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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례쥔

파일:이열균.jpg
중화민국 강서도독
정체 李烈鈞
간체 李烈钧
한국식 독음 이열균
영문 Li Liejun
협황(俠黃)
협화(協和)
출생 1882년 2월 23일 청나라 강서성 무녕현
사망 1946년 2월 20일 중화민국 사천성 충칭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정치가, 군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반원투쟁과 계축전쟁2.3. 호법운동2.4. 국민혁명2.5. 말년
3. 가족4. 주요 경력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청말의 혁명가, 중화민국의 정치인.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2년 강서성 무녕에서 태어났다. 강서무비학당 졸업 이후 일본 제국으로 유학, 일본의 진무학교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07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귀국 후에 신군에서 반청활동을 진행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강서도독부 총참모장, 육해군 총사령에 추대되어 강서성에서의 혁명을 주도했고 1912년 중화민국 건국 이후 강서도독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민정장관을 파견, 도독의 재정권을 박탈하여 중앙집권화를 이룩하려는 위안스카이와 충돌하였다.

2.2. 반원투쟁과 계축전쟁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를 무력으로 토벌할 것을 주장했고 이어 선후대차관 사건이 일어나자 국무총리 자오빙쥔 등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후 그의 무력을 경계한 위안스카이에 의해 본직을 망각하고 혼란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1913년 6월 9일 면직당해 강소도독직은 리위안훙에게, 강서호군사 직은 구양무에게 내주고 도독에서 물러났으며 펑궈장북양군벌의 실력자들에게 매국노라고 매도를 당했다. 위안스카이는 리례쥔에게 거금을 주며 강서성을 떠나 혁명활동을 하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거부하고 강서성에 잔류했다.

선후대차관 사건에 이어 삼독해직 사건이 벌어지자 쑨원의 주최로 상하이에서 국민당원들이 회의를 열었다. 리례쥔은 남방 각성이 호응만 한다면 자신이 제일 먼저 기의를 일으키겠다고 주장했고 이에 국민당은 리례쥔을 토원군 총사령관으로 추대, 각 성의 호응으로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913년 7월 12일 리례쥔이 강서성 호구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토원군을 조직, 7성 토원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고 강서호군사 구양무를 포섭하여 강서성을 장악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빠른 반격으로 호구, 난창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다른 곳의 혁명군도 패하면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고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가 정식 대총통에 취임한 이후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쑨원이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을 때는 가입하지 않았다.

이후 이근원 등 구국민당원과 함께 운남에 들어와 반원활동을 전개하며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을 비판했다. 1915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단행하자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와 함께 운남성에서 위안스카이에게 제제를 취소하고 제제파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토벌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위안스카이가 이를 묵살하자 12월 25일 호국전쟁을 일으켜 위안스카이 토벌에 나섰다. 이때 리례쥔은 2군 총사령관에 추대, 양광으로 출병했고 1916년 3월,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였고 6월에 부총통 리위안훙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총통에 계임한 리위안훙은 구국회와 약법 회복을 선포하였고 이에 남방의 군무원이 해산하여 호국전쟁이 종결되었으나 리례쥔은 루룽팅, 탕지야오 등이 고관에 오른 것에 비해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

2.3. 호법운동

1917년 부원지쟁을 거쳐 장훈복벽이 일어난 이후 국무총리에 복직한 돤치루이가 구국회 회복을 거부하자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리례쥔도 광저우로 남하하여 호법정부 대원수부 참모총장에 추대되어 광동, 운남의 군대를 이끌고 강서성을 공격했으나 패했다. 그의 부하들은 강서성에 잔류하다가 북양정부에 투항하였다. 이 때문인지 북양정부와의 화해를 도모하는 탕지야오의 뜻에 따라 1917년 11월 4일 <서남연합회 장정초안>을 작성하여 각성에게 쑨원이 대원수로 재직하는 군정부 개조를 논하기도 했으나 1920년 2차 호법운동 시작 이후 참모총장에 임명, 군사회의에 참여하여 북벌을 논했고 1922년 쑨원이 1차 직봉전쟁을 틈타 북벌을 거행하자 북벌군 중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강서성으로 진공했다.

1922년 6월 16일 천중밍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을 광저우에서 축출하자 쉬충즈와 함께 천중밍 토벌에 참여했다. 1922년 9월, 구국회와 약법이 복구되고 리위안훙이 총통에 복직하자 리위안훙 총통으로부터 전국재병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924년 1차 국공합작 이후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2차 직봉전쟁 이후 선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상하는 쑨원을 보좌하여 일본을 거쳐 베이징을 다녀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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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1월 쑨원과 리례쥔

쑨원 사후 서산회의에 참석, 서산회의파에 가담하여 국공합작을 반대했으나 국민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광저우 국민정부에 참여했다. 과거 운남에서의 인맥을 활용하여 탕지야오가 주월전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차단하였으며 주페이더 등을 중국 국민당에 가입시켰다. 이후 주월전군은 건국전군으로 거듭났으며 양시민 숙청 이후 1925년 7월, 국민혁명군 3군으로 재편된다.

2.4. 국민혁명

1926년 중산함 사건으로 권력을 잡은 장제스국민당의 1차 북벌에 나선 후 1927년 강서성 정부주석, 국민정부 상무위원 겸 군사위원회 상무위원, 군참원원장을 역임했다. 1927년 천도논쟁이 벌어진 후에 3전대회에 참여했다가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난징 국민정부에 가담했다. 영한합작 이후 후한민, 왕징웨이, 차이위안페이, 탄옌카이와 함께 국민정부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장제스 하야 이후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탕성즈의 깽판으로 무산되었다. 1927년 10월 탕성즈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참가를 거부하고 행패를 부리자 리쭝런, 주페이더, 펑위샹, 리지선과 함께 당계전쟁에 참여, 탕성즈를 토벌하였다. 1928년 국민당 2기 4중전회 이후 위유런, 탄옌카이, 장런제,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다시 국민정부 상무위원에 임명되었다.

1929년 반장전쟁이 발생하자 쉬충즈 등의 장제스 토벌 통전에 동참하여 파문을 일으켰고 1931년 탕산 사건을 계기로 발생한 1차 양광사변에도 참여, 광저우 국민정부 정부위원에 선출되었다. 1931년 12월 15일 장제스의 하야를 조건으로 난징과 광저우 국민정부가 합류한 이후 다시 국민정부에서 일하게 되었다.

1932년 장왕합작으로 정치에 복직한 장제스에 의해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상임위원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직했다. 1935년 쑨촨팡스젠차오에게 암살당했을 때 관대한 처벌을 청원하였다.

2.5.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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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의 리례쥔

만주사변 발생 이후 장제스에게 전보를 쳐서 정치개혁, 일치항일을 주장하다가 서안 사건 이후 장쉐량의 선처를 호소했고 1937년 중국 국민당 5기 3중전회에 출석, 쑹칭링, 펑위샹과 함께 국공합작을 주장했다.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병으로 인하여 정치에서 은퇴하였고 정부가 충칭으로 후퇴하자 같이 충칭으로 피난했다. 충칭에서 휴양하던 중 1946년 충칭에서 사망했다. 국민정부는 국장을 거행하여 국민당의 원로인 그를 추모하였고 저우언라이, 둥비우중국공산당의 주요 지도자들도 그를 조문했다.

3. 가족

자녀가 10명에 달했다고 한다. 막내아들 리간류는 하얼빈의과대학을 졸업했다. 1987년에는 한단시 부시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4. 주요 경력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손문평전, 해롤드 시프린, 지식산업사.
  • 신해혁명사, 민두기, 지식산업사.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군신정권, 진지양, 고려원.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국민당 3전대회 전후의 반장운동, 김영신, 중국학연구 30,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53호,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55호, 중국학연구회.

6.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