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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설야

조선문학가총동맹 위원장
한설야
韓雪野
파일:Hanseolya.png
출생 1900년 8월 3일
함경남도 함흥군 주서면 하구리[1] 503번지[2]
(現 함경남도 함주군 주서리)
사망 1976년 4월 6일 (향년 75세)
자강도 시중군[3]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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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한병도(韓秉道)
필명 설야(雪野)·만년설(萬年雪)·한형종(韓炯宗)
김덕혜(金德惠)·윤영순(尹英順)·H생
본관 청주 한씨[4]
부모 아버지 한직연(韓稷淵, 1863. 4. 1 ~ 1926)
어머니 전주 이씨(1870 ~ 1951)[5]
형제자매 형 한병무(韓秉武, 1893 ~ ?)
배우자 전주 김씨[6](사별)
김씨(1906 ~ ?)[7](재혼)
자녀 장남 - 한형원(韓炯元, 1925 ~ )
차남 - 한욱(韓旭, 1927 ~ )
삼남 - 한영(韓英, 1927 ~ )
사남 - 한형주(韓炯柱, 1934 ~ )
학력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전학) →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
함흥법학전문학교 (제적)
익지영어학교 (사회과학 / 중퇴)
니혼대학 (사회학 / 중퇴)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로고타입.svg

1. 개요2. 생애3. 경력4. 작품 목록
4.1. 해방 이전(1925-1943)4.2. 해방-한국전쟁(1945~1953)4.3. 한국전쟁 이후(1955-1962)4.4. 기타: 아동문학
5. 관련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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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겸 문학가.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본명은 한병도(韓秉道)이다. 한설야 이외에도 설야(雪野)·만년설(萬年雪)·한형종(韓炯宗)·김덕혜(金德惠)·윤영순(尹英順)·H생 등의 필명을 사용한 바 있다.

2. 생애

1900년 8월 3일 함경남도 함흥군 주서면 하구리(現 함주군 주서리)에서 아버지 한직연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로 대대로 함흥 인근에 세거하였는데, 직계 10대조 이후로 1대도 거르지 않고 벼슬을 했을 정도로 명문가였다.[8] 아버지 한직연은 1894년(고종 31) 진사시에 3등 123위로 입격한 뒤 구한말 삼수군수를 지냈다. 1909년 2월 삼수군수에서 해임된 이후 1914년 평안남도 진남포부에서 의사로 개업하였고[9], 1915년과 1916년 두 차례 다른 사람의 철광산을 양도받아 광산업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통해 한설야의 집안은 명문 양반가로서 가세가 매우 풍족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평안남도 숙천군 서부면 당하리 67번지(現 숙천군 숙천읍)으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고, 1915년 아버지를 따라 상경해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후일 정적이 되는 박헌영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동기사이. 그러나 새어머니와의 극심한 갈등으로 인하여 1918년 경기도 경성부를 떠나 고향 함흥부에 있던 함흥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해 1919년 졸업했다. 졸업 당시 전국적으로 일어나던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그 결과로 3개월 정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함흥법학전문학교에 진학했지만 재학 중에 반일 성향의 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학교에서 제적되었다.[10] 이듬해인 1920년 중화민국으로 건너가 베이징에 있던 익지영어학교(益智英語學校)에서 1년간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중화민국 육군성에 근무하던 조선인 관리의 집에서 가정교사 노릇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1921년 귀국해 북청군 학습강습소에서 교사로 근무했고, 이때 《매일신보》에 시 「부벽누에셔」를 발표했고, 이후 정식으로 등단하기까지 10여 편의 창작시와 번역시, 소개문, 추도문 등을 발표했다. 1923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니혼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해 유학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를 하며 사회주의에 본격적으로 입문했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대학을 휴학하고 그해 가을 귀국했다. 1924년 북청군 대성중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북청자전거운동회 사건'으로 인해 북청군을 떠났다.

1925년 1월 단편소설 「그 날 밤」(『조선문단』)으로 문단에 등단하였다.[11]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신나게 까내리던이광수의 추천을 통해 등단하였다.[12] 이 가운데 1926년 봄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과 함께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무순현(撫順縣)[13]으로 이주했고, 창작활동을 지속했다. 이 시기 겪었던 경험들은 이후 그의 작품에 자주 형상화된다. 1927년 1월 다시 조선으로 귀국했고, 카프에 가입했다. 그의 글에 따르면 이 시기 이기영조명희를 알게 되고 친해진다.
말하자면 그 때 포석(조명희)와 민촌(이기영)과 나는 한 가지로 문학에 뜻을 둔 청년이었다. (중략) 사실 나는 그들의 문학론보다도 그들의 작품보다도 인간으로서의 그들을 더 좋아하였던 것이다. - 「포석과 민촌과 나」(1936)

당시 한국의 문단을 주도한 흐름은 소위 '경향주의'라 불리는 사회주의 계열이었고, 이 경향주의 성향의 작가들이 한 데 모인 조직이 바로 카프였다. 이윽고 한설야는 카프의 주요한 멤버로 발돋움하였고, 1927년 카프의 새로운 강령에 초안이 되는 「프로 예술의 선언」(동아일보, 1926년)을 발표하였다.
'사회를 위한 예술.' 이것이 우리 프로(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의 기치에 새겨져 있는 선언 강령이다. - 「프로 예술의 선언」의 마지막 부분.

이 시기부터 사회주의적인 성향을 본격적으로 발산하며 카프 논쟁에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당시 아나키즘 논쟁의 구심점에 있던 김화산(金華山)과 제3전선파의 이북만(李北滿) 등과 주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여러 편의 문예학 및 사회과학 원론들을 발표한다. 1928년에는 문예운동의 방향 전환을 위해 박영희 등 카프 지도부를 비판하는 「문예운동의 실천적 근거」라는 원론을 발표하는데, 이 때문에 카프 내부 논쟁에서 여러 비판을 안게 되어 창작을 위해 자신의 눈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보고 경험한다는 명분으로 함경남도 함흥부 사포정 150번지(現 함흥시 사포일·이·삼동)에 1년간 거주하면서 조선일보사 함흥지국을 경영했다. 이 시기 「과도기」, 「씨름」 등의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고, 1929년 여름에는 압록강백두산 일대의 국경 지방을 여행했다.

1930년 상경해 조선지광사에 입사하고, 《신계단》, 《대조》, 《조선지광》 등의 잡지를 편집하는 데에 관여했다. 1933년에는 조선일보사에 기자로 입사했고, 간도에 특파되어 그해 9월 23일 중국공산당 동만주특별위원회와 연길현위원회에서 조직한 '연길현 유격대'가 반일 산림대와 연합해 연길현 팔도구(八道溝)[14]경찰서를 습격한 '팔도구 습격전'을 취재했다. 그 뒤 신건설사(新建設社)라는 사회주의 연극 단체에 가입해 사회주의 운동 및 창작활동을 벌이던 중 1934년 11월 사회주의를 본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 일제에 '카프 제2차 사건' 연루 혐의로 체포되었고, 전주감옥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35년 12월 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곧 출옥했다. 출옥 후 귀향해 동명극장과 인쇄소를 창업했고, 1936년에는 자신의 첫 장편소설인 「황혼」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활동을 벌였다. 1940년 6월에는 왕징웨이 정권 치하 하북성 북평시(北平市)를 두 번째로 방문했다. 그 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문석준(文錫俊)과 함께 유언비어 유포 및 비밀결사 조직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인 1944년 5월 병보석으로 석방되었고, 고향에서 자전적 장편소설 《해바라기》를 집필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북한 문학계와 정치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45년 9월 리기영과 함께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결성하고, 그해 12월 10일 분열된 문학계의 통합 논의를 위해 상경해 아서원 좌담회 및 봉황각 좌담회에 참여했다. 이후 12월 말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함경도 대표로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고, 이때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단체 조직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당시 문인 중에서 가장 발빠르게 김일성 우상화에 착수했다. 1947년 7월부터 9월까지는 소련을 여행했고, 당시 경험들을 토대로 이듬해인 1948년 《쏘련 여행기》를 저술했다. 1948년 7월 7일, 북조선인민위원회 결정 157호에 따라 남일, 리문환, 리순근, 리동화, 허남히, 리병제, 정준택, 계응상, 장기려, 태성수와 함께 고등교육원 내에 설치된 최고과학기술평의회 성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리고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에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교육문화상(장관급) 등의 고위직을 역임하였다. 1949년 4월에는 '평화 옹호세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나중에 박헌영숙청 당하면서 남로당 계열의 문인이었던 임화, 김남천부터 이태준에 이르기까지 싸그리 숙청 당한 것에 비하면 대조적이다. 한설야는 당중앙위원회 문화부장을 역임, 북한 김일성 정권을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당시 이들의 숙청을 주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소련계 선전책임자 기석복, 송진파, 정률 등을 숙청하는데 앞장선 것도 한설야였다. 1958년 9월 7일, 강량욱, 강영창, 김두삼, 김회일, 리기영, 리송운, 리일경, 리천호, 리희준, 백남운, 정두환, 진반수, 최철환과 함께 공훈이 있는 국가기관, 정당, 사회단체 지도일군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1급을 받았으며 1958년 10월 2일, 최고인민회의 2기 4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고, 그해 《력사》로 인민상을 수상했다. 당시 한설야 선집이 15권 계획으로 출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60년대 사석에서 김일성을 비판한 것이 발각되어[15] 1962년부터 김창만 등을 비롯한 김일성 세력이 한설야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그해 12월 10일 조선로동당 4기 4차 전원회의에서 한설야에 대한 숙청이 결정됐다. 이듬해인 1963년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강도 시중군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이후 생사불명이 되었다. 단편소설 「개선」 (1948)을 시작으로 장편소설 『역사』 (1953) 등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부각시켜주었던 소설을 썼던 걸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발언혐의가 적용되자마자 토사구팽당했다.

훗날 북한에서 한설야가 복권되어 애국렬사릉에 안장되면서 1976년 4월 6일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설야를 빼놓고는 북한에서 문학이론을 설명하기 힘들어지니 그만큼 그의 문학이론과 작품이 북한의 문예이론 형성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일본과 공산권 국가에 조선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로 번역되어 널리 알려졌다. 사실상 1950년대 북한의 국민작가였다.

1990년대 김일성 사후 그와 카프작가들을 다룬 영화가 등장했다. 2003년 2월, "당과 수령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속에 주체의 문학예술발전에 기여했다"라는 짤막한 칭송과 함께 최승희 등과 함께 공식적으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경력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내각 교육상
1956년 11월 5일 1957년 8월 3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교육문화성으로 통합
내각 교육문화상
1957년 8월 3일 1958년 9월 1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임명
최고인민회의 2기 1차 회의에서 유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조동
2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58년 10월 2일 1962년 10월 23일 최고인민회의 2기 4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3기 1차 회의에서 임기만료

4. 작품 목록

4.1. 해방 이전(1925-1943)

표제 연도 수록 지면 비고
그날 밤 1925.1 조선문단 4
동경(憧憬) 1925.5 조선문단 8
그릇된 동경 1927.2.1-10 동아일보
평범 1926.2.16-2.17 동아일보
주림 1926.3 조선문단 14
사랑은 있으나 1927.4.24-5.8 매일신보
그 전후 1927.5 조선지광 67
산연 1927.6.12-6.19 매일신보
뒷걸음질 1927.8 조선지광 70
합숙소의 밤 1928.1 조선지광 75
홍수 1928.1.2-1.6 동아일보
인조폭포 1928.2 조선지광 76
과도기 1929.4 조선지광 84
한길 1929.5 문예공론 콩트 형식의 실화
씨름 1929.8 조선지광 86
새벽 1929 문예공론 삭제된 작품
가두에서 1930.1.1-1.8 중외일보
공장지대 1931.5 조선지광 96
사방공사 1932.11 신계단 2 「태양이 없는 거리」 1부
삼백 육십 오일 1932.12 문학건설 1
개답(開畓) 1932.12 신계단 3 삭제된 작품
교차선 1933.4.27-5.2 조선일보
추수 후 1933.6 신계단 9 「태양이 없는 거리」 2부
소작촌 1933.6 신계단 10 삭제된 작품
태양 1936.2 조광 4
황혼 1936.2.5-10 조선일보 장편소설
임금(林檎) 1936.3 신동아
1936.4 조광 6
홍수 1936.5 조선문학속간 1 『탁류 3부작』 1부
철로 교차점 1936.6 조광 8 「임금」의 속편
부역 1937.6 조선문학속간 11 『탁류 3부작』 2부
청춘기 1937.7.20-11.29 동아일보 장편소설
강아지 1938.9 여성 30
산촌 1938.11 조광 37 『탁류 3부작』 3부
귀향 1939.2.7 야담 43-47
이녕 1939.5 문장 4
보복 1939.5 조광 43
대륙 1939.6.4-9.24 국민신보
술집 1939.7 문장임시중간 7
초향 (마음의 향촌) 1939.7.19-1941.2.14 동아일보 장편소설
종두 1939.8 문장 7
태양은 병들다 1940.1-2 조광 51-52
모색 1940.3 인문평론 6
1940.8.1-1941.2.14 매일신보 장편소설
숙명 1940.11 조광 61
파도 1940.11 ?신세기 ?인문평론 13
아들 1941.1 삼천리 140
유전(流轉) 1941.4 문장 35 「그날 밤」의 개작
두견 1941.4 인문평론 16
세로 1941.4 춘추 3
1942.1 국민문학 일본어 소설
1942.12 국민문학 일본어 소설
젖(乳) 1943.2 야담 86 일본어 소설

4.2. 해방-한국전쟁(1945~1953)

표제 연도 수록 지면 비고
혈로 1946.8 우리의 태양 김일성 미화 소설
모자(帽子) 1946.8 문화전선 1
탄갱촌 1946.8
개선 1948.3 김일성 가문 미화 소설
얼굴 1948.10
남매 1949.8
자라나는 마을 1949.8
기적 1950.8
하늘의 영웅 1950.9 문예총
어느 날의 일기 1950
초소에서 1951.1 문학예술
전별 1951.3
승냥이 1951 우화소설
역사(歷史) 1951 장편소설
김일성 미화 소설
황초령 1952.6
땅크 214호 1953.3

4.3. 한국전쟁 이후(1955-1962)

표제 연도 수록 지면 비고
대동강 3부작 1955 작가동맹출판부 장편소설
3부작(대동강, 해방탑, 용악산)
설봉산 1956 장편소설[16]
레닌의 초상 1957.11 조선문학 레닌 신격화 소설
열풍 1958.9 조선문학 『탑』 속편
길은 하나이다 1958
강철 1958
아버지의 아들 1960.2 조선문학
사랑 1960 작가동맹출판사

4.4. 기타: 아동문학

  • 참고 자료
    • 이경재, 2015, 「한설야의 아동문학 연구 - 『금강선녀』를 중심으로 -」, 『어문연구』 167, 한국어문교육연구회, 155-181면.
    • 고자연, 2020, 『해방 후 한설야 문학 연구』, 인하대 박사학위논문, 94-97면.
표제 연도 수록 지면 비고
이상한 그림 1927.5.3 동아일보
만경대 1955 김일성 유년기를 다룬 김일성 미화 동화
아동혁명단 1955 『역사』 1-2부 수정 보완본
형제 1960.4.20 아동도서출판사
금강선녀 1960.11-1961.8 아동문학 작가의 유일한 장편동화
선녀와 나무꾼 개작
성장 1961.8 조선문학 「형제」 속편
버섯 1962.4.20 아동문학 112

5. 관련 연구

  • 이병순, 『한설야 소설 연구 - 「황혼」과 단편소설과의 연계를 중심으로』,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1.
  • 조수웅, 『한설야 현실주의 소설의 변모 양상 연구』, 조선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 남원진, 「한설야, '문예총'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사」, 『통일인문학』 60, 2014.
  • Brian Myers, Han Sorya and North Korean Literature: The Failure of Socialist Realism in the DPRK, Cornell University, 1994.


[1]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집성촌이다.[2] #[3] 재산몰수 후 자강도의 노동교화소에 구속 수감되었다가 사망하였다는 설이 있다.[4] #.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23세 병(秉) 항렬족보 일부 자료에서는 본관을 안변(安邊)이라고 하는데, 청주 한씨 예빈윤공파를 후손들 중 안변 한씨로 칭하기도 했던 것은 사실이나, 한설야의 15대조 한익지(韓翼之)의 1486년(성종 17) 생원시 입격 당시 사마방목을 보면 당시에 이미 본관을 청주(淸州)로 환원했음을 알 수 있다.[5] 이병호(李炳浩)의 딸이다.[6] 김민규(金旻奎)의 딸이다.[7] 김의완(金義完)의 딸이다.[8] 10대조 한곽(韓廓, 1616 ~ 1666) 선원전 참봉 - 9대조 한기천(韓紀千, 1645 ~ 1678) 1663년(현종 4) 진사시/1675년(숙종 1) 문과/사헌부감찰 - 8대조 한재원(韓在垣, 1663 ~ 1725) 1682년(숙종 8) 진사시/1702년(숙종 28) 문과/순천부사 - 7대조 한석건(韓錫健, 1688 ~ 1752) 참봉 - 6대조 한종제(韓宗濟, 1698 ~ 1791) 1733년(영조 9) 문과/부총관 - 5대조 한백림(韓栢林, 1740 ~ 1803) 1777년(정조 1) 생원시/서흥부사 - 고조부 한홍빈(韓弘玭, 1769 ~ ?) 1805년(순조 5) 생원시/지릉(智陵)참봉 - 증조부 한용근(韓用近, 1810 ~ ?) 1848년(헌종 14) 진사시 - 조부 한봉현(韓鳳鉉, 1843 ~ 1863) 통덕랑; 생조부 한귀현(韓龜鉉, 1831 ~ 1869) 1852년(철종 3) 진사시 - 부친 한직연(韓稷淵, 1863. 4. 1 ~ 1926) 1894년(고종 31) 진사시/삼수군수.[9] 1914년 6월 14일 면허 등록. 등록번호 490번. 당시 거주지는 진남포부 원당면 비석동.#[10] 정확히는 동맹휴학을 주도했다고 한다.[11] 사실상 작품이 창작된 연도와 잡지가 발간된 연도는 1924년도이기에, 북한에서는 1924년에 「그 날 밤」을 쓰고 등단했다고 이야기한다.[12] 이광수는 『조선문단』 창간호부터 1925년 1월호까지 주재자였다.[13]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푸순시.[14]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차오양촨진(朝陽川鎭) 바다오촌(八道村).[15] 흘러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이 무식하다고 씹었으며 결국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같은 예술가들이 더 위대하다는 식의 오만한 취중 발언이었다고 한다.[16] 1989년 한국에서도 동광출판사에서 출판된 적 있다. 김일성 항일투쟁운동 미화 소설이기 때문에 '김일성'을 '김'으로만 표기하는 등 수정 사항이 있다. 자세한 것은 남원진, 2014, 「한설야, '문에총'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사」, 『통일인문학』 60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