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5:48:14

이놈의 목을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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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예시3. 나관중의 일방적인 악평인가?

1. 개요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의 사형 명령 장면들을 모아놓은 짤방. 물론 당시엔 큰 잘못을 저지르면 참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지만, 삼국지연의 이후부터 중도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한 조조의 단점을 드러내는 인물평이기도 하다. 사실은 나관중이 삼국지연의를 쓰기 이전에는, 조조도 동탁과 같은 폭군으로만 인식되었다.[1] 이 짤방은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 경악스러운 상황에서 사용된다. 아예 다른 장면에다가 잘라붙여 뜬금없이 목을 치는 이상한 전개로 만들어버리는 케이스도 있다.[2]

한 시대를 풍미한 호걸인 동시에 상당히 잔인했던 조조의 이면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짤방이다. 이 짤방은 조비와 조조의 닮은 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져서 조비를 깔 때도 쓰인다.
Q: 조조의 자식들이 아버지와 닮은 점은 무엇일까요?
A: 조창, 조식, 조비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조창: 무재(武材)
  • 조식: 문재(文材)
  • 조비: 살재(殺材) 이놈의 목을 쳐라
[3]
하지만 조조도 하급자들을 곯리면서 처리한 술책들을 보면, 아들에 맞먹는 처리방법이 자주 발견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하트 여왕도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들면 이 대사를 한다. 여기서는 Off with his/her head!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신하들이 몰래 풀어 주기 때문에 죽는 사람은 없다.

2. 예시

위 짤방에 나와있는 상황들은 다음과 같다.(상-하, 좌-우 순)
"닥쳐라! 이 배반자의 목을 베라!"
주유의 계략에 걸려 채모가 배신한 줄 알고 채모를 처형할 때.
25권 <적벽의 전초전>
"죽여야지."
고향에서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할 구상을 할 때, 부호 위홍이 군자금을 내주지 않으면 죽일 것이라고 진궁[4]에게 말하는 상황. 해당 장면 이후 조조는 대답에 따라 정말로 죽이려고 차고 있던 칼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 다행히 위홍이 수락하여 없던 일이 되었지만.
4권 <난세의 간웅>
"저 목을 내걸어 병사들에게 본보기로 삼도록 하라!"
양수조조의 뜻을 읽고 철수 준비를 하자 열받은 조조[5]가 양수를 처형한 뒤 목을 효수하라고 명령하는 장면. 도열한 장수들은 조홍, 서황이다.
40권 <한중왕 유비>
"이놈의 목을 쳐라!"
감택황개의 계략으로 거짓 항복을 하러 왔을 때, 조조가 황개의 (거짓) 편지를 읽어보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여 감택을 처형하라고 말한다. 조조 입장에서는 불행히도 감택의 교묘한 거짓말로 이를 믿고 마는데 결국은 뼈저린 패배를 맛보게 된다.
25권 <적벽의 전초전>
"미안하지만 죽어줘야겠습니다."
여백사가 술을 사러간 동안 오해로 여백사의 가족들을 죽이고 여백사가 이 상황을 보면 자신들을 신고할 것이라고 여겨[6] 여백사를 죽이는 장면.
4권 <난세의 간웅>
"저놈을 잡아서 옥에 가두어라."
화타조조의 뇌종양을 치료하기 위해 머리를 갈라야 하고, 이러면 십중팔구는 회복되지만 그래도 죽는다면 하늘의 뜻으로 여기라는 발언을 하자 조조가 "날 실험재료로 쓰려고 하냐!"고 여겨 화타를 하옥시키라고 명령하는 장면. 이후 화타는 옥중에서 처형된다.
42권 <조조의 죽음>
"목을 쳐서 황규의 일족와[7] 함께 효수(梟首)하라!"
마등황규를 처형한 뒤 마등과 황규의 계획을 밀고한 묘택을 의리 없는 놈이라고 끔살시킨다.
30권 <주유와 용봉>
"이놈의 목을 쳐라!"
조조가 장송의 콧대를 꺾어주려고 열병식을 펼쳤지만 장송이 코웃음을 치며 "강해보이긴 무적은 아니다."라고 평하며 조조의 굴욕들을 언급하자 빡돌아서 처형명령을 내리는 장면. 참수하고 목을 소금에 절여 촉으로 보내라고 할 정도로 분노한 조조를 주변의 만류로 사형은 면하지만 몽둥이 100대의 형벌을 받으면서 초주검 상태가 되어[8][9] 장송이 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계기가 된다.
32권 <위수의 결전>
"목을 베어라."
마등이 조조에게 잡혀 처형을 명령하는 장면.
30권 <주유와 용봉>
"싸움도 제대로 못 해보고 뻔뻔스럽게 돌아오다니, 용서할 수 없다. 참형(斬刑)에 처하겠다."
유대왕충유비에게 쳐발리고 돌아와서 자신들을 극진히 대접한 것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자 어이없어하며[10] 처형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측근[11]이 '원래 이들은 유비의 상대가 되지 못하지만 승상께서도 이를 알기에 일부러 보내신 거 아닙니까? 이제와서 책임을 물으면 오히려 인심을 잃습니다.'라고 충고하고, 조조도 이를 받아들여서 장군 지위를 박탈하는 것으로 처벌을 끝낸다.
16권 <조조의 지모>
"이놈의 목을 쳐서 본보기로 삼아라!"
뇌물에 눈이 먼 양송장로를 배신하고 한중을 갖다 바치고 난 후 조조는 배신자를 싫어한다며 죽이라고 한다. 결국 양송은 길거리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참수당했다.
36권 <한중 침공군>
"에잇, 전부 목을 베라!"
좌자를 잡아들이라고 명령했지만 좌자가 신통력을 부려 5백명의 좌자가 잡혀온다. 조조는 좌자가 또 도술을 부렸다고 말하며 전부 목을 베라고 한다. 이렇게 참수당한 좌자들이 다시 목이 붙어 기괴하게 웃는 광경을 본 조조는 실신하고 만다.
37권 <위와 오의 격돌>
"반란에 가담한 자는 물론, 그 일족들까지 모조리 처형하라!"
위황, 경기, 김의, 길막, 길본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을 진압하고 나서. 사실 저 짤은 오른쪽이 잘린 것으로, 실제로는 조조가 중앙에 와있다. 오른쪽의 잘려나간 대사는 "내게 칼을 겨누는 자는 어느 누구도 용서치 않겠다."이다.
38권 <장비의 지략>

3. 나관중의 일방적인 악평인가?

현대에는 유비손권에 비해서, 조조에 대한 악평만 나관중에 의해서 왜곡당했다는 평가가 나도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조조는 서주 대학살망탁조의 문서에서 드러나는 실책을 저지른 시점부터 역사에 남을 악명을 지니고 있었다. 단, 당대에는 학살에 의한 정치적인 영향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대륙에 이름난 명사 한두명을 죽인 것이 문제였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상황만 그랬다는 것이지, 조조의 편이 되어줄 수 있었던 천하의 인재들이 대거 남하하고, 대륙이 3개의 나라로 갈라진 계기를 서주대학살에서 찾는 연구자들이 많다.[12] 이것이 특정 세력의 왜곡이었다면 모를까, 망탁조의라는 말에서 보듯이 조조는 무려 10세기 동안 높으신 분들 중에서도 치사한 이미지를 대변했다. 조조의 대표적인 실패들이 특정한 약소자들을 처리할 때 생겨난 나비 효과였음을 감안하면,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조조는 단점에 대한 최소한의 인물평가라고 생각하는 것이 편할 것이다.

조조는 특정한 군벌들 앞에서는 국가를 통합할 만한 영웅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특별한 명분이 없는 사건을 처리할 때는, 호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실책을 반복했다. 서주대학살로 역사에 남을 악명을 남긴다던가, 자신의 제일 가는 모사였던 순욱인격적으로 차갑게 처리했다던가, 장송을 홀대했다가 유비에게 촉을 헌납하는 등등. 다른 창업군주들도 비슷한 실수를 했다지만, 조조의 경우는 이러한 실수가 통일을 못한 이유로도 꼽히니, 후대 기록들이 조조를 왜 이렇게 평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조조의 악행에 대한 축소는 오히려 현대 중국에서 시작된 유행에 가깝다. 조조 영웅관이 대중문화에서 극치를 이룬 시기는 마오쩌둥 치세의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조조의 초반부 행보를 자신의 빨치산 활동이랑 비교하기도 했는데 당연히 마오쩌둥의 일대기를 소설처럼 숭상했던 중국에서도 대대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강조했던 일본, 한국에서는 그때 만들어진 마오쩌둥-조조 사관이 화교들에 의해서 대중문화에 전파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조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은 당대의 흐름을 파악했던 역사가들의 평가를 지나치게 무시한 결과인 것이다. 실제로 조조는 황제라는 목표가 아니라, 단순히 권세를 지닌 귀족 위정자라는 심리를 품고 행동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랬다면 서주에서 대학살을 저지르거나, 백성들의 원망을 알면서도 이미지에서 손을 놓지는 않았을 테니. 이 때문에 조조를 일반적인 창업군주가 아니라, 전형적인 환관-귀족적인 정치가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튼 조조가 통일을 못했다거나, 유비 세력이 커진데는 그 자신의 인성 문제를 짚지 않을 수가 없는 셈이다. 결국, 조조가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던 사람들에게 냉랭했던 것처럼,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감정도 좋지는 않았다는 소리다. 나관중 전에도 10세기 나관중 후에도 8세기나 까였으니 불쌍하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그 정도로 까일만큼 스스로 어그로를 자초한 면도 있는 셈. 참고로, 조조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 역시도 현대에 조금 더 깊게 다루어지는 감이 있다. 이는 조조가 통일을 실패했던 과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를 무작정 영웅으로 평가하는 여론에 대한 비평이다.


[1] 망탁조의 참고.[2] 예로 들면 이놈의 식견이 제법이라고 칭찬하더니 갑자기 목을 치라던가, 상대가 그저 웃기만 했는데 목을 치라는 등 조조를 일단 사람부터 죽이고 보는 싸이코패스로 만든다.[3] 조비의 경우 자기 아버지보다 더 심한 일을 저질러서 개그 소재로 자주 쓰인다. 친척이면서 국가공신인 좌절감으로 큰 사나이 친삼촌을 돈 안 빌려줬다는 이유로 죽이려 하고, 자기 생들을 박대했고, 첩을 총애하다가 조강지처에게도 사약을 날리고(게다가 이쪽은 의 마누라를 빼앗아온 케이스다.), 최고의 숙장 한명을 괴롭혀서 분사시키거나, 자기의 친구이자 개국공신의 조카네크로필리아로 만들어서 죽게 만들거나, 신하의 고통스러운 과거인 인육섭취를 들먹이며 조롱했던 적도 있으니 아버지보다 쩨쩨하다고 놀림받을 수 밖에.[4] 조조에게 실망하고 죽이려다 실패한 건 같지만 연의와 다르게 한동안 조조와 동행한다. 정사의 진궁은 서주 대학살 내지는 변양 살해 사건 즈음에서 조조에게 완전히 학을 뗀 것으로 보인다.[5] 이때 양수가 조조의 뜻을 읽은 과거 회상, 그 중에서 양수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된 후계자 책봉 문제까지 나온다.[6] 이 때 조조동탁을 암살하는 데 실패하여 수배령이 떨어졌다가 진궁이 구출하여 도망치던 중이었다.[7] 일족'과'가 맞는데 오타가 났다.[8] 형을 집행하는 장교도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목숨을 건진 것만으로 다행으로 알아라"며 빈정댔다.[9] 곤장도 많이 맞으면 목숨이 왔다갔다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형벌이다. 연의의 적벽대전에서 황개고육지계를 위해 곤장을 맞아야 했는데, 100대 맞아야 하는 걸 주위에서 만류해서 50대로 줄였다지만 초주검이 됐다. 당장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에도 곤장을 맞다가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10] 굳이 조조가 아니라 그 누구라 하더라도 어이 없을만하긴 하다. 패장 주제에 졌으니 제발 죽여주십쇼 해도 모자랄 판국에 적군의 우두머리를 칭찬해대고 있으니(...).[11] 연의 원작에서는 공융이 이 발언을 하지만, 만화에서는 누구인지 직접 설명이 없다.[12] 서주 출신 중에서 두 세력의 중진들은 물론 총사령관/재상급 인물도 많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만 읊어봐도 유비 수하의 제갈량, 손권 수하의 장소, 노숙, 제갈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