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Foco Theory196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풍미했던 시골 게릴라 전략. 피델 카스트로가 1959년 쿠바 혁명 때 사용한 전략을 발전시킨 것으로 주민들과의 친목, 자원봉사 등을 통해 거점을 만든다는 전략이다.
2. 설명
흔히 거점 이론이라고도 한다. 특정 지역을 무력으로 점령해 거점을 만드는 게릴라식 전술과 달리 초기에는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지역 주민들과 어울리고 지역 주민들을 도와주며 지역 주민들과 인간적 유대관계를 만들어 가며 충분히 인간적 유대관계가 발전하면 그 때부터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주민들에게 가르치며 한 지역을 해방구로 만드는 전술이다.기존 게릴라 전술과 다른 점은 주민들을 회유한 후 이들을 모두 게릴라 병사로 흡수하지 않으면서 그들이 보초, 첩자, 연락책, 약간의 병참지원과 같은 아주 기초적인 비전투 게릴라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실제 전투 게릴라가 얼마 없더라도 광범위한 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정규군에게 매우 효과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이 해방구에 정부군이 들어온 순간부터 정부군은 믿을 수 있는 것이 그 어떤 것도 없다. 문제는 게릴라에 협조하는 사람들이 모두 게릴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정부군 입장에선 100명 중 1명만 적대적 행위를 해도 지역 전체가 넘어갔다 판단하게 되는데 대규모 보복을 하면 진짜로 게릴라들이 양산되고 보복은 안 하면 게릴라들이 천천히 양성되며 기껏 상부에 '여긴 중립지대입니다' 라고 해봤자 윗선에서는 '정부에게 협조하지 않아? 반역이다!' 같은 반응이나 얻게 된다.
이 전술의 매력은 해방구 건설 과정에서 굳이 전투를 벌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건설 초기 단계에 전투를 벌이면 악효과를 낼 수 있다.[1] 해방구가 완성되면 극소수의 인원으로도 광범위한 지역에서 게릴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하고 많은 정규군에 대해 효과적으로 작전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어느 순간 그 지역은 해방구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쿠바 혁명 전쟁 과정에서 포코 이론은 완벽에 가까운 성과를 나타냈다. 병력과 장비의 절대적 열세 속에서 주민들의 지지와 지원을 통해 치고 빠지는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했으며 정부군의 폭격과 진격 루트를 미리 알고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레 겁을 집어먹은 바티스타 정부는 어느새 국민 대다수를 적으로 돌린 채 정복되고 말았다.
3. 전술의 수립과정
포코 이론은 러시아 혁명 당시 블라디미르 레닌의 혁명 전략보다는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 당시 보여준 홍군 전략과 더 많은 공통점과 유관성을 갖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중국공산당이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중국을 장악한 것(소위 중국 혁명)은 대략 40년대 후반의 일이며 에드가 스노우나 아그네스 스메들리등 중국공산당에 우호적인 입장의 언론인들이 이 과정을 생생하게 세계 각지로 전달하기까지 하였다. 쿠바 혁명이 대략 50년대 중반에 일어난 일임을 생각하면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등의 쿠바 혁명 주도세력들의 입장에서 중국 혁명은 바로 자신들의 눈앞에서 일어난 세기의 대사건이다. 이에 비해 레닌이 주도한 러시아 혁명은 1910년대 후반에 일어났는데 쿠바 혁명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30년도 더 이전에 일어난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다. 둘 중 어느 쪽이 당시 쿠바 혁명 주도세력에게 더 큰 충격과 감동을 안겨 주었을지는 불문가지의 일이다.
쿠바 혁명의 주역중 하나인 체 게바라의 일대기를 보더라도 그가 극렬 마오쩌둥 빠돌이(...)였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체 게바라는 평생 동안 마오쩌둥에 대한 호의와 존경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오고 중국을 방문해 직접 마오쩌둥과 회견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어린 딸에게 나의 작은 마오라는 애칭을 붙일 정도였다. 남미의 체 게바라뿐 아니라 유럽의 사르트르 같은 인물도 마오쩌둥과 마오주의에 대한 호의와 지지를 드러낸 바 있으며 십여년 뒤 68운동 당시 서유럽이나 일본의 좌파 학생운동에서도 마오주의를 표방하는 조직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즉, 당시 좌파 지식인들 사이에서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 중국 혁명에 큰 관심과 호의를 가진 이들의 비중이 대단히 높았다는 것. 애초에 중국 혁명(즉 중국공산당의 집권)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에서 혁명이 성공한 사례로써 20세기 중반의 세계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이며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과 감동/공포를 안겨준 사건이다. 그런 만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사건이기도 한데... 이 중국 혁명의 사례가 직후에 일어난 쿠바 혁명에 영향을 끼쳤을 개연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억지스럽다.
가장 중요한 점은 '농민과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농민들을 지지자로 이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해방구를 확보한다'는 전략은 마오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써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혁명 전략과 본질적인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오주의 항목에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할 것. 당장 러시아 혁명의 전개과정을 보더라도 2월 혁명은 분노한 대중들의 파업과 시위에 진압군 병사들이 합류함으로써 차르 정부가 전복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고 10월 혁명은 볼셰비키의 적위대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노동자 및 병사들이 임시정부를 전복시킴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즉, 레닌의 혁명 전략에는 애초부터 게릴라전이 없고 사회적 기능이 집중된 도시를 기반으로 단숨에 정부를 장악함으로써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주된 목표다. 이에 비해 마오주의는 농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농촌 지역에 넓은 해방구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는) 도시를 포위하고 압박하는 것을 주된 전략으로 삼는다. 실제로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의 승리 자체도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혁명 초기 극동, 우크라이나, 캅카스 등지에서 독자적으로 들고 일어난 지방 혁명 세력들은 거의 다 외부 간섭군의 지지를 입은 백군에게 제압당했다가 나중에, 주로 1920-21년쯤에야 러시아의 전통적인 국력의 핵심지방인 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에서 원정온 붉은 군대의 정규군이 통상적인 점령전으로 진주해 재점령하는 크게 보면 정규 야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군은 쿠바 상륙 작전에서 정부군에 궤멸적 타격을 입고 전투 능력을 거의 완벽히 상실해 버렸다. 그나마 20명 채 안 되는 생존자가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도망가 거점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인력 및 장비 면에서 도저히 정부군에 대항하는 게릴라 활동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점을 마련한 공산주의 혁명군은 군사작전 대신 일단 주민들을 도와주며 인간적 유대관계를 쌓는 작업을 시작했다. 군사적으로 정부군에 감행할 작전을 수행할 능력 자체를 상실했기 때문에 일단은 불쌍한 산골의 주민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며 다시 세를 불리기로 했다. 당연히 주민들은 이들이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하는 공산주의 혁명군이라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고 그저 자신들을 도와주러 온 외지에서 온 착한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것이 의외의 방향으로 좋은 결과를 낳았다. 이와 같은 대민봉사활동 - 특히 체 게바라의 의료 지원 활동이 주민들에게 큰 호감을 산 것이었다.[2] 이로 인해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군의 거점 주변으로 광범위한 지역이 무력으로 점령하지도 않았는데 해방구가 되었다.
이 때부터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군은 광범위한 해방구 지역의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소수 인원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정부군에 효과적인 타격을 입히고 정부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들로 무장하기 시작했다.[3] 정부군이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들어온 순간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지역 주민들에 의해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군에게 전달되었고 공산주의 혁명군은 그들을 가지고 놀았다. 특별히 정부군과 싸워 점령한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해방구는 계속 확장되어 갔다. 그렇다고 특별히 전선이 형성된 것도 아니었다.[4] 이러한 전술을 사용한 결과는 쿠바 혁명의 성공이었다.[5]
4. 남미에 미친 영향력
쿠바 혁명 시작부터 끝까지 피델 카스트로의 공산주의 혁명군은 단 한 번도 정부군을 압도한 적이 없었다. 정부군과 비교해보면 공산주의 혁명군은 바티스타 정권이 몰락하는 그 순간까지도 불과 한 줌에 불과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 한 줌도 안 되는 공산주의 혁명군이 쿠바 혁명을 성공시켰다.이는 민족해방운동가들 및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만큼 매력적이었다. 이 전술을 따르면 투쟁 시작 시점에 많은 자금과 어느 정도의 인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극소수의 인원이 큰 준비 없이 바로 투쟁에 돌입할 수 있다. 게다가 해방구가 완성되는 과정까지 자신들의 존재를 숨기기도 쉽다. 하지만 해방구가 완성되는 순간 해방구 안의 정부군은 동물원 우리 속 호랑이에 불과한데 그렇다고 해방구가 완성될 때까지 어지간해서는 정부군이 눈치를 채지도 못하며 해방구 주민들이 자진해서 혁명에 참여한다고 해서 혁명가의 위치가 약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혁명가의 위치는 더욱 중요해진다. 만약 해방구 주민들이 자진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킬 경우 압도적이지만 실체를 찾지 못해 해방구 안에서 우왕좌왕하던 정부군의 확실한 타격 목표가 되고 그 결과는 해방구 붕괴이기 때문이다. 해방구는 게릴라와 지역주민의 유기적 결합 형태이지 지역주민의 게릴라 병사화는 아니다.
그래서 쿠바 혁명 성공 이후 많은 민족해방운동가들 및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포코 이론을 연구하고 받아들였다.
5. 한계와 몰락
하지만 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포코 이론은 체 게바라의 볼리비아 게릴라 실패로 그 한계를 드러내었다.볼리비아에서는 이미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농민들의 불만이 많이 해소된 상태였으며 농민의 대부분이 자영농이라 딱히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해 나눠주겠다는 게바라의 선전이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게바라는 동조자들을 거의 모을 수 없었고 오히려 농민들은 외부에서 온 불청객들에게 적대적이었다. 이 때문에 게바라와 그 부하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남미에서는 느리지만 진행되던 도시화로 농촌 인구가 크게 줄어들면서 농촌은 도시를 포위할 능력을 상실했으며 각국 정부군의 정글 폭동 진압능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특히 네이팜, 고엽제, 헬리콥터의 도입은 이들 게릴라들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간단히 말해 체 게바라의 행적 및 게릴라 활동들을 살펴보면 포코 이론의 흥망성쇠가 죄다 드러난다. 그가 그나마 성공사례인 쿠바 혁명의 주인공이었음을 생각하면 한계까지 나중에 같이 보여준 것이 아이러니한 점이다. 이른바 시류의 변화에 의해 사장된 전략의 전형적인 사례디.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의 혁명 전략은 카를로스 마리겔라의 도시 게릴라 폭력 이론이 주류가 되고 포코 이론은 한물 간 이론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이 이론이 완전히 몰락한건 아니다. 페루의 농촌에서는 2000년대까지 빛나는 길이 활동했고 멕시코에서도 농촌에서 사파티스타 게릴라들이 2020년대에도 활동하고 있다.
비슷한 것으로 채명신 장군의 고보이 정신이 있으며 단점을 보완하고 상황에 맞춘 전법으로 바꿨다면 다른 이론을 낳았을지도 모른다.
[1] 외지인이 다짜고짜 총질을 하는데 좋아할 리가 없다.[2]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낙후된 곳일수록 봉사활동 중 지역 주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의료 봉사활동이다. 아예 병원이 없거나 설령 있다 해도 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들이 심각한 상태가 되어 죽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낙후된 곳일 수록 위생상태 또한 매우 열악해지기 때문에 의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넘쳐난다. 체 게바라는 당시 혁명군중 유일한 의사였기 때문에 그 가치가 매우 높았고 혁명군 내에서의 위상과 지위도 자연스럽게 상승했다.[3] 이전까지는 게릴라 병사를 늘릴 수도 없었는데 당장 그들에게 제대로 지급할 무기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4] 바티스타 정권이 붕괴되기 직전까지도 정부군은 해방구 안에서 게릴라 소탕작전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단지 잡아야 하는 게릴라는 안 보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총알과 폭탄이 날아올 뿐이었다.[5] 그래서 게릴라전을 일종의 사회운동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단순히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시킨다기보다 끊임없이 주민들과 상호 공존하며 지지자를 넓히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