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00:40:27

강이식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ㅣ姜以式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42px-Gang_Yi-sik_admral.jpg
고구려 강이식 장군 영정.
주군 영양왕(嬰陽王)
직위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1] 또는 병마원사(兵馬元師)
본관 진주 강씨
강(姜)
이름 이식(以式)
생몰연도 550년(?) ~ ?년

1. 개요2. 생애3. 실존성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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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암집(戇庵集)》, 《진주 강씨 족보》, 《조선상고사》 등의 문헌에서 언급되는, 수나라를 물리친 고구려장수이자 현재 한국의 대성인 진주 강씨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2]

2. 생애

조선시대 후기에 작성된 '진주강씨 족보'에 따르면 550년 중국 남조 광동에서 시랑 강철상의 아들로 태어나 15세 때는 90근짜리 철퇴를 마상에서 구사하고 진법을 이루었으며 24세 되던 해(573년)에 동명대회에서 장원했다고 한다. 이후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서부 총관부에서 벼슬하며 돌궐, 계단(거란), 말갈 등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으며 그는 양견[3]을 도와 수(隋)나라를 건국(581)하고, 나아가 남북조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통일(589)하여 중국천하를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강이식은 고구려에 귀화하고, 동명대회에서 장원한 후 아직 보직을 받지 않은 을지문덕이 592년(영양왕 3년) 8월 하순 요동성 서부 총관부의 총관 강이식을 찾아와 총관부에서 같이 일하게 되었고 수 문제가 고구려에게 무례한 국서를 보내자 이때 강이식 장군은 "이러한 오만무례한 국서는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 대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공으로 병마도원수, 을지문덕은 서부 총관으로 각각 승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한국측의 다른 기록과는 모순되는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사이에서 임유관(산해관)을 중심으로 수륙에서 30만 수나라군을 물리치고 승리한 임유관 대첩(臨渝關大捷)의 주인공으로 강이식을 지목하고 있다. 이는 수문제 시절의 사건으로, 위의 족보의 설명인 수양제 때 고구려로 귀화하였다는 설과 모순된다.[4] 거기에 수 문제를 돕고 나서 갑자기 적국 고구려의 사령관이 되어 조국에서 보낸 국서에 분개하는 것도 미심쩍은 부분.

조선상고사의 내용대로 실존인물이라 하더라도 17세기 이후 생애에 관한 기록들은 후대에 첨가된 가공의 내용으로 보인다.

3. 실존성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강이식 장군의 무덤이 중국 심양현(潘陽縣) 봉길선(奉吉線) 원수림역(元帥林驛) 앞[5]에 있으며, 무덤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라고 새겨진 큰 비석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와 함께 1930년대에 현지를 방문해 강이식 무덤의 비석을 확인했다는 주장도 존재하는데, 문화대혁명 때 비석과 무덤이 훼손되어 현재는 묘역이 밭으로 개간된 상태이고 다만 비석 조각과 거북좌대만 남아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2년 진주강씨 사적연구회 제1차 탐사단의 현지답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또한 진주 강씨 종친회에서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것이 2002년 KBS 역사스페셜에 방송되기도 했지만 현존하는 역사자료로는 강이식에 대한 전승을 조선시대 이전으로는 소급하기 어렵다.

삼국사기》나 중국 《이십사사》, 일본 《육국사》 등 당대에 가까운 정사라 할 수 있는 사료에는 강이식을 언급한 자료가 없으며, 금석문도 전해지지 않는다. 당대로부터 한참 지난 20세기에 신채호가 남긴 저서 《조선상고사》에서는 강이식을 언급하면서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의 기록을 참고했다고 했으나 둘 다 현존하지 않으므로 알 수 없고[6] 《진주 강씨 족보》(17세기 후반 이후 작성), 17세기 진주 강씨 강익(姜翼)이 작성한 짤막한 기록과 야사 등을 통해서 전승되지만, 당대 기록도 아니고 숭조사업으로 조상의 업적을 윤색하는 서술이 일반적인 족보는 사료로서의 신빙성을 높게 치지 않는다.

또한 역임했다고 나오는 병마원수나 병마도원수는 후대의 것으로 고구려에서 실존했던 관직으로 보기에는 다소 이질적인 이름인 것도 감점 요소이다. 삼국시대에 병마원수라는 관직이 사용된 다른 사례가 없으며, 중국에서도 고구려가 멸망한 지 50여년이 지난 당현종 이후에 처음 등장하는 관직명이다. 한국사에서는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중국에서 수입되었다. 따라서 강이식이 병마(도)원수를 역임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의심스럽다.[7][8]

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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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배우 김시원[9]이 연기했다. 고구려-수 전쟁 때 고구려군이 수시로 써먹은 게 거짓 항복을 통한 화전양면전술이었는데 드라마에서는 "거짓 항복도 고구려의 수치"라며 외교관을 통과시켜 주지 않으려는 과격주의자에, 무작정 서토정벌만 외쳐대는 전쟁광으로 묘사되었다(이는 을지문덕도 마찬가지).[10]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할 때 "을지문덕이나 고건무 다음으로 조심해야 할 맹장"이라며 부하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였으나 죄다 털려버렸다. 당시 강이식의 명대사는 "어허! 이거 어린 아이들을 계속 혼을 내주자니 참으로 귀찮구나! 오냐, 날 원망하지 마라!" 작중(이때가 38화)에서 강이식의 나이는 80세가 넘었는데 수나라의 선봉장인 맥철장의 부관 맹차의 이마를 베었고, 다른 부장인 전사웅이라는 장수는 강이식의 창에 배가 뚫려버렸다. 결국 맥철장이 나가려고 하자 수양제는 "저것이 늙은 귀신이지 어디 사람이란 말이냐."며 가지 말라고 하였으나 부장들보다 짧은 시간의 일기토 끝에 맥철장은 목이 베인다. 수나라의 간판급 장수인 맥철장마저 목이 떨어지고 말자 수나라 진영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충격과 공포에 빠져 침통해지는 묘사가 아주 볼만하다.

    초반부인 제6화에서 영주 총관 겸 영주 성주 위충[11]과 대결을 벌여 서로 호각을 이루며 서로의 무예를 칭찬하지만 한왕 양량이 그걸 보고 "노인네들끼리의 장난"이라면서 조롱하며 군대를 끌고 나가 방해를 하지만 위충이 양량이 이끈 군대를 막아서 강이식이 도망치게 할 수 있게끔 해주며 서로 라이벌 플래그를 성립하나 했더니 위충이 제7화 요택에서의 전투에서 지휘를 하던 도중에 전사해 버리는 바람에 라이벌 플래그 성립이 무산되어 버렸다.[12] 2부인 영류왕 시기에는 너무 늙어서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군부의 원로로 온사문, 검모잠 등 젊은 장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이 무렵 고구려에 돌아온 주인공 연개소문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대당 평화 정책을 펼치던 영류왕의 굴욕 외교에 계속하여 불만을 드러내었다.[13] 급기야 영류왕이 전승 기념물인 경관을 허물려고 하자 90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임에도 추모성왕의 사당에서 단식 투쟁을 하다가 결국 기력이 다해 죽었다. 강이식의 죽음으로 양만춘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14], 군부는 영류왕과 그 측근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고 결국 이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로 이어진다.

    강이식이 죽기 직전에 영양왕과 삼족오의 환상을 보는 장면이 있다. 비장한 분위기에 배우도 뭔가에 홀린 듯한 연기를 제대로 해냈으나, 병맛 연출과 CG가 그 분위기를 다 깎아 먹고 말았다. SBS의 공식 유튜브인 빽드에서 그 장면 가지고 자학개그를 칠 정도였다. 사람 죽이는 삼족오
  • Why? 한국사 시리즈》에서 강마루의 선조인 강비의 할아버지 격 인물로 설정되었다.

[1]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등장[2] 9세기 초반 당나라 때 지어진 《원화성찬(元和姓纂)》에서 강이식이 등장한다고 하는 얘기가 있으나, 이는 낭설이며 실제로는 언급되지 않는다.[3] 수 문제, 재위 581~604[4] 조선상고사가 인용했다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의 기록으로 보인다.[5]중국 랴오닝성 푸순시 둥저우구(東洲區) 장당진(章黨鎭) 가오리촌(高力村, 高麗村).[6] 다만 《서곽잡록》의 경우, 조선시대 야사의 총집합서인 《패림》에 실려있고, 일본 가와이 도서관에도 이본이 있으며 백과에도 현존한다고 적혀 있으므로 실존한 기록물일 가능성은 있다.[7] 다만 병마, 원수 등의 용어는 당대에도 통용되고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용어이다. 또한 심지어 고구려 동시대 자료나 삼국사기 서술 시점에서도 관직들을 서술 주체의 시점에서 다듬어서 기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당 관직과 전승의 신빙성이 올라가는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관직 이름 때문에 개연성이 크게 낮아진다 하긴 힘들다.[8] 고구려 관직의 변천사를 보면 최전성기엔 자사, 태수등 중국식 관직을 사용했지만 후기로 가면 갈수록 고유명칭으로 바뀌는 경향이 나온다. 이는 수 당과의 항쟁으로 인해서 바뀐것으로 보인다[9]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극렴 역,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능창(수달) 역.[10] 제3화에 처음 출연해서 한 대사도 "먼저 사신의 목을 베시옵소서! 저 따위 오만한 조서에는 붓이 아니라 칼로써 화답을 해야 하옵니다, 폐하!"일 정도로 과격한 면이 강조되었다.[11] 작중 영주 총관이라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요서 총관이었다.[12] 비록 빠르게 죽어버렸지만 연개소문 내에서 고경과 함께 긍정적으로 묘사된 몇 안 되는 수나라 인물이다. 현명하지만 음흉한 양소나 우직하지만 기회주의적인 우문술은 드라마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됐다고 보기에는 애매하다.[13] 당연한게 태제 시절에 굴욕적인 거짓 항복을 하려고 하자 막역한 사이이자 고구려의 재상 을지문덕이 반대하다가 결국 분사하였기 때문에 좋게 보일 리가 없다.[14] 물론 양만춘은 영류왕의 부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영류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 것이지, 그 역시 영류왕의 정책에는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