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D8D6D0><colcolor=#000000> 초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 Robert Dudley, 1st Earl of Leiceste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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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로버트 더들리 (Robert Dudley) |
| 출생 | 1532년 6월 24일 |
| 사망 | 1588년 9월 4일 (향년 56세) |
| 잉글랜드 왕국 옥스퍼드셔주 콘버리 | |
| 배우자 | 에이미 롭사트 (1550년 결혼 / 1560년 사망) |
| 레티스 놀리스 (1578년 결혼) | |
| 자녀 | 로버트(사생아) |
| 아버지 | 제1대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 |
| 어머니 | 제인 길포드 |
| 형제 | 헨리, 토마스, 존, 엠브로즈, 헨리, 길포드[1], 메리, 찰스, 캐서린, 탬퍼런스, 마거릿, 캐서린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튜더 왕조 마지막 국왕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 활동한 정치인, 군인. 초대 레스터 백작.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으로서 당대 잉글랜드 국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유명하다.2. 생애
2.1. 초년기
1532년 6월 24일, 미래의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와 헨리 8세의 측근인 에드워드 길포드 경의 딸 제인 길포드의 자녀 13명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존 더들리의 자녀들 중 두 딸 메리와 캐서린, 그리고 다섯 아들 헨리, 존, 로버트, 엠브로즈, 길포드만이 성인이 되었다. 존 더들리와 제인 길포드 부부는 당대의 잉꼬부부로 정평 났고, 두 사람 사이에서 8남 5녀가 태어났다. 존 더들리는 정부와 사생아를 전혀 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553년경에 쓰인 한 시는 그들의 결혼 생활이 "사랑과 충실함"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칭찬했다.로버트는 아버지 쪽으로 더들리 가문의 일원이었다. 이 가문은 서튼의 로랜드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는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에 참여했던 브르타뉴 출신의 기사 알랭 더 루퍼스 추종자의 후손이었다. 14세기 초 서튼 가문이 더들리 남작으로 임명되었고, 제6대 더들리 남작 존 서튼은 백년전쟁과 장미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 후 그들은 더들리 남작을 대대로 물려받으면서 성을 '더들리(Dudley)'로 변경했다.
로버트의 조부인 에드먼드 더들리는 헨리 7세의 고문이었지만, 가혹한 세금 징수 때문에 국민의 원망을 받았고, 헨리 7세가 죽고 왕위에 오른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당했다. 친할머니인 리슬 여자작 엘리자베스 그레이를 통해, 엠브로즈는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제13대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와 초대 슈루즈버리 백작 존 탈보트의 후손이었다.
로버트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 존 더들리는 기사였다. 1537년, 존 더들리는 잉글랜드 부제독이 되었고, 나중에는 제독이 되었으며, 1542년에 어머니의 소유였던 리슬 자작령을 확보하고 리슬 자작 칭호를 받았다. 에드워드 6세 치세 초기에 워릭 백작으로 선임되었고, 1550년 추밀원 의장이 되었으며, 1551년 호국경 에드워드 시모어를 축출한 뒤 잉글랜드의 권력자로 등극하고 노섬벌랜드 공작에 선임되었다. 한편, 로버트의 어머니 제인 길포드는 앤 불린과 클레베의 앤 왕비의 시녀로 일했다.
더들리 가문은 종교 개혁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1530년대 중반부터 복음주의 집단에 속했다. 존 더들리와 제인 길포드는 인본주의 정신에 따라 자녀들을 키웠다. 로버트와 형제자매들의 가정교사 중에는 수학자이자 신비주의 학자인 존 디와 연설가 토머스 윌슨, 언어학자 로저 애샴이 있었다. 이중 로저 애샴은 로버트가 라틴어를 포함한 언어와 글쓰기에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수학에 빠지는 바람에 그 재능을 살리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로버트는 헨리 8세의 궁정에서 궁정 신하의 기술을 배웠고, 에드워드 왕자의 친구 무리와 함께했다.
1549년, 로버트는 형제들과 함께 로버트 켓의 반란을 진압하러 출진한 아버지의 군대에 참가했다. 그 후 에이미 롭사트와 교제한 끝에 1550년 6월 4일 에드워드 6세가 주관한 가운데 결혼식을 거행했다. 에이미 롭사트는 노퍽의 젠트리인 존 롭사트 경의 딸이자 상속녀이며, 로버트와 같은 나이였다. 당시 잉글랜드 국정을 장악한 아버지 존 더들리는 이 결혼을 통해 노퍽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이후 로버트는 노섬벌랜드 공작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고 중요한 지역 신사가 되었으며, 1551~52년, 1553년, 1559년에 노퍽 의원을 지냈다.
2.2. 더들리 가문의 몰락
1553년 1월, 에드워드 6세가 중병에 걸려 상태가 위중해졌다가 나아지기를 반복했다가 6월 초순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메리 공주가 잉글랜드 여왕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던 존 더들리는 왕을 설득해 메리 공주와 엘리자베스 공주를 왕위 계승권에서 배제하고 자기 아들 길포드 더들리와 결혼한 제인 그레이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특허장을 발행하도록 설득했다. 1553년 6월 21일, 왕의 부름을 받고 침실에 모인 귀족 대표들은 왕위를 제인 그레이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의 특허장에 서명했다. 그 후 에드워드 6세가 7월 6일에 사망했고, 제인 그레이와 길포드 더들리 부부는 7월 10일 런던 탑에 엄숙하게 입장했다. 같은 날 저년, 메리 공주의 편지가 런던에 도착했는데, 그녀는 자신을 여왕이라고 칭하고 내각의 복종을 요구했다.그 후 아버지가 형들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메리 공주를 체포하러 출진하는 동안, 로버트는 노퍽으로 가서 병사 300명을 모았다. 그 후 약 10일간 노퍽에서 활동하며 여러 마을이 제인 그레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한 뒤, 킹스린을 점거하고 시장에서 그녀를 여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7월 20일, 추밀원과 런던 시민들은 메리 1세를 여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의하고 로버트의 어머니 제인 길포드, 동생 길포드 더들리, 그리고 제인 그레이가 체포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킹스린 시민들은 로버트와 그의 소규모 부대를 체포한 뒤 프램링엄 성으로 압송했다.
로버트는 그의 아버지와 네 형제와 함께 런던 탑으로 투옥된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아버지 존 더들리는 8월 21일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 8월 22일 처형되었다. 그 후 형제들과 함께 런던 탑에 갇혀 지내던 로버트는 토머스 와이엇의 난으로 처지가 더욱 곤란해졌다. 1554년 2월 12일, 길포드 더들리와 제인 그레이 부부가 타워 힐에서 잇달아 참수되었다. 로버트와 그의 세 형제 존, 헨리, 엠브로즈는 런던 탑 감옥에 갇혀 지냈다. 형제는 감방 벽에 이름과 자기 문장을 새겼다.
1554년 하반기에 로버트의 어머니 제인 길포드와 처남 헨리 시드니는 메리 1세의 배우자인 스페인의 펠리페 왕자의 일행에게 접촉해 메리 1세가 살아남은 더들리 가문의 아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설득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했다. 그해 10월, 메리 1세는 제인 길포드와 헨리 시드니, 그리고 스페인 인사들의 간청에 따라 존, 로버트, 헨리를 석방하기로 했다. 세 사람은 켄트에 있는 헨리 시드니의 집으로 이송되었는데, 존은 석방 직후 사망했다. 엠브로즈는 이후에도 런던 탑에 갇혀 지내다가 1554년 12월 또는 1555년 1월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 탈보이스의 간청을 받아들인 펠리페 왕자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1554년 12월, 로버트와 엠브로즈 형제는 잉글랜드-스페인의 우호를 기념하기 위해 열린 토너먼트에 참여했다. 한편, 더들리 가문의 재산은 1553년 재판 중에 몰수되었는데, 1554년 메리 1세는 엠브로즈의 재산 일부를 그의 어머니 제인 길포드에게 돌려줬고, 그녀에게 첼시에 있는 그녀의 남편 집을 사용하는 걸 허락했다. 제인 길포드는 1555년 1월 15일 또는 22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이후 메리 1세는 엠브로즈가 어머니의 상속 재산을 받는 걸 허락했다.
1555년 후반, 더들리 형제는 자기 영지로 돌아가야 했고, 더들리 가문의 먼 친척인 헨리 더들리가 프랑스로 망명한 뒤 메리 1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공공연히 선동한 후 프랑스 대사 앙투안 드 노아유는 메리 1세 정부가 도주 중인 "노섬벌랜드 공작의 아이들"을 체포하려 한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1557년 초, 상황이 바뀌었다. 더들리 형제는 이제 스페인 국왕이 된 펠리페 2세를 위해 싸울 개인 부대를 받았다. 엠브로즈, 로버트, 헨리 3형제는 1557년 생캉탱 전투에서 스페인군과 함께 프랑스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고, 헨리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로버트는 생캉탱 전투에서 군공을 세운 덕분에 1558년 의회법에 따라 유일하게 남은 형제 엠브로즈, 그리고 자매 메리와 캐서린과 함께 권리를 회복했다.
2.3. 엘리자베스 1세의 총신
로버트는 일찍이 에드워드 6세의 궁정에서 함께 지내면서 엘리자베스 1세와 잘 알고 지냈다. 그가 런던 탑에서 고초를 겪었을 때, 엘리자베스 공주도 몇 주간 그곳에 투옥되었다. 이후 로버트는 생캉탱 전투에서 군공을 세우고 권리를 회복한 후 노퍽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엘리자베스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고, 어느덧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품었다. 메리 여왕이 죽기 일주일 전, 잉글랜드 궁정에 파견된 펠리페 2세의 특사는 로버트를 엘리자베스 공주의 특별한 친구로 여겼다.1558년 11월 18일,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한 다음 날 아침, 로버트는 해트필드에서 여왕에게 잉글랜드 왕국 대인장을 받고 왕실 말 관리관이 되었다. 말 관리관은 군주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중요한 직책으로, 그는 말을 잘 탔고, 왕실의 수송과 숙박, 말 사육, 모든 경우에 필요한 말 공급에 깊은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이 직책에 적합했다. 또한 로버트는 여왕의 대관식 축제의 많은 부분을 조직하고 감독하는 일을 맡았다. 1559년 4월, 로버트는 가터 기사단의 일원에 선출되었다. 잉글랜드 주재 스페인 대사인 초대 페리아 공작 고메스 수아레스 데 피게로아 이 코르도바는 펠리페 2세에게 엘리자베스 1세와 로버트의 관계에 관해 이렇게 보고했다.
"로버트 경은 너무나 총애를 받아 정사를 마음대로 처리하며, 심지어 여왕 폐하께서 밤낮으로 그의 방을 찾아오신다는 소문까지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너무 거침없이 꺼내어, 그의 아내가 한쪽 유방에 병이 나서 여왕이 로버트 경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가 죽기를 기다리고 있다고까지 합니다. (중략) 제가 폐하를 대신해서 로버트 경에게 접근하는 게 좋겠습니다. 폐하께서 로버트 경을 끌어들여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후 페리아 공작은 로버트를 수석 고문 윌리엄 세실, 국새 관리인 니콜라스 베이컨[2]과 함께 로버트를 잉글랜드를 다스리는 세 명 중 한 명으로 꼽았다. 로버트는 국빈 행사에서 공식 주최자 역할을 했고, 대사 만찬에도 자주 손님으로 초대되었다. 1559년 가을에는 여러 외국 왕자가 사절을 보내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는데, 다수의 사절은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할 생각이 있는 것처럼 자신들을 속여놓고, 로버트의 적과 그의 아내를 숙청할 때까지 시간을 끌고 있다고 의심했다. 심지어 일각에서는 여왕이 로버트와 결혼하지 못한다면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주장했으며, 여왕이 더들리와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소문도 퍼졌다.[3]
그러나 많은 귀족은 로버트가 국서로 등극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왕의 배우자로는 외국의 왕족이 최우선이고, 그러지 못한다면 잉글랜드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와 맺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그들의 눈에 조부, 아버지, 형 등 3대에 걸쳐 반역죄로 참수당한 더들리 가문은 여러모로 부적격한 대상이었으며, 더들리 가문이 로버트가 국서 자리를 꿰찬 뒤 권력을 독점한 후 과거에 받은 박해에 복수하려 들 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로버트가 여왕과 결혼하기 전에 죽이려는 음모가 계획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로버트는 옷 안에 가벼운 갑옷을 입고 다녔으며,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에 될 수 있는 대로 오래 지내며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았다.
2.4. 에이미 롭사트의 죽음
토머스 프랜시스 딕시 작, <에이미 롭사트>, 1850년작.
로버트의 아내 에이미 롭사트는 1559년 런던에 방문한 후 남편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로버트를 몹시 총애한 엘리자베스 1세가 로버트를 궁정에 붙잡아두고 아내와 만나는 걸 불허했기 때문이다. 그 후 에이미 롭사트는 1559년 12월부터 버크셔의 컴너 마을에 있는 컴너 홀에 살았다. 이 집은 14세기에 지어진 수도원 단지를 개조한 저택으로, 더들리 가문의 친척이자 에이미의 친척인 앤서니 포스터 경이 임대했고, 앤서니 포스터의 아내, 친척인 오딩셀스 부인, 오웬 부인이 함께 살았다.
에이미 롭사트의 방은 크고 호화로운 2층 방으로, 집에서 가장 좋은 방이었으며, 별도의 입구와 계단이 있었다. 집 뒤편에는 테라스 정원, 연못, 사슴 공원이 있었다. 그녀는 롭사트 영지의 수익을 직접 손에 쥐고, 약 10명의 하인으로 구성된 자신의 가계에 대한 비용을 지급했다. 또한 정기적으로 드레스와 화려한 장신구를 주문했으며, 남편으로부터 선물을 종종 받았다.
윌리엄 프레드릭 예임스 작, <에이미 롭사트의 죽음>, 1877년작.
그러던 1560년 9월 8일 일요일, 애빙던에서 박람회가 열리던 날, 에이미 롭사트가 계단 아래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당시 윈저 성에서 여왕과 함께 있었던 로버트는 9월 9일 사절로부터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컴너 홀에 있던 집사 토머스 블런트에게 즉시 서신을 보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내고 사법 조사를 요청하라고 간절히 촉구했다. 블런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사법 조사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그는 주인에게 에이미 부인의 생전 행적에 관해 이렇게 보고했다.
그날 여주인께서는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집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박람회에 보내고 싶어 안달이 나서, 집에 머무를 이유를 대는 자기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면 몹시 화가 나서 오딩셀스 부인에게 갔습니다. (중략) 부인은 그날 박람회에 가기를 거부했고, 오딩셀스 부인에게도 몹시 화를 냈습니다. 오딩셀스 부인이 오늘은 신사 숙녀들이 갈 날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여주인은 자기 마음대로 가도 되지만, 자기 가족은 모두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몹시 화를 내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간다면 누가 자기와 동행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여주인은 오웬 부인이 저녁 식사 때 자기와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픽토도 같은 이야기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주인님, 제가 여기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여주인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야기들을 보면 여주인이 이상한 정신의 소유자라고 판단하게 됩니다.
픽토는 에이미 롭사트의 하녀였다. 블런트가 에이미에게 일어난 일이 사고로 벌어진 건지, 누군가가 해친 건지 알 수 있겠냐고 묻자, 픽토는 "에이미가 절망에서 구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답했다. 이에 블런트가 "그녀가 마음속에 사악한 생각(자살)을 품고 있었다는 것인가?"라고 추궁하자, 픽토는 "아니요, 블런트 씨. 제 말을 그렇게 판단하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제가 말을 너무 많이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답했다. 블런트는 이후에도 여러 인사의 증언을 접한 뒤, 로버트에게 "제가 그녀에 대해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니, 그녀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사법 조사를 맡은 검시관과 15명의 배심원은 현지 젠트리와 부유한 자작농이었다. 배심원단은 로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이미가 사고사한 것 같다고 알렸다. 로버트는 답신을 보내 "진실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얻기 위해" "정직한 사람들로 구성된 또 다른 상당수"가 추가 조사를 수행해야 한다는 자기 뜻을 밝혔다. 이 '정직한 사람들'에는 에이미의 친구들과 그녀의 이부형제 존 애플야드와 이복형제 아서 롭사트가 포함되었다. 하지만 로버트의 제안은 실현되지 않았다.
1561년 8월 1일 지역 순회 재판에서, 검시관은 에이미가 어떤 방에 혼자 있었다가 우연히 인접한 계단에서 그 방의 맨 아래로 급하게 떨어져 사망했다는 소견을 밝혔다. 그녀의 머리엔 두 개의 상처가 있었는데, 하나는 "엄지손가락 4분의 1 깊이"였고 다른 하나는 "엄지손가락 두 개 깊이"였다. 또한 그녀는 "사고로 인한 부상 또는 추락과 레이디 에이미 본인의 체중으로 앞서 언급한 계단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졌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고 결론 내렸다. 로버트는 2,000파운드에 달하는 비용을 들여 호화로운 장례식을 거행했지만, 관례에 따라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고, 6개월 간 자기 집에서 은거 생활을 하면서 아내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세간에서는 로버트가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사고사로 위장해 죽였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로버트가 국서가 되는 걸 어떻게든 막으려 했던 수석 고문 윌리엄 세실은 이 소문을 활용해 로버트와 여왕이 맺어지는 걸 막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스페인 대사에게 로버트와 여왕이 결혼하려 하며, 에이미 부인을 독살하려 했으며, "세상에는 그녀가 아프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전혀 아프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소문은 해외까지 퍼졌고, 얼마 후 유럽 전역에 로버트가 여왕과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살해했다는 이야기가 진실인 것처럼 떠돌았다. 프랑스 주재 잉글랜드 대사 니콜라스 스록모턴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 이 악성 소문 때문에 자신이 프랑스 궁정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
"한 사람은 우리를 비웃고, 다른 사람은 위협하고, 다른 사람은 여왕을 모욕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하가 아내를 죽이고 공주가 그것을 묵인할 뿐만 아니라 그와 결혼까지 하는데, 이게 무슨 종교냐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로버트가 아내를 살해했다는 소문을 전혀 믿지 않았다. 1561년 10월 궁정에 복귀한 로버트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자, 그녀는 신하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짐이 로버트 경과 직접 대면해 심문한 결과, 문제가 보고된 것과 상반된다는 것이 밝혀졌소. 그의 정직성이나 에이미 부인의 명예는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았소."
한편, 에이미 롭사트의 이부형제인 존 애플야드는 1559년 이래로 로버트에게 많은 연금을 받았지만, 그걸로는 불충분하다고 여겼다. 1567년, 그는 로버트를 궁정에서 축출하길 원했던 제4대 노퍽 공작 토머스 하워드과 제3대 서식스 백작 토머스 래드클리프로부터 로버트를 아내 살해 혐의로 고발하고 1,000파운드를 배상하라고 요구하라는 의뢰를 받았다. 존 애플야드는 누이가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지만, 로버트가 정말로 누이를 살해했다고 여기지 않아서 이 음모에 협조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진짜 범인을 찾아내야 한다고 여기고, 로버트에게 사건을 재조사해 범인을 찾아내자고 요청했다. 로버트는 배심원이 이미 적법한 절차에 따라 사고사로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재조사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그러다가 노퍽 공작과 서식스 백작이 애플야드에게 접근해 자기를 고발하라고 의뢰한 걸 알게 되자, 로버트는 격분해 추밀원에 고발했다.
몇 주 후, 추밀원은 노퍽, 서식스, 레스터 백작에 대한 혐의를 조사했고, 존 애플야드는 한 달 동안 플리트 감옥에 갇혔다. 윌리엄 세실과 귀족들의 심문을 받은 존 애플야드는 "노퍽 백작, 서식스 백작,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연루시켜 레스터 백작 아내의 죽음과 관련하여 문제를 일으키게 한" 이유와 "레스터 백작 아내의 죽음"은 "누구에 의해서든" 초래되었다고 말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서면으로 답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애플야드는 답변을 하는 대신 자신의 모든 진술을 철회했다. 이후 그는 검시관 보고서를 열람해 달라고 요청했고, 감옥에서 검토한 뒤 보고서가 자신을 완전히 만족시켰으며 에이미가 사고사로 죽은 걸 확인했다고 밝혔다.
세간에서는 에이미 롭사트가 아버지인 존 롭사트 준남작과 이복동생 아서 롭사트, 사촌오빠 스펜서 롭사트에게 남편이 자신을 죽이려 든다며 독살당할까 봐 음식도 개에게 먼저 준 다음에야 먹고 불안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겠다는 편지를 보낼 정도로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렸고, 이에 놀란 존 롭사트와 스펜서 롭사트가 손수 부하들을 데리고 에이미의 곁을 감시하며 지켰지만, 그녀가 허무하게 사고사하자 롭사트 일가는 모두 에이미가 로버트 더들리에게 살해당했다고 믿고 로버트를 증오했으며, 아버지 존 롭사트는 지방의 작은 귀족임에도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왕실에까지 딸이 사위에게 살해당했다는 상소문을 올리며 억울함을 읍소했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아버지 존 롭사트는 에이미가 죽기 3년 전인 1557년에 사망했고, 이복형제 아서 롭사트와 사촌오빠 스펜서 롭사트는 로버트가 에이미를 죽였다는 소문을 믿지 않고 로버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이부형제 존 애플야드가 사건 재조사를 요구하긴 했지만, 위에서 보듯이 로버트를 범인으로 여긴 게 아니라 숨겨진 범인을 찾아내기 위해 사건 재조사를 요청한 것이었으며, 그나마도 검시관 보고서를 읽고 나서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로버트가 여왕과 결혼하려고 아내를 죽였다는 소문은 끈질기게 이어졌고, 1584년 가톨릭 망명자들이 레스터 백작을 비난하는 풍자소설 <레스터의 코먼웰스>에서 로버트의 의뢰를 받은 리처드 버니 경이 에이미 부인의 목을 부러뜨린 후 계단 아래에 내려놓았다고 주장했다. 1608년 초에 발간된 <요크셔 비극>은 아내를 없애는 쉬운 방법은 계단에서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밝혔다. 빅토리아 시대 역사가 제임스 앤서니 프루드는 스페인 외교 서신에서 에이미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에이미가 로버트에게 독살당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그 뒤를 이어 노퍽 고고학자 월터 라이는 1885년에 <에이미 롭사트 살인 사건>을 발간하면서, 로버트는 에이미를 독살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하인들을 시켜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에이미가 로버트에게 살해될 것을 두려워한 끝에 자살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이 모든 이야기는 로버트의 강력한 권세를 질시한 이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며, 에이미는 검시관 보고처럼 사고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내렸다. 일부 학자들은 에이미가 사망하던 날 하인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렸다는 증언이 있는 것을 볼 때 우울증에 시달린 끝에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으며, 몇몇 학자는 설령 살해당했다고 해도 로버트가 아니라 윌리엄 세실 등 로버트의 정적들이 사주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로버트는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집사 토머스 블런트를 보내 진상을 가능한 한 신속하게 파악하게 했고, 윌리엄 세실과 주고받은 서신에서도 아내의 죽음에 몹시 당황해하며 진상을 밝히는 걸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현대 학자들은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로버트는 에이미의 사망에 경악했고, 어떻게든 진상을 파악하고 싶어 했다고 판단했다. 또한 그들은 영리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서 수많은 정적의 견제를 물리치고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평생 누린 로버트가 예측할 수 있는 스캔들에 노출될 수 있는 방식으로 아내의 죽음을 조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2.5. 엘리자베스 1세와의 혼담과 궁정 생활
엘리자베스 1세는 에이미 롭사트 사망 사건 이후에도 로버트를 굳건히 신뢰했다. 그러나 에이미의 죽음이 자신과 연관되었다는 소문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로버트는 1561년 봄 잉글랜드를 떠나 해외에서 잉글랜드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단호히 거부했고, 로버트는 궁정에서 계속 지냈다. 1562년 10월, 엘리자베스 1세는 천연두에 걸려 생명이 위독해졌다. 이에 그녀는 추밀원에 로버트를 국왕의 수호자로 임명하고, 그에게 적절한 직함과 연봉 2만 파운드를 지급하라고 요청했다. 이후 여왕이 건강을 회복하자, 로버트는 추밀원 의원으로 돌아갔다.1563년, 엘리자베스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에게 로버트를 배우자로 맞이하라고 제안했다. 그녀는 메리가 로버트와 결혼한다면, 메리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하는 걸 서면으로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 1564년 9월,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 여왕이 로버트를 결혼 감으로 인정하도록 유도하고자 로버트를 초대 레스터 백작에 선임했다. 1566년 1월, 스코틀랜드 주재 잉글랜드 대사 토머스 랜돌프는 메리 여왕이 로버트와의 결혼에 긍정적인 뜻을 내비쳤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정작 로버트는 스코틀랜드로 가기 싫어서 메리와의 결혼을 받아들이길 꺼렸고,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를 메리 여왕과 맺어주게 하려는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와 마거릿 더글러스 부부의 계획에 협조했다. 결국 메리 여왕은 로버트를 배제하고 헨리 스튜어트를 남편으로 삼기로 했다.
로버트는 이후에도 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 대상으로 진지하게 여겨졌고, 그 역시도 엘리자베스 1세와 맺어지길 희망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로버트에게 호감을 표하면서도 세간의 시선이 좋지 않고 대귀족들이 강하게 반대하는 터라 쉽사리 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565년과 1578년 사이에 4명의 독일과 프랑스 공주들이 레스터 백작의 신부로 거론되었지만, 로버트는 모두 거부했다. 그는 궁정에서 여왕의 방 바로 옆에 자리 잡았고, 여왕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남자로 여겨졌기에 실로 강력한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왕의 소유욕과 질투가 심했기 때문에, 그는 어딜 가든지 여왕에게 항상 보고해야 했고, 여왕의 명령 때문에 궁정에서 수년간 한 발짝도 떠나지 못하기도 했다. 1578년 레스터 백작이 몇 주간 궁정을 떠났을 때, 잉글랜드 대법관 크리스토퍼 해튼 경이 그에게 서신을 보냈다.
"궁정은 당신의 참석을 원합니다. 폐하께서는 홀로 계시며, 제가 장담하건대 방은 거의 비어 있습니다."
로버트는 종종 의례 행사에서 비공식적인 배우자 역할을 했으며, 때로는 여왕을 대신하기도 했다. 그는 주로 궁정 의례를 담당했고,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축제를 조직했다. 1587년부터 집사 경이 되었으며, 왕실의 식량과 기타 물품 공급을 담당했다. 그는 왕실 예식과 관리 비용을 절약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궁정의 위생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존 해링턴에게 의뢰해 수세식 변기를 만들게 했다. 한편, 레스터 백작은 사냥을 즐겼고, 틸트야드에서 마상창시합에 매번 참여했으며, 테니스를 매일 즐겼다. 또한 연회에서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언제나 댄스 파트너로 지명되었다.
2.6. 영지 확대와 운영
아버지 존 더들리가 몰락한 후, 더들리 가문 상속 재산은 몰수당했다. 로버트 등 그의 아들들은 1558년 1월 재산을 가질 권리를 되찾았지만, 그때는 가문의 재산이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분할된 뒤였다. 로버트는 가문 재산을 재건하기 위해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는 1560년 4월 엘리자베스 1세가 그에게 연간 6,000파운드 상당의 첫 수출 허가를 내릴 때까지 런던 시 상인에게서 많은 돈을 빌려 왕실의 총애를 받는 사람에게 기대되는 생활 방식을 지원했다. 또한 아버지의 땅 중 일부를 구매했고, 1563년 6월 여왕으로부터 케닐워스 영지, 성, 공원과 함께 북웨일스의 덴비와 처크 영주권을 받았다.로버트가 새로운 웨일스 영지에 들어왔을 당시, 그곳에는 반세기 넘게 토지 소유권 분쟁이 이어졌고, 일부 지역 유력 가문들은 이 때문에 왕실의 세수입에 큰 타격을 입혔다. 로버트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 수입을 늘리기 위해 소작인들과 합의를 맺었다. 지금까지 등기 소유자였던 모든 소작인은 새로 합의된 임대료를 받는 대가로 자유 소유자 지위로 승격되었다. 마찬가지로 모든 소작인의 공유지 권리와 공유지의 경계가 보장되어 재산권과 인클로저 운동에 대한 보호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
덴비의 영주인 레스터 백작은 이 영주권을 부활한 더들리 가문의 영토적 기반에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기고, 덴비 마을에 대대적인 건축 프로젝트를 벌이려 했다.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가장 큰 규모의 개신교 교회를 지을 계획을 세웠으며, 인근의 세인트 아샵 주교좌를 덴비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이 너무 야심적이어서 비용 감당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그는 성경과 공통 기도서를 웨일스어로 번역하는 것을 장려했다.
로버트는 유일하게 남은 형제 엠브로즈 더들리와 무척 가까운 사이였으며, 형과 함께 여러 사업을 기획했다. 1567년, 그는 형제 엠브로즈와 함께 워릭셔 지역 지주들과 연합하여 "워릭셔의 복음 설교자"를 위한 컨소시엄을 설립했다. 또한 반란을 선동한다는 비난을 받는 책을 출판한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몰린 설교자 존 필드를 옹호했다. 존 필드가 투옥되자, 로버트는 엠브로즈와 함께 설교자를 런던 시의원으로 전근시키고 석방을 위한 기금을 기부했다.
로버트는 자신이 백년전쟁에서 활약한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의 후손인 걸 자랑스럽게 여기고, 워릭 백작의 고대 문장인 사자와 엉성한 지팡이를 자기 문장에 삽입했다. 또한 1571년 성 미카엘 기사단 축일을 기념하기 위해 워릭 타운에 방문하여 대대적인 행사를 개최했다. 이 미카엘 기사단은 1566년 프랑스 국왕 샤를 9세가 그에게 수여한 것이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날에도 운영되고 있는 노령 및 부상 군인을 위한 자선 단체인 레이스터 경 병원을 설립했다.
케닐워스 성은 레스터 백작이 영지를 확대하고 관리하려는 야망의 중심지였다. 그는 성의 중세 건축물에 15세기 스타일의 문지기실을 추가했고, 정식 정원과 주거용 윙을 추가했는데, 이 윙은 수십 년 후 엘리자베스 시대 건축의 특징이 된 "진취성이 있고 얇은 벽과 격자형 창문"을 특징으로 했다. 성이 완성되자, 백작은 1575년 7월에 엘리자베스 1세를 초빙해 19일간 화려한 축제를 개최했다. 호수의 여인, 배 속에 작은 오케스트라를 품은 수영하는 파피에마셰 돌고래, 불꽃놀이, 가면극, 사냥, 곰 낚기 와 같은 대중적인 오락이 이 축제에 개최되었다. 여기에 풍경, 인공 호수, 성, 르네상스 정원의 전체 풍경이 오락을 위해 독창적으로 사용되었다.
2.7. 연애와 재혼
로버트는 1569년경부터 초대 에핑엄 남작 윌리엄 하워드의 딸이며 제2대 셰필드 남작 존 셰필드의 미망인인 더글러스 하워드와 연인 관계를 맺었고, 1574년 그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로버트 더들리를 낳았다. 그러나 그는 더글러스 하워드에게 더들리 가문의 상속인을 낳기 위해서라도 그녀와 결혼할 수 없으며, 결혼해 버리면 여왕의 은총을 절대로 받을 수 없게 될 거라는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그러면서 자신은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명예를 위해 다른 남편을 찾는 걸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
| 후처 레티스 놀리스(Lettice Knollys) |
1573년, 로버트는 초대 에식스 백작 월터 데버루의 아내 레티스 놀리스와 사랑을 나누었다. 레티스 놀리스는 엘리자베스 1세의 이모 메리 불린의 외손녀로 엘리자베스의 오촌 조카다. 에식스 백작은 그해 아일랜드 총독으로 부임했다가 1576년 9월 이질로 사망했는데, 로버트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일랜드의 대리 총독인 헨리 시드니가 공식 조사를 했지만, 독살 징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소문은 기승을 부렸고, 로버트의 명성은 더 나빠졌다.
미망인이 된 레티스 놀리스와의 결혼 전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로버트는 마침내 더글러스 하워드와의 관계에 선을 그었다. 그는 사생아 로버트를 자신과 친구들의 집에서 자라게 해주고 훌륭한 교육을 했으며, 유언장에 자기가 죽은 후 케닐워스 성을 포함한 대부분의 재산을 사생아 로버트에게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어린 로버트 더들리는 부모가 30년 전에 비밀리에 결혼했다고 주장해 레스터와 워릭 백작령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후 사생아 로버트 더들리는 이탈리아로 떠난 뒤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엔지니어이자 조선공으로 일했으며, 전 세계를 망라한 최초의 해상 지도책인 델아르카노 델 마레 (Dell'Arcano del Mare, 1645-1646) 를 설계하고 출판하는 등 뛰어난 항해사이자 탐험가로 이름을 날렸다.
1578년 9월 21일, 로버트는 소수의 친척과 친구만 참석한 가운데 완스테드에 있는 자신의 시골 저택에서 레티스 놀리스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그는 감히 여왕에게 자신이 결혼했다는 걸 알리지 못했지만, 9개월 후 그의 정적들로부터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여왕은 격노했다. 여왕은 레티스 놀리스를 지방으로 추방했고, 로버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1583년, 그녀는 대사들 앞에서 레티스가 "암늑대"이고 그녀의 남편은 "반역자"이자 "속인 남편"이라고 발언했다. 로버트는 동료들에게 아내를 위해 중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여왕은 나중에 마음이 풀어져서 레티스가 다시 궁정에 출입하는 걸 허용했고, 로버트도 예전처럼 잘 대접했다.
로버트는 레티스에게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1583년 프랑스 대사 미셀 드 카스텔노는 "레스터 백작과 그가 매우 애착을 가진 그의 부인"과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에 대해 보고했다. 로버트는 아내가 이전의 결혼에서 낳은 네 명의 의붓자식에게 세심하게 대했으며, 모든 면에서 정치적 상속자로 여겼던 제2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의 승진을 위해 노력했다.
2.8. 후원 활동
로버트는 태피스트리부터 광업까지 많은 분야에 관심이 있었고,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관심을 가져서 매일 가난한 사람들, 청원자, 교도소에 기부했다. 또한 무역과 탐험에 깊은 관심을 가져서 머스코비 컴퍼니와 런던 상인 모험가 협회에 열광적으로 투자했다. 그는 애국심과 선교적 열정으로 모로코와의 무역 사업도 도맡았다. 특히 초기부터 존 호킨스와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해상 활동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드레이크의 세계 일주 항해의 주요 후원자였다. 또한 그는 형제 엠브로즈 더들리와 함께 마틴 프로비셔의 1576년 북서 항로 탐색의 주요 후원자였다. 나중에 로버트는 갤리온 '레스터 호'를 구매했고, 에드워드 펜튼과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항해에 참여하게 했다. 여기에 1580년 이후 포르투갈을 접수한 펠리페 2세에 대항해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한 안토니우의 친구이자 후원자를 자처하기도 했다.로버트는 이너 탬플 명예 협회를 후원해 1561년 그들로부터 "가장 특권적인 회원이자 주인이자 총독"이란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너 템플에서 자신의 아파트를 짓고, 그곳에서 웅장한 축제와 공연을 조직했다. 또한 옥스퍼드 대학교의 총장으로서 성공회 39개 신조와 수장령에 대한 맹세를 시행했고,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를 설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후대에 국제법 분야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알베리코 젠탈리 옥스퍼드 민법 교수로 선임했고, 스페인 출신 수도사였다가 칼뱅파로 개종한 안토니오 델 코로를 신학 교수로 선임했다.
엘리자베스 1세 치세 동안, 약 100권의 책이 로버트에게 헌정되었다. 1564/1567년에 아서 골딩은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대한 그의 인기 있는 번역본을 백작에게 헌정했다. 또한 로버트는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학습을 대중화하는 수단으로 여겨지는 번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고, 역사 애호가로서 1559년 재단사 존 스토우에게 연대기 작가가 되라고 제안했다. 그리고 극장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옥스퍼드의 학술 연극을 후원했고, 적대적인 주교와 지주로부터 세인트 폴 대성당과 왕실 예배당의 어린이들과 극장 주인들을 보호하는 데 힘썼다. 그는 1559년부터 자신의 연주자 모임을 가졌고, 1574년에는 지방 당국의 방해 없이 전국을 순회할 수 있도록 배우들에게 발급된 최초의 왕실 특허를 획득했다. 1586년 잉글랜드를 방문한 덴마크와 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2세를 위한 연주회를 베풀었다.
로버트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그림 컬렉션을 소유할 정도로 그림을 대거 수집했다. 그는 궁정 인물들을 그린 초상화 미니어처를 전문으로 그린 화가 니콜라스 힐리어드의 주요 후원자였다. 그의 학자와 문인 그룹에는 조카 필립 시드니, 점성가이자 헤르메스주의 추종자 존 디, 비서 에드워드 다이어, 장 오트망, 조반니 플로리오, 가브리엘 하비가 포함되었다. 에드먼드 스펜서는 하비를 통해 레스터 하우스에서 일자리를 얻었고, 그곳에서 시 작품을 대거 연재했다. 스펜서는 로버트가 죽은 지 수년이 지난 후 자기를 후원해 준 그를 기리는 시를 여러 편 지었다.
온건적인 청교도였던 로버트는 메리 1세 치세 때 해외로 망명했다가 엘리자베스 1세 집권 후 귀환한 개신교 설교자들을 후원했다. 1561년부터 위그노의 대의를 옹호한 그는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 벌어지자 위그노를 더욱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한편, 그는 자기 집안에서 친 가톨릭 성향 인사인 크리스토퍼 블런트를 집사로 고용했고, 블런트는 그의 충실한 집사로서 활약했다. 그리고 청교도들을 후원하면서도, 그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나와서 여왕을 자극한다면 지금까지 이룩한 잉글랜드 종교 개혁이 위험에 빠질 뿐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여왕이 청교도에게 적대감을 품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고, 청교도와 주교 측 사이의 논쟁이 벌어질 때마다 화해를 이루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1580년대에 반청교도 인사인 존 휘트기프트가 캔터베리 대주교에 선임된 뒤 엘리자베스 1세의 강력한 지지 아래 청교도를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교회 문제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쇠락했다.
2.9. 네덜란드 독립 전쟁 참여
로버트는 네덜란드 반군을 이끌고 강대한 스페인에 맞서 싸우는 오라녀 공 빌럼 1세를 매우 존경했다. 그는 1577년부터 네덜란드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잉글랜드군을 적극적으로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윌리엄 세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서 번번이 실패했다. 그러던 1584년 오라녀 공 빌럼 1세가 암살당하면서 네덜란드 반군이 혼란에 빠졌고, 1585년 8월에는 안트베르펀이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에게 함락당했다. 이에 레스터 백작은 직접 네덜란드로 가서 반군을 이끌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가신과 친구들로부터 원정대를 모집하고, 25,000파운드에 달하는 재산을 저당 잡혀서 "신과 여왕 폐하의 대의"를 위해 스페인군과 맞서기로 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초기에는 그가 스페인군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걱정해 원정 계획을 반대했지만, 로버트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승낙했다.1585년 12월 9일 목요일, 로버트는 하위치에서 출항해 24시간도 채 되지 않아 영불해협을 빠르게 횡단한 후 플리싱겐에 정박했다. 그는 그곳에서 내려서 네덜란드인들의 환대를 받으며 여러 도시를 거쳐 헤이그에 도착한 뒤, 1586년 1월 1일 연합주 총독이 되어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는 즉각 윌리엄 세실과 프랜시스 월싱엄에게 서신을 보내 네덜란드인들의 간청에 호의적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후 끊임없는 역풍 때문에 잉글랜드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지만, 그는 1월 25일에 총독직을 받아들였다. 로버트는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엘리자베스 1세가 네덜란드의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1세는 로버트가 자신의 허락 없이 총독을 자처한 것에 분노했다. 그녀는 로버트에게 총독으로 취임한 그 장소에서 공식 의식을 통해 즉시 사임하라고 명령했다. 그녀가 파견한 토머스 헤니지 경이 네덜란드 의회에서 여왕의 지시를 전하자, 의회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총독직은 특정 군주가 아니라 의회와 네덜란드인에 의해 수여되었다고 못 박았고, 로버트는 그 덕에 총독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로버트에 대한 네덜란드인들의 신뢰가 흔들리는 계기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로버트에게 파르마 공작과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지 말라고 요구했지만, 로버트는 이를 받아들이길 꺼리고 군사 원정을 여러 차례 벌여 초기에 소소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 그라브가 스페인군에게 항복해 버리면서 잉글랜드군의 사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자, 로버트는 격분해 그라브 도시 총독 헤마르 남작을 처형했다. 네덜란드 귀족들은 그러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면서, 전임 오라녀 공 빌럼 1세조차도 감히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라고 경고했지만, 로버트는 헤마르 남작이 좋은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에 겁먹지 않겠다고 답하고 처형을 감행했다. 네덜란드 귀족들은 이때부터 로버트를 불신했다. 여기에 부관인 존 노리스와 불화를 빚으면서 잉글랜드 원정대 내 단결력이 떨어졌고, 엘리자베스 1세는 전쟁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자, 수개월간 자금과 병력 파견을 미뤘다. 로버트는 이 때문에 자기 재산을 털어서 추가 자금을 조달해야 했고, 병사들의 처지도 크게 악화했다.
로버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과의 무역을 금지했다. 이에 무역을 통해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였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반발했다. 또한 로버트는 재정 개혁을 단행해 재정을 중앙 집중화하고 세금 징수가 매우 불공평하게 이뤄진다고 여겨 직접 과세로 대체하기 위해 국무원의 감독을 받지 않는 새로운 재정 위원회를 설립하게 했다. 이에 국무원에 속한 네덜란드 의원들은 분노했고, 로버트의 입지는 갈수록 악화했다. 1586년 12월 로버트가 잉글랜드로 돌아갔고, 그가 없는 동안 데벤테르와 쥣펀 요새의 지휘를 맡긴 두 명의 가톨릭 장교인 윌리엄 스탠리와 로랜드 요크가 파르마 공작에 귀순했다.
1587년 6월 로버트가 네덜란드로 돌아온 직후, 잉글랜드군이 접수했던 슬로이스 항구가 파르마 공작에게 공략당했다.(1차 슬로이스 공방전) 로버트는 슬로이스 항구를 구원하려 했지만, 그를 불신한 네덜란드 동맹군의 지원 거부로 실패했다. 그 후 엘리자베스 1세는 파르마 공작과 평화 협상에 들어갔고, 로버트는 더 이상 네덜란드인들의 복종을 받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자기 직위를 포기하고 1587년 12월에 잉글랜드로 귀환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2년간 많은 고생을 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막대한 빚에 허덕였다.
2.10. 무적함대 방어 사령관과 갑작스러운 죽음
1588년 7월,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 접근했다. 이에 로버트는 "여왕의 군대와 중대의 중위 겸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스페인군이 상륙할 때 런던을 방어하기 위해 템스 강변 틸버리 항구에 진지를 세웠다. 추밀원이 비용 절감을 위해 틸버리 진지를 해산하는 걸 고려하자, 로버트는 이에 강력히 반대했고,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장병들을 독려해달라고 청원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그의 청원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1588년 8월 9일 틸버리 항구에 주둔한 장병들을 방문해 틸버리 연설을 했다. 이때 로버트는 엘리자베스 1세가 탄 백마의 고삐를 잡고 걸어갔다고 한다.무적함대가 칼레 해전에서 와해한 후, 로버트는 런던에서 개최된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했고, 생애 마지막 몇 주 동안 여왕과 함께 식사했다. 이후 더비셔의 벅스턴으로 목욕하러 가던 1588년 9월 4일, 옥스퍼드 인근 콘버리 공원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학자들은 그가 말라리아 또는 위암에 걸려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지만, 세간에서는 그가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불과 일주일 전에 로버트로부터 작별 인사를 받았던 엘리자베스 1세는 로버트가 죽었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아 며칠간 별장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 후 그녀는 로버트가 죽기 6일 전에 보낸 편지를 침대 옆 보물 함에 보관하고 겉면에 "그의 마지막 편지"라고 썼다. 15년 후인 1603년 3월 24일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했을 때도, 그 편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로버트는 1588년 10월 10일 워릭의 세인트 메리 대학 교회의 뷰챔프 채플에 안장되었다. 그는 조상인 리처드 뷰챔프와 같은 예배당에 묻혔다. 후처인 레티스 놀리스는 로버트가 죽은 지 1년도 안 돼서 12살 연하인 크리스토퍼 블런트와 재혼했지만, 크리스토퍼는 1601년 레티스의 장남인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와 함께 반역 혐의에 연루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당시 기준은 물론 현재 기준으로도 엄청나게 장수한 91세까지 살았고 그만큼 모든 자식과 손자 및 손녀가 죽는 걸 봐야 했지만, 전 남편들인 에식스 백작과 로버트 더들리로부터 상속받은 막대한 재산으로 풍족하게 살았다. 1634년 증손들 앞에서 편하게 눈을 감았고, 로버트의 곁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