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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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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년
2.1. 서자 논란
3. 군인 활동4. 암흑기5. 왕 재임기
5.1. 초기5.2. 밧세바 사건5.3. 쿠데타
5.3.1. 제1차 쿠데타 (압살롬)5.3.2. 제2차 쿠데타 (세바)
5.4. 인구조사5.5. 말년

1. 개요

이스라엘 왕국 제2대 왕 다윗생애를 정리한 문서.

2. 초년

이스라엘 유다 지파 이새의 아들로 출생하여 양치기로 생활하던 중, 고향에 방문한 예언자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다. 이후 출중한 키노르[1] 연주 실력 덕에 왕실 악사로 채용됐다.

2.1. 서자 논란

다음은 다윗이 이새의 친자가 아니거나, 서출 자식이라는 주장에 대한 근거들이다.
  1. 콩가루 같은 다윗 집안
  2. 사무엘이 아버지 이사이에게 "네 아들 다 데려와라"라고 했을 때 형들과 달리 다윗은 양을 치며 그대로 외면되어 있었고
  3. 맏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하는 말에서 정상적인 형제 관계라고 볼 수 없는 서술(사무엘상 17:28)[2] [3]
  4.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시편 27:10, 공동번역성서) 라는 다윗의 서술 존재와
  5. 다윗의 여색과 자녀 양육 실패가 있다.
첫 번째의 근거는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가족들에 대한 설명이다. 사무엘하 17장 25절에서 '스루야의 아들' 이라는 서술이다.
압살롬은 요압 대신 아마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그 아버지의 이름은 이드라였다. 그런데 그는 요압과 이종간으로 그 이모의 이름은 스루야였고, 어머니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으며 외조부의 이름은 나하스였다.
사무엘하 17:25 (공동번역 성서)
성경에서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족보는 '아버지의 자녀'[4] 또는 '가문의 유력한 사람의 형제'[5]로 서술을 한다. 다윗의 형제들은 다 '이새의 아들'이라고 서술하는 데 비해 요압, 아비새, 아사헬, 아마사 같은 다윗의 조카들은 아버지가 아닌 이새의 딸 '스루야'의 기준으로 서술되어 있고 스루야를 '이새의 딸'이 아닌 '나하스의 딸'[6]로 서술하고 있다. 이로 가정할 수 있는 사실은 스루야는 이새의 피를 잇지 않았고, 이새는 나하스의 아내였던 여자를 데리고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요약하자면 나하스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이새의 아들들을 낳지 않았고, 이새의 아내는 최소 둘 이상이었으며, 이후 스루야의 가계 인물들에 관한 서술로 보아 스루야를 위시한 영향력이 최소 다윗의 대부터 크게는 많은 유다인에게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무엘의 명령을 거역하는 이새의 태도. 이스라엘 부족 연맹의 영도자가 한낱 깡촌의 지방 유지를 방문한 상황에서 사무엘의 권위를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내아들 다윗을 부르지 않은 이새의 태도를 보면 다윗을 크게 신경쓰지 않은 느낌이다. 이를 토대로 보면 이새는 다윗이 자기 아들이라는 인식이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으로 사무엘 호출 문제는 전통적인 유목이나 농경사회에서 성인식[7]를 치르지 않은 소년의 사회적인 위치는 매우 낮은 게 보통이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통상의 막내자식이면, 그것도 성인 의식을 거치기 전이라면 대개 집 부근에서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위치였다. 베들레헴이 비록 깡촌이라고는 하나 이새는 그 지방의 유지이고 보아스[8] 때부터 물려받은 그런 재력이면 차라리 농사일을 시킬지언정 굳이 막내아들을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상대적으로 천시나 받는 양치기로 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근거로는 골리앗을 상대할 무렵, 전쟁에 나간 세 형을 방문했을 때, 다윗의 의분을 듣고 엘리압이 다윗을 대하는 태도에서 볼 수 있다. 다윗을 대하는 태도가 친형제라고 보기에 너무 강경하다는 점이다.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큰 형 엘리압이 엿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여기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 새끼는 누구한테 맡겼지? 이 건방진 못된 녀석, 네가 싸움 구경하러 온 걸 모를 줄 아느냐?"
사무엘상 17:28 (공동번역 성서)
공동번역성서의 어감으로는 나이 든 맏형이 아직 철부지 꼬마같은 동생을 단순히 나무라는 식의 다소 완곡한 해석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언어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옮기기는 어렵다는 점은 감안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맏형 엘리압이 듣고, 그에게 화를 내며 다그쳤다. “네가 어쩌자고 여기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들은 누구한테 맡겼느냐? 내가 너의 교만과 못된 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너는 싸움을 구경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
사무엘상 17:28 (성경, 가톨릭)
2004년판 가톨릭 성경에서는 정말 서출에게나 할 만한 독설을 퍼붓는다. 이를 토대로 한 근거에 대반 반박 역시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 다윗의 현 상황을 서술하는 구절과 비교, 분석해보면 명확해질 것이다.

골리앗이 참전한 전쟁 이전에 사울이 다윗을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면 당시 다윗은 생각보다 유명인이었다. 사울의 악사 겸 무기 관리 일을 할 때 다른 사람의 천거로 들어갔기 때문이다.[9][10] 이 배경을 가지고 보게 되면, 어느 정도의 공신력이 이미 다윗에게 있었음에도 다윗을 걱정한다기보다 무시하고 있는 뉘앙스가 충분히 공동번역에서도 묻어난다. 그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전쟁 중에 진지로 몸소 찾아온 동생에게 형이란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다는 말이 그렇다면 집안에서 다윗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대략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리고 시편에서의 다윗의 심경 서술이 있다.
이 몸은 죄 중에 태어났고, 모태에 있을 때부터 이미 죄인이었습니다.
시편 51:5 (공동번역 성서)
이 구절이 태어나기 전부터 짊어지게 되는 원죄를 의미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해석에 따라서는 다윗의 어머니가 이새의 정실부인이 아니었고 이새와의 불륜을 통해 다윗을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문맥이라면 불륜을 저지른 부모가 죄인이지 다윗이 복중태아인 상태인 자신을 죄인이라 정죄하는 것은 이상하다. 죄를 저질러 타락한 상태의 출생이라 죄인이라 자칭하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 자체가 원죄의 인정이다.
내 부모가 나를 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야훼께서는 나를 거두어주실 것입니다.
시편 27:10 (공동번역 성서)
확실히 이것 하나만 보고 다윗이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았다는 서술이라기엔 비약이라는 의견이 있으니 이 부분은 뉘앙스와 번역의 차이로 생길 수 있는 소지가 있음을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다. 문제는 다윗의 삶에 대한 서술에서 실제로 그러했던 뉘앙스가 강해 보인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다윗의 삶에서 나타난 심리학적인 분석. 많은 발달심리학자들은 어린 시절에서의 경험이 성인이 되어서도 큰 영향을 주며, 그러한 성향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부모가 되어서 자녀에게 그대로 대물림한다고 이야기한다. 가정에서 어머니의 부재는 남아의 성장 과정에서 이성에 대한 경험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나중에는 성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을 높인다. 그리고 위축되고 고립된 환경은 의존적, 내성적인 성격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고, 자녀교육은 부모에서 자식으로 대물림되는 경향이 있다.

많은 서술은 없지만 다윗은 최소 아내 5명에 후궁 10명에 동녀 1명을 두었다. 왕이 되면 일부다처와 축첩이 문제될 것은 없겠지만[11], 다윗이 밧세바와의 불륜을 저질렀을 때, 그 남편은 자신의 37충복 중 하나인 우리아였다. 다윗과 우리아의 관계가 멀지 않았고, 추측상 우리아-밧세바 부부가 신혼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생각해볼 만한 문제이다.

그리고 일평생 다윗은 내성적인 성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고, 평생을 유다와 기타 이스라엘 지파들의 눈치를 보았고, 요압에게 일평생 휘둘렸으며 말년에는 아들 솔로몬에게 의존하며 복수를 부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자식 교육에 있어서는 방임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압살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는 다윗의 어린 시절 가정 환경과 심리학 이론을 결부시켜 생각해보면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이런 다윗이지만 흥미로운 기술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사자에게서[12] 들을 지키곤 했다. 현대 사회에서 양치기는 언뜻 생각하기에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이미지이지만, 고대 사회에서 양치기매우 힘들고 고되고 목숨마저 위태로운 직업이었다. 양들을 데리고 산과 언덕을 다니느라 운동량이 격하게 많았고, 성경의 언급에 의하면 산과 들에 맛있는 양을 노리는 맹수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고대의 양치기는 매우 건장하고 강인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다윗의 이미지는 작고 나약한 소년이 아니라 야생에서 단련된 강인하고 굳센 청년이었을 듯하다.[13] 그렇다고 해서 꼭 헬스 트레이너마냥 우락부락하고 거대한 남성의 이미지를 생각할 것만도 아니다. 단련되었다고 해도 마초화랑, 악진, 잔 다르크 등의 예를 생각해 보자. 게다가 실제로 그의 용모는 "혈색이 붉고 눈이 반짝이는 잘생긴 아이였다."[14]고 묘사되는데, 그 미모 덕에 사울 왕의 시종이 된다.

그리고 양치기 일을 하면서 꽤나 투석구를 잘 사용했던 것 같다. 양치기들이 투석구(Sling)를 사용하는 묘기를 보이는 동영상을 보노라면 다윗의 이야기는 마냥 허풍은 아닌 듯.
  • 다윗의 출생에 대한 논란에 반대되는 근거는 이렇다.
    1. 먼저 큰형 엘리압이 다윗에게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삼상 15장 28절의 사무엘이 사울 왕의 왕권이 상실되었다는 것과 하느님께서 새로운 왕을 세우리라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퍼졌다는 것이다. (사무엘이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 두려움에 떨었던 장로들) 즉 어쩌면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와서 자신들을 불렀을 때, 자기 아들들 중 장자 엘리압을 가장 유력한 차기 왕후보로 보았을 수도 있으며, 엘리압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선지자 사무엘도 엘리압을 보고 삼상 16장 6절...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라고 오해하기도 할 정도...)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들에서 양이나 치던 막내아들 다윗에게 하느님의 왕의 계시(기름부음)를 받자 놀랐을 것이고. 집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여겨졌을 엘리압의 권위가 깎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즉 다윗이 왕이란 신분으로 생각하면 엘리압은 큰 형이지만 다윗의 종이 된다는 뜻이다. 이는 엘리압이 아직 왕권을 확립하지 못한 양치기 동생을 볼 때마다 심기가 불편했을지도 모르며, 이 사건을 통해서 엘리압이 다윗에 대한 편견으로 '교만'함을 꼬집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다윗이 양치기로 있었을 이유는 이스라엘의 재산분배 제도에 있다. 성경 사무엘상에서는 다윗이 엘라골짜기로 형들의 안부를 물으러 갈 때, 양치는 자들에게 맡겼다고 나와 있다. 이스라엘은 장자가 2배의 몫을 취하고 나머지 형제들이 나눠 분배받는 재산 분할 제도가 있었다.
      이새의 아들들이 다윗까지 합쳐서 8명이었고 '스루야의 아들들'인 다윗의 조카이자 부하들이 다윗보다 더 많은 나이대이거나 비슷한 나이대임을 생각했을 때,(요압, 아비새, 아사헬) 다윗의 형들과 다윗의 나이차가 꽤 났다는 것과, 이미 가정을 꾸릴 정도로 장성한 형들은 어느 정도 재산을 분배받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다윗이 자신의 분깃을 얻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이새의 할아버지인 보아스는 큰 부자였고 토지 즉, 농경을 하였다. 다윗이 농사일이 아니라 양을 쳤다는 것은, 토지를 분배받지 못했기에 축산을 분깃으로 삼았을 수도 있다.)
    2. 시편 27편을 통한 다윗이 이새의 다른 부인을 통한 자식이라는 주장이 아닌 것에 대한 근거는 이렇다. 시편27편에는 (2절)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절)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라는 표현을 통해서 다윗이 이 시편을 지었을 때의 상황이, 사울 왕에게 쫒기는 시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사울에게 쫒기는 당시,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은 아무런 사정도 모른채, 급히 도망쳐와 배고픈 다윗에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하느님께 드린 후에 물려진 빵)을 주어 먹게하고, 다윗이 잡았던 골리앗의 검(당시에 동기, 금속제 병기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즉 무기를 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사건이 있음을 통해서 다윗이 성읍이나 마을에 거주할 수 없게 되는 일이 생기는데, 즉 이때 다윗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기위해선 사울에게 밀고하거나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배경이 있어서 다윗의 친족이나, 부모님조차 다윗을 모른척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나중에 가족들이나 도망쳐온 사람들이 다윗에게 찾아오지만, 이 후의 일이고 다윗이 도망자로 지냈던 세월이 7년이 넘는 것을 상정한다면 족히 몇 년간은 의절당했을 수도 있다.)즉 이런 상황배경에서 지었던 시편이기에 이 구절이 다윗의 서자출생을 암시하는 자료로는 매우 근거가 들어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3. 그리고 골리앗을 다윗이 죽이지 않았다는 오해에 대한 근거로는 일련의 사건들과 인과관계를 조금만 알면 알 수가 있다. 다윗이 골리앗을 침을 통해서 일개 악사였던 다윗이 사울과 그의 신하들의 눈에 들었고,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로다"라고 여인들의 노래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울이 다윗을 결정적으로 시기하게 되었다.(즉 사무엘을 통해 사울의 왕권 상실과 이웃에게 왕권이 갈 것이라는 이 예언이 확실하게 사울에게 각인되는 사건이었다.)
      또한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의 수하로 있을 때,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 시에 동족을 칠 위기에 처한 다윗을 구하는 하느님의 은혜가.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로다"라는 것을 가드 장수들이 친히 춤으로 묘사함을 봤을 때, 골리앗과 다윗이 싸웠던 사건은 블레셋에서도 큰 사건이었고 동일하게 파악했다는 것이다.
      또한 다윗이 사용한 물매는 숙련자가 가공한 당시의 최대 능력을 낼 수 있는 그런 탄환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상 17장 40절에 시내에서 매끄러운돌 다섯을 골라서 제구에 넣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서도 다윗이 물가에서 돌을 골랐다는 표현이 있으며, 또 물매질 하여 돌로 골리앗을 사살했다기보다는 정확하게 하자면, 물매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다윗의 손에 칼(금속 병기)이 없었기에 골리앗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베었다고 나와 있다.
      또한 다윗이 나오는 성경 시대에는 대표적으로 5명의 거인 골리앗과 그의 가족들이 나오는데, 이 모든 거인이 다윗의 손과 다윗의 부하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숫자 5는 연합국이었던 블레셋(가사, 가드, 아스돗, 에글론, 아스글론)을 나타내는 상징수이기도 하며 금속병기를 가진 강대한 해상전투민족(바이킹과 비슷한?)을 완전히 제압했다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지, 다윗의 부하들이 골리앗을 잡았다는 표현은 그 어느 구절에도 없다.

3. 군인 활동

음악 활동 중 블레셋(필리스티아)의 거인 전사 골리앗을 사살함으로써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이스라엘군 군사령관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그 인기가 왕을 추월하자, 사울 왕은 그를 고의적으로 기피 지역에 출장보냈으나, 더 큰 공들을 쌓고 결국 사울의 딸 미갈[15]과 첫 번째로 결혼함으로써 부마가 된다.

4. 암흑기

파일:다윗죽이려는사울.jpg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결국 그가 왕위를 노릴 것이라는 불안감과 질투에 사울은 다윗의 암살을 시도하고, 사울의 딸인 아내 미갈과 사울의 아들인 처남 요나단의 도움으로 도망친다.

먼저 다윗은 사무엘이 살고 있는 라마에 있는 나욧(예언자 공동체로 해석)으로 피했으나, 사울이 병력이 채 도달하기도 전에 병사들이 일제히 성령에 취해 예언을 하면서 맥없이 돌아가는 일이 발생한다. 세 차례 파병에도 같은 일이 일어나자 결국 사울이 직접 쳐들어오지만, 오히려 라마 나욧에 도달하기도 전에 사울 역시 성령에 취해 옷을 벗고 누울 정도로 인사불성이 되어 예언을 하는 일이 발생한다(심지어 사무엘 눈 앞에서 벌거벗고 있었다.). 사무엘에게 있는 성령의 능력으로 계속 다윗은 보호를 받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사무엘 및 선지 생도들에게 누를 끼쳤다는 심적인 부담을 느낀 탓인지 아니면 사울이 쳐들어올 것을 두려워했는지 모르지만, 다윗은 사무엘의 곁을 떠나 다시 도주의 길에 오른다.

나중에 다윗의 처지와 소문을 들은 반(反)사울 인사들이 다윗이 숨어있는 아둘람 동굴로 속속 모이게 되고, 다윗은 이들 400명을 규합하여 여기저기 도망다녔다. 이때 사울을 가까이서 죽일 기회가 2차례 있었으나 "하느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죽여도 되는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신념을 지켜 각각 옷자락, 물병과 창을 가지고 돌아간다.
  • 첫 번째의 경우 다윗이 숨어 있는 엔게디 황야까지 쫓아온 사울이 부하들을 추적 보낸 뒤 혼자 볼일을 보고 있을 때, 그 안에 숨어 있던 다윗이 몰래 다가가 옷자락을 베어 가져간 뒤 이를 사울에게 제시하며 자신은 사울과 대적하거나 그를 죽이려 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밝힌다.
  • 두 번째는 요압의 동생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 한복판을 잠입해 사울의 물병과 창을 챙겨 나와 어느 정도 위험 범위에서 벗어나자 사울 진영을 향해 소리를 질러 사령관 아브넬에게 "내가 네 주인 얼굴까지 보고 갔는데 너는 왕을 안 지키고 뭐하고 있었냐? 네 주인의 창이랑 물병이 어디로 갔는지 확인해봐라."며 아브넬을 질책하고 이어 사울을 불러서는 자신이 왕의 적이 아님을 밝히고 그의 시종을 보내도록 부탁하여 창과 물병을 돌려주었다. 이것을 증거로 사울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없앨 기회를 두 번이나 주셨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제 제게 왕을 해칠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왕께서는 저를 계속 해치려고 하십니까?"라는 말로 호소한다.

다윗에 자비에 사울이 감복하여 돌아가는 일도 있었으나 이 평화도 잠깐뿐이었고 여전히 사울과의 관계는 좋아지지 않았다. 이후 다윗은 아예 유대 땅을 떠나 필리스티아와 아말렉 등이 맞닿아 있는 국경 지대에서 일종의 용병으로 지내게 된다.

이때 자기를 푸대접한 나발을 죽이려다가[16] 오히려 그의 아내 아비가일과 눈이 맞는다.

이후 다윗은 적국 블레셋의 가드 지역으로 피신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죽을 뻔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피신 당시 다윗은 블레셋의 영웅이었던 골리앗을 죽일 때 썼던 칼을 차고 있었는데, 이것이 블레셋인들의 어그로를 끌어 신하들 앞에 끌려가게 된 것. 이때 다윗은 대문에 몸을 비비적대며 수염에 침을 흘리고 미친 척을 하자, 아기스 왕[17]은 "나한테 미친 놈이 모자라서 이런 놈을 데려온거냐?"라며[18] 역정을 내며 쫓아내 다윗은 목숨을 건진다. 이후 한동안 이곳저곳을 전전하던 다윗은 다시 한번 가드 왕 아기스에게 잠시 신변을 맡기고, 국경지대에 위치한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받게 되어 가족 및 가신들, 휘하 용병단을 이끌고 이주한다.

이후 블레셋과 사울 왕가의 전쟁에 참전할 상황에 처했다. 객장 신세인 다윗은 거절할 수 없어 반쯤 끌려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벌일 뻔 했으나[19] 다윗을 경계하던 필리스티아의 신하들이 이스라엘과의 양동 작전을 펼칠지도 모른다는 배신 가능성을 이유로 크게 반대하여 다윗의 참전은 없던 일이 된다. 그때만을 기다리던 다윗은 그 길로 블레셋을 빠져나와 시글락으로 향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동족상잔의 침극을 피하게 하셨다"라며 찬송한다. 그러나 와보니 시글락은 이미 폐허가 되어 가족들이 납치된 상태였고, 가족을 잃었다는 현실에 절망한 부하들에게 돌로 맞아 죽을 뻔했지만, 기도하며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버려진 이집트 인 노예의 안내를 받아 납치된 사람들을 구하러 출격해 유다 백성들을 도와주었다. 이윽고 침입자들과 싸우고 이긴 뒤에 전리품을 나눠주는 행동을 함으로써 결국 엄청난 유다인들의 지지 속에서 시글락 및 주변 필리스티아 주변의 땅을 가지고 유다로 귀환한다. 한편 이때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벌인 전투에서 사울 왕과 사울 왕의 세 아들 모두 전사하게 된다.

사울 왕과 아들들이 패배해 죽었다는 소식은 시글락에 있을 때 듣게 되었는데, 아말렉 출신의 패잔병이 다윗을 찾아와 "사울 왕이 '블레셋 놈들에게 죽기 전에 나를 죽이라' 하길래 그를 죽였습니다. 증거물로 그의 왕관과 고리도 가져왔어요."[20]라고 했으나 돌아온 반응은 "하느님이 기름 부어 세운 왕을 시해했다고? 이놈의 목을 쳐라"였다.[21] 이후 다윗은 크게 슬퍼하며 사울과 요나단을 추모하는 시를 짓는다.

5. 왕 재임기

5.1. 초기

사울 왕이 필리스티아와의 전쟁에 패하여 아들들과 함께 전사하자, 유다로 복귀하여 헤브론에서 유다 부족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반면 북이스라엘에서는 사울 왕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사실상 허수아비 노릇이었고, 실권자 아브넷과의 분열 이후 자신의 신하에 의해 암살된다.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은 여부스 인의 영토였던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다윗성을 쌓고 지방을 전전하던 성궤를 옮겨와 정치적, 종교적인 수도로 만든다. 또한 필리스티아 등 주변 민족들을 여러 차례 격파하여 복속시키기에 이른다.

그러나 암몬과의 갈등[22]으로 이스라엘-암몬 전쟁이 발발한다.

5.2. 밧세바 사건

파일:다윗밧세바.jpg
이스라엘-암몬 전쟁은 장기간 진행되어 왕이 직접 출전해야 할[23] 시기가 도래했으나, 다윗은 낮잠을 자다 옥상에서 목욕하는 밧세바를 발견하고 그녀를 임신시킨 후 그녀의 남편이자 현재 전쟁에 출전한 유능한 장군 우리야[24]를 고의적으로 사망하게 한다.[25]
파일:꾸짖는나단선지자.jpg
십계명의 두 계명[26]을 이중 위반한 다윗에게 신은 선지자 나단을 통해 그를 훈계한다.[27]

다윗은 이에 뼈저리게 회개했고, 예언대로 밧세바의 아이는 병사했다. 몇 년 후 밧세바는 다른 아이를 출산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차기 국왕 솔로몬이다.

이 밧세바 사건은 다윗의 인생을 통틀어 최악의 흑역사로 평가받으며, 열왕기, 복음서 등 이후 집필된 성경에서도 책망받는다.

5.3. 쿠데타

다윗 재위기 총 2번의 쿠데타가 발생하는데, 아래 두 사건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제1, 2차 세계대전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

5.3.1. 제1차 쿠데타 (압살롬)

파일:압살롬반역.jpg
니콜 드 시몬의 <암논의 암살>
이후 이복형 암논이 여동생 다말을 성폭행한 것을 빌미[28]압살롬은 암논을 파티장에서 암살하고 타국[29]으로 이민한다.

요압의 중재로 다시 귀국하지만, 이미 본인이 다윗보다 더 나은 왕이 될 것이란 자신감이 넘쳤던 압살롬은 여론을 조작하여 반 다윗 세력을 형성하고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까지 점령한다. 그리고 다윗이 예루살렘 궁을 지키게 하려고 남겨둔 후궁들을 강간했는데[30], 당시 근동 지방의 관례에는 전왕의 후궁들을 취하는 것이 왕권의 완전한 계승을 의미했다. 다윗이 우리야를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대가로 받은 저주의 예언이 최악으로 돌아온 것으로 다윗은 그녀를 은밀하게 범했지만 압살롬은 휘장만 쳐놓은 침대를 거리에 내놓고 백주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잠자리를 가졌다.
신이시여,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습니까? 너 따위는 신도 버렸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하면서 다윗이 읊조렸다고 전해지는 말. 이후 재구성하여 시편 3편[31]에 수록된다.
그 사이 다윗은 일단 예루살렘을 떠나 피신하는데, 이 과정에서 그의 정적들에게 여러 차례 모욕을 당하게 된다.[32]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을 떠나기 전, 후새라는 신하를 예루살렘에 주둔시켰는데, 후새는 이후 아히도벨의 전략을 방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후 마하나임에서 근왕세력을 결성한 다윗과, 예루살렘 성을 효율적으로 침략한 군사 세력의 반격으로 결국 반란군은 대패했다.
파일:압살롬최후.jpg
압살롬의 최후
이후 노새를 타고 도망치던 도중 머리[33]가 나뭇가지에 걸려 매달렸으며, 이를 발견한 한 군인이 요압에게 신고했고, 요압은 직접 압살롬을 암살한다.[34]

5.3.2. 제2차 쿠데타 (세바)

압살롬의 난은 진압되었으나, 여전히 그를 추종했던 몇몇 이들은 세바라는 베냐민 지파 출신의 인물을 중심으로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때 요압과 함께 출정된 아마사가 요압에 의해 암살된다.[35] 그렇게 세바의 근거지에 도착한 이스라엘 군대는 성을 포위하고 서서히 압박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한 여자가 꾀를 부려 더 큰 전쟁을 막았으며, 세바는 얼마 안 가 주민들에 의해 공개 처형되며 반란은 실패로 끝난다.

5.4. 인구조사

파일:다윗인구조사.png
다윗이 실시한 인구조사를 묘사한 그림.
다윗은 하느님이 불어넣어준 마음에 따라 인구조사를 한다.[36] 성경에 왜 인구조사가 죄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인구조사라는 행위 자체가 야훼를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군사력)을 더 믿는다는 의미이므로 불순종과 교만이라는 두 가지 죄목에 해당된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허나 사람마다 해석이 미묘하게 다르다.[37]

한편 전근대의 많은 문화권에서 인구조사(특히 정확한 인구조사)는 곧 학정(虐政)으로 여겨지던 것과 연관하여 해석할 수도 있다. 전근대 국가에서 인구조사의 목적은 결국 정확한 세금 징수를 위한 것이었고, 이 때문에 정확한 인구조사를 하려 들면 "사람 수 따박따박 세서 그에 맞춰 세금 따박따박 걷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여겨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 개개인의 소득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에 맞춰 일정 비율의 세금을 거두는 발전된 조세체계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인구조사 해서 적정 세액 파악하는 게 왜 학정이냐?'라고 여길 수 있지만, 행정 기술 및 교통 통신 기술의 한계가 뚜렷하여 정확한 납세자 규모 파악이 힘들고, 그 반대급부로 각 개인에 대한 조세 부담이 무겁던 전근대에는 인구(= 납세자)수가 정확하게 파악되면 세금이 견디기 힘들게 무거워진다고 여기고, 따라서 대략 '전이랑 인구 큰 변화 없지? 그러면 세금도 전이랑 비슷하게 내라' 정도로 넘어가는 정치를 너그러운 정치라고 여겼던 것이다. 당장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국에서도 조선 시대까지 왕이 정확한 인구조사를 지시하면 모진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신하들의 반대 상소가 줄이었고[38], 조정래태백산맥을 보더라도 인민군이 점령지에서 농업 소출 파악을 위해 이삭에 달린 알갱이 개수까지 세자 "저걸 다 세서 세금을 매기겠다는 거냐"라고 분노와 공포에 질리는 농민의 일화가 다뤄지며, 청나라 시대에도 강희제가 정세(인두세)를 고정하자 폭발적으로 인구가 성장(자연인구 뿐 아니라 인구조사를 통해 파악된 인구 자체가 폭증)하기 시작한 사례등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전근대인의 사고방식에서는 인구조사 자체가 백성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뜯어내기 위해 밑밥까는 죄로 여겨졌다는 것.[39]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에서 나쁘게 묘사되는 요압마저도 인구조사를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하여 말렸는데, 다윗이 오히려 강행했다는 점이다.[40] 양심에 찔린 다윗은 야단맞기도 전에 잘못했다고 하느님에게 용서를 구한다.[41] 이후 야훼는 선지자 갓을 통해 7년 대기근, 3개월 침공, 3일 전염병, 이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는데, 다윗은 전염병을 선택한다.[42] 그렇게 3일 동안 7만 명의 백성이 죽고 만다. 이후 다윗은 하느님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한 농부의 밭을 사서 재단을 쌓아 "죄는 내가 지었는데 왜 백성이 고통받아야 하냐며 자기와 자기의 가문을 벌해달라"라고 기도하고, 곧 용서받는다. 참고로 해당 지역은 아브라함이사악을 번제로 바칠 뻔했던 모리아 산 정상이었고, 후에 솔로몬 재위기에 성전 공사 터로 낙점된다.

사울을 처음으로 세우려고 할 때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한 말을 생각하면, 사실상 기록의 버릇이기보다 기록된 시기와 의도에 대한 차이이다. 사무엘기의 저자는 왕이 중앙 집권을 할 때 백성들의 저항에 대한 당시의 생각을 잘 대변하고 있었고, "손해가 무척 나는 일이었지만 신의 뜻(혹은 왕의 뜻)을 대변한 일이었다"라는 당시의 공식 기록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사무엘기는 의외로 동시대의 궁중비사에 박식하기 때문에 궁중 근무 선지자나 내관급의 신하가 서술했거나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는 사무엘의 사망 소식도 기록된 것이 사무엘기다. 이 경우 사무엘 사후의 사무엘기는 사무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작성했다고 생각 할 수 밖에 없는 것도 하나의 근거.

하지만 역대기 상하권은 이스라엘이 초유의 쇠퇴와 멸망을 겪은 후에 기록된 것임을 생각하면, 우리 조상들이 이런 죄를 저질러 하느님께 벌을 받아 망했다는 기록의 의도가 짙다. 즉 초심을 잃고 타락하여 멸망한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의 의미에서 과거의 문제되었던 사건을 '사탄의 유혹'으로 이야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역대기 상하권이 구약의 동시대를 다룬 사건에 비해서 다른 시각을 가진 경우가 무척 많다.

그래서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위의 두 내용은 서로 보완이 가능하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사탄이 주로 쓰는 전략은 백성들이 죄를 짓도록 유도하여 야훼를 격노하게 하고, 야훼는 곧 이스라엘에게 항상 걸어놓는 가호를 거두는 것이다. 가호가 거둬지면 사탄은 합법적으로 악을 허용하여 땅을 망가뜨리거나 사람들을 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 상태에서 회개하면 다시 야훼의 은총이 내려 사탄의 행동이 멈추고, 파괴된 땅이 회복된다는 것이다. 이를 해석하면 백성의 죄로 야훼의 보호가 풀렸고, 사탄이 다윗을 충동질해서 인구조사가 시행되었다는 것이다.

5.5. 말년

여러 사건들을 겪고 난 후 궁정에는 '다윗 왕은 무조건 보호 대상이다.'라는 인식이 퍼지며 점점 다윗의 출전이 줄어든다. 어떨 때는 다윗이 직접 전투에 나서려 할 때도 있었으나, 신하들의 극구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그렇게 다윗은 대놓고 무시받으며 점점 힘이 약해졌고, 그에 따라 서서히 왕권이 추락할 위기에 처했다.
파일:아도니야의 반역.png
건강과 권력이 쇠약해진 다윗[43]의 눈을 피해 아들 아도니야가 독단적으로 요압[44] 주도 하에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밧세바와 나단의 공동 요청과 다윗 주도 하에 차기 국왕을 솔로몬으로 지정하고, 퇴위 직전까지 그에게 여러 조언[45]을 한 후 퇴위 직후인 기원전 970년에 병사한다.


[1] 구약시대에 히브리인들이 사용한 현악기. 이스라엘 밖에서는 워낙 생소한 악기인지라 서양권에선 리라(악기)로, 한국에선 수금(手琴)이나 비파로 번역했다.[2] 이때에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멸망시킬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이 위기상황에 아무리 동생이 미워도 아버지와 동생의 안위보다 가축에 더 관심이 있었다는것이다. 게다가 에리압은 근무는 서지도 않고 전선을 이탈까지 했다. 에리압이 얼마나 집에서도 밖에서도 제멋대로인 망나니였는지 알수 있는 내용이다.[3] 다윗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큰형 엘리압이 엿듣고 화를 내며 소리쳤다. "네가 무엇을 하겠다고 여기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 새끼는 누구한테 맡겼지? 이 건방진 못된 녀석, 네가 싸움 구경하러 온 걸 모를 줄 아느냐?" (사무엘상 17:28, 공동번역성서)[4] 예)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5] 예)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6] 이에 관해서는, 이스라엘에서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맞아들여야하는 풍습이 있었다.(과부의 부양과 가계유지를 위해) 거기다 그 경우에는 그 아내와 관계를 가져 아이를 가져도-후계자 문제로 자신의 아이가 아닌 형제의 아이가 되는 풍습이 있었다. 창세기나 마태복음에서 확인 가능하다.[7] 특정한 관습이나 결혼과 같은 통과의례[8] 룻기의 인물로 이새의 할아버지이자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룻기 서술에 의하면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거부였다고 한다.[9] 시중들던 한 젊은이가 말하였다. "소인이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한 아들을 알고 있는데 그는 수금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씩씩하고 날랜 용사로서 말도 잘하고 풍채도 좋은 데다 야훼께서 함께 해주시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상 16:18, 공동번역성서)[10] 이리하여 다윗은 사울을 찾아와 그를 시중들게 되었는데 사울은 다윗을 몹시 사랑하여 그를 자기의 무기 당번으로 삼았다. (사무엘상 16:21, 공동번역성서)[11] 사실 신명기에 이미 왕이 될 자는 많은 아내를 두지 말라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마음이 미혹될 수 있다는 이유인데 이것으로 보면 다윗의 장남이자 제 형을 죽인 압살롬이 모친의 외가인 왕국으로 도주했다가 돌아왔을 때도 제대로 된 처벌을 내리지 못한 것이 이방공주와의 혼인으로 인한 외교일 수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12] 사무엘기 상권 17장 34~37절에 있는 내용은 자기 PR. 문맥의 의미도 하느님께서 지켜주신 거지 때려잡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자슬링이나 나무 작대기는커녕 소총으로도 잡기 힘들다. 성서에 나오는 표현도 막 때려잡고 무쌍 찍는 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아줌마처럼 을 물어갈 때 쳐서 빼오는 수준. 물론 때려잡는 일이 현실에서나 현대에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엄청 어려울 뿐.현실 사례[13] 실례로 로마 제국에서 검투사반란을 일으켰던 스파르타쿠스도 이탈리아 남부 일대를 휩쓸면서 그곳에서 양치기 노릇을 하던 노예들을 해방시키고 자신의 군대로 적극 편입시켰다. 목동 생활에 익숙하던 그들이 척후 또는 기병으로 매우 쓸모가 있었기 때문.[14] 사무엘상 16장 12절[15] 이후 사울에 의해 다른 남자와 재혼했고, 오랜 시간이 흘러 당시 유다 왕이었던 다윗과 재회했으나, 슬하 자식은 없었다. 사울의 직계 자손이 통일 이스라엘의 왕자가 되는 것을 의도적으로 지양한 것으로 추측되나, 성경에서는 성궤 운반 당시 백성들 앞에서 몸을 노출해가면서까지 찬양하고 춤춘 다윗을 비난하여 불임의 몸이 되었다고 해석했다.[16] 이후 나발은 다윗이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는 소문을 듣고 신경성 쇼크로 인해 사망한다.[17] 특정 인물의 이름이 아니라 고대 블레셋 통치자를 뜻하는 칭호.[18] 이 대목에 대해 탈무드의 다윗 왕 이야기에서는 아기스 왕의 공주가 미치광이였기 때문에 나온 말이라고 전한다.[19] 다윗이 블레셋으로 몸을 맡긴 건 단지 변덕스러운 사울이 죽이려 들자 피하기 위함이었지, 적국의 힘을 빌려서 사울을 죽이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사울이 신께 기름부은 자라는 것을 강조하며 죽이려는 것을 꺼렸다.[20] 사울이 죽기 전에 했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울 옆에 있던 사람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고, 이 자는 차마 왕을 죽이지 못해 망설였다. 그래서 사울은 칼 위에 엎드려 자결하였고, 지켜보던 그도 따라 죽었다. 다윗에게 보고한 병사는 다윗의 적이었던 사울을 죽였다고 하면 상을 받을 거라 생각해 거짓 보고를 한 것.[21] 공명심에 눈이 멀어 거짓 보고를 했다가 쓸데없이 명을 재촉한 이 병사가 아말렉 출신이라는 점은, 과거에 아말렉 민족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을 적대한 것과 그 이후로 사울 대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적대해온 것에 대한 저주의 결과로도 해석되기도 한다.[22] 암몬에 방문한 이스라엘 사신들의 수염과 둔부를 훼손시켰다. 조공의 목적을 오인한 것.[23] 이스라엘 율법상 전쟁 발발 1년이 경과하면, 국왕이 직접 전쟁에 출전해야 한다. 이미 이를 위반한 것.[24] 그는 이방인이었으나 다윗이 왕이 되기 훨씬 전부터 그를 믿고 따랐으며, 전쟁에서 지휘를 매우 유능하게 해냈다고 한다.[25] 사무엘기 하권 15장에 우리야를 전투가 가장 심한 곳 정면에 배치했다가, 그만 남겨 두고 후퇴하여 그가 칼에 맞아 죽게 하여라.”라고 편지를 썼다고 나온다.[26] 살인 금지, 간음 금지.[27] 나단은 다윗에게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었고 부자에게는 소와 양이 많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반려동물처럼 아끼는 어린 암양 한 마리만 있었는데, 어느날 손님이 오자 부자가 자기의 넘쳐나는 대신 가난한 사람의 하나뿐이자 그가 사랑하는 딸 같은 그 암양을 잡아다가 자기 손님에게 대접했다"라는 비유를 들려주었고, 이야기를 듣던 다윗은 길길이 화를 내며 하느님에게 벌을 받아야 하고 그 일을 행한 사람에게 4배를 배상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참고로, 다윗의 아들들 중에 진짜로 네 명이 비참하게 죽었다: 밧세바와의 불륜으로 태어난 갓난아기, 암논, 압살롬, 그리고 사후에 반역을 꾀했던 아도니야.) 그러자 나단은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며 일침을 놓고, 우리야를 속이고 그 아내를 빼앗고 결국에는 그를 죽이기까지 한 이 죄를 묵과하지 않으신다고 천명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길 이 일로 태어난 아이가 죽을 것이며 칼이 다윗의 집안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고, 다윗의 아내들이 대낮에 불륜을 저지를 것이라는 저주를 전했다.[28] 사실 다윗도 이를 인지하고 있었으나 암논을 처벌하지 않았다. 현재와 마찬가지로 당시 율법상 근친상간 및 성범죄는 사형에 필적할 만큼 중범죄로 취급됐는데, 아무래도 후사를 이을 장자이기도 하고, 워낙 자녀 사랑이 극진했던 다윗이기도 하였고, 밧세바 사건 이후 다윗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침묵 혹은 방관을 하게되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압살롬의 형에 대한 분노 및 왕위 찬탈에 대한 욕망이 급상승한다.[29] 압살롬은 복수국적자였기 때문에, 어머니의 고국으로 도피한 것이다. 사실 이 점 때문에 차기 승계자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기도 하다. 참고로 그의 외할아버지는 그술 왕이었다.[30] 이 아이디어는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전향한 모사 아히도벨이 낸 것이다. 그는 밧세바의 외할아버지로, 다윗이 외손녀를 강제로 취한 일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31] "야훼여! 나를 괴롭히는 자 왜 이리 많사옵니까? 나를 넘어뜨리려는 자 왜 이리 많사옵니까? 너 따위는 하늘마저 버렸다고 빈정대는 자 또한 왜 이리도 많사옵니까?" - 시편 3편 1~2절 (공동번역성서)[32] 대표적인 것이 사울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시므이라는 자에게 돌을 맞을 뻔한 것. 이에 분노한 신하 아비새가 시므이를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다"라고 말하며 만류한다. 물론 복수심은 남았는지, 사망 직전 그에게 복수하라는 말을 솔로몬에게 남기고, 몇십 년 후 여러 법들을 위반한 혐의로 사형시킨다.[33] 압살롬은 머리카락에 병적으로 집착하여 그의 머리카락은 무척 길고 탐스러웠다고 한다. 결국 이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으로 인해 사면초가된 것. 이스라엘에서는 나무에 메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로 취급이 되는데 압살롬의 자랑스러운 풍성한 머리털로 인해 나무에 메달리게 되었다는 묘사를 보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부왕을 배신하고 역모를 저지른 자의 최후가 어떠한 것인지 아주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34] 당시 다윗은 압살롬을 생포하라고 명령했으나, 왕명을 대놓고 위거역한 것. 사실 다윗과 요압의 갈등은 옛날부터 진행되어왔으며,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현대 성경학자들의 절대다수는 요압은 다윗의 러닝메이트이자 비선실세였다고 해석한다.[35] 요압이 그를 암살한 이유는 다윗 왕이 본인 대신 아마사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36] 다만 성경 구절에 따라 사탄이 인구 조사의 마음을 불어넣었다는 대목도 있다.[37] 군사력을 믿는게 왜 죄인가? 출애굽기의 인구조사는 왜 문제가 없는 것인가? 다윗을 부추긴 것이 있는데도 왜 다윗에게 책임이 돌아가는가? 같은 문제들에 대해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38] 왜냐하면 조선 왕조의 국시인 성리학의 가르침에 의하면 가급적 백성들한테 세금을 적게 걷어서 조세 부담을 줄여주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일부러 호구(인구) 조사나 토지 조사를 철저하게 하지 않았다.[39] 다만 유럽에서는 오히려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백성들에게 알뜰하게 세금을 거두는데 중세 유럽의 행정은 교회가 담당했고 당시 분위기상 교회는 가톨릭을 의미했으며 가톨릭은 로마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네트워크가 있었고 시대적 분위기상 가톨릭 신자가 아닐 순 없었기에 국가 체계에는 안 잡혀도 가톨릭 체계에는 잡힐 수 밖에 없었다.[40] 게다가 요압도 다윗의 강행에 짜증이 나서 일부 지역의 인구조사는 생략해버렸다.[41] 해당 내용에 대해 사무엘기 하권 24장 1절에는 "야훼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떤 죄로 인해 진노를 내리실 일이 있어 다윗에게 이스라엘 유다의 병적을 조사할 마음을 품게 하셨다"라고 되어 있는데, 역대기 상권 21장 1절에는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했다"라고 되어 있어서 문제가 된다. 전자는 일견 '이건 야훼가 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데 후자는 '이건 사탄이 한 것'이 되어 상호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 전반에 따른 가르침은 야훼가 징계의 의미로 사탄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탄은 결국은 하느님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에 그때그때 허락된 이상의 악행을 할 수 없으며(욥기 참조), 이 경우는 하느님이 그 제어를 어느 정도 풀어서 사탄이 다윗을 격동시키는 것을 묵인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42] 의료 체계가 전무했던 당시는 유행 기간과는 관계 없이 농경 경제에 치명타를 입을 정도로 전염병 또한 가뭄과 전쟁 못지 않게 심각한 재앙이었다. 다윗은 그나마 단기간에, 인간의 개입 없이 처벌을 감수하겠다고 한 것뿐.[43] 이 때 왕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신하들은 수넴 여자 아비삭을 기용하여 그녀와 성관계를 하라고 권고했으나, 다윗은 거절한다. 참고로 이 당시 늙은 권력자와 젊은 처녀 간 잠자리 풍습은 매우 흔한 것이었다. 그것을 거절한 다윗의 신념이 대단할 따름.[44] 상술했듯 다윗-요압 간 갈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의 실권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다윗조차 그를 함부로 건들지 못했다. 압살롬 쿠데타 당시 그를 주저없이 암살한 이유도 병사로서의 책임감보다는 경쟁자 제거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보통 요압이 아도니야 왕정을 생각보다 일찍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시사한다.[45] 제일 중요시한 것은 단연 신앙심이었으나,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정적들을 일찌감치 제거해야 함을 강조했다. 솔로몬은 아버지의 조언을 모두 이행하여 결과적으로 북이스라엘 독립 직전까지 선왕보다 더 큰 왕권을 소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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