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2:52:41

누리 알 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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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FFF> 11대 메소포타미아 위임통치령 총리
9·14·18·22·25·31·34대 이라크 왕국 총리
누리 알 사이드
نوري السعيد
파일:Nuri_al-Said_Photo.jpg
이름 누리 알 사이드
출생 1888년 12월
오스만 제국 바그다드
사망 1958년 7월 15일 (향년 69세)
아랍 연방 바그다드
정당 언약당, 입헌통합당

1. 개요2. 생애3. 젊은 시절4. 총리가 되다5. 사망

[clearfix]

1. 개요

누리 알 사이드는 이라크의 정치인이자 이라크의 정치적 불안정과 왕실의 지지를 받아 무려 8번이나 이라크의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1]

2. 생애

3. 젊은 시절

누리는 1888년 12월, 북 카캅스에서 터키로 이민 한 체첸인 혈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터키에서 보냈고, 1906년 이스탄불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참모 장교 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군사 장교 생활을 시작했고, 1912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 참전하였고, 자파르 알 아스카리 장군 지휘하의 게릴라 작전을 펼쳤으며, 1915년에는 영국군을 상대로 싸웠다.

하지만 이후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혀, 아랍 대봉기 당시 전향하여, 파이살 1세 휘하에서 싸웠다. 이후에는 잠시동안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유명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운전사가 되었다. 이후에는 파이살 1세휘하에서 있었던 다른 사람들처럼, 새로운 정치 엘리트가 되었다.
파일:FeisalPartyAtVersaillesCopy.jpg
파리 강화 회의 당시 파이살 1세 대표단[2]

4. 총리가 되다

누리는 1930년 영국에 위임을 받아 총리로 처음 임명된 이후 하심 가문하에서 이라크의 주요 정치인이였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오늘날 이라크를 형성한 주요 정책 결정에 관여하였다. 1930년 그의 첫 임기 동안 그는 영국-이라크 통행권 조약에 서명했는데, 이는 영국의 군대를 이라크에 주둔시키고 군대가 이라크를 통과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리를 부여하고 영국의 통제권을 합법화했다.[3]

이 조약은 명목상 이라크 내정에 대한 영국의 개입을 어느정도 줄였지만, 이 조약은 이라크가 영국의 경제적 또는 군사적 이해관계와 충돌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졌다. 이 협정은 위임통치령이 1932년에 막을 내림에 따라 명목상으로 이라크 왕국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당시 이라크는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와 같은 반 영국, 민족주의를 외치는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누리는 반대로 영국의 이라크에 더욱 개입을 유리하게 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국민들의 지지가 매우 낮았다.

친영국 정책 때문에 적이 너무 많았던 누리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고 한번은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의 쿠데타 때문에 탈출, 두번째는 압둘 카림 카심의 쿠데타 때문에 이라크를 탈출해야 했다.[4] 총리 재직 내내 여러 실책으로 매우 인기가 없었다. 친영국적인 그의 정책은 이라크의 변화된 사회 상황에 적응하는 데 실패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라크 빈곤과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고 누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부유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탄압의 길을 택한 정권의 상징이 되었다. 전국 각지, 특히 이라크 남부의 도심 지대를 중심으로 많은 시위가 일어났고, 이 때마다 계엄령을 선포하여 폭압적으로 진압했지만 갈수록 누리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1957년 2월에는 누리 정권에 대항하는 야권이 국가연합전선을 설립했고, 군부에서도 자유 장교단 최고위원회가 결성되어 누리 정권에 반대하였다.

누리와 이라크 왕실은 같은 하심 가문에 속한 요르단과 이라크-요르단 아랍 연방[5]을 결성했고 누리는 이 새로운 연방에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이라크 왕정과 누리의 삶과 함께 연방은 붕괴되어 버린다.

5. 사망

1958년 레바논 위기로 인해 요르단은 이라크군의 지원을 요청했고 이라크는 이를 받아들여 출병했으나, 출병한 군부는 압둘 카림 카심 준장의 지휘 하에 전선 대신 바그다드로 진군했다. 정국을 장악한 카심 정권은 파이살 2세 일가를 모조리 총살하고, 다음 날인 7월 15일, 누리는 여장을 하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쿠데타군에게 들켜버려 총살당했다. 총살 직후 매장되었으나 분노한 군중에 의해 시신이 꺼내진 후 바그다드 길거리에 끌려다니며 목 매달리거나 불타고 훼손되었으며, 끝내 달리는 시내버스에 매달려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갈려나갔다.알 사이드의 훼손된 시신. 열람에 주의.


[1] 여담으로 그리스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7번이나 그리스 총리직을 맡은 적이 있다.[2]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루스탐 하이다르 이라크 왕국 경제 장관, 누리 알 사이드, 파이살 1세,
로사리오 피사니 프랑스군 대위(파이살 1세 뒤),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영국군 대령, 미확인 (파이살 1세의 노예로 추정), 타신 카드리 대위.)
[3] 심지어 이때 영국은 기름까지 뺏어갔다.[4] 하지만 이때는 실패하여 처형당했다.[5] 이는 반서방 공화정 국가인 이집트와 시리아가 아랍 연합 공화국을 결성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