편에 대한 엄격한 성경적 독서 순환을 준수하도록 했다. 아침 기도에서는 구약을 독서한 후 테 데움(Te Deum)[6] 또는 베네딕테(Benedicite)[7]를 불러야 하며, 신약을 독서한 다음에는 베네딕투스(Benedictus)[8]를 부르도록 했다. 저녁 기도에서는 마니피캇(Magnificat)[9]과 눈크 디미티스(Nunc dimittis)[10]를 부르도록 했다.
공통 기도서는 성체성사 예식에도 변화를 줬다. 돌 제단, 예복 등 전통 예식을 대체로 보전했지만, 가톨릭의 미사에서 예수의 희생을 강조하던 것을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와 영적 친교를 위한 개신교 예배로 대체되었다. 성체 변화와 성체 숭배의 개념은 억제되었고, 사제는 회중에게 등을 돌리던 관례 대신 회중을 마주한 채 행사를 집행하게 되었다. 또한 예배는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진행되었고, 평신도는 두 가지 종료의 성찬을 자주 받아 참여하도록 권장되었다. 또한 성찬식은 봉헌된 빵과 포도주를 높이 들지 않고 거행되었으며, 전통 미사에서 사제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희생과 명백히 동일시했던 것과는 달리 기도서에서는 교회가 드리는 감사 기도가 십자가에서 예수의 희생과 동일하지 않다고 명시했다. 이제 성찬례는 단순히 예수의 희생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받는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했다.
가톨릭은 세례가 구원에 필수적이라고 간주했지만, 크랜머는 세례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는 않으며,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된 선택으로 결정된다고 봤다. 다만 세례는 일반적으로 필요하며, 세례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유아세례를 무조건 받아야 한다는 전통 교리와는 달리, 크랜머는 유아가 선택받은 자 중 한 명이라면 세례를 받지 않고 죽어도 아이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봤다. 그리고 회중은 공개 장소에서 행해지는 자신의 세례를 관찰하고 기억할 수 있으며, 긴급할 때는 집에서 개인적으로 세례를 베푸는 걸 허용했다. 세례 방식은 전통적인 형식과 성사적 성격을 유지하되 거추장스러웠던 의식을 단순화했다.
이렇듯 전통 교리의 구조를 상당 부분 계승하면서도 개신교도들에게 미신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단순화하거나 배제한 공통 기도서는 1549년 1월 21일에 의회에서 통과된 통일법에 따라 유일한 합법적 예배 형태로 채택되었다. 통일법에 따르면, 잉글랜드, 웨일스, 칼레 및 그 변경 지역 내의 모든 성당이나 교구 교회 또는 기타 장소에 있는 모든 목사는 공통 기도서에 따라 예배를 집행하고 예식을 행해야 하며, 공통 기도서를 사용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설교나 발언을 하는 성직자들에 대해서는 초범은 벌금형 또는 6개월 징역형에 처하고, 재범은 1년간 징역을 받고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며, 세 번째로 위반하면 종신형에 처한다고 규정되었다. 또 다른 의회법은 사제가 독신을 고수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결혼하는 걸 허용한다고 명시했다.
1549년 통일령은 잉글랜드 전역의 예배를 획일적으로 만듬으로써, 여러 기독교 분파로 분열한 교회를 통합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의 반발이 거셌다. 1548년 콘월에서 에드워드 시모어의 개신교 위주 종교 정책에 반발하는 첫 번째 가톨릭 신도 봉기가 일어났고, 이듬해에 잉글랜드 전역에 퍼졌다. 잉글랜드 서부에서는 성직자와 시민 모두 성상 파괴에 저항하여 정부 관리를 살해했고, 직공들은 목초지를 표시하는 울타리를 파괴했다. 1549년 6월에는 엑서터가 반군에게 포위되었다.
추밀원은 에드워드 시모어에게 조속히 군대를 보내 진압하라고 촉구했지만, 에드워드 시모어는 수많은 사람이 살해되어서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는 걸 바라지 않아 망설였다. 나중에 노샘프턴 후작 윌리엄 파 휘하의 토벌대를 보내기는 했지만, 병력이 너무 적어서 반란군을 진압할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새로운 반란이 일어났고, 노리치가 반군에게 함락당했다. 에드워드 시모어는 고심 끝에 반군과 협상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는 반란군에게 사면을 제안하고, 불만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의회를 소집하기로 했으며, 구역 폐쇄를 조사할 새로운 위원회를 선임했다. 하지만 협상은 잘 이뤄지지 않았고, 워릭 백작 존 더들리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반군 진압을 대신 맡았다. 결국 8월 27일, 잉글랜드 서부의 반란은 유혈 진압되었다.
한편, 개신교 진영에서도 공통 기도서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들은 공통 기도서가 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제대로 수정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마르틴 부처는 기도서의 문제점을 60가지나 지적했고, 이탈리아의 개신교 신학자 페트로스 마테르 베르밀리는 가톨릭 교리서에서 별로 바뀌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여기에 보수적인 성직자들이 통일령의 허점을 이용해 새로운 전례를 가능한 한 옛 라틴 미사와 비슷한 형태로 거행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당국은 좀 더 확고한 통일령을 반포할 필요성을 느꼈다.
3. 1552년 통일령
1550년 에드워드 시모어가 실각한 뒤 새로운 권력자가 된 존 더들리는 유럽 대륙에서 전파된 복음주의 개신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존 후퍼와 존 포넷 등 개신교 설교자들을 주교로 승진했다. 그는 1548년에 발간된 공통 기도서에 미흡한 점이 많다고 여기고, 토머스 크랜머에게 기도서를 개정해달라고 의뢰했다. 때마침 루터교회의 신학에 점점 더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던 크랜머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먼저 1549년 후반에 캔터베리 총회에서 공통 기도서와 관련된 여러 문제를 논의했고, 마르틴 부처와 페트로스 마테르 베르밀리의 비판을 검토했다. 여기에 1549년 공통 기도서에 대한 로마 가톨릭적 해석을 제시한 스티븐 가디너의 "진정한 가톨릭 신앙에 대한 해설과 주장"을 접수한 뒤, 가디너가 승인한 요소들을 제거해 기도서를 더욱 개신교적으로 만들었다.1552년 4월, 의회는 크랜머가 완성한 개정판 공통 기도서를 채택하기로 하고,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예배부터 시행하기로 결의했다. 1552년 기도서는 1549년 판과 달리 사람과 사물의 축복과 퇴마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는 많은 전통적인 성례와 의식을 폐지했다. 세례 예식을 할 때 유아는 더 이상 퇴마 예식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세례, 성직 안수, 병자 방문 예식에서는 더 이상 기름 부음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은 의식이나 사물에 대한 신뢰보다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도록 변형되었다.
전례력은 1549년 공통 기도서와 거의 변함이 없었지만, 1552년 기도서에서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 세 명의 성인(성 조지, 캔터베리의 로렌스, 클레멘스 1세)을 다시 기리게 했다. 또한 본래 베드로의 해방을 기념했지만, 잉글랜드에서는 농업 축제였던 라마스의 날은 1549년 기도서에서는 빠졌지만 1552년 기도서에서 다시 도입되었고, 마리아 막달레나의 축일은 달력에서 제거되었다. 이 기도서에서 기념되는 성인과 축일 목록은 아래와 같다.
1월: 그리스도의 할례 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 바울로의 회심.
2월: 성모 마리아와 마티아의 정화.
3월: 수태고지.
4월: 성 조지와 복음사가 성 마르코.
5월: 사도 필립보와 소야고보.
6월: 바르나바, 세례 요한의 탄생, 베드로.
7월: 대야고보.
8월: 라마스 데이, 캔터베리의 로렌스, 사도 바르톨로메오.
9월: 마태오와 미카엘과 모든 천사.
10월: 루가, 사도 시몬, 유다 타대오.
11월: 모든 성인 대축일과 클레멘스 1세, 사도 안드레아.
12월: 사도 토마스, 스테판, 사도 요한, 그리고 무고한 아이들의 날.
2월: 성모 마리아와 마티아의 정화.
3월: 수태고지.
4월: 성 조지와 복음사가 성 마르코.
5월: 사도 필립보와 소야고보.
6월: 바르나바, 세례 요한의 탄생, 베드로.
7월: 대야고보.
8월: 라마스 데이, 캔터베리의 로렌스, 사도 바르톨로메오.
9월: 마태오와 미카엘과 모든 천사.
10월: 루가, 사도 시몬, 유다 타대오.
11월: 모든 성인 대축일과 클레멘스 1세, 사도 안드레아.
12월: 사도 토마스, 스테판, 사도 요한, 그리고 무고한 아이들의 날.
아침과 저녁 기도의 순서는 죄에 대한 공동 고백과 일반적인 사면을 포함하는 회개 부분을 시작 부분에 포함해 확장되었지만, 본문은 저녁에도 사용하도록 규칙서에 지시된 아침 기도에만 인쇄되었다. 1549년의 성경 낭독의 일반적인 패턴은 유지되었지만, 특정 축일의 아침과 저녁 기도에 대해 구약과 신약의 별도의 낭독이 지정되었다. 1552년 기도서가 출판된 후, 1553년에 개정된 영어 입문서가 출판되어 평신도의 가정 경건에 맞게 성무일과 아침과 저녁 기도, 그리고 다른 기도문이 각색되었다.
1552년 공통 기도서는 1549년 기도서의 많은 전통적인 요소를 제거해 성찬식을 더욱 개혁적인 방향으로 전환했다. 예배의 이름에서 미사라는 단어가 빠지고 "주님의 만찬 또는 성찬식 집례"로 변경되었다. 돌 제대는 성가대나 본당에 배치된 성찬상으로 교체되었고, 사제는 북쪽에 서 있었다. 1549년 기도서는 전통적인 미사 예복을 입는 게 허용되었지만, 1552년 공통 기도서에서는 예복 대신 수플리스[11]를 입어야 했다. 그리고 성찬식 때 예수는 영적으로 현존하지만, 육체적으로는 현존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1552년 기도서에서는 사제가 십계명을 낭송하도록 지시했고, 사제가 각 계명을 낭송한 뒤 회중은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이 법을 지키도록 우리 마음을 기울여 주십시오."라고 응답하도록 했다.
1549년 기도서와는 달리, 1552년 기도서에서는 빵과 포도주의 봉헌이나 축복은 없었고, 사제는 성찬 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도록 기도했다. 이 기도 후, 제정의 말씀이 낭송되었고, 성찬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다만 무릎을 꿇는 것에 대한 일각의 반대가 제기되었다. 존 녹스는 성찬례 참석자들이 사제 앞에서 무릎을 꿇는 건 우상 숭배라고 주장했다. 이에 토머스 크랜머는 이 예법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존 더들리 정권은 이 문제를 놓고 고심한 끝에, "무릎을 꿇고 예배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다"라는 내용으로 개정하기로 결의했다.
1552년 기도서는 1549년 기도서에서 시작된 유아세례 예식을 간소화하는 과정을 더 진행했다. 1549년 예식은 교회 문에서 시작하여 세례반으로 옮겨졌지만, 1552년 예식은 전적으로 세례반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하나님이 아이를 유아 세례를 통해 받아주신다는 주제는 마르코 복음서 10장을 낭독과 목사의 권고로 이어졌는데, 이는 유아 세례에 반대하는 재침례파의 가르침을 배척하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아이는 1549년 기도서에서처럼 물에 세 번 담기지 않고 한 번 담겼으며, 1549년 기도서와는 달리 성유로 기름을 바르지 않고 흰 성유 옷을 입지 않았다.
1553년 7월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가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내세운 존 더들리를 물리치고 잉글랜드 여왕이 되었다. 메리 여왕은 1552년 통일령을 폐지하고, 잉글랜드 교회를 교황청과 가능한 한 빨리 연합하려 했다. 이에 따라 라틴어만이 사용되는 미사가 재설립되었고, 제단, 성화, 성인상이 복원되었다. 1552년 공통 기도서에 따른 예배는 비밀 예배와 몇몇 스코틀랜드 교구에서만 시행되었고, 공통 기도서의 저자 토머스 크랜머는 1556년 3월 21일에 화형당했다.
4. 1559년 통일령
1558년 11월, 메리 1세가 사망하고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메리 1세 치세 때는 숙청을 피하려고 자신을 가톨릭 신자로 내세웠고, 메리 1세가 주관하는 미사에 종종 참여했지만, 내심 잉글랜드 국교회를 신봉했다. 그녀는 왕위에 오른 뒤 외국 가톨릭 관찰자들의 경각심을 피하고자 처음에는 "현재 우리 영토 내에 확립된 모든 질서나 관습을 위반, 변경 또는 변경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반포했다. 그러나 본심은 잉글랜드 국교회를 재건하는 데 있었다. 여왕의 수석 고문으로 온건한 개신교도인 윌리엄 세실이 임명되었고, 추밀원은 에드워드 6세 치세 때 활동했던 정치인들로 채워졌고, 궁정 설교자는 개신교 신자로 채워졌다.1558년 성탄절 미사 시작 전, 여왕은 미사 집전자이자 칼라일 주교인 오웬 오글소프에게 성체를 높이 들지 말라고 지시했다. 오웬 오글소프 주교가 이를 거부하자, 여왕은 축성식 전에 성당을 떠났다. 이는 그녀가 가톨릭의 성체 변화 교리를 믿지 않는다는 걸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1559년 1월 15일 대관식을 치른 뒤 1월 25일 의회 개회식을 위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향하던 여왕은 촛불을 든 수도자들을 이끈 페켄햄 수도원장의 환영을 받았지만, 수도자들에게 "횃불을 치워라. 우리가 잘 보고 있다."라며 촛불 행렬을 가톨릭의 미신으로 여긴다는 뜻을 드러냈다.
1559년 1월 여왕의 첫 의회가 열렸을 때, 하원은 수장령을 회복하는 종교 개혁 법안, 에드워드 6세 시기에 제정된 서품식 법안, 그리고 약간 수정된 1552년 공통 기도서를 통과했지만, 전부 가톨릭 신자인 주교 20명이 참석한 상원은 이를 거부하고 교황을 교회의 수장으로 받들고, 성체 변화를 고수하며, 희생 제물로서의 미사를 확언했다. 결국 하원이 통과했던 법안은 대부분 수정되었다. 서품식과 기도서 조항은 폐지되었고, 양형 성찬을 허용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메리 1세에 제정된 종교법이 변경되지 않았다. 교황의 권한은 제거되었지만, 여왕에게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대신 단지 여왕이 직접 채택할 수 있다고만 명시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상원이 농간을 부린다고 여기고 법안 승인을 거부하고 1559년 4월 의회를 재소집했다. 이때 추밀원은 새로운 법안 2개를 도입했는데, 하나는 수장령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신교 전례에 관한 것이었다. 추밀원은 적어도 두 법안을 분리함으로써 수장령이 통과되기를 바랐다. 1559년에 제시된 수장령은 교황이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 군림하는 건 금지되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최고 수장이 아닌 '최고 통치자'(Supreme Governor)로 규정했다. 1534년 헨리 8세가 반포한 수장령에서 명시된 '최고 수장'(supreme head)이 아니라 최고 통치자라는 표현을 쓴 것은, 국왕이 에베소서에서 교회의 수장으로 언급된 예수보다 더 높은 지위를 누리는 신성모독을 범한다는 비난을 피하려는 조치였다.
여기에 두 종류의 성찬을 받을 수 있는 허가가 포함되었으며, 메리 1세가 부활시킨 이단법을 폐지했다. 다만 성경, 초기 회의 총회, 그리고 미래의 의회에 반하는 의견만 교회 위원들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하도록 해, 가톨릭 신자들이 어느 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다고 여기도록 했다. 또한 잉글랜드에서 공직이나 교회 직책을 맡은 모든 사람은 잉글랜드 국교회의 최고 통치자인 군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규정했으며, 맹세하지 않는 것을 불경죄를 범한 것으로 보아 해임 처분을 내렸다. 수장령은 하원을 쉽게 통과했고, 상원에서는 주교 20인 전원이 반대표를 던졌지만, 세속 귀족 대부분이 찬성하면서 통과되었다.
뒤이어 추밀원이 제시한 개신교 전례로 되돌리기 위한 통일령은 상원에서 수장령보다 더욱 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 법안을 어떻게든 통과시키기 위해 링컨의 토머스 왓슨 주교와 윈체스터의 존 화이트 주교를 반역을 꾸민 혐의로 체포해 런던 탑에 가두고 개신교 성향 주교로 교체했으며, 더럼의 주교 커스버스 턴스톨이 고령이라는 이유로 참석을 면제했으며, 세인트 아사프의 토머스 골드웰 주교를 의회에 소환하지 않았다. 그 결과, 통일령은 상원에서 불과 3표 차로 통과되었다.
통일령은 일요일과 축일에 교회 참석을 의무화했고, 참석하지 않는 날마다 12펜스(약 3일 치 임금)의 벌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1552년 공통 기도서를 다시 채택하되, 가톨릭 신자들의 반발을 예상해서 상당한 수정을 가하기로 했다. 먼저, 1552년 공통 기도서에서 성찬식에 삽입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었던 검은색 표식을 제거하기로 했다. 1552년 기도서의 연찬 기도문은 "로마 주교와 그의 모든 혐오스러운 극악무도한 행위"를 비난했는데, 1559년에 채택된 공통 기도서에선 교황에 대한 이러한 비난을 삭제했다. 그리고 1552년 기도서에서 성찬을 위해 무릎을 꿇는 것이 성체 조배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명한 검은 규정(Black Rubric)도 삭제했다.
통일령은 성직자들이 여왕이 별도로 명령을 내릴 때까지 "에드워드 6세 통치 2년 차에 의회의 권한으로 사용되던 장식을 사용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잉글랜드 사제들은 에드워드 6세 통치 2년차 기간에 전통적인 가톨릭 예복을 입고 라틴어로 미사드렸다. 그러나 첫 번째 공통 기도서를 승인한 1549년 통일법이 1월에 통과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1549년 기도서의 조항에 따라 알브(Alb, 장백복), 코프(Cope, 망토), 샤주블(Chasuble, 장백의와 영대 위에 입는 전례복)만 입어야 했다.
1559년 공통 기도서의 가장 중요한 개정은 1549년 기도서에서 성찬식 빵과 포도주를 집전하는 데 필요한 말씀을 1552년 기도서의 말씀에 추가하는 방식으로 성찬 예배를 변경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빵을 받을 때, 그들은 사제로부터 아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당신을 위해 주어졌으니, 당신의 몸과 영혼을 영원한 생명으로 보존하십시오.(1549년 기도서) 이것을 받아먹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해 죽으셨음을 기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그분을 먹으십시오.(1552년 기도서)"
이러한 조합은 성체성사에서 예수가 영적 및 육체적으로 빵과 포도주에 실제로 현존한다고 믿는 이들의 믿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를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수의 희생을 기념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었다. 이렇듯 1559년 공통 기도서는 가톨릭 진영과 개신교 진영의 의견을 절충하는 형태였지만, 대체로 개신교 성향인 여왕의 뜻에 따라 개신교 교리 위주로 작성되었다.
1559년 통일령 이후 개신교가 잉글랜드 국교회를 주도했지만, 가톨릭 사제와 전통을 중시하는 평신도가 다수를 차지한 교구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미사를 여전히 드렸고, 성인상을 보존했고, 묵주 기도를 바쳤고, 축일, 금식, 관습을 준수하면서 가톨릭 신앙을 꿋꿋이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당국의 압력과 스페인 등 해외 가톨릭 국가들의 잉글랜드 침공 위협이 가시화된 것에 대한 잉글랜드인들의 반감이 고조되면서 입지가 약화했다.
강경파 가톨릭 신자들은 잉글랜드 국교회 예배에 참석하길 거부하고, 국교회와 완전히 분리된 지하 가톨릭 집단을 형성하고 당국에 저항했다. 윌리엄 세실, 프랜시스 월싱엄을 비롯한 엘리자베스 1세의 측근들은 이들을 반역자(recusants)로 간주하고 혹독하게 탄압했다. 반면에,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는 국교회 내 친 가톨릭 성향 신자로 전환되었다. 즉, 외적으로는 국교회에 순응하지만 내적으로는 가톨릭 신앙을 유지했다. 부유한 교회 가톨릭교도들은 교구 교회에 참석했지만, 집에서 미사드리거나 두 명의 사제를 고용하여 한 명은 기도서 예배를, 다른 한 명은 미사를 집전했다. 이들은 훗날 성공회에서 고교회 집단을 형성했다.
한편, 대부분의 개신교도는 이 타협안을 받아들였고, 국교회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했다. 그러면서도 교회 예식이 좀 더 개신교 쪽으로 진행되도록 힘썼다. 이들은 로버트 세실, 프랜시스 월싱엄, 로버트 더들리, 엠브로즈 더들리, 월터 밀드메이 등의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 국교회를 주도했고, 훗날 성공회에서 저교회 집단을 형성했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교회 개혁이 덜 이뤄졌다며 실망을 표했고, 더욱 철저하고 일관된 종교 개혁을 주장하는 청교도 집단을 형성했다. 그들은 분리주의자가 되어 지하 교회를 세웠지만, 캔터베리 대주교 존 휘트기프트 등이 엘리자제스 1세의 후원하에 집행한 강력한 박해에 시달렸다.
5. 1662년 통일령
1650년 9월 27일, 급진적인 청교도 신자 올리버 크롬웰이 주도하는 잉글랜드 연방은 왕정을 폐지한 뒤 통일령을 수장령과 더불어 폐지했다. 그러다가 1660년 왕정복고가 이뤄지면서 영국 국왕으로 등극한 찰스 2세는 통일령을 부활하는 걸 검토했다.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 고위 성직자들은 1559년 기도서 전례로의 복귀를 원했지만, 살아남은 청교도들은 기도서와 잉글랜드 연방 이전의 다른 성공회 관행의 부활을 막으려 했다. 1661년 사보이 궁전에서 열린 회의에서, 성공회 측은 1559년 기도서의 개정안을 제출했는데, 이는 가톨릭과 개혁 개신교 관행 사이의 '중도의 길'로 홍보되었다. 회의는 청교도들에게 몇 가지 양보를 한 채 끝났는데, 여기에는 결혼식장에서 결혼반지를 삭제하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것과 새로운 기도서의 제작을 장려하는 것이 포함되었다.이후 의회는 청교도와 다른 비국교도가 공직을 맡는 것을 막고 대중 예배가 공식적으로 승인된 성공회 문서에 따라 진행되게 하려고 클래런던 법전으로 알려진 일련의 4개 법률을 통과했다. 클래랜던 법전은 찰스 2세의 수석 장관이었던 초대 클래런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의 작위 명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그중엔 1662년 5월 19일에 반포된 통일법도 있었다. 이 법령에 따르면, 사도 바르톨로메오의 날인 8월 24일까지 1559년 공통 기도서를 사용하며, 이후에는 1662년에 최종 확정된 개정판 기도서를 사용해야 했다. 이 기도서 사용을 거부하는 자들은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이윽고 8월 24일이 되자, 약 1,200~2,000명의 청교도 성직자가 성직에서 추방되었다. 1664년에 반포된 비밀결사법은 16세 이상이 1662년 기도서에 따르지 않은 예배에 참석하면 처벌을 내리도록 규정했다.
1662년 공통 기도서는 수백 년간 통일령의 비호 아래 성공회의 기본 교리서로 군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공회를 받들지 않는 자들을 공직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지나치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고, 19세기 내내 기도서를 개정하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이어졌다. 1850년대와 1860년대에는 개정안을 담은 팸플릿이 수십 권 발행되었지만, 공식적인 효력은 없었다. 잉글랜드 국교회 내부에서도 기도서를 개정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제임스 1세를 암살하려던 '화약 음모'가 실패된 것을 감사하는 기도문을 삭제하고 군주의 즉위 일을 기념하는 총회 기도문을 삽입하는 데 그쳤다.
1872년, 통일령 개정법이 의회에서 통과되었다. 이에 따르면, 주중에 드리는 아침기도와 저녁 기도를 단축하는 게 허용되었고, 특별한 경우에 일반 총회에서 승인한 특별 예배 형식은 성서나 1662년 공통 기도서에 포함되지 않은 찬송가나 성가를 허용하며, 정규 예배 외에 일요일 및 공휴일에 드리는 추가 예배 형태는 총회의 승인하에 집행될 수 있으며, 아침기도, 기도문, 성찬식을 별도의 예배로 다양한 순서로 사용할 수 있으며, 기도서에 명시된 일반적인 기도나 예배 없이 설교나 강의를 하는 것도 허용되었다. 또한 1877년 성공회 공의회가 소집되어 1662년 기도서의 구두점을 개선하기 위해 15년간 진행되었지만 결국 별다른 조치가 내려지지 않았다.
1974년 12월 12일, 잉글랜드 국교회 총회는 성공회를 믿지 않는 이들의 공직 임용을 금지하는 1559년 통일령과 1662년 통일령을 시대착오적이며 다른 교회 간의 협력을 저해한다고 간주하고 폐지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이리하여 통일령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6. 관련 문서
[1] Act는 본래 법으로 번역되기 때문에 통일법으로 번역되어야 하지만, 워낙 통일령이라는 표기가 굳어져 본 문서도 그렇게 표기한다.[2]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었다. 루터교회나 칼뱅교회 등 개신교에서 좋은 점은 따오기도 했다.[3] 이 때문인지 개신교 중에서는 가톨릭과 의식이나 전례 등이 유사한 편이다.[4] 전체 제목은 <잉글랜드 국교회 도입 이후 교회의 공동 기도와 성사 집행, 그리고 기타 의례와 의식에 관한 책>(The Book of the Common Prayer and Administration of the Sacraments, and other Rites and Ceremonies of the Church after the Use of the Church of England)이다.[5] 헤로데 대왕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된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기리는 날.[6] 암브로시오 또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찬가.[7] 가톨릭 교회의 시간 전례에서 쓰이는 찬가.[8] 루가 복음 1장 68~79절에 등장하는 찬가.[9] 루가 복음 1장 46~55절의 본문에서 따온 찬가.[10] 루가 복음 2장 29~32절의 본문에서 따온 찬가.[11] Surplice. 흰색 리넨이나 면 소재의 튜닉 형태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수도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