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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미켈란젤로 디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1] 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
| 출생 | 1475년 3월 6일 |
| 피렌체 공화국 카프레세 | |
| 사망 | 1564년 2월 18일 (향년 88세) |
| 교황령 로마 | |
| 묘소 | 산타 크로체 성당 |
| 국적 | [[피렌체 공화국| |
| 신체 | 160cm |
| 가족 | 아버지 로도비코 디레오나르도 부오나로티 시모니(1444~1534) 어머니 프란체스카 디네리 델 미니아토 디시에나(?~1481) |
| 종교 | 가톨릭 |
| 직업 | 조각가, 화가, 건축가, 공학자, 해부학자, 시인, 작가, 수학자 |
| 주요 작품 | 천지창조, 피에타, 다비드상, 최후의 심판, 성 베드로 대성당 등 |
| 서명 | |
1. 개요
피렌체 공화국의 조각가, 건축가, 화가, 시인, 수학자, 해부학자, 공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와 함께 르네상스 3대 거장 중 한 명이며 후대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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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생애#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생애#|]] 부분을 참고하십시오.3. 평가
다재다능한 천재로 추앙받는 레오나르도와 달리 미켈란젤로에게는 그러한 주목도가 좀 덜한데, 아무래도 남은 기록이 적다 보니 그런 감이 없지 않다. 레오나르도와 마찬가지로 미켈란젤로 역시 다재다능했고, 이건 모든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특징이다.[2] 르네상스 시대 당시의 조각가들은 돌을 조각하느냐, 나무를 조각하느냐에 따라 다른 역할을 수행하곤 했다. 미켈란젤로처럼 돌 조각을 하는 조각가들은 석공으로서 건축가의 역할을 함께 수행했으며, 나무 조각가들은 가구 제작자의 역할을 같이 수행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조각 작품들을 전시하는 미술관이 디자인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겸한다.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박물관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다.다만 그 와중에서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만큼 모든 분야에 통틀어 이 정도의 업적을 남긴 예술가는 정말 세 손가락에 꼽고 그렇기에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불리는 것이다. 건축에 있어서는 성 베드로 대성당[3], 회화에 있어서는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성당, 조각에 있어서는 다비드, 피에타. 대중이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것 한두 가지만 꼽아도 이 정도다. 심지어 시인으로서의 재능 역시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본인은 자신이 쓴 시를 친구들에게만 낭송하거나 혼자서 재미로 하는 정도로, 문학인의 길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은 듯하지만 그가 흠모했던 귀족부인인 비토리아 콜론나[4]에게 써서 보냈던 시가 사후 몇 편 발견되었고 후에 그의 조카, 일명 작은 미켈란젤로라 불리는 인물이 이 시들을 모아서 시집으로 출판한다.
다만 회화 분야에서 보면,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위용이 워낙 대단해서 그렇지 다른 거장인 레오나르도, 라파엘로 등에 비해서는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있다. 실제로 남아 있는 회화 작품이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 말고는 거의 없다시피 하며, 대부분 미켈란젤로의 회화로 알고 있는 아담의 창조 등의 작품은 전체 천장화 중 일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또 묘사도 과도한 근육의 묘사, 의복의 투박한 선 등 자연스러움이 떨어지고 마치 사람을 덩어리진 물건처럼 표현하였던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라파엘로와의 싸움에서도 드러나듯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조각가'라고 생각했으며, 회화에 대해서는 경멸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에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조각가는 밀가루를 뒤집어 쓴 제빵사와 다를 게 없다."라며 조각 장르를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에 미켈란젤로는 "조각은 회화를 닮을수록 불완전해지지만 회화는 조각을 닮을수록 완전해진다."라고 응수했다는 일화 또한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화가 있는데, 미켈란젤로의 어린 시절 그는 화가를 꿈꾸었으나 돈에 집착하는 성격 때문에 기를란다요 미술공방에서 파문당하여 화가로서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였다. 이후 회화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였던 미켈란젤로는 회화에 대한 욕심은 있었으나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실제로 그의 몇 안 되는 회화 중 하나인 '성 가정과 세례자 요한(성가정, Tondo Doni)'은 당시 그의 작품인지 모르고 보았던 결혼식의 하객들의 비웃음을 샀다가 반품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주일도 안 돼 그것이 다비드를 깎은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라는 것 때문에 유명세를 타면서, 도니는 오히려 내기로 했던 돈의 2배를 내며 이를 가져가기도 했다. 또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또한 그를 엿먹이려던 경쟁자인 브라만테가 그에게 회화를 그리라고 요구할 것을 율리오 2세에게 종용한 결과로 나온 작품이었다. 이를 볼 때 그의 회화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아마 당시 예술 관련 업계에서는 대부분 알고 있었던 사실인 듯.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벽화 제작법을 그리는 동시에 공부하면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해냈고,[5] 그를 통해 회화 분야에서도 거장으로 남게 되었다.
유럽도 예술가에 대한 세간의 대접은 르네상스 시대 이전까지는 그냥 환쟁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래에도 언급하는 대로, 망한 귀족 가문이라도 귀족이라는 자부심이 있던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조각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엄청난 반대를 했을 정도. 하지만 이후 르네상스 시대 중세 문명의 발전에 가속도가 붙고, 여러 재능들이 발굴되며 예술가의 위상이 조금씩 올라갔다. 미켈란젤로는 이렇게 예술가의 지위를 높이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던 세대 중 한 명이다. 물론 미켈란젤로 혼자서 이런 일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전 세대부터 이런 발전의 토양이 만들어져 왔지만 한 번에 과실을 맺은 것은 미켈란젤로와 이후 세대이며, 그 과정에서 미켈란젤로는 예술가 중에서는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한 인물 중 한 명이고, 미켈란젤로만큼 예술가의 위상을 끌어올리는 데에 한몫한 예술가는 있어도 능가했다고 거론될만한 예술가를 찾기 힘들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6]
4. 대인관계
4.1. 레오나르도 다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 한 세대 뒤의 인물로, 젊었을 때는 대선배인 레오나르도에게 경쟁심을 불태우는 루키 포지션이었다. 레오나르도와 피렌체 베키오 궁전 벽화 대결까지 벌였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 완성되었다면 미술계의 영원한 보물이 되었겠지만 두 사람 다 완성시키지 못했다.[7] 특이하게도 이 선의의 대결에서 두 사람은 모두 서로 부담감과 특이한 호기심으로 탐색하는데 그쳤다. 실제로 그들의 당시 스케치 중 몇 장에는 서로의 스타일을 반영해 보려고 모방한 티가 보이기도 했다.그 뒤에도 이 둘의 라이벌 관계가 유지되었다. 미켈란젤로는 회화를 "사람의 눈을 속이려 드는 수작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조각만 못하다."라고 깎아내렸고[8], 레오나르도는 "조각가의 모습은 마치 머리에 빵가루를 잔뜩 뒤집어쓴 제빵사 같다."라고 했다.[9]
참고로 레오나르도가 미켈란젤로보다 23세나 연상이었는데,[10] 대선배 레오나르도를 존중할 줄 몰랐던 미켈란젤로의 싸가지와 스무 살도 넘게 어린 친구의 치기를 기를 쓰고 이기려 들었던 레오나르도의 유치함이 합쳐져 저 둘은 정말 초등학생들처럼 유치하게 싸우며 살았다. 그나마 두 사람을 이해해 주자면 당시 예술가라는 직업은 결국 지금의 프리랜서와 비슷한 개념이었고, 조금 더 실력이 있고 명성이 높은 쪽이 더 좋은 계약을 따내게 되어 있다. 연상에 대한 존중을 챙기거나 연하에 대한 관대함을 생각할 정도로 여유있는 처지가 아니었을 것이다.[11]두 사람의 싸가지 & 속좁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는데, 잘생긴 외모와 언변으로 인기가 많았고 젊은 추종자를 많이 이끌고 다녔던 레오나르도에게 어느 날 광장에서 추종자 한 명이 단테의 시에 대해 모르는 걸 물어보았다. 레오나르도는 마침 그때 지나가던 미켈란젤로를 보았고 항상 패션에 신경을 쓰던 레오나르도와 달리 넝마같은 옷을 입고 대리석 가루를 뒤집어 쓴 미켈란젤로를 보자 곯려주고 싶었는지 "저 젊은 친구가 나보다 더 잘 알 거요."라고 했다.
사실 한 번 봐도 뉘앙스를 이해할 수 있듯이 '쟤한테 물어봐'라기보다 '저기 쟤 옷 입은 꼴 좀 봐. 단테를 알긴 지가 쥐뿔 알겠어?'에 가까운 놀림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나와 있듯이 로렌초 공방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높은 수준의 교양을 쌓게 했고, 더군다나 단테는 미켈란젤로가 가장 좋아하는 문인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레오나르도의 추종자들은 미켈란젤로의 몰골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기까지 했다. 자기 무시하면 교황한테도 대드는 미켈란젤로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사실 레오나르도는 지뢰를 밟은 정도가 아니라 그 위에서 점프를 해 댄 셈.
당연히 미켈란젤로의 성질머리는 폭발했는데하고 쏘아붙였다. 그리고 말하다가 화가 더 났는지 2차로 폭발해 극딜하길
"그 동상을 완성시킬 줄 알고 네놈한테 일을 맡긴 그 밀라노 놈은 천하에 둘도 없는 돌대가리야!"
라고 퍼부어준 뒤 자리를 떴다 한다. 레오나르도는 그말에 대꾸도 못하고 입만 뻐끔뻐끔 했다고. 애초에 레오나르도에게 이렇게까지 당돌한 말을 뱉을 수 있는 인간은 별로 없었다.이 일화 말고도 두 사람 사이의 키배 및 분쟁에 관한 일화는 수도 없이 많다. 상기한 피렌체 베키오 궁전에서 앙기아리 전투(레오나르도) vs 카시나의 전투(미켈란젤로)로 서로 경쟁할 당시에는 사이좋게 쌍욕을 면전에서 교환할 정도로 사이가 최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작업 중 니스가 녹아내려 그림이 엉망이 되었을 때 레오나르도의 안티가 그걸 보고 "영감탱이 꼴 좋게 됐군"이라고 했을 때에는 미켈란젤로가 그의 턱에 주먹을 날렸고 "너 같은 게 진정한 예술을 알기나 하느냐"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13]
일례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성당 부벽을 장식할 '다비드'의 조각을 맡을 사람을 물색하다가 당시에는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미켈란젤로에게 그 일을 맡겼을 때 레오나르도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나마 만들다가 망하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걸작이 태어났으니 분노는 2배. 위에도 써 있지만 이 다비드 상의 질이 생각보다 너무나 좋자 성당 측은 "이걸 부벽이나 장식하려고 놓는 건 낭비다"라는 판단 하에 새로운 거치 장소를 물색하고자 회의를 여는데, 이 회의에는 레오나르도 역시 끼어 있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가 "그냥 구석탱이에 처박아두죠."라는 뉘앙스로 말한 것 역시 유명한 일화. 당연히 미켈란젤로의 뇌 속에서는 레오나르도에게 영원히 떼어지지 않을 '혐' 마크가 붙어 버렸다.
거기에 둘 모두 자신의 지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릴 줄 몰랐다. 레오나르도도 미켈란젤로도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으로 인체 해부를 해 댔으며 사실상 그들의 재능이 교황 등 윗줄에서 인정받고 소중히 여겨지지 않았다면 엄벌을 받았을 것이다.
미완성작이 많은 것 역시 공통점. 다만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와 비교했을 때에 완성품이 더 많기도 하다. 애초에 미켈란젤로가 미완성작이 많은 건 레오나르도처럼 하나 만드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집중을 못 해서가 아니라 젊은 시절 자신의 기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되도 않게 계약을 많이 잡아서 그렇다. 미켈란젤로가 수락하고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는 율리오 2세의 영묘를 위한 40개의 조각, 12사도 조각, 카시나 전투 벽화 등이 있다. 미켈란젤로 특유의 엄청난 작품 제작 속도를 감안해도 하나에 1년이 걸린다 치면 이거 다 만드는 데 53년이 걸리는 꼴.
4.2. 라파엘로 산치오
또 다른 3대 거장인 라파엘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라파엘로가 처음에 먼저 경의를 표했다고 하는데, 미켈란젤로가 후배 대접은커녕 자신의 경쟁자로 생각하고 까칠하게 대하자 이후 라파엘로도 미켈란젤로를 탐탁치 않게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놓고 쌍욕까지 면전에서 나누던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라파엘로는 연하여서 그랬는지 자신을 무시하든 말든 미켈란젤로를 존중하기는 했다고 한다.| 한번은 바티칸에서 라파엘로가 귀족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을 본 미켈란젤로가 "귀족 도련님처럼 찬미자들에게 둘러싸여 어디를 가나?" 하고 묻자,[14] 라파엘로가 "그럼, 당신은 사형집행인처럼 혼자서 어디를 그렇게 가시나요?"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
또한,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미켈란젤로의 얼굴을 비관론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얼굴로 써먹기도 하고 여러 그림에서 미켈란젤로 화풍의 불끈불끈 근육질 캐릭들이 찌질한 모습으로 죽거나 꼴불견이 되는 모습을 넣어 미켈란젤로를 은근히 조롱하며 깠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과장이다. 본래 라파엘로는 선배 예술인들의 걸작을 많이 연구하고 오마주하면서 자신의 화풍을 형성하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레오나르도의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와 스푸마토 기법, 미켈란젤로의 인체 묘사를 연구했으며 스승인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그림 구성을 거의 베끼다시피 차용한 적도 있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작업을 지척에서 지켜보면서 그의 인체묘사법을 연구했다.[15] 소문에 의하면 경쟁심이 강했던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자신의 그림을 보는 것에 신경이 쓰여 라파엘로가 그림을 못 보도록 천장화 작업시에 아예 문을 걸어잠갔다고도 하는데 미켈란젤로와 앙숙이었던 브라만테가 라파엘로에게 열쇠를 주어 은밀하게 볼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제의가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라파엘로에게 이를 맡기는게 어떻겠냐고 교황에게 간언했었고,[16]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제작 이전인 1511년 성모 승천 대축일에 중간점검 차원에서 천장화를 대대적으로 공개한 적이 있음을 고려하면 소문에 불과할 것이다.
아테네 학당에서 미켈란젤로를 헤라이클레이토스의 모델로 쓴 것은 이 천장화의 공개 이후에 크게 감명을 받은 라파엘로가 추가적으로 그린 것이다. 개인적인 알력이야 어떻든 간에 다른 예술가를 자신의 작품에 등장시킨다는 것은 경의의 표시이며 생전 라파엘로의 성격을 생각해봤을 때 이는 미켈란젤로의 디스라고 보기 어렵다. 다만 미켈란젤로는 완성작 속의 자신이 외톨이처럼 있는 모습에 무척 불쾌해했었다고는 하나 생전 미켈란젤로가 주변인들에게 보여주었던 독고다이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라파엘로가 그를 헤라클레이토스로 묘사한 것은 실은 라파엘로의 관찰력이 정확했다는 뜻이다. 후에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그린 헤라클레이토스의 모습을 차용하여 예언자 예레미야를 그리기도 했다.
그래도 라파엘로의 뛰어난 실력은 인정했는지, 로마 산타고스티노 성당에서 의뢰해 라파엘로가 그린 프레스코화 <예언자 이사야>에 대해 주문자가 너무 비싼 값을 치렀다며 투덜거리자 성당으로 가서 그림을 보고는 "그 돈은 그림에 그려진 사람의 무릎 값밖에 되지 않는다"라며 비웃은 적도 있었다.[17] 생전에 이들의 관계야 어찌됐든 성 베드로 대성당 건립시 많은 공헌을 했던 예술가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현재 바티칸 뮤지엄 입구에 나란히 부조로 조각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5. 대중매체에서
- 1965년 개봉한 영화 <고뇌와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에서는 배우 찰턴 헤스턴이 주인공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연기했다. 교황 율리오 2세(렉스 해리슨 분)가 미켈란젤로에게 억지로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한 이야기가 중심으로, 둘의 애증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캐럴 리드 연출, 제리 골드스미스와 앨릭스 노스 작곡.
- 2008년 미국 드라마 <튜더스>에 2번 살짝 나왔다. 모두 바오로 3세가 등장하는 시즌 2의 장면. 하나는 벽화를 그리면서 조수들을 닦달하는 모습인데, 장발을 늘어뜨린 형색. 교황 바오로 3세는 "괴팍하지만 천재이니 용서해 줘야 한다"며 넘어가 준다. 이후 그에게 최후의 심판 그림을 의뢰했다는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끝.
- <가면라이더 고스트>에서는 르네상스 3대 예술가 중 한 명,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혼이 담긴 아이콘을 사용해 그 능력을 얻은 안마. 몸에서 뱀의 형상을 만들어내 공격할 수 있다. 10년 전 세상에서 다빈치 안마를 되살리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강한 동경을 가진 어린 아카리를 끌고 가려다 당시 고스트 헌터로 활동하던 텐쿠지 류에게 저지당한다. 그러다 미켈란젤로 아이콘을 사용하여 안마 슈피리어 미켈란젤로로 변신해 류에게 치명상을 입힌다. 하지만 텐쿠지 타케루와 토마리 신노스케가 뒤늦게 류를 발견했을 때 류가 미켈란젤로 아이콘을 가진 것으로 보아 결국 류에게 당한 것으로 보인다.
- 게임 <대항해시대 5>에서는 열전 퀘스트에서 상인으로 활동하는 아이린 브라운이 고객의 의뢰에 맞춰 고객의 저택에 장식을 꾸미도록 디자인을 부탁하기 위해 피렌체에 찾아와 후원자가 되겠다고 하자 이를 수락하며, 고객의 저택에 장식할 보석을 논의해 아이린과 주인공 일행에게 호박, 산호, 공작석, 대리석 등을 가져오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 아이린 브라운이 물건을 한가지 구할 때마다 뜬금없이 아이린을 엄마라고 부르기도 하며, 의뢰 내용에 해당하는 조각한 보석으로 장식되어 빛이 들어오는 양에 따라 색이 변하거나 모양이 다르게 변하는 꽃병처럼 장식할 수 있는 대리석상이나 아이린이 딸에게 줄 수 있게 한 대리석으로 조각한 새끼손가락 정도의 크기인 고양이를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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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ate/Grand Order>에서는 라이벌 다 빈치의 막간 이야기에서 망령의 형상으로 등장. 다 빈치는 망령이 돼 버린 일생일대의 라이벌을 보고 안타까움을 내비치며 성불시켜준다. 다 빈치는 미켈란젤로에 대해 영령의 좌에 머무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표현하기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영령이 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 다빈치는 그의 다비드 상을 처음 보았을 때를 일생일대 최대의 충격으로 묘사했다. 그 외에 발렌타인 데이에 그의 다비드 상 머리를 모티브로 만든 초콜릿을 선물한 다비드의 모델 본인도 있다. 다윗이 다비드 상과 닮게 디자인된 건 덤.
6. 여담
- 1530년 카를 5세의 군대에 피렌체가 침공당했을 때(가비나라 전투)에는 방위 대책 위원 중 한 명으로 뽑혀 성벽 건축을 맡기도 했다.[18] 간혹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약간 황당한 성벽을 이 때와 연결시켜 그가 방위 대책 위원으로 훌륭하진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성벽은 다른 때에 설계한 성벽이다. 오히려 임기응변으로 양가죽을 이어 만든 천을 이용해 대포 공격을 막는 등 굉장히 현실적이면서도 기발한 방위대책 위원이었다. 건축공학이란 건 엄연히 전략기술에 속하며 레오나르도도 미켈란젤로도 예술 이전에 전략기술자였던 것. 하지만 어쨌든 그가 몸담은 피렌체는 결국 졌다.
- 그의 외모에 대한 평가는 추남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크게 비뚤어진 코인데, 어린 시절 공방 제자 시절에 다른 공방학생의 작품을 신랄하게 까내렸다가 분노의 수정펀치를 얻어맞고 코가 부러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미켈란젤로는 남을 까는 것에 대해 많이 신중해졌다나. 물론 옛날에 비해서는 말이다. 그 후 예술가로서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다시 독설이 독해졌다가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금 유해진 경향이 있다.
-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유별난 행동은 자신의 스케치를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업 중 그린 스케치들을 작업이 끝나고 폐기하거나 말년에 대부분 다 모아서 불태워버린 탓에, 지금 남아있는 스케치들 중 확실하게 미켈란젤로 것인지 알 수 있는 것들은 매우 적고 위작으로 판명난 것도 굉장히 많다. 미켈란젤로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상 보기에 별로 좋지 않았던가, 그런 흔적들 따위는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듯 싶다. 다빈치가 스케치북과 노트를 몇 십 권이나 남겨 놓은 것에 비해 대비된다.
- 베네치아의 화가인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그림 <다나에>을 보고 한마디 하기도 했다. "우아한 양식을 터득했고 생생한 기법을 구사하지만 데생의 기본을 배우지 않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훈련이 부족한 것 같다. 만일 그 단점만 보완한다면 완벽한 화가가 될 텐데."라고 했다. 훗날 티치아노는 당대 최고 슈퍼스타 국제화가로 성장한다. 특히 티치아노는 유럽의 군주들의 의뢰를 받고 그들의 생동감 넘치는 초상화들을 그려주고 후한 사례를 받는 등 군주와 예술가가 본격적으로 계약을 통해 미술품을 주고 받는 관례를 확립시키면서 예술가의 재정 기반을 크게 확대해놓는다. 로마를 털어버린 카를 5세 황제와 그의 콩라인 라이벌인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까지 그릴 정도로 권력자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었으며 스페인 바로크 시대를 열어 미술사적으로는 피카소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쳤다고까지 평가받는 인물. 그러나 이는 미켈란젤로가 후배 예술인의 작품에 대한 심미안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인체를 묘사하는 기법의 차이로 인한 이견이었다고 보면 된다. 미켈란젤로가 인체의 형태 묘사에 주력했다면 티치아노는 자유로운 색채를 표현하는 데에 능했다. 물론 티치아노는 사실적인 묘사에도 매우 능한 화가라서 그가 그린 군주들의 플레이트 갑옷을 보면 갑옷의 질감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놨다.
- 한 성당에서 성가정[19]을 소재로 한 그림을 의뢰한 적이 있었다. 본좌급의 실력으로 매우 잘 그려놓았지만, 요셉의 얼굴이 매우 우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에 신부가 왜 이러냐고 물으니 미켈란젤로 曰, "친아들이 예수가 아니잖아요."
- 미켈란젤로의 그림이나 조각에 나오는 여인들을 보면 근육미가 남다르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보면 여성마저도 남성적으로 그려놓았다. 실제 여성에게 없는 근육이 묘사되어 있기도 한데, 여기에 대해서 앞서 언급된 대로 금욕주의자라서 여자를 멀리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당시에는 나체 모델이 되어줄 여성이 없기에 남자 모델을 보고 여자를 그렸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편으로 주요 의뢰주였던 성직자들을 비꼬거나 골탕먹일 속셈으로 그랬다는 주장도 있다.[20] 또 여성의 신체를 균형미가 없다고 폄하하기도 했다. 여성을 비하했다기 보다 미켈란젤로 본인의 미적 감각이 남성의 신체적 미를 더 선호했다는 편으로 이해하자.[21] 미켈란젤로 본인이 남긴 로맨틱한 시를 보면 괄괄한 성격의 거장이 의외로 수줍은 면이 많았다는 걸 알 수 있다.
- 근육에 대한 집착, 그리고 그 묘사는 너무나 뛰어났고 이 과정에서 불법으로 해부를 했다가 옥살이를 할 뻔한 기록도 남아 있다. 하지만 기실 미켈란젤로는 사실적으로 묘사를 하는 주의의 예술가는 아니었으며, 눈치채기 힘들지만 극적인 표현이나 더 나은 전달력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비율조차 희생하는 편이었다. 그의 대표작인 피에타와 다비드 상 모두 정면이나 위에서 바라보면 비율이 심히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피에타 상은 성모가 예수보다 더 큰 체구를 가지고 있으며, 다비드 상은 황금 비율은 어디 팔아먹은 대두다. 이는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게 되는 조각상의 특성상 비율을 정확히 지켜서 만들면 오히려 위쪽에 있는 얼굴 부분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눈치채기 힘들다고 말한 것처럼, 미켈란젤로는 이를 사람들이 '이상한데?' 라고 느끼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눈을 속이는 기술이 뛰어났다. 사실 미켈란젤로가 이 기술에 뛰어났다기보다 본격적으로 이러한 기법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하는 게 어울릴 듯. 그 이전의 예술가들도 이런 과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의 스승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그림에서 느껴질 수 있듯이 의도적인 게 아니라 그냥 인체 비례를 잘 못 맞춰서 이런 경우도 있고, 도나텔로의 다비드에서처럼 앞쪽의 곡선미를 강조하다가 뒷 쪽의 사실성을 포기해 버리는 등 미켈란젤로만큼 능수능란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미켈란젤로는 이런 과장을 통해 당대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인체의 역동성에 대한 표현을 극도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한다. 바로 이 점이 미켈란젤로가 미술사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이기도 하다. 그 이전의 회화들 그리고 그와 동시대의 회화들을 본다면 미켈란젤로만큼 인체의 역동성을 탁월하게 잘 살린 예술가는 없다.
- 글을 읽지 못하는 하인을 위해서 식료품 목록을 그림으로 그려서 남긴 메모가 화제가 됐다.#
- 도스 시절 악명을 떨쳤던 컴퓨터 바이러스인 미켈란젤로 바이러스는 그의 생일인 3월 6일에 발동된다고 하여 미켈란젤로 바이러스로 불렸다.
- 르네상스 3대 거장의 다른 2명을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꼬장꼬장하고 성관계를 질색하는 데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경멸했지만 언변이 능했고 외모가 잘생긴 데다가 외출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에는 당시로서는 센스입게 잘 차려입고 다니고 박학다식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호감을 쉽게 샀다. 그래서 그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주변에는 늘 그를 숭배하는 젊은 청년들이 따라다녔다. 라파엘로 산치오는 레오나르도처럼 꼬장꼬장한 면이 없이 고용주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데다가 잘생겼고 본인 역시 여자를 좋아한다고 밝히면서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못생긴 데다가 본인도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전혀 없어서 길거리로 나올 때에도 작업 중 지저분해진 몰골 그대로 다녔다. 라파엘로처럼 원만한 성격도 아니고 레오나르도처럼 매력적인 사람인 것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매우 거만한 성격이었고 독설을 자제하지 않아서 대인관계가 나빠 친구도 없었다. 메디치 가문에서 수학하던 시절 동문들에게 독설을 내뱉었다가 토리지아노라는 친구에게 주먹으로 코를 맞아서 코뼈가 주저앉은 적도 있었으며[22] 심지어 동문들에게 미움받아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었다. 또한 윗사람이라고 예외는 없어서 비위를 맞추기는 커녕 수틀리면 교황에게도 독설을 하고 대들어서 화가 난 교황에게 얻어맞았으며 더는 일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등 사람들이 생각하는 전형적인 천재의 이미지였다.
- 사보나롤라와 개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매우 금욕적이었는데 그가 가장 좋아했던 문학 작품이 단테의 신곡이라는 데에서 그의 성향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술도 거의 마시지 않았고 소식가였으며 여자는 경멸했던 데다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 많아서[23] 지출이 많았지 본인의 사치를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다. 교황 율리오 2세에게 돈 안 준다고 보챈 것도 돈을 밝힌 게 아니라 율리오 2세가 줄 돈을 안 줘서 그런 것인데 일 시키고 나서 미켈란젤로한테 1년이나 보수를 안 주기까지 했다. 오히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를 맡게 되며 자신의 전임자였던 상갈로 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돈 욕심이 나서 그러지?'라는 비방을 받자 무보수로 일 할 것이라 천명하기도 했다. 대신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예술에 쏟았고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동시대 모든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역동적이다. 현재 각종 패션쇼, 사진촬영에서 모델들이 과장되면서도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것[24]의 시발점은 이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회화에 있어서 미켈란젤로의 업적을 한마디로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그가 남긴 가장 큰 의의를 꼽으라면 역시 인체의 역동성을 하나의 미학으로 발견한 것을 들 수 있다. 비단 이런 역동성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스케일이 거대한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의 스케일과 그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미켈란젤로의 작풍을 가장 잘 설명해 준다. 단순히 스케일만 큰 게 아니라 남긴 작품도 상당히 많다.
- 미켈란젤로도 사람인지라 모두와 원수를 지고 산 것은 아니었다. 못생긴 외모, 괴팍한 성격, 금욕적이기까지 한 일상생활을 가진 그였지만 인류사에서도 이름을 영원히 남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실력 자체만으로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거기에 금욕적인 생활이 더해지니 어떤 사람들은 그를 마치 현자처럼 우러러 보기도 했다. 사실 바꿔 말하면 미켈란젤로는 수평적인 인간관계는 별로 없었다. 항상 그를 찍어누르고 고용하는 사람들 아니면 그를 일방적으로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극소수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항상 생활고, 건강 문제, 돈을 요구하는 가족들과의 불화 때문에 한 개인으로서는 굉장히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이다. 회고록에서는 아예 자살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 게이라는 루머가 있는데 평소 여성을 경멸했으며 남성 모델에게 남성(의 육체)을 찬미하는 시를 쓰고 러브레터처럼 보냈기 때문이다.
- 미켈란젤로가 죽기 3일 전에 이탈리아에서 위대한 과학자가 태어났다.
- 그림에 이스터 에그 같이 숨겨둔 요소가 굉장히 많지만 이 중 일부는 5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다보니 확실히 그가 숨겨둔 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 당장 시스티나 천장화만 하더라도 수많은 이스터 에그 추정 요소들이 많다. 아담의 창조로 유명한 구획은 잘 보면 뇌의 단면도로 추정되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어깨 관절의 모습이 숨겨진 무녀의 다리, 폐와 기관지의 모습이 숨겨진 하와, 콩팥의 단면도를 나타낸 형상과 뇌의 생김새를 묘사한 목 부분 등 찾아보면 수도 없다.[25] 물론 미켈란젤로가 '이건 이거다'라고 하고 가진 않았으니 논란이 있긴 하지만 이런 식의 인체 해부도와 유사성을 가진 구도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는 점, 그가 근육 묘사에 광기에 가까울 정도의 집착을 보여주었으며 해부를 직접 해보지 않았으면 모를 정도로 인체에 통달해 있었다는 점 때문에 상당히 유력한 추측이다. 최후의 심판에서는 이런 이스터 에그가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림을 잘 보면 전체적으로 해골(다스 베이더)의 형태를 띄고 있으며 바르톨로메오가 들고 있는 살가죽에는 미켈란젤로 본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작업이 진행되던 도중 교황청 의전관이었던 바지오 체세나 추기경이 “예수를 비롯한 모든 유명한 성인들께서 나체로 벌거벗고 있다는 이유로 그림이 불경하다”며 이 “그림이 가장 어울릴 만한 장소는 창녀촌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자 미켈란젤로는 그를 그림 구석에 지옥의 왕 미노스로 묘사해 그려 넣어 복수했다. 이 악마 그림을 발견한 추기경은 교황 바오로 3세 앞에 엎드려 울면서 그림에서 자신의 모습을 지워달라고 애원했지만 바오로 3세는 “체세나 추기경님이 연옥에만 계셨어도 제가 어떻게 해보겠는데 사람인 제가 지옥에서 추기경님을 구원하기란 불가능합니다.”라면서 미켈란젤로의 승리를 선언했다. 사실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자 한 취지 자체가 사코 디 로마 사건에서 입은 상처를 기억하고자 하는 감정적인 입장에서 기획된 것이니 어느 정도 융통성이 있는 것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시킨[26] 바오로 3세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기[27] 때문에 교황이 미사를 집전할 때 신자들의 시야로는 그의 머리가 그림의 지옥의 입구에 걸리도록 해 놨다. 추기경보다도 예술가를 선택한 교황이었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황송한 처사를 내려주었음에도 애초에 마음에 안 든다고 미켈란젤로는 그런 교황에게도 좋은 대접을 해주진 않았던 것.
- 12살에 숀가우어의 그림을 모작한 것이 유명하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로망스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영어 단어 '르네상스 맨'(Renaissance man)이 팔방미인, 다재다능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할 정도.[3] 그 외에도 캄피돌리오 광장과 같은 여러 건축물들을 설계했다. 또 다른 뛰어난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와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미켈란젤로도 그의 재능은 인정했다. 다만 그 특유의 강마에적인 까임의 대상에 브라만테도 들어갔기에 문제였다. 당연히 브라만테는 열폭. 브라만테와 사이가 안 좋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다. 브라만테가 건축을 하며 이익을 남기기 위해 재료를 빼돌렸고 미켈란젤로가 이를 지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확실한 것은 둘 다 성격은 별로였다는 것.[4] 그러나 아름답진 않고, 남성적인 면이 강했던 귀족 과부였다고 한다. 둘의 관계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관계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폐인이 됐다고 적혀 있다.[5]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보여주듯,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서 초기에 그가 그린 부분과 후기에 그린 부분은 작화 능력에서 차이가 나타난다는 평가가 있다.[6]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다빈치 등 당대에 시대를 초월한 전설적인 거장들이 다수 존재했던 덕분에, 위상은 굉장히 높아졌다. 미켈란젤로는 살아있을 때 '신'이라고 불릴 지경이었고, 레오나르도는 예술가로서는 죽을 때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와서 지켜봐줄 정도였다. 라파엘로는 당대의 지식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교류했고, 특히 교황 레오 10세는 그를 매우 신임하여 추기경으로 임명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7]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개발해서 칠한 니스의 성분 문제로 말그대로 그림이 녹아내려 버리는 등 거듭되는 실패, 미켈란젤로는 특유의 변덕스러움과 교황의 부름에 의해 끌려나갔다. 그나마 남아 있던 흔적들조차 전란 중에 사라져 버렸다. 다만 레오나르도의 작품(앙기아리 전투)의 경우엔 루벤스가 모사한 스케치가 남아있다. 그리고 2012년에 들어와 베키오 궁전에서 레오나르도가 그렸던 '앙기아리 전투'의 흔적이 발견되어 고고학계를 흥분 시켰다.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또한 그림을 준비하며 그가 직접 준비한 스케치 일부가 여기저기 남아있다. 영국 박물관(British Museum), 알베르티나 박물관(Albertina Museum), 그리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 of Art)에 스케치와 도면이 있다.[8] 미켈란젤로의 조각 사랑은 말년에 최후의 심판을 하기 전까지 계속 된 듯 싶다. 그의 이런 성격은 너무나 유명했기에, 시스티나 경당 천장화를 강요한 교황에게 얼마나 큰 반감을 가졌을지 상상이 간다. 그래도 말년에 그는 "조각과 회화를 서로 비교하며 우위를 가르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라고 인정했다.[9] 조각가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상 평상시에도 조각하다가 씻지도 않고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미켈란젤로를 겨냥한 말.[10] 레오나르도가 1452년생, 미켈란젤로 1475년생.[11] 사실 선배 예술인에 대해 존중하지 않았던 건 레오나르도도 마찬가지였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성모영보를 보고 천사가 성모를 위협하는 듯이 그렸다며 주변인들에게 그림을 저따위로 그리지 말라며 대차게 깠던 건 유명한 일화다.[12] 사실 레오나르도의 행동에 대한 기록을 보면, 현대 정신건강의학과의 ADHD 진단 기준에 전부 들어맞는다고 한다.[13] 일본 슈에이샤에서 나온 '세계의 역사' 제8권에 실려 있는 내용.[14] 라파엘로는 매우 사교적인 성격으로 유명했고, 미켈란젤로는 그 정반대로 유명했다.[15] 바티칸 미술관 내에 있는 <헬리오도루스의 추방>이라는 작품을 보면 쫓겨나는 헬리오도루스의 모습은 천지창조의 아담의 신체 구도를 반전시켜 놓은 것과 다름없다.[16] 이는 바사리의 말에 따른 내용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켈란젤로는 프레스코화와 거기에 쓰이는 화구의 사용법을 전연 모른다는 구실로 그 일을 라파엘로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은밀히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농간이었으며, 특히 브라만테의 사주에 넘어간 교황의 마음만 자극할 따름이었다.'[17] 비슷한 일화는 다빈치보다도 선배격 예술가인 도나텔로도 가지고 있다. 스폰서였던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중개로 의뢰를 받아 청동상을 만들었는데 의뢰인이 너무 비싸다고 불평하자 '너 따위의 의뢰를 받느니 콩이나 파는 게 낫겠다'고 말하면서 청동상을 내던져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의뢰인도 후회하고 코시모도 다시 만들어달라고 권했지만 도나텔로는 듣지도 않았다나.[18] 우습게도 이 피렌체를 침공한 카를 5세와 교황은 한 편이었다. 교황은 사코 디 로마에서 로마를 털린 이후 결국 자존심을 굽히고 카를 5세와 화해해 같은 편을 먹었다. 한 마디로 이 위대한 예술가는 자신의 고용주를 배반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서 피렌체가 패망하고 카를 5세가 승리했기에 사형당할 수도 있었지만, 교황이 앞장서서 미켈란젤로를 그냥 용서해 주었고, 다시 일하라고 독려했다. 다만 이 교황도 나름대로 뒤끝은 있던지라, 과거 로마를 털었던 카를 5세에게 여전히 앙금이 있어서 그 분노를 담아 '최후의 심판'을 그리기로 하는데 그 적임을 다름 아닌 미켈란젤로에게 맡겼다.[19] 예수, 성모 마리아, 나자렛의 요셉.[20] 그니까 성직자가 지적하면 '여자 알몸을 잘 아시네요?' 같은 식으로.[21] 사실 이 같은 경향은 미켈란젤로만의 태도라고 보기 어려운 면도 있다. 미술에서 여성 누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의외로 최근이고, 당시 '육체미'와 같은 표현들은 어디까지나 남자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었다.[22] 이후 토리지아노는 로렌초의 총애를 받는 미켈란젤로를 구타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렌체를 떠나게 된다. 다만 미켈란젤로가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토리지아노에 대한 독설을 내뱉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애초에 미켈란젤로의 성미를 고려한다면 설득력이 없진 않는 대목이다. 이 토리지아노라는 양반은 훗날 미켈란젤로의 죽빵을 날린 일화를 조르조 바사리에게 자랑스럽게 떠들었다고 한다. 주먹이 코에 닿는 순간 뼈와 연골이 흘러내렸다고 한다.[23] 아버지와 동생들이 걸핏하면 돈을 달라고 하니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24] 이를 '콘트라포스토'라고 한다. 사람은 일부러 하지 않는 이상 자연스러운 상태에서는 뻣뻣하게 어깨와 골반이 평행되게 서있지는 않다. 자연스러운 포즈는 어깨와 골반의 불균형에서 가장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며 이 포즈 기법을 통해 묘하게 뻣뻣하고 자연스럽지 못했던 미켈란젤로 이전의 예술품들은 이 때를 기점으로 자연스러운 포즈에서 과감한 포즈로까지 발전하게 된다.[25] <미켈란젤로 미술의 비밀>이란 책에서 이걸 매우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림 화질도 뛰어나고 소소하고 재미난 이야기도 간간히 들어있다.[26]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분명 어느 정도 기쁜 마음으로 이 일에 임했다. 원래 벽에 있던 예술가의 프레스코 벽화를 구식이라고 늘 욕해왔던 그이기에 이걸 대치하고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건 큰 기쁨을 주었을 것이다.[27] 바오로 3세는 누나가 알렉산데르 6세의 애첩이어서 그 빽으로 추기경이 된 사람이었고 교황이 된 후에는 가톨릭의 보수반동화에 앞장선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