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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문화훈장 수훈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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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李孝石 | Lee Hyo-Seok | |
<colbgcolor=#1B5B40><colcolor=#ffffff> 출생 | 1907년 2월 23일[1] |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2][3] [4] | |
사망 | 1942년 5월 25일 (향년 35세) |
평안남도 평양부 기림정 자택 (現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 |
묘소 | 이효석문화관 달빛문화언덕 |
본관 | 전주 이씨[5] |
호 | 가산(可山) |
학력 | 평창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 21회) 경성제국대학 예과 (수료)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 / 학사) |
경력 | 숭실전문학교 교수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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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2년 2월 23일에 나온 탄생 105주년 기념 구글 두들 |
한국문학 단편 수작으로 손꼽히는 메밀꽃 필 무렵으로 유명한 일제강점기 작가이자 대학교수. 호는 가산(可山)이며, 필명은 아세아(亞細兒), 문성(文星) 등을 사용했다.
작품 경향은 초기 동반자 작가로 불리며 사회주의적 경향문학의 성격을 띄다가 후기로 가면서 색채가 바뀌어 순수 문학의 길을 걸었고,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다수 발표했다.
사실 향토색 짙은 작품만 쓴 것은 아니고, 모던보이나 근대 문화를 기반으로 한 작품도 있으며,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했는데, 현대 대한민국의 국민공통교육과정 의무교육에서 다루어지는 메밀꽃 필 무렵의 그늘이 너무 강하기 때문인지 이효석은 향토적인 작품을 쓴 작가라는 이미지가 크게 강조되는 편이다.
그의 문체는 세련된 언어, 풍부한 어휘, 시적인 분위기로 요약할 수 있으며, 시적인 정서로 소설(산문문학)의 예술성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 196번지에서 아버지 이시후(李始厚, 1882. 6. 20 ~ 1945)와 어머니 평산 신씨(1882. 4. 22 ~ 1911)[6]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호적상으로는 강원도 홍천군 출신으로 성결교단 집사을 지낸 곡산 강씨(谷山 康氏) 강홍경(康洪卿, 1889 ~ 1962. 2. 25)이 어머니로 올라가 있으나, 이효석의 장녀 이나미(李奈美)에 따르면 강홍경은 생모가 아니라고 한다. 이후 이계원, 이정원, 이계숙 등 여동생 3명이 내리 태어났다.
아버지 이시후는 본래 함경도 함흥부 출신으로,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해 1904년 7월 우등생으로 선발되었다.
1905년 5월 14일,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초고(初考)에 입격하고, 5월 18일 회고(會考)에도 급제해 10월 11일 내부 주사(內部主事)에 임명되었다.
1905년 11월 제7회로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05년 12월 29일 강원도 회양군의 회양공립소학교 교원(판임관 8급)에 임명되었으나, 1906년 1월 17일 사직했다.
1911년에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을 편역했고, 1912년 평창군으로 돌아와 사숙을 세워 한문을 가르쳤다.
1919년부터 1923년까지 봉평면장, 1924년부터 1925년까지 진부면장을 역임했으며, 그 사이 1921년 11월 8일 평창금융조합 감사에 선출되었고, 1923년 4월 24일부터 1925년, 1925년 4월 16일부터 1927년 4월 16일까지 대화(大和)금융조합 감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4살이 되던 1910년,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경성부로 갔고, 1912년 다시 평창군으로 돌아와 아버지가 세운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1914년 4월 평창군청 소재지에 있던 평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이때 아버지 이시후는 강홍경을 새 부인으로 들인 상태였는데, 이효석과 계모 강홍경 간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관계로 이효석을 평창군 읍내 고명균의 집에 하숙하도록 해 이때부터 하숙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숙집에서 본가에 다녀올 때면 100리가 넘는 거리를 오가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대표작인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고 물놀이와 고기잡이 꽃놀이를 즐긴 경험, 그리고 특히 '오대산에서 내려오는 목기류 행상, 심마니의 모습, 머루와 다래 같은 산과, 꿀 뜨기, 농산물 품평회' 등을 본 기억은 그의 작품의 바탕이 될 정도로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1920년 3월, 평창공립보통학교(6년제)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그해 4월 당시 조선 최고의 고등보통학교였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現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해 이후 평생을 절친한 벗으로 지내게 되는 1년 선배 현민 유진오 선생과 만나게 되었다.
고등보통학교 시절부터 서로 평을 교환하며 서구문학을 섭렵했고, 유진오는 시를, 이효석 본인은 소설을 써서 서로 돌려 읽고, 비평하며 우정을 다졌다고 한다.
등단한 후 없는 살림에도 이효석이 잡지에 글을 써서 받은 고료로 술을 마신 사람도 유진오였고, 이효석이 임종하기 직전 보고 싶다고 했던 사람도 친우인 유진오였다고 한다.
이효석은 경성제일고보 역시 우등으로 졸업하고, 1924년 제1회 입학생 수석 유진오의 뒤를 따라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1925년 제2회 신입생으로 입학한다.
2.2. 대학 시절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재학시절 |
1927년 3월 예과를 수료하고, 이어 4월 1일 법문학부로 진학한 이효석은 당초 예과에서 문과A반이었기 때문에 법학과로 진입하게 되어 있었으나, 문과B반 동기들과 함께 문과로 올라가 문학과로 진입하였다.
전공으로 사토 기요시 교수의 영문학을 택한 그는 학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잡지 <조선지광>에 단편 "도시와 유령"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8]
1929년, 학위논문으로 예이츠에게서 영향을 받은 아일랜드의 극작가 존 밀링턴 싱(John M. Synge)의 희곡을 분석한 <The Plays of John Millington Synge>를 제출했으며, 1930년 3월 문학사 칭호를 수여받고 학부를 졸업하면서 법문학부 조선인 학생들이 발간하는 <新興>(1930.4)에 키플링이 인도를 배경으로 쓴 작품인 Venus Annodomini[9]를 번역해 게재했다.
이렇게 대학 시절 이효석은 영국의 식민지인 아일랜드와 인도에 관심을 나타내며, 식민지의 삶에 천착했다.[10]
2.3. 순수 문학으로
1930년 3월 31일,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한 이효석은 1931년 7월,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성동본인 나남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의 전주 이씨 이경원과 결혼해 경기도 경성부 수송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수송동) 46번지에 새 살림을 차렸다.그러나 1929년 촉발된 대공황과 뒤이어 닥친 불황의 여파속에 작품 활동을 계속 하던 이효석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은사인 쿠사부카 소지(草深常治)[11]의 추천으로 1931년 하반기 또는 1932년 초에 조선총독부 경무국 산하 도서과 검열계 서기로 취업하기도 했는데, 양심의 가책과 세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불과 보름 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평론가 이갑기(李甲基)[12]에게 "네놈도 결국은 개가 다 되었구나!"라고 매도당한 데 충격을 받아 사직했다는 일화가 전하나, 이효석의 경성제대 영문학전공 2년 후배인 조용만(趙容萬, 1909 ~ 1995)[13]의 회고로 보아 이는 낭설일 개연성이 높다.
화려한 도시 경성부에서의 비참한 도시 빈민의 모습을 그린 대학 시절의 등단작 <도시와 유령>, 그리고 소련을 그리며 가고자 하는 <노령근해>, <상륙>, <북국사신> 등으로 대표되는 경향문학 등 활동 초기 이효석은 동반자 작가로 분류될 만큼 사회주의 경향이 짙은 작품들을 썼다.
그러나 1932년, 처가가 있는 함경북도 경성군으로 가 경성공립농업학교(現 서울시립대학교와는 무관한 학교임) 영어교사로 취직해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되기 시작한 뒤로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경향문학적 요소를 탈피하고 그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는 순수문학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하여 향토적·이국적·성적 모티프를 중심으로 한 특이한 작품세계를 시적 문체로 승화시킨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오리온과 능금>(1932)을 기점으로 하여 <돈(豚)>, <수탉>(1933) 등은 이 같은 그의 문학의 전환을 분명히 나타내주는 작품들이다.
1933년 8월에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영문학 전공 후배인 조용만, 최재서 등과 함께 순수문학단체를 표방한 '구인회'에 창립 멤버로 가입하여 순수문학의 방향을 더욱 분명히 하였다. 다만 경성부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지방인 함북 경성군에 거주하면서 구인회에 자주 참여하지는 못하여 점차 흐지부지되었다고 한다.
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교수 재직 시절 |
이효석은 1934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면서 평안남도 평양부 창전리 48번지(現 평양시 중구역 만수동)로 이주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교육기관인 구제전문학교의 교수 직위에 앉은 셈으로, 이제야말로 경제적으로 여유를 갖추게 된 이효석은 1936년에 걸작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며,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8년,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되고 나서, 숭전의 시설을 활용해 세워진 대동공업전문학교(現 김책공업종합대학) 교수를 맡았다. 지인들 앞에서 이효석은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면서 호강을 부리던 놈이 객기로 그만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나, 먹고살고자 다시 왜놈에게 아첨을 하는 글을 쓰는 건 두고두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오."
1939년과 1940년 두 차례 만주국 빈강성(濱江省) 하얼빈시를 여행하고 이 유럽풍 도시에서 《벽공무한(碧空無限)》, 《하얼빈(哈爾濱)》 등의 작품을 썼다.
같은 해 차남 영주가 태어났으나, 1940년에 안타깝게도 처와 자식 둘 다 병으로 연이어 세상을 뜨고 만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다 여러 번 만주 여행을 다녀올 정도로 건강하던 그 역시 이로 인해 큰 충격을 받고 이듬해인 1941년, 뇌막염에 걸려 대수술을 받았다.
그 자신도 병마로 고생하던 이효석은 1942년 5월, 평양도립병원에 입원했으나 불치의 진단을 받고 퇴원한지 얼마 되지 않은 25일, 평안남도 평양부 기림정(現 평양시 모란봉구역 개선동) 자택에서 향년 35세의 나이에 결핵성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시신은 그의 부친 이시후에 의해 모친과 함께 강원도 진부면 하진부리 곧은골에 매장되었다. 하지만 1972년, 영동고속도로의 건설공사로 인해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의 고속도로변으로 이전되었다가, 1998년 9월에 영동고속도로의 확장공사[14]로 인해 경기도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으로 이장되었다.
다만 이장 당시엔 이를 두고 유족들과 지역 주민 간의 갈등이 있어서[15] 유족 측이 밤중에 이장할 수밖에 없었고, 미술사학자 유홍준도 이를 비판하는 칼럼을 냈다.
2021년 11월 11일, 유족 측이 '가산 이효석 선생 묘지 이장 추진위원회'와의 협의가 타결되면서 봉평으로 이장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동월 11월 19일 이효석 부부의 유해를 평창 이효석문화관 달빛문화언덕으로 이장하였다. 참조.
1982년 10월, 문화의 날을 맞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3. 작품
그의 저작 활동은 100편에 가까운 단편에 집중되어 있으나, 경성제일고보 재학 중에 발표한 시를 비롯하여 장편소설, 수필, 평론, 희곡·시나리오, 번역 등 다방면에서 작품을 발표하였다.단편집 기준으로 그의 대표작을 추리면, <노령근해(露領近海)>[16], <해바라기>[17], <이효석단편집>[18] 등이 있다.
장편으로는 『화분(花粉)』(1939년 작), 『벽공무한(碧空無限)』(1941년 작)[19]이 있으며 이 중 『화분』은 1972년에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하였다.[20]
110편이 넘는 수필을 발표하여 당대에는 수필가로서도 명망이 높았으며, 중 · 고교 교과서에 실린 바 있는 1938년 작 「낙엽을 태우면서」가 대표작이다.
1달에 7~8편의 영화를 감상한 영화광이라 전하며, 직접 희곡과 시나리오를 창작하기도 하였다. 1930년에는 김유영(金幽影), 서광제(徐光齊), 안석영(安夕影) 등과 함께 '조선씨나리오·라이터협회'를 결성하고, 연작 시나리오 「화륜(火輪)」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침체의 늪에 빠진 당시 조선 영화계에 활력을 주었다고 평가 받는다.
그가 창작한 희곡 · 시나리오 7편 중 생전에 영화화한 작품은 <화륜>(1931년 개봉, 김유영 감독), <애련송(愛戀頌)>(1939년 개봉, 김유영 감독)[21]이 있다.
단편소설 중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황제>라는 작품이 있다. 말년에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이 임종 직전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형식의 1인칭 소설. 삼국지 등 동아시아식 영웅 소설을 연상케 하는 문장과 표현을 사용해 색다른 장엄함과 비장함을 느낄 수 있다.
제목 없는 미발표 단편 소설이 2011년 번역 공개되기도 하였다. 번역 보기
4. 평가
메밀꽃 필 무렵을 포함한 단편 몇 개를 제외하면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는 받지 못한다. 전형적인 원 히트 원더. 특히 장편들은 평이 나쁘다. 장편 소설가 이효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무재능. 그나마 화분 정도가 언급되는 정도.[22]장편소설은 글이 다소 거칠더라도 서사가 먼저 있고, 문장이 다음인데, 이효석은 아주 전형적인 문장만 예쁜 작가였다. 서사를 묵직하게 끌어가며, 메시지를 주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의 작품들은 항상 기승전결의 '결'에 가면 힘이 빠져 흐지부지되어버린다. 당연히 글이 길어지면 질수록 이 단점이 커지니 장편들에 대한 평이 특히 박하고 단편 몇 개만 기억에 남은 것이다.
절친한 친구 유진오가 소설가이자 학계, 정계의 거물이라 정치권력을 뒤에 두고 문단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간 친구를 기리고 부각시키는 데 성심을 다했다. 반민족 행위 경력이 있음에도 오래 회자되는 작가들은 서정주나 김동인처럼 차마 지워 없앨 수 없을 정도로 문학적 성과가 뚜렷한 작가들이 대부분인데, 이효석은 유진오의 판깔기로 예외가 될 수 있었다.
김동리는 그의 작풍에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는 평을 내렸다. 비판이 아니라 거의 시인이 소설을 쓰듯 분위기를 잡는 데 능하다는 반어이다. 이는 그의 작품 중 메밀꽃 필 무렵에 잘 나타난다.
5. 가족관계
부인 이경원(李敬媛), 이효석, 차녀 유미(瑠美), 장남 우현(禹鉉), 장녀 나미(奈美), 1938년 4월 |
특히 장녀 나미(奈美, 1932~2015)는 부모를 어릴 적에 떠나보낸 후 평양의 외삼촌 집에서 살다가 1949년 월남 후 친척집 등을 떠돌고 이듬해에 동생들을 키우기 위해 결혼했다.
1982년에 전 재산을 털어 '이효석기념사업회'와 '이효석문화연구회'를 세워 부친의 문학세계와 존재를 재조명시키는 데 공헌했고, 1983년에는 '창미사'도 세워 1970년대 이래 국내외에 흩어진 부친의 작품들을 모은 걸로 전집을 낸 바 있지만, 1992년부터 부친의 저작권 보호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인세조차 받지 못해 2006년에는 운영난 때문에 기념사업회를 닫아야 했고, 허리 디스크 증세에 시달리며 2007년 들어 단칸방에서 지낸다는 사연이 언론에 알려진 바 있다.
그 뒤에도 여러 합병증으로 고생한 채 2015년 8월 26일부터 폐렴으로 강동성심병원 중환자실에서 지내다가 9월 25일에 숙환으로 숨을 거뒀다.[23](공식 트위터[24])
장남 우현(禹鉉)은 경기고등학교 졸업 후 부친의 작품을 전집으로 내서 번 인세 400달러로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로 유학간 뒤 미국에서 한동안 살다가 1988년에 귀국했다.
이후 2000년부터 이효석문학상을 후원하는 한편 2004년에는 <메밀꽃 필 무렵>을 영어로 번역한 바 있으며, 2012년 '이효석문화재단'을 세우는 데 주도하며 상임이사를 지냈다.
그 외에 차남 영주(煐周)도 있었으나 생후 4개월 만에 사망하였다.(#1, #2)
6. 일제 부역 논란
2002년 김윤식 명지대학교 석좌교수는 월간 <현대문학> 7월호를 통해 <대륙의 껍질>, <북만주 소식> 등 1939~1940년에 이효석이 일본어로 쓴 수필 3편을 공개했고, 2011년에는 시조시인 장순하가 해독한 일본어 미완성 소설 원고 일부가 <현대문학> 9월호에 공개됐다. 몇몇 이들은 이런 행위를 두고 친일 작가라고 주장하기도 하나 문학평론가 이호림은 2006년에 낸 저서 <친일문학은 없다>를 통해 반박에 나섰다. 2011년에 김혜연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소속 연구원은 그의 일본어 작품에 나타난 당대 시대인식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냈다.사실 이효석이 친일 활동을 했다는 건 이미 오래 전부터 드러났다. 친일파 고발과 연구에 힘쓴 임종국이 1966년에 낸 저서 <친일문학론> 등지에서 거론했고, 임종국 사후 그의 뜻을 계승하는 반민족문제연구소(現 민족문제연구소)가 이걸 보강하여 93년에 낸 한국의 친일파 99인에서도 채만식, 김동인, 홍난파 등등과 같이 문학예술 분야 친일파로 분류한 바 있다. 다만 이 책자에서도 상술하던 대로 친일활동을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던 이효석의 일화를 언급하며 최소한 양심적으로 그걸 후회해서 김동인이나 최남선 등등처럼 친일 활동을 거리낌없이 하고 후회도 하지 않았던 이들보다 낫다고 긍정적으로 서술했다.
7. 기타
- 1940년 부인 이경원과 사별 후 기생 출신 가수 왕수복(王壽福, 1917 ~ 2003)과 인연이 생겼고, 1942년에 이효석의 임종을 지키기도 했다. 이는 2016년 9월 4일자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 소개됐다.
- 한국의 토속적 색채를 강하게 그린 메밀꽃 필 무렵과는 달리 서구적인 문화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빵과 버터, 커피 등을 즐겨먹고 쇼팽과 모차르트의 피아노곡 연주를 즐기고, 벽돌집에 살았으며, 서양영화 감상 등을 즐겨했다고 한다. 1939년에 국제도시 하얼빈을 여행한 후 쓴 벽공무한, 하얼빈에서 그의 서구 문화 동경을 읽을 수 있다.
[1] 양력 4월 5일.[2] 2002년 9월 4일 장녀 이나미를 대상으로 한 중앙일보 인터뷰, 2003년 장녀 이나미가 재출간한 '새롭게 완성한 이효석 전집' 제8권에 수록된 작가 연보, 경성제국대학 학적부 사본 참조. 기존에는 이효석의 출생지가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남안동(現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마을 681번지)로 알려져 있었고, 평창군청에서도 이 지번에 가산이효석생가를 복원해 보존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 9월 9일 강원일보 기사에서 이효석의 장남 이우현 이효석문학재단 이사장이 최근에 평창군 진부면으로 이사를 했고, 그 이유가 하진부리 196번지가 부친인 이효석 선생 생가여서라고 밝혀 이효석의 유족들은 하진부리를 출생지로 인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 다만 1921년 11월 30일 조선총독부 관보에 이효석의 아버지 이시후의 주소지가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273번지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효석이 봉평면에 살기는 했던 것 같다.[4] 현 강원특별자치도 평창군 진부면 하진부리[5] 안원대군파.#[6] 충청도 충주목(現 충청북도 충주시) 출신으로, 신영균(申英均)의 딸이다.[7] 개교 1주년 기념 제1호(1925)부터 태평양 전쟁 개전 후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제30호(1941)를 마지막으로 정간될 때까지 꾸준히 발간된 경성제대의 대표 간행물이었다.[8] 1925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시 <봄>이 선외가작(選外佳作)으로 뽑힌 일이 있다.[9] 1886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키플링이 인도를 배경으로 한 40개 단편을 모아 1888년 발간한 작품집 <Plain Tales from the Hills>에 재수록된 작품이다.[10] 이효석이 예이츠나 싱 같은 아일랜드 작가, 그리고 인도를 다룬 키플링의 작품에 관심을 가졌던 데는 당시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영문학 전공 주임이자, <아일랜드문학사>(愛蘭文學史)(1925)를 저술한 사토 기요시 교수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11] 1924년 ~ 1926년, 경성제일고보 교유로 근무했으며,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1927년 경기도경찰부에서 경부로 근무했으며, 1928년 3월 경찰관강습소 교수 겸 조선총독부 사무관으로 임명되었다. 유진오의 젊은 날의 초상에 실린 1927년 3월 27일 자 일기에 나오는 K선생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1927년 당시 조선 생활 22년 그리고 고등관 6등의 직위에 있었다. 출처 : 검열연구회, <<식민지 검열: 제도 텍스트 실천>>[12] 융희 2년(1908년) 생으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약하기도 했던 사회주의 계열 문인이다. 평론가로서 민족주의 문학론을 발표했고, 임화, 백석과 마찬가지로 해방 뒤에 월북한 탓에 한국에는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에서도 창작 활동을 이어나간 듯 하지만 언제 죽었는지도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결말이 좋지는 못했었던 모양.[13] 대한민국의 영문학자, 기자, 문학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문학 전공 졸업 후 《매일신보》 기자, 《경향신문》,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 《국도신문》 주필과 《서울신문》 논설위원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초기 영문학자 중 한 사람으로 다양한 영미문학을 한국에 소개하였으며, 고려대학교 영문학과 교수(1953~1975)로 재직하였다.[14] 이미 용평초등학교 이전 공사까지 겹쳐서 진입로를 만듦에 따라 묘소의 가장자리가 깎였는데, 원래 진입로는 예정에 없었으나 주민들의 요구로 더 깎아냈다.[15] 1998년 4월 한식 때 묘소 훼손 광경을 본 장녀 이나미 측은 평창군의 비협조적 태도 탓에 분노해 이장을 추진코자 하자, 지역사회 측이 이에 반발한 것이다.[16] 1931년 출간된 단편집. <도시와 유령>, <기우>, <행진곡>, <추억>, <상륙>, <북국사신(北國私信)>, <북국점경(北國點景)>, <노령근해> 등 8편이 수록되어 있다.[17] 1939년 출간된 단편집. <돼지>, <삽화>, <수난>, <산정(山精)>, <장미 병들다>, <막(幕)>, <부록>, <해바라기> 등 8편이 수록되어 있다.[18] 1941년 출간된 단편집. <메밀꽃 필 무렵>이 바로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수탉>, <산양>, <독백>, <일기>, <석류>, <계절>, <공상구락부(空想俱樂部)> 등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19] 1940년 신문 연재 시 제목은 『창공(蒼空)』이나 단행본으로 발간 시 게재되었다.[20] 하지만 하길종의 화분은 이효석의 원작보다는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영화 〈테오레마〉(1968)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21] 최금동(崔琴桐, 1916~1995) 원작 시나리오를 이효석이 각색한 작품이다. 최금동은 이 작품의 원작 시나리오로 데뷔하여 광복 이후 한국 시나리오 문학계를 이끌어 간 인물로서, 시나리오작가협회 회장을 7차례나 역임하고, 1970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을 수상하였다.[22] 당시 근대 작가들의 상당수는 통속 소설(특히 역사 소설, 딱 지금의 무협지 같은 위상이었다)을 냈었다. 90년대 말 ~ 2000년대 이후 미시사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이쪽에 대한 조망도 많아졌다.[23] 이에 이나미의 아들(이효석의 외손자)이 의료사고라고 주장하며 한동안 장례를 치르지 않았으며, 병원 측은 폐렴 등 합병증으로 숨졌다며 반박했다. 후술할 트위터에 따르면 2021년 병원 측이 일부 승소했다.[24] 운영은 이효석문학연구회가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