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서(蜀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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廖化 요화 | |
작위 | 중향후(中鄕侯) |
최종직위 | 우거기장군(右車騎將軍) 겸 가절(假節) 겸 영병주자사(領幷州刺史) |
성씨 | 요(廖) |
휘 | 화(化), 순(淳) |
자 | 원검(元儉) |
생몰기간 | ?년[1] ~ 264년 |
고향 | 형주(荊州) 양양군(襄陽郡) 중로현(中盧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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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촉한의 장수다. 본래 이름은 요순(廖淳)이며[2], 자는 원검(元儉)이다. 형주 양양군 중로현 사람.삼국지 내에서 장수한 걸로 유명한 인물로 촉한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지켜본 인물이다. 사실 내민, 여대, 사마부 등도 장수하였고 동시에 100세 가까이 생존한 게 사서에서 확인되는 장천같은 인물들도 있지만, 인지도가 낮아서 으레 요화가 장수의 대명사로 꼽히곤 한다.
2. 정사 삼국지
양양기구기에 따르면 집안은 면수 남쪽에서 대대로 고관을 지낸 가문이었고 대충 한중 공방전 직후 즈음 촉에 임관했다. 이후 형주에서 전장군 관우 휘하로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는데 형주가 함락될 때 오에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병으로 죽었다는 소문을 가장하여 감시의 시선을 피했으며 노모를 모시고 밤낮으로 달려 오를 탈출해 때마침 오를 치기 위해 자귀로 나온 유비군에 합류했다. 유비는 매우 기뻐하며 요화를 의도태수로 삼았다.[3]이릉대전에서 촉 2세대 무장들이 떼죽음 당하는 와중에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유비 사후에는 제갈량의 참군(승상 참군)이 되었고 후에 독광무(督廣武)에 임명되었다. 점차 관직이 올라 우거기장군 가절, 영 병주자사에 이르고 중향후(中鄕侯)에 봉해졌다. 과단성있고 강직하다고 칭해져 관위(官位)가 장익과 나란히 하고 종예보다 앞섰다.
제갈량 사후 음평태수 등을 역임했다. 238년 9월, 음평에서 옹주자사 곽회가 보낸 광위태수 왕윤(王贇), 남안태수 유혁(遊奕)의 장병을 격파하고 둘을 죽였다. 이때 곽회는 '왕윤, 유혁 등이 분병하여 산의 동서를 둘러쌌고, 포위하여 적의 외면을 함락시켰으니, 격파하는 건 아침 아니면 저녁의 일입니다.'라고 자신했지만 조예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는데 결국 조예의 예상대로 되었다.
연희 12년(249)에 강유에게 부절을 주어 또 서평으로 출정했는데 이 일 있기 바로 전에 곽회 및 하후패와 조수에서 싸우고 이민족 수장 치무대의 항복을 받았다. 강유는 위에 패배해 달아난 강인들을 거둬들이고 요화에게 석정산에 성을 쌓아 적과 대치하게 했는데 곽회는 숫적 우세[4]를 이용해 하후패를 보내 강유를 추격하게 하고 자신은 요화를 공격하니 강유는 별수 없이 달려와 요화를 구원하고 퇴각한다. 이때도 음평태수였던 것으로 보아 꽤 오래 봉직하고 있던듯하다.
249년에 등애는 곽회와 함께 촉의 편장군 강유를 막아냈다. 강유가 퇴각하자, 곽회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서쪽으로 강인을 공격하려는데 등애가 말했다. "적군은 아직 멀리까지 가지 못했으므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응당 병사들을 나누어 의외의 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등애의 예상대로 3일 만에 돌아온 강유는 요화에게 백수 남쪽에 진을 세우고 등애를 견제하게 하고 본인은 북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강유군의 진로를 예측한 등애가 미리 요지를 선점하고 지키는 바람에 퇴각해야 했다.
후반기에 갈 수록 강유의 북벌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다. 그 전까지는 강유의 북벌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한진춘추에 이르길 경요 5년(262)에 강유가 군을 이끌고 적도(狄道)로 출병하자 요화가 말했다,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태운다고 하더니 백약(伯約-강유의 자)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지모가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용병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스스로를 보존하리? 시경에서 말하는 ‘不自我先, 不自我後’[5]라는 것이 바로 지금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로다” 하지만 그럼에도 강유의 북벌에 계속 보조를 맞추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강유의 북벌 초중반기엔 꽤 나쁘지 않은 견해를 가졌었지만,[6] 후반기에 가서는 출병해봤자 별 소득도 못 건지고 패주만 하지만 그럼에도 북벌을 해야 한다고 출병을 강요하던 강유에게 질린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강유와 계속 합을 맞춘 것은 기본적으로 당시 무장 중에선 요화가 강유와 가장 합을 많이 맞춰 보았기 때문에 강유 입장에서는 요화가 그런 의견을 내든 말든 일단 데려가야 할 1순위 무장인 것은 변함이 없었고, 요화 입장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위치면서도 강유의 북벌에 더욱 회의적이었던 장익도 끌고 가는 판에 자신은 무조건 강유가 끌고 갈 것이 뻔하니 어차피 같이 가게 될 거 푸념이나 하고 가겠다는 심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263년엔 강유가 요화에게 음평교두를 맡겨야 한다고 유선에게 표를 올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검각에서 강유, 장익, 동궐과 함께 종회의 위군을 방어하였다.
264년 봄, 촉한 멸망 후 종예와 함께 낙양으로 옮겨지던 중 길에서 병사했다.
최후에는 우거기장군, 영병주자사, 중향후에까지 이르렀다. 분명 촉한 군부의 중신이었지만 기록이 미미한 촉한 인물답게 열전을 남기지 못했고 종예전의 말미에 더부살이로 약간의 기록만이 남아있고 그외 곽회전, 강유전 등에 기록이 조금식 남아 있어 삼국지연의로 얻은 인지도에 비해 알려진 정사의 내용은 매우 부족하다.
3. 삼국지연의
떠돌아 다니다 두원과 함께 동료 500명을 규합한 도적단의 소년 우두머리로 나온다. 때마침 관우와 함께 하북으로 가던 유비의 두 부인[7]을 확보하게 된다.[8] 유비의 아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요화는 무사히 돌려보내기로 결심했지만 두원은 여자를 가지자고 제안한다. 이에 요화는 두원을 죽이고 두원의 목을 바치며 관우의 휘하에 들어가기를 청했으나, 미부인과 감부인에게 거절당한다. 이유인 즉 황건적 잔당을 끌고 다니면 유비의 이름이 더러워지기 때문이라고. 비슷한 이유로 나중에 만나는 배원소와 주창 역시 합류할 수 없었지만 주창은 간절하게 부탁한 덕택에 합류할 수 있었다.대대로 고관을 지낸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연의에서는 황건적으로 등장하게 된 이유를 기록들이 베껴지고 옮겨지는 과정에서, 冠族(관족)을 寇族(구족=도적집안)으로 오기가 되며 와전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틀리게 베껴쓴 사람은 '대대로 도적질을 해먹던 가문 출신'을 도대체 무슨 가문이라고 생각한 걸까(...)
유비가 입촉하러 형주를 떠나자 유비 휘하에 들어가 나름대로 활약하게 된다. 소위 1류 장수들에게는 못 미치나 상당한 무용과 지략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여 약방 감초처럼 크고 작은 작전에 시크릿 캐릭터처럼 들어간다.
손오의 공격으로 형주가 함락되자 맥성에 있는 관우의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오군의 포위망을 필사적으로 돌파한 뒤 상용의 맹달, 유봉에게 가서 눈물로 호소했으나 맹달이 고심하는 유봉에게 관우는 네가 양아들이 되는걸 거부했는데 네가 관우를 숙부라고 생각하여 도와준다고해도 관우가 너를 조카라고 인정할까?라며 유봉을 꼬드겼고 끝내 관우의 원군요청을 거부한다. 결국엔 성도까지 가서 원군을 요청하지만 이미 맥성은 함락되고 관우는 죽고 만다. 이 후 유비가 관우의 복수전을 시작하려 할 때 "먼저 유봉과 맹달부터 죽이고 가십시오"라고 바람을 넣는 씬도 있다. 이 일로 유비는 유봉을 미워하게 되고 결국 죄를 묻고 참수한다. 맹달은 반대로 위에 귀순하지만, 나중에 사마의의 행보가 두려워 촉으로 귀순하려고 밀서를 했으나 촉에서 같이 귀순했던 신탐, 신의 형제에게 오히려 배반을 당하여 참수당한다.
연의 한정으로는 사마의를 추격해 죽이기 직전까지 가기도 한다. 요화가 추격하고 있는데 사마의가 자신의 황금 투구를 던져놓고 반대쪽으로 도망갔다. 요화는 투구가 떨어진 쪽으로 쫓아갔지만 놓친다. 이후 제갈량이 요화를 1등 공신으로 삼자 위연이 불만을 표시했지만 제갈량은 무시했다.[9] 제갈량 사후 강유의 북벌 과정에서도 종종 등장하는데, 강유의 무모한 북벌을 말리는 역할로 종종 나오며 꽤 띄워주는 편이다.
정사에서는 촉이 망한 뒤 낙양으로 이동하다 중간에 병으로 죽었는데, 연의에서는 촉한이 패망하자 성도에 남아 있다가 분사한 것으로 나온다. 연의에선 삼국지의 처음과 끝을 계속 지켜본 사나이. 사실 삼국의 통일은 280년에야 완료되었기 때문에 삼국시대의 끝을 봤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자신이 섬기는 촉한의 멸망은 지켜봤다.[10]
촉한무대장, 요화작선봉 [11] |
이름없는 장수였으나 북벌 때부터 점점 성장해가더니 제갈량 사후에는 강유와 힘을 합쳐 30여년간 위에 대적하게 된다. 솔직히 성장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요화 말고는 써먹을만한 인간이 없어서 그렇다는 인상이 강하지만... 그로 인해 중국 속담에는 촉한에 대장이 없으면 요화가 선봉에 선다[12]라는 말이 있다. 이를 본다면 노익장의 별명은 응당 황충이 아니라 요화에게 주어져야 한다.
4. 평가
현대에서 요화의 평가는 흔히 말해 계륵에 가까운데, 이는 전적으로 삼국지연의를 필두로 한 2차 창작물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사실 삼국지연의만 놓고 보면 요화는 계륵이라고 평가받기에 딱 좋다. 등장 자체는 무려 관우의 오관육참 시기, 그러니까 얼추 200년 즈음부터 빠르게 등장하는데 관직은 정사를 따라가서 249년에도 태수직이나[13] 맡고 있었고 260년이 다 돼서야 거기장군까지 올라간다. 삼국지연의만 놓고 보면 등장해서 50년 가까이 태수 직에 연연하다가 60년이 지나서야 알아주는 직책이 된 것이다. 오호대장군으로 대표되는 1세대에 비해 크게 떨어진 당시 촉한 말기의 네임밸류를 생각하면 '아, 요화는 크게 뛰어나진 않아도 충성심이 높고 오래 살아서 저기까지 올라갔구나.' 라고 평가받기 딱 좋은 상황인 것이다.그러나 실제로는 오호대장군이나 위연, 왕평 등의 촉한이 자랑하는 화려한 라인업의 장군들까진 아니어도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충성심 깊은 장수였다고 봐야 한다. 우선 임관 자체가 한중공방전 직후라고 하니 얼추 219년 즈음, 그리고 형주를 빼앗길 당시 탈출하여 오를 공격하려던 유비에게 합류해 의도태수 직을 맡았다 하니 이때가 얼추 220~221년 즈음일 것이다. 즉 촉에 임관해 1~2년만에 태수직을 맡았으니 그 사람 보는 눈이 예리했던 유비가 요화에게 거는 기대는 꽤 컸다고 보아야 한다.
이후 249년까진 음평태수로 전전하는 것은 같지만, 촉한이 멸망할 263년 당시에는 우거기장군이었다. 비록 장익과 관직을 양분했다고는 하나, 삼국지 시대에 무관 서열 3위인 직위이다.[14] 그냥 단순히 음평에서 세금 잘 걷고 백성들 잘 다스렸다고 줄 일은 절대 없을 관직이니, 애초에 요화가 음평태수 겸 장군의 직을 동시에 맡고 있었고 크고 작은 활약들이 반복되었다고 보아야 한다.[15] 강유를 몇 번이고 엿먹인 그 곽회의 예상을 깨부수고 곽회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은 전적도 있는 만큼, 능력은 확실히 어느정도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대중에게 알려진 여러 촉한의 장수들에 비하면 굵직한 활약이 없었으니 그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충성심 또한 상당히 깊었는데, 관우가 패주하고 형주를 빼앗길 당시 낮은 직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오에 투항하지 않고 죽을 각오를 한 채 촉에 돌아와 촉이 멸망할 때까지 촉과 운명을 함께 한 것도 좋게 평가받을 만하다고 볼 수 있다.
5. 나이 논란
정사만 따지면 나이 관련해서 그렇게 심하게 논란이 생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런데 삼국지연의에서 도적단의 우두머리로 나오고 하필 노란두건을 한데다 관우가 요화를 황건적의 잔당으로 지레짐작하면서 나이 논란이 시작되었다.황건적의 난이 184년에 있었고, 적어도 그 때 20세 쯤이라고 가정해도 100살 가까이 살았단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화라는 동명이인이 두 명 있었다는 일명 '요화 분신설'까지 제기되었다. 연의에서 관우와 엮다 보니 산적이 되었고 하필 복색 때문에 황건적 잔당으로 오인당하면서 본의 아니게 장수하게 된 것이다.
사실 연의를 기준으로 잡아도 동명이인설이 나올 이유까진 없었다. "황건의 잔당"이라는 말도 여러 각도로 해석해 볼 수 있기 때문. 황건적의 잔당들과 어울리다 보니 그들의 무리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뿐, 황건란 당시부터 황건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고, 황건란 당시엔 어린 아이였으나 황건적 잔당 무리 속에서 성장한 후 관우와 만났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연의에서 도적으로 등장하게 된 경위로 배주의 관족冠族(=고관)이라는 부분을 구족寇族(=도적)으로 잘못 알아봐서 황건적 출신이 된 것이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더구나 연의 본문에서 요화가 황건적이라는 말은 전혀 없다. 요화는 그저 자체적으로 무리를 모아 일어난 독자적인 도적이었을 뿐이며[16] 단지 노란 두건 차림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관우가 요화를 황건적의 잔당으로 지레짐작하고 나중에 진짜 장각 휘하의 무장이었던 배원소, 주창이 등장하면서 이들과 혼동을 한 이들이 요화를 배원소, 주창처럼 장각 시절부터 활동한 황건적으로 오인해 오해를 키운 것이다.
그리고 연의에서 요화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소년이라고 했는데 오관육참 당시 요화를 10대의 나이로 보면 요화는 264년에 80세를 전후한 나이로 사망했다는 계산이 나오니 딱 정사에 나오는 요화의 나이와 일치해 전혀 논란이 생길 일이 없다. 그저 요화가 90세가 넘도록 장수했다거나 요화가 두 사람이었다는 설은 연의 본문조차 제대로 살피지 않은 이들에 의해 생긴 낭설일 뿐.
물론 정사만 따져도 요화가 당대 기준으로 충분히 장수한 것은 사실이다. 촉서 종예전을 보면 258년 종예가 요화에게 "우리들의 나이가 이미 70을 넘었는데…(후략)…"고 말했는데, 적게 잡아 189년생이라고 쳐도 76살은 산 셈이고 잘하면 제갈량보다 연상일지도 모른다. 90을 훌쩍 넘기며 장수한 사섭이나 여대, 사마부, 내민만큼은 아니라고는 해도 그 시대에 80세 가까이(혹은 그 이상) 살았다면 꽤나 오래 산 셈이다.
6. 요화와 주창의 관계설
주창과 초반 행적이 거의 같으며 관우 아래에서 성장했다는 점, 그리고 주창이 연의 한정의 가공인물이라는 점 때문에 요화가 주창의 모델이라는 나그네의 가설도 있다.하지만 이는 근거가 없는 주장이며, 실제 기록을 참조하면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요화는 정사 삼국지에서는 형주의 호족 집안 출신의 자제로 기록되어 있으며, 나름대로 지방 명문가 출신으로 무난하게 관리 생활을 하다가 관우의 죽음과 오나라의 형주 점령 이후 노모를 모시고 유비군에 귀순하면서 유비를 감동시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다. 이는 삼국지연의에서 '황건적으로 나왔다가 관우에게 감회되어 동료가 되는 줄거리'와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요화의 기록이 '황건적에서 관우의 부하가 되는' 주창 이야기의 원형이 되었다고 볼 수 없다. 요화는 실존인물이지만 연의 속 행적의 대부분, 특히 초반의 행적은 삼국지연의의 창작이다.
주창의 경우도 '원형'이 요화와는 무관하다. 주창의 창작 시기는 상당히 오래되어서, 삼국지연의 이전의 작품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작품의 주창은 삼국지연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화관색전의 주창은 서천의 장수로 등장한다. 즉, 주창의 모습 역시 대부분 연의 저자의 창작에 기반한 것이다. 오히려 본래 주창은 '신장 관우'의 보좌역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그 역시 '신장'에 가까운 풍모를 보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는 도적&일반장수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따라서 요화가 주창의 모델이라는 설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그네는 요화가 실존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실제 정사 삼국지는 참조하지 않고 황건적에서 귀순했다는 부분까지 정사에 있다고 착각해서 이런 주장을 펼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요화와 주창의 이야기가 삼국지연의에서 비슷한 것은 그저 우연일 뿐이다. 그저 연의에서 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에 만나는 장면이 비슷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또한 당시 기록을 보면 도적으로 살다가 일약 등용되어 출세한 인물이 적지 않으므로 이게 별로 특별한 묘사도 아니다.
7. 미디어 믹스
자세한 내용은 요화/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 밑에 나오는 종예의 말에서 유추해 보면 최소 189년생이다.[2] 위서 명제기에서는 잘못써서 요돈(廖惇)이라 적혀있다. 돈형이 두 명이 될 뻔 했다[3] 육손전에서는 보광, 조융, 부융 등과 함께 각각 별독(別督)으로 임명되었다고 나온다. 요기서는 초명인 요순(廖淳)으로 기재한다.[4] 비의 시대엔 강유에게 북벌병력을 1만 밖에 주질 않았다.[5] 시경의 원본은 父母生我 胡俾我癒 不自我先 不自我後으로, 해석하면 "부모님은 왜 (하필 이 시국에) 나를 낳아 괴롭게 하시는가, 더 일찍 낳거나 더 늦게 낳거나 하시지."라는 셀프 탈룰라다. 쉽게 말하면 "왜 하필 이런 때에 이런 놈이 나와서"라는 꽤 강도 높은 비판을 한 것.[6] 실제로 강유의 북벌은 초중반기엔 그다지 평가가 나쁘지 않았다. 적도와 도수에서의 대승의 기록도 있고, 단곡 전투에서의 패배로 원망을 듣긴 했으나 호제(삼국지)라는 변명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7] 미부인과 감부인[8] 이때 관우는 조조의 작별인사, 그리고 오관육참장 때문에 뒤처져 있던 상태였다.[9] 2차 창작에서는 제갈량이 요화가 아니라 관우나 조운 같은 장수였으면 사마의의 수작을 알아채서 잡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촉한의 인재 부족을 한탄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10] 정사에서 삼국지의 시작부터 위나라의 멸망 및 서진의 건국까지 지켜본 인물은 사마의의 아우 사마부다. 이 사람은 후한 영제 시절에 태어나 사마염의 서진 건국까지 지켜보고 272년 사망했다. 삼국지의 시작부터 오나라 멸망까지 지켜본 인물은 적게 잡아도 100세까지는 살아야 하기에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보통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시기부터 시작하고 촉한이 멸망한 뒤는 정말 이야기가 순식간에 전개돼서 진의 통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분량상으로는 후반까지 본 것이 맞다. 실제 역사적으로는 삼국시대의 시작을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 받아 조위를 건국할 때부터로 하므로 일반인이 인식하는 삼국시대와 사학자가 인식하는 삼국시대는 판이하게 다르다. 후한 말의 혼란기를 일반인은 삼국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것.[11] '촉한에 대장이 없으면, 요화가 선봉에 선다'는 뜻이다.[12] 촉에는 하도 인물이 없어서 요화 같은 평범한 장수가 선봉에 선다는 뜻으로 '호랑이 없는 굴에는 여우가 왕', 꿩 대신 닭과 비슷한 문맥이다. 연의에서도 제갈량 생전에 사마의가 투구를 버리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자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하고 투구가 버려진 방향으로 추격하면서 용맹하지만 아직 미숙한 이미지로 그려졌다.[13] 물론 태수같은 관직이라 한들 위연처럼 독한중 등 지역의 중요성에 따라 위상이 확 올라가긴 하지만 요화는 그냥 최전방 지역 중 하나인 음평태수였다. 애초에 위연은 빠르게 사진장군까지 올라간 케이스라 요화와 비교할 수가 없다.[14] 심지어 이 당시 대장군인 강유는 신변의 위협 탓에 답중에서 사실상의 운둔 상태였고, 표기장군은 없었다. 이 말인 즉슨 촉한에서 외정 방면 실질적인 최고는 요화와 장익이었다는 뜻이 된다.[15] 혹은 강유의 북벌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만큼 중앙에서 강유의 견제를 위해 올렸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무려 대장군이자 외정에선 건드릴 자가 없던 강유의 직접적인 견제책으로 요화를 선택한 것이니 요화에 대한 평가가 절하될 일은 없다.[16] 두원과 콤비로 나왔는데 하필이면 배원소와 주창이 또 콤비로 나와서 헷갈리기 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