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李泰俊 | |
본명 | <colbgcolor=white,#2d2f34>이규태(李奎泰)[1] |
호 | 상허(尙虛), 상허당주인(尙虛堂主人) |
본관 | 장기 이씨(長鬐 李氏)[2] |
출생 | 1904년 11월 4일 |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 (현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 | |
사망 | 몰년 미상 |
국적 | [[북한|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서당 (한문 / 수학) 사립 봉명학교 (졸업) 철원간이농업학교 (1학년 / 중퇴)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 / 퇴학) 조치대학 (예과 / 중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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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소설가. 소설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조선의 모파상'이라는 별명도 있으며 일반적으로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고 불린다. 당대에 "시에는 정지용, 문장에는 태준"이라는 말이 있었다. 정지용은 그의 '지용문장독본'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남들이 시인 시인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못난이 하는 소리 같이 좋지 않았다. 나도 산문을 쓰면 쓴다. - 태준만치 쓰면 쓴다고 변명으로 산문 쓰기 연습으로 시험한 것이 책으로 한권은 된다.
이태준은 자신의 저서 <문장강화(講話)>에서 주장한 '일물일어설(一物一語說)'에 따라 소설을 썼다.[3] 실제 이태준의 소설은 2020년대에 와서 읽어도 누가 따로 설명하지 않는 한 1930년대 소설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문장과 구성이 현대 소설과 비슷하다.
문장가로서도 유명하다. 이오덕이 아래처럼 극찬했던 소설가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장력은 물론이고 삶을 절실하게 전달하는 표현력도 겸비한 작가였다.
문장이 아주 정확하여 어디 한 자리도 빈 틈이 없다. 역시 글을 갈고 다듬기를 남달리 애써 한 장인의 솜씨가 보인다.
ㅡ 이오덕(1992), 우리글 바로쓰기 2, 서울: 한길사, p. 445
보통의 작가로서는 체험을 넘어서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런 삶의 이야기가 이토록 진실한 느낌으로 가슴에 와닿는 것은 실지 현장의 조사기록과 관찰을 성심껏 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능숙한 우리 말 쓰기에다가 남다른 글 다듬기의 노력이 있었으리라 본다.
ㅡ 이오덕(1992), 우리글 바로쓰기 2, 서울: 한길사, p. 450
ㅡ 이오덕(1992), 우리글 바로쓰기 2, 서울: 한길사, p. 445
보통의 작가로서는 체험을 넘어서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이런 삶의 이야기가 이토록 진실한 느낌으로 가슴에 와닿는 것은 실지 현장의 조사기록과 관찰을 성심껏 했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능숙한 우리 말 쓰기에다가 남다른 글 다듬기의 노력이 있었으리라 본다.
ㅡ 이오덕(1992), 우리글 바로쓰기 2, 서울: 한길사, p. 450
2. 생애
2.1. 광복 이전
이태준 일가. 소남(둘째딸), 소명(맏딸), 부인 이순옥, 유진(차남), 이태준, 소현(막내딸), 유백(장남) |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현 철원군 철원읍 산명리[4])에서 아버지 이창하(李昌夏, 1876 ~ 1909. 8)와 어머니 순흥 안씨(? ~ 1912) 사이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5] 아버지 이창하는 1904년 덕원감리서 주사(德源監理署主事), 철원공립보통학교 교원 등을 역임한 개화파 지식인이었다.
1909년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였으나 그해 8월 아버지의 별세로 귀국하다가 함경북도 회령군 관해면 사리 배나루마을(현 청진시 이진동)에 정착하였는데 이곳에서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수학했다. 1912년 어머니마저 별세하여 천애고아가 된 그는 외조모와 함께 아버지의 고향인 철원군 서변면 율이리(현 철원군 철원읍 율이리) 용담마을로 내려갔고 그곳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졌다.
1915년에는 경기도 이천군 안협면에 있는 5촌 당숙(堂叔)의 집에 입양되었다가 같은 해 다시 용담으로 돌아와 또다른 5촌 당숙인 이용하(李龍夏)의 집에서 거처하면서 철원 사립봉명학교에 입학했다. 1918년 3월 봉명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그는 읍내에 있는 간이농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한 달 뒤 가출하여 여러 곳을 방랑하다 원산부 등지에서 객주집 사환 등의 일을 하며 2년을 보냈는데 이때 외조모가 찾아와 그를 보살폈는데 이 즈음 그는 문학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얼마 뒤 인척 아저씨가 거주한다는 만주 안동현에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경하였다. 1920년 4월 배재학당 보결생 모집에 응시하여 합격하였으나 입학금 마련이 어려워 결국 등록하지 못했다. 이후 낮에는 상점 점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야학에 나가 공부하면서 주경아독을 하였다. 1921년 4월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고학생이지만 비교적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6]
그러다가 4학년 병조(丙組)에 재학 중이던 1924년 동맹휴학을 주동한 혐의로 퇴학당했다.# 같은 해 가을 휘문고등보통학교 친구인 김연만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1925년 일본에서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하여 입선하여 데뷔했다. 1926년 4월 조치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는데 신문 및 우유 배달 등을 하면서 고학하였기 때문에 매우 궁핍한 생활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927년 11월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김용준의 〈이태준 초상〉(1928) |
귀국 후 1929년 잡지 《개벽》 등 여러 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였는데 이때 이상의 천재성에 주목해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했고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 여운형에게 부탁해서 이상의 시를 신문에 내도록 도와주었는데 그렇게 해서 나온 시가 오감도다.[7]
일제강점기에는 카프의 경향파 문학과는 거리를 두었는데 일제 말엽에는 극도의 빈곤과 공습에 따른 사전 소개로 시골에서 낚시나 하고 살게 되었다. 저 시절을 반영하고 먼저 간 현진건을 추억하면서 쓴 작품들이 토끼이야기, 해방전후 등[8]이 있다. 일제 연간에 비겁한 지식인의 표상이라고 나중에 욕을 먹었지만 중편 해방 전후는 당대 지식인의 모습을 잘 드러냈다고 해방 후 문학상을 받았다.
광복 전까지는 철원에 머물렀다.
2.2. 광복 직후의 행적
8.15 광복 후에는 주로 좌익 계열에서 활동하고 6.25 전쟁 이전에 소련이나 발전하는 북한을 방문차 월북하였다. 그렇게 이태준은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부위원장, 북조선예술문학예술총연맹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6.25 전쟁 전에도 여러 번 김일성을 찬양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싸우자! 목을 걸구 싸우자! 우리 뒤엔 얼마든지 큰 힘이 있다! 우리 농군이나 노동자두 잘살 수 있는 조선이 되도록 도와 주는 나라두 있다! 성필 씨 같은 사람두 하나는 아니다! 김일성 장군 이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모두 우리 편이다! 아니, 남조선에도 온통 우리 농민들이다. 또 거기 지도자들 중에도 우리 편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싸우자 목을 걸고!' 「농토」(1948) 中에서 |
그러나 <농토>는 토지개혁을 주제로 글을 써내라는 당의 지시에 따라 쓴 것이고 여러 번의 검열과정을 거치면서 실제 이태준이 쓴 글과 상당 부분 달라졌다는 서정범의 진술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카프와 대립각을 세운 순수문학의 대표 단체인 구인회를 결성하고 주도했던 이태준의 "급작스런 변신과 북행"[9]은 당대의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애초에 이태준의 해방 전 글에선 좌파적 가치관이 전무하며 오히려 그쪽 사상을 적대하는 장면이 많다. 그리고 이태준은 해방 전에 쓴 장편소설에서 근대적 계몽주의에 경도된 모습을 수시로 드러냈다. 민혜숙은 "기독교인 주인공을 중개자로 내세워 농촌계몽과 사회변혁, 이상사회의 실현이라는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10]
이태준 본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쓴 자전소설 <해방전후>에는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근대적 민족주의자가 민족 대단결이라는 대원칙을 위해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현은 그들의 태도와 주장에 알고 보니 한 군데도 이의를 품을 데가 없었다. "장래 성립할 우리 정부의 문화, 예술 정책이 서고, 그 기관이 탄생되어 이 모든 임무를 수행할 때까지, 우선, 현단계의 문화 영역의 통일적 연락과 각 부문의 질서화를 위하여"였고 "조선문화의 해방, 조선문화의 건설, 문화전선의 통일" 이것이 전진구호였던 것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민족이 나아갈 노선에서 행동통일부터 원칙을 삼아야 할 것을 현은 무엇보다 긴급으로 생각한 것이요, 좌익작가들이 이것을 교란할까 보아 걱정한 것이며, 미리부터 일종의 증오를 품었던 것인데 사실인즉 알아 볼수록 그것은 현 자신의 기우였었다. 아직 이 이상 구체안이 있을 수도 없는 때이나 이들로서 계급 혁명의 선수를 걸지 않는 것만은 이들로는 주저나 자중이 아니라, 상당한 자기비판과 국제노선과 조선민족의 관계를 심사숙고한 연후가 아니고는, 이처럼 일견 단순해 보히는 태도나 원칙만엔 만족할 리가 없을 것이었다. 현은 다행한 일이라 생각하고 즐겨 그 선언에 서명을 같이 하였다.[11]
강진호는 "좌우로 분열되어 상쟁하는 민족의 현실 앞에서 ‘계급보다는 민족의 비애’에 더 솔직했던 이태준은 ‘민족의 대동 단결’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생각했고, 자연스럽게 그런 구호를 앞세운 좌익에 이끌렸다"고 평가했다.[12] 하지만 식민지 근대가 아닌 제대로 된 근대를 경험하지도 못했고, 좌파 사상이 무엇인지 제대로 판별조차 못했던 인물이 좌파 세력에 가담한 것은 "주체의 내면적 요구와 성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급변하는 상황을 추수한 것"이었다고 봤다.[13]
2.3. 최후
종전 후 종파분자 및 해당 행위로 비판을 받았다. 그 이유가 참 가관인데, 이태준이 쓴 소설은 전쟁 당시 북한 상공에서 추락한 개념없는 미군조종사를 비꼰 '반미소설'이었지만, 북한 당국에서 "공화국에서는 포로를 학대한 적이 없는데 여기 나온 인물은 미군포로를 위협한다며 미국이 공화국을 침략할 명분을 주었다"며 반동분자라고 몰아갔다. 결국 1956년 2월에 숙청되었다.[14] 이태준이 누구보다도 아끼던 자식들도 강제이혼, 행방불명, 사망 등으로 흩어졌다고 한다.강상호는 이태준이 1960년대 초에 산간 협동농장에서 병사했다고 주장했다.[15] 그러나 김진계는 1969년까지 이태준의 생존이 확인 가능하다고 구술했다.[16] 반면에 숙청된 후 황해도 해주시에 인쇄공으로 배치되었으나 1974년 다시 강원도 장동탄광 노동자지구로 재추방되었으며 이후 고철 수집 등을 하면서 힘겹게 살다가 아내가 죽은 뒤 행방불명되었다는 기사도 있다.[17] 그 밖에 1978년에 자강도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설이 존재한다.[18] 아직까진 그 누구도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기에 학술지에선 사망년도를 미상으로 기재한다.[19]
남한에서도 해방 후 좌익 활동과 월북으로 인해 금기시되다가 1988년 해금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1988년 이전에는 피치 못할 경우 '이○준' 정도로 언급되는 정도였고 당시 그에 대한 연구를 하던 어느 학자는 이태준의 고향인 철원군 사람들에게 욕설과 같이 모욕도 당했던 적도 있다. 박헌영, 김원봉처럼 남북 모두에서 외면당하는 그런 부류가 되었다.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이태준의 여러 작품들은 북한에서 문학을 동경하는 학생들에 의해 비밀리에 읽히고 있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이태준 일가의 최후도 그런 문학도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이다.
1962년의 증언에 따르면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수복했을 때 피난가지 못하고 강동군 승호리에 숨어 있었는데 부인을 통해 귀순교섭을 해 왔지만 중공군의 갑작스런 개입으로 실현되지 못했다고 한다.[20] 1990년대 초반 신동아에 소개된 선우휘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 중 적어도 두 번 정도 남한으로 데려오려는 공작이 있었다고 한다.
3. 주요 작품
<오몽녀>(1925)<무서록>
<복덕방>[21]
<가마귀>[22]
<밤길>
<영월영감>
<토끼 이야기>
<고향>(1933)
<제이의 운명>
<농군>(1939)
<문장강화>(1940)[23][24][25]
<돌다리>(1943)
<해방전후>(1946)
<쏘련기행>(1947)[26]
<농토>(1948)
<먼지>(1950)[27]
<행복>
<달밤>[28]
<패강랭>(1938)
<사상의 월야>(1946)
4. 기타
저작권이 꼬인 구보 박태원과 다른 이유로 전집이 나올 가능성이 매우 낮은 작가인데 소련과 북한에 경도된 채 쓴 후기 작품들은 일제강점기 이광수의 친일 작품 수준으로 노골적이고 당연히 문학성도 떨어져서 출판사들이 굳이 긁어모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2009 개정 교육과정 천재교과서 중학교 국어 4 검정교과서에 '돌다리'가 수록되었으며 2015 개정 교육과정 해냄에듀 문학 교과서, 미래엔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달밤'이 수록되었다.
수능 연계 교재인 EBS 수능특강, 수능완성에도 여러 차례 작품이 수록되었다. 2018학년도 수능특강에 소설 '달밤'이, 수능완성에 소설 '패강랭'이 수록되었다. 2020학년도 수능특강에 소설 '복덕방'이 수록되었다. 2022학년도 수능특강에는 소설 '돌다리'가, 2023학년도 수능특강에는 소설 '달밤'이 수록되었다. 2024학년도 수능특강에 소설 '복덕방'이 다시 수록되었으며, 2025학년도 수능특강에는 자전적 소설 '해방 전후'가 실렸다. 자전적 인물인 '현'이 강원도 어느 산읍에 지내면서 강직한 시골 노인 '김 직원'과 교유하는, 해방 전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수록되지 않은 해방 뒤의 이야기에서는, '현'이 좌익 문인 단체에 가입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 직원'이 서울로 찾아와 '현'의 마음을 돌리려 한다. 그러나 결국 둘은 서로의 생각이 일치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작별하게 된다. 해방 후의 이야기는 작가 이태준이 이전의 태도와는 다른 선택을 했던 이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248번지에는 이태준이 월북하기 전까지 글을 집필한 '상허 이태준 고택'이 있으며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11호이기도 하다. 1999년 외종손녀(이태준의 누나의 외손녀) 조상명이 1933년 이태준이 지은 당호인 '수연산방'을 내걸고 찻집을 열었다. 1992년 상허학회가 조직되어 이태준에 대한 연구를 이끌고 있다.
동화도 꽤 많이 썼는데 일부 동화와 재밌는 단편들을 묶어 어린이용 책으로 남한에서 출간된 적이 있다.
여담으로 건담 시리즈가 나오기도 한참 전에 이 만화에 등장하는 설정인 뉴타입과 유사한 개념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소련 기행이라는 수필에서 언급된다.
전략 "이해가 필요없는데서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반드러워질까? (중략) 인간이 위선과 비굴에 빠지지 않으면 안될, 불순한 이해관계를 제거해 놓은 소비에트는 비단, 경제나 문화 뿐이 아니라 인류 자체에 거대한 변혁을 일으킨 것이다. 마치 중세기의 르네상스가 봉건 체제 속에서 말살되었던 인류의 자아를 위한 각성이었듯이, 쏘비에트는 인류가 다시 자본의 노예로부터 풀려나와 노예의 근성을 뽑아버리고 절대 평등에 의한 진정한 평화향, 계급 없는 전체적 사회의 성원으로서 새타입 인간의 창조인 것이다. 영원히 축복 받을 인간의 위대한 재탄생인 것이다." |
불순한 이해관계를 제거 = 오해없는 상호 이해, 인류의 자아를 위한 각성 = 이를 통한 인류의 진보, 새타입 인간 = 이로 인해 새롭게 진보한 인류인 뉴타입. 건담의 원작자 토미노 요시유키가 설정한 뉴타입의 개념과 거의 일치한다.
[1] http://www.sanghur.net/tjlee_01.htm[2] 용담파 10세 규(奎) 항렬. 장기 이씨는 전국적으로 200명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희귀 본관이다. 장기 이씨 가계도는 국립중앙도서관이나 정독도서관이 아니라 부천역 인근에 있는 족보도서관(사설)이 소장하고 있다. 다만 이태준의 본관이 장수 이씨(長水 李氏)라는 이야기도 있다.(참고 포스팅)[3] 하나의 사물과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선 가장 적합한 하나의 단어만이 있다는 이태준의 주장. 사실 최초의 일물일어론자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이며 <보바리 부인>이 여기에 입각해 쓰인 리얼리즘 소설이다.[4] 비무장지대에 있는 주민 미거주지역이다.[5] 어머니 순흥 안씨는 아버지의 후실 부인이다. 아버지의 정실 부인은 한양 조씨로 슬하에 이규덕(李奎悳)이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한다.[6] 당시 정지용·박종화가 선배로, 이병기가 스승으로 있었다.[7] 이태준이 아니었으면 오감도는 발표되지 못했을 작품이었다. 하도 독자들의 반발이 심해서(심지어 이 시를 쓴 사람을 찾아내서 죽이겠다는 협박도 있었다고 한다.) 이태준은 사무실에 오감도 원고를 갖고 갈 때 항상 사표를 같이 들고 다녔다.[8] 해방전후의 묘사를 빌리자면 일 안 하고 낚시나 다닌다고 순사에게 혼나고 엄한 사상범들 가방 속에서 이태준의 책이 나와서 곤욕을 겪고 아는 선배 부탁으로 라바울 승전기나 끄적거리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9] 강진호(2004), 한 근대주의자의 신념과 좌절. 해방 후 이태준 소설의 변모 양상, 돈암어문집(17), p. 192[10] 민혜숙(2017), 사회변혁의 중개자로서 기독교인 이미지 연구. 이태준 장편소설을 중심으로, in: 현대소설연구(67), p. 355[11] 이태준(1995), 해방전후, in: 이태준(1995), 이태준 문학전집 3, 서울: 깊은샘, p. 36[12] 강진호(2004), 한 근대주의자의 신념과 좌절. 해방 후 이태준 소설의 변모 양상, 돈암어문집(17), p. 193[13] 강진호(2004), 한 근대주의자의 신념과 좌절. 해방 후 이태준 소설의 변모 양상, 돈암어문집(17), p. 193[14] 이태준 연보, 문예운동(2016.11), p. 32[15] 출처: 중앙일보, 내가 치른 북한 숙청, 1993년 6월 7일[16] 민충환(1992), 이태준 소설의 이해, 경기: 백산출판사, p. 315[17] 오마이뉴스, 고물상으로 살다 행방불명된 '조선의 모파상', 2008년 10월 30일[18] 참고 포스팅[19] 이태준 연보, 문예운동(2016.11), p. 32[20] 참고 기사: 경향신문, 어찌 우리 이 날을 2, 1962년 6월 24일[21] 문장도 문장이거니와 주제도 오늘날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쭉 존재할 노인들의 소외 문제를 다룬 작품이기 때문에 1937년의 작품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담으로 여기서 나오는 영감과 속물적이기 그지없는 무용수 딸의 모델이 무용가 최승희와 그의 아버지 최준현이라는 추측이 많다.[22] 1937년에 출간된 단편집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색시>, <우암노인>, <3월>, <손거부>, <까마귀>, <순정>, <바다>, <점경>, <철로>, <장마>, <복덕방> 등 11편이 수록되었다.[23] 시집이나 소설이 아니고 글 쓰기 지침서다. 강화(强化)가 아니다. 만약 이 문장강화(文章强化)였다면 그저 문장의 묘사를 짙고 강하게 나타낸다는 의미가 되었을 것이다. 이태준의 문장강화(文章講話)는 '문장 강의를 하듯이 쓰인 이야기'란 뜻이다. 원래 강화(講話)가 '강의하듯이 말하는 이야기'라는 뜻이지만 이건 책이라서 '쓰인'으로 의역하였다. 월북 작가의 책이지만 여러 번 재판을 하여 21세기에도 서점에서 구할 수 있다. 오래 전 나온 책이나 글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는 이만한 책이 아직 없다.[24] 이 책이 얼마나 권위가 있었느냐면 문장강화에 자신의 글이 실렸느냐 안 실렸느냐가 당시 문장가들의 필력의 잣대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로 구판 대신 신판이긴 하지만 당대에 이름을 날린 저자들의 글이 많이 수록되었다. 요즘 기준에선 한자가 많아 힘들 수도 있고 촌티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책의 해석을 곁들이면 수록된 글의 저자들이 얼마나 저명한 이들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25] 독립운동가이자 공산당 지도자인 김두봉도 이 책에 글이 실렸다. 다만 좋은 글의 기준이 아닌 장황하고 안좋은 글의 기준이긴 하지만 말이다.[26] 평양 조소문학협회의 주선으로 1946년 레닌그라드 대외문화협회를 방문하면서 쓴 기행문. 여담으로 갈 때는 비행기, 귀환 때는 열차를 이용했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뿐 아니라 스탈린그라드, 트빌리시, 예레반까지도 다녀왔다. 2016년 한국에서 출판된 이태준 전집 시리즈에서는 이것과 함께 중국 기행도 같이 실렸다.[27] 월북 후 북한 문화예술지에 기고한 작품이다.[28] 이를 표제작으로 1934년에 단편집이 출간되었다. <불우선생>, <결혼의 악마성>, <서글픈 이야기>, <기생 산월이>, <봄>, <아담의 후예>, <어떤 날 새벽>, <코스모스 이야기>, <꽃나무는 심어놓고>, <달밤>, <아무 일도 없소>, <실락원 이야기>, <은희부처>, <촌뜨기>, <천사의 분노>, <미어기>, <마부와 교수>, <어떤 화제>, <만찬> 등 19편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