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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국 제2대 국왕 다윗 דָּוִד | |||
하프를 연주하는 다윗 왕. 헤라드 반 혼토르스트. 1622년 작(作) | |||
<colbgcolor=#0038B8><colcolor=#fff> 본명 | דוד בן ישי (다비드 벤 이샤이)[1] | ||
출생 | 기원전 1040년 | ||
이스라엘 왕국 가나안 베들레헴 (現 팔레스타인 베들레헴) | |||
사망 | 기원전 970년 (향년 70세) | ||
이스라엘 왕국 예루살렘 | |||
묘소 | 예루살렘 다윗성 | ||
국적 | 이스라엘 왕국 | ||
재위 기간 | 제2대 이스라엘 국왕 | ||
기원전 1010년 ~ 기원전 970년 (40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38B8><colcolor=#fff> 지파 | 유다 지파 | |
부모 | 아버지 이새 | ||
형제자매 | 형 7명[2] | ||
배우자 | 미갈[3], 아히노암, 아비가일, 마아가, 학깃, 밧세바 등 | ||
자녀 | 아들 암논, 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야, 솔로몬 등, 딸 다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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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이 몸에 생기가 넘친다. 그 이름 목자이시니 인도하시는 길, 언제나 곧은 길이요, 나 비록 음산한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내 곁에 주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어라. 막대기와 지팡이로 인도하시니 걱정할 것 없어라.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한평생 은총과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님 집에 거하리이다. |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다윗/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사울을 이스라엘 왕의 자리에서 파면시켰다고 해서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슬퍼만 하고 있을 셈이냐?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길을 떠나거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에 사는 이새라는 사람에게로 보낸다. 그의 아들 가운데서 내가 왕으로 세울 사람을 하나 보아두었다." (중략) 이새가 사람을 보내어 데려온 그는 볼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다. 야훼께서 말씀을 내리셨다. "바로 이 아이다. 어서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
(상략)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요, 내 뜻을 다 이루어줄 사람이다. |
다윗은 여러모로 후대에 많은 영향을 남겼다. 예루살렘을 건설하여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가 치열하게 싸울 성지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그다. 물론 사울 때부터 그 단초를 보이긴 했으나, 이스라엘이 다윗 아래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나라 꼴을 갖추고 복잡한 중동 정세에서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이 이스라엘과 훗날의 팔레스타인 지역 국가들에겐 재앙이 되기도 했으니, 다윗 왕 시대에 군사•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해서 여러 강적들을 두들겨 준 것은 좋았으나, 아람이 아시리아의 발목을 열심히 잡아주던 중요한 시기에 하필이면 다윗 왕에게 일격을 당해서 아시리아의 급성장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덕분에 여유롭게 성장한 아시리아는 그때까지 대여섯 차례에 걸쳐 지배와 종속, 정복 관계를 뒤바꾸던 바빌로니아를 끝내 굴복시키고 메소포타미아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한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나중에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패망한 걸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의 융성기를 연 성군이 동시에 패망까지 준비한 셈이니 그야말로 아이러니. 하지만 이 책임을 모두 다윗에게만 전가할 수는 없고, 아람의 약화는 후일 북이스라엘과의 잦은 싸움도 한몫 했다고 봐야 한다.
후대에는 굴욕을 많이 당했다.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왕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7세가 쳐들어오자 그와 협상을 하기 위해 다윗 왕의 능을 털어서 은 3,000 달란트를 마련해 뇌물로 주고 포위를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예루살렘이 그간 수많은 침공과 점령, 파괴를 겪었는데 다윗 왕의 능에서 은 3,000 달란트라는 거금이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 시대로부터 불과 100년 이후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기록했으니 무조건 신빙성이 없다고 하기도 힘들다.[4][5]
현재 예루살렘에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했다는 마르코의 다락방 기념 교회 밑 지하에 다윗 왕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무덤은 진짜 다윗 왕의 무덤은 아니고 십자군 시대에 예루살렘 왕국에서 마르코의 다락방 기념 교회 밑에 다윗 왕을 기념하는 무덤을 세웠을 뿐이다. 십자군이 만든 이 가묘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의 성지가 되었다. 또한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두 신자가 함께 예배를 올리는 몇 안되는 곳이다.
근데 다윗의 행적을 생각해보면 나라가 안 망한 게 신기할 정도로 그의 치세 때 국가 막장 테크가 연속으로 터졌다.
- 왕은 되었지만 왕 되자마자 나라가 둘로 쪼개지고(이스보셋)[6]
- 이를 어찌어찌 합쳐놨더니 옆나라가 2번이나 쳐들어오고
- 이를 또 무찔렀더니 이번에는 먼 이웃나라가 시비를 걸어서 쳐들어가 박살을 내놓고
- 그 와중에 밧세바를 범하는 NTR을 저질러서 밧세바의 할아버지인 유능한 신하[7]가 사표를 내버렸고
- 이제 좀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방목해서 키운 큰아들(암논)이 배다른 여동생을 강간하고 그 배다른 여동생의 오빠가 빡쳐서 그 큰아들을 살해했으며
- 그 동생내미를 용서했더니 더 삐딱선을 타서 반란 일으켜 내전으로 번지고[8]
- 이 반란을 어찌어찌 막았더니, 어떤 양아치 하나(세바)가 반란 또 일으키고
- 또 정리하고 나니 역병 돌아 사람들 떼죽음 당하고(인구조사 사건)
- 말년에는 부하들한테 전쟁터에서 짐짝 취급 받았으며
- 후계자를 정해놓기만 하고 공표하지 않는 바람에 또 다른 욕심쟁이 아들내미(아도니야)가 왕위 계승을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키려 하는 등.[9]
다름이 아니라 다윗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지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데 그는 너무 피를 많이 흘려서 그에게는 허락치 아니하시고 그의 아들에게 성전건축을 하게 하시고 대신 다윗이 시키지도 않은 성전을 세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기특하게 여겨 다윗 왕조는 최소한 망하지는 않게 하신다는 약속이 있었다.[10]
거의 평생을 전쟁 속에서 살았는데, 이 때문인지 군부와 각 지파의 입김이 상당히 셌던 모양.[11] 그러나 전쟁 영웅이었던 다윗의 지속적인 왕권 강화 덕분에 후계자인 솔로몬의 치세 동안 각 지파의 수장과 선지자들이 솔로몬에게 감히 대들지 못하였다.[12]
사실 성경상 다윗이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이 바로 밧세바를 불륜했던 건데, 문제는 그것 때문에 다윗의 집안에서 말 그대로 칼이 떠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나라가 두동강이 나서, 둘 다 약해져서 그대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여자 하나 잘못 건드려서 그 대가로 자식들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것을 보고, 몇 번이고 목숨의 위험을 겪었으며 (그것도 자식에게) 종국엔 죽음 다음에도 다윗 본인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라 전체가 완전히 박살나버리는 엔딩을 맞은 것. 이걸 보면 다윗의 간통에 야훼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대충 감이 올 것이다... 또한 구약성경의 사무엘하 3장에서는 "사울 왕실과 다윗 왕실 사이의 싸움은 오래 계속되었다. 다윗은 갈수록 강해졌고 사울 왕실은 갈수록 약해졌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사울의 장군인 아브넬이 죽은 사울의 후궁인 리스바를 겁탈하자, 이를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이 문제 삼았는데 오히려 아브넬은 화를 내며 "내가 사울과 당신을 위해 충성을 바치고 당신을 다윗한테 넘겨주지 않았는데 하찮은 여자 일로 나를 꾸짖는 것이오? 이 나라 사울 왕실을 다윗한테 넘겨주어야겠소."라고 협박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문장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다윗이 사울로부터 평화적으로 권력을 넘겨받은 것이 아니라, 사울의 가문과 치열한 내전을 벌인 끝에 승리하여 힘으로 권력을 빼앗았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폭력적인 쿠데타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아울러 다윗의 손자인 르호보암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대로 한 노역을 줄여주지 않자, 그들은 화가 나서 "우리가 다윗에게서 받을 몫이 어디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것이 없구나. 다윗이여, 이제 네 집안이나 돌보아라."[13]고 울분을 터뜨렸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호보암의 조상인 다윗에 대한 반발심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음악가로서의 그의 위상은 더욱 뛰어난데, 최고의 시집으로 평가받는 시편의 상당 부분을 다윗 혼자서 집필했고, 이 문학적 가치는 역대 최고로 평가받는다. 다윗은 시를 집필할 때 꼭 악기를 연주하며 그 멜로디에 걸맞은 시를 썼는데, 어찌나 연주를 잘 하는지 10대 때 왕실 정식 연주가로 채용되기도 했다.
4. 영향력
다윗의 이미지와 에피소드는 이후 아서 왕이나 카롤루스 대제 등 중세 기사도 문학에 등장하는 위대한 왕의 이미지와 에피소드에 차용되기도 하는 등, 문화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미쳤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아도니야와 요압을 처리하는 것을 명시한 부분은 마리오 푸조의 영화 대부에서 그대로 패러디된다. 성경을 좀 읽어봤다면 유쾌한 장면.르네상스 시대에 미켈란젤로가 만든 유명한 누드 조각상, 다비드상의 주인공이다. 당연하겠지만 물론 르네상스 시대가 인간에 대한 탐구 때문에 누드로 표현한 것이지 실제의 다윗은 사람들 앞에서 누드로 다니진 않았다.
셜록 홈즈 시리즈 중 꼽추 사내 에피소드에서는 다윗의 이름이 사건의 전말을 암시한다. 부부 싸움 중 다윗의 영어 이름 'David'가 언급되고 이후 남편이 의문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아내가 그 이름을 꺼낸 이유는 남편이 다윗처럼 동료 군인의 여자(아내 본인)를 빼앗는 짓을 해 결혼 생활 내내 자신을 속였다는 배신감 때문이었다. 셜록 홈즈는 자신이 정말 뛰어난 탐정이라면 부부 싸움 중 튀어나온 이름 데이비드만으로 사건을 궤뚫어봤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80년대 KBS에서 방영된 영화판에서는 금발의 다윗이 나온다. 저예산을 자랑하는 열악한 수준이지만 의외로 성경에 충실하고 자잘한 이야기들, 이를테면 다윗을 숨겨주었다고 성직자들을 도륙하는 사울의 모습이나 용병 생활을 하는 다윗도 묘사한다. 문제가 있다면 성우 이정구가 소년 다윗도 더빙했다는 것 정도.
1985년 리처드 기어가 나온 영화 'King David'는 압살롬과 다말 스토리까지 그렸는데 고고학적인 고증이 정확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아래에 언급된 코딱지만한 흙벽돌 왕궁이라든지…[14] 영화 자체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고증의 정확함 덕분에 지금도 유튜브에 king david richard gere 라고 치면 이 영화의 장면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미갈과 결혼하는 다윗(리차드 기어). |
다윗과 밧세바. |
다윗의 막장은 CCM 그룹 '다윗의 장막'을 패러디한 그룹명이다.
Fate 시리즈에는 서번트로 등장. 항목 참조.
그림체나 연출 스타일에서 드림웍스의 이집트 왕자나 디즈니 작품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덕분에 국산 애니인 줄도 몰랐던 사람이 은근히 많다고 한다. 작화와 노래는 수준급이나 선교라는 주제에만 치우친 나머지 짙은 종교색채나 원작의 임팩트 있는 시퀀스들을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겉핥기식 급전개로 진행하는 등 밋밋한 각색 때문에 비종교인들에게 어필하진 못하여 흥행에선 실패하였다.[15] 현재는 유튜브에 저화질 풀버전만이 남아있다.
5. 가족관계
<rowcolor=#683235> 지위 | 성명 | 가족 | 비고 |
- (元妃) | 미갈 | 부친 사울 자녀 없음 | 사울의 차녀 다윗과 초혼, 3혼 |
원비 (元妃) | 아히노암 | 부모 미상 자녀 1남 | 암논의 모후 |
비 (妃) | 아비가일 | 부모 미상 자녀 1남 | 나발의 아내 다윗과 재혼 길르압의 모후 |
비 (妃) | 마아가 | 부친 달매[16] 자녀 1남 1녀 | 압살롬과 다말의 모후 |
비 (妃) | 학깃 | 부친 미상 자녀 1남 | 아도니야의 모후 |
대비 (大妃) | 밧세바 | 조부 아히도벨 부친 엘리암 자녀 5남 | 우리야의 아내 다윗과 재혼 솔로몬의 모후 |
6. 여담
6.1. 예술적 조예
솔로몬과 함께 시편의 주요 저자로서 유명한데, 현대에는 다윗이 직접 지은 것 외에 다윗에게 바치는 노래 같은 것까지 전부 '다윗의 노래'로 뭉뚱그려 묶었다는 의견이 많다. 그가 살았던 삶이 참 굴곡이 심하고 고달팠던지라, 시편에는 그의 절절한 사연이 많이 묻어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자신을 도와달라며 간구하는 모습들이 서양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문화권에 큰 영향을 주었고, 시편의 유명한 여러 구절들은 서양은 물론 전 세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사랑받으며 기억되고 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등장하는 잭슨 이병은 적을 저격하기 전에 성경 구절을 읊으며 마음을 가다듬는데, 그 읊는 구절이 바로 다윗의 시편이다.현대에는 그가 조울증을 앓고 있었건 게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조증 특유의 과장된 자신과 돌출 행동을 보이다가도 "눈물로 밥을 해 먹는다"[17]라는 등, 우울증 증세에 해당하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가 다재다능한 행적 이면에 예민한 감정선으로 고생한 것만은 확실하다.
집안에서도 그리 대우와 기대를 받지 못한 끄트머리 아들이었고, 사무엘이 찾아왔을 때처럼 들에서 양을 보면서 노래와 악기로 찬양하며 혼자 있던 일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목동 일은 천시받고 고된 일이었는데 심지어 자신이 돌보는 양들을 잡아먹으려는 사자와 곰을 해치웠다는 이야기는 결국 다윗이 사자와 곰을 직접 상대할 만큼 험하게 컸다는 소리 아니겠는가. 게다가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에게 기름 붓기 위해 방문했을 때도 따로 언급하기 전까지 다윗을 부를 생각조차 없었으며, 다윗이 부친의 명으로 군에 입대한 형들에게 식량을 주러 갔을 때 형은 동생인 다윗에게 폭언을 내뱉기까지 했다.
즉 사람으로부터 소외되고 하느님과 진실로 깊은 교제를 나눌 기회가 많았음이 그를 “주의 마음에 합한 자”로 빚어준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체면조차 벗어던지고 춤추는 다윗의 묘사는 모든 계명 중의 으뜸인 “모든 것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의 한 예로 자주 언급된다. 그와 별개로 이런 성장 배경이 그를 일종의 애정결핍적인, 갈구하는 면을 만들었고, 밧세바와의 간음도 근본적으로는 영적인 나태함으로 가드가 풀린 것이 원인이지만 이런 성격 또한 한몫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다.
확실한 건, 다윗은 감수성이 상당히 풍부했다는 것이다. 예술적으로도 조예가 있었는지, 수금을 매우 잘 다루고 다윗의 시편은 종교적 가치를 떠나서 문학적으로도 큰 가치를 지녔다 평가받는다. 군사적 자질을 말할 것도 없고 상당히 다재다능했던 인물. 거리낄 것이 없어진 왕들이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흔한 일이고(아들인 솔로몬은 엄청난 단위의 여자를 두었다), 그런 이유로 밧세바에 집착했다기엔 나단을 통해 책망받을 때에도 언급되듯이 다윗이 고를 수 있는 여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굳이 자신의 충신의 아내를 범해야 할 필요가 없었던 것. 결국 다윗의 죄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고 설령 성격적 배경이 타당한 이유라고 해도 그것이 그의 소행을 정당화시켜줄 수도 없었다. 그래도 다윗은 나단에게 책망받았을 때에서나마 사울처럼 변명하거나 회피하는 대신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자리에 들어선다. 물론 회개한다고 처벌받지 않는 건 아니라서 본인의 가정과 나라가 개박살이 나버렸다.
6.2. 외모
다윗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다"라는 묘사가 있다. 여기에서 '붉다', '아름답다'는 말이 보통 여자의 외모를 칭찬할 때 쓰는 말인 걸 생각하면, 현대 기준으로 미소년에 가까운 외모였을 듯싶다. 그리고 요새야 미소년이란 명칭이 자랑일지 몰라도 저 시대에는 우락부락한 마초가 남성미의 표본이었기에, 남자가 예쁘다는 것은 곧 놀림거리였다.[18] 이 묘사는 골리앗이 다윗을 보고 업신여길 때도 나오는데 현대식으로 바꾸면 "계집애처럼 생긴 녀석이 맞짱 뜨자고 하다니 가소로운 것" 정도가 된다. 드웨인 존슨이나 제이슨 모모아 같이 생긴 골리앗 앞에 한류 아이돌 같이 생긴 소년이 맞짱을 뜨자고 나타난 것 같은 상황.6.3. 인명
서양권 인명 중 데이비드, 다비드, 다비트라는 이름이 이 사람으로부터 유래된 이름이다. 아랍-이슬람권에서도 다우드 이름으로 쓰인다. 모하마드 다우드 칸, 술탄 다우드, 다우드 킴 등이 있다.6.4. 실존 여부
실존을 의심하는 학자들도 있다. 성경의 내용과는 달리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보면 당시 팔레스타인의 주도권은 사마리아에서 계속 쥐고 있었고, 아래에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통일 왕국을 다스렸다는 다윗과 솔로몬의 궁궐로 추정되는 건물은 막상 매우 작은 저택 정도였지만 사마리아에서는 성서의 이스라엘 왕국 묘사처럼 레바논 삼나무와 상아로 장식된 화려한 궁궐 유적이 나왔으며, 주변 국가의 기록에서도 오므리, 아합, 예후 등 이스라엘 북왕국 국왕들은 실존이 확인되지만 다윗의 자손이라는 유다 남왕국은 막상 독립국가가 아닌 이스라엘의 봉신국으로 기록되고 있다.일단 다윗에 대한 당대의 금석문 기록이 단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고, 게다가 그마저도 다윗 사후 약 100여 년 뒤의 기록인데, 성서에서 선지자 엘리사가 아람 왕으로 세운 것으로 나오는 하사엘 2세가 건립한 텔 단 비문에 유다 왕 아하시야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를 "다윗 집에 속한 자"라고 부른 것이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하게 다윗의 이름이 기록된 경우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다윗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아서 왕처럼 후대 유다 왕들이 정통성을 위해 과장해서 기록한 전설상의 인물이거나, 실존했더라도 유다 지파의 족장에 지나지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에는 이스라엘 12지파는 사실은 별개의 부족이었다가 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에 이르러서야 통일되어 이스라엘로 묶이게 되었고 그 중 유다의 족장 여호사밧이 아합의 딸 아달리야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결혼동맹을 통해 이스라엘의 종속국이 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연방체제에 편입되었다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의 이스라엘 정복 이후 정치적인 혼란 속에서 유다 왕국의 요시야 왕이 아시리아가 물러간 옛 이스라엘 땅을 잠시 차지하면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통일 왕국 왕이었고 그 후손 요시야가 다시 이스라엘을 통일한다'고 선전하며 '통일 왕국'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는 견해가 지지를 얻고 있다.참고
다윗이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닐 것이라는 추측도 있는데, 다윗이란 이름은 지휘관을 의미하는 아카드어 "다위둠"에서 온 것으로 사울 휘하의 장군으로서, 또는 사울에 대항하는 반란군 대장으로서 받은 별명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사랑과 관련된 어근 ד-ו-ד (dwd)에서 유래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인데다가, 기원전 22세기의 아카드 왕 두두(𒁺𒁺, du-du), 기원전 14세기의 아마르나 서신에 기록된 이집트 관료 두우두(𒁺𒌑𒁺, du-u₂-du)등 실재했던 인명과 같은 계통의 이름으로 보는 입장도 있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없다.
2005년 다윗왕의 궁궐이라는 곳이 발견되었다.[19] 예루살렘 성의 동쪽에서 발굴이 된, 다윗의 궁으로 추정되는 궁궐은 일명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Large Stone Structure 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구조물을 발굴한 고고학자 에일랏 마자르(Eilat Mazar)에 의하면 현재까지 발굴된 이 건물의 벽의 한 변은 약 2.5~3m 두께로 동서로 30m에 이른다.
이미 예루살렘은 이 잡 듯 다 뒤져서 평면적으로는 더 다른 건물터가 나올 데도 없다. 지형상 홍수나 산사태, 습지 등 건물을 삼킬 정도의 지질이나 자연 재해가 있지도 않고 나무로 궁을 지었다면 방화로 인한 인멸도 있겠지만 그 동네는 석조 건물 위주라 기초도 찾을 수 없다면 그냥 다른 건물 터가 없는 거다. 소소한 유물 정도는 앞으로도 더 나오겠지만 더 이상의 대형 구조물들의 터는 찾기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물론 수천 년 간 파괴와 재건이 반복되었고 고고학자들이 뭣 모르고 상부 건물을 날려 버린 경우에는 건축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바닥을 찾기가 힘들 수는 있다.
그렇기에 발굴된 결과를 볼 때 연대의 논란이 있지만 고고학자 에일라트 마자르에 의하면 그 건물과 연결이 되었다고 주장이 되는 높이 18m 정도의 Stepped Stone Structure와 같은 거대한 석조 건축물도 있기 때문에 다윗의 궁전이 없었다고도 그렇다고 해서 얼마 만큼의 규모로 건축이 되었는지는 현재로서는 단정을 짓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아무튼 책임자 에일랏 마자르를 포함을 한 발굴 팀들은 다윗왕이 건설을 한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지만 일단 10헥타르 정도의 최대 4천 명 정도 거주를 하는 지역으로 흔히 이야기를 하는 촌락 수준이었다고 보면 된다.
실제로 베를린의 이집트 전문학자 롤프 크라우스(Rolf Krauss)는 다윗의 궁궐 터에 대해 "지방 둥우리"라고도 일컫고 있다. 이 유적의 경우 부족 국가설을 주장하는 사학자들에 의해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는데 즉, 추장의 저택 정도로 생각한다면 당연히 가능한 규모라는 것.
최근의 고고학적 결과로는 성서고고학자 요세프 가르핑켈과 학자 겸 조사관인 가노르가 키르벳 케이야파(Khirbet Qeiyafa)를 발굴했는데, 학자들은 성서의 사아라임으로 보고 있다.[20] 발굴이 된 유적과 그 곳에서 발견이 된 유물이 해석되면서 기원전 10세기 경 다윗의 유다 왕국이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된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가 되고 있다. 고고학자 아미하이 마자르(Amihai Mazar)는 "다윗의 예루살렘은 그 시기 예외적인 크기의 망대를 지닌 약 4㏊(4만㎡)의 도시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한 도시와 망대는 강력한 통치자의 세력 기반이 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열왕기상 10장에 의하면 다윗의 도읍에는 "은이 돌과 같이 많았다"라고 하며, 다윗의 궁궐의 찬란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실제로 발굴되어 이스라엘 정부에서 공인하고 지키고 있는 다윗의 궁궐 터의 규모 자체가 애초에 그 찬란하던 나라의 흔적과는 거리가 멀다.
6.5. 기타
- 잠입이나 은신에 재능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되는 일화가 몇 개 있는데, 사울에게 쫓기고 있을 때 그가 잠든 진영으로 잠입해서 망토를 조금 자르고 창과 물병을 가져가 자신은 왕위를 노릴 의도가 없음을 보여준 일화[21]와, 전쟁에서 패해 쫓기고 있을 때 은신한 곳 입구에서 거미가 거미줄을 치자 추적병들이 인기척도 못느끼고 그냥 거미가 거미줄 친 거 보니 아무도 없을 거다며 그냥 가버린 것,[22] 적장의 침소에 침입해 칼을 훔쳐 피 안흘리고 싸움을 끝낸 일화가 있다.[23] 세번째의 경우 적장이 칼을 깔고 자고 있어 포기하려다 모기가 적장을 물어 적장이 몸을 움직여서 빼앗긴 했지만, 그때까지 경비병들에게 전혀 들키지 않고 침투한 것만 보면…
- 구약과 신약 시대라는 배경을 공유하는 코란에서도 등장하는데 여기서는 다우드라는 이름[24]으로 불리며,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인류 최초로 철갑을 벼려낸 대장장이로 나온다. 성경에 기록된 것과 마찬가지로 골리앗을 이기고 왕이 되었다는 등 막강한 피지컬 및 실전 능력에 카리스마가 뛰어난 인물[25]로 묘사된다.
- 플레잉 카드 속 K♤의 모티브로 알려져있다.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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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새(가톨릭에서의 표기는 이사이)의 아들 다윗'이라는 의미.[2] 누나들도 몇 명 있었다고.[3] 사울의 차녀로 절친 요나단의 여동생이다.[4] 요한 힐카누스가 턴 무덤이 다윗 왕의 무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무덤 도굴로 자금을 마련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그리고 예수 관련 구절로 신뢰성 의문을 제기하는 이도 있지만 예수에 대한 구절은 후대 익명의 기독교인이 부분적으로 가필한 것으로 거의 확정되었으므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보기는 힘들다.[5] Antiquities 13:240[6] 사실 엄연히 따지면 이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유다의 왕이 되었다. 게다가 정통성으로만 보면 오히려 전 왕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있었으니 사실상 다윗의 유다 왕 등극은 내란죄에 해당된다. 하지만 결국 이스보셋의 2인자이자 사울의 삼촌인 아브넬이 다윗에게 귀순하면서 다윗에게 나머지 지파들이 힘을 주기 시작한다.[7] 그것도 당대 이스라엘 최고의 지략가이자 책사 아히도벨. 정 이해가 안간다면 삼국지연의의 제갈량을 아히도벨에, 다윗을 유비에 놓아보면 된다. 말그대로 그 제갈량이 유비에게 반기를 든 그림과 같다. 정사로 본다면 진궁의 사례로 보면 된다.[8] 여기에 책사 아히도벨이 합류해서 진짜 나라가 멸망 직전까지 갈 뻔했다.[9] 열왕기 초반 참조[10] 그런데 사실 솔로몬이 성전 건축하는데 썼던 재원과 시간을 보면, 위와 같은 시기에 성전을 건축하는 건 거의 나라기둥을 뽑는 일이 아니었을까도 싶다.[11] 사실 유목제국의 특성 중 하나가 각 분파와 파벌의 힘이 상당히 강하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몽골 제국도 황제권이 상당히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유목민은 아니지만 전쟁을 상당히 많이 벌린 고구려 같은 경우도 생각보다 왕권이 약했다. 반면 유목민족인 여진족이나 투르크인이 세운 나라이지만 중앙권력이 상당히 강했던 청나라나 오스만 제국은 어느 정도 영토와 군사력이 확보된 이후 유목민을 농민으로 전환하고 행정력을 보강하여 정주 제국으로 전환한 사례이다.[12] 사실 건국 초기에 수많은 개업 군주들이 많이 하는게 바로 대규모의 숙청작업이기도 하다. 그만큼 왕권을 안정시켜놔야 후대에 왕조가 안정적으로 클 수 있기 때문. 사실 다윗이 어마어마하게 사람을 많이 죽이긴 했지먼 당장 똑같이 구약시대 인물 중에는 자기 형제 69명을 싹다 죽여버린 사람도 있고 먼 훗날 지구 반대편에는 신하 한명 잡겠다고 그 사람의 일가친척과 친구, 제자는 물론 동네 사람들까지 죄다 잡아다가 죽여버린 영락제 같은 사례도 등장한다.[13] 구약성경 열왕기상 12장 16절[14] 신학적 고증은 배제했는지 다윗이 죽는 결말부에서는 다윗이 솔로몬에게 "신의 뜻이 아니라 네 뜻을 따라라"라고 유언하는 성경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장면이 있다. 산지자 나단도 다윗과 시종일관 다투는 대립역이다.[15] 아이러니하게도 목사 및 교인들의 무단 대량복제 유포 때문에 회사가 파산되었다고 한다.[16] 그술 왕[17] 시편 80:5. 시편에는 다윗의 울적한 감정선이 잘 드러난다.[18] 굳이 저 시대까지 갈 필요도 없이, 현대에도 5~60대 이상의 남자 앞에서 예쁘다고 말하는 것은 모욕으로 오해당할 소지가 크다.[19] 참조.[20] 2017년에 두 번째 관문이 발견되었다.[21] 이때 사울 옆에서 같이 자던 사울의 조카 아브넬에게 "넌 장수 자격도 없다"라고 디스한 건 덤.[22] 여기에는 다윗은 평소 거미를 싫어했고 때문에 다윗이 쫓기다 동굴에 이르렀을 때 거미가 있는 걸 보고 싫어서 안 들어가려다가 너무 몰려서 할 수 없이 들어갔는데 뒤이어 온 추적병들은 동굴의 거미를 보고는 다윗은 거미를 싫어한다고 했으니 여기에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 돌아갔다고 살이 붙여지기도 한다.[23] 뒤의 두 일화는 탈무드에서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며 보여준 3가지 일화들이다. 다른 하나는 미친 사람인데, 다윗이 위험한 상황에서 미친 사람 흉내를 내자 아무도 그를 못 알아보고 그냥 가버린 경우도 있었다.[24] 코란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 상당수를 아랍식 이름으로 부른다.[25] 대장장이는 직업 특성상 힘이 세지만 금속 중독에 노출되기 쉬워서 전장을 누비기는 의외로 힘들다. 단신에 추남이 되는 것은 보너스, 그런데 그 패널티가 없는 듯 골리앗을 쓰러트리고 왕까지 했으니 당대인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