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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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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2대 방송위원회 위원장
윤석중
尹石重 | Yun Seok-jung
파일:윤중석사진.png
<colbgcolor=#003764><colcolor=#fff> 본관 파평 윤씨(坡平 尹氏)
출생 1911년 5월 25일
경기도 경성부 수표동 13번지
(현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11-1)
사망 2003년 12월 9일 (향년 92세)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직업 아동문학가 , 시인, 정무직 공무원
학력 교동보통학교
양정고등보통학교[1] (명예 졸업)
조치대학[2] (신문학 / 학사)(1941년 졸업)
가족 아버지 윤덕병, 어머니 조덕희[3]
배우자 박용실, 슬하 3남 1녀
종교 가톨릭 (세례명 : 요한)
데뷔 동아일보 신춘문예 등단 (1925년)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12호
수훈 금관문화훈장 (2003년 추서)
1. 개요2. 생애3. 작품 경향4. 여담5. 작품 목록6. 상훈

[clearfix]

1. 개요

윤석중은 한국 아동문학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이며 대한민국 초대 방송위원장이다.

1,300여 편의 동시를 썼으며 그중 약 800편이 동요로 만들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동요집 <윤석중 동요집>을 펴냈으며, 잡지 <어린이>의 편집장을 지냈다. 아동 문화 단체 <새싹회>를 만들어 어린이 문화 운동을 이끌었다.

2. 생애

한국의 아동문학가로 아명은 노마, 호는 석동(石童).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외할머니 슬하에서 자랐는데도 보통학교 3학년에서 5학년으로 월반할 정도였다니 이미 어린 시절부터 낭중지추였던 듯하다.[4]

첫 동시를 발표한 것이 14세 때인 1925년이다.[5] 데뷔작의 제목은 '오뚝이'.
"석동 윤석중군은 조선 아기노래 시인의 거벽이다. 그의 노래 중에는 전 조선 아기네의 입에 오른 것이 여러 편이다. 그는 지금 이십이 넘은 청년이지만, 그의 속에는 사오세로부터 십이삼세에 이르는 아기네의 맘과 뜻을 겸하야 가졌다. 이른바 '동심'이란 것이다. 아마도, 또한 원컨대는, 그는 일생에, 그에게 백발이 오고 이가 다 빠져 오므람이 늙은이가 다 될 때까지 이 '어린 맘'을 읽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다."이라 평했다

1932년 윤석중동요집 서문 - 춘원 이광수

192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극 「올빼미의 눈」이 선외가작으로 뽑힌 다음, 같은 해 『어린이』에 동요 「오뚝이」가 입선되었으며, 1926년 「조선물산장려가」가 당선되면서 천재소년예술가로 불렸다.

1933년, 방정환의 뒤를 이어 어린이 주간으로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활약하였다.

1945년 12월, 정진숙, 민병도, 조풍연과 함께 을유문화사를 공동창업했다.

6.25 전쟁 중에는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부친계모서산시에서 우익 세력에게 학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하였는데, 계모가 좌익 세력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부친이 북한군 점령 기간 중에 서산에서 요직을 맡았다고 한다. 전쟁이 터지자 윤석중은 가족들이 있는 서산으로 피난오려고 했으나, 부친이 '전쟁 통에는 떨어져 있어야 누구든 산다'며 만류해서 천만다행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후 소년중앙·소년·소학생 등의 주간을 지냈으며 1955년에는 조선일보 편집 고문을 지냈다. 이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던지 그는 1956년 1월 3일 조풍연, 피천득, 어효선, 홍웅선 등과 새싹회를 창립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하여 어린이문화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1957년 소파상을 제정하고, 1961년 장한어머니상을 제정했다. 1964년 마해송의 문학 세계를 기리는 해송문학상을 제정했다.

1961년 3·1 문화상 예술 부문 본상과 1966년 문화훈장 국민장을, 1978년에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다. 또한 외부활동도 활발해서 1970년에는 어린이 회관 고문을, 1979년부터 2년간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 1981년부터 1984년까지는 초대 및 2대 방송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다.

2003년 12월 9일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향년 92세에 지병으로 눈을 감은 그는 12월 12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006년에 그가 모은 도서 8,555권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었다.

3. 작품 경향

그는 작품의 소재를 어린이들의 일상과 자연에서 찾았다. 그의 동요 세계는 4·4조나 7·5조의 형태에 반복과 대구를 사용하던 초기의 정형동요에서 시적 동요로 나아갔고, 낙천주의적 정서를 기반으로 어린이들의 밝고 긍정적인 장면을 포착하여 형상화한 특징을 보였다.

4. 여담

아마 대한민국에서 국민학교 내지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 치고 윤석중의 노래를 부르지 않거나 듣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 거의 모든 학년의 교과서에 교육과정이 바뀌더라도 반드시 들어가는 명곡들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어린이날 노래졸업식 노래가 바로 모두 그의 작품들이다. 그야말로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례.

대우그룹의 사가 <대우가족의 노래>와 <신한제분 닭표간장 CM송>의 가사도 그가 썼다. 그의 사무실이 있던 건물을 김우중 회장이 인수하며 인연을 맺게 되었다고 한다.

에버랜드에서 약 30년 넘게 가동되었던 놀이기구인 지구마을의 테마곡을 작사하기도 했다.

5. 작품 목록

- ‘새 신’- 새신을 신고/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똑같아요’-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젓가락 두 짝이 똑같아요. -

‘나란히 나란히’- 나란히/나란히/나란히/밥상위에 젓가락이/나란히 나란히 나란히 -

‘달 따러 가자’-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 가자/장대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우산’-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

‘기찻길 옆’-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 아기 잘도 잘다 -

‘맴맴’- 아버지는 나귀타고 장에 가시고/할머니는 건넛마을 아저씨 댁에 -

가나다순 정렬, 번안곡은 ★표시.

이 외에도 약 800여 편의 동시들을 지었고, 세대를 초월해서 지금도 많은 어린이들이 부르고 있다. 아니 어쩌면 50년대부터 태어난 모든 한국인들은 윤석중의 노래들을 한번씩은 전부 불렀을 것이다.

6. 상훈

3·1문화상(1961)
문화훈장 국민장(1966)
외솔상(1973)
막사이사이상(1978)
대한민국 문학상(1982)
세종문화상(1983)
대한민국예술원상(1989)
KBS동요대상(1990)
인촌상(1992)
금관문화훈장(2003) (사후 추서)


[1]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자퇴했으나 훗날 명예졸업장을 받았다. 양정고 14회 졸업생으로 대우하고 있다.[2] 1939년 조선일보 장학생.[3] 슬하 9자녀를 두었으나 윤석중만 홀로 살아남았으므로 외아들이나 다름없었다.[4] 1925년 '조선소년운동협회'에서 수재(작문 잘하는 아동)로 뽑혀 동아일보에 소개되기도 했다. 전국에서 뽑힌 140명 중 한 명이었다.[5] 처음으로 노랫말을 만든 것은 12살 때였다고 한다. 학교에서 '하루(春)'라는 일본 노래를 배웠는데, 이 때 '봄'이라는 노래를 만든 것이 시작이라고... 생전에 인터뷰나 특강 때마다 언급했던 부분. 정확히는 <하루가키타(春が来た-봄이 온다)>라는 노래였다. 윤석중은 이 노래를 처음 배우면서 가사의 의미를 몰라, 선생님께 '왜 하루가 길다고 하는 겁니까?'라고 질문했다가 혼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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