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23:15:32

박태원(소설가)

<colbgcolor=#000><colcolor=#fff>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박태원
朴泰遠 | Park Tae-won
파일:Park Taewon.jpg
출생 1909년 12월 7일
대한제국 한성부 다방골
(現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
사망 1986년 7월 10일 (향년 77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국적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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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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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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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1909~1910)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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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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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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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1910~1945)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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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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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1945~1986)
본관 밀양 박씨
구보(丘甫, 仇甫, 九甫)[1] / 몽보(夢甫) / 박태원(泊太苑)
학력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호세이대학 (법정학 / 중퇴)
직업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데뷔 1926년 시 《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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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부모 아버지 박용환
어머니 남양 홍씨
배우자 김정애 (1934년 결혼)
권영희 (1956년 재혼)
자녀 장녀 박설영(朴雪英)
차녀 박소영(朴小英)[2]
장남 박일영(朴一英)
차남 박재영(朴再英)
삼녀 박은영
의붓딸 정태은[3]
친인척 숙부 박용남
친조카 박철호, 박찬호
둘째사위 봉상균
외손녀 봉지희
외손자 봉준수, 봉준호
외손부 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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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일제강점기2.2. 일제강점기 후반2.3. 월북
3. 작품
3.1. 골목 안
4. 기타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 조선의 소설가, 시인, 문학평론가. 이상, 정지용 등과 더불어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2. 생애

2.1. 일제강점기

박태원은 1909년 대한제국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7세 무렵 학교를 휴학하고 외국문학 작품을 탐독했다. 경성제일고보 시절인 1926년에 시 "누님"으로 등단했다.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호세이 대학 예과에 입학하였으나 이듬해에 중퇴하였다. 이 시기의 일본 유학 체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로 1933년 발표한 「반 년간」이 있다.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1930년 소설 「수염」, 「적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비슷한 시기 헤밍웨이, 맨스필드 등 영미 작가들의 최신 문학 작품들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본격적으로 문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33년 이상,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조용만, 이효석 등과 함께 문학 동인들의 모임인 구인회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실험적인 기법과 문장을 문학의 본령으로 내세워 ‘기교파’ 또는 ‘예술파’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박태원의 소설은 당시에도 꽤 모험적이고 실험적인 시도였기 때문에 경향문학이 주류였던 당대 문단에서 꽤 독한 비판을 받았다. 박태원은 <내 예술에 대한 항변-작품과 비평가의 책임> 등의 글에서 이런 비판에 대해 항변한 적이 있지만, 이후로도 비판은 계속 되었다. 카프와 박태원과의 불화는 후일 있을 월북의 이유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작가인 이상과 친구 사이였다.「애욕」과 「제비」, 「이상의 비련」 등은 절친한 벗이자 문학적 동지인 작가 이상을 모델로 한 것이다. 친구인 이상과 시인인 윤동주이제 만나러 갑니다 528화에 방송되었다.

2.2. 일제강점기 후반

일제의 압력이 심해진 1940년대, 작가 본인이 친일파로 전향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2009년 민족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는 포함되지 않음.) 다만 아세아의 여명(1941.2), 군국의 어머니(1942), 「원구(1945.5-8)」 등 일제의 대동아전쟁을 찬양하고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친일 성향 작품들을 발표한 것은 사실이다. 이 시기의 박태원의 대표작 중에 하나인 「채가」에서는 일본인 와타나베에게 진 빚을 갚을 길이 막막해 전전긍긍하던 주인공 조선인 남성이 결국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 놓으려 와타나베를 찾아가자, 와타나베가 조선인과 일본인은 배다른 형제라면서 통 크게 빚을 탕감해주고, 이에 감동을 먹은 주인공은 와타나베 앞에서 울면서 고개를 조아리며 서투른 발음으로 '고멩나사이'를 반복하여 외치고, 여지까지 찝찝한 마음에 미뤄 두었던 창씨개명을 기쁜 마음으로 하러 간다는 결말로 스토리를 맺는다.

2.3. 월북

6.25 전쟁 때 아내와 자식을 두고 홀로 월북하는데 월북 사유가 가장 미스테리한 작가다. 전형적인 서울 토박이면서 모던보이였던 박태원의 월북동기에는 문학사적으로도, 소설미학적 측면에서도 의문이 생긴다. 구인회 시절 절친한 동료였던 이태준을 따라 6.25전쟁 중 정인택 설정식 이용악 등과 함께 북한으로 가게 되었던 것으로만 알려져 있다.

월북 전 그의 생애는 공산주의 이념과는 거리가 있었다. 30년대 등단 무렵 ‘성탄제’ ‘사흘 굶은 봄 달’ 등을 통해 카페 여급이나 서울 변두리 지역의 민중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계급 이데올로기적 접근은 아니었다. 이기영, 한설야, 임화처럼 원래 경향주의 문학을 하던 사람도 아니고, 이용악, 백석처럼 고향이 이북인 것도 아니다. 고향은 남쪽이고 일제강점기에 경향문학 작가들과 사이가 매우 나빴으며, 북에 힘있는 지인도 없으며, 가족들도 남쪽에 두고 올라갔다. 월북할 당시 그는 가족들에게 "친구 이태준이를 만나러 간다."라고 하고 나갔다고 한다.

정인택의 차녀이자 정인택의 사후 박태원 슬하에서 자란 북한 소설가 정태은의 글을 통해 월북 후 행적이 조금이나마 알려져 있다. 월북한 박태원은 평양문학대학에서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하지만 이태준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숙청됐던 ‘8월 종파사건’ 이후 남로당 계열이라는 이유로 숙청당하고 4년 간 평안남도 강서 지방의 한 집단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하며 지내다가[4] 1960년에 다시 대학교수로 복귀하였다. 그러나 강제 노동의 후유증으로 영양실조를 겪은 그는 건강이 악화되어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16권으로 계획하고 1964년 제1권을 탈고하고 2권을 집필하던 중에 갑자기 시력이 나빠져 병원에 가보았더니 양안 시신경 위축이란 진단이 나왔다고 한다.

그는 실명되기 전에 한 장이라도 소설을 더 쓰기 위하여 서둘렀다. 시력 보충을 위해 새로 도수 높은 확대경을 준비했고 1965년 어느 날, 평양에 돌아와 자료를 읽던 그는 눈앞이 캄캄해지며 쓰러졌다. 둘째 권이 거의 끝날 무렵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원고지 모양으로 특수 틀을 만들어 손가락으로 더듬어 글을 썼다. 1976년에 뇌출혈로 두번째 쓰러져 당초 계획한 16권을 <갑오농민전쟁> 삼부작으로 바꾸어 집필을 계속했다. 그로부터 부인 권영희에게 구술로 받아쓰게 하여 2부까지 마치고 1981년에는 언어장애까지 와서 구술능력을 상실한다.

특히 마지막 3부를 지을 때는 구술 능력까지 상실하여 후처 권영희[5]가 자료를 가지고 작성한 원고를 불러 주면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만 할 수 있었기에 공동 저작으로 발표되었다. 결국 이 소설의 완간을 보지 못한 채 1986년 7월 10일고혈압으로 타계했다. 이듬해인 1987년에 마지막 3부가 완간됐다. 박태원의 병석을 지키던 권영희가 전한 몇 장의 편지에는 남한에 남겨두고 온 자식들에 대한 회한 넘치는 글귀가 보인다. “어디 이름들이나 한번 불러보자. 소영이, 일영이, 재영이, 은영이, 내 그지없이 사랑하는 아들딸들아!” #

박태원의 소설은 1987~88년에 월북, 납북작가들의 광복 이전 작품 출판과 판매가 해금될때 함께 해금되었다. 대표적인 모더니즘 작가답게 소설이 난해한 편이고 월북 이후 저작권이 붕 떠버려 판권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서 문제를 내기 좋아서인지 평가원이 좋아하는 작가 중 하나로 평가원 모의고사수능 국어 영역에서 박태원의 작품은 꽤 자주 출제 되는 편이다. 특히 박태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천변풍경은 수능에 2번 이상 출제된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다. 2024학년도 수능에도 그의 작품인「골목 안」(1939)이 출제되었다.

3. 작품

대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는 의식의 흐름을 제대로 살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6]과 <천변풍경> [7],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방란장 주인>등이 있다.

이후 카페 여급, 도시빈민 등 도시의 주변적인 삶을 조명한 「성탄제」, 「골목안」을 비롯하여, 사이비 종교인 백백교의 집단 살인 사건을 소설화한 『우맹』(후에 『금은탑』으로 개제), 『명랑한 전망』, 『여인성장』 등의 장편소설을 발표하였다.

1938년 잡지 <소년>에 탐정소설인 <소년탐정단>을 연재했다.

1940년 돈암동에 집을 지어 이사한 뒤에 겪은 일들을 토대로 한 소설 「음우」, 「투도」, 「채가」를 발표하였다. 이는 일제 말기 작가로서의 내면의 갈등을 생생하게 고백하고 있어 ‘자화상 3부작’으로 불린다. 이 시기 중국 문학과 역사물 번역도 활발하게 이어나가 『신역 삼국지』, 『수호전』, 『서유기』, 『지나소설집』 등을 번역하였다. 이중 박태원이 번역한 삼국지는 현재도 출간되어 있다. 길용우가 읽는 박태원 삼국지 오디오북으로도 제작되었다.

3.1. 골목 안

파일:할매턴우즈.png

여담으로 골목안은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출제되었다. 동 작가의 소설인 방란장 주인을 연상케 하는 문체로 인해 당시 수험생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해당 문제 정답률이 역대급 불수능 국어로 꼽히는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브레턴우즈 체제 지문과 유사하다는 점에서[8] 할매턴우즈라는 별명이 생겼다. 수능에 출제된 문학작품 목록 참고.[9]

4. 기타

  • 박태원이 쓴 수필에 의하면, 저 바가지머리는 억센 직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헤어 스타일이라고 한다. 결혼하고 나서도 머리 관리가 귀찮아 저 머리를 고수했다고 한다.[10]
  • 영화 감독 봉준호가 그의 외손자다. 정확히는 6.25 전쟁대한민국에 남겨진 첫 번째 부인에게서 나온 차녀의 아들이 봉준호. 봉준호가 기생충으로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후 출판업계에선 이 관계를 거론하며 박태원 작품 홍보에 활용했는데, 정작 봉준호 본인은 박태원에게 재능이나 영향을 받았냐는 질문에도 그래픽 디자이너인 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 저작권이 꼬여서 전집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는 작가다. 위에 언급된 월북작가들 작품이 시장에 해금되던 89년 차남 박재영이 <갑오농민전쟁> 출판건으로 저작권 문제로 소송을 제기해 한바탕 시끄러웠다. 북에 올라가 중혼 하는 바람에 출판사의 저작권 관련 이해가 달랐기 때문이다. 당시 깊은샘 출판사가 박재영과 판권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는데, 공동체 출판사가 <갑오농민전쟁>은 북한에서 저술했으므로 저작권은 남한에 있는 후손이 아닌 중혼한 부인 권영희에게 있다 판단해 출간을 시도한 것. 법원은 중혼을 인정치 않는 대한민국의 법률에 따라 깊은샘 출판사의 손을 들어줬다. 일시적으로 이렇게 봉합되긴 했지만 저작권에 대한 법률과 인식은 점점 강화되는데, 후손은 남북으로 갈려져 있고, 남북관계 악화로 2000년대 논의되던 남북간 저작권 관련 논의도 중단된 상태이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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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래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도 그의 작품이다.[2] 영화감독 봉준호의 어머니.[3] 권영희와 전 남편 정인택 사이의 딸.[4] 주기적으로 지식인 계층을 노동 현장에 보내는 '하방' 조치보다는 숙청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5] 6.25 전쟁 때 같이 월북한 작가 정인택의 아내로, 정인택이 휴전을 앞두고 1952년에 사망한 뒤 1956년에 박태원과 재혼하였다. 정인택과 결혼하기 전 이상의 연인이기도 했다. 참고로 정인택은 박태원과 고교 동창이자 절친했던 사이로, 대표적인 친일 문학인으로 악명이 높은 소설가이다. 정인택은 특이하게도 일본 제국뿐만 아니라 히틀러까지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6] 중편 소설로, 1938년 출간된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성탄제>, <옆집 색시>, <5월의 훈풍>, <사흘 굶은 봄달>, <피로>, <딱한 사람들>, <전말>, <거리>, <길은 어둡고>, <비량>, <진통>, <방란장 주인> 등 12편이 수록되어 있다.[7] 청계천변 주민 삼십여 명의 일상사를 다루는 개별 삽화 형식의 소설로 한국 현대문학의 리얼리즘 걸작이라 평가받는다. 1938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8] 화법과 작문 선택자 기준 28번, 30번의 오답률이 각각 62%, 70%였다.[9] 사실 이건 평가원이 의도적으로 줄거리를 이해할 수 없도록 맥락없이 전문을 잘라서 낸 까닭도 있다. 실제로 전문을 읽어보면 매끄럽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10] 여담이지만 외손자인 봉준호 감독은 동양인 치고는 상당히 심한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유전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