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2 15:44:30

미방

<colcolor=#fecd21>
麋芳
미방
최종직위 <colbgcolor=#fff,#000>남군태수(南郡太守)[1]
(麋)
(芳)
자방(子方)
생몰연도 ?년 ~ ?년
고향 서주(徐州) 동해국(東海國) 구현(朐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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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유비), 남군태수(南郡太守) }}}}}}}}}

1. 개요2. 정사 삼국지
2.1. 유비 휘하에서2.2. 동오로 배반2.3. 오나라에서
3. 삼국지연의4. 미디어 믹스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이며 미축의 동생, 미부인의 오빠로[2] 는 자방(子方).

미축과 함께 유비를 따라 각지를 전전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사서에 따르면 부사인과 함께 관우를 배신한 인물이다.

2. 정사 삼국지

2.1. 유비 휘하에서

조조가 서주를 장악했을 당시 미방은 서주의 중심지였던 팽성국의 상 자리를 받았는데, [3] 미방은 이 제안을 거부하고 형 미축과 함께 유비를 따라나섰다.[4]

유비는 입촉 직전 그를 남군 태수로 임명했다. 근거지는 가장 신뢰하는 이에게 맡긴다. 조조가 친구인 장막에게 후방을 맡겼 던 것과 비슷하다.

2.2. 동오로 배반

이후 그는 형주 공방전 당시 관우가 북벌(번성공략전)을 실시할 때까지 남군 태수로 있었다. 이 지위는 관우의 바로 아래로 실질적으로 형주를 관리하는 자리으나, 관우는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북벌시기 미방과 사인은 군수물자를 공급했으나 전력을 다하지 않자 분노한 관우가 ‘돌아가면 응당 죄를 다스릴 것’이라 하니, 미방과 사인은 모두 두려움을 품고 불안해하여 이에 손권이 은밀히 미방과 사인을 꾀자 미방과 사인은 사람을 시켜 손권을 영접했다.(정사 관우전)
그런데 정사 여몽전에는 미방과 사인 중 누가 더 문제인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여몽전 주석 오록의 기록에 따르면,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 그러다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게 되자 쇠고기와 술을 지니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라고 되어 있다. 즉 남군 태수인 미방이 군수물자를 상당부분 소실했고, 이에 관우는 그를 질책하였는데, 이에 자신의 입지를 염려한 미방이 손권과 내통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미축전에서도 미방이 관우와 같이 일을 맡아 처리했으나 두 사람은 개인적인 친분관계가 좋지 않았고 이에 두 마음을 품고는 모반하여 손권을 맞이했다고 나온다.
미방의 형 미축은 촉에서 제갈량보다도 높은 대우를 받았고 누이는 유비의 부인이었다. 그렇기에 우번도 처음엔 그의 내통을 믿지 않았고 이후에 사인이나 반준과 다르게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미방이 항복하자 미축은 스트레스로 얼마 안가 죽었다. 계한보신찬에서는 미축과 미방을 나란히 언급하면서도 미축은 자(字)를 붙여서 '미자중(子仲)'으로 존칭했지만 미방은 이름 그대로 '미방'이라고 칭했다.

유비가 다스리는 형주 영역은 남군, 무릉, 영릉이 있었는데, 형주 공방전 당시 관우군 + 항복한 우금군 이렇게 6만명분의 식량을 보급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수 있고 관우가 과하게 질책했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대게 사임하거나 타세력으로 망명하는 정도지 미방처럼 적극적으로 근거지를 넘겨다주진 않는다.[5]

호삼성은 초병이 비록 잡혀 묶였어도, 만약 미방과, 사인의 반심이 없었다면, 관우는 오히려 듣고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우번은 강릉성 접수 기념연회 중에 여몽에게 남군에서 미방 혼자만 투항했으니 안심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서황이 관우를 격파하며 몰아냈지만, 여전히 관우군은 면수를 장악하고 있었고 양양이 촉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미방의 내통이 없었다면 촉은 무난히 양양을 얻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가장 안좋은 상황으로 흘러가더라도 관우군(형주군)은 비교적 온전히 촉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2.3. 오나라에서

오나라에 항복한 이후 괜찮은 관직을 얻어 잘 산 듯하다. 그러나 항복한 인물인 만큼 평가가 썩 좋진 않았던 모양으로, 우번에게 조롱당한 기록이 있다.[6] 이후 하제와 함께 진종의 반란 토벌에 참여한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이상 어떠한 사서에서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냥저냥 살다가 조용히 죽은 것으로 보인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방 본인이 관우에게 모반을 일으키고 오나라로 귀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오나라에서 본인의 역할은 모반을 토벌하러 다니는 것이었다. 오나라에서 미방은 하제의 부장이었는데 하제가 평생 모반을 진압하러 다녔기 때문이다.

미방이 오에 와서 남긴 유일한 기록인 진종의 반란 토벌인데, 자신이 유비를 버리고 손권에게 돌아선 처지에서 손권을 버리고 위나라로 귀순한 진종을 친 것은 꽤나 재미있는 인선이었다.

다만 우번과의 일화를 보면 최소한 내통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은 있었던 모양이다.

3. 삼국지연의

정사에서의 행적과 비슷하다. 관평이나 유봉과 세트로 잡졸, 잔당 처리 담당이며, 간손미에도 못 미치는 등 비중이 적고 전공도 높지 않지만, 그래도 은근히 단역으로라도 자주 노출된다. 관우에게 처벌을 받을 때 미방이 받았을 당혹감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오에 투항할 때 상당한 구신이 투항하는 것으로 보이게끔 한 나관중의 빌드업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연의에서는 후일 유비가 극대노하여 무려 70~75만이라는 정신나간 수의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이릉대전을 일으켰을 때, 유비군의 기세가 흉흉하여 오나라가 위태위태하자 겁을 집어먹고는 역시 같은 처지였던 사인에게 자신과 함께 다시 유비에게 돌아가자고 설득하는데 촉으로 돌아가면 유비가 죽일까봐 불안해하는 사인에게 '내 여동생은 촉제의 부인이었고 아두는 내 조카니 용서해 줄 것이야.'[7]라고 말하며 같이 촉으로 돌아가지만 유비의 분노가 워낙 대단한데다 저런 걸 감안해도 용서받기에는 지은 죄가 워낙 무거웠기에[8] 유비는 이들이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그를 참수한다.

그나마 코에이 삼국지에선 무장 취급이라도 받지만 연의에선 고람유벽을 죽인 장면에서 '유일한 무장이었던 유벽이 죽자 유비는 직접 칼을 빼들고...'라고 묘사되며 무장 취급도 못 받는다. 물론 미방도 무관은 무관이었지만 백전노장 유비보다 개인 전투력이 강했던(혹은 맹장 고람과 그나마 한 판 붙어볼만하던) 인물이 전직 황건적이던 유벽 하나 뿐이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또한 재상 제의도 받고 서주에서 손꼽히는 부자집 사람이던 미방이 굳이 그렇게 강했을 이유도 없었다.

한편 장판파에서는 조조군의 공격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유비와 떨어졌다가 다시 합류하면서 조운이 조조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면서 조운이 배신했다고 일러바친다. 물론 당시에는 조운이 적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 내지는 투항행위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목격한 장수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장비 또한 조운이 투항했다고 처음에 의심한 모습을 보아도 그렇다. 정사에도 이 대목은 있으나 일러바친 사람이 미방이라는 언급은 없다.

4.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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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나라에 항복 이후 얻은 정확한 관직은 불명이다[2] 미축, 미방, 미부인 삼남매 모두 생년 기록이 없어 미축이 첫째이지만 미부인과 미방 둘 중 누가 더 연상인지는 확실하지 않다.[3] 정확하게는 군국제 체제에서 국(國)에 봉해진 왕(王)은 따로 있고, 상(相)이 행정을 책임진다. 전한 초기까지는 문자 그대로 한 나라(왕국)의 재상으로, 제후왕을 보좌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오초칠국의 난 이후로 번국의 재상을 중앙에서 임명했고, 전한 중기부터는 번왕에게 번국의 관리들을 다스리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후한대에는 그냥 태수와 동급의 지방 관료직일 뿐이었다.[4] 조조가 중히 예우할 정도의 유비 세력 내에서의 위치와, 그런 예우에도 유비를 따른 그의 충성심은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조조는 당시 유비의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수하들에게 관직을 주고 있었다.[5] 합비공방전 당시 합비에 있던 장료, 이전, 악진은 서로 굉장히 사이가 나빴지만 결국 적이 처들어오자 일단은 사적인 일을 공적인 일에 묻고 넘어갔었다. 오나라에도 감녕과 능통이라는 원수지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이 전쟁터 등 공적인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켰다는 기록은 없다[6] 싸움꾼 기질이 강했던 우번은 오나라의 여러 인물을 비판했던 기록이 많다. 미방과 비슷한 이유로 우금도 조롱당한다. 하지만 우번의 이러한 행동은 우번이 손권의 미움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우금은 촉과의 대결을 앞두고 협력하던 위의 장수였고 미방은 오 입장에선 형주를 가져다 바친 공신인데 손권의 만류에도 박대했으니, 손권 입장에선 본인의 권위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적당한 선에서 까고 손권이 미방을 감쌌으면 우번이 채찍, 손권이 당근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으나 우번은 그냥 트집 잡아서 극딜을 한 거다.[7] 그리고 여기서 언급은 안 되지만 개국공신 미축이 자신의 형이니 미축을 봐서라도 용서해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8] 이들은 군수물자도 태워먹고 병량보급도 제대로 안 했고 이들이 항복한 덕에 관우와 관평이 죽었고 형주까지 넘어가 버린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받을 수가 없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