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8-21 21:44:36

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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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충왕 현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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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연의 · 수호전 가공인물
삼남 장녀 직계 후손
관색 관은병 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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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의 장수
관평 | 關平
명 추봉 왕작
갈충왕 | 竭忠王
파일:attachment/관평_사진.png
출생 <colbgcolor=#ffffff,#1c1d1f>연도 미상
후한
(現 중국)
사망 219년 12월 (향년 미상)
후한 형주 남군 임저현
(現 후베이성 징저우시)
성씨 관(關)
이름 평(平)
자(字) 실전[1]
시호 무이후(武夷侯)[2]
무이위현후(武夷威顯侯)[3]
갈충왕(竭忠王)[4]
부황 관성대제(關聖大帝)
모후 영황후(英皇后)
형제 동생 현충왕(顯忠王)

1. 개요2. 정사 삼국지3. 삼국지연의4. 기타5. 숭배 및 신격화6. 생년 관련7. 미디어 믹스8. 관련 항목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이자 관우의 아들.

2. 정사 삼국지

딱 3번 등장한다.
  • 관우전에 주석으로 달린 촉기에 따르면 관우가 처음 출군해 번성을 포위했을 때 돼지가 그의 발을 깨무는 꿈을 꾸고는 아들 관평에게 말했다. "내가 올해 쇠약해졌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하겠구나!"
  • 관우는 10여 명의 기병과 함께 맥성에서 도주한다. 반장전과 오주전에 따르면 반장(潘璋)의 사마 마충이 장향에서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 도독 조루(趙累)를 붙잡았다.
  • 관우전에 따르면 손권은 장수를 보내 관우를 역격하였고 관우와 그의 아들 관평을 임저에서 참수하였다.

관우와 함께 행동한 것으로 보아 어느 정도 무예도 되고[5] 전장에 나설 정도의 나이는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였을 것이다. 정사에서 장자라고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관흥이 관우 사후 관우의 작위를 계승한 이후로 약관의 나이에 시중에 되었으니 아버지를 따라 종군한 관평이 관흥보다 나이가 많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청나라 시대의 지리지 강릉현지에 따르면 관평은 조운의 딸 조씨와 결혼했고 213년에 아들 관월을 낳았다. 방회가 촉에 살고 있던 관우의 후손들을 몰살했던지라 관평의 후손들이 가문을 이어왔다고 한다.[6] 다만 방회에 의해 관흥의 후손이 몰살당했다는 중국 동진의 역사가 왕은이 저술한 촉기(蜀記)라는 기록은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이와 별개로 현대 중국에 남아있는 관우의 후손들은 관평의 직계 후손으로, 이들 가운데 관우의 67대손 관충금(關忠金)은 6.25 전쟁에도 중국군(인민해방군)으로 참전했다고 하며, 중국 정부에서 이들의 족보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인정했다.

3. 삼국지연의

연의에서는 관우의 양자로 등장한다. 삼국지연의 이전의 삼국지 문화에서는 관평을 양자로 설정한 적이 전혀 없다. 양자란 설정을 넣은 데는 마찬가지로 같은 양자인 유봉과 대립시켜 관평의 충의를 더욱 눈에 띄게 하기 위해서란 설이 있다. 혹은 형주에 정착하기까지 유비의 다른 부하들은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할 정도로 고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충절의 화신이어야 할 관우가 자식을 건사하고 조조에게 항복했다는 점은 흠이자 오점이 된다고 작가가 생각했을 수도 있다. 관우의 엄연한 장자임에도 졸지에 양자가 돼 버린 능욕을 당한 연의의 피해자 중 한 명이지만, 콕 집어 양자로 만든만큼 정사보다는 자주 등장하니 어찌 보면 연의의 수혜자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천리행 당시 관우가 유비와 함께 하북을 지나다가 어느 집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일행을 묵게 해 준 이 집의 주인 관정(關定)도 관우와 같은 관(關)씨였고, 두 아들이 있었다. 장남 관녕(關寧)은 학문을 수양하는 젊은이였고, 차남 관평은 대조적으로 무예를 수양하는 젊은이였다고 한다. 관우는 이 중에 차남 평을 마음에 들어 부자의 연을 맺고 데리고 갔다고 한다. 이때까지 관우에게 아들이 없다는 것을 보아 관흥은 관도 대전 이후에 태어났으며 이릉대전 당시에 10대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7]

이후 유봉과 파트너가 되어 활약한다. 유비가 서천을 공략하자 유봉과 함께 종군했으나, 방통이 전사해 관우와 더불어 형주를 수비하고 있던 제갈량에게 원군을 요청하는 사자로 나서면서 운명이 바뀐다. 번성 공방전에서는 관우도 인정한 방덕을 상대로 맞짱을 까고도 크게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관흥은 관우가 양양을 점령하고 유비에게 승전고를 전하는 사자로 파견되면서 목숨을 건졌지만, 관평 본인은 관우와 남아 있다가 결국 둘 다 여몽이 이끄는 오군에게 잡혀 목숨을 잃게 된다.

4. 기타

  • 자(字)는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반삼국지에서는 호서(胡西)라고 나오지만 역사적 근거는 없다. 관평의 또다른 자로 알려진 정국(定國)은 2010년 방영한 중국 드라마 신삼국에서 설정된 자로 현대에 지어낸 것이다.[8] 민간 전승에서 설정된 자는 탄지(坦之)다.
  • 정사 삼국지에서 관평의 양자(養子) 여부가 언급되지 않지만 그냥 아들이라고 서술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친아들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5. 숭배 및 신격화

파일:external/www.taoistsecret.com/god16.jpg
주창, 관우, 관평
정사에서는 잠깐 나오는 인물이지만 연의와 아버지 관우 덕에 제대로 출세했다. 아버지가 신격화되자 덩달아 갈충왕(竭忠王)이라는 이름으로 신격화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영후태자(靈侯太子), 관평제군(關平帝君)으로 불리며 군신의 황태자가 되었다. 관제묘에서 주창과 함께 관우의 좌우를 시위한다.

6. 생년 관련

동진 시기에 편찬된 화양국지에서 관우와 두씨의 일화에 대해 언급하며 ‘관우의 처에게 자식이 아직 없다’고 언급하는데, 이 부분은 배송지가 주석을 정리할 때 누락하였다. 하지만 화양국지의 신빙성은 여포가 포위된 것이나 구원을 요청한 인물에 대해 잘못 적을 정도로 높지 않다. 여포가 포위되었을 당시 연도는 199년인데, 만약 이때까지 장자 관평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번성 공방전 당시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던 관평의 연령은 많아봐야 19세라는 얘기가 되니 아주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청나라 시기에 발굴된 관후조묘비에 관평의 생년이 178년으로 적혀 있으나 맞지 않다. 관우와 나이가 비슷한 유비가 161년생이니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이게 맞다면 번성 공방전 당시 41세의 나이인 데다 무려 관우의 장남인 관평에 대한 기록이 너무 없는 게 어색하다. 게다가 관평이 실제로 178년생이면 181년생인 제갈량보다도 나이가 많은 중년의 장수이다.

7.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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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8. 관련 항목



[1] 자세한 것은 후술.[2] 송휘종 숭녕(崇寧) 원년인 1102년 무이후(武夷侯)로 추봉.[3] 송휘종 선화(宣和) 5년인 1123년 '위현(威顯)'이 추시되어 무이위현후(武夷威顯侯)로 추봉.[4] 1569년, 만력제가 관평을 갈충왕(竭忠王)으로 추봉. 일설에는 정충왕(精忠王).[5] 관흥은 창작물에서 표현되는 모습과는 다르게 정사에서는 문관의 일을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6] 후베이성 궁안현(공안현) 인근에 살았다고 하는데 위진남북조 당시 북형주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7] 판본에 따라서는 유비가 관정에게 "내 아우 관우에게는 자식이 없는데, 당신의 차남을 아우의 양자로 들이고 싶소."라고 요청하자 관정이 관평을 불러 앞으로는 "관우 장군님이 네 새로운 아버님이시니 앞으로 잘 모시거라!"라고 당부하기도 한다.[8] CHING에서 방영한 자막에 한자로는 '定國'으로 나왔지만, 한글로는 '현거'라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