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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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김윤식 (金允植) |
아호 | 영랑 (永郞) |
출생 | 1903년[1] 1월 16일[2] |
전라남도 강진군 군내면 남성리 (現 전라남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3] | |
사망 | 1950년 9월 29일 (향년 47세) |
본관 | 김해 김씨# |
학력 | 강진공립보통학교[4] (졸업)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영어과 / 졸업 여부 불명) 휘문의숙 (졸업) 아오야마가쿠인 중학부 (졸업) 아오야마가쿠인대학 (영문학 / 중퇴) |
상훈 | 건국포장 금관문화훈장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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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독립운동가. 전라남도 강진군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윤식이다. 1935년 영랑 시집으로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며 201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3년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군 군내면(現 강진읍) 남성리에서 아버지 김종호(金鍾湖)와 어머니 김경무(金敬武) 사이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강진공립보통학교(現 강진중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에서 영어를 수학하다가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하였다.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경기도 경성부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 들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서는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현재 각지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하여 사상자가 발생하고 있는데 우리도 방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며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이에 그 자리에서 각자 2원씩을 거두고 곧바로 태극기 500개를 제작하기로 하였으며, 다음날인 24일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 중이라는 김안식(金安植)을 만나 함께 25일 강진 장날에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또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등을 준비했으나 25일 전까지 목표한 태극기 개수를 다 만들지 못하고[5] 등사판 입수도 어려워져서 결국 다음 장날인 3월 30일로 거사 계획을 연기하였다.
다음날인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영랑은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이에 불복, 공소를 제기하였다. 4월 29일 공소 제기로 인해 대구복심법원으로 이송되었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제2부에서 비밀리에 만세운동을 계획하는 등 불온한 언동을 한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만세시위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무죄를 선고받아 출옥하였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를 제기하였으나, 6월 9일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 기각되어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20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동학교 영문학과에서 수학했다. 이 시절 아나키스트 혁명가인 박열과 교류했고, 괴테, 키츠 등의 외국 문학에 깊이 심취했다. 그러나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30년 정지용과 함께 박용철이 주재하던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1930년대 「독(毒)을 차고」,「가야금」, 「달마지」,「춘향」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해 저항의식을 표출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시를 많이 발표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지조있는 시인으로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기도 했다.8.15 광복 후 보수파 정치인으로서 정계에 입문하여 1945년 고향 강진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대동청년단 지단장에 취임하였지만 활동하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성향에 질려 금방 그만두었다. 그 후 이승만 정권의 공보수석비서관이던 시인 김광섭의 권유로 출판국장을 맡았지만 친일파들로 가득한 중앙청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했다. 무질서한 당대 시국과 이승만의 독재,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폭력과 억압을 일삼는 '간판만 바꾼' 친일파와 일제 부역자들의 행태에 환멸을 느낀 김영랑은 출판국장직 역시 6개월을 겨우 넘기고 그만두었는데 이것이 그의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라남도 강진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차경모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그래도 강진의 유복한 집안 출신이었던 덕분에 비교적 여유 있는 삶을 살다가 서울특별시 수복 다음날이었던 1950년 9월 29일, 유탄에 맞아 사망했다. 평범하게 적군의 눈에 띄어서 죽은 것이 아니라 북한군이 후퇴할 때 뒤를 돌아보면서 아무나 맞으라고 쏜 눈 먼 유탄이 하필이면 집 문을 여는 김영랑 시인에게 제대로 맞은 것. 결국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망하고 말았다.
사후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3. 작품
대표적 작품으로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을 아실 이>, <꿈 밭에 봄 마음> 등이 있다. 주로 언어의 조탁을 통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발굴하고 세련된 시형과 율격으로 섬세하고 투명한 감성의 세계를 고운 어조로 표현했다.초중반기까지는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운율이 살아있는 서정적이고 세련된 시를 여럿 발표했지만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고 폭압적인 체제하에 놓이면서 후기 영랑의 시는 1940년대까지 저항적이고 날선 느낌으로 변한다. 회유와 협박이 거세지면서 1940년 절필을 선언한 김영랑은 해방이 오기까지 일본어로 된 단 한줄의 글조차 적지 않은 저항시인이기도 하다. 초기의 서정시가 워낙 유명해서인지 비해 후기의 저항적인 면모는 그렇게까지 유명하지 않지만 2008년 금관문화훈장, 2018년에야 건국포장을 받으며 뒤늦게 인정을 받았다.
의외로 김영랑은 발표한 시에 제목을 한 번도 붙인 적이 없다. 즉 위의 제목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모두 가제. 직접 시집을 보면 제목 자리에 번호만 붙어 있는 게 보인다. 보통은 첫 줄의 구절이 제목으로 뽑혀 쓰이는 편이다. 물론 마지막 줄이 쓰인 <꿈 밭에 봄 마음> 같은 예외도 있다.
펴낸 시집은 《영랑시집》(1935), 《영랑시선》(1949) 두 권이다.
4. 여담
- 여순 사건 당시 14연대의 폭동을 비난하는 <절망>이라는 시를 썼다.
- 관동 대지진으로 아오야마가쿠인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했던 김영랑은 1923년 자주 서울과 강진을 오가며 작가 최승일(崔承一)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여동생인 최승희를 알게 되어 그해 11월경부터 1925년까지 연애를 했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마침내 혼담까지 오갔다고 하는데, 부친의 반대 등으로 결국 이별하였다. 이때 김영랑은 자살까지 기도할 만큼 마음에 크게 상처를 입었으며 이 때의 심정을 담은 시가 바로 그 유명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 슬하에 7남 3녀를 두었으며[6], 대부분 해외로 이민을 갔으나 막내딸인 김애란씨와 종손인 김우식씨, 손녀인 김혜경씨가 국내에 거주 중이다. 2018년 건국포장 추서 당시 해외에 있는 다른 자제들을 대신해 아버지의 훈장을 수여받았고 건국포장을 부친의 고향인 강진군에 기증했다.
- "피아노"로 유명한 시인 전봉건이 그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 201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필적 확인 문구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가 바로 김영랑 시인의 시 「바다로 가자」 속 시구의 일부이다.
- 2020학년도 6월 모의평가의 필적 확인 문구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이 「수풀 아래 작은 샘에서」속 시구의 일부이다.
- 생전 교우관계가 굉장히 방대했는데 3.1 운동으로 인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적이 있었지만 서정주나 이광수가 친일로 돌아서고도 '생계 때문에 돌아설 수도 있다'며 크게 나무라지 않고 친분을 어느정도 유지했고, 결혼식 주례는 여운형이 서줬을 정도였다. 정지용이나 카프계열 문인들하고도 교우가 있었고 공보수석비서관을 지낸 김광섭과도 정말 친해서 김광섭의 도움으로 중앙청까지 들어갔었지만 의견이 맞지 않아 상을 엎을 정도로 크게 싸우고 나서도 친하게 지냈다. 잠시 중앙청이나 대동청년단에 몸담은 경력으로 인해 우익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김영랑은 생전 우익으로 간판바꾼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싫어서 출판국장이라는 멀쩡한 직장도 걷어차고 나왔다. 김영랑의 셋째 아들인 김현철씨는 생전 아버지에 대해 자주통일과 평화통일을 선호한 진보 민족주의자로 평가했다.
- 그의 아들 김현철은 한때 박정희 대통령이 김삼화라는 배우를 성폭행했다는 찌라시를 퍼뜨린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걸 서울의소리가 영상으로 내보내며 알려지게 되었고, 덤으로 고창규와 박정규가 이걸 블로그에 게시했다가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다만 김현철은 미국시민권자인지라 처벌도 받지 않았다.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소속정당 | 득표 수(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전남 강진군) |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 7,405표 (17.46%) | 낙선 (4위) |
6. 관련 문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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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folding [1] 전통적 운율·정서를 계승한 시인.[2] 조국 광복 염원·의지 및 부정적 현실 극복을 다룬 시인.[3] 정치적 이념을 배제한 순수 서정시를 추구한 유파. 특정 사상이나 계급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반발하며 등장했으며, 시 동인지 《시 문학》을 중심으로 순수 서정시 운동을 주도했다. 김영랑, 박용철, 정지용, 신석정 등의 시인이 활동했다.[4] 부정적 현실을 지식인의 관점에서 비판한 소설이 많았다. 특히 의식의 흐름 기법이 많이 쓰였다. 대표적으로 이상의 날개와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있다.[5] 장편소설 중에서도 일제 강점기에 부정적 인물이 득세하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 이때 주목받았다. 대표적으로 채만식의 태평천하, 염상섭의 삼대가 있다.[6] 계몽주의에 기반한 농촌 계몽 소설, 향토적 삶을 다룬 향토적 농촌 소설, 식민지 지배와 통치 제도의 억압성과 부조리로 인한 농촌의 현실을 다룬 현실 비판적 농촌 소설이 있다.[7] 만주 사변 이후 더욱 극심해진 일제의 사상 통제와 검열을 피해, 역사적 사건을 다루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8] 당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어 아예 한국어 사용 자체를 금지할 지경에 이른 관계로 주제 의식이 모호하고 불분명한 몇몇 단편들만 간신히 명맥을 이었다. 대표적으로 순수 소설인 황순원의 '별'이 1941년에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학창시절을 보낸 전후세대(1920년대생) 작가들은 체계적인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한 탓에 다른 세대와 비교도 안되는 굴곡진 인생 경험을 했음에도 이를 풀어내는데 한계가 있었고 이전 세대와 60년대 부상한 한글세대(김승옥 등) 사이에 끼어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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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는 1901년생으로 기재하여 출마하였다.[2] 음력 1902년 12월 18일.[3] 남성리 211-1번지에 김영랑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다.영랑생가[4] 現 강진중앙초등학교[5] 총 93개를 제작하였다.[6] 김영랑은 '배만 곯는 문학 예술따위 하지마라'며 자식들에게 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김영랑의 자식들 대부분은 불어불문학·영어영문학 등 어문학과 교수가 되거나 언론인이 되었다(...) 2004년 2월 22일 별세한 김현태 단국대학교 어문학부 프랑스어전공 교수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