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22 09:39:09

가미야 소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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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다 마나부
제2대
가미야 소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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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66620><colcolor=#fff> 제2대 참정당 대표
가미야 소헤이
神谷宗幣 | Kamiya Sōhei
파일:일본 참정당 대표 가미야 소헤이.jpg
출생 1977년 10월 12일 ([age(1977-10-12)]세)
후쿠이현 오이군 타카하마정
거주지 이시카와현 카가시
학력 간사이대학 문학부 (사학·지리학과[1] / 학사)
간사이대학 법과대학원 (법무박사)
소속 정당
[[참정당|
참정당
]]
의원 선수 2 (참)
의원 대수 26-27
지역구 비례대표
현직 제27대 참의원 의원
제2대 참정당 대표
참정당 사무국장
약력 고등학교 교사
스이타시의회 의원 (재선)
스이타시의회 부의장
참의원 의원
참정당 사무국장
가족 배우자, 슬하 2남 1녀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1. 개요2. 생애
2.1. 청년기2.2. 스이타시의원 및 자민당 시절2.3. 무소속 ~ 참정당 창당 이전2.4. 참정당 창당 이후
3. 논란 및 비판
3.1. 음모론적 콘텐츠 조장3.2. 밀가루 음모론 및 식문화 왜곡 논란3.3. 독단적 당 운영 정책3.4. 조선인 비하 표현(춍) 사용 논란3.5. 자이니치 논란
4. 소속 정당5. 선거 이력6. 성향7. 기타8. 한국 관련9. 둘러보기

1. 개요

일본의 교육인 출신 정치인. 참정당의 2대 대표를 맡고 있다.

2. 생애

2.1. 청년기

1977년 10월 12일 일본 후쿠이현 오이군 타카하마초에서 태어났다. 후쿠이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뒤 간사이대학 문학부에 진학했다. 대학 진학 시절에는 오사카부 스이타시에서 거주했다.

대학 2학년 때 오토바이로 일본 열도를 일주한 경험을 계기로 해외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졸업 후에는 캐나다의 어학교에서 아시아 출신 청년들과 교류했다. 이후 약 8개월 동안 30여 개국을 여행하며 각국의 다양한 사회상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 내에서는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 시기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청년 세대에 대한 문제의식도 이 시기의 경험을 통해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이후 2001년 후쿠이현 현립 와카사 히가시 고등학교에서 단기 교사로 일하며 국어세계사 과목을 담당했다. 2002년에는 가족이 운영하는 슈퍼마켓 경영에 참여했지만 부진한 실적으로 인해 슈퍼마켓이 도산하는 큰 위기를 겪었고, 이후 다시 교단으로 복귀해 2003년까지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는 교육 현장에서의 경험과 개인 사업 실패를 통해 다양한 사회 현실을 접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배경이 훗날 정치 활동의 동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

2004년 간사이대학 법과대학원(로스쿨)에 입학하여 2007년 법무박사(한국의 법학전문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다만 변호사 자격은 따지 못했다.[2] 대학원 졸업 이후에 본인이 거주하고 있는 스이타시의 지방의원 선거에 출마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2.2. 스이타시의원 및 자민당 시절

2007년, 스이타시의회 선거에 출마해 전체 30위권 안에 들며 당선되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인 회파인 '스이타 신선회(吹田新鮮会)'를 결성하였고, 교육 및 헌법 개정 관련 문제에 관심을 두고 활동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일본공산당 및 혁신 계열 시의원들과는 정치적 견해 차이를 보이며 논쟁이 오가기도 했다.

2009년 2월에는 오사카부의 젊은 의원들과 함께 교육 관련 토론 모임인 “오사카 교육 유신의 모임(大阪教育維新の会)”을 조직했으며, 당시 오사카부 지사였던 하시모토 도루와의 교류도 이어졌다. 이 인연으로 2010년 오사카유신회 결성 시기에 참여했지만, 이후 정책 방향 차이로 인해 별도의 노선을 걷게 되었다.

2011년 4월, 스이타시의회 의원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며, 같은 해 열린 스이타시장 선거에서는 본인의 회파가 추천한 후보가 출마했으나, 본선에서는 오사카유신회가 지지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12년 11월에는 자유민주당에 입당하여 오사카 제13구 지부장을 맡게 되었으며, 이후 스이타시의회 의원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에 열린 제46회 중원선에서 자민당 소속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사실 재선 시의원에 불과했던 가미야의 갑작스런 중의원 선거 출마는 당시 지역구 현역 의원이었던 니시노 아키라의 정계 은퇴와 관련이 있었다. 니시노 아키라가 차기 중의원 선거 불출마를 선언한 이후 지역에서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니시노의 장남 고이치가 오사카 지역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일본유신회(오사카유신회)에 합류하게 되면서 자민당 내에서 새로운 후보가 필요해졌고, 이에 따라 정치 유망주였던 카미야가 공천을 받게 되었다.

그는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본인의 지역구인 오사카 13구에 출마했으나, 유신회 돌풍과 지역 내 인지도 차이로 인해 니시노 고이치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3]

가미야는 중의원 선거 낙선 이후 현실 정치 활동을 잠시 중단한뒤 대안 우파 정당의 설립 및 청년들의 저조한 정치참여 현상을 지적했고, 보수 인터넷 커뮤니티 및 강연 활동을 활발히 펼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2013년 유튜브 채널 CGS (ChGrandStrategy)를 개설하며 역사·헌법·국제정치 이슈를 일본 중심적 시각에서 설명하며 일부 청년 보수 성향 시청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으나, 아래 성향 문단에도 나와 있듯이 일각에서는 해당 채널의 콘텐츠가 음모론적 내용을 조장하거나 과도하게 국수주의 성향이 강한 내용을 다룬다는 비판도 존재했다.

2.3. 무소속 ~ 참정당 창당 이전

2015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한 가미야는 오사카부의회 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스이타시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6명의 후보자 중 최하위로 낙선하였다.

가미야는 오사카부 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현실 정당 정치와 일정 거리를 두고, 직접적인 선거 활동보다는 교육과 시민 의식 함양을 중심으로 한 사회 활동에 주력했다. 유튜브 채널과 전국 강연 등을 통해 헌법, 역사, 공동체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일본 사회의 방향성과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자 했다.

이러한 활동은 일부 우파 계층에게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특히 정치 무관심~정치혐오 성향이 강했던 청년층이나 비제도권 보수 성향 시민들 사이에서 일정한 지지층을 형성했다.[4] 제도권 정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이러한 행보는, 정치인보다는 의제 제시자이자 시민 담론 형성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결과적으로 2020년 이후 본격화되는 참정당 창당 움직임의 기반이 되었으며, 기존 정당 정치의 한계를 인식한 시민 주도 정치 운동의 실험기로 평가된다. [5]

2.4. 참정당 창당 이후

2019년 온라인 정치 플랫폼 정당DIY를 통해 정치 진입 기반을 마련했으며, 2020년 4월 11일, 참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사무국장을 맡았다.

2022년 3월 7일, 스스로 일본회의통일교와의 관련성을 부정하였다. #[6]

2022년 7월 10일에 시행된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선거 운동 기간 동안 당의 기조처럼 '농약이나 화학 비료를 사용한 식량 생산 및 외국 자본에 의한 기업·토지 매수' 등을 비판하는 반세계화적 및 내셔널리즘적인 주장을 펼쳤다. #

2022년 7월 14일, 백신 접종에 대해 '임의 접종에 대해 동조 압력이 가해진다'라고 비판했다. #

2023년 8월 30일. 참정당 제2대 대표가 되었다.#

2024년 10월 21일, 제5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선거 유세 도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생명에 큰 지장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 당 관계자에 따르면 "과로로 인한 기절로 보인다"고 밝혔다.

3. 논란 및 비판

3.1. 음모론적 콘텐츠 조장

가미야는 유튜브 채널 CGS나 SNS 등에서 코로나19 관련 정보, 국제 정치, 역사 해석 등에 있어 사실관계가 불명확하거나 과장된 주장을 반복적으로 제기해 온 점에서 과장 및 음모론적 콘텐츠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바이러스 유행 당시 백신 정책에 반대하면서 “국제 금융 세력”이나 “언론의 공포 조장” 등 음모론적 레토릭을 활용했으며, 일부 발언은 반유대주의적 상징과 결합된 표현이라는 지적도 제기되었다.

또한 CGS 채널에서는 일본제국의 전쟁 책임이나 오키나와 전투 등 민감한 역사 이슈에 대해 역사 왜곡 또는 미화 논란이 있는 발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2025년에는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이 민간인에게 자결을 강요한 사례를 부정하는 발언을 해 오키나와 지역 유족 단체 및 지방의회의 항의를 받은 바 있다.

또한 타 정당이나 인물의 정책을 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왜곡한 내용을 X 등 SNS를 통해 공유한 사례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2025년 참의원 선거 당시 레이와 신센구미가 이민 정책에 반대의사를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정책에 찬성한다는 잘못된 사실을 유포한 뒤 논란이 커지자 문제의 게시물을 삭제한 뒤 사과 발언을 한 사례가 있었으며, # 이러한 오류 전파 방식이 반복되면서 “정보보다 감정에 호소하는 선동형 메시지 전략”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참정당 지지자나 일부 보수 계층에서는 이러한 발언 및 콘텐츠가 주류 담론이 다루지 않는 사안에 대한 문제 제기의 일환이며, 표현의 자유 및 정치적 다양성의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는 의견을 주장하고 있다.

3.2. 밀가루 음모론 및 식문화 왜곡 논란

가미야는 일본 내 밀가루 소비 증가에 대해 "전후 GHQ가 일본인의 식생활을 변화시킨 결과"라며, 이를 일본인의 체질에 맞지 않는 서구식 식문화 침투로 바라보는 발언을 여러 차례 한 바 있다. 그는 특히 "일본인은 을 중심으로 한 전통 식생활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유기농 및 자연식 식단을 선호하는 건강 지향적 시각을 드러낸 바 있다.

한편, 그의 이러한 발언은 언론과 식문화사 연구자들로부터 과학적·역사적 해석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예컨대 일본의 서양식 식문화는 이미 메이지 시대부터 점진적으로 확산되었고, 전후 GHQ의 급식 정책은 당시 식량난 해소 목적이 주였다는 분석이 있다.[7] 이에 따라 "밀가루 확대가 일본인을 병약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정책이었다"는 해석에는 다소 논란이 될만한 주장이 포함되어 있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일본 식문화사나 전후 정책사를 다룬 역사학자들은 과거부터 해당 주장을 주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과학적 근거나 사료적 뒷받침이 부족한 해석”이라고 지적하고 있으며, 일부는 이를 "의도적 해석 또는 식문화적 민족주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일부 언론과 가미야의 정책에 반대하는 계층 사이에서는 그가 과거 자신의 인스타그램 등 SNS 계정에 피자, 라멘 등 밀가루 기반 음식의 시식 장면을 공유한 사실을 지적하며, # 발언과 실제 행보의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참정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정책과 개인 취향은 구분해야 한다"는 옹호와, "발언에 대한 상징적 일관성 부족"이라는 비판이 엇갈리고 있다.

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면, 그의 발언은 전통 식문화 회복이라는 보수적 식견과 건강 중심의 식습관 권장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으나, 일부 표현이 음모론적 해석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3.3. 독단적 당 운영 정책

참정당은 창당 이후 가미야 소헤이 대표의 강한 리더십을 중심으로 당의 전략과 메시지를 전개해 왔으나, 그 운영 방식에 대해 내부 및 외부에서 여러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2023년 12월, 참정당 공설비서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해당 비서는 유서에서 "사람이 잘 모이지 않는다"며 당 상부의 질책이 반복되어 정신적 압박을 느꼈다는 취지의 내용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카미야 대표의 갑질 논란으로 비화되었다. #

또한 1년 뒤인 2024년, 참정당 국회의원 사무실에 감시용 CCTV 설치를 지시했다는 내부 폭로가 공개되면서, 당 지도부의 통제 강화 방침이 도마 위에 올랐다. 이에 반발한 스즈키 아츠시 의원은[8] 공개적으로 당의 내부 운영 문제를 지적하며 당 지도부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

이외에도 창당 초기부터 활동해 온 다수의 핵심 인사들이 가미야 대표와의 의견 차이를 이유로 탈당하였다. 전 참정당 고문 타케다 쿠니히코, 정치학자 무카이 타카시, 와세다대학 정치 애널리스트 와타세 유야 등 초창기 공동 창립자 인사 일부는 당 운영 방향과 리더십 방식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2022년~2023년 사이에 줄줄이 당을 떠났다. 이들은 탈당 후 인터뷰 및 공개 성명을 통해 "의사결정 구조가 대표 1인에게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거나 "내부 비판이나 견제가 실질적으로 차단되어 있다"고 비판했다.[9]

가미야 본인은 내부 행사에서 "인사권과 예산권은 독재적으로 행사할 것"이라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였으며, 이러한 발언은 당 내부에서조차 비민주적[10]이라며 큰 우려를 낳았다. 당헌 및 당규상 대표 권한의 집중이 명문화되어 있진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대표 1인의 리더십에 의존한 정당 구조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미야 소헤이의 당 운영 방식은 효율성과 집중력이라는 장점을 가지는 한편, 내부 민주주의의 한계와 리더십 집중 구조라는 비판도 함께 받고 있으며, 이는 정치적 관점에 따라 상반된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3.4. 조선인 비하 표현(춍) 사용 논란

2025년 7월 18일, 미에현 참원선 유세 도중 "참정당은 생긴 지 아직 5년밖에 안된 당. 법률가도 아닌 아마추어 국민이 ‘이런 나라였으면 좋을 텐데’라는 소망을 모아 이상을 펼쳤을 뿐입니다. 그걸 가지고 이게 부족하다, 저게 부족하다, 헌법을 모른다, 멍청이다, 바보다, 이라고 (무시당합니다). 춍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방금 부분은 컷! 아, 또 말해 버렸군."[11]이라는 발언을 했다. 맥락상 이 표현이 참정당 자신들을 향한 것이라고는 하지만[12] 이 표현은 일본 사회에서도 공적인 자리에서 쓰면 안 되는 말이라는 묵시적 합의가 있는 용어이며, 더군다나 아무리 극우라 해도 정치인이 공적인 장소에서 입에 담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13] 발언 직후 가미야는 "미안합니다. 정정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3.5. 자이니치 논란

2025년 7월, 가미야 소헤이가 화상회의 도중 한국식 주도를 취하여 재일 논란이 일었다.#
설령 재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술을 마실 때 고개를 돌려 마시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 밖에 없으므로 가미야 소헤이가 한국 문화에 심취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 여성과 사귄적이 있고 한국도 자주 방문했고 겨울연가도 봤고 한국어도 조금 배웠으며 김치와 불고기는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고 밝혔다.#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스이타 신선회)
2007 - 2012 정계 입문


2012 - 2015 입당


2015 - 2019 탈당
DIY 2019 - 2020 창당

[[참정당|
참정당
]]
2020 - 창당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7 스이타시의회 선거 스이타시

2,663표 (2.1%) 당선 (30위) 초선
2011 5,856표 (4.3%) 당선 (2위) 재선
2012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오사카 13구

58,465표 (27.41%) 낙선 (2위)
2015 오사카부의회 선거 스이타시

11,825표 (9.2%) 낙선 (6위)
2022 제26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비례대표
[[참정당|
참정당
]]
1,768,349표 (3.33%) 당선 (1위) 초선

6. 성향

일본 중심주의, 고립주의, 국수주의를 추구하는 강경 우파적 인물이다. 그의 개인 유튜브 ChGrandStrategy(CGS) 채널을 보면 재특회, 넷 우익처럼 직접적으로 혐한성 발언을 일삼는 인물은 아니지만, 10년 전부터 혐한 성향이 강한 강사들[14]을 초빙하여 한국에 대해 잘못된 사실을 왜곡하거나 크게 부풀려진 말들을 적극적으로 주장할수 있게끔 한 적이 있다.

다만 헌법 개정에 반대하거나 징용공 문제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의외로 '충돌하는 부분은 서로 양보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취하는 등# 일본의 자민당 내 친아베파 일부 의원이나 일본보수당 같은 기성 극우와는 달리 과거사 관련해서는 비교적 온건한 편이다. 다만 외세를 배척하는 극우 성향 인사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일관성 있는 입장이라고 보긴 어려우며, 큰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애초에 한일관계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맞다.

2025년 7월 18일 유세 중 이란 한국 비하 표현을 썼다가 곧바로 해당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면서 자기가 차별발언을 하면 곧바로 기사화 된다는 불만을 하기도 했다.#

7. 기타

  • 현재 가미야의 가족은 이시카와현 카가시에서 거주중이며, 아내와 아들 2명, 딸 1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그의 부인은 정치 활동 중 사무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고, 이후 5년간 지지자 → 연인 관계로 이어지다 2017년 6월 결혼에 성공했다.
  • 2013년에 이시키카이카쿠 주식회사[15]라는 회사를 부인인 가미야 후미 명의로 창업하여 운영해 오고 있다. 대표 인삿말 페이지에 버젓이 본인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면, 사실상 본인이 대표인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은 소위 ‘강의 팔이’로 볼 수 있는 ‘이시키카이카쿠 대학‘과 유튜브 운영 대행, 굿즈 판매 등이다.

8. 한국 관련

가미야 소헤이 본인의 배외주의 성향과 춍 발언 논란과 별개로 한국과의 인연이 많다.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인 여성과 사귄적이 있고 한국도 자주 방문했고 겨울연가도 봤고 한국어도 조금 배웠으며 김치와 불고기는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외로 가미야 대표는 캐나다 어학연수 시절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었어서 한국 이주도 진지하게 고민했었다고 밝혔다. #

한국 지인들의 영향을 받아 한국 예비군에 해당하는 예비 자위관을 10년 째 유지 중이다. 예비 자위관은 실제로 자위관 복무를 하지 않고도 할 수 있지만 한국 지인들이 병역 의무를 다 하는 모습에 자극을 받아 하는 중이라고 한다.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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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다 유코 하지카노 히로키 마쓰다 마나부 미야데 치사토 야마나카 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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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학과 지리학을 복수 전공하는 학과로, 현재는 종합인문학과로 통합되었다.[2] 일본은 사법시험과 로스쿨이 병행 실시되는 중인데 로스쿨을 졸업하거나 예비시험에 합격하면 사법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지며, 지방 하위 로스쿨 출신은 거의 다 사법시험에 못 붙어 변호사 자격을 못 딴다. 도민퍼스트회의 아라키 지하루도 지방대 로스쿨 출신으로 변호사를 못 딴 경우다. 변호사가 될 만한 이들은 로스쿨에서 시간낭비를 하기보다 예비시험을 거쳐 변호사가 되기에, 로스쿨 제도는 거의 파행인 수준이고 지방대 로스쿨은 미달이다. 로스쿨 졸업생 변호사시험 응시 자격이 있어 입시경쟁이 치열한 한국과는 경우가 상당히 다르다.[3] 참고로 이 당시 자민당 총재였던 아베 신조와 청년국장이었던 고이즈미 신지로가 카미야의 응원연설을 맡은 적이 있다. #, #, #[4] 그러나 그의 담론은 교육과 애국심을 강조하는 외형을 취하고 있으나, 실제 내용에 있어서는 역사적 사실의 왜곡, 선동적 프레이밍, 과잉 일반화, 검증되지 않은 주장의 반복 노출 등 다수의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일부 콘텐츠는 음모론적 서사 구조를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특정 정치 세력이나 이념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로 인해 학계나 언론계에서는 건설적인 보수적 담론 형성보다는 정치적 포퓰리즘과 대중 선동에 기초한 콘텐츠 생산에 가깝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5] 한편, 참정당의 이러한 시도는 정치적 지향은 상이하지만, 2019년 창당된 시민 주도형 좌파 정당인 레이와 신센구미와 일부 유사한 측면을 보인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양 정당 모두 풀뿌리 정치 모델, 대중 미디어의 전략적 활용, 제도 정치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 등을 공유하고 있으며, 두 당의 세력 상승은 일본 정치에서 비주류 정당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 #[6] 또한 가미야는 2008년부터 일정 기간 동안 모리토모 학원의 감사직을 맡았던 이력이 있으며, 이와 관련된 사실은 본인도 공개적으로 인정한 바 있다. 다만 그는 자신의 역할이 재무 조언에 국한되었고, 논란이 된 국유지 매입이나 땅 소유 관련 결정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명하고 있다.[7] 출처: 『日本食生活史』 渡邊實, 2007[8] 스즈키 의원은 국민민주당 - 교육무상화를 실현하는 모임과 같은 중도 정당 출신의 인사이다.[9] 이 밖에도 일본의 정치 단체인 일본 성진회(日本誠真会)의 대표 요시다 도시아키(吉野敏明)도 가미야와의 불화로 참정당을 탈당한 사례 중 하나이다.[10] 애초에 국민주권을 부정하고 국가에 주권을 넘기겠다는 반민주적 노선을 주창하는 정당인데도 이런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11] 원문: 参政党はできてまだ5年の党。そしてその素人の、法律家でもない国民が、こういう国だったらいいよねっていう思いをまとめてこういう理想を掲げただけですよ。それをね、あれが足りない、これが足りない、憲法分かってない、アホだ、バカだ、チョンだと。チョンだと言ったらダメだ。ごめんなさい。今のカット!ああ、また言っちゃった。[12] 물론 동영상을 보면 발언 정황이나 말투, 표정이 일부러 의도적으로 사용한 티가 난다[13] 한국으로 치면 한국 정치인이 유세 도중 우리가 쪽바리, 짱깨라고 무시당한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14] 학력이 불분명하거나, 대학이나 학술기관에서 사학을 제대로 배워놓지도 않은 사이비에 가까운 유사역사학자들이 많다. 이들의 어록에는 "한국인은 똥을 먹는 문화가 있다", "한국인들은 노예민족이다", "일본문명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일본은 초고대문명국이었다", "김치의 역사는 100년밖에 안 되었으며, 일본의 도움으로 만들 수 있었다"와 같은 황당하고 왜곡된 주장들이 난무한다.[15] ‘의식 개혁’의 가타카나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