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1:23:23

이해조

신소설 3대 작가
이인직 이해조 최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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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날개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태평천하, 염상섭삼대가 있다.[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중일전쟁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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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설 3대 작가
이해조
李海朝
파일:201102161590.jpg
본관 전주(全州)
이름 해조(海朝)
열재(悅齋) / 이열재(怡悅齋) / 동농(東濃)
필명 선음자(善飮子) / 하관생(遐觀生) / 석춘자(惜春子) / 신안생(神眼生) / 해관자(解觀子) / 우산거사(牛山居士)
생부 이철용
생모 청풍 김씨(淸風 金氏)
자녀 3남 1녀
생몰
기간
출생 1869년 4월 8일 (음력 2월 27일)
사망 1927년 6월 10일 (음력 5월 11일)
(향년 58세)
1. 개요2. 생애
2.1. 초반2.2. 관직 생활2.3. 교육 및 애국계몽운동2.4. 언론 활동과 작품 활동2.5. 번역, 개작 활동
3. 사망4. 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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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대한제국 ~ 일제 강점기작가, 언론인, 교육인이다. 한국 신소설의 시초가 되는 작가들 중 한 명이다.

2. 생애

2.1. 초반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 121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철용(李哲鎔)은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6남이자 인평대군 동생 용성대군의 양자인 복평군의 8대 종손이었으며 어머니는 청풍 김씨였다.[1] 이해조가 출생할 당시 임금이었던 고종과는 본가가 같은 먼 친척이었고[2][3] 고종시대 초기에 시행했던 종친우대 정책과 맞물려 할아버지 이재만이 흥선대원군의 측근으로 활동하면서 한동안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다.[4][5][6]

그러나 1881년(고종 18년)에 이재선 왕위 옹립 시도가 일어나 그나마 남아있던 흥선대원군파들이 역적으로 몰렸고 이재만 역시 억울하게 엮여 2년 뒤인 1883년(고종 20년)에 처형당했다. 이후 집안이 몰락하여 어린 시절을 힘들게 보냈다.

2.2. 관직 생활

아버지 이철용과 친했던 김홍집과 이해조 집안과는 사돈관계였던 김윤식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한학(漢學)을 공부했다. 이를 바탕으로 19세 때인 1887년(고종 24년)에 초시[7]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25 ~ 26세 무렵에는 한시를 즐기던 유학자들의 모임인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를 주관했으나 관직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 1901년(광무 5년)에는 양지아문[8]의 양무위원으로 임명받았고 그 무렵부터 신학문을 본격적으로 배울 기회를 얻었다.[9]

1903년(광무 7년) 1월에는 중추원 의관[10]으로 임용받았다. 단, 이 때의 임용은 사실상 지금으로 치면 명예퇴직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의관이 된 지 불과 2일만에(...) 다른 의관들과 함께 면직당했다.[11]

길지는 않았지만 관직 경험을 통해 이해조는 지금까지 공부해온 한학 지식이 격변하는 현실 속에서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을 느꼈고, 퇴직 이후 근대 교육 활동 및 계몽 운동을 시작한다.[12]

2.3. 교육 및 애국계몽운동

면직당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이해동이 다니던 '낙연의숙(洛淵義塾)'의 교원으로 취직했다.[13] 1905년(광무 9년) 10월에는 각 소학교가 교원의 월급을 줄 수 없어 후원회를 열어 보조금을 모집할 때 당시로서는 제법 많은 돈이었던 4원의 보조금을 모금했으며[14] 1906년(광무 10년) 2월에는 아버지 이철용이 설립한 포천의 '신야의숙(莘野義塾)'에서 간사원, 의숙감으로 근무했는데[15] 이 때 부족한 학교 운영비를 메꾸기 위해 근처 향교의 땅을 몰수해 비용으로 쓰도록 학부[16]에 건의했다가 유림들의 심한 반발을 일으키기도 했다.

1907년(광무 11년)에는 황족 영선군 이준용이 세우고 역시 황족인 이기용이 명목상 주인이던 '돈명의숙(敦明義塾)'의 숙감(塾監)으로 재직했다.[17] 주인 이기용은 당시 20세에 불과하고 숙장(교장)은 명예직에 가까워 실질적인 학교 운영은 이해조가 담당했다. 하지만 돈명의숙의 경영진들이던 황족들이 제대로 지원을 해주지 못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문제는 역시 돈이다. 같은 해에 양기탁주시경 등과 함께 '광무사(光武社)'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다.

1908년(융희 2년)에는 애국계몽단체 중 하나인 대한협회(大韓協會) 교육부 사무장, 실업부 평의원 직을 맡았다. 그해 말부터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의 일원으로 월보(月報) 편집위원을 했고, 1909년(융희 3년)에는 기호흥학회 소속 기호학교의 겸임교감까지 맡았다.[18]

2.4. 언론 활동과 작품 활동

1905년(광무 9년) 7월 무렵부터 개신교를 믿었고 지금의 연지동에 있던 연동예배당(蓮洞禮拜堂)에 출석했다. 그리고 이 교회의 담임목사인 미국인 제임스 게일의 집에서 창립한 단체인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에 가입했는데, 이 국민교육회 회원이자 연동예배당 교인 중 한 명인 양재건이 바로 한국 최초의 소년 잡지인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의 사장이어서 이 인연으로 《소년한반도》의 찬술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잡지는 사실상 '근대 학문 총괄서'일 정도로 많은 근대 학문 내용이 들어있었는데 다른 찬술원, 직원들에 비해 근대 교육을 받은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이해조가 그런 내용을 다룰 수는 없었기에(...) 그나마 자신있던 한학 실력을 바탕으로 한문 소설 《잠상태(岑上苔)》를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

《소년한반도》가 폐간한 이후 《황성신문》, 《제국신문》에 취직했고 이인직 대신에 1907년(광무 11년) 6월 5일부터 《제국신문》에 소설 《고목화(枯木花)》를 연재하는 것을 시작으로 1910년 《매일신보》에 입사한 뒤에는 《화세계》, 《화의 혈》, 《옥중화》 등 여러 작품을 연재하면서 신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파일:ja-u-jong.gif
<colbgcolor=#2d7666> 《자유종》
소설들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1910년 작 《자유종(自由鐘)》이다. 기존의 봉건제도에 비판을 가한 사회적 개혁의식을 나타낸 소설이다. 한 부인의 생일잔치에 소개받은 다른 부인들이 모여 서로 돌아가면서 사회적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는 내용으로, 특히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 신교육의 고취, 사회풍속의 개량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기에 신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짙은 진보적 관점이 두드러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형식은 토론소설이며 처음과 끝의 몇 문장을 제외하고 전부 등장인물들의 대화로만 채워져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도 가정 내 처첩 갈등을 다루는 《빈상설(鬢上雪)》, 한 여성의 계모와의 갈등과 유모 아들과의 사랑을 다룬 《춘외춘(春外春)》, 그리고 미신타파를 내세운 《구마검(驅魔劍)》, 일반적인 이성간의 만남과 이별을 소재로 한 《화세계(花世界)》, 한국 추리소설의 시초 격[20] 《쌍옥적(雙玉笛)》과 《구의산(九疑山)》,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을 소재로 하여 춘향전을 모티브로 한 《화의혈(花의血)》, 선대에 원한을 가진 두 집안이 자식들의 기지로 그 원한을 푸는 과정을 그린 《원앙도(鴛鴦圖)》 및 전통적인 가정, 사회 문제인 고부 갈등을 소재로 한 《봉선화(鳳仙花)》 등 약 4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해 신소설 작가 중 가장 많은 소설을 써 신소설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해조의 작품 목록을 볼 수 있는 사이트.

이해조 소설들의 공통점들은 구어체의 특징과 인물 · 성격의 사실적 묘사, 그리고 기자 생활에서 오는 보고체 문장 의식 등이 두드러진다는 점과 새로운 근대적 의식과 계몽성을 담고 있지만 고대소설의 전통적인 구조를 기본바탕으로 엮어나갔다는 점이다. 비록 당시 사회 현실을 아주 절실하게 부각시키지 못한 단점은 있으나, 그래도 최대한 사회의 부조리를 반영하고 문제 의식을 제기하려 했으며, 개화기라는 역사적 상황을 개인적인 체험 세계 안에서 비교적 포괄적으로 형상화시켰다. 또한 소설의 사회계몽이라는 도덕적 기능과 오락적 기능에 대한 동시적 인식 등 최초의 근대적인 문학관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다.[21]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정치소설적 형태로부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해조는 이인직과 최찬식의 중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택한 이와 같은 창작 태도는 사람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다.[22]

문학평론가이자 문학사가인 인하대학교 인문학부 최원식 교수는 이인직이 아닌, 이해조야말로 '신소설의 아버지'로 불려야한다고 주장했다. 한 때 신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로 이인직이 잘 알려져 있었으나 그의 친일 논란 및 문학적 업적의 우위 등을 토대로 이해조를 재평가해야한다고 한 것. 최원식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이인직은 이완용의 비서와 같은 경력에서나 작품 경향에서나 “친일 사이비 계몽주의”를 대표한 반면, 이해조는 “중세적 구소설을 국민주의에 입각한 새로운 소설로 개량하는 고투 속에 우리 소설의 리얼리즘 발전도상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 것'이니 문학적 업적에서도 이해조가 이인직보다 공이 많다는 것이다. 관련 기사.

2.5. 번역, 개작 활동

그 밖에도 국내 최초로 쥘 베른의 《철세계(鐵世界)》 및 《화성돈전(華盛頓傳)》[23], 《누구의 죄》 등을 번역하여 소개했고, 《춘향전》 · 《심청전》 · 《흥부전》 · 《별주부전》 등의 판소리계 소설을 각각 《옥중화(獄中花)》[24] · 《강상련(江上蓮)》 · 《연(燕)의 각(脚)》[25] · 《토(兎)의 간(肝)》[26] 등 현대적 감각을 지닌 작품으로 고쳐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고전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이해조의 공로이다.[27]

3. 사망

1927년 6월 10일[28] 포천 자택에서 향년 5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사창동에 있는 7대 조부인 낙춘군 이전의 묘 동쪽에 있다. 훗날 시인 고은이 그의 비문을 지었다. 관련 포스팅.

2005년 ‘동농 이해조 선생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이해조를 다루는 세미나 및 특별 강연회 등의 사업을 벌였으며 2017년부터는 '이해조소설문학상'을 제정하여 유망있는 작가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관련 기사

4. 가족과 후손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3남 이갑주는 1980년대에도 생존해 있었고, 딸 이규숙은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갔다.관련 기사.

장남 이학주의 아들이자 이해조의 손자가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역임한 이우경인데 6.25 전쟁 때 납북당해 광산에서 노역을 하다 사망했다.

이우경의 동생이자 이해조의 손녀가 한국 기독교 여성운동의 대모 이우정 전 국회의원이다.
[1] 단, 복평군이 용성대군의 양자로 입적된 것은 이해조가 3살 되던 1871년이다. 물론 용성대군, 복평군 둘 다 죽은 지 한참 뒤의 일.[2] 고종과 이해조 모두 실제 혈통 상 인평대군의 후손들이다. 항렬로는 고종이 이해조의 할아버지 뻘.[3] 이해조는 덕흥대원군 기준 14대손 '해(海)' 항렬로 나이에 비해 항렬이 낮은 편이다. 이해찬과 같은 항렬.[4] 주요 측근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재만이 당시로서는 늦은 나이인 44세였던 1871년에야 알성시 장원급제를 했기 때문. 단, 성균관 유생 응제와 시사에서 이미 충분한 검증을 걸치고 시험을 치를 자격을 얻은 것으로 일반적인 경우와는 비교가 불가능하다.[5] 알성시는 알성과(謁聖科)라고도 하는데, 왕이 문묘(文廟)에 참배할 때 성균관(成均館)에서 실시한 비정기시험으로 문과, 무과로 나누었다.[6] 출처: 송민호 著 - 「동농 이해조 문학 연구 - 전대(前代) 소설 전통의 계승과 신소설 창작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 논문. p.22.[7] 조선시대 각종 과거(科擧)의 제1차 시험.[8] 量地衙門. 토지와 측량 등을 담당한 의정부 직속의 부서다.[9] 출처: 송민호 著 - 「동농 이해조 문학 연구 - 전대(前代) 소설 전통의 계승과 신소설 창작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 논문. p.25.[10] 지금으로 치면 국회의원 급. 독립협회가 중심이었던 중추원은 고종에게 찍힌 뒤로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황제의 형식적 자문기관으로 전락하였다.[11] 출처: 송민호 著 - 「동농 이해조 문학 연구 - 전대(前代) 소설 전통의 계승과 신소설 창작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 논문. p.23 ~ 24.[12] 출처: 송민호 著 - 「동농 이해조 문학 연구 - 전대(前代) 소설 전통의 계승과 신소설 창작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 논문. p.27.[13] 황성신문 - 1904년(광무 8년) 6월 15일 자.[14] 황성신문 - 1905년(광무 9년) 10월 9일 자.[15] 이 학교는 1908년(융희 2년) 포천에 있던 다른 학교 '옥성의숙'과 합쳐 포천의 옛 이름을 따 '청성학교(青城學校)'로 이름이 바뀌었다. 기존의 신야의숙은 청성 제1학교, 옥성의숙은 청성 제2학교가 되었다.[16] 지금의 대한민국 교육부.[17] 숙장(塾長)은 종친인 이재극.[18] 해당 문단 전체 출처: 송민호 著 - 「동농 이해조 문학 연구 - 전대(前代) 소설 전통의 계승과 신소설 창작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 논문. p.30 ~ 33.[19] 출처: 송민호 著 - 「동농 이해조 문학 연구 - 전대(前代) 소설 전통의 계승과 신소설 창작의 사상적 배경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학위 논문. p.49 ~ 54.[20] 당시에는 ‘정탐소설’이라고 불렀다.[21] 해당 문단 내용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0098&cid=41708&categoryId=41711[22]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33821&cid=41708&categoryId=41737.[23] 워싱턴의 한자 가차어이다.[24] MBC 드라마 옥중화가 여기서 제목을 따왔다. 물론 내용은 관계가 없다.[25] 제비 다리라는 뜻.[26] 토끼 이라는 뜻.[27] 해당 문단 내용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0098&cid=41708&categoryId=41711[28] 음력 5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