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황충의 생애를 다루는 문서.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삼국지의 내용을 기초로 한다.2. 유비를 따르기 전까지
형주목 유표가 그를 중랑장으로 삼고 조카 유반을 보좌하게 했다. 유반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인데, 그 이유는 유표가 영역 확장을 피하고 현상유지에 더 관심이 있었던 데 비하여, 그는 강동 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했기 때문이다. 유반을 경계한 손권은 태사자를 배치해 수비하게 했다.[1]황충은 유반 아래서 유현을 수비하다가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한 후 조조에게 비장군직을 받고 장사태수 한현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3. 유비를 따르다
적벽에서 패한 조조가 형주에서 철수하고 유비가 세력을 확장하자 그를 따랐다.황충은 유비가 입촉했을 때 종군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는 항상 부하들보다 앞장서서 적진으로 달려가 용맹을 과시했는데, 그 공이 삼군의 으뜸이라고까지 표현한 것을 보면 많은 활약을 했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선주가 대노하여 유장의 백수군독(白水軍督) 양회(楊懷)를 불러 그의 무례함을 질책하며 그를 참수했다. 이에 황충(黃忠)과 탁응(卓膺)을 시켜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향하도록 명했다. - 선주전
황충은 늘 앞장서서 적진에 침투하여 함락시켰고, 용맹하고 굳셈이 삼군(三軍)의 으뜸이었다. - 황충전
4. 한중 공방전
한중 공방전 때 황충은 법정과 협력하여 조조의 친족이자 조조군을 대표하였던 명장이자 외정사령관이던 하후연을 전사시키는 커다란 공을 세웠다.하후연의 전사 소식을 접한 조조가 친정에 나서자, 황충은 조조의 진지를 몰래 기습하여 적의 군량을 탈취하려 시도했으나, 성공 여부에 대한 언급은 기록에 없다. 부장이었던 조운이 염려했을 정도로 그의 귀환이 늦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후 무사히 귀환한 것을 볼 때 별다른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안 24년(219년), 한중(漢中) 정군산(定軍山)에서 하후연(夏侯淵)을 공격했다. 하후연의 군대는 매우 정예했으나, 황충은 적의 예봉을 꺾어 어김없이 전진하고 사졸들을 격려하여 이끌고, 징과 북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환성은 골짜기를 뒤흔드니, 한번 싸움으로 하후연을 참(斬)하고 하후연의 군대를 대패시켰다. 이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올랐다. - 황충전
건안 24년(219년) 봄, 양평에서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定軍山)에 영채를 세웠다. 하후연이 군을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선주는 황충에게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했고, 하후연과 조공이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顒) 등을 참수했다. - 선주전
하후연이 패하자 조공(曹公)이 와서 한중 땅을 다투었고 북산(北山) 아래에 군량(米)을 운반하여 수천만 포대에 달했다. 황충(黃忠)이 가히 이를 탈취할 수 있다 하였고 조운의 군대가 황충을 수행해 군량을 탈취하려 했다. 황충이 기한을 넘겨도 돌아오지 않자, 조운이 수십 기(騎)를 거느리고 가벼운 차림으로 위[2]를 나와 황충 등을 마중하며 상황을 살펴보려 했다 - 조운별전
정군산에서의 활약에 대해 과연 황충이 하후연을 직접 죽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어왔으나, "一戰斬淵"라는 표현만으로는 두 장수가 직접 무기를 주고받았다고 생각하기 부족하다. 여기서의 "斬"은 한 사람의 물리적인 공격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군사를 동원한 전투 중 하후연을 패사시켰다고 보는 쪽이 타당하다. 자세한 사항은 일기토 문서로.
한중 공방전에서의 하후연 전사 상황을 보면, 황충은 처음부터 하후연을 잡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조커였다. 먼저 유비가 하후연을 꾀어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 1만 명으로 구성된 기습 부대들에게 장합이 지키는 방향인 주마곡 쪽의 위군 진영을 공격하게 명령하여 지속적으로 장합을 압박해 하후연에게 구원 요청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하후연이 본인 직속 정예부대의 절반을 장합에게 보내주게 만들고, 이 상황을 정군산에서 지켜보던 법정이 마침내 하후연을 칠 기회가 왔다고 유비에게 진언, 이 진언을 받아들인 유비가 곧바로 이 때를 위해 따로 대기하고 있던 황충과 그가 이끄는 기습부대에게 하후연을 공격하도록 지시, 이에 황충이 하후연을 급습하여 방어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던 하후연을 그대로 전사시켰다. 하후연이 장합을 구원하지 않는다면 기습 공격으로 장합을, 장합을 구원 한다면 황충을 통해 하후연을, 적의 대장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잡는다는 법정의 치밀한 전략을 황충의 용맹으로 실현시킨 것이었다.
이 전투 후 황충이 곧바로 사정장군 중 하나인 정서장군[3]에 임명된 것만 봐도 이 때의 전공이 확실히 황충의 몫이었다고 볼 수 있다.
5. 사방장군
유비가 한중왕에 즉위한 후에는 사방장군 중 하나인 후장군에 봉해졌다.[4] 이는 전장군 관우, 우장군 장비, 그리고 좌장군 마초와 동급의 위상을 얻는다는 뜻으로써, 황충이 전국구급 무장으로 대우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 안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마초, 장비는 가절[5]을 관우는 가절월[6]을 받지만 황충은 받지 못한다.이때 제갈량은 관우는 형주에 있었기에 그가 공을 세우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으므로 자존심이 드센 그의 성격상 황충과 나란히 같은 대열의 관직 봉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 제지했지만, 유비가 직접 관우를 설득하겠다며 황충을 그대로 임명하였다. 역시나 관우는 강하게 반발하여 불편함을 드러내었으나, 비시가 고사를 인용하여 그를 설득하였고 관우는 마음을 고쳐먹고 관직을 받아들였다.
유비군 내에서 그 두 인물의 짬밥 차이가 굉장히 크게 나긴했다. 게다가 관우는 이미 오래전부터 중원에 명성이 자자하던 장수이기도 했고. 마초야 진작부터 이름 높은 군웅이었지만(그리고 그런 마초에 대해서도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누가 더 낫냐며 물었던 관우이기도하고) 황충은 오랫동안 전장을 누빈 장수였지만, 군웅 마초와 너무나도 널리 알려졌던 관우의 명성과 비교될 순 없었으니…
그러나 이는 바꿔 말하자면 관우만 제외하면 황충의 공을 직접 봤던 제갈량, 마초, 장비 등의 공신들은 편입된 장수 출신인 황충이 사방장군으로 임명되는 것에 별다른 반대를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된다. 제갈량도 형주목 관우의 반응을 우려했던 것 뿐이며, 그조차도 "(황충의 공을 직접 본)마초와 장비라면 황충이 자신들과 동렬에 서도 인정하겠지만..." 이라며 유비부터 시작해 관우를 제외한 군 상층부 인물들은 모조리 황충이 사방장군에 임명되는 것을 기꺼이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선주가 한중왕이 되자, 그는 비시를 형주로 보내 관우를 전장군으로 임명했는데, 관우는 황충이 후장군으로 임명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격분해서 말했다. "대장부는 평생 노병(老兵)과 같은 대열에 있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제수되었던 관직을 거부하였다. 비시가 말했다. "왕업을 세우는 자가 임용하는 인물에게 하나의 기준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옛날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은 전한의 고조와 어릴 적부터 친한 교분이 있었고, 진평(陳平)과 한신(韓信)은 초나라에서 도망쳐 뒤에 한나라에 도착했지만, 관직의 순서를 정하는 논의에서는 한신을 가장 높은 지위에 있게 하였고, 이 때문에 소하와 조참이 원한의 마음을 가졌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지금 한왕(漢王)은 일시적인 공로에 근거하여 한승(漢升:황충)을 높은 신분이 되게 했지만, 마음속의 평가가 어찌 군후(君候)와 동등하겠습니까! 게다가 한중왕과 당신을 비유컨대 그는 주군과 한 몸처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고 화와 복도 같이 합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생각해 보면, 관호(官號)의 높고 낮음이나 작위와 봉록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그를 마음으로써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일개의 관리로써 명령을 받아 이를 시행하는 사람이지만, 만일 당신이 임명을 받지 않아 곧 돌아가게 된다면 당신 때문에 이와 같은 거동을 애석해 할 것이며, 아마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관우는 크게 깨닫고 즉시 임명을 받았다. - 비시전 |
6. 죽음
한중에서 조위의 사령관을 참살하여 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대공을 세운 것도 잠시 황충은 한중 공방전이 끝난 후 바로 다음 해인 2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사나 별전을 통틀어도 사인에 대한 서술은 남아있지 않으며, 때문에 불과 1년 전까지 전장을 휩쓸던 맹장이 어떤 이유로 죽었는 지는 아직도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따로 병이나 전상(戰傷)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기에 나이가 많이 든 상태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느라 기력을 모두 소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만 오가는 상태. 가족에 대한 기록도 '그의 아들 황서가 일찍 죽어 후사는 없었다'라고 짧게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7]황충이 세상을 떠난 건 유비가 손오 정벌을 시작하기 일 년 전이었다. 따라서 연의에서처럼 황충은 손오 정벌에 참여한 바가 없다. 만약 황충처럼 용맹하게 일군(一軍)을 이끌 수 있는 재목이 유비를 수행했다면 이릉대전의 결과에 적잖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황충의 사망은 관우의 전사, 장비의 급작스러운 암살, 마초의 요절과 함께 유비에게 있어서는 뼈아픈 결과였다. 홀로 형주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한 관우를 제외한 나머지 넷은 익주 쪽에 있었는데 관우가 전사한 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1년 단위마다 황충, 장비, 마초 순서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들 중 누구 한 명이라도 살아있었다면 유비 혼자 이릉대전에서 전선을 감당하는 부담을 덜 수 있었을 텐데 하필 이릉대전이 벌어질 무렵에 순차적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연의에서는 오호대장군, 정사에서는 관장마황조 열전으로 묶인 촉의 마지막 1세대 장수인 조운마저 1차 북벌 이후 사망하면서 유비 세력의 1세대 네임드들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하게 된다.
사후, 그에게 내려진 시호는 강후(剛侯)이며, 이는 일생을 용맹함으로 살아온 무장에게만 내려졌던 삼국시대에서 상당히 드문 시호다.[8]
[1] 태사자는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붙박혀 있었다. 나관중은 이게 아쉬웠는지 그가 장료와 싸우다 죽는 이벤트를 만들어 주었다.[2] 圍, 군사 시설의 일종[3] 우연의 일치인지 황충이 이 전투에서 참살한 위나라의 대장, 하후연의 최종 관직도 정서장군이었다.[4] 연의에선 조운이 추가되어 오호대장군이 된다.[5] 관리를 죽일 수 있는 직책이다.[6] 가절 윗급 직책이다.[7] 대를 잇는 것이 중요했던 시대인데 손자도 없었고, 양자도 없었던 것 때문에 황충이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황서가 제갈첨과 종회처럼 늦둥이일 수도 있고, 황충이 약관의 나이에 중랑장 벼슬을 달았다고 해도 사망 기준으로 최소 20년 이상 전장을 누빈 노련한 40대 장수에 해당하기 때문에 젊은 장수라고 생각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 애초에 중랑장은 일군을 이끌고 항복한 장료나 만인지적으로 명성이 높았던 장비조차 30대 전후에 받았을 정도로 결코 낮지 않은 관직이었다. 거기다 관우도 50대 중후반의 나이에 형주 공방전에서 싸우다 전사했는데, 황충이 그보다 어리다고 보기에는 무리다.[8] 삼국시대 인물 중에선 이통, 장료, 소칙과 더불어 황충까지 단 4명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