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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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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첸차
Piacenza
국가 이탈리아
지역 에밀리아로마냐
면적 118.46km2
인구 103,607명[1]
시장 카티아 타라스코니
시간대 UTC+1 (서머타임: UTC+2)

1. 개요2. 지리3. 경제4. 역사5. 랜드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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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에밀리아로마냐에 위치한 도시다. 과거 파르마 공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첫번째 수도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중요한 지리적 위치 때문에 통과의 땅으로 정의하기도 하였다.

2. 지리

피아첸차는 포 계곡의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61m 포강의 오른쪽 기슭 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트레비아강 하구와 동쪽으로는 누레강 사이에 있다. 롬바르디아, 피에몬테, 리구리아, 에밀리아 사이의 교차로에 있는 지리적 위치는 항상 전략적 군사적 운명을 결정했으며, 이는 피아첸차를 이탈리아 교통의 고속도로 및 철도 주요 허브로 만들었다.

3. 경제

피아첸차는 우유가 유명하다. 피아첸차에만 24개의 우유회사가 존재한다. 또한 파르미지아노 레지아노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치즈인 그라나 파다노를 생산한다. 또한 절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물류 허브로 발전하여 피아첸차 교외 곳곳에 화물 야적장이 존재한다.

4. 역사

피아첸차는 고대 로마 건국 이전부터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 사이의 교류 중심지였다. 기원전 218년 로마는 플라센티아(Placentia)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세웠다. 피아첸차는 인근 도시 크레모나와 함께 로마의 이탈리아 북부 식민지로 포에니 전쟁당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에 대항하는 군사 전초기지로 활용되었다. 180년대 10년 동안 비아 에밀리아가 건설되면서 아드리아해에 위치한 항구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그로 인해 로마 제국이 몰락 후 여러 세력이 약탈하였기도 하였다.

롬바르디아 공국의 소재지가 된 피아첸차는 자유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1167년 신성 로마 제국황제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이탈리아반도를 차지하기 위해 남진하였을 때 주변 도시 국가와 연합하여 신성 로마 제국군을 막고 그 대가로 제노바 공화국과의 무역로를 장악하였다. 16세기 까지는 밀라노 공국의 지배 하에 있었으나, 1521년 교황령으로 넘어갔다. 이 지역을 노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파르마와 피아첸차를 자신의 영토인 밀라노 공국에 합병시키려고 했으나 황제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교황 바오로 3세가 자신의 사생아 피에르 루이지 파르네세에게 파르마와 피아첸차를 봉토로 주어 파르마 공국을 세웠고 이탈리아 중부로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카를 5세의 야망을 좌절시켰다.

1731년 파르네세 가문이 단절되고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와 결혼한 파르네세 가문의 마지막 후손 엘리사베타 파르네세의 맏아들 카를로스 왕자가 파르마 공국을 물려받아 카를로 1세로 즉위하여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지배를 받았지만,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카를로 1세가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을 받는 조건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로 카를로 1세의 동생이었던 펠리페 왕자가 파르마 공국의 필리포 1세로 부임하여 다시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프랑스 제1공화국-프랑스 제1제국 직할령이 되었다가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부활한 파르마 공국의 지배가 다시 이어졌다.

나폴레옹 전쟁 종결 이후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이탈리아인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1848년 5월 10일 열린 투표에서 피아첸차 시민 다수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을 요청하였다.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이 요제프 라데츠키에게 패배하면서 이 시도는 좌절되었고 1860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군이 주둔하였지만 결국 제2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트리아 제국롬바르디아에서 물러나면서 파르마 공국의 보르보네 왕조는 폐위되었고 1859년 중앙이탈리아 연합주에 합류하여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 합병되었다.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언되어 이탈리아 영토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피아첸차는 고딕선의 중심도시로 연합국의 폭격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나치 독일의 장군 알베르트 케셀링은 트레비아와 포를 가로지르는 이 도시를 포기하지 않았고 도로와 교량이 파괴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피아첸차의 독일 국방군에게 식량을 공급하였다. 하지만 1945년 4월에 포도탄 작전이 시행되고, 이탈리아 빨치산이 봉기하자 이탈리아 북부에 주둔하던 독일군은 추풍낙엽처럼 항복하였다. 피아첸차는 4월 29일 브라질 원정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5. 랜드마크

  • 카빌리 광장 (Piazza dei Cavalli) : 피아첸차의 역사적 중심지에 있는 광장으로 도시 중앙에는 파르마 공작인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동상이 있다.
  • 파르네제 궁전 (Palazzo Farnese) : 1568년 오타비오 파르네세와 그의 아내였던 카를 5세의 사생아 마르가레테가 지은 궁전으로 파르마 공국의 공작이 머물렀다. 현재 고고학 박물관과 피아첸차 국가 기록 보관소가 위치해있다.
  • 피아첸차 대성당 (Duomo di Piacenza) : 1122년에서 1233년에 완공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에밀리아로마냐에서 가장 큰 성당이다.
  • 요한 바오로 2세 공원 (Parco Papa Giovanni Paolo II) : 18세기 오스트리아군의 병영이 위치했던 지역으로 이탈리아 통일 후 포탄과 탄약을 생산하는 창고가 위치했다. 1977년 피아첸차 시정부는 이 일대를 공원으로 전환하였고, 당시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에 헌정하였다. 공원은 총150,000m² 중 2/3가 잔디밭이다.


[1] 2020년 1월 1일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