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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하우스 오브 사담 · 바트당 · 아랍사회주의 · 바트주의 이라크 |
1. 개요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일생에 대해 다룬 문서.2. 젊은 시절
이라크 알 아우자의 수니파 무슬림 중에서 하층민 출신이었다.[1] 그의 생모 수브하 탈파가 매춘부였다는 중상모략도 있으나[2] 후세인의 고향인 알 아주마 마을은 매춘부도 없을 정도로 빈곤하고 낙후된 곳인 데다가 썰 외에는 입증할 근거가 없다. 공식적으로 1937년 4월 28일에 태어났고 이후 이라크 공화국의 국경절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공식적인' 기록으로 그의 실제 생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후세인이 태어났을 당시 이라크 왕국은 행정력이 너무 미약해 모든 하층민의 생일을 7월 1일로 기록해 버리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후세인 자신조차 자신의 정확한 생일을 몰랐고, 그의 생부인 후세인 알 마지드의 운명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수브하와 싸우고는 가출했다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설, 후세인이 태어나기 전에 강도에게 살해되었다는 설[3]이 중구난방으로 나돌고 있다.어려서는 재혼한 어머니의 의붓아버지 하지 하산 이브라힘[4]은 후세인을 두들겨패며 그를 농사일과 양치는 일에 내몰았다.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후세인은 사촌인 아드난 탈파가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을 보고 크게 부러워했으며 주변으로부터 고아라는 이유로 많은 괴롭힘을 당했다. 결국 이를 견디다 못해 1947년이 집을 떠나 평소에 자신이 존경하던 이라크 왕국군 육군 소위 출신인 교사 외삼촌 하이랄라 탈파의 집으로 옮겼다. 하이랄라 탈파는 1941년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 반란에 참여했다가 군에서 면직되어 5년간 투옥된 경력이 있었다. 하이랄라 탈파는 후세인을 맞아들여 교육을 시켜주었다.
1947년의 후세인 |
1960년의 후세인 |
이 시점에서 아플라크의 눈에 들어 바트당에서 주목을 받게 되고, 나세르 정권의 지원을 받아 이집트에서 학교에 다니며 망명 생활을 계속하였다. 이곳 카이로의 카스르 알닐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그는 공부에 열중했다.
3. 정치 경력
3.1. 정계 입문
그리고 1963년의 이라크 군부의 쿠데타로 카심 정권이 붕괴되고, 압둘 살람 아리프 정권이 들어서자 바트당과 후세인은 이라크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아리프 정권의 우유부단한 정책과 내부 갈등 봉합 실패로, 바트당과 시아파 등 내부 세력과 대립국면에 들어갔으며, 이때 사담 후세인은 체포, 수감되었다. 후에 어렵지 않게 탈출하고 군부를 설득하여, 1968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압둘 라흐만 아리프(전 대통령인 아리프의 형)에 대한 쿠데타를 결행, 바트당 정권이 집권하였다. 허나 이때만 해도, 사담 후세인은 두드러지는 인물은 아니었다.당시 아랍 특유의 피의 복수[6] 관습을 의식하여, 치안첩보를 전담하는 '일반사무국'의 수장 자리는 아무도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7] 그때 사담 후세인이 '악역을 맡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일하겠다'고 공언하여, 그가 일반사무국, 즉 첩보치안기구의 수장이 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호랑이에게 이빨과 날개를 달아준 셈이 되었다. 이 또한 스탈린이 아무도 맡지 않으려던 혁명자금책(=은행, 열차 강도)을 맡아 레닌의 신임을 얻었던 것과 비슷하다.
후일 후세인이 비상식적인 짓을 하면서도 대책 없는 낙관에 빠져 있었던 이유가 이게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3.2. 부통령 시절
바크르와 후세인 |
또한 부통령 자리에 오르면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이는 당시 이라크의 국력신장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업적은 IPC(이라크석유조합)의 국유화를 들 수 있다. 이라크 석유조합은 서방 석유화학기업의 이라크 유전개발 조합으로서, 이라크 유전의 수익은 모두 그들이 나눠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국유화 여론은 1950년대 당대부터있었지만 이라크 정국이 1958년 이후로도 상당기간 혼란에 처해있던탓에 전면 국유화는 미루워졌던 상황인데 사담 후세인은 서방국가의 반발을 각오하고 IPC의 국유화를 단행하면서,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소련이나 폴란드 등의 공산국가들, 프랑스 등의 일부 국가를 새로운 수출고객으로 준비해놓고, 서구의 위협에 대응하여 소련의 지원을 약속받는 등 매우 주도면밀하고 다방면에서 철저한 준비를 했다. 당시 전문가들조차도 놀랄 만큼 세부적인 면까지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석유조합의 국유화는 후세인의 의도대로 성공하였으며, 기존의 고객과 새로운 고객이 더하여 수출처는 늘어났고, 이라크의 재정수입은 엄청나게 불어나서 이에 따라 사담 후세인은 이렇게 벌어들인 오일머니들을 대규모 인프라투자 사업에 쓰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정책은 문맹퇴치, 고속도로와 전기사업, 전화보급, 여성의 사회참여 강화[8], 의무교육 확대, 과학기술 발전, 사막화되어 가던 이라크 국토를 다시 메소포타미아 시대의 옥토로 부활시키는 거대 프로젝트, 시아파와 쿠르드족에 대한 사회간접자본 우선보급을 통한 이라크 통합정책 등이 있었다. 이러한 정책은 서방세계에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주었고, 이라크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의무교육과 문맹퇴치 운동은 성공리에 마무리되어, 아랍에서 문맹률이 최저인 국가가 되었고 유네스코에서 극찬을 받고 수상까지 하게 되었다.
바크르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부통령의 뛰어난 성과, 자신을 깍듯이 모시는 그의 예의바른 행동 등을 통해 후세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을 후세인에게 맡기고 자신의 측근들의 불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모른 채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담의 권력이 점차 강화되어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바크르 대통령이 사담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정치공작을 시도하기 시작했는데, 이라크의 분열된 바트당 통합과 국가통일에 대해 바르그 대통령이 시리아와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바크르는 대통령이라는 대표성으로 이 논의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차후 통일국가에서 사담 후세인을 제3인자로 끌어내리되,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제1인자로 삼으려는 방향으로 논의하였다. 그런데 하페즈와 사담 모두 실질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하페즈 아사드는 이라크가 강대한 국력과 인구수로 시리아를 집어삼킬 것이라 생각했으며,[9] 사담은 바크르와 하페즈가 전면에 나선다면, 자신은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버릴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에, 이에 개입하여 결국 통일논의는 결렬되었다.
사담은 자신에 대한 바크르의 견제가 확실해지자 결국 바크르에게 퇴임을 강요했고, 내각 구성원들과 군부마저 사담을 지지했다. 때문에 바크르는 표면적으로 건강과 가족들의 죽음 등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었다고 발표하는 동시에, 부통령 사담 후세인을 차기 대통령으로 지목하며 정권을 내놓고 하야하고 순순히 대통령 자리를 내준 바크르는 1982년까지 살다 68세를 일기로 조용히 죽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후세인은 점점 타락하기 시작한다.
3.3. 대통령 취임
대통령이 된 사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당회의를 소집하는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홀에서 삼엄한 경비 속에 열린 당회의에는 1천명의 당 간부들이 소집되었는데, 반역모의가 발각되었다는 당 개회연설로 참석자들이 당황하는 와중에 곧이어 갖은 고문과 가족들에 대한 살해협박에 끝에 굴복한 바트당 지도자 압둘 후세인이 당 중진 4명과 함께 시리아의 지령을 받고 후세인을 암살코자 했다는 자백문을 읽어내리면서 회의장이 완전히 얼어붙었고, 분위기를 파악한 몇몇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담에 대한 충성맹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사담은 대표석에서 혼자 뻑뻑 시가를 피우며 참석자들에게 누가 상전인지 분명히 인상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런데 본격적인 연출은 아직 시작된 게 아니었다. 사담은 압둘 후세인에게 대표석 의자까지 내주면서 이름을 계속 불게 시켰고, 연단에서 내려가 진작에 고문으로 조작한 역적모의 자백을 경청했다. 자백이 전부 끝나자 사담은 다시 올라와 반역자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약속하면서 이제는 자기 입으로 모의자 이름들을 한 번에 10명씩 총 68명의 이름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이 이름들 가운데에는 자신의 심복이자 바트당의 인텔리이며 후세인 집권을 도운 절친한 친구인 아드난 함다니도 끼어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읽다가 티슈로 눈물을 훔치는 것은 물론이고 숙청이 끝난 후 그의 유가족을 방문하여 새 집을 지어주는 등 무서운 연출력까지 보여주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참석자들은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으려고 충성심을 과시하며 반역자들을 쏴죽이라느니, 지금까지 사담이 너무 관대했으나 이제는 바뀔 때가 되었다느니, 공산주의 러시아의 스탈린 식으로 대응을 하자느니[10] 등 앞다투어 강경한 처벌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참석자들에게 거대한 공범 의식을 만들어내는 치밀한 모습까지 보였다.[11]
사담은 이 숙청과정을 녹화하여 전국의 당 조직에 배포하여 시청케 함으로써 자신이 전권을 쥐었음을 과시하였는데, 오늘날 이 테이프가 완전히 남아있는 것은 없고 여기저기 흩어진 일부만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이렇게 끌려나간 68명중 47명은 가혹한 고문만 당하고 살아나왔으나, 21명은 처형되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 심복들과 휘하 관리들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숙청되었다. 특히 함다니는 이라크 기획부장관을 역임했기 때문에 사담 후세인의 경제개발계획을 함께 이끌어왔던 유능한 관료들이 많이 연루되어 죽어나갔다.
왼쪽의 인물. 오른쪽은 무아마르 카다피 |
3.4. 이란-이라크 전쟁
위대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후예인 '강한 이라크'를 강조하여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사담 후세인의 선전화
동시에 기존 바트당의 아랍 민족주의 역시 강조, 본인이 아랍의 수호자로써 '아랍의 적' 이란과 싸운다는 프레임을 만들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 이후, 이라크의 시아파에 가해지던 시아파 혁명 선동과 그에 따르는 온건 시아파 성직자 알 사드르의 반정부 항쟁 등에 대해, 내부적으로는 치안첩보의 강화를 통해 대처함과 동시에, 혁명 선동의 본거지인 이란에 대해 군사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정치, 외교적 우위를 명백히 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결행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분명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추진한 것이기는 했다. 당시 이라크는 고유가로 국력을 착실히 키워 경제적으로 개도국의 수준을 충분히 넘어 이제는 어느정도 잘먹고 잘사는 국가가 되었고, 이러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도 충실히 키웠지만 그럼에도 이란에 비하면 인구와 국토가 턱 없이 적은 나라였다.
이란이 제대로 마음먹고 부국강병을 추구할 경우에는 이라크가 뒤쳐질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 컸다. 이 상황에서 이란을 누르려면 기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에 대해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라 치명타를 입으면 국민들의 상태가 영 아니니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협상 테이블에 앉을 거라고 기대하였다. 즉 초반에 이란의 기를 꺾어서 불리한 상황을 대등한 상황으로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이란군의 혼란 상황이나 어느 정도 준비된 이라크군의 상황을 감안하면 절대 비합리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롤모델로 삼았다.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은 러시아 혁명과 뒤이어 벌어진 러시아 내전(적백내전)으로 혼란했던 러시아, 제1차 세계 대전을 막 끝내고 독일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던 폴란드 제2공화국과 독일-러시아 사이에 갑자기 생겨난 수많은 소국들(발트 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이 혼란한 시점에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내부 충돌이 폴란드와 러시아가 개입하면서 정면 충돌로 발전했고, 결국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은 폴란드가 승리하여 폴란드 제2공화국은 소련의 공산주의 블록 확산을 저지하고 영토를 확장하였다. 사담 후세인은 폴란드 제2공화국을 승전으로 이끈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전략, 전술 운용에 감화를 느꼈다. 이란 혁명으로 혼란한 이란이 시아파 신정혁명을 중동 각국으로 수출하겠다고 덤비던 시점에, 이란의 길목인 이라크가 폴란드 제2공화국처럼 이란의 혁명 수출 기도를 눈앞에서 저지한다면 이라크는 중동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 발언권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사담 후세인은 이런 효과를 노리고 이란을 선제공격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12]
이 것은 만들어진 국가의 통치자인 후세인의 오판이었다. 국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국가에서 통치를 너무 오래 하다 보니 상대도 그럴 거라고 착각을 심하게 한 것이다. 전쟁 전에는 이란군을 제대로 두들기면 국민 여론 때문에 알아서 협상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란은 여러 민족이 있긴 해도 사실상 페르시아인 민족 국가에 가까웠기에 전 국민이 애국심으로 단결했고, 호메이니는 초기의 열세에 기가 꺾이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게다가 이란과 이라크는 기본적인 규모가 달랐다. 이라크군은 초기 전역에서만 성과를 보였을 뿐 얼마 가지 않아 이란군의 반격에 밀려나 전황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장기적인 소모전으로 흐르게 되었고, 또한 양국이 서로 전비를 댈려고 석유수출량을 경쟁적으로 늘리는 바람에 유가가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면서 이란과 이라크 양국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 되었다. 결국 수니파 국가들의 지원을 등에 업어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후세인과 당시 이란 혁명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이 심화되고 특히 전쟁 말기에 벌어졌던 도시간 탄도 미사일 공방전에서의 열세로 인해[13]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바닥난 이란과의 이해타산이 맞으면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덤으로 후세인은 전쟁 기간 동안 대통령궁의 지하 벙커에 머무르며 폭격에서부터 소규모 전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결정을 직접 내렸으며, 전쟁 기간 동안 보안국의 인원을 10배나 늘리며 공포 정치를 강화했다.
3.5. 공포정치
집권 직후 후세인은 극단적인 공포정치로 지탄을 받았다. 내치 면에서만 보았을 때 악행에서 후세인을 능가하는 자들이 없지는 않으나, 국민들과 관료들의 공포를 조장하는 능력만큼은 그 누구를 데려와도 밀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후세인의 악명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내각 관료들은 그와 차를 마실 때에 절대로 먼저 차를 마셔서는 안 되었으며, 그의 앞에서는 함부로 입을 놀려서도 안 되었고, 항상 정자세로 경청을 해야만 했으며, 나갈 때에는 등을 보이지 않고 뒷걸음질로 나가야만 했다. 심지어 국회 연설 중 한 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쪽지를 건네는 모습을 보고서, 음모를 꾸민다며 즉석에서 그 의원을 총으로 사살해버렸다. 그러자 국회는 한순간에 공포에 휩싸였고, 겁에 질린 의원들의 두려움 섞인 박수소리가 이어지자, 후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연설을 계속했다고 한다. 1982년 3월에 열린 내각 회의 중 후세인은 보건부 장관 리야드 이브라힘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권총으로 사살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돌아와 회의를 계속하기도 했다.
바빌론 유적 복원이 한창 진행될 때 후세인이 이곳에 왔다가 자기 이름이 없는 것을 보고 화가 나서 현장 기술자들을 모조리 처형해 버린 적이 있었다. 이후 겁을 먹은 다른 기술자들은 기존의 벽돌을 뜯어 내고 후세인의 이름을 새긴 벽돌을 박았다고 한다. 실제로 기자가 확인해보니 후세인의 이름이 적힌 벽돌은 모두 색깔도 다르고 새로 박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79년에 살해된 의원들만 60명이었고, 집권 이후 3,000명 이상의 정치가들이 처형당했다. 후세인의 이부동생이자 정보국 국장을 역임했던 바르잔 이브라힘 알 티크리티 또한 후세인 카멜 알 마지드에게 밀려서 숙청되었다. 원래 후세인의 어머니 수브하 탈파는 바르잔의 아들과 후세인의 딸을 결혼시켜 집안을 결집시키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후세인은 어머니의 유언을 씹고 자신의 딸을 후세인 카멜과 결혼시킨 다음에, 바르잔의 권력을 빼앗고 이라크에서 추방한다.
또한 1980년에는 이란을 공격하여 이란-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1988년까지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다치게 만들었고, 1990년에는 쿠웨이트를 점령하는 걸프 전쟁을 일으키면서도 이라크군은 수백명의 민간인들을 납치, 고문,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패색이 짙어져 이라크군이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오자 후세인은 쿠웨이트의 모든 유정들을 다 태우라는 명령을 내렸고 약 1,000만t 가량의 기름이 걸프만으로 흘러들어가 수많은 수원들이 기름에 잠겨버렸다. 결과적으로 후세인은 이때 미국에게 찍혀 자기 무덤을 파게 된다.
물론 후세인은 자신의 정부에게 지지를 표하지 않는 모든 집회를 법적으로 금지시켰고, 여행의 자유도 북한과 폴 포트 치하의 민주 캄푸치아, 이디 아민 치하 우간다,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의 적도 기니처럼 대놓고 법으로 막은 것만 아닐 뿐이지 국내의 도로와 고속도로에 경찰 검문소를 채워넣거나 출국 비자를 값비싸게 만드는 식으로 박탈했으며[14], 특히 이라크 여성은 남성 친척의 호위 없이는 해외 여행이 불가능했다. 물론 우상화도 착착 진행하여 이라크 전역에 자신의 동상을 세웠고 관공서나 집집마다 자신의 사진을 걸도록 강요했으며 만약 사진을 걸지 않으면 반체제로 간주해 처벌했다.[15]
결론적으로 후세인은 동정의 여지가 없는 피의 독재자였는데, 실제로 2003년부터 이라크 곳곳에서 후세인 정권 당시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묻혀있는 대량무덤들이 발견되고 발굴되었는데 시체가 너무도 많았다고 하며, 휴먼라이츠워치는 2004년에 25만~29만 명의 이라크인이 후세인 정권 하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것으로 추산했다. 이런 공포 정치가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이후 많은 이라크인들이 미군을 환영한 이유로 꼽힌다.
그리고 북한마냥 국민들의 인터넷 접속도 차단하여 2002년 기준 이라크의 인터넷 이용자 수는 인구의 0.1% 미만 수준인 25,0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16] 물론 후세인의 몰락 후에는 일반인들의 인터넷 사용이 허용되었지만.
3.5.1. 부정선거
1995년 10월 15일에는 대통령 선거[17]를 치르는 과정에서 단독 후보로 출마해 당 간부들을 동원해 자신을 찬양케 하거나 '후세인을 찍지 않으면 식량 배급을 중단하고[18] 가족에게 화가 닥칠 것이다'고 협박을 하면서 99.99%의 투표율과 99.9%의 찬성율[19]을 기록했다.이를 넘어 2002년 10월 16일에도 후세인은 단독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단 한 명의 오차도 없이 100% 투표, 100% 찬성[20]이라는 기괴한 기록을 세웠는데,[21] 투표 과정에서 투표소는 후세인의 초상화로 장식되었고, 어린이들이 이라크 국가를 부르면서 유권자들에게 비스킷과 음료를 제공했으며, 유권자들은 성조기를 짓밟고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표시하기 위해 자신의 피로 투표 용지에 서명했다고 한다. 다만 쿠르드족이 이 선거에서 반대 의견을 표했다는 것을 보면, 투표 결과 자체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도 후세인 정권의 2인자이던 이자트 이브라힘 알 두리는 "투표 집계는 공정하고 정확했다." "이라크의 선거가 유럽이나 미국의 선거와 비교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궤변을 쏟아부었다. #
3.5.2. 두자일 학살(Dujail Massacre)
후세인은 자신에게 대항하거나 잘못 보인 자들의 가족까지 죽여 버리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두자일 학살이다. 1982년 7월 8일에 후세인이 바그다드로부터 53km 정도 떨어진 두자일(Dujail)[22]이라는 마을을 방문한 뒤 바그다드로 돌아가려고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릴 때 총을 든 무장 괴한들에 의해 본인의 경호원 2명이 죽고 본인도 암살될 뻔하자[23], 후세인은 암살범들의 매복을 막기 위해 발라드 지역에서 두자일로 가는 길 양쪽에 있는 과수원을 파괴하라고 지시한 것을 넘어서[24]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인 보복에 나섰다.후세인은 애꿎은 마을 주민 787명[25]을 체포하고 이 중 암살에 가담했다고 판단된 148명[26]을 강제로 '혁명 재판소'에 보내 약식재판을 거치게 한 후 1984년 5월 말에는 전쟁 중 이란에 대한 무장 지원을 제공한 반역죄에 대한 유죄도 인정하며 1984년 6월 14일에 이들 전원에게 교수형을 선고했는데, 이 사형수들 중 무려 96명[27]이 1985년 3월 23일 단 하루 만에 모두 처형당했다. 참고로 사형수 중 2명은 실수로 석방되었고, 3명은 실수로 다른 교도소로 옮겨지며 살아남게 되었으나, 46명은 가혹한 심문 끝에 '청산', 즉 사망했다.
거기다가 후세인은 1984년 7월 23일에 사형 집행을 승인하는 법원 문서에 서명한 후 사형 판결을 받은 이들의 집과 과수원을 불도저로 밀어버리도록 손수 명령했으며, 수감 당시 11세부터 17세였던 소년 10명[28]은 1989년에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성인이 되자 정보국의 명령으로 비밀리에 처형당했다. 학살로 분류될 정도인 이 초대형 사법살인은 2006년에 사담 후세인이 교수형에 처해질 때 주요 혐의로 적용되었다.
3.5.3. 안팔 캠페인(Anfal campa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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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목록 |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 ||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 발생 위치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 ||
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 ~ 1917,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련 인물 이스마일 엔베르 | |||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 발생 위치 오스만 제국 | ||
관동대학살 ,1923, | 발생 위치 일본 제국 전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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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1937, | 발생 위치 일본군 점령하 중화민국 난징시 | ||
롬인 말살 정책 ,1935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파슬리 학살 ,1937, | 발생 위치 도미니카 공화국 | ||
관련 인물 라파엘 트루히요 | |||
제2차 세계 대전 | 슬라브인 말살 정책 ,1939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홀로코스트 ⚖️ ,1941 ~ 1945, | 발생 위치 나치 독일 점령하 유럽 | ||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 |||
관련 인물 아돌프 히틀러 | 헤르만 괴링 | 하인리히 힘러 | 파울 요제프 괴벨스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 아돌프 아이히만 | 하인리히 뮐러 | 루돌프 회스 | 프란츠 슈탕글 | 크리스티안 비르트 | 아몬 괴트 | |||
관련 단체 나치당 | 친위대 | 국방군 | 게슈타포 | 무장친위대 | 아인자츠그루펜 | 질서경찰 | |||
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 수용소 | |||
크로아티아 홀로코스트 및 세르비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크로아티아 독립국 | ||
관련 인물 안테 파벨리치 | 딘코 사키치 | 미로슬라프 필리포비치 |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 | |||
관련 단체 우스타샤 | 우스타샤 민병대 | |||
수용소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 |||
보슈냐크인 및 크로아티아인 학살 ,1941 ~ 1945, | 발생 위치 추축국 점령하 유고슬라비아 | ||
관련 인물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 |||
관련 단체 체트니크 | |||
크림 타타르족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크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 발생 위치 체첸-인구시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
관련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
과테말라 마야인 제노사이드 ,1960 ~ 1996, | 발생 위치 과테말라 | ||
방글라데시 제노사이드 ,1971, | 발생 위치 동파키스탄 | ||
이키자 ,1972, | 발생 위치 부룬디 | ||
아촐리족과 랑고족 학살 ,1972 ~ 1978, | 발생 위치 우간다 | ||
관련 인물 이디 아민 | |||
동티모르 제노사이드 ,1975 ~ 1999, | 발생 위치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 ||
킬링필드 ⚖️ ,1975 ~ 1979, | 발생 위치 민주 캄푸치아 | ||
재판 ECCC | |||
관련 인물 폴 포트 | 키우 삼판 | 깡 겍 이우 | 누온 체아 | 이엥 사리 | 이엥 티릿 | |||
관련 단체 크메르 루주 | |||
수용소 뚜올쓸라엥 | |||
구쿠라훈디 학살 ,1983 ~ 1987, | 발생 위치 짐바브웨 | ||
관련 인물 로버트 무가베 | |||
안팔 학살 ,1986 ~ 1989, | 발생 위치 이라크 쿠르디스탄 | ||
재판 안팔 학살/재판 | |||
관련 인물 사담 후세인 | |||
이사크 학살 ,1987 ~ 1989, | 발생 위치 소말리아 소말릴란드 | ||
관련 인물 시아드 바레 | |||
보스니아 전쟁 | 보스니아 제노사이드 ⚖️ ,1992 ~ 1995, | 발생 위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 | 스릅스카 공화국 | |
재판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 라도반 카라지치 | 라트코 믈라디치 | 젤리코 라즈나토비치 | 니콜라 요르기치 | 프라뇨 투지만 | 슬로보단 프랄략 |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 |||
관련 단체 스릅스카 공화국 | 헤르체그 보스니아 | 스릅스카군 | |||
세부 사건 스레브레니차 학살 | 프리예도르 인종 청소 | 포차 학살 | |||
르완다 제노사이드 ⚖️ ,1994, | 발생 위치 르완다 | ||
재판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 | |||
관련 인물 르완다 제노사이드 가해자 목록 | 르완다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인물들 목록 | |||
관련 단체 후투족 민병대 (Interahamwe | Impuzamugambi) | |||
제1차 콩고 전쟁 중 후투족 학살 ,1996 ~ 1997, | 발생 위치 자이르 키부 | ||
밤부티 피그미족 학살 ,2002 ~ 2003, | 발생 위치 콩고민주공화국 이투리주 | ||
다르푸르 학살 ,2003, | 발생 위치 수단 공화국 다르푸르 | ||
관련 인물 오마르 알바시르 | |||
야지디 학살 ,2014 ~ 2019, | 발생 위치 이라크 니나와주 Sinjar | ||
관련 단체 ISIL | |||
중국의 위구르인 탄압 ,2014 ~ , | 발생 위치 중화인민공화국 위구르 자치구 | ||
미얀마의 로힝야 탄압 ,2016 ~ , | 발생 위치 미얀마 라카인주 | ||
[!] 논란의 여지가 있음. | }}}}}}}}} |
1988년 2월부터 9월까지 이라크 정부는 '쿠르드 반군 그룹을 제거하고 키르쿠크 주의 전략적 부분을 아랍화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안팔 캠페인[29]'이라며 쿠르드족 마을 40여곳에 화학무기를 살포했다. 사담 후세인의 사촌이자 당시 바트당 북부 사무국장이었던 알리 하산 알 마지드가 이 화학전을 계획한 것 때문에 그는 "케미컬 알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로 인한 사망자 수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1993년에 휴먼라이츠워치는 '5만 명 미만일 수 없으며 그 2배일 수도 있다'고 추정했으며, 1995년에 안팔 피해자 권리 수호 위원회는 63,000명이 실종되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며 전체 사망자 수는 7만 명 미만이라고 추정했고, 학살 최대치는 18만 명이라고 한다. 게다가 수만 명의 여성, 어린이, 노인들마저 수개월 동안 감금되었고, 거의 2천 개에 달하는 마을이 파괴되었다. [30]
'안팔 캠페인' 시기에 일어난 사건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88년 3월 16일에 '쿠르드족과 이란군에 대한 공격'을 명분으로 쿠르디스탄 지역의 할라브자(Halabja) 마을에 화학무기가 사용된 사건이다. 이라크군은 이날 마을에 로켓과 네이팜탄을 투하한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사용되어 악명높은 겨자 가스 폭탄을 퍼부었는데, 그 직후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질식하거나 눈이 멀었으며, 구토, 경련, 전신에 물집이 생기는 걸 느꼈다고 증언했고, 영구적으로 시력을 잃거나 암에 걸리거나 기형아를 출산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약 3,200~5,000명의 사람들이 화학무기 사용 당일 사망했으며 7,000~10,000명 정도는 생존했지만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할라브자 마을에서는 현재까지도 기형아 출산이 빈번하다고 한다. 물론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역사상 민간인 거주 지역에 대한 최대 규모의 화학 무기 공격'으로 간주되고 있다. 참고로 이라크군은 화학무기 살포도 모자라 할라브자 마을이 탈환된 후에 다시 마을로 돌아와 마을을 불도저와 폭발물로 파괴해버렸다[31].
3.5.4. 1991년 시아파 봉기 유혈진압
사담 후세인은 걸프전 후인 1991년 3월 1일부터 시아파 교도 수천 명이 이라크 남부의 바스라와 나시리야에서 후세인의 퇴위를 요구하머 민병대, 반군을 꾸려 무장 봉기를 하여 바트당 관리, 정부군 장교들을 죽인 것이 다른 시아파 도시와 이라크 북부의 쿠르드족에게도 확산되자 이를 무차별적인 총격과 헬리콥터를 동원한 폭격, 심지어는 사린 폭탄까지 동원하며 무자비하게 진압하며 4월 5일까지 단 1달 만에 약 25,000~180,000명의 시아파인들[32]을 죽였다. 그리고 봉기 진압 과정에서 정부군측도 5,000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33]후세인은 '케미컬 알리'를 이라크 남부에 보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반란을 진압하게 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병사들에게 '수도에서 감히 무기를 드는 사람은 누구든 사살하라'라고 직접 명령했는데, 이렇게 후세인은 자신의 군대를 바그다드 남부에 주로 거주하는 시아파 마을에 들어가게 해 시아파 성인 남자, 여자 및 아이들을 체포한 후 벌판에서 무차별 사격 살해 후 땅에 파묻거나 살아있는 사람을 산채로 탱크로 깔아뭉개거나 땅에 파묻어 죽였으며, 당연히 헬리콥터를 탄 군인들이 도시를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퍼붓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시민들에게 강제로 휘발유를 마시게 한 후 총을 쏘아 몸에 불을 붙여 죽인 것도 모자라 7~80년대 남미의 극우 군사정권의 '죽음의 비행'과 비슷하게 한 가족 전체를 헬리콥터에 실은 후 공중에서 산 채로 떨어뜨려 죽이기까지 했다. 더 나아가 후세인은 봉기 진압을 위해 사린, CS 가스, 겨자 가스 같은 화학무기까지 사용했다. 물론 봉기 중 체포된 사람들은 고문과 강간을 당했다.
학살 피해자들이 암매장된 대량무덤들이 이라크 곳곳에서 300개 이상 발견되었으며, 한 대량무덤에서는 수천 구의 시체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 학살 과정에서 후세인은 이라크 남부에 있는 역사적, 종교적인 건물을 파괴하라는 지시를 내려 의도적으로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건물들을 파괴하기도 했으며, 이라크군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인간 방패로 삼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봉기 기간 동안 무려 200만 명[34]이 고국을 떠나 터키 등지로 떠나야 했으며, 이들은 이란과의 전쟁 중 이라크군이 동부 국경 근처에 설치한 지뢰를 밟아 죽거나 불구가 되기도 했다.[35] 그리고 75만 명에 달하던 이라크의 기독교인들은 봉기가 끝난 후 집단적으로 나라를 떠나기 시작했고, 현재 이라크에는 기독교인이 8만 명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사실 후세인은 1981~1982년 사이에 시아파 교도 민간인들 3천 명 넘게 학살한 적이 있으며, 이 학살이 대폭 확장된 것이 바로 1991년 시아파 학살이다.
3.5.5. 비밀경찰을 동원한 공포정치
"비밀경찰 한 명이 내 살을 먹겠다며 손을 물어 뜯었다. 귀에 전기선을 연결해 전기고문을 했다. 담뱃불로 지지고 차마 다 얘기할 수 없다. 특히 콜라병에 앉게 하는 고문이 횡행했다. 이 고문을 받던 전직 경찰 간부 한 명은 항문이 터져 울면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소리 쳤다. 이것은 단지 하나의 예다. 지금 우리는 수백만 건의 처형기록과 고문기록을 확보하고 있다."
INA 당원이자 이라크인권협의회 의장인 사타르 알 바이르의 증언
INA 당원이자 이라크인권협의회 의장인 사타르 알 바이르의 증언
특히 후세인 시기에는 이라크 곳곳에 비밀경찰들이 도사리고 있다가 반정부 인사들을 혐의도 없이 체포하고는 무기한 구금하며 고문했는데, 이러한 탄압에는 여자와 아이들도 예외는 없었다. '경고'라며 사람들의 피해자들을 거꾸로 매달아 뼈가 부러지도록 구타하는 것은 일상이었으며, 성기에 전기충격 가하기, 손톱 뽑기, 신체 일부 절단하기 등의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고, 심지어 이들은 어린아이들에게도 예외를 두지 않았다[열람주의] 게다가 이런 식으로 잡혀 온 사람들의 입에서 이름이 나온 사람들은 곧바로 경찰에 연행되어 같은 식으로 고문을 받은 후 처형되었다. 이처럼 당시 이라크 내에서 고문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라크 경찰서에는 문자 그대로 강간실까지 두고 사람들을 고문한 것으로 전해진다. 게다가 후세인은 대범하게도(?) 전 세계 이라크 대사관에는 물론이고 심지어 뉴욕에까지 고문실을 설치했는데, 정확히는 유엔 주재 이라크 공화국 대표부의 외관[37]의 지하실에서 비밀경찰 요원들이 뉴욕에 살고 있는 이라크인들을 연행하고는 무자비하게 고문했다고 한다.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38]
리비아[39]의 한 TV 방송은 후세인 정권의 비밀경찰들이 체포한 젊은이들의 가슴에 다이너마이트를 장착해서 리모컨으로 폭파시켜 처형하는 장면을 방영했으며, 2003년 10월 30일 미국 폭스 뉴스와 CNN은 후세인 치하에서 군과 경찰이 정치적 반대자를 처참하게 고문하는 장면을 방영했다. 23분짜리 이 비디오 테이프에는 웃통이 벗겨진 채 두 팔이 기둥에 묶인 남자의 알몸을 철봉으로 수없이 내리치는 장면, 살아 있는 사람의 혀를 뽑거나 손목을 자르는 장면, 목을 치기 위해 머리를 나무받침에 끌어 올리는 장면,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10m 아래의 위에서 밀어떨어뜨려 관절을 골절시키는 장면 등이 담겨 있었다.#
3.6. 걸프 전쟁
이란과의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고 이라크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된다. 이란 혁명이 자국에서 재현되는 걸 두려워한 중동 왕정들이 이라크에 큰 돈을 빌려줬는데 후세인은 이 돈을 갚을 생각이 없었다. 고갈된 재정을 채울 방법을 찾던 후세인은 부유한 이웃나라 쿠웨이트를 침공한다. 쿠웨이트를 장악하면 풍부한 석유를 차지하고 이라크의 지리적 약점인 좁은 해안선을 해결할 수 있었다. 또한 많은 이라크인들은 영국이 식민지 시절 자신들의 영토인 쿠웨이트를 떼어냈다고 믿었다.걸프 전쟁 개시 이틀만에 쿠웨이트를 쉽게 점령했지만 이라크는 외교적 고립에 이어 군사적 참패를 당하게 된다. UN은 침공을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고 이라크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한다. 후세인이 이를 무시하자 미국을 주축으로 35개국이 참가한 다국적군이 세계 4위 규모였던 이라크군을 무참히 패퇴시킨다. 이라크는 결국 쿠웨이트에서 철수하고 UN의 엄격한 제재를 받아 경제가 붕괴된다.
후세인의 철권 통치가 패전으로 흔들리자 곧바로 이라크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걸프전 종식 다음날인 3월 1일 바스라에서 귀환하던 군인들이 후세인의 초상화를 포격한 것을 시작으로 시아파가 주로 거주하던 남부 지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관공서와 교도소, 바트당 지부가 공격당한다. 탈영병, 이슬람주의자, 공산주의자, 일부 수니파, 바트당내 반 후세인 세력까지 참여하면서 대부분의 도시들이 장악되지만 이들은 후세인 타도 외에는 공동의 목적도 전략도 없었다. 북부 지방에서는 3월 5일 쿠르드족도 "이라크에는 민주주의, 쿠르드족에는 자치"라는 구호로 반란을 일으켜 모술을 제외하고 모든 주요 도시들을 전투도 없이 장악한다. 이들도 이념에 따라 여러 정파로 나누어져 있긴 했지만 남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었고 목표도 명확했다.
반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는 18개 주들 중 14개가 반란군 손에 넘어갔지만 후세인은 곧 반격에 나선다. 수도 바그다그는 반체제 세력의 기반이 약했기에 시아파가 거주하는 빈민가 사담시티에서 쉽게 제압된 봉기를 제외하면 정부가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친위대인 특수 공화국 수비대는 여전히 후세인에 충성하고 있는데다 반란군의 주축인 이라크군 탈영병들보다 무장이 잘돼있었다. 특히 고정 익기를 금지한 종전협정에서 미국이 전후 복구를 위해 헬리콥터 사용을 허가한 것을 악용했다. 파괴된 도로를 대신한 교통 수단으로 헬리콥터 허락을 받았지만 반란군 점령 도시에서 무차별적 사살하는데 이용했다. 3월 말에는 도시 지역은 모두 정부군이 재장악한다. 후세인은 또한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물을 돌려 반란의 중심이라고 여긴 하구의 늪지대를 파괴해 늪에 의존해 살던 주민들을 환경난민으로 만든다. 1994년에는 늪지대의 57%가 사라졌다. 미국이 남부를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자 후세인은 미사일로 1994년까지 전투를 계속한다. 북부는 산지에서 전투가 이어지다 4월 미국이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고, 10월까지 전투가 이어진 끝에 양측의 협정으로 쿠르드족 자치 지역이 형성된다.
후세인은 정권을 유지했지만 그 대가는 컸다. 180만명의 난민이 발생하고 2만 5천명에서 18만명까지 대부분 민간인인 인원이 사망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정권 붕괴 후 집단 무덤에서 발견된다. 독가스와 늪지 파괴로 인한 피해도 컸다.
미국은 부시 대통령의 연설과 CIA의 라디오 방송으로 정권 전복을 부추겼지만 막상 반란이 일어나자 이라크의 완전한 붕괴와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해 이라크 내정 문제라는 명목으로 반란군 지원을 하지 않는다. 이는 이라크인들과 인권 단체의 비판을 받았고 부시 행정부 인사들도 자신들이 신중하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국가안보보좌관인 브렌트 스코크로프트는 피터 제닝스와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기대한건 쿠데타였지만 내전이 일어나 버렸다고 고백했다.
후세인은 경제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UN 무기사찰단 등을 추방했다가 대량살상무기 개발 의혹을 스스로 만들고 1993년 4월에는 쿠웨이트를 방문한 미국의 전 대통령 조지 H. W. 부시를 차량 테러로 암살하려다가 실패하는 등 국제 사회에서 계속 문제를 일으킨다.
3.7. 이라크 전쟁
2002년, 기자회견을 하는 후세인 |
90년대 동안 후세인은 국제적으로 꾸준히 어그로를 끌던 와중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되고난 후 2001년, 오사마 빈 라덴이 일으킨 9.11 테러로 인해 보복대상을 찾고 있던 미국에게, 후세인은 "신의 천벌을 받았구나."라고 조롱했다. 하지만 후세인 본인도 아차 싶었던지, "우리 이라크도 테러로 고생하는데 테러와의 전쟁에 적극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물밑접촉을 시도했지만 이미 충분히 어그로를 끌어댄 상황이었다. 어차피 9.11 테러를 통해 형성된 국제적 분위기를 이용해 골치 아픈 후세인을 제거하기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결국 2003년 미군의 전면 침공을 불러일으키게 된다.[40]
사실 당시 후세인이 말조심만 제대로 했어도 후세인 정권의 불행한 운명을 막지 못할지언정 적어도 후세인 정권의 붕괴를 늦출 수는 있었다. 후세인 본인부터가 반쯤 세속주의를 표방하며 이라크를 통치했기 때문에,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라는 공동의 적을 없애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과 협력하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 토벌에 적극 나설 수도 있었다. 그리고 후세인 정권 자체가 당시에 이미 수많은 이라크 국민들의 증오를 받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자국민들의 불만을 외부의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으로 돌려 정권의 안정을 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조심만 제대로 했으면, 당시 미국의 상황이 후세인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미국과의 협력으로 정권의 수명을 연장시킬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절대권력에 취하여 말을 함부로 한 것이 후세인 본인의 권력과 목숨을 모두 끝장내버린 게 아니냐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셈이다.
미국은 이미 2002년부터 후세인 정권 심장부에까지 공작원을 심어둘 정도로 후세인의 동선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아예 후세인 일가의 씨를 말려버리기 위해 JSOC 인원들까지 파견해가며 기밀작전을 벌여 그 주변을 모조리 정리해버린 상황이었다. 이때 이라크에 파견된 주이라크 JSOC 부대원들의 단대호가 바로 태스크 포스 121이다. 그래서 이라크 자유 작전 개시 하루 전 후세인의 활동이 잦게 포착되던 도라 농장의 벙커에 후세인과 그 일가가 거주하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F-117 스텔스기와 BGM-109 토마호크 순항미사일로 벙커를 완전히 박살내버리지만 후세인은 그 벙커에 있지 않았다.
바그다드 시내 진입 직전 후세인과 최고위층이 바그다드의 어느 레스토랑에서 회의를 갖는다는 첩보를 입수한 미국은 이번에 B-1B 폭격기를 동원해 JDAM으로 레스토랑을 파괴해버렸지만 이번에도 후세인 제거를 실패해버렸다. 그러나 후세인은 바그다드가 미국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 자신의 두 아들과 손자도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후세인의 동상도 성난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면서 후세인 정권은 미군에 의해 한 달만에 붕괴되었다.
바그다드가 한 달만에 미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후세인은 지하 저항세력으로 전환하여 도피행각을 이어갔지만, 실권을 잃은 상태에서 더 이상 권력을 회복할 가망은 없었고, 두 아들까지 폭사하는 등 계속 궁지에 몰리고[41] 최후의 순간에는 어느 민가의 지하 땅굴에 숨어 있다가, 12월 13일에 있었던 붉은 새벽 작전(레드 던 작전, Operation Red Dawn) 때 델타포스를 위시한 태스크 포스 121에 의해 체포되어[42] 기소되었다.
4. 최후
자세한 내용은 사담 후세인/재판 문서 참고하십시오.태스크 포스 121에 생포되는 순간 | 2003년 4월 21일 TIME[43] |
왼쪽 사진은 이라크계 미국인인 미 육군 통역병 사미르 알 자심에게 잡혀서 끌려나오는 사진이다. 사미르는 아버지가 후세인 부하들에게 고문을 당했고 친척들은 살해당했다며 자신의 상관에게 후세인 체포 증명사진을 찍게 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상관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결국 마지못해 허락했다고. 이 통역병은 이후 백악관에 초청받기도 했다. 관련 냇지오 다큐
이 작전을 지휘했던 당시 미 육군 제4기계화보병사단장 레이먼드 오디에어노 장군은 이후 이라크 주둔군 사령관, 미 육군참모총장까지 영전하였으며, 사담 후세인 및 그 측근들을 멸족시키는 이 모든 판을 주도하고 목표를 달성하는데 성공했던 태스크 포스 121과 관련 부대 및 기관들은 이후에도 멈추지 않고 태스크포스 6- 26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중동지역에서 흑색작전을 계속 이어가, 말 그대로 중동 정세를 좌지우지 하였다.
이 당시 지하 비밀장소에서 후세인은 난로 및 가스 오븐 전문 업체인 한국 회사인 파세코 난로로 서늘한 지하에서 추위를 이겨내고 있었다. 파세코 대표이사가 《월간 신동아》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이 소식을 듣고 농담조로 이를 활용해 자사 홍보를 할까 우스갯소리를 했다가, 후세인을 광고모델로 썼다가는 별로 듣기 좋은 소리 못 들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간부들이 진지하게 말한 바 있었다 한다.[44] 사담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사담의 두 아들인 우다이와 쿠사이는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공수대원들의 농성 중인 건물에 대한 TOW 미사일 공격에 직격당해 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채 전사했으며, 미군은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고자 시신을 다 짜 맞추고 봉합수술까지 해야 했다. 이후 봉합된 시신은 티크리트로 보내져 장례를 치렀다.
후세인이 붙잡히자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전 세계 수 많은 국가들은 지지와 기대의 반응을 보였으며 미국과 앙숙이던 그 이란조차도 후세인에게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크게 데인 경험 때문에 '이란인 상대로 많은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가 드디어 붙잡혔다'며 환호했다.
재판 과정에서 후세인은 갑자기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자신을 굉장히 잘 변호했다. 그의 말만 들으면, 서방(西方)과 특히 미국, 영국은 천하의 개자식이자, 아랍의 독립을 두고 못 보는 제국주의자였다.[45] 그리고 사담 후세인은 이러한 자들의 방해공작에 맞서 이라크를 지키려고 하였으나 희생된 불우한 처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또한 죽인 사람들의 여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하거나, "그들은 반역자이고 이란인들"[46]이라고 주장하고, 피해자들의 증언에 대해서는, "나는 그러한 명령을 하지 않았으며, 억울한 피해자를 피하라고 항상 강조하였다."라고 하거나, "당신들 중 누가 도둑이자 반역자들인 이란인들에게 물어보았는가?"라며 책임소재에서 벗어나려 들거나, 증언 자체가 허위라는 식으로 몰고 갔다. 그의 학살명령으로 온 식구를 잃은 쿠르드인 노인이 법정에 나와 진술한 적이 있는데, 그가 울면서 후세인에게 대놓고 분노할 때, 후세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면서 꼬박꼬박 논리적으로 반론을 하여, 그 노인은 기가 막혀서 이후 인터뷰에서 말하길, "뻔뻔하면서도 논리적인 말발이 쎈 놈이다."라고 혀를 차기도 했다. 물론 그 노인은 후세인이 처형당했을 때 굉장히 기뻐했다.
1년간에 이르는 긴 재판을 받았는데, 주된 공판 내용은 두자일 학살을 비롯하여 이라크인에게 저지른 학살에 대한 처벌 문제였다. 시아파 정부는 그의 모든 혐의를 증명하고 싶어 했지만, 이라크의 형법이 문제였다. 이라크 형법상 만 70세 이상인 범죄자에게는 사형집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47] 그래서 후세인의 나이가 만 70세가 가까워진 상황에서 사형을 시키려면, 단기간 내에 사형이 가능한 혐의를 유죄로 입증해야 했으므로, 일단 두자일 학살 등 몇 가지로 국한시켜 기소했고,[48]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어 수감된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논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간의 나약한 독재자들의 최후와 대비되어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사형을 당할 때도 용수[49]를 거부[50]를 하는 등, 비교적 의젓한 자세로 최후를 맞았다. 사실 사담 후세인은 군 통수권자이자 군인이라면서 군인의 전통적 사형 방법인 총살형으로 사형을 집행 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군 지휘관 처형에는 총살형이 적절한 방법이며 군인답게 의젓한 최후를 맞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기각되었고 불명예 사형 방법인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51]
후세인은 반(半)세속주의자이면서도, 정작 재판정에는 코란을 들고 나와서 신앙인임을 강조하면서, 판사와의 싸움이 격해지면 '알라후 아크바르'를 외치면서 분위기를 자기 주도로 몰고 나아갔고[52] 때문에 사담을 재판하는 것은 굉장히 힘들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아무튼 자기가 항상 잘했거나, 아니면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다른 놈들이 지 멋대로 굴었다는 식이었고, 또 이러한 논리가 완전 허위가 아니라, 상당 부분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기 때문에, 피고를 굴복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정도였다.
이에 분노한 이라크 민중들이 이에 사담 측 변호인들을 사살하거나 할 정도였는데, 결국 사담 후세인이 변호인단의 조언을 뿌리치고,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오직 단 한 명뿐인 이라크 대통령이며, 지금의 대통령은 가짜이고 이라크 정책의 모든 책임자임을 인정하는 발언을 하는 바람에, 재판부는 후세인 유죄 입증의 가닥을 잡았고, 결국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검사 측의 사형 구형이 낭독되는 때에는 이부동생인 바르잔과 함께 썩소를 지으며 같잖다는 표정으로 실실 웃어댔고, 사형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에도 사담 후세인은 종교적 구호를 외치고, 재판정과 부시에게 죽음을 내리라고 큰소리를 치며, 끝까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후세인을 포섭하여 이후 후세인 지지세력의 저항을 예방하기 위해, 도널드 럼즈펠드를 보내서 후세인과 살아남은 가족들의 안위를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제시했지만, 후세인은 럼즈펠드를 비웃으며, "죽은 국민들 목숨을 돌려주면 생각해보겠다."라고 협상을 사실상 거부했다. 그는 럼즈펠드에게 "대량살상무기는 찾았냐?"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처형당하는 후세인 |
이렇듯 무리하며 급히 사형 집행을 한 이유는 전후 이라크 정권의 주요 세력이 후세인이 밀어주던 수니파의 철천지 원수 시아파, 그 중에서도 손꼽히는 초강경파들이었기 때문이다.[53] 이 사람들은 안 그래도 폭정에 엄청나게 시달렸었기에 후세인을 죽이려고 벼르고 있던 데다, 전술(前述)했듯이 이라크 형법상 만 70세가 넘으면 사형 집행이 불가능해서 빨리 죽이지 않으면 자기들 법 때문에 못 죽이기 때문에 저질러 버린 것이다.[54] 그 날짜가 12월 30일이었다는 것은 여러가지 해석을 낳기는 했으나, 한국인들과 같이 1월 1일 기준으로 나이가 올라가는 세는나이 계산법이 아니기 때문에 이전 기술처럼 이틀 뒤면 후세인이 70세가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55] 새해를 넘기기 전에 사형집행을 하는 것이 여러모로 이라크 당시 정권에 유리하다고 판단되었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렇다고 해서 12월 31일에 집행하는 건, 24시간 이내로 시체를 처리해야 하는 이슬람 율법에 의해서 2007년 1월 1일에 새해와 함께 사담 후세인의 장례식이 치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2006년 12월 30일로 치른 게 아닌가 하는 평가가 있다. 또, 2006년 12월 31일이 일요일이었던 것도 12월 30일에 사형을 집행한 이유일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판단도 있다. 그때 사형을 시키지 않고 쿠르드족 학살 같은 다른 재판으로 넘어가면, 후세인에게 선고할 수 있는 형량은 무기징역까지였고, 게다가 후세인이 사형을 받지 않게 되어 버리면, 수괴(首魁)가 사형이 아닌데, 그 수하들이었던 그의 측근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게 되니, 측근들도 죽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처형할 놈들 다 처형하고 싶으면 후세인부터 일단 처형해야 했다. 아니면 그들을 모두 다 살려줘야 했으니까. 시아파는 전자(前者)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 시아파 정부가 감정만 앞세워서 망쳐버린 일이 한두개가 아니며 이라크 군대와 정보부의 해산도 시아파 망명자들의 바람잡이로 이뤄졌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이라크인들이 치르고 있다.
심지어 후세인의 처형 동영상이 유출되기도 했다. 다만 이를 시아파 정부의 잘못이라고 하기엔 조금 곤란하다. 사실 후세인의 사형 집행 과정은 그들의 법률을 준수했다. 실상은 사형 집행인들이 멋대로 한 것으로, 원래 집행리(執行吏)들이 후세인을 데리고 나와 교수대에 세우고 유언도 물어보고 용수를 씌우는 것까지는 공개되었다. 하지만 곧 용수를 도로 벗기고[56] 처형한 후, 사망한 후세인 얼굴까지 나오는 충격적인 동영상이 나돌았고, 이는 그야말로 국제적인 파문을 일으켰다. 수사결과 당시 처형 감독관의 휴대전화로 촬영한 것으로 밝혀졌고, 관련자들은 무더기로 처벌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그래서 후세인의 처형 목적을 정의라기보다는 복수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사형당하기 전 후세인이 마지막으로 한 경고대로, 이라크는 각종 반군 단체 및 과격파 종교 단체들의 무장 봉기 및 테러로 인해, 오히려 더 큰 혼돈 속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최악의 형태로 변하고 말았다. 후세인은 평소 체제가 이슬람 원리주의에 빠지는 상황을 극히 경계했는데 결국 권력의 구심점이었던 후세인이 제거되면서 이라크 전체가 전국시대에 돌입하게 된 셈이 되었다.[57]
4.1. 여담
2014년 6월, 사담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했던 판사가 반군 수니파에게 잡혀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라오프 압둘 라흐만 판사는 6월 12일, ISIL의 위협이 닥쳐오자, 수도 바그바드에 위치한 거주 지역에서 변장한 채 탈출하다 붙잡혔으며, 이틀만에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다는 설이 돌았다. 특히 그의 처형 사유는, 후세인에게 사형을 선고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알려졌다. # 하지만 이는 오보로 밝혀졌다.아랍 세계를 휩쓸었던 사건이자 아랍 독재자들을 몰아낸 아랍의 봄 때도 사담 후세인이 살아있었다면, 아랍의 봄으로 결국 물러났을 것이라는 가설과 과연 살아남았을 것인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언론들도 나왔다.[58] 물론 사담 후세인이 아랍의 봄 이전인 2006년 말에 사망했기에 이런 추측성 떡밥들이 크게 의미는 없지만 사담 후세인 지지 세력들이 2011년에도 있었고 이 때도 이라크 국민들은 사담 후세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들도 적지 않았다보니 사담 후세인이 2010년대까지 살아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아랍의 봄 및 그것과 같은 현상으로 인한 시위, 저항들을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 다수이다.
[1] 티크리트 출신이라는 말이 있지만 정확히는 티크리트으로부터 8km 남쪽에 위치한 알 아우자 출신이다. 당시 티크리트도 상당한 깡촌이었는데 알 아우자는 그보다도 낙후된 그야말로 깡촌 중에 깡촌이었던지라 훗날 후세인이 자신의 출생지를 티크리트라고 조작했다. 사실 조작하는 것도 이해가 가는 게 알 아우자는 단순히 낙후된 지역이 아니라 과장 섞어 마을의 남자 인구 전체가 강도와 밀렵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질이 안 좋은 막장 동네였다. 또 티크리트랑 워낙 가까워서 티크리트 출신들한테도 같은 동향 사람으로 인정 받았다.[2] 근데 당대 아랍 여성치고 굉장히 기가 세서 집안에서 남편을 압도했으며 공공장소에서 팔을 드러내길 서슴지 않는 등 눈총을 사는 행동을 많이 하긴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매춘부라는 비방이 생겼을지도...[3] 이 설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4] 거짓말쟁이 하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이유는 이 사람이 무슬림으로서 성지 메카를 순례해야만 받을 수 있던 명예로운 칭호인 '하지'라는 칭호를, 순례도 안하고 자처하고 다녔기 때문.[5] 아랍어로는 حزب البعث(Ḥizb Al-Ba‘ath)라 하는데 아랍어 발음은 '바트'보다는 '바스'에 가깝다.[6] 부족사회인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부족의 구성원이 살해당하면 그 살해범에게 반드시 보복을 해야만 부족의 명예를 유지할 수 있다는 관습이 굳건했다. 이런 보복을 면하려면 정당한 이유가 있든지, 사죄와 보상이 함께 이루어져야만 했다.[7] 카심, 아리프 정권은 정보기구를 이용하여 반정부 세력을 잡아들이거나 죽였고, 당연히 그 수장은 피의 복수 규율에 의해 나날이 생명 위협에 시달리는 처지였다. 또한 국민감정도 그런 기구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아랍인으로서의 사회 규율이나, 개인적인 보신 차원에서 맡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맡는 순간 수천 수만 명의 살해 위협에 시달리게 되기 때문이었다.[8] 그 보수적이라는 아랍계열 국가가 여성의 참정권 강화를 내세웠다는 점(대표적으로 사우디 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등 아직도 종교세가 강한 국가에선 2010년 아랍의 봄 이후에서야 여성들이 자동차를 혼자 운전할 수 있었다)에서 매우 파격적인 개혁안 이였고, 강압적인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해외선진국들도 사담후세인을 티토와 동급으로 보거나, 최소한의 생각은 가진 독재자로 평가하고 있었다.[9] 더군다나 이미 이전에 이집트와 같이 국가통합을 했다가 시리아가 손해보는 바람에 재분리된 전적도 있었다.[10] 이때 후세인은 1973년 소련 수상 알렉세이 코시긴의 이라크 방문 이후로 형성된 이라크 공산당과의 연정체제인 민족진보전선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공산당을 무자비하게 숙청한다. 이라크 공산당은 바트당과의 연정을 비롯한 모든 공식관계를 철회하고 지하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전환하였으며, 이는 소련이 이란 혁명 초기 '잠깐' 이란을 지지하는 계기가 된다. 자세한 것은 이란 인민전사기구 참고.[11] 이때 상당수의 바트당원들이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12] 즉, 장기전으로 갈 경우 이라크보다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지닌 이란에게 전쟁이 유리하게 돌아가니 대대적인 기습 공격을 통해 초반에 이란의 전쟁 수행 능력과 사기를 깎고, 이란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서 유리한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마침하려는 전략이었다.[13] 당시 이란은 탄도 미사일 공격에서 열세에 처했으며 거기에 후세인이 탄도 미사일에 핵이나 화학무기를 탑재하고 공격할 수 있다는 공포로 인해 혁명의 수도 테헤란이 공황상태에 빠질 정도였다.[14] 물론 전술한 국가들이 국내 여행을 대놓고 법으로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인류 역사에서도 최악으로 꼽히는 독재국가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15] 이 때문에 이라크인들은 후세인 정권이 붕괴된 이후에 후세인의 동상들을 파괴하고 집에 걸려있던 사진들도 모조리 불에 태웠다고 한다.[16] 다만 당시에는 웬만한 선진국들도 인터넷 보급률이 50%를 밑돌았기에 북한 수준의 임팩트는 주지 못했다.[17] 이 선거는 이라크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선거였다.[18] 대이라크 제재로 인해 이라크의 식량이 부족했기에 이라크 주민들에게 식량 배급 중단은 매우 치명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19] 정확히는 8,357,560명의 투표자 중 984명이 반대표를 던지고 7,876이 무효표나 빈 표를 냈다.[20] 정확히는 '11,445,638명의 유권자 중 11,445,638명 투표 참석, 11,445,638명 찬성'[21] 아이티의 프랑수아 뒤발리에도 1961년 대통령 선거를 이와 판박이로 치렀다. 더욱이 당시 뒤발리에는 임기가 2년이나 남았던 데다가 법으로 대통령의 재선이 금지되었는데도 선거에 나가 당당히 당선되었고, 당연히 국제적으로 맹비난을 받았다.[22] 75,000명이 거주하는 마을로, 후세인과 바트당 정권을 전복하고자 했고,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이란을 지원했던 시아파 정당인 이슬람 다와당의 본거지였다.[23] 실제로 이 과정에서 후세인의 경호원과의 총격전이 벌어지며 대부분의 무장 괴한들이 사살되었다.[24] 그나마 1982년 10월 14일에 과소원 소유자들에게 손실을 보상하라는 명령을 하기는 했다.[25] 이중 393명은 성인 남성이었고, 나머지는 여성과 미성년자였다.[26] 성인 138명+청소년 10명. 참고로 당시 수감자들 중 400명(대부분이 이 148명의 가족들이었다.)은 이라크 남부의 외딴 지역으로 추방했으며 나머지는 석방하고는 두자일로 돌려보냈다.[27] 이 중 일가족이었던 4명은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된 상태였지만 실수로(??) 사형당했다. 이것을 본 후세인마저 기가 막혔는지 이 가족들은 '순교자'로 선포하고는 그들의 친척들로부터 압수한 재산을 반환하는 법령을 발표했으며, 이 엽기적인 실수를 저지른 공무원을 기소할 것을 명했고, 결국 그 공무원은 3년형을 선고받았다.[28] 한동안은 이들이 1985년 3월 23일에 처형된 96명에 포함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사마와 시 외곽의 감옥으로 옮겨졌다.[29] 참고로 여기서 '안팔'은 코란 8장의 제목인 '알 안팔'에서 따왔으며, '안팔'은 '전쟁의 전리품'을 의미한다.[30] 이후 이라크 전쟁때의 명분인 대량 살상 무기에 이 안팔 캠페인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31] 참고로 할라브자는 2006년 기준으로도 파괴된 모습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고 하며, 2003년에 약 30.5m 높이의 할라브자 순교자 기념비(내부에 박물관도 있었다)가 세워졌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 마을에 방문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파괴된 마을 대신 현대적이고 멋진 기념관만 볼 것'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방문했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을 무시했다'라는 비판적인 여론도 있었고, 결국 마을 주민들은 학살 18주기인 2006년 3월 16일에 관료들이 이 기념비를 찾자 항의 시위를 벌이다가 보안군이 발포하여 17세 소년 1명이 죽고 12명이 다치자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기념비를 불태워버렸다. 출처[32] 이들 대부분이 민간인이었다.[33] 심지어 일각에서는 무려 75만 명이 이 봉기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사실이라면 르완다 학살까지 능가하는 인류 역사상 최단시간 최대규모 학살로 기록되었을 것이다.[34] 이들 중 150만 명이 쿠르드족이었다.[35] 미국 국무부와 국제 구호 단체에 따르면 매일 500~1,000명의 쿠르드족이 이라크 터키 국경에서 사망했다고 하며, 일부 보고에 따르면 이란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매일 최대 수백 명의 난민이 사망했다고 한다.[열람주의] 실제로 한 수감자가 답을 하지 않는다고 그의 3개월밖에 안 된 딸을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콘크리트 벽에 내리쳐 죽이기도 했고, 다른 남자는 자신의 아들이 비밀경찰에 의해 벽에 머리를 부딪쳐 죽여버리자 겁에 질려 자기 부인의 이름을 이야기해야 했다.[37] 외관 건너편에는 마이클 블룸버그의 집이 있었다.[38] 참고로 아무리 막장 독재국가라 할지라도 북한을 제외하면 저렇게 까진 하지 않는다. 북한은 2024년 중국 주재 대사관에 지하감옥을 만들어 자국 외교관들을 가둬놓는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39] 참고로 당시 리비아도 무아마르 카다피 치하 독재국가였던 것을 감안하면 사담 후세인이 얼마나 막장이었는 지 알 수 있다.[40] 후세인도 조지 W. 부시의 침공 의도를 명확히 인지한 시점에서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발악했다. 대표적인 것이 몇 년 전에 추방했던 UN의 무기사찰을 다시 허용한 것이다. UN의 사찰에 의해 이라크 내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인증까지 받아내었고 그로 인해 이라크 전쟁이 UN차원의 국제적 지지를 얻지는 못하는 성과까지는 만들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역부족이었다.[41] 당시 다른 아랍국가들은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사담 후세인의 망명을 불허하면서 국외 망명조차도 불가능했다.[42] 후세인 소재파악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미군이 공식발표 기자회견장에서 던진 첫마디부터 "Ladies and gentlemen, we got him!(신사숙녀 여러분, 드디어 그를 잡았습니다!)"로 상당히 기뻐하는 문장이었다. 미군의 선전효과와 쇼맨십을 엿볼 수 있는 대목.[43] 타임지는 히틀러가 죽었을 때도 같은 표지를 내놓은 적이 있다.[44] 다만 이는 '파세코' 사가 (극단적으로 더운 낮과 반대로 밤에는 인정사정없이 추워지는)중동 일대 및 세계 각국에서 가성비가 좋다는 평가를 받아 사담 후세인도 어쩌다 쓴 것일 뿐,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의견이 중론이다.[45] 후세인이라는 인간의 잔혹성과는 별개로 이라크 전쟁만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쿠웨이트를 인정하지 않고 침략전쟁을 자행한 시점에서 아랍의 독립 운운은 설득력을 크게 잃는다. 이라크전 이후 알아낸 대량살상무기 부재가 이라크 전쟁의 정당성을 훼손했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이란-이라크 전쟁 시절부터 화학무기와 탄도탄과 같은 대량살상무기를 실전에서 사용해 왔던 전과자가 다름 아닌 후세인이다. 게다가 전후 알아낸 사실은 후세인이 착해서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90년대에 지속되었던 UN의 경제제재가 생각 외로 너무나도 효과적이어서 후세인의 많은 무기개발 계획들이 페이퍼플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과 관련해서 미국이 욕을 먹어야 하는 것과 별개로, 사담 후세인 본인도 결코 선의의 피해자는 아니었던 셈이다.[46] 단 두자일 학살이 아닌, 이란-이라크 전쟁 중에 벌어진 쿠르드족 학살은 이란의 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47] 꼭 그렇다고 보긴 어려운건 이라크 정치인인 타리크 아지즈는 만 74세의 나이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물론 사형 집행은 이뤄지지 않았다.[48] 나머지 학살극은 나중에 다른 측근들에게 적용되어, 그들이 사형 선고를 받는 증거로 사용되었다.[49] 교수형 집행 때 사형수 머리에 씌우는 일종의 두건이다.[50] 대신 목에 천을 감았다고 한다.[51] 그러나 후세인 변호사는 후세인은 제네바 협약의 보호를 받았어야 했다며 교수형이 아닌 총살형을 집행했어야 한다고 했으며 유엔에 조사를 촉구했다.링크 왜냐면 후세인이 죽기 전까지는 전쟁 포로로 간주됐다며 이에 따라 그는 1949년 제네바 협약의 보호 혜택을 받았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후세인은 교수형이 아닌 군인의 사형 방법인 총살형을 받았어야 했다고 했다.[52] 판사든 검사든 어차피 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신은 위대하다." 등의 구호를 외치면 그에 대놓고 일침을 놓거나 반대하기가 곤란해지는 정서가 있다. 사실 법정 소란이 일어나거나 하면, 판사들이 쿠란의 구절을 인용하거나 해서 피고인들을 진정시키는 방법도 자주 쓰이던 거라 사담 후세인만 탓할 수는 없다. 특히 쿠르드 판사 라우프 압델 라흐만은 이 방식으로 소란을 막아보려다, 사담이 오히려 신은 위대하다는 구호를 외쳐 조용히 수긍하고 마는 모습도 보여주었다.[53] 수니파와 시아파는 무려 1,300년동안이나 원수 관계로 살아온 관계라 이스라엘, 십자군 등 공공의 적이 있어도 그냥 알아서 각자 해결하려고 하지, 서로 힘을 합치는 일 자체가 없고 오히려 한쪽이 상대방 엿먹으라는 심리로 그 적이랑 손잡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로 사이가 정말정말 나쁘다. 물론 둘 다 IS 앞에서는 장사 없다[54] 실제로 사담 후세인은 만 69세였으며, 그 다음해 4월 28일 생일에 만 70세가 될 운명이었다. 이라크 형법상 4개월정도 여유는 있었다는 얘기다.[55] 만 나이 계산법에 의해서 2007년 4월 28일 날에 만 70세가 되는 것이다.[56] 다만 사형집행인들이 처음부터 용수를 씌우지 않고 멋대로 집행한 것은 아니다. 후세인 본인이 용수를 쓰는 것을 거부하여 그냥 안 씌운 채로 했다고 한다.[57] 다만 이는 후세인 자신도 하등의 도움을 준 바가 없었던 부분으로 후세인은 바로 그 세속적인 권력의 유지를 위해서 세속적으로 수니파를 우대하고 세속적으로 출신부족을 우대하면서 종교갈등에 더해 부족갈등을 오히려 더 부추긴 장본인이다. 즉 후세인의 세속주의라는 것이 자신의 권좌유지를 부족과 종파에 우선시한다는 의미의 세속주의라는 것이지 부족과 종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세속주의가 아니었다는 것. 애초에 후세인이 종파와 부족화합에 힘쓰는 지도자 였다면 그렇게 처참하게 몰락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침략주의에 의해 자멸하지도 않았을 것이다.[58] 그 외 일부 시각에서는 아랍의 봄이 나타났기에 굳이 이라크 전쟁이 나타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