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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colcolor=#fff> 박종운 朴鍾雲 | Park Jong Woon | |
출생 | 1961년 12월 22일 ([age(1961-12-22)]세) |
충청북도 청주시 | |
현직 | 고용노동부장관 정책보좌관 내정자 자유민주시민연합 사무총장 미제스와이어 집필위원 |
학력 | 남일국민학교 (졸업) 운호중학교 (졸업) 청주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 /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1] / 석사[2])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박사[3]) |
가족 | 친형 배우자 강희경[4] (1990년 12월 9일 결혼 ~ ) 1남 1녀 |
병역 | 육군 제37보병사단 병장 만기전역[5] |
소속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약력 | 서울대학교 반독재민주화투쟁 학생운동본부 위원장 박종철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민주당 국회의원 보좌관 김충환 강동구청장 비서실장 한나라당 부천오정 지구당 위원장 한나라당 부천오정 당원협의회 운영위원장 국가발전전략연구회 사무처장 경기도경제단체연합회 사무총장 한나라당 경기도당 서부지역 총괄본부장 한나라당 인권위원회 부위원장 경기남부도로주식회사 상임고문 미디어펜 논설위원 자유시민TV 대표 중앙대학교 강사 자유공화당 사무총장 자유공화당 공천관리위원장 택시기사 |
링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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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운동권 출신 전 정치인.2. 생애
2.1. 출생과 운동권 시절
1961년 12월 22일,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태어났다. 남일초등학교, 운호중학교, 청주고등학교 졸업 후인 1981년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6]에 입학했다.운동권이 된 계기는 신입생 때 ‘사회대평론’이라는 서클에 가입했는데, 거기서 선배들이 리영희와 카를 마르크스의 책을 읽게 했고 마르크스가 주장한 노동가치설에 감명받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후 제헌의회그룹 간부가 되어 여러 시위에 참여했고 1985년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되어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1987년 1월 8일, 박종운이 후배 박종철의 집에 들러 조직 재건을 위한 연락책 임무를 전달하고 현금 1만 원을 빌린 사실을 파악한 경찰은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안다고 판단했고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한 후 고문하여 숨지게 했다. 또 같은 해 2월 군 복무 중 국군보안사령부의 조사를 받은 후 의문사한 녹화사업 피해자 김용권 역시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8년 12월 수배령이 해제되자 가장 먼저 박종철의 부모를 찾아가 사죄한 후 양자가 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정치활동을 하기 전에는 박종철 군의 부모님에게 매일 안부전화를 했으며, 명절마다 인사를 드리러 찾아가고 결혼인사는 물론 결혼식에서 폐백을 드리고 가족사진을 찍을 정도였다.#
이후 비공개 지하조직인 ‘노동자해방투쟁동맹’(약칭 ‘노해동’)에서 활동하다가 당시 재야 민주진영을 이끌고 있던 이부영, 김충환 라인을 따라서 이들의 지역구 기반인 서울 강동구에서 활동했다. 민선 1기 구청장으로 당선된 김충환의 비서실장을 역임하기도 했고, 기타 강동구청에서 몇몇 업무를 본 것으로 보인다.
2.2. 정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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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에 입당했을 때의 박종운[7] |
2000년에 정식으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 때 오경훈 전 서울대 총학생회장, 정태근 연세대 총학생회장, 고진화 성균관대 총학생회장도 함께했었다. 사실 이 시기 한나라당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한나라당의 전신 신한국당은 김영삼이 주도해서 만든 정당이다. 1987년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독재 대 반독재,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 대립의 구도보다는 정치지형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 3당 합당에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한 축으로 참여해서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정국 안정과 범보수연합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통합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민주자유당 대선후보로 당선하였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하에서 하나회 숙청과 전두환, 노태우 구속 등 문민개혁이 이루어졌으며, 1995년 12월 민주자유당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종필은 당에서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다.
한나라당은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자유당의 후신인 신한국당과 DJ세력이 모두 빠져나간 반/비 DJ 성향의 민주당이 합당한 정당이었다. 이회창은 권위주의 정권과는 차별화된 정치인이었고, 권위주의는 물론 3김정치의 청산을 기치로 내걸었다. 아울러 이부영, 김충환은 모두 반DJ 성향으로서 한나라당에 합류한 경우였고, 박종운도 이들과 함께 따라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일보 인터뷰에 따르면, 단순히 이들과 함께 움직인 것 외에도 후에 돌이켜 보니 자신이 추종하던 공산주의 또한 독재였고 공산 국가에서 지배를 당하는 사람은 노예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1990년대 초 소련 해체와 동구권 붕괴에 영향을 받아 사상적 전환이 있었던 듯 보인다.
2000년대에는 뉴라이트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 부천시 오정구에 공천을 받아 출마했으나 새천년민주당 최선영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참여정부가 출범한 후, 한나라당 내의 反/非DJ 계열 개혁적, 민주계 인사들이 자신들과 과거 뜻을 함께 한 노무현과 정치적 명운을 같이 하기로 하면서 이부영은 한나라당에서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합류했고 김충환과 같은 경우에는 한나라당에 잔류했다. 그리고 박종운도 한나라당에 잔류했다. 그의 잔류가 이부영보다 김충환에 더 가까웠던 개인적 이유였는지, 아니면 사상적 전환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오히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부천시의 한나라당 조직을 김문수, 차명진, 임해규 등 과거 민중당 계열 출신인 운동권 정치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이들 모두가 한나라당 잔류를 택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들의 정치적 선택에 영향을 받았거나 그 흐름과 함께 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한나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서울대 선배이자 부천시의 터줏대감 원혜영에게 패하고 낙선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범친이계로 분류되었으며 본래 출마했던 같은 선거구에 재도전했으나 역시 원혜영에게 밀려 낙선하였다.[8] 게다가 3번째로 낙선한 18대 총선때 선거법을 위반하는 바람에 같은 해 12월, 대법원에서 벌금 150만원, 피선거권 5년 박탈이 확정되었다. 따라서 당연히 다음 총선에 출마할 길이 막혔고, 결국 정계은퇴를 선택했다.
2.3. 근황
그 이후로는 미디어펜 논설위원으로 재직하다가, 루트비히 폰 미제스의 저서를 여럿 번역하고 자유기업원, 펜앤드마이크에서 기사를 쓰는 등 신자유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사상을 알리는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이러한 정치적 행보와는 관계 없이 박종철에 대한 인간적인 도리는 지키는 것으로 보인다. 뉴라이트 활동을 계속하면서 박종철의 가족과는 과거처럼 가까이 지내긴 어려워졌지만 매년 박종철 추모 행사에 참석하며, 2018년 1월 서울시 관악구의 박종철 거리 선포식 때는 초청도 받지 않았음에도 일부러 찾아와서 말없이 지켜보다 돌아갔다고 한다.#
박종철 추모 관련 행사에는 거의 대부분 참석한다고 보면 된다. 다만, 본인의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물러가라’ ‘반성은 하느냐’는 고함이 들린다고 한다. 전면에 나서거나 다른 참석자들과의 교류는 못하고 말 그대로 자리만 지키다 가는 듯.
2020년 김문수 등과 함께 자유통일당을 창당했고, 뒤이어 합당한 자유공화당에서 사무총장 겸 공천관리위원장을 맡았다가 당내 분쟁이 심해지자 탈당했다.
한때 자유시민TV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지만, 댓글 대부분이 박종철과 관련된 과거사로 인해 여론이 매우 좋지 못한 상황이었고 결국 구독자수 1000명도 모으지 못하고 활동을 접었다.
한편 썰전 253화에서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종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민주화 운동가들이 새로운 정치비전으로 당을 택하고 자기생각을 펼치는 것 자체는 변절로 표현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지만 이제 박종운씨 문제는 저는 그렇게 짚을 문제는 아니고요. 이 분이 당시 (한나라당) 입당을 선택하고 갔을 때 박종철 씨 유가족들이 받은 상처가 너무 깊었어요. 이 분들에게는 같은 편인데, 내 아들을 죽인 사람들과 같은 진영으로 갔다고 생각하는 상처가 있어서 되게 힘들어 하셨어요. 제가 볼 때, 본인 입장에서는 나는 내 정치적 선택의 자유가 있다 그럴 수 있는데... 박종운 씨나 우상호 같은 사람은 선택의 자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죽음을 안고 살야야 되기 때문에... 저는 이한열 열사의 가족이 싫어하는 일을 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사상의 측면이나 전향이란 측면보단... 그래도 종운이는...종철이를 생각하면 차라리 정치를 안 하던가, 그냥 다른 일을 하고, 종철이를 기념하는 사업을 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저한테는 좀 있어요.
인터뷰 당시에는 택시기사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80살까지 할 계획임을 밝혔다. 한편 이 인터뷰에서 만약 박종철이 살아있었다면 박종철 역시 본인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언급[9]을 했다. 아무튼 현재는 정계를 아예 떠난상태이다. 본인의 지역구인 부천이 민주당 강세지역이 된데다가 극우정당 활동까지 겹치면서 추후 정치를 하는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본인과 같이 학생운동을 했던 우상호의원이 중진이 된 것을 감안하면 초라한 결과를 맞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우상호 의원이 주장했던 내용들이 맞았던 셈이다.
본인 역시 학생운동의 핵심인물이었음에도 정계입문이후 선출직 한번 못해보고 정계은퇴를 한것을 감안하면 잘못된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 되었다. 정치할 당시는 양보해서 그의 말을 믿어주더라도[10][11]이후 행보, 특히 뉴라이트에 발을 담근것을 생각하면 그에겐 참 애석하지만 변절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12][13]
3. 저서
- 『시장경제가 민주주의다』(2008)
- 공역서,『인간행동』(루트비히 폰 미제스, 2011),
- 공역서,『미시정치-성공하는 정책만들기』(매슨 피리, 2012)
- 역서,『과학이론과 역사학』(루트비히 폰 미제스, 2015)
- 역서,『사회주의』(루트비히 폰 미제스, 2015)
- 역서,『경제학의 인식론적 문제들』(루트비히 폰 미제스, 2016)
- 역서,『경제과학의 궁극적 기초』(루트비히 폰 미제스, 2016)
- 공저,『자유주의 자본론』(2016)
- 공저,『자유주의 노동론』(2017)
- 공역서,『법, 입법, 그리고 자유』(루트비히 폰 미제스, 2018)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90 - 1991 | 정계 입문 |
| 1991 - 1995 | 합당[14] |
| 1995 - 1997 | 합당[15]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97 - 2000 | 탈당 |
| 2000 - 2012 | 입당 정계 은퇴 |
[[새누리당|]] | 2012 - 2017 | 당명 변경 |
[[자유한국당|]] | 2017 - 2020 | 당명 변경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20 | 탈당[16] |
[[자유통일당(2020년)|]] | 2020 | 창당 |
[[자유공화당|]] | 2020 | 합당[17]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2020 - | 탈당[18]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0 |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 경기 부천 오정 | | 19,652 (32.81%) | 낙선 (2위) | |
2004 |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 | 20,216 (28.05%) | |||
2008 |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 24,831 (42.32%) |
역대 선거 벽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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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 박종운이 마지막으로 박종철의 집에 갔던 1월 초, 대문을 나서는 그에게 박종철은 고생 많다고 하면서 누나가 떠준 털목도리를 감아주었다고 한다.[19] 그 목도리는 현재 용산구 민주인권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 보수정당 소속 정치인이었지만 정치 은퇴 후 택시기사를 하기 전까지 평생 운동, 정치만 하고 직업이 없어서인지 재산이 2008년 기준 1억 2천만 원이었다.
- 원래 정치적으로는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와 가까웠으나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대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며 손학규에 대한 실망이 커졌다고 한다. 그때 이명박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행동력을 보여 친이계가 되었다.
- 전두환 전 대통령이 사망했을 당시에는 '한 생이 끝을 맺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1] 정책학 전공[2] 석사 학위 논문: 지방자치실시와 지방예산구조 변화에 관한 연구 : 서울시 강동구와 경기도 부천시에서의 선출직의 영향력을 중심으로 (2001)[3] 부분지급준비 제도의 형성 및 정착과정에 관한 연구 (2018)[4] 배우자 역시 민주운동가 출신이다.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에서 파업 지원 활동을 하던 중 한 운동권 동료의 소개로 박종운과 만났다. 민주화 이후 박종운의 정치성향이 바뀌고 나서도 박종운을 지지했다고 한다.[5] 소총수로 근무했었다.[6]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MBC의 오보로 사회복지학과 출신으로 알려졌으나 사회학과 81학번이 맞다.[7] 이회창 대표와 악수하는 사람은 정태근이고, 박종운 오른쪽은 고진화와 오경훈이다. 이들 중 박종운만 유일하게 국회의원이 되지 못 했다. 이회창은 15, 16, 18대, 정태근은 18대, 고진화는 17대, 오경훈은 16대 국회의원을 했다. 사진 찍을 당시에는 이회창만 국회의원이었다.[8] 참고로 당시 같은당 소속으로 부천 지역에 출마한 임해규(원미구 갑), 이사철(원미구 을), 차명진(소사구)는 당선되었는데, 본인만 낙선하였다. 물론 원혜영은 아예 부천이 고향이었고, 지금까지 본인이 태어난 동네에 쭉 살고 있기 때문에 부천토박이인데다 맹주이기 때문에 지역기반도 상당히 탄탄했다.[9] 이에 김문수 전 도지사는 박종철이 본인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주장해야 본인의 보수당 입당의 논리가 성립된다면서 박종철을 계속 엮을 수밖에 없을것이라면서 비교적 객관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참고로 김문수는 이당시에는 나름 합리적인 목소리를 내던 시절이었다.[10] 우상호의원이 나왔던 썰전에서 유시민은 민주화 운동 세력이 보수당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면서 이를 너무 나쁘게 볼 이유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우상호의원 역시 유시민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다만 이 사안에 대해서는 좀 달리 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11] 애초에 민주화의 양대축 중 하나인 김영삼 대통령이 보수당의 뿌리인 민주자유당을 만든 장본인이기에 민주화가 민주당만의 전유물이라고 보긴 어렵다. 김영삼과 민주화를 함께한 운동권 인물들이 다수 입당해서 활동했기 때문[12] 우상호 의원의 말처럼 기념사업회등의 활동에 주력했다면 사회의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추후 자연스럽게 정계입문도 가능했을 것이다[13] 노동운동계의 황태자이자 노동운동의 전설로 불리웠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친박에 발을 담그며 굴러떨어진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14]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15] 개혁신당과 신설 합당.[16]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17] 우리공화당과 신설 합당[1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9] 나중에 누나에게는 목도리를 잃어버렸다며 다시 떠달라고 말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