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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우 | 장비 | 마초 | 황충 | 조운 |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노당익장(老當益壯) 황충 | 黃忠 | |||
시호 | <colbgcolor=#ffffff,#191919>강후(剛侯) | ||
작위 | 관내후(關內侯) | ||
최종직위 | 후장군(後將軍) | ||
성씨 | 황(黃) | ||
이름 | 충(忠) | ||
자 | 한승(漢升) | ||
생몰 기간 | ?년 ~ 220년 | ||
{{{#!wiki style="margin: 0-10px -5px" {{{#!folding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6px; margin-bottom: -16px" | 유표 | 중랑장(中郞將) → 비장군 대행(裨將軍 代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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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老將說黃忠(로장설황충) 노장이라면 황충을 말하니
收川立大功(수천립대공) 서천을 얻을 때 큰 공 세우네
重披金鎖甲(중피금쇄갑) 쇄갑을 엄중히 걸치고
雙挽鐵胎弓(쌍만철태궁) 양팔로 철태궁을 잡아당기니
膽氣驚河北(담기경하북) 담력은 하북을 뒤흔들고
威名鎮蜀中(위명진촉중) 위명은 촉에 가득하네
臨亡頭似雪(림망두사설) 죽을 때 머리는 눈처럼 희건만
猶自顯英雄(유자현영웅) 영웅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네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자 유비 휘하의 무장.收川立大功(수천립대공) 서천을 얻을 때 큰 공 세우네
重披金鎖甲(중피금쇄갑) 쇄갑을 엄중히 걸치고
雙挽鐵胎弓(쌍만철태궁) 양팔로 철태궁을 잡아당기니
膽氣驚河北(담기경하북) 담력은 하북을 뒤흔들고
威名鎮蜀中(위명진촉중) 위명은 촉에 가득하네
臨亡頭似雪(림망두사설) 죽을 때 머리는 눈처럼 희건만
猶自顯英雄(유자현영웅) 영웅의 모습이 더욱 드러나네
형주 남양군 사람으로서, 자는 한승(漢升).[1] 시호는 강후(剛候)[2]다.
익주 정벌과 한중 공방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여 유비의 영토 확장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명장으로 항상 앞장서서 적을 깨부수고 점령하여 그 용맹이 전군의 으뜸이었다고 한다. 그 용맹함과 사람됨, 높은 공로 덕분에 항장 출신이란 한계를 극복하고 만인지적이라 일컬어진 관우, 장비와 동렬에 서며 당대와 후대를 가리지 않고 큰 명성을 떨쳤다.
촉한의 인물들 중에서도 조운과 더불어 굳세고 강직하면서 인정이 두텁고 온화한 인품을 지녔기에 편입된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유비의 남다른 신임을 받았다. 동시에 《삼국지연의》를 통해 최고의 명궁이자 노장(老將)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
2. 생애(정사)
자세한 내용은 황충/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훨씬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촉장들이 늘 그렇듯 수많은 적장들을 쓰러뜨린 인간병기 역을 맡고 있으며, 정사에서 보여준 강인한 모습이 한층 강화되었다.3.1. 유비군 합류
유비와의 만남도 보다 극적으로 묘사되었다. 형남정벌전은 적벽대전이라는 큰 이벤트 이후 유비 세력이 세력 확장을 위해 간판급 명장들을 동원해 형남 4군을 각각 정벌한다는, 이른바 쉬어가는 에피소드이다. 대략적으로 남만 정벌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여기서 황충이 형남 4군의 끝판왕(?)으로서 등장해 유비군 최강의 장수 관우를 상대로 선전하는 것은, 황충이라는 새로운 스타 캐릭터의 데뷔전을 위한 포장이라고 볼 수 있다.[3]관우는 적벽대전 당시 화용도에서 패주하던 조조를 그냥 보내준 일로 초조하던 상태였기에 형남 4군 중 한현이 다스리는 장사만이 남자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자청했으나, 제갈량은 황충이라는 명장이 있으니 얕보지 말라며 경고했다. 하지만 관우는 앞서 말한 화용도 사건에서 (아무리 시위였다지만) 자신을 죽여야 하니 어쩌니 하고 떠들었던 제갈량이 또 자신을 방해한다고 여기고는 도부수 500명만을 데리고 무작정 장사로 쳐들어간다. 제갈량은 제아무리 관우라지만 황충에게는 힘들 거라며 유비에게 따라가라고 권유했고, 장사에서도 유비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양령이라는 장수가 먼저 출진했으나 3합도 못버티고 순식간에 목이 떨어져서 황충이 출진한다.
장사의 기둥답게 황충은 관우와 치열하게 싸웠지만 말의 무릎이 꺾이는 바람에 낙마했는데, 관우는 낙마한 상대를 베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면서 말을 바꿔 타고 오라고 살려서 보내준다. 황충이 무사히 돌아오자 한현은 황충을 걱정하며 자신이 아끼던 명마를 내어주고는 다음엔 활을 쏘라고 충고한다. 하지만 관우의 페어플레이 정신에 감격했던 황충은 부하로서의 충성과 무장으로서의 도리 사이에서 저녁 내내 고민했고, 날이 밝자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다시 싸우러 나간다. 황충은 관우와 다시 싸우던 중에 한현이 시킨 대로 활을 쐈지만 처음 두 번은 일부러 빗맞췄고,[4] 속임수라 판단하고 방심한 관우가 달려들자 관우의 투구 장식을 노리고 화살을 날려서 명중시킨 후 돌아간다. 그제서야 관우는 황충이 어제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자신을 맞추지 않았음을 깨닫고 자신도 돌아간다.
한편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한현은 황충이 돌아오자마자 좌우의 사람들을 시켜 결박하고는 관우와 내통했느냐며 따진다. 황충은 그럴 의도는 없었다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이었고,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것은 불충이라 여겼기에 입을 열지 않는다. 황충이 가만히 있자 한현은 배신이라고 확신하고서 목을 치라고 명령했으나, 황충의 충성과 중요성을 알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말렸지만 그럴수록 한현은 더욱 대노할 뿐이었다. 한현의 서슬퍼런 명령에 겁먹은 도부수가 황충의 목을 치려고 한 순간, 위연이 나타나 그 도부수를 죽이고 황충을 일으키고는 대들보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한현이야말로 잘못됐다며 욕한다. 위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평소 황충을 흠모하고 한현을 싫어하던 백성들을 순식간에 모아 쳐들어가서 한현의 목을 베었고, 그 직후 관우에게 항복하면서 장사성도 함락된다. 하지만 황충은 이를 불편하게 여겨서 자택에서 근신했고 장사에 입성한 관우의 면회에도 응하지 않았으나, 뒤늦게 들어온 유비가 몸소 찾아와 간곡히 부탁하자 그제서야 유비군에 합류한다.
관우와 황충의 의기를 강조하는 일화지만 이것 때문에 훗날 관우가 황충을 대하는 태도에 모순이 생기기도 한다. 연의에서도 촉의 사방장군 임명 에피소드는 그대로 나오는데[5] 이때 관우가 황충과 같은 취급을 안 받겠다며 화내는 장면도 정사와 똑같기 때문이다. 분명히 장사에서는 서로를 동등한 적수로 인정하다가 나중에 오호장군에서 같은 대열에 서게 되자 정사와 똑같이 "황충 따위와 나를 세트로 묶다니!"라는 발언을 하기 때문에 현대인인 독자가 보면 어리둥절할 수 있다.
다만 이것은 '장수로서는 그 역량이나 개인의 무력 등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 외 부분에서 자신과 동급으로 놓는다는 걸 인정할 수 없다'라는 의미로 보면 딱히 문제될건 없다.한왕조는 고대 왕조이며 당연히 그 시대 사람들은 신분질서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황건적의 난 등으로 신분질서가 뒤흔들리는 시대이기는 해도 원소의 예처럼 명문가는 명문가의 혈족이라는 이유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시대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관우나 장비는 비록 신분이 미천하지만 같은 개국공신이자 군주의 의형제로서 유비군 입장에서는 최고급 귀족이다.마초의 집안도 한왕실에서 대대로 한 지방을 맡은 높은 관직생활을 해온 혈통귀족이다. 따라서 마초가 유비군에 참가해온다면 오히려 마초 쪽의 눈치를 봐야할 정도로 무게추가 마초 쪽으로 기운다.
그리고 집안을 떠나서 연의 기준 당시 관우의 명성은 전 중국에 퍼져있는 상태였고 오죽하면 그 조조조차 관우를 회유하기 위해 적토마를 시작으로 온갖 보물에 미녀까지 하사하고도 관우가 언제 떠날지 몰라 전전긍긍할 정도였으며 당대를 떠나 후대에도 신으로 모셔지며 사당까지 세워지는등 엄청난 인기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황충은 역량이나 무력 등은 본인과 동급일지 몰라도 지방관의 부하 무관이라는 미관말직에 불과하므로 형주 토착귀족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해도 자신과 같은 반열에 놓는다는 것을 관우가 고깝게 볼 이유는 충분하다. 실제 해당 일화에서 오호대장군의 자격을 논할 때 관우는 '장비는 내 아우, 조운도 오랫동안 형님과 함께 하였으니 아우와 다름없는 존재, 마초는 명문가 자제이니 나와 동격으로 취급할만 하다'고 무력이나 능력이 아닌 신분을 기준으로 삼았다. 관우가 고압적이며 권위에 매우 민감한 성질을 가진 것은 오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모멸적인 외교적 언사로 화를 자초하는 모습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인간적인 단점은 연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므로 개연성이 없는 전개가 아니다. 다만 이런 자부심에 따르는 지휘력과 무력이 그럴만한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주므로 귀족적인 영웅상으로 그게 단점으로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혹은 장사 전투 이후 일어난 사건 때문에 관우가 황충한테 삐졌다는(...) 주장도 있다. 장사를 장악한 후 관우가 황충을 찾아갔으나 황충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고, 이후 유비가 직접 방문해서야 황충이 출사한 일이 있는데 관우가 이것때문에 황충에게 불만을 가졌으리라는 추측이다. 약간 어이없는 이유 같지만 관우 입장에서는 나름 인재라고 예를 갖추어서 방문했는데 문전박대를 당했으니 자존심 높은 관우 성격상 화가 났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3.2. 한중 공방전
서촉정벌에서도 활약했고 위나라가 한중 부근 국경을 집적거리자, 7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역시 고령의 엄안과 책사 법정과 함께 원군으로서 출진한다. 제갈량은 황충에게 '그 연세에 무리하시다 돌아가십니다'라고 만류했지만 사실은 격려 차원에서의 격장지계였고[6], 황충은 장식으로 걸려 있던 묵직한 칼을 나무젓가락 돌리듯이 칼춤을 추거나 두꺼운 활을 단숨에 꺾어서 자신이 아직 정정함을 증명한다. 실제로 황충이 엄안 및 법정과 출진하자 다른 장수들이 잘못되면 어쩌냐며 걱정했지만, 제갈량은 아까와 정반대로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호언장담한다.한편 맹달을 비롯해 한중에 먼저 나가 있던 장수들도 '원군이랍시고 온 게 늙은이들이라니'라며 그들은 물론 명령을 내린 제갈량까지 비웃는 기색이 만연했다. 이에 황충은 엄안에게 '늙은이의 진면목을 보여주자'라며 나서서 장합을 상대로 어느 정도 선전했으나, (연의에서만) 한현의 동생이었던 한호[7]가 형의 원수를 갚겠다며 하후상과 함께 원군으로 참전하자 패주를 반복한다. 당연히 맹달 일행은 영감들이 노망 들었다고 비웃고 유비도 걱정했지만, 제갈량은 황충이 교병계[8]를 쓰는 것이라며 알려주면서도 만약을 위해 유봉을 보내자는 유비의 제안에 응한다.
이에 유봉이 원군으로 도착했지만 황충은 제갈량의 예상대로 다 계략이었으니 구경이나 하라고 말하고는 순식간에 적들을 물리친다. 그제서야 유봉은 제갈량의 말대로였음을 깨닫고 황충을 믿으면서도 너무 무리하면 위험하다고 만류했으나, 황충은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호랑이 새끼를 잡는다'면서 천탕산의 하후덕에게 도망간 장합 일행을 쫓아간다. 하후덕이 황충에게 제대로 당했던 장합과 달리 황충을 얕보며 한호와 함께 섣불리 공격하려 들자, 황충은 엄안과 함께 천탕산에 불을 질러 조조군을 혼란에 빠트린 후 엄안이 하후덕을 해치우자 자신도 한호를 손쉽게 베어버린다.[9]
혼자 남은 장합이 정군산의 하후연에게 도망치자, 유비와 조조 둘 다 지금이 중요한 순간임을 깨닫고 출진한다. 제갈량은 유비와 함께 황충의 공로를 치하하면서도 하후연은 장합 따위와는 수준이 다르다며 다시 한 번 격장지계를 사용하고, 황충이 염파의 일화[10]를 얘기하며 자신감을 내비치자 못 이기는 척하며 법정과 함께 출진시켰다.[11] 첫 싸움에서 자신의 부장 진식이 하후연에게 붙잡혔으나, 이내 다음 싸움에서 적장 하후상을 손쉽게 사로잡고는 진식을 구하기 위해 맞교환을 제안했다. 하후연도 조카 하후상을 구하기 위해 맞교환에 응하여 진식을 풀어줬으나, 황충은 풀어준 하후상이 조조군 진영에 도착하기 직전에 화살을 쏘아 등에 부상을 입히는 페이크를 시전한다.
열받은 하후연은 그대로 황충과 싸우려고 했으나, 촉군이 제갈량의 지시를 받고 계곡에 세워놓은 수많은 기치를 매복으로 오해하여 몸을 사렸다. 이에 황충은 하후연의 부장 두습으로부터 정군산이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봉우리를 빼앗고 법정에게 맡겨서 지리적 및 정보적 우위를 점한다. 하후연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싸우려고 하자 장합이 황충의 계책에 걸려들 뿐이라며 말렸으나, 하후연은 아군의 정보가 속속들이 노출된다며 황충에게 싸움을 건다. 하지만 산봉우리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법정은 흰 깃발을 세워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알리다가 하후연의 군대가 지치거나 풀어져서 주저앉자 빨간 깃발을 세우고, 황충은 사전에 정해둔 신호였던 붉은 깃발을 보자마자 나는 듯이 달려가 하후연을 베어버린다.
다만 아쉽게도 정사에서는 엄안과의 노익장 듀오가 등장하지 않는다.
3.3. 사망
최후마저도 이릉대전에서 관우의 원수인 반장을 공격하여 달아나게 만드는 등 용맹을 과시하며 활약하다 전장에서 멋있게 마무리지었다.관흥과 장포가 공을 세우고 오자 유비가 "나를 보호하던 충성스러운 장수들은 모두 늙어 쓸모가 없어졌지만 두 조카가 큰 공을 세우니 기쁘구나"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 발언이 황충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다. 이에 황충은 약간의 군사만 데리고 동오군을 공격하여 사적을 3합도 안 걸려 베고 반장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관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관흥과 장포의 귀환하라는 명령을 거절하고 이튿날에도 반장을 쫓다가 복병에게 포위당해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는다. 관흥&장포의 구원을 받아 돌아오긴 했으나 위독했고, 유비가 황급히 찾아와 자신의 실언에 눈물을 흘리자 '이미 천수를 충분히 누렸다, 참된 주인을 만나서 기뻤다'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둔다. 그리고 유비는 "짐이 벌써 오호대장군 중에 세 사람을 잃었거늘 그 원수를 갚지 못 했다"며 통곡하고는 계속 진군하여 원수를 갚긴 하나[12], 손권까지 죽이겠다는 집착이 화근이 되어 촉장 대다수가 전사하고 유비 자신도 무리하는 바람에 얼마 못 가 죽으면서 삼국지 독자들의 안타까움을 자극했다.
수하에게 암살당한 장비나 노환과 병으로 죽은 조운 및 마초와 비교했을 때 오호대장군 중에선 유일하게 관우와 맞먹을 정도로 장수다운 장렬한 죽음이었다. 실제로는 이릉전투가 일어나기 전에 죽었고 사인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없다. 아마 노환이었을 가능성이 제일 높을 듯하다.
4. 평가
정군산에 위치한 황충의 동상 |
황충, 조운은 굳세고 사납고 씩씩하고 용맹하여 아울러 조아(爪牙-발톱과 어금니. 임금 호위무사, 용맹한 심복 등을 뜻 함)가 되었으니 관(灌), 등(滕)의 무리로다.
진수 《정사 삼국지》
진수 《정사 삼국지》
장군(將軍, 황충)은 돈후하고 웅장하여, 적군의 선봉을 부수고 난국을 극복하였으며, 공업을 세운 당대의 재간꾼이었다.
양희 《계한보신찬》, 황한승을 찬하며(贊黃漢升)
양희 《계한보신찬》, 황한승을 찬하며(贊黃漢升)
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황충과 조운을 유비의 발톱과 어금니(爪牙)라 평하며 황충을 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었던 관영과 하후영에 비유하며 고평가를 내렸다. 촉의 신하인 양희의 계한보신찬에서도 황충은 성정이 돈후하고 웅장했으며 위기를 극복하고 공업을 쌓아 올린 인물이라 평했다.
이처럼 황충의 용맹과 무예, 그리고 무엇보다 그 높은 공적에 관해서는 당대 인물들은 물론 후세 역사가들까지 이견이 없다. 또한 사령관으로서는 그다지 검증된 바가 없는 조운과 달리 황충은 한 전선을 맡아 하후연을 참살하고 촉의 영토 확장에 누구보다 큰 활약을 펼친 명장이었다.[13] 여기다 진수가 인물에 대해 평가할 때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인품에 있어서도 전혀 비판하지 않았으며, 양희가 그의 성정을 극찬한 것을 보면 인품 또한 완성된 덕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14]
당시 편입된 장수들은 아무리 높은 공을 세워도 적정선 이상은 출세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황충은 예외적으로 본인의 군공과 인품만으로 유비 휘하 최고의 장수들이었던 관우, 장비, 마초와 동렬에 서며 천하에 위명을 크게 떨쳤다. 제갈량이 직접 '황충의 공을 직접 본 장비와 마초라면 이에 승복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니 정사에 언급된 대로 익주와 한중에서 전군의 으뜸가는 공을 세웠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상과 같이 황충은 훌륭한 인품과 더불어 항상 병사들보다 먼저 적진에 돌격하는 솔선수범함, 병졸들을 고무하며 이끄는 참된 지휘관으로서의 태도, 장수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용맹함과 과단성, 끝으로 최고의 군사적 업적까지 보유한 조운과는 다른 의미에서 비판할 요소를 찾아볼 수 없는 난세를 이끈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5. 여담
- 연의 덕분에 황충에게 2가지 이미지가 정립되었는데, 첫째는 명궁, 둘째는 노장이다. 정사에서는 활을 잘 쏘았다는 기록은 없지만 코에이사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언제나 최고의 궁술 실력을 가진 무장으로 나온다.[15] 실제로는 활보다 칼을 잘 썼던 것으로 보이는데, 연의 내에서의 묘사도 활보다 큰 칼로 적장을 해치우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가장 큰 전공인 정군산 전투에서도 하후연을 칼로 베어 죽였다.
- 노장 이미지로 인해 중국에서는 힘이 장사인 노인을 가리켜 황충이라고 하며 건강하고 정정한 노인의 상징이 되면서 늙었지만 여전히 대단한 장군 이미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황충 이전에는 기전파목의 염파나 노익장이란 고사를 탄생시킨 후한의 복파장군 마원 등이 노장 이미지로 유명하였는데, 황충의 유명도 때문에 다 묻혔을 정도. 연의에서는 황충의 나이가 220년에 75세라고 나와있어 145년에 태어난 것으로 설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황충의 정확한 출생년은 미상이다. 기록을 보면 호쾌한 맹장 느낌이 강한데, 이는 짧고 굵은 활약과도 맞물린다. 게다가 대를 잇는 것이 매우 중요했던 시대였는데도 황충은 후사는 커녕 처첩도 언급이 안된다. 늙은 장수였다면 가족 구성원이 많았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황충의 가족은 요절한 아들 황서 말고는 언급이 없고 이외 아들이나 손자, 심지어 양자조차도 언급되지 않으며 처와 첩도 마찬가지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 볼 때, 황충은 널리 알려져 있는 노익장의 이미지와는 오히려 거리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황충이 뒤늦게 자식을 얻게 된 걸 수도 있는데 "아들이 있었지만 요절하여 후사가 없다."가 기록의 전부이고 아들이 언제 죽었는지도 언급이 안 되니 젊은 시절에 얻은 아이를 잃고 다시 자식을 가지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정확한 생년 기록이 없으니 황충이 활약한 시점이 중년이었는지 노년이었는지는 확답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게다가 황충의 친척에 대한 기록이 미비하고, 귀족 가문의 경우 누군가 요절해서 대가 끊기면 가문의 조카를 양자로 들여 대를 잇게 하는게 관행이었는데 그러지도 못한걸 보면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자수성가했을 가능성이 높다.[16]
- 황충의 노장 이미지는 유비가 한중왕 즉위 이후 관우가 사방장군의 직위를 받을 때 황충과 동률에 있자 '이런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을 수는 없다!'며 분노한 데에서 기인한 것이 큰데, 이 부분에 사용된 노병이라는 단어는 정황상 '늙은 병사'라는 의미보다는 '쓸모 없는 병사'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즉 관우의 말은 황충의 나이와는 전혀 상관 없이 '이 내가 이런 놈과 비슷한 대우를 받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라는 의미일 수도 있는 것. 그래서 젊은 장수였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태사자가 건창도위에 부임한 게 202년인데 황충은 그 시기 이전에 중랑장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중랑장이면 태수급 연봉을 받는데 이 정도의 벼슬을 젊은 나이에 꿰찼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설령 황충이 중랑장을 20대에 역임했다고 해도 사망시에는 중년의 나이이기 때문에 젊은 나이는 아니다. 이러한 여러 상황들을 조합해봤을 때 부실한 기록 속에서 억지로라도 황충의 나이를 굳이 유추해보자면 200년경에 이미 중랑장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 중랑장 정도 되는 관직이면 어지간한 전공 혹은 인맥 없이는 쉬이 오를 관직은 아니라는 점을 토대로 최대한 적게 잡아 30대 초중반 전후에 중랑장으로 임관했음을 가정했을 시, 155년생 조조나 관우 정도의 또래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가 활약하던 시대상인 217년경에 적어도 50대 중후반~60대 초중반 정도는 되었으니 당시 시대상으로 노장 취급은 받았을 터.[17] 사실 중랑장을 빠르게 달았을거란 보장도 없고 오히려 늦게 달았을 가능성도 있는데다 관우가 노병이라고 언급한 것을 감안하면[18] 연의처럼 14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70살이 넘어서까지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생각 외로 오래 못살았는지의 여부 역시 황충의 출생년이 미상인만큼 확실치 않다.
- 노장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마찬가지로 노장인 엄안과 세트로 활약하기도 한다. 연의에선 이를 코믹하게 묘사하는데 이를 본 맹달이 유봉에게 '제갈량도 잠깐 머리가 돌았나 보오. 두 늙은이를 보내는 것을 보니 촉의 운명도 이제 다한 것 같소'라고 말한 것으로 서술한다. 이때 황충은 이 두 장수가 비웃은 것을 보고는 엄안에게 '늙었다고 업신여기는 듯한데 우리가 젊은이들에게 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시다'라고 하니 엄안은 '장군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라는 대화를 나눈 것으로 서술한다.
- 황충은 같은 열전에 있는 관장마황조 중에선 가장 기록이 없는 장수이다. 관우, 장비, 마초, 조운은 각각 배송지가 여러 기록을 가지고 본전에 주석을 붙여 넣었고, 특히 같이 관영, 하후영의 무리라고 평가 받은 조운의 경우엔 따로 사적을 모은 별전을 이용해서 내용이 매우 충실해졌다, 하지만 황충은 불행히도 별전류 같은 것도 없었는지 배송지가 아무런 주석을 붙여주지 못했다. 사방장군의 칭호를 받아 매우 용맹하고 무서운 장수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많은 공을 세워 조운과 함께 유비의 조아(爪牙)라 불리며 사방장군의 위치에 올랐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쉬운 부분, 익주와 한중에서의 맹활약상이 없었다면 진도 같이 열전도 만들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제 그의 나이나 활약상, 어떻게 유비군에 들어갔고 그전까지 무얼했으며 정확한 유비군 내 위치가 어땠는지 등은 상당수 추측으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는 1세대 인물들이 다 죽은 후에야 태어난 사람이라서, 가문이 아예 사라져버린 황충의 경우 조상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후손들이 없었기에[19] 진수의 시대에 이미 황충에 대해서는 수집할 수 있는 기록이 매우 적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나관중이 기록 자체가 부실한 황충을 한중 공방전의 활약과, 사방장군에 임명 된 것을 보고 본인의 상상력과 집필력으로 연의에서 '노익장', '명궁' 이라는 이미지를 붙여주어 오늘날 다른 오호대장군과 구분되는 황충만의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 준 것이 정말 대단할 정도다. 지방태수 휘하의 일개 장군으로 늙어가던 장수가 말년에 유비라는 명군을 만나 뒤늦게 비상하여 죽을 때까지 그 재능과 능력을 한껏 펼쳤다는 드라마틱한 각색은 나관중의 소설가로서 탁월한 역량을 엿볼수 있는 부분으로, 삼국지 2차 창작물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 21세기의 작가들도 노장과 명궁 캐릭터성에 견줄만한 개성을 창작해내지 못하고 있다.
- 후대도 꽤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다고 봤는지, 남북조(南北朝) 시대 송(宋)나라와 양(梁)나라 사이의 이름 난 의약학자(醫藥學者)이자 도가(道家)인 도홍경(452년 ~ 536년)이 쓴 책중에는 고금도검록이라고 하여 당대까지 전해지던 명검들에 대해 다룬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황충은 한선주(유비)가 남군을 평정할 때 칼 하나를 얻었는데 피와 같이 붉었고, 한중에서 하후연의 군대를 공격할때 하루동안 손수 벤것이 백으로 헤아려야 할 정도였다.’ 야사의 내용이긴 하지만 저 책은 삼국연의가 나오기도 한참 전에 지어진 책이기 때문에 남북조시대부터 민간에서는 대단한 용장 중 하나로 평가되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 중국 경극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작품 중 하나인 정군산(定軍山)에선 거의 진주인공 취급. 늙고 기력이 쇠해 하후연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라 말하는 제갈량에게[20] 분개하며 하후연을 베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이후 멋들어지게 하후연을 쓰러트리는 황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황충/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태평어람》에 인용된 송본에 따르면 한숙(漢叔)으로 한승은 오자라고 한다. 그러나 정사 삼국지, 계한보신찬 등 그 외 모든 사료에서는 일관되게 한승으로 기록되어 있다.[2] 시법에서 강은 '수의불굴(守義不屈=의리를 지키며 굴복하지 않음)', '치과살적(致果殺敵=용감하게 적을 죽임)'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3] 후술하겠지만 이때 반골의 상 이라고 평가받은 위연도 덤으로 합류했다.[4] 판본에 따라서는 아예 화살을 장전하지 않았기에 바람 소리만 나서 관우가 움찔하고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나온다.[5] 차이점이 있다면 여기에 은근슬쩍 조운을 밀어넣어 오호대장군으로 만들었다는 정도다.[6] 자신의 계략에 말려들도록 상대를 자극하는 것. 정사와 달리 장수들의 캐릭터성이 강화된 연의에서는 일일이 언급하지 않을 뿐이지 생각보다 매우 자주 등장한다. 성깔 좀 있는 장수들이 뭔가에 걸려드는 장면이면 거의 이 쪽이다. 대표적으로 적벽대전 도입부에서 제갈량의 도발에 걸려 분노하여 전쟁을 준비하는 손권과 주유가 있다.[7] 실존인물은 둔전제를 실시했건만 연의에서는 패전을 거듭하는 무장으로 나오는 등 괴리가 너무 심해서, 실제로는 동명이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세한 것은 한호 문서 참고.[8] 패배 등의 실책을 거듭하여 적들이 자만에 빠진 나머지 실수하게 유도하는 것. 유인 작전도 어느 의미로는 교병계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9] 한호가 형의 원수를 갚겠다고 나서자 '무딘 실력으로 입만 살았으니 네 숨이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라며 아주 걸쭉하게 디스한다.[10] 전국시대 당시 조나라의 장수. 80세가 되어서도 밥 한 말에 고기 열 근을 먹었으며, 다른 제후들은 그 용맹이 두려워 조나라를 넘보지 못했다고 한다.[11] 다만 제갈량은 역시 걱정이 됐는지 조운을 원군으로 보내되, 어디까지나 황충이 위급할 때만 도와주라고 했다.[12] 반장은 관흥에게 참살되었지만, 마충은 수하인 미방&부사인에게 암살당하고 그 미방&부사인은 다시 촉에게 항복하려고 찾아왔다가 끔살, 장비를 죽인 범강&장달마저 손권이 화해의 선물(…)로서 잡아보내는 등 원수를 갚았다기보단 떠먹여줬다는 측면이 은근히 강했다.[13] 조운은 기본적으로 군영 감독관과 수도 방위군 및 황실 친위대 지휘관, 후방 군영 담당 및 최고사령관의 최측근이자 직속 돌격대장 등으로 활약했다.[14] 진수는 같은 촉나라 1세대 대표장수들인 관우와 장비를 만인지적이라고 그 능력과 공훈을 칭찬하면서도 각각 오만한 성격, 지나치게 부하를 엄하게 대하여 화를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사실 그 성격적 결함들 때문에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했으니 당사자들도 할말 없다.[15] 참고로 라이벌 이미지가 있는 하후연 역시 삼국지 시리즈에서 궁술 쪽으로 조명받고 있다. 또한 하후연도 역사서에는 딱히 명궁이었단 언급이 없다. 지나가는 이벤트 수준인 조조군 장수들의 활쏘기 대회에서 다른 장수들이 과녁 가운데에 맞힌 것을 다시 맞혔다는 기록 정도가 전부다. 동작대 문서 참고. 역사서에 활을 잘 쐈다거나, 활로 적군의 장수를 참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는 삼국지의 장수는 여포, 태사자, 방덕, 감녕 정도다.[16] 삼국지에 수두룩한 남양군 출신이고 젊다고는 못하는 추정 나이에도 혈연, 지연, 혼맥 등으로 황충과 얽히는 다른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으니 자수성가 확률이 높다.[17] 삼국지에서 중랑장으로 임명된 인물들 중 대표적인 케이스가 황건적 토벌 당시 노식, 황보숭 등이 있다. 또한 유비 세력이 조조 밑으로 잠시 들어갔을 때 조조가 장비를 포섭하기 위해 준 벼슬이 중랑장이었는데, 이때 조조가 유비 본인에겐 무려 좌장군 벼슬을 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중랑장이란 벼슬이 꽤 무게 있는 관직임을 알 수 있다. 20대 후반에 중랑장에 오른 장료의 경우 여포가 패망할 당시 자신의 군을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한 인물이었으므로, 이 공헌도가 인정되어 높은 벼슬을 받은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저런 특별한 사연이나 인맥이 있다는 기록이 없는 황충이 자신의 전공만으로 중랑장 직위에 올랐다면, 202년 당시 절대 젊은 장수였을리는 없었을 것이다.[18] 그냥 늙은 놈, 쓸데없는 놈이라는 중의적 의미로 언급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19] 후손들이 기록한 조상의 행장 등은 조상을 공적을 부풀리기 위한 허풍과 과장을 감안하면서 비판적으로 읽을 필요는 있지만, 어릴적 개인사 같은 부분은 다른데서 구하기 힘들고 인용할 가치가 있는 1차 사료이다.[20] 물론 상술한 것처럼 황충의 무용을 더욱 이끌어내기 위한 격장지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