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3 06:08:11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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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공화국 제4대 대통령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أحمد حسن البكر
파일: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jpg
<colbgcolor=#C8102E> 이름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أحمد حسن البكر (아랍어)
출생 1914년 7월 1일
파일:오스만 제국 국기.svg 오스만 제국 티크리트
사망 1982년 10월 4일 (향년 68세)
파일:이라크 국기(1963-1991).svg 이라크 바그다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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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 기간 이라크 대통령
1968년 7월 17일 ~ 1979년 7월 16일
정당

[[바트당|
바트당
]] (이라크)
1. 개요2. 역사3. 평가

1. 개요

이라크 제4대 대통령이다. 1968년 무혈 쿠데타로 바트당 정권을 세웠고, 1968년 7월 17일 대통령으로 선출 되었으며, 1979년 7월 16일 병으로 사임 후 1982년 10월 4일 사망했다. 정권은 부통령이었던 사담 후세인이 이어받았다.

2. 역사

바크르는 1914년 오스만 제국령 티크리트에서 태어나 교사로 일하다가 1938년 이라크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의 반영 반란에 가담했으나 실패로 끝나면서 체포되고 군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15년 동안 복권을 시도하다가 1956년에 군에 복귀했으며, 같은 해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이하 바트당) 에 가입했다. 1957년 준장으로 승진하고 자유장교운동과 협력하여 1958년 7월 14일 혁명을 통해 하심 왕조를 전복하고 압둘 카림 카심을 집권시켰다. 그는 이 시기 중앙 조약 기구 탈퇴와 소련과의 관계 개선에 기여했지만, 1959년 모술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다시 군에서 퇴출되었다. 이 시기에도 알바크르는 바트당 내에서 영향력을 유지했고, 1950년대 후반부터 사담 후세인과의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바트당 지도자 알리 살리흐 알사디는 카심 정권에 대한 전국적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으며, 1963년에는 베이루트에서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 알바크르는 군사국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군 내부 지지세력을 구축했고, 이 조직이 중심이 되어 1963년 2월 쿠데타(라마단 혁명)를 성공시켜 카심 정권을 무너뜨렸다.

라마단 혁명 이후 압둘 살람 아리프가 대통령, 알바크르가 총리 겸 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새 정부 내에는 급진파(사회주의 지향 군인들) 와 온건파(비바트 인사 포용 주장) 로 나뉜 두 파벌이 형성되었다. 알바크르는 온건파로서 양측을 조율하려 했지만, 당내 분열이 심화되면서 결국 1963년 11월 아리프가 쿠데타를 일으켜 바트당 정권을 전복했다. 알바크르는 수감되었지만, 이후 바트당 내 영향력이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는 이라크 바트당 지역사무국의 사무총장이 되었고, 사담 후세인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사담은 이 시기 당 보안기구를 조직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고, 알바크르는 자신의 고향 티크리트 출신 인물들과 가족을 중용하여 인맥 중심의 인사 정책(족벌주의)을 폈다. 1964년 쿠데타 실패로 알바크르와 사담은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6년 사담이 출소하면서 당의 부사무총장으로 임명되어 바트당 재건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66년 시리아 바트당 분열 이후, 이라크 바트당은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고, 1968년 2월 제9차 전국대회에서 미셸 아플라크를 당 총서기로 선출했다. 같은 해 7월, 알바크르는 쿠데타를 주도하여 압둘 라흐만 아리프 대통령을 축출하고 바트당 정권을 재수립했다.[1]

초기에는 군부 인사 압드 알라자크 알나이프 총리와 이브라힘 다우드 국방장관이 실권을 잡았지만, 알바크르는 정치적 수완과 당 조직력으로 그들을 제압했다. 1968년 7월 30일 수정 쿠데타를 일으켜 두 사람을 축출·추방했다. 이후 알바크르는 대통령·총리·혁명사령위원회 의장직을 모두 겸임하며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고, 하르단 알티크리티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했다.

대통령이 된 알바크르와 바트당은 급진적·사회주의적 수사를 내세웠지만 실제 정책은 포퓰리즘족벌주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 사담 후세인이 경제 정책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국가 주도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강화되었다. 또한 사담은 산업 다각화를 추진해 석유 의존도를 줄이려 했다. 1969년, 정부는 몰수된 토지에 대한 보상 취소를 선언하고 농업 투자 확대하였고, 1970년에는 새로운 토지 개혁을 시행해 협동조합을 설립하게 만들었는데, 농민들은 보조금을 받으려면 협동조합에 가입해야만 해서 눈물을 머금고 가입을 해야만 했다. 이러한 토지 개혁은 식량 생산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더러 토지와 보조금 배분이 정치적 충성 확보 수단으로 이용되어, 부패와 불평등이 이전보다 더 심화되었다. 하지만 이라크 석유회사를 국영화함으로서 막대한 보조금을 뿌림으로서 국민들의 불만을 완화시켰다. 특히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석유가격 급등하면서, 알바크르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며, 석유로 얻은 수익금을 대규모 인프라 사업이 시행되어 시골 방방곡곡에까지 전기가 들어오고, 무상의료 및 무상교육이 전면적으로 시행되어 한때 의료수준이 중동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받았다. 결과적으로 1970년대 이라크는 연 평균 11.7%의 고도경제성장을 달성하였고, 자동차와 텔레비전, 전화가 대중화 될 정도로 국민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다만, 석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단점이 있었다.

통치 후반부로 가면서 알바크르는 사담에게 점차 권력을 잃었는데, 사담은 안보 기관을 통해 당과 국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다. 1979년 알바크르는 "건강상의 이유"로 모든 공직에서 사임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982년 알려지지 않은 원인으로 사망했다.

3. 평가

이라크인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거나 비판을 받는 후임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나, 전임이자 제1공화국 정권 시절의 초대 총리였던 압둘카림 카심과 달리 현대 이라크에서는 평가가 매우 좋다. 이 시기에도 쿠르드족과의 갈등 및 쿠웨이트와의 국경분쟁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전과 이후와 비교하면 정국혼란과 전쟁도 없었고, 외교에서도 아랍권 및 서방 선진국들하고도 관계가 좋았으며, 석유국유화를 단행하여 얻은 수익을 바탕으로 연 평균 10%대의 고도경제성장을 기록하여, 도시는 물론 시골에서도 인프라 공사가 이어지고, 무상교육 및 무상의료도 실현되었고, 중공업 육성을 위한 산업화에도 열을 올렸던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에는 조만간 이라크가 선진국으로 진입할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아바스 왕조 시기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실제로 1980년 이라크의 1인당 국민소득[2]은 스페인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1] 이 쿠데타 당시 사담 후세인과 살라 오마르 알알리가 현장 지휘를 맡았고, 알바크르는 군사본부에서 작전을 총괄했다.[2] 3,867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