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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콩고[1]에서 일어난 내전들을 일컫는 말.2. 목록
2.1. 콩고민주공화국
2.1.1. 콩고 위기 (1960~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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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se congolaise
당시 콩고 내의 핵심 인물들 (좌측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조제프 카사부부, 모부투 세세 세코, 모이즈 촘베, 파트리스 루뭄바)
2.1.1.1. 개요
1961년 1월 15일 반군의 공격을 받아 가슴에 부상을 입은 채로 담배를 피는 유엔 평화유지군 에릭 본데 소령.[2]
1960년에서 1965년 사이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격변으로 콩고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직후에 시작되어 비공식적으로는 조제프 데지레 모부투의 통치 하에 나라 전체가 들어서면서 끝났다
2.1.1.2. 배경
콩고의 식민 지배는 19세기 후반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콩고 분지를 개인 식민지로 확보하면서 시작되었다. 1885년 그는 국제적 승인을 받아 콩고 자유국을 세웠지만, 원주민에 대한 폭력과 착취로 비난이 거세지자 1908년 벨기에 정부가 공식적으로 통치권을 인수해 벨기에령 콩고가 되었다. 벨기에 식민 지배는 국가·선교·기업의 ‘식민 삼위일체’ 체제를 기반으로 했으며, 정부와 기업의 이익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원주민의 저항을 강압적으로 진압했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도시화와 개발정책이 추진되면서 유럽식 교육을 받은 아프리카 엘리트 계층이 등장했고, 이들은 콩고의 독립을 원하였다. 1950년대 들어 이 엘리트 계층을 중심으로 민족주의 운동이 확산되었으며, 주요 세력으로는 온건한 전국통일당 MNC(지도자 파트리스 루뭄바), 급진적 독립을 주장한 콩고동맹 ABAKO(지도자 조제프 카사부부), 남부 카탕가의 연방주의를 내세운 CONAKAT(지도자 모이즈 촘베) 등이 있었다. 1959년 수도 레오폴드빌에서의 시위가 폭동으로 번져 수십~수백 명이 사망하면서 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식민당국은 위기감을 느낀 백인 사회의 압력 속에 억압과 협상을 병행했다. 결국 1960년 1월 브뤼셀에서 콩고 지도자들과 벨기에 정부가 원탁회의를 열었고, 루뭄바가 석방되어 회담에 참석했다. 벨기에는 30년 후 독립을 원했으나 콩고 측의 압력으로 1960년 6월 30일 독립이 확정되었다. 연방제·민족 갈등·벨기에의 영향력 문제에서는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벨기에는 루뭄바를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며 경쟁 세력을 지원했다. 1960년 5월 총선에서 전국통일당이 다수를 차지했고, 같은 해 6월 30일 콩고 공화국이 독립했다. 독립식에서 벨기에 국왕 보두앵 1세가 ‘문명화 사명’을 언급하자 루뭄바는 즉흥 연설로 식민지배의 폭정을 비판해 외교적 파장을 일으켰다. 새 정부는 반(半)대통령제 헌법 아래 루뭄바가 총리, 카사부부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중앙집권적 체제를 유지한 채 콩고의 독립국가로 출범했다.
2.1.1.3. 역사
1960년 콩고민주공화국이 벨기에로부터 독립했다. 콩고가 1960년 독립을 선포했지만, 식민지 사회 질서는 즉시 바뀌지 않았다. 벨기에 정부는 백인 지배가 유지되길 바랐고, 행정과 군대는 여전히 백인 기술자와 장교에 의존했다. 독립 후에도 변화가 없자 콩고인들의 불만이 커졌다. 7월 5일, 벨기에군 사령관 에밀 얀센스 장군이 “독립 전 = 독립 후”라고 말하며 흑인 병사들의 기대를 무시하자 군 내 반란이 발생했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거기에 더해 한때 콩고 독립운동의 3인방이었던 루뭄바와 카사부부, 촘베 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콩고는 독립하자마자 분열하기 시작했다. 루뭄바 총리는 얀센스를 해임하고 콩고군을 창설해 모든 흑인 병사를 진급시켰으며, 빅토르 룬둘라와 조제프 모부투가 지휘부에 올랐다. 그러나 반란은 계속 확산되어 백인 민간인 공격과 약탈, 성폭행 사건이 이어졌고, 벨기에 정부는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콩고 정부의 승인 없이 공수부대를 투입했다.특히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와 조제프 카사부부 대통령의 대립이 극심했다. 루뭄바는 벨기에 공수부대의 투입을 반대했지만, 카사부부는 이를 찬성하였다. 벨기에군은 콩고군과 충돌하며 폭력을 자행했고, 행정관과 백인들이 대거 탈출하면서 콩고 행정체계는 마비되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동남부 카탕가 주 총리 모이스 촘베는 벨기에의 지원 하에[3] 카탕가국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벨기에군은 유엔의 결의안에 따라 철수했으나, 콩고 식민지군 소속이던[4] 벨기에 군인들은 용병으로 남아 촘베의 편을 들었다. 이어 8월 8일, 루바족 중심의 알베르 칼론지가 남부 카사이 주에서 남카사이국의 분리 독립을 선포했다. 두 지역은 벨기에 광산기업들의 자금 지원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중앙정부는 전체 세수의 약 40%를 잃었다. 상황이 이리 되자 내전은 끝나지 않았고 소련, 중국, 쿠바, 탄자니아 등의 지원을 받던 루뭄바와 프랑스, 벨기에와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권의 지원을 받던 촘베, 그리고 미국의 지원을 받던 카사부부 간의 삼파전이자 대리전으로 번졌다. 루뭄바 정부는 유엔이 분리주의 진압을 도울 것으로 기대했지만, 다그 하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은 내정 간섭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도 군사 지원을 거절하자, 루뭄바는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고 약 1,000명의 소련 군사고문단이 콩고에 도착했다. 이는 카사부부와 서방의 불안을 키웠고, 미국은 루뭄바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 이러한 분리사태와 벨기에 개입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왔고, 유엔은 벨기에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 143호를 통과시켜 유엔 콩고작전을 파견했다.
유엔은 다그 함마르셸드 사무총장의 지시 아래 창설 이래 처음으로 유엔 평화유지군을 파병하기로 결의했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카사부부 대통령을 지원하여 '카탕가국'으로 독립을 선언한 촘베를 진압하기로 결정하였고 그에 따라 모토르 작전이란 공세작전을 입안하여 카탕가 주의 수도 엘리자베스빌을 점거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이 탄 비행기가 격추되어 함마르셸드가 죽는 사태가 벌어졌다.[5] 소련의 지원을 받은 콩고군은 남카사이를 공격해 점령했으나, 루바족 학살 등 잔혹행위를 저질러 약 3,000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콩고가 쿠바처럼 소련의 위성국이 될 것을 우려했고, CIA는 루뭄바 정권을 ‘고전적인 공산주의 접수 사례’로 규정하며 제거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61년에는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했던 아일랜드군 병력이 자도빌에서 촘베의 부대에게 포위되어서 약 6일 동안 저항했으나 결국 항복하고 이후 협상으로 풀려난 일도 있었다.[6] 전투의 자세한 내용은 자도빌 전투 문서 참조.
이런 상황에서 군부의 모부투 세세 세코가 잠정정권을 수립해 카사부부의 묵인 하에 루뭄바를 체포한 뒤 촘베에게 보내서 촘베 휘하의 벨기에 용병단이 처형하게 해 버렸다.[7] 이후 카사부부와 촘베와의 전쟁이 격화되자 모부투는 유엔 평화유지군과 함께 1963년 카탕가의 촘베를 진압했다. 그러나 연합 정권의 극심한 혼란에서 1964년 로디지아를 거쳐 스페인으로 망명한 촘베가 돌아와 총리가 되어 콩고민주공화국 전체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
한편 파트리스 루뭄바의 측근이었던 피에르 물렐레가 서남부 크윌루 지역에서 루뭄바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내걸면서 퀼루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은 동부로도 크게 확대되어 루뭄바의 동지였던 크리스토프 그베녜가 심바 반란[8]을 일으켜 동부를 장악했다. 물렐레와 그베녜는 소련의 지원을 받고 중국과 손을 잡아 마오이즘식 게릴라 전술을 채택했다. 이때 쿠바의 군사고문단도 왔는데 체 게바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식 게릴라 전술을 반란군에게 가르쳤다. 총리였던 촘베는 심바 반군 진압을 위해 옛 카탕가주 용병까지 불러오고 모부투와 손을 잡았으나 카사부부와의 갈등으로 정국의 혼돈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에 1965년 모부투는 콩고의 안정을 바란 서양 열강의 지원을 얻어 또 쿠데타를 일으키고 카사부부와 촘베를 모두 축출했다. 이후 모부투는 대통령이 되고 촘베는 스페인으로 망명해 반모부투 활동을 전개했다. 퀼루-심바 반군과 콩고 정부군의 전투는 계속됐으나 체 게바라도 실망할 정도의 오합지졸인 반란군은 지도부 사이의 내부 분열이 극심했다. 중소결렬로 중국과 소련의 사이도 나빠져 국제 공산주의 세력의 지원도 줄어들면서 연이어 패퇴해 결국 내전은 정부군의 우세로 접어들어 최대 10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일단락되었다.[9][10]
1967년 촘베를 지지하던 카탕가 주에서 또 반란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촘베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1967년 프랑스 정보부 DGSE의 전신인 SDECE에게 납치되어 알제리로 끌려갔고[11] 감옥에 갇혔다가 가택연금 상태에서 196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패전 직후 도망갔다가 사면을 약속받고 항복한 피에르 물렐레는 체포되었으며 약속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처형되었다. 크리스토프 그베녜는 우간다로 도주를 하고 우간다에서 2015년에 사망했다.
경쟁자가 모두 사라진 상태에서 32년간의 모부투 독재 정권이 콩고에 수립되었다.
2.1.2. 콩고 전쟁 (1996~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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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콩고 전쟁#|]] 부분을 참고하십시오.2.1.3. 키부 분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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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키부 분쟁#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키부 분쟁#|]] 부분을 참고하십시오.키부 분쟁은 콩고민주공화국의 북키부주와 남키부주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로 제2차 콩고 전쟁 종전 직후부터 발생했다.
2.2. 콩고 공화국
2.2.1. 콩고 공화국 내전 (1997~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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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epublic of the Congo Civil War
콩고 공화국은 독재자 드니 사수 응게소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가 1990년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1992년 민주정부가 출범했다. 이렇게 파스칼 리수바가 권력을 잡는 듯했지만 리수바가 군벌의 무장 해제를 시도하자 응게소가 이를 거부하고 내전을 일으켰다. 결국 최소 13,929명의 사망자와 함께 2년간의 전쟁 끝에 앙골라의 지원을 받은 응게소가 정권을 되찾았고 2025년 현재까지 독재자로 군림하고 있다.
[1]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 공화국이 해당된다.[2] 부하들이 그의 부상을 걱정하자, 자신은 백작이며, 자신의 피는 푸른색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3] 카탕가의 자원 채굴을 거의 독점하고 있던 벨기에의 회사 우뇽 미니에르(Union Minière)의 입김이 상당했다. 이렇다 보니 카탕가는 정부에 벨기에인 고문이 파견되고 군 수뇌부가 전원 벨기에인으로 채워졌을 정도이다.[4] 콩고에 주둔하던 벨기에 병력은 본국에서 파견나온 병력과 현지 식민지군으로 나뉘었고, 이는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식민제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1960년 독립 이후 콩고 식민지군은 콩고군으로 재편되었고 이 과정에서 백인 장교들을 쫓아냈는데 이때 전역당한 백인들이 벨기에의 영향력 하에 있어 벨기에인을 우대해주던 촘베의 밑으로 몰려간 것.[5] 사건의 원인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사건이 사건인지라 카탕가 측에서 격추시킨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추락 장소였던 로디지아 당국은 격추됐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고 추락 전까지 위험할 수준으로 낮게 날았던 조종사의 과실이라는 결론을 냈다.[6] 이를 소재로 한 '자도빌 포위작전'이란 제목의 아일랜드 영화가 있다.[7] 어처구니없게도 모부투를 진급시켜 준 사람이 바로 루뭄바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8] 라이언 킹에 나오는 심바와 같은 의미를 가진 것으로 심바는 사자(용맹함을 비유)를 뜻하는 스와힐리어 단어다.[9] 이때 미국은 공산주의 격퇴라는 명분으로 모부투에 대한 군수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백인 주민이 스탠리빌에 감금되자 벨기에군이 직접 개입해서 심바 반군을 격파하고 미국은 이를 지원했다.[10] 이때 궤멸된 동부의 심바 반군의 잔당은 로랑 데지레 카빌라에게 흡수되어 지속적으로 모부투를 괴롭혔다.[11] 왜 도와주던 프랑스가 뒤통수를 쳤나면 1967년에 카탕가 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서방은 미국을 중심으로 이미 모부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콩고의 분열을 바라지 않았던 서방 열강은 반란의 구심점이었던 촘베를 그냥 팽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