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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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河吉鍾 | Ha Gil-jong
파일:7705c1fd-2698-47e2-9fe6-0a6c169a71e0하길종.jpg
출생 1941년 4월 13일
경상남도 부산부 초량정
(現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사망 1979년 2월 28일 (향년 37세)
서울특별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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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진주 하씨 시랑공파
학력 중앙초등학교 (졸업)
경남중학교 (졸업)
중동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불어불문학 / 학사)
UCLA 대학원 (영화학 / 석사)
데뷔 1972년 영화 '화분'
가족 9남매 중 일곱째
남동생 하명중
배우자 전채린[1]
자녀 아들 하지현

1. 개요2. 유년시절3. 학창시절4. 감독 생활5. 기타6. 하길종의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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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영화감독.

1941년 태어나 1979년 세상을 뜰때까지 짧은 생애 동안 7편 밖에 만들지 못했으나, 그 실험정신과 모더니즘 때문에 한국의 천재 감독으로 평가 받는다.

2. 유년시절

부산 초량에서 아홉 형제중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5세에 어머니가, 10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가세가 기울어 친척집을 전전하며 어려운 유년 생활을 보냈다. 경남중학교 졸업 후 서울에 있는 형에게 가서 중동고등학교를 입학하게 된다. 여기서 평생의 친우인 김지하를 만나게 되는데, 단짝으로 붙어다니며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하길종이 중학교 졸업 후 일년 쉰 덕분에 학번은 하나 차이가 났지만 동갑이었기에 친구가 되었다고.

3. 학창시절

한국 문학의 전설이 된 서울대 문리대 60학번 중 한명으로 불문과로 진학한다. 불문과 김승옥, 김현, 김치수, 독문과 이청준, 염무웅, 김주연, 김광규, 영문과 박태순, 정규웅 등이 동기였고, 친우 김지하는 한해 전에 미학과에 입학해 있었다. 입학하자마자 4.19를 겪게 된 동기들과 학림다방에서 수많은 시간을 보내며 시와 문학에 대해 토론하였다고 한다.

잘생긴 외모는 늘 걸치고 다니는 군용 외투로도 가리기 어려웠으나, 대학 시절 내내 궁상 맞게 사는 덕에 김지하, 김승옥, 주섭일 등과 함께 '문리대 거지떼들'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심지어 어느날은 여행을 하던 도중에 머리를 밀고 수도를 위해 계룡산에 입산하기도 했다고. 3학년이던 1962년 초현실주의 작품을 담은 시집 <태(胎)를 위한 과거분사>를 자비로 출판하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은 거기까지였고 영화로 시선을 돌린다.

대학시절 김지하, 김승옥과 함께 '최악의 한국영화상'을 만들어 시상 행사를 열었고, '최악의 배우'로 무려 당대 최고의 스타 신성일을 뽑았다고 한다. 군자였던 신성일은 이 상을 받으러 직접 학교에 방문했다고. 이 둘은 10여년 후에 <속 별들의 고향>에서 감독과 배우로 다시 만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당시 최고의 영화사였던 신상옥 감독의 '신 필름'에 입사했으나, 영화판의 현실을 보고 몇달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불문과의 전공을 살려 에어 프랑스에 입사하였으며, 직원 보너스 형식으로 보내주는 홍콩 여행을 이용해서 미국 유학 비자를 받아낸다. 대학 동기들이 한일회담 반대 운동으로 데모를 하던 64년, 하길종은 훌쩍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 접시닦이, 청소부, 잡지 배달원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학비를 모은 하길종은 그 다음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Academy of Art University에 입학해서 사진과 미술을 공부하고, 이듬해에는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한다. 재학중 올 A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전설적으로 내려오고 있으며 영화 미학의 MA와 연출실기의 MFA 학위를 취득한다.

대학 재학중에 만든 작품은 <어느날> (65), <나의 환자> (67), <병사의 제전> (69) 등이 있으나 실전되었고, <병사의 제전>만 음성이 빠진 필름이 남아있다. <병사의 제전>으로 MGM사에서 메이어 그랜드 상을 받았다. UCLA 대학원 동기로 대부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있고, 상당히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대학원 재학중에 유학중이었던 수필가 전혜린의 동생인 불문학자 전채린과 결혼한다.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딱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가 무르익을 무렵 유학을 다녀온지라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와 한국 영화 간의 관계를 설명 할 때 빠짐없이 언급하기도 한다.

우수한 성적으로 UCLA 강사 자리가 보장되어 있었지만, 군대 미필로 인한 정부의 제재 때문에 1970년 아내와 아들과 함께 귀국한다.

4. 감독 생활

사상 첫 유학파 감독이어서 충무로에서 기대가 컸으나, 시대를 앞서간 터인지 초기작들은 작품성에 비해 흥행에는 실패한다. 72년 이탈리아의 거장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감독의 <테오레마>를 오마쥬한 영화 <화분>으로 충무로에 입봉하지만 흥행에 실패했고, 두번째로 야심차게 영화적인 실험을 시도한 74년 <수절>도 차가운 비평을 받았다. 당시 쾌락주의와 호스테스 영화로 도배되던 충무로에서 이상주의와 이데올로기 담론으로 점철된 그의 영화가 관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동생의 집을 팔아가며 만든 영화의 실패로 압박을 받은 하길종은 74년 8월 <오적>으로 감옥에 갇혀있던 친우 김지하에게 편지를 보내며 본인의 암울함을 토로한다.
신부여, 당신은 알것이다. 이 상실된 여름의 무거움을, 자유를 잃고 있는 시인의 여름을, 신부여 당신은 알것이다. 땀에 젖은 비문

실험정신을 버리고 흥행을 선택한 하길종은 한국영화에 길이 남을 명작 바보들의 행진을 내놓아 서울 관객 15만을 모으며 흥행 감독의 대열에 들어가고, 이후 <별들의 고향(속)>, <병태와 영자> 등 대중영화를 내놓기 시작한다. 흥행에 고무되어 77년 <한네의 승천>으로 다시 예술영화를 시도해 보기도 했으나 차가운 반응에 다시 포기해야 했다.

하길종은 언제나 충무로의 아웃사이더이기를 자처했다. 현실과 안주하던 충무로의 관행에 대해 언제나 목청을 높이고 싸움을 걸어댔고, 그 대표적인 예가 특유의 독설 섞인 평론들을 충무로의 다른 감독들에게 실명으로 날려대던 그의 칼럼들이었다. 하길종은 8미리 소형 영화운동을 주도 했고, 대학강단에서 고급 영화인구의 확대를 주장했다.

하길종은 또 국내 첫 영화인 연대인 영상시대 창립을 주도했다, 비록 두권의 영화 잡지를 내고 빠르게 퇴색한 동인이지만, 하길종·이장호·김호선·변인식·이원세·홍파 등 젊은 영화인들이 모여서 단체를 주도한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잘나가던 30대 영화인들이 주도한 이 모임은 신인배우와 연출지망생들의 공개모집이라는 파격적인 이벤트를 기획했고, 정지영, 이황림, 장길수, 이세민, 차현재 등의 영화 감독과 최민희, 서나미, 한우리, 이영하, 임성민, 김만등의 배우들을 데뷔 시키는 통로가 되게 된다.

하지만 유신시대의 끝없는 검열은 하길종을 지치게 만들었고, 그의 영화들 대다수는 복원 불가능한 검열의 칼질로 훼손 되어야 했다.

그의 가장 대중적인 성공작인 <바보들의 행진>도 검열의 손길을 피하지 못했다. 네 차례에 걸친 사전검열로 시나리오는 만신창이가 되었고, 완성된 필름에는 다섯 장면 삭제, 네 장면 길이 단축, 세 개 대사 삭제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야구경기 응원 간다고 학생들이 단체로 강의실을 나가는 모습은, 본래 데모에 참가하기 위해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 하 감독은 심의를 통과한 직후, 삭제된 필름을 다시 붙여 온전한 판본을 국도극장에 걸었지만 이 역시 당국이 파견한 요원들의 감시를 피하지 못하고 네거티브 필름을 압수당했다.

<바보들의 행진>의 현재 남아있는 분량은 102분. 검열을 받기 위해 제출할 당시의 공식적인 러닝타임 117분에서 잘려나간 15분은 영영 복원할 수 없게 되었다. 주제가인 송창식의 ‘왜 불러’와 영철의 테마곡인 ‘고래사냥’ 역시 금지곡 판정을 받았다.

스트레스를 술로 달래던 하길종은 결국 <병태와 영자>가 스카라극장에서 상영중이던 79년 2월 23일 잡지 편집자 인명관과 함께 극장주변 맥주집에서 술을 마시다 잔을 놓고 탁자에 엎드려 그대로 사그러지듯 타계한다.[2] 향년 37세였다.

5. 기타

아들인 하지현은 건국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로, 저서들을 통해 간간히 부친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최근에 언론에서 업계 전문가로 자주 등장하고 있고 저서들도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에 관심있다면 읽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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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은 배우 겸 영화 감독인 하명중. [3]미남배우인 하명중의 친형이며 하길종 본인도 배우의 길을 걸을뻔 한 적이 많다고 한다. 영화 마부의 강대진 감독은 하길종을 서울대학교까지 쫓아가서 배우하라고 했었다. 한국 영화사에서 감독 중에서는 한국의 장 가방이라는 별명이병일 감독과 더불어 가장 미남 감독이다. 잘생긴 외모와 더불어 당시 충무로에서 유일하게 저항정신이 투철하여 대학생들로부터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잘생긴 본인의 얼굴이 쑥스러워서 수염을 기르기도 하고 일년 내내 바바리 코트를 입고 다니기도 하며 양치질을 안 하고 늘 껌을 씹었다고 한다.

제자로 박평식 평론가가 있다. 그래서인지, 하길종 감독 관련 연구를 찾다보면 박평식 평론가가 기여한 연구를 자주 볼 수 있다.

욱하는 성질이 강해서 오늘날 강준만교수가 했던 실명 비판을 술자리에서 선배를 불문하고 여러 동료들에게 하는 바람에 많이 맞았다고 한다.

또한 영화를 촬영하다 장발 단속을 나온 경찰과 충돌한 일이 있었다.

영화감독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현 서울예전의 교수, 고려대,한양대 강사, 그리고 틈틈이 번역가 일을 했다. 번역서로는 캐리, 스타워즈, 엑소시스트[4]등이 있다.

또한 충무로에서 유일하게 유학경험이 있는 감독으로서 평론가로도 일을 했다. 평론가 일을 하면서 김기영 감독과 유현목 감독을 제외하고 당시에 유명한 감독들을 무차별적으로 비판해서 기성 감독들이 하길종 감독을 싫어했다고 한다 일례로 김응천 감독의 청춘영화를 당시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에 '애들 돈 빨아먹는 영화'라는 식의 평을 써서 김응천 감독이 편집용 가위를 들고 하길종 감독의 여관방에 쳐들아가 해코지 하려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6. 하길종의 작품들



[1] 번역가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전혜린의 여동생이다.[2] 월간조선에 실린 그의 일생과 작품세계를 다룬 기사에 따르면 그는 고혈압을 앓으면서도 약 먹기를 거부하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는데, 당시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다가 형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동생 하명중이 그를 업고 혜화동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그는 닷새 만에 숨을 거뒀다고 한다.[3] 하명중 감독의 아들인 하준원 또한 영화감독인데, 2024년 개봉된 '데드맨'을 연출하였다[4] 범우사에서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