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20:14:46

과테말라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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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vs 소련군 }}}}}}}}}}}}
과테말라 내전
Guerra civil de Guatemala
Guatemalan Civil War
1960년 11월 13일 ~ 1996년 12월 29일
장소
과테말라 전역
원인
불평등한 토지소유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에 따른 토지개혁 무산
교전 국가 및 세력

[[과테말라|]][[틀:국기|]][[틀:국기|]]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URNG)
파일:과테말라 노동자당 당기.svg 과테말라 노동당(PGT)
파일:MR-13 깃발.svg MR-13
파일:FAR 깃발.svg FAR
파일:Ejército_Guerrillero_de_los_Pobres_(emblem).jpg EGP
파일:Organización_del_Pueblo_en_Armas_(emblem).jpg ORPA
지원 국가 및 세력

[[미국|]][[틀:국기|]][[틀:국기|]](1962~1996)

[[아르헨티나|]][[틀:국기|]][[틀:국기|]](1976~1983)

[[이스라엘|]][[틀:국기|]][[틀:국기|]]

[[대만|]][[틀:국기|]][[틀:국기|]]

[[칠레|]][[틀:국기|]][[틀:국기|]]

[[남아프리카 연방|]][[틀:국기|]][[틀:국기|]] 남아프리카 공화국

[[쿠바|]][[틀:국기|]][[틀:국기|]]
파일: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기(1980-1992).svg FMLN

[[니카라과|]][[틀:국기|]][[틀:국기|]](1979~1990)
지휘관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미겔 이디고라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엔리케 페랄타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훌리오 멘데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카를로스 아라나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셸 라우헤루드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로메오 루카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오스카르 메히아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비니시오 세레소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라미로 데레온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알바로 아르수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롤란도 모란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루이스 투르시오스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마르코 욘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베르나르도 알바라도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로드리고 아스투리아스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리카르도 로살레스
병력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군
51,600명(1985)
45,000명(1994)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준군사조직
30만 명(1982)
50만 명(1985)
32,000명(1986)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전투원[1]
6,000명(1982)
3,000명(1994)
피해규모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군&준군사조직 6,500명 전사
파일:미국 국기.svg 미군 28명 전사
파일:과테말라 민족혁명연합 당기.svg 24,900명 전사
20만명 이상 피살 또는 실종
결과
1996년 평화협정
URNG 합법화
군의 정치참여 금지
과테말라 민사경찰 창설
영향
마야인 대학살[2]
과테말라 사회의 분열

1. 개요2. 배경3. 1960년~1966년, 내전의 시작, 군부의 발호4. 1966년~1973년, 암살과 "실종"의 시대
4.1. 1970년대 사회운동의 활성화 및 반군의 진화4.2. 1970년대 말: 암살에서 제노사이드로
5. 1978년~1983년: 제노사이드와 초토화작전6. 1983년~1996년: 민주주의와 평화로의 이행7. 피해8. 참고문헌9. 여담10.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과테말라 내전1960년부터 1996년까지 과테말라 친미정부와 다양한 좌익 반군 사이에서 벌어진 내전이다.

내전의 근본적 원인은 불평등한 토지소유이다. 유럽 이주민의 후손(크리오요)으로 구성된 부유층과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 같은 외국 기업들은 대토지를 소유한 반면에, 주로 원주민인 농촌 주민들은 소작농이나 농업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갔다. 1944년1951년 선거로 세워진 좌익 정부는 토지개혁으로 불평등을 시정하려 했으나 1954년 CIA가 지원한 쿠데타로 아르벤스 정부가 무너지고 그 자리를 미국이 지원하는 우익 군사정권이 대체했다. 1960년 11월 13일 소장파 좌익장교들이 이디고라스 푸엔테스 정권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과테말라군 군용기로 위장한 미국 B-26 폭격기가 봉기군의 기지를 폭격하여 진압을 도왔다. 봉기군은 과테말라 동부 산악지대로 피신, 그곳에 은거하다 1962년 반군 단체 MR-13(Movimiento Revolucionario 13 Noviembre)를 결성했다. 1970년 과테말라 정부는 카를로스 마누엘 아라나 오소리오 대령이 이끄는 제도민주당(PID) 정권으로 교체되었다. 제도혁명당 정부는 이후 12년간 부정선거로 정권을 유지했다. 1982년 3월 23일 제도민주당 정권은 다시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의 쿠데타로 엎어졌다. 70년대 내내 정권에 불만을 품은 원주민과 농민의 수가 증가했고 적잖은 수가 정부에 맞서 반군을 조직했다.

1981년부터 과테말라군은 5년간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군은 거의 모든 사회 및 정치적 기관에 침투하여 적대 세력을 격멸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정부와 반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지긴 했지만, 실상은 1960년대 중반부터 거의 일방적으로 정부가 민간인에게 벌이는 폭력에 가까웠다.[3] 군정보국은 정부 반대파를 살해하거나 '실종'시키는 작업을 조율했다. 과테말라 정부는 반군이 주둔한 농촌에서 농민들을 대대적으로 살육하거나 마을 전체를 완전히 파괴했다. 이런 학살은 주로 마야인을 상대로 벌어졌다. 정부 반대자로 의심되는자, 귀환 난민, 비판적인 지식인과 좌익 정치인, 노조 운동가, 종교인, 언론인도 이런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1994년 조직된 역사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 이하 CEH)의 추산에 따르면 20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살해되거나 강제 '실종'되었다. 당시 학살의 93%가 정부군(민병대 포함)에 의해, 3%가 게릴라에 의해 자행되었다. 2009년부터 과테말라 사법부는 과테말라 내전에서 학살을 저지른 정치인과 군인들을 기소하고 있다.

2. 배경

파일:Justo_Rufino_Barrios.jpg 파일:Presidente_Jorge_Ubico_Castañeda.png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 호르헤 우비코
1871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자유주의자들은 의욕적으로 커피 생산을 늘렸다. 당시 대통령 후스토 루피노 바리오스는 1877년 일용노동자 규정(Reglamento de Jornaleros)을 제정하여 원주민 노동자들이 크리오요와 독일인 이민자로 구성된 지주들을 위해 저임금으로 일하도록 강요했다. 바리오스는 또한 원주민의 공유지를 '합법적으로' 몰수하여 근대적 소유권에 근거한 대토지 소유의 기반을 확립했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측근들에게 배분하여 대지주로 키워줬다. 이것은 스페인 식민지 시절은 물론이고 라파엘 카레라의 보수주의 정권에서도 벌이지 않은 짓거리였다.

윗동네의 미국은 1890년대부터 먼로 독트린에 따라 아직도 잔존한 유럽의 식민세력을 라틴아메리카에서 몰아냈다. 물론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자기 세력권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이티니카라과, 쿠바 같은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달리 과테말라는 미군이 주둔하는 일이 없었는데 이것은 이미 과테말라 과두지배자들이 미국에 너무나도 잘 협조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과테말라 독재자들은 미국에 순응하며 자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의 조세를 면제해주었다. 그 중에는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이하 UFC)도 있었다. 또한 공공자산을 사유화한 다음 미국 기업에 매각하거나 공유지를 헐값에 양도했다.

1920년 과테말라를 방문한 스웨덴의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 빌헬름 루드비그는 방문기에 과테말라 사회는 3가지 계급으로 확연히 구분된다고 적었다. 가장 우월한 지위는 물론 크리오요가 차지했다. 라틴아메리카를 정복한 콩키스타도르의 후손인 이들은 숫자는 제일 적지만 국가의 엘리트 계급으로써 이 나라의 정치적, 지적 영역을 독점하고 농경지의 대부분을 소유했다. 그 다음 계급은 라디노인(Ladino people)으로[4] 원주민, 흑인, 크리오요의 혼혈인 이들은 수공업자, 상점의 점원, 상인, 하급 공무원으로 일했다. 가장 숫자가 많고 또한 가장 지위가 낮은 계급은 인디오들이었다. 과테말라의 원주민인 이들은 대부분은 아무런 공교육도 받지 못했다. 인디오는 농업노동자의 대부분을 구성하였다.

1931년 집권한 호르헤 우비코 장군(자칭 "또다른 나폴레옹")은 정부와 사회 전반을 군사화하고 정치적 반대파를 고문하거나 살해하여 나라 전체를 감옥으로 만들었다. 특히 농민이 UFC, 지주 및 도시 엘리트와 분쟁을 벌이면 언제나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고, 1929년 대공황으로 커피생산체계가 흔들리자 채무노예제 및 강제노동을 도입했다. 우비코 정권은 1944년 과테말라 혁명으로 붕괴되었고 과테말라 최초의 민선 대통령 후안 호세 아레발로 박사가 뒤이어 집권했다.[5]
파일:Juan_jose_arevalo_bermejo_large.jpg 파일:Jacobo_Arbenz_Guzman_(oficial).jpg 파일:Carlos_Castillo_Armas_(LOC_98512008,_low-res).jpg
후안 호세 아레발로 하코보 아르벤스 구스만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아레발로는 최저임금법, 교육예산 증액, 노동개혁 등 주로 노동과 복지분야의 사회개혁을 추진했지만 그 혜택은 대부분 중상류층에게 돌아갔을뿐 국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업노동자들은 받지 못했다. 1950년 당시 과테말라 토지의 72%는 국민의 2%가 소유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온건개혁마저 받아들일 생각이 없던 미국 정부, 가톨릭 교회, 대지주, UFC, 군 장교들은 아레발로 정부가 무능력한 용공 정권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아레발로는 숱한 쿠데타 위협을 모두 이겨냈고 1950년 대선에 당선된 하코보 아르벤스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아르벤스는 전임 아레발로의 진보적 개혁노선을 이어받아 강화시켰다. 그는 대대적인 인프라 건설에 착수했고 1952년 6월 17일 토지개혁 법안(900호 법령)을 통과시켰다. 아르벤스는 673에이커(272헥타르) 이상의 모든 비경작지 그리고 224에이커(91헥타르)와 672에이커 사이의 부동산 중 비경작지가 1/3 이상인 것들을 유상몰수하는 식으로 온건한 농지개혁을 추진했다. 토지개혁은 빠른속도로 진행되어 1954년 6월까지 인구의 1/6에 달하는 50만 명이 140만 에이커(57만 헥타르)에 달하는 토지를 분배받았다. 그러나 보다 온건한 아레발로마저 고깝게 본 대지주와 UFC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에 당연히 경기를 일으켰다. 아르벤스의 목적은 봉건적인 과테말라를 현대적인 자본주의 국가로 재편하는 것이었지만 과두지배자들은 자기들의 권력 기반 그 자체인 대토지를 해체하려는 그의 개혁을 도저히 받아들일수 없었다. 게다가 일부 농민의 자의적인 토지 점거나 지주와 농민간의 폭력 사태마저 발생했다.

UFC도 토지개혁법에 따르면 55만 에이커(22만 헥타르)에 달하는 소유지의 85%에 달하는 비경작지를 내놓아야 할 판이었다. 이 막대한 토지를 놀린 이유는 파나마병 때문이었다. 문제는 아르벤스가 제안한 액수가 너무 낮았다는 것이다. 1953년 2월 28일 아르벤스 정부는 1차로 UFC 소유 비경작지 23만 4천 에이커(9만 4,700헥타르)를 수용했다. 미 국무부는 3월 25일 토지 수용에 항의하는 서한을 과테말라 측에 보냈고 6월 26일에 답변을 받았다. 아르벤스는 작년 5월 10일 UFC가 제출한 토지 가격평가 결과에 근거하여 62만 7,572달러(2023년 현재 726만 달러)를 장기채로 지불했다고 주장했다.[6] 반면에 UFC는 해당 토지의 실 가치가 1,935만 5천 달러(2023년 현재 2억 2,390만 달러)라고 주장했다. 같은해 과테말라의 GNP는 5억 5,830만 달러, 정부예산은 6,287만 5,000달러(재정적자 149만 달러), 외환보유고는 4,320만 달러였다. 즉 당시 과테말라 GNP의 3.5%, 정부예산의 30.7%, 외환보유고의 44.8%에 해당하는 액수를 요구한 것이다. 과테말라 정부 입장에선 지불하기 힘든 거액을 요구한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과테말라 최대의 대지주인 UFC 입장에서 보면 지불능력도 안되면서 헐값에 몰수한다고 느낄 수 있었다.

미국 정부는 UFC의 입장에 동조하여[7], 8월 28일 과테말라 정부에 보낸 서한에 전체 수용지 37만 7천 에이커 중 UFC 소유지 비중이 23만 4천 에이커나 된다며 UFC가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보상을 채권으로 지불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부당한 것으로 간주되며, 과테말라 정부가 근거로 내세운 가격평가 결과도 세금 평가시에는 실 가격에 비해 낮게 책정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므로 소유주가 전액 보상을 요구할 경우에 내세울 명분이 아니라고 보았다. 미국은 UFC가 주장한 가격에서 조금 깎아서 1,584만 5,849달러(2023년 현재 1억 8,331만 달러)를 요구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1954년 2월 24일 과테말라 정부는 2차 수용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UFC 소유 비경작지 17만 3천 에이커(7만 헥타르)를 수용했고 보상액은 55만 7,542달러였다. 과테말라 정부는 또한 UFC가 차별을 받는다는 주장에 대해 UFC 소유지가 전체 수용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9% 미만이라며 차별은 없다고 반박했다. UFC는 CIA의 아르벤스 축출 계획을 승인하도록 본국 정부를 설득했다. 마침 CIA 국장 앨런 덜레스와 그의 형인 미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둘 다 UFC 경영진과 친분이 있었다. 결국 토지개혁은 아르벤스 정부가 1954년 6월 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붕괴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1954년 집권한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대령은 노동조합과 좌익정당을 모두 금지했고 아르벤스 정부에서 몰수된 토지들을 모두 재몰수하여 UFC와 대지주에게 반환했다. 물론 카스티요 아르마스 뒤로도 수많은 쿠데타가 뒤따랐다.[8]

3. 1960년~1966년, 내전의 시작, 군부의 발호

1960년 11월 13일, 일단의 소장파 좌익 장교들이 이디고라스 푸엔테스 정권(1958~1963)에 맞서 봉기했다. 장장 36년에 걸친 과테말라 내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이디고라스 정권의 부패와 무능력, 그리고 자기를 지지하는 장교들에 특혜를 베푸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 결정적으로 피그만 침공을 위한 미국의 훈련기지 설치를 군대와 상의하지도 않고 독단으로 허용하며 게다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보상을 군대와 나누지 않은 것이 봉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봉기군의 병력은 장교 120, 병 3,000으로 이들은 사카파 군사기지와 대부분의 동부 군사지구를 점령하고 이디고라스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군 공군기로 위장한 미 공군 B-26의 폭격으로 기지가 파괴되었고 반군은 과테말라 동부로 후퇴했다. 1962년 이들은 봉기가 일어난 날을 기념하여 MR-13(Movimiento Revolucionario 13 Noviembre)을 결성하였다.
파일:Guatemala_Topography.png 파일:756px-Guatemala_Regions_map.png
과테말라의 지형도 과테말라의 지역구분[9][10]
1960년대 반군은 주로 과테말라 동부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했다. MR-13은 1962년 2월 6일 본격적인 게릴라전을 개시했고, 이후 과테말라 노동당(PGT)[11], 4월 12일 운동(Movimiento 12 de Abril), 에드가르 이바라 게릴라전선(FGEI)과 접촉하여 1963년 2월 7일 과테말라시티의 한 건물에서 연합조직인 무장반란군(FAR)을 결성했다. MR-13과 PGT, FGEI는 동부에서 각자 자기 '전선'을 만들었는데 MR-13은 이사발과 사카파, FGEI는 시에라데라스미나스에서 활동했고, PGT는 도시게릴라로 활동했다.

한편 군부는 1963년을 기점으로 과두지배자를 위한 기구에서 새로운 지배세력 그 자체로 변모했다. 그 계기는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민중시위였다. 이디고라스를 지지하는 정당연합은 1961년 12월 총선에서 부정선거로 승리했다. 새 국회의원의 임기가 시작되는 1962년 3월 1일 과테말리시티의 학생단체가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일으켰다. 시위는 곧 치키물라, 후티아파, 레탈울레우, 산마르코스, 우에우에테낭고, 케찰테낭고 등 과테말라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민중도 동조 파업과 작업중단 등의 방식으로 지지했다. 19일 이디고라스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민중시위를 공산주의자가 선동한 것이라고 몰아가며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또한 몇주 내로 내각인사를 전부 군인으로 교체했다. 시위는 22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사상자 300~500여명과 피체자 1,000여명을 내고 진압되었다. 비록 정권은 지켰지만 이때 진압으로 이디고라스는 인기를 잃게 되고, 좌익은 1963년 대선에 전 대통령 아레발로를 중심으로 단일화하여 권토중래를 노렸다. 군부와 극우 지배계급은 아레발로의 대선 당선 가능성에 경기를 일으켰고 결국 3월 30일 엔리케 페랄타 아수르디아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페랄타는 나라 전체에 공산주의자가 침투했다고 주장하면서 1963년 대선을 취소했다. 또한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새로운 국가원수로서 정부의 모든 기능을 인수받았다. 정부군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반군 진압작전에 나섰다. 이해 2월과 3월 정부군 공군이 이사발의 MR-13 기지를 공습하였다. 이듬해 9월과 10월에는 '팔콘 작전(Operation Falcon)'을 벌여 사카파 일대의 반군을 진압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정부군과 경찰은 미국으로부터 각각 대게릴라전 교관과 고문을 지원받았다. 11월에는 도시게릴라를 상대로 '림피에사 작전(Operation Limpieza)'을 벌여 PGT의 핵심요인을 억류, 고문하고 살해했다.

4. 1966년~1973년, 암살과 "실종"의 시대

반란 진압 과정에서 반군뿐만 아니라 민중도 무차별적인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 1966년 이후 2년만에 최소 19개 처형부대(death squads)가 창설되었고 이들은 좌익분자는 물론 일반 시민과 그들의 친구, 가족들까지 탄압했다. 예를 들어 1966년 3월 3일부터 5일까지 군정보국 G-2와 사법경찰(Policía Judicial)은 수도 과테말라시티의 PGT 및 노동조합 지도자 28명을 체포했다. 그들은 모두 "실종"되었다. 정부군에 의한 "실종"자의 가족들과 대학생연합(AEU)이 진상을 밝히려고 하자 정부는 처형부대를 보내 다수의 대학생연합 회원들을 암살했다. 11월 2일에는 국토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모든 인권이 정지되었다. 도시든 농촌이든 좌익분자 또는 그 동조자로 의심된 자들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살해되거나 "실종"되었다. 도시에서는 사복을 착용한 중무장 병력이, 농촌에서는 제복을 착용한 육군순찰대와 군사순경(PMA)이 이런 살해와 "실종"을 주도했다. 1966년 10월 정부군은 '과테말라 작전(Operation Guatemala)'을 개시, 사카파-이사발 군사지구에 5천의 병력을 투입하여 대규모 진압작전에 나섰다. 여기서도 처형부대는 반군이나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자를 살해하도록 허가받았고 실제로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1976년 국제앰네스티 보고서에 따르면 1966년 10월부터 1968년 3월까지 3천~8천명의 사카파-이사발 거주 농민들이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에 살해당했다. 또다른 추산치는 훌리오 멘데스 대통령[12] 재임기(1966~1970) 사카파에서만 1만 5천명이 피살되었다고 본다. 이 작전을 주도한 아라나 오소리오 대령은 "사카파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얻었다. 이렇게 반정부세력을 씨가 마르도록 죽여대다보니 FAR을 위시한 동부 반군의 세력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때 반군은 마야 원주민과 농민 문제를 등한시한 나머지 활동 지역에서 현지 민간인의 협조를 얻는데도 실패했다. 반군은 가장 세력이 컸을 때도 병력이 1,790명에 불과했고 이는 과테말라 정규군과 국가경찰을 합친 병력(22,000명)의 1/10도 되지 않았다. FAR 지휘관 루이스 투르시오스, MR-13 지휘관 마르코 욘도 각각 1966년과 1970년에 전사했다. 늦어도 이 시점에서 기존의 반군은 거의 괴멸되었다.

주목할 것은 반군의 활동이 미미해진 1970년대 전반기에도 정부군의 폭력은 줄어들지 않거나 오히려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의 계엄령은 1968년 6월 24일 "경보령"으로 단계가 낮아졌지만 1970년 7월 집권한 제도민주당의 아라나 오소리오 대령은 그해 11월 13일 다시 계엄령을 발표하고 오후 9시부터 오전 5시까지 통금령을 내렸다(계엄령은 1972년 말에 해제됨). 정부군과 경찰은 사법절차를 완전히 무시하며 적으로 의심되는 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과테말라시티에서만 수천여 명의 좌익분자, 학생단체 및 노동조합 운동가, 일반 범죄자들이 납치당해 고문받거나 살해되었다. 국제앰네스티와 실종자 유족 단체에 따르면 1970년과 1971년 사이 7,000명이 넘는 민간인이 살해된 채 발견되거나 "실종"되었고, 1972~1973년 추가로 8,000명이 같은 운명을 맞이했다. 과테말라 인권위원회(Guatemalan Human Rights Commission, 이하 GHRC)는 1970년부터 1974년까지 2만 명이 살해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산했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살해되거나 실종된 과테말라 민간인은 총 4만 2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결국, 당시 과테말라 정부의 진정한 목적은 반정부 세력의 말살이라고 보는 것이 중론이다. 반군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빌미였다.

4.1. 1970년대 사회운동의 활성화 및 반군의 진화

1970년까지 기존의 반군이 사실상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과테말라 내전의 근본적인 원인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으므로 사회는 여전히 불안했다. 과테말라의 빈부격차는 여전히 극심했고, 민중들의 삶은 1973년 오일 쇼크와 1976년 과테말라 대지진으로 더더욱 악화되었다. 오일 쇼크는 급격한 식품 물가 인상과 유류 품귀 현상을 초래했으며, 과테말라 대지진은 2만 3천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100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낳았다. 제도민주당 정부의 인권유린과 부정선거도 민중들의 분노를 샀다. 그 결과 1970년대 과테말라는 반군과 연합한 사회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일어났다. 대표적인 예로 1978년 4월 15일 창설된 농민연합위원회(CUC)이 있다. 과테말라 최초로 원주민이 주도하는 노동자 조직인 CUC는 도시의 라디노 노동자와 농촌의 원주민 농민들 사이의 연대를 추구했다. 전성기 15만 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CUC는 주로 서부 고원지대와 남부 해안지대에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으며, 게릴라 조직과 가톨릭 교회의 지지도 받았다. 특히 EGP와 매우 밀접한 조직이었다.[13]

1974년 부정선거로 대통령이 된 셸 라우헤루드 장군은 적어도 임기 초에는 어느정도 폭력을 자제하는 사람이었다. 라우헤루드는 노동자들을 폭력으로 침묵시키기보단 노동자와 기업계 사이의 협상을 추구했다. 미 국제개발처(USAID)는 비료 등의 물자를 구입하기 위한 450만 달러의 재정을 지원하고 미주개발은행(IADB)도 1976년 초 1,500만 달러 융자를 승인했다. 그러나 1975년 6월 7일 EGP에 의해 지주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나자 정부는 곧바로 고원지대의 협동조합 운동가들을 체계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다. 처형부대는 1975년 6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서부 이슈칸(Ixcan) 지역에서만 60명의 협동조합 지도자를 살해하거나 '실종'시켰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추가로 163명의 협동조합 지도자와 촌장을 살해했다. 정부는 EGP의 주요 사회적 기반 중 하나가 가톨릭 교회라고 판단했으므로 가톨릭 전도사들도 살해했다. 1976년 11월부터 1977년 12월까지 처형부대는 엘키체(El Quiche) 교구의 가톨릭 행동(Accion Catolica) 소속 전도사 143명을 살해했다. 이외에도 서부 고원지대에서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학살이 자행되었다. 과테말라 정부의 인권유린과 벨리즈를 둘러싼 영국과의 무익한 갈등은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다. 1977년 미 지미 카터 행정부는 인권유린을 이유로 과테말라를 비롯해 여러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에 대한 군사원조를 줄였다.

1970년대는 사회운동이 활발해질 뿐만 아니라 반군의 구성과 전략이 대폭 변화한 시대이기도 하다. 이 시대 반군은 크게 4개 조직으로 나뉜다. 세력이 확연히 위축된 FAR, 1971년 중서부 고원지대에서 결성된 무장민중혁명조직(ORPA), FAR의 일부세력이 결성한 빈민게릴라군(EGP), 1978년 PGT에서 분리한 PGT 전국지도핵심파(PGT-NDN)가 그들이다. 이 시대 반군의 특징은 포코 이론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즉 거점 전략을 포기하고 베트콩을 모델로 삼았으며, 마오주의 군사전략과 유사한 '장기전' 방식을 도입했다. 또한 반군에 마야 원주민이 대거 가담하거나 아예 원주민이 반군조직을 주도하였다. ORPA의 경우 조직원의 90% 이상이 마야 원주민이었고 지역 지도부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은 1954년 아르벤스 정부 붕괴로 인해 마야 원주민 운동이 급진화되고 정치화된 결과이자, 동시에 원주민 문제를 등한시하여 그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기존 반군세력의 자기반성의 결과였다.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마야 원주민을 주체가 아닌 객체로만 바라본 PGT는 1960년대에 누린 지도적 역할을 곧 상실했다. 끝으로 주요 활동 지역이 동부 산악지대에서 마야 원주민이 밀집한 서부 고원지대로 옮겨갔다. 물론 마야 원주민의 반군 참여가 완전히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반군은 원주민의 거주지에서 자기들에 반대한다고 판단되는 주민들을 학살했고, 일부 원주민은 반군의 공포통치에 못 이겨 반강제적으로 반군을 지원하거나 도왔다. 당시 반군이 벌인 학살에 대해 후일 지도부가 사과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반군의 학살은 정부측 학살에 비해 훨씬 단발적이었고 규모도 더 작았다. 무엇보다 정부처럼 제노사이드를 벌이진 않았다.

반군이 변화한 결과 1970년대 말 이르러 반군은 1960년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했다. 기껏해야 300~500명에 불과했던 전투원의 숫자가 4천~1만2천명으로 증가했고 게다가 대규모의 지지 집단까지 거느렸다. 1981년 마야 원주민 25만에서 50만 명이 반군을 적극적으로 도운 것으로 추산되며, 군정보국 G-2는 EGP의 원주민 지지자만 36만 명에 달한다고 추산했다. 주의할 점은 마야 원주민이 반군의 주요 지지층이었다고 해서 그들 대부분이 반군의 지지자거나 협조자인 것은 아니란 점이다. 원주민이 서부와 중부 고원지대에 밀집한 특성상 반군과 접촉이 잦긴 했지만 그래도 평범하게 농사짓고 하루벌어 하루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1980년 반군은 도시와 농촌에서 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농촌에서는 농장을 점거하고 유명한 지주들을 암살했으며, 도시에서는 주요 기관에 테러를 벌이거나 정부측 요인을 암살했다. 급기야 1981년 초에는 니카라과 혁명의 성공에 고무되어 대대적인 공세를 벌이고 심지어 과테말라시티를 종종 습격할 정도로 성장했다. 1982년 2월 8일에는 ORPA, FAR, EGP, PGT-NDN이 모여 과테말라민족혁명연합(URNG)을 결성했다. 하지만 URNG가 결성될땐 반군이 정부군의 토벌에 다시 지리멸렬하게 되어서 별다른 군사적 활약은 없었다.

4.2. 1970년대 말: 암살에서 제노사이드로

1960~70년대 정부군과 경찰은 좌익세력과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자들을 주저하지 않고 죽였다. 물론 이 자체로도 매우 잔인한 정책인 것은 맞지만, 뒤집어보면 그래도 자기 딴에는 사람을 가려가며 죽였다는 말이 되겠다. 정부가 벌이는 학살의 성격과 대상은 1970년대 말을 기점으로 변하게 된다. 우선 반군의 활동지가 동부 산악지대에서 서부 고원지대 위주로 바뀌었다. 반군은 현지 마야 원주민 사회에 침투하여 그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냈다. 즉 마야 원주민 거주지가 반군의 활동지가 된 것이다. 그러자 정부군이 마야 원주민을 보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정부군은 초토화작전을 벌여 반군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약해 섬멸하는 전략을 도입했고, 따라서 원주민은 더 이상 기존 과테말라 지배세력이 생각한 문명화의 대상이 아니라, 제거 대상이자 잠재적인 적군으로도 분류되었다.

1978년 5월 29일 라우헤루드 정권 말기에 벌어진 판소스 학살[14]은 이제 학살의 주요 대상이 좌익세력에서 마야 원주민으로 변하며, 그 양상도 선별적인 암살이나 처형에서 제노사이드와 초토화작전로 변모했다는 신호탄이었다. 다음 5년간 10만 명이 넘는 원주민이 살해된다.

5. 1978년~1983년: 제노사이드와 초토화작전

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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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20세기 이전에 벌어진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사례로는, 인디언 전쟁미국아메리카 원주민 학살이 있다.)
※ 국제군사재판에 회부된 사건이라면 ⚖️ 표시.
사건 목록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발생 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Reichskolonialflagge.svg.png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발생 위치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홀로도모르 [!]
,1932 ~ 1933,
발생 위치
파일: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발생 위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파슬리 학살
,1937,
발생 위치
파일:도미니카 공화국 국기.svg 도미니카 공화국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제2차 세계 대전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발생 위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홀로코스트 ⚖️
,1941 ~ 1945,
발생 위치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크로아티아 독립국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관련 단체
체트니크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발생 위치
파일: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기.svg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발생 위치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발생 위치
파일:과테말라 국기.svg 과테말라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발생 위치
파일:방글라데시 국기(1971-1972).svg 동파키스탄
이키자
,1972,
발생 위치
파일:부룬디 국기.svg 부룬디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발생 위치
파일:우간다 국기.svg 우간다
관련 인물
이디 아민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발생 위치
파일:인도네시아 국기.svg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킬링필드 ⚖️
,1975 ~ 1979,
발생 위치
파일:민주 캄푸치아 국기.svg 민주 캄푸치아
재판
ECCC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수용소
뚜올쓸라엥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발생 위치
파일:짐바브웨 국기.svg 짐바브웨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안팔 학살
,1986 ~ 198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1963-1991).svg 이라크 쿠르디스탄
재판
안팔 학살/재판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이사크 학살
,1987 ~ 1989,
발생 위치
파일:소말리아 국기.svg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보스니아 전쟁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발생 위치
파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국기.svg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관련 단체
스릅스카 공화국 | 헤르체그 보스니아 | 스릅스카군
스레브레니차 학살
,1995,
발생 위치
파일:스릅스카 공화국 국기.svg 스릅스카 공화국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발생 위치
파일:르완다 국기(1962-2001).svg 르완다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관련 인물
베르나르 투야하가 | 테오네스테 바고사라 | 펠리시앵 카부가 | 장-보스코 바라야귀자 | 하산 응게제 | 조르주 루지우
관련 단체
후투족 | 투치족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발생 위치
파일:자이르 국기.svg 자이르 키부
밤부티인 학살
,2002 ~ 2003,
발생 위치
파일:콩고민주공화국 국기(1997-2003).svg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다르푸르 학살
,2003,
발생 위치
파일:수단 공화국 국기.svg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야지디 학살
,2014 ~ 2019,
발생 위치
파일:이라크 국기.svg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관련 단체
ISIL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발생 위치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위구르 자치구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발생 위치
파일:미얀마 국기.svg 미얀마 라카인주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파일:lucas_garcia.jpg 파일:Rios_Montt.png
페르난도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1978년 수립된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은 반군 진압 과정에서 마야 원주민 공동체를 대상으로 무자비한 학살을 벌였다. 이에 1980년 1월 31일 마야 원주민 농민단체가 과테말라시티의 스페인 대사관을 점거하여 이 사실을 국제사회에 호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정권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대사관에 화재가 발생해 스페인 외교관 8명을 포함해 3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15] 비록 이 사건으로 정권의 이미지가 실추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탄압이 느슨해지진 않았다. 정부군에 살해된 사람의 숫자는 1979년 일평균 20~30명에서 1980년 30~40명으로 증가했다. 1980년 한해에만 5천명이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에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81년 그 숫자는 9천명으로 더 늘어났다.
토레스 리바스는 과테말라 봉기에 대한 분석보다는 비판에 더 비중을 두는데, 봉기는 30여 년이나 전투 상황을 지속할 능력이 있었고,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버텨낼 수 있었으며, 가장 잔혹한 진압 작전에 저항해낼 수 있었지만, 중요한 평화 의제를 제기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적들에게 결정적인 방식의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가치 있는 고통이었나?: 중미의 내전과 민주주의(2013), 리카르도 사엔스 데 테하다(강성식 譯)[16]
1980년에 거둔 일련의 군사적 성과와 니카라과 혁명의 성공은 반군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엘살바도르 내전 발발로 남부 국경이 불안정해지자 부득이하게 정부군이 남부로 재배치되었는데 그 결과 반군은 자기 군사력이 정부군과 맞먹는다고 착각하기에 이르렀다.[17] 반군은 잘못된 평가를 바탕으로 1981년 초 대대적인 공세를 벌여 서부와 남부 대부분을 점령하고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를 공격하며 과테말라시티를 서서히 옥죄어 들어갔다. 여름에는 과테말라시티를 목표로 정한 공세를 계획했다. 하지만 과테말라 정부의 대응은 한발 더 빨랐다. 이해 중순 정부군은 각 여단에서 3천~5천명 규모의 전략적 기동부대를 편성하여 고원지대의 수색 및 격멸 임무에 투입하는 "특임대(task-force) 방식"을 도입했다. 정부는 7월과 8월에 걸쳐 도시에 잠입한 ORPA 조직을 전부 적발해내 ORPA 세력을 완벽히 고자로 만들어버렸고, 9월에는 EGP 조직도 적발했다. 같은 달 반군과 민간인 사회를 분리하고 나아가 반군 진압에 투입하기 위해 친정부 민간자위순찰대(PAC)를 편성하였다. 정부는 7월과 9월 사이 ORPA와 EGP로부터 노획한 문서를 토대로 게릴라 측의 과테말라시티 공세 예정일이 1981년 11월 13일이란 사실을 알아냈다.

국방참모총장 마누엘 베네딕토 루카스 가르시아[18]는 11월 10일 참모본부 회의에서 게릴라가 공세를 벌이기 전에 선수를 쳐서 먼저 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했다. 게릴라의 군사력이 약하다는 정보기관의 보고를 토대로 마누엘은 지방 도시에 파견된 병력들도 작전에 모조리 동원했다. 11월 13일 새벽 1시, 2천명 이상의 정부군이 세니사 작전(Operación Ceniza)를 개시, 수도 주변의 게릴라를 겨냥한 대대적인 토벌전에 돌입했다. 정부군의 공세는 기습의 효과를 얻었고, 반군은 과테말라시티 인근 도시와 농촌의 위치에서 일패도지했다. 공세 첫날 정부군은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가 지나가는 중부 고원지대의 치말테낭고까지 도달, 그 주변에 전개하여 게릴라 소탕전에 나섰다. 정부군은 쾌속 진격을 거듭하며 아티틀란호 주변 지역을 확보했다. 반군은 서부 고원지대 키체 주 남단의 추폴(Chupol)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이곳은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가 지나가며 또한 방어에 용이한 요지였다. 이곳의 반군은 각종 장해물을 설치하여 정부군의 진격을 늦추었으나, 정부군은 열흘간의 전투 끝에 추폴을 확보하고 막대한 물자를 노획했다.

이제 정부군이 할 일은 패잔병 소탕밖에 없었다. 세니사 작전은 이듬해 3월까지 이어졌다. 작전에 투입된 정부군은 총 1만 5천명으로 이들은 EGP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키체 주를 시작으로 우에우에테낭고 주와 멕시코-과테말라 국경지대까지,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깊숙히 진격하였다. 이 작전은 그 이름값을 하는[19] 피눈물 없는 전면적인 초토화작전이기도 했다. 정부군은 처음부터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전혀 구분하지 않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량으로 학살했다. 정부군은 학살을 피해 도망친 주민들을 "반군 지지자"로 간주했고, 그들이 뒤에 남긴 마을과 농작물에 방화하고 가축들을 도살해 생존자들의 남은 삶의 기반마저 완전히 파괴했다. 어떤 희생자들은 살해되기 직전 자기가 묻힐 집단매장지를 직접 파야 했다. 과테말라 가톨릭대주교인권사무국(ODHAG)에서 발행한 REMHI 보고서에 따르면 1981년 세니사 작전으로 살해된 사람은 1만1천명에 달했고 그들 대부분은 서부 고원지대의 원주민 농민들이었다.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의 잔혹한 토벌작전은 군부에서도 불만분자를 양산하기에 이르렀고[20] 결국 1982년 3월 23일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내쫓았다. 12년에 걸친 제도민주당 정권의 종말이었다. 그러나 정작 리오스 몬트 자신이야말로 과테말라 내전의 가장 피비린내나는 시대를 열어제낀 사람이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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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에 따른 마야 원주민 분포도[22] 1999년 CEH 보고서에 따른 주(州)별 학살 발생건수 1978~1995년 사이 자행된 학살의 장소[23]
리오스 몬트 정권은 집권 직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24] 4월 10일 "안보와 발전을 위한 국가계획안(Plan Nacional de Seguridad y Desarrollo, or PNSD)"을 발표하였다. PNSD의 목적은 무차별적인 폭력을 끝내고 주민들에게 과테말라 국민의식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정권은 문맹하고 "미성숙"한 농민과 원주민들은 국제공산주의의 유혹에 취약하다면서 그들을 과테말라 국가의 체제에 편입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25] 그리고 이 PNSD를 실현하기 위해 그 세부계획으로 빅토리아 82 작전(Operation Victoria 82), 피르메사 83 작전(Operation Firmeza 83), 소피아 작전(Operation Sofia)을 수행했다.

빅토리아 82 작전의 목표는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당시 진행되던 각종 소요사태를 "6개월 이내로"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작전의 주요 섬멸대상은 반군과 그 지지세력 또는 지지자로 의심되는 자들이었다. 즉 게릴라는 물론 그들을 지지하는 가톨릭교회, 노동조합, 결사체들이 섬멸 대상이었다. 당초 빅토리아 82는 루카스 가르시아의 무차별적인 섬멸전과 차별을 두어 심리전과 대민지원을 포함하고 반군에 대한 사면 및 주민을 위한 사회경제적 지원을 통해 반군을 민간인과 분리하여 섬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나 실제 빅토리아 82의 운용은 이전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처럼 일반적인 초토화작전에 가까웠다. 이것은 애초에 마야 원주민 마을들을 게릴라의 근거지, 그리고 마야 원주민들을 게릴라 또는 그 지지세력으로 상정하고 작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뿌리깊은 인종주의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군인들은 마야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겼고 그러므로 잔혹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 있었다. 그 결과 마야 원주민 공동체 다수가 무자비하게 파괴되었고 그 주민들은 학살되거나 난민으로 전락했다. 정부군 그리고 PAC를 위시한 민병대는 희생자를 참수하거나, 분살하거나,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죽을 때까지 마체테를 내려치는 방식으로 잔인하게 학살했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아이의 머리를 나무나 바위에 패대기쳐 죽인 병사들도 있었다. 정부군은 게릴라로 위장하여 농민들을 대상으로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반군에 대한 여론 악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CEH에 따르면 게릴라로 위장한 정부군이 벌인 학살은 400회가 넘는다. 1982년 12월 7일 중북부 라스도스에레스 마을에서 이런 가짜 깃발 작전으로 최대 300명이 희생되었다. 희생자들은 정부군에 의해 산 채로 우물에 던져지고, 영아들은 벽에 머리를 부딪히는 식으로 살해되었다. 젊은 여성들은 사흘이 넘게 강간당했다.

빅토리아 82 작전이 거시적 측면의 소요진압 작전이었다면, 소피아 작전은 좀 더 세부적인 측면에서 마야계 이실인 공동체(Ixil)에 대한 섬멸을 목표로 한 작전이었다. 이실인 공동체는 서부 고원지대의 교통이 불편한 고립된 지역에 있었으며 따라서 1970년대부터 EGP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그리고 과테말라 정부가 보기에 국가 체제로부터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이실인 공동체는 EGP의 근거지로 보였다. 1982년 7월 16일부터 8월 19일까지 진행된 소피아 작전은 이실인 공동체를 고립하고 원주민들을 직접 공격하는 식으로 진행되었고 작전이 끝난 뒤에도 1983년 1월까지 원주민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진행되었다. 이곳의 원주민에 대한 잔혹행위가 끝난 것은 1987년이 되어서였다. REMHI 보고서에 따르면 이실인 공동체에서 8,857명이 사살되었고, 그 중 5,252명은 정규군에게, 2,270명은 친정부 민병대에 살해되었다. 이실인 공동체 지역에서 정부군은 2차대전 독일군이 벨라루스 일대를 초토화하면서 벌인 학살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잔혹한 범죄들을 저질렀다.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사살한 것은 물론이고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강간하고 성노예로 전락시키거나, 또는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거나 남편에게 아내와 자식들이 강간당하는 것을 강제로 보게 하였다. 정부군은 이실인을 학살할 뿐만 아니라 마을을 완전히 파괴하여 생존자들이 자원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당시 이실인 마을의 70~90%가 잿더미가 되었다.

피르메사 83 작전은 빅토리아 82 작전의 성과를 토대로 마야 원주민을 '국민'으로 개조하는, 다른말로 하면 '라디노화'를 수행하는 민사작전의 일환이었다. 정부는 각지에 군부대를 파견해 대민지원을 하면서 동시에 이주자와 난민을 관리하였다. 일부 난민은 남베트남의 '전략촌' 정책처럼 타지에 새로 건설된 마을에 수용되어 정부의 관리와 교육을 받았다. 정부는 또한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에서 창설된 PAC의 인원을 대대적으로 늘렸다. 리오스 몬트 정권 초기 2만 5천명이었던 PAC는 18세부터 50세까지의 남자를 대대적으로 징집하여 말기에는 70만 대군으로 급증했다. 물론 징집에 응하지 않는 자는 탄압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했다. PAC는 대게릴라전에 운용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라디노화'를 수행하는 또다른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정부는 마야인 PAC를 조직하여 마야 공동체 내부에 대게릴라 부대를 운용하고 이들을 통해 근대국민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였다.[26]

리오스 몬트 정권의 강력한 의지로 반군과 그 동조세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실제로 URNG는 민간인 지지자들로부터 거의 분리되어 외딴 시골로 내쫒기는 등 완전히 수세에 몰렸고 지도부는 아예 멕시코시티로 도망쳤다. 결국 군사력이 소진된 URNG는 1986년부터 정부와 협상에 나섰다. 정부군은 또한 사회의 전 분야에 침투하여 적대세력들을 절멸하고 사회 전 영역을 통제했다. 그 과정에서 일반 민간인과 마야 원주민들이 치루어야 했던 대가는 극심했다. 정부군과와 친정부 민병대가 저지른 학살의 규모는 이전의 모든 군사정권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리오스 몬토 재임기에 살해된 사람은 최대 7만5천명에 달했고 그들 대부분은 1982년 4월부터 11월 사이에 살해되었다. CEH의 1999년 보고서에 따르면 1978년부터 1983년까지 절대다수의 학살이 서부 고원지대에서 자행되었다.

6. 1983년~1996년: 민주주의와 평화로의 이행

1983년 8월 8일 리오스 몬트 정권의 국방장관 오스카르 움베르토 메히아 빅토레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메히아 빅토레스가 권좌에 오를 당시는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과 리오스 몬트 정권의 작전으로 반군을 민간인으로부터 분리하는데 거의 성공했을 때였다. 이 시점에서 군부는 군대의 경찰 통제, 난민 수용, PAC 확장, 재정착 프로그램 등을 통해 과테말라 사회 전체를 군사화하여 사회의 전 영역을 통제했다. 메히아 빅토레스는 국제사회의 압력을 받아 민주주의로 점진적인 이행을 준비했다. 1984년 7월 1일 민주주의 헌법을 만들 제헌국회 총선이 실시되었고, 이듬해 5월 새로운 헌법이 작성되어 즉시 발효되었다. 1985년 대선에서는 과테말라 기독민주당(DCG) 후보 비니시오 세레소가 결선투표에서 68.4%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1966년 이래 최초로 민주선거를 통해 선출된 민간인 대통령이 되었다.

1986년 1월 14일 취임한 세레소는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정지척 폭력행위의 중단 및 법치의 회복을 선언하였다. 세레소 정부는 인신보호영장과 암파로(amparo) 영장[27]에 관한 법을 제정하고 국회에 인권위원회를 설립했으며, 1987년 인권옴부즈맨 사무소를 설치했다. 과테말라 대법원도 반부패 개혁 및 사법제도 효율성 제고에 착수했다. 세레소가 선출된 후 과테말라군은 정치 개입에서 물러나 군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세레소 정부의 전반기는 정치적 폭력이 확연히 줄어들고 경기가 안정되었다. 수세에 몰린 URNG도 1986년부터 무장투쟁보단 정부와의 협상에 집중했다. 세레소 정부의 후반기는 경제적 실패와 각종 사회갈등으로 얼룩졌지만 그래도 쿠데타 시도들을 이겨냈고, 1990년 5월에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URNG에게 이후 치뤄질 선거를 방해하지 않을 것을 보장받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1990년 대선에서는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가 당선되어 최초의 민선 민간인 정부 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비록 메히아 빅토레스와 세레소 정부가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공을 세웠지만, 그들의 시대에도 암살과 "실종"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메히아 빅토레스가 정권을 잡은 후 미 정보기관과 인권단체에 따르면 농촌 지역의 인권유린은 줄어들었지만 도시에서 처형부대의 활동이 증가했다. 또한 초법적 살인과 학살은 줄어들었지만 대신 구금과 강제실종이 늘었다. GHRC는 UN에 보내는 보고서에 1984년 1월부터 9월까지 초법적 살인 713건과 실종 506건이 발생했다고 기술했다. 미 국방부 비밀보고서도 1983년 8월 8일부터 1985년 12월 31일까지 보고된 납치 2,883건이 있었으며 이것은 정부군의 조직적 납치 및 살해와 관련있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군정보국 G-2는 용의자를 죽을 때까지 고문하고 살아남은 수감자는 칠레 군사정권의 피노체트처럼 비행기에 태워 바다 위에 던져 죽였다. 세레소가 집권한 1986년 분쟁으로 살해된 사람은 월 100명에 달했고, 심지어 세레소 정부 3년차인 1989년에도 암살 1,600건과 납치 및 실종 800건이 발생했다.

1991년 집권한 세라노는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확립하고 고급장교의 수를 줄였다. 또한 세레소 정부 후반기 악화되던 경제문제를 해결했으며 URNG와 대화를 지속했다. 하지만 1993년 5월 25일 친위쿠데타를 시도했다가 국내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결국 일주일만에 사임하고 해외로 망명하였다. 국회는 6월 5일 인권옴부즈맨 출신의 라미로 데레온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세라노의 잔여 임기를 채우도록 했다. 데레온은 무소속이었지만 대신에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바탕으로 국회와 대법원을 '정화'할 야심찬 반부패개혁에 착수했다. 8월 26일 데레온은 모든 국회의원과 대법관의 사임을 촉구했다. 정부와 국회는 대립을 이어가다 1993년 11월 16일 가톨릭 교회의 중재 하에 합의에 도달하였다. 합의안 내용은 1985년 제정된 헌법의 43개 수정조항들로, 이 수정조항들은 1994년 1월 30일 국민투표를 거쳐 통과되었다.

데레온은 1월 6일 URNG와 협상을 재개했다. 그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UN과 미주기구(OAS)의 후원을 받았으며 반면에 군부가 협상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줄어들었다. 양측은 3월에 인권, 6월에 난민 정착과 역사 진상규명, 이듬해 3월에 원주민 권리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양측은 또한 사회경제 및 농업정책에 관한 협정에 상당한 진전을 이끌어냈다. 1994년 4월 3일 대법원장 에두아르도 에파미논다스 곤살레스 두본이 살해되고 이듬해 10월 5일 사만에서 군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지만 그래도 데레온 정부는 자유선거를 치루는 데 성공했다. 1994년 8월 16일 잔여임기를 채울 새 국회가 선출되었고, 1996년 1월 7일 대선 결선에서 국민선진당(PAN) 후보 알바로 아르수가 당선되었다. 아르수 정부도 전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URNG와 계속 대화했다. 3월 20일 휴전이 선언되었고 이후 여러 개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다. 12월 12일 양측은 마드리드에서 URNG를 합법정당으로 전환하는데 합의했고, 18일 국회는 URNG 전투원을 부분적으로 사면하는 법안을 통과했다.

그리고 새해가 사흘 남은 1996년 12월 29일.
Que con la suscripción del presente Acuerdo se pone fin a más de tres décadas de enfrentamiento armado en Guatemala, y concluye una dolorosa etapa de nuestra historia,
본 협정의 서명으로 과테말라에서 30년 넘게 지속되어온 무장분쟁이 끝을 맺고, 우리 역사의 고통스러운 시대가 끝난다.
1996년 평화협정의 첫 문장.#
아르수 정부와 URNG가 평화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장장 36년에 걸친 과테말라 내전이 완전히 끝났다.

1996년 평화협정은 1986년부터 시작된 정부와 반군 간의 협상의 종착역이었다. 협정 내용은 군에 독립적인 경찰 창설[28], 군 예산 삭감 및 병력 감축[29], PAC 해체[30], 사법부 개혁이었다. URNG 사령관 롤란도 모란과 과테말라 대통령 알바로 아르수는 과테말라 내전을 종식한 공로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평화상을 공동 수상했다. UN 안보리는 1997년 1월 20일 과테말라에 평화협정의 적용을 감시하는 관찰단을 배치하는 내용의 1094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5월 UN 관찰단의 조회 하에 URNG의 무장해제가 완료되었다. 당시 무장해제한 URNG 병력은 약 3,000명이었다. URNG는 1999년 1월 정당을 설립하여 11월 대선에 참여했다. 그해 아르수 정부는 원주민의 인권 그리고 국가의 다문화, 다언어, 다인종 특성을 수용하는 개헌안을 의회 표결에 부쳤으나 부결되었다. 협상 과정에서 URNG는 정부에 내전 당시 군부의 인권유린과 학살의 진상규명을 강조했다. 양측의 논의 끝에 1997년 2월 CEH가 설치되었다. CEH는 마을 2천 곳을 방문하고 2만명의 증언을 청취했다. 1999년 2월까지 이어진 조사활동 끝에 그달 25일에 최종보고서 '침묵의 기억'(Guatemala: Memoria del Silencio)을 제출했다.

7.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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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치말테낭고 주 코마팔라의 유해발굴 현장
과테말라 정부 공식기관인 ‘역사진실규명위원회(Comisión para el Esclarecimiento Histórico)’는 1999년에 발표한 보고서에서 과테말라 정부와 반군 양측 모두 학살을 비롯한 잔혹행위를 저질렀지만 학살의 책임은 거의 대부분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 처형부대에 있다고 밝혔다. 인권유린과 폭력행위로 인한 피해자 42,275명[31]의 사례를 조사한 결과 그 중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 처형부대에 책임이 있는 경우가 93%에 달했고, 3%만 반군에 책임이 있었다.[32] 신원이 확실한 피해자 중 83%는 마야인, 17%는 라디노인이었다. 보고서는 이 자료와 다른 연구 결과들을 종합한 결과 내전에서 발생한 피살자와 실종자는 최소 20만 명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CEH 보고서의 핵심은 과테말라 정부군이 다수의 마야 원주민 마을에서 저지른 626건의 대량학살사건을 상세히 설명하고 이를 “제노사이드”로 규정했다는 것에 있다. 원주민을 상대로 한 학살과 초토화작전의 절반 이상이 1981년부터 1983년까지 발생했다.[33] 학살이 절정에 달한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수천여개의 마을이 파괴되었고 50만~150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그 중 15만 명이 멕시코로 피신했다.[34] 조사결과를 토대로 CEH 위원장 크리스티안 토무샤트(Christian Tomuschat)[35]는 정부군의 만행이 분명히 민간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며 계획적인 전략이었다고 지적했다. 동 보고서에 따르면 CIA를 비롯한 미국 정부기관들이 정부군의 학살행위를 직간접적으로 지원했다.

1980년~1989년 사이 내전으로 발생한 직접적이고 측정가능한 경제적 손실은 1990년 GDP의 121%에 달했다. 주원인(1990년 GDP의 90%)은 살해와 실종, 피란 및 정부군과 반군, 친정부 민병대의 징집으로 인한 생산의 저하였다. 사유 및 공유 재산과 인프라를 비롯한 물적 자산의 파괴로 인한 손실은 1990년 GDP의 6%였다.

Jeffrey S. Dixon과 Meredith Reid Sarkees의 책 "A Guide to Intra-state Wars: An Examination of Civil, Regional, and Intercommunal Wars, 1816-2014"(2015)에 따르면 전투행위와 관련된 군인 사망자는 3만 3,300명이 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과테말라 내전 전체를 하나의 기간이 아니라 순차적이지만 비연속적인 4개의 기간으로 나누고 각 기간을 'n차 전쟁' 식으로 명명하는데, '1차 전쟁'은 1966년 10월 3일~1968년 3월 30일에, '2차 전쟁'은 1970년 11월 13일~1971년 9월 15일에, '3차 전쟁'은 1978년 5월 29일~1983년 8월 8일에, '4차 전쟁'은 1987년 9월~1990년 9월에 벌어졌다고 본다. 1차 전쟁에서 전사한 반군은 1,400명이고 정부군 전사자는 1,000명이다. 2차 전쟁에서 전사한 전투원은 1,000명이다. 3차 전쟁에서는 양측 합계 2만 명이 전사했는데 그 중 2,500명이 정부군 전사자다.[36] 4차 전쟁에서는 정부군 3,000명과 반군 6,000명이 전사했다.

A Guide to Intra-state Wars(2015)와 CEH의 최종보고서에서 추산한 사망자의 숫자가 맞다면, 과테말라 내전에서 살해된 군인 1명당 민간인 최소 5명이 살해되었다. 마찬가지로 초토화 작전을 벌인 엘살바도르도 이 비율은 1:2 정도이니, 과테말라에서 정부군이 얼마나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살육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8.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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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치 있는 고통이었나?: 중미의 내전과 민주주의(2013), 리카르도 사엔스 데 테하다(강성식 譯), 2013 라틴아메리카-대통령 선거와 정세 변화,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원제: ¿Valió la pena?: guerras civiles y democracia en Centroamérica(2012), Ricardo Sáenz de Tejada, Nueva Sociedad 240: p.149-162)
  • 과테말라 내전 원주민 학살의 전개와 배경(2014), 노용석, 비교문화연구 제34집, 경희대학교 글로벌인문학술원
  • 과테말라 원주민 시정부 제도의 역사적 고찰과 전망(2015), 정이나, 이베로아메리카연구 제26권 제1호,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 라틴아메리카의 과거청산과 민주주의: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의 경험을 통해 본 과거청산과 민주주의(2017), 노용석, 산지니
  • 토지개혁과 계급역관계에 대한 고찰: 한국과 과테말라 사례를 중심으로(2017), 정이나, 아태연구 제24권 제2호, 경희대학교(국제캠퍼스) 국제지역연구원
  • 과테말라의 ‘열띤 냉전’과 제노사이드: 1980년대 초 원주민 학살(2018), 박구병, 4.3과 역사 제18호, 제주4.3연구소
  • 과테말라 내전 당시 반정부 게릴라 단체의 활동(2021), 이성재, 역사교육 157집, 역사교육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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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sic Data on the Economy of Guatemala(October 1960), World Trade Information Service: Part 1—Economic reports No. 60-47, U.S. Bureau of Foreign Commerce
  • The Latin American Nations Today: A Study of Political Developments Since World War II(1964), Raymond Estep, Air University
  • The Hovering Giant (Revised Edition): U.S. Responses to Revolutionary Change in Latin America, 1910–1985(1985), Cole Blasier,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1st edition
  • Shattered Hope: The Guatemalan Revolution and the United States, 1944-1954(1992), Piero Gleijes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 Intervening in Revolution: The US Exercise of Power in Guatemala, 1954(1999), José Luis Valdés Ugalde, University of London
  • Guatemala: Memory of Silence(1999), Commission for Historical Clarification, Guatemala City[37]
  • State violence in Guatemala, 1960-1996: a quantitative reflection(1999), Patrick Ball, Paul Kobrak, Herbert F. Spirer,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1st Edition
  • Encyclopedia of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2003), W. Thomas Smith Jr., Facts on File
  • Encyclopedia of Intelligence and Counterintelligence(2004), Paul F. Kisak, Routledge; 1st edition
  • A Short History of U.S. Interventions in Latin America and the Caribbean(2006), Alan McPherson, Wiley-Blackwell; 1st edition
  • Wars of Latin America, 1948-1982: The Rise of the Guerrillas(2013), René De La Pedraja, McFarland; Illustrated edition
  • Wars of Latin America, 1982-2013: The Path to Peace(2013), René De La Pedraja, McFarland; Illustrated edition
  • Civil-Military Relations in Post-Conflict Societies: Transforming the Role of the Military in Central America(2015), Orlando J. Pérez, Routledge; 1st edition
  • A Guide to Intra-state Wars: An Examination of Civil, Regional, and Intercommunal Wars, 1816-2014(2015), Jeffrey S. Dixon, Meredith Reid Sarkees, ‎CQ Press; 1st edition
  • A History of Political Murder in Latin America: Killing the Messengers of Change(2015), W. John Green, SUNY Press; Reprint edition

9. 여담

토지를 지키겠다고 본의 아니게 내전의 단초를 제공한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는 정작 미국 본국의 반독점법에 걸려서 이후 중남미의 철도망과 과테말라의 토지 일부를 토해내야 했다.

벤 마이켈슨이 이를 소재로 나무소녀를 썼는데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며 마야족에 대한 여러 억압 및 학살에 대한 내용들 나온다.

내전의 단초가 된 아르벤스 축출 쿠데타를 지켜보던 에르네스토 게바라라는 아르헨티나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체 게바라이다.

10. 관련 문서



[1] 동조 민간인 제외. 게릴라 특성상 전투원 또는 비전투원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민간인이 있음. 과테말라 군정보부 G-2는 원주민 최소 36만 명이 반군을 지원하고 있다고 추산함.[2] 과테말라 제노사이드(Guatemalan genocide)는 사실상 마야인 대학살이나 다름없었다. 과테말라인의 2/5가 마야인인데 내전 당시 발생한 사망자 20만명의 5/6가 마야인이다. 마야인은 집중적인 학살을 당했을뿐만 아니라 정부군의 초토화 정책으로 수십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했다. 그들 상당수는 오늘날에도 도시 변두리의 빈민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3]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의 무력 자체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전투행위보다는 민간인 학살이 훨씬 빈번하게 벌어졌다. 4.3 사건 당시 한라산과 중산간지방에 찌그러져 간간히 습격이나 하고 적에게 별 피해도 못 준 제주도남로당 반군과 거의 피에 굶주린 짐승마냥 제주도민을 학살한 국군과 서북청년단을 생각하면 쉽다.[4] 라디노어와 혼동하지 말 것. 라디노어세파르딤 유대인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다.[5] 과테말라 혁명이 성공한 1944년부터 CIA가 지원한 군부 쿠데타로 정부가 무너지는 1954년까지 10년의 기간을 10년의 봄이라고 부른다.[6] 이건 UFC가 제 발등을 찍은 격인데 왜냐하면 그동안 탈세 목적으로 소유지의 가격을 낮춰서 당국에 신고했기 때문이다.[7] 미국은 900호 법령이 표면화되던 1951년에 이미 과테말라 기업에 관한 문제는 상관없지만 미국 기업에 관한 문제는 아니라며 경계했었다.[8] 카스티요 아르마스는 1957년 7월 26일 대통령궁에서 좌익분자에게 암살되었다. 그가 대통령이 된지 한달도 안 된 시점에서.[9] 5개 지역으로 나뉜다. 페텐 주(Peten), 서부 고원지대(Western Highlands), 중부 고원지대(Central Highlands), 카리브해 해안지대(Caribbean), 태평양 고원지대(Pacific Highlands).[10] 과테말라의 지역별 구분은 이것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에 표시된 중부 고원지대 남서쪽 이심체(Iximche), 치말테낭고(Chimaltenango), 안티과(Antigua), 과테말라시티(Guatemala City) 일대를 중부(Central)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 외의 지역구분은 다음 사이트들을 참고하라.##[11] 공산주의 정당으로 아르벤스 정부에서 합법화되었다가 군사쿠데타 이후 다시 불법화된 상태였다.[12] 훌리오 멘데스는 1954년부터 1986년까지 이어지는 군사정부의 대통령 중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당초 과테말라의 민주주의 개혁을 이끌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멘데스는 군부의 지지를 대가로 어떤 수를 써서라도 반군을 진압할 권한을 부여했다. 그의 재임기에 정부군과 처형부대의 테러가 본격화되었고 그 규모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급증했다.[13] 대신 그만큼 과테말라 정부의 어그로를 크게 끌어서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집권기인 1982년까지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살해되었다.[14] 판소스는 서부 고원지대가 아니라 과테말라를 북부와 나머지 지역으로 양분하는 북부횡단지대(Franja Transversal del Norte) 동남쪽 변경에 있다. 원주민 학살은 서부 고원지대에서 주로 벌어졌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도 원주민이 사는 곳이라면 학살이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다. 판소스도 마야계 켁치인(Q'eqchi')이 살고 있었다.[15] 이 참사로 리고베르타 멘추의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스페인은 과테말라와 단교했다. 양국은 1984년 9월 22일에 외교관계를 정상화했다.[16] 토레스 리바스(1930~2018)는 과테말라 출신의 사회인류학자이다. 아르벤스 정부 말기에 민주대학생전선(FUD)의 지도자로 일한 바 있으며, 과테말라 내전 후 CEH의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17] 쿠바 혁명니카라과 혁명에서 보이듯, 라틴아메리카의 좌익 혁명은 정부군이 압도적인 전력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좌익 반군에게 맥없이 패배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심지어 엘살바도르 내전에서도 FMLN은 비록 패배하긴 했지만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수도 산살바도르 인근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과시했다. 그 영향으로 반군이든 정부군이든 반군의 실제 전력을 과대평가했다.[18] 페르난도 로메오 루카스 가르시아 대통령의 동생이다.[19] ceniza란 잿더미(ashes)를 뜻하는 스페인어다.[20] 이들은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의 군사행동과 조직적 테러가 반란의 사회적, 이념적 동기를 간과한 것이며 그 결과 민간인들을 급진화시키고 있다고 보았다.[21]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의 잔혹한 토벌작전이 반군 세력의 성장을 초래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오히려 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Rachel M. Mccleary의 Dictating Democracy: Guatemala and the End of Violent Revolution(1999)이 이런 주장을 하는데, René De La Pedraja의 Wars of Latin America, 1982-2013: The Path to Peace(2013)는 1981년 추폴 전투를 끝으로 반군이 궤멸되어 정부군을 상대로 어떠한 의미있는 활동도 벌이지 못한 것으로 본다. 여기선 De La Pedraja(2013)를 따른다.[22] 카스티야어(Castilian)는 스페인어를 가리킨다.[23] 밝은색은 원주민 비율이 50% 이상, 어두운색은 50% 미만인 지역이다.[24] 당시 과테말라 헌법은 1965년 페랄타 정권에서 제정된 것이다. 현행 헌법은 1985년 제정되었다.[25] 이것은 과거 과테말라 과두지배자들이 원주민을 보는 시각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즉 19세기 과테말라 과두지배자와 20세기의 군사독재자 모두 독자적인 마야 문화를 가진 원주민들을 서구식 복장을 하고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즉 유럽 문화에 동화된 라디노인(Ladino)으로 개조하는 라디노화(Ladinización)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다.[26] 실제로 PAC는 인원이 가장 많았을 때 무장한 인원이 전체의 1%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구식 화기 또는 냉병기로 무장한 경우가 많았다. 결국 정부의 목적은 실질 군사력 확보보단 마야 원주민에 대한 통제 강화 및 국민의식 주입 그리고 반군과 마야 원주민의 접촉을 차단하여 반군의 인력공급 자체를 말려버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고 봐야한다.[27] 독일의 헌법소원(Verfassungsbeschwerde)과 유사한 스페인어권 국가들의 제도로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구제방법을 뜻한다.[28] 즉 경찰의 탈군사화. 과테말라 민사경찰(PNC) 창설로 이어진다.[29] 과테말라군 병력은 1996년 1월 52,875명에서 2004년 6월 15,500명으로 줄었다.[30] 1984년 130만명으로 인원 최대치에 달했지만 1994년에 이르면 30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동원해제 자체는 1996년 8월에 시작되었고 평화협정을 통해 해체를 선포했다. 그러나 다른 이름으로 남아 1999년과 2003년 선거에서 극우 정당 과테말라 공화주의전선(FRG)의 농촌 지지자 결집에 동원되기도 했다.[31] 임의 처형(arbitrary execution) 피해자 23,671명 및 강제 실종(forced disappearance) 피해자 6,159명 포함.[32] ODHAG도 1998년 보고서에 잔혹행위의 90%와 400건 이상의 학살이 정부 측에 의해 저질러졌고, 잔혹행위의 5%와 16건의 학살이 반군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비슷한 결론을 냈다.[33] 위에서 설명한 루카스 가르시아 정권 후기 그리고 리오스 몬트 정권 전 기간에 걸친다.[34] 사실 이러한 학살의 양상은 해방 정국 한반도,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스 내전, 핀란드 내전, 스페인 내전, 쿠바 혁명 등 전 세계의 좌우대립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본문에서와 같이 이 과정에서 게릴라전을 토벌하는 쪽이 게릴라전을 전개하는 주체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광범위한 학살과 잔혹행위를 저지른다. 엘살바도르 내전도 진상위원회에 따르면 FMLN 좌익게릴라가 내전 동안 민간인 살해의 5%에 책임이 있는 반면, 모든 민간인 살해의 약 85%는 엘살바도르 군대와 처형부대가 자행됐다고 추정했다.관련자료[35]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법학교수.[36] 토레스 리바스는 정부군 전사자를 4,200명으로 추산한다.[37] 위에서 설명한 CEH의 1999년 최종보고서다. 원문은 여기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