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이 같은 동명의 영화에 대한 내용은 안시성(영화)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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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지도와 안시성의 위치
1. 소개
압록수(鴨淥水) 이북의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중략) 옛날 안촌홀(安寸忽)[1]이었던 안시성(安市城).
鴨淥水以北 未降十一城(중략)安市城 舊安寸忽[或云丸都城]
《삼국사기》 제37권 <잡지(雜志)> 제6
鴨淥水以北 未降十一城(중략)安市城 舊安寸忽[或云丸都城]
《삼국사기》 제37권 <잡지(雜志)> 제6
옛 고구려의 성. 한나라 때 요동군 안시현이었고 그만큼 지명의 유래가 길다. 다산 정약용에 따르면 안시는 황새, 다시 말해 한새의 음차이다.[2]
험준한 지형과 방어하기 좋도록 지어진 고구려 성의 양식 때문에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난공불락이었다고 한다. 당나라의 명군 태종 이세민이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성이다.
2. 위치
안시성으로 추정되는 영성자산성의 사진 (좌). 아직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는 불명이다. 역사스페셜에서 복원한 안시성 이미지 (우). |
현 중국 랴오닝 성 하이청 시 잉청쯔(英城子) 촌에 위치한 영성자산성의 위치. |
3. 안시성 전투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잡은 이후 안시성주가 연개소문에 반발하여 서로 전투까지 한 끝에 서로 타협했다는 소문이 전투 초기에 언급된다.안시성의 공략이 생각외로 오래 걸리자[3] 당군은 성벽보다 높은 토산을 쌓아 안시성을 공략하려고 했다. 그러나 토산이 갑자기 무너져 성벽을 덮쳤고, 고구려군이 이를 틈타 토산을 점령하자 결국 당군은 안시성 공략을 포기하고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당시 당태종이 한쪽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최초의 기록은 고려 문인 이색의 '<정관음>'이라는 시에 등장하고, 이색의 아버지 이곡이 쓴 '《가정집》'에도 나온다.[4] 북송의 명신 사마광의 ‘《자치통감》’ 에서는 당태종의 사망을 두고, 요동에서 병을 얻었다고 기록했다. 조선에서는 송준길의 저서 '《동춘당선생별집》'과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나온다.#
4. 이후의 행보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가 사실상 멸망한 후에도 당군이 안시성은 우회해서 지나가서인지 여전히 살아남았으나고려나 조선의 문인들은 중국의 대병력과 불세출의 영웅 당 태종에 맞서 이겼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리고 대규모 병력에 맞서 수성전을 벌여 승리한 안시성 전투의 승리 요인을 찾아내려고 관련 기록들을 자주 검토해 국정에 반영했다. 다만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조선의 문인들은 안시성의 정확한 위치 비정은 못했는지 봉황성을 안시성이라고 부르거나 안주군이 안시성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보니 중국 입장에서 결코 영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곳은 아니다. KBS 역사스페셜 취재팀이 안시성으로 비정되는 영성자산성을 답사하려고 했지만 중국 당국은 아예 한국 취재팀의 접근을 허가하지도 않았고, 영성자산성을 답사하려던 한국인 학자에게 이곳을 안내해 준 현지 조선족이 그 가족 전체가 강제이주를 당하는 불이익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
5. 창작물
5.1. 대조영(드라마)
안시성 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번 비중있게 등장하는 장소이며, 작중 역할은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고구려의 명예가 서린 곳. 후술하겠지만 주인공 보정을 무지막지하게 받은 대조영 일행마저도 큰 희생을 치르고서야 간신히 점령할 수 있을 정도로 공격하는 쪽 입장에선 공격하기 난감한 곳으로 묘사된다.안시성 전투 당시엔 당나라 군이 토산을 쌓았으나 고구려군과 주민들이 몰래 산 밑에 땅굴을 팠고, 거기에 해자의 물이 스며들면서 토산이 무너지고 만다. 이때 수 많은 당나라 병사들이 생매장 당했고, 설인귀에게도 정신적 충격을 준 것으로 묘사된다. 나중에 설인귀가 이때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언급할 정도. 주군으로 모시던 당태종을 위한 복수도 있고 해서 설인귀는 안시성을 반드시 함락시키기로 결심한다.
3차 고당전쟁 당시엔 안시성주는 대중상이었으며, 설인귀와 거란군은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별다른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이에 이해고 측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안시성을 점령해도 늦지 않다고 제안하였고 결국 설인귀 측은 고구려 군을 속이고 몰래 평양성으로 이동한다. 고구려 멸망 후 설인귀와 거란군은 다시 안시성을 공격하는데 숙영의 설득도 그렇고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대중상 측은 고사계가 유인계를 쓰는 동안 백성들과 함께 몰래 안시성을 빠져나간다. 무혈 입성하는 설인귀를 은근히 조롱하는 편지 한통을 남겨놓는건 덤.
이후 대조영 측이 거란의 지원을 받아 요동을 함락할 때 재등장한다. 다른 지역은 다 점령하고 안시성만 남은 상황에서, 대조영 측은 다른 성들을 공격할때와 달리 많은 준비를 하고 공성을 시작한다. 그동안 각종 지략과 주인공 보정으로 요동의 성들을 쉽게 함락시켜왔지만, 안시성 만큼은 주인공 보정받은 대조영 측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상대였던 것. 아니나다를까 장현우 측이 우주방어만 했음에도 대조영 측은 전사자가 1만에 부상자도 상당히 많은, 대 피해를 겪는다. 당나라 황제인 측천도 매번 점령한 성들이 함락당해 뒷목잡고 있던 상황에 안시성은 방어에 성공했을뿐만 아니라 대조영의 군대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만큼 대승을 거두었다는 전령에 역시 천하의 철옹성이라 칭할만하다며 놀라워 하면서 겨우 웃음기를 되찾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에서 고구려 백성들이 봉기하여 성문을 열어줬기에 간신히 점령에 성공한다.
대조영은 안시성을 본거지로 삼아 요동을 다스린다. 거란이 설인귀의 간계에 빠져 이해고와 상당 전력을 요동으로 파견한다. 이해고는 다른 성들은 다 무시하고 대조영이 있는 안시성을 공격하지만 쌍방 큰 피해를 입는다. 이때 거란의 수도 영주가 돌궐과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고, 이해고는 급하게 회군을 하지만 대조영은 이때를 노려 거란군을 박살내버린다. 이후 천문령에 가기 위해 대조영 세력은 안시성을 비워둔다. 그 후는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정황상 이해고가 대군을 이끌면서 요동을 일단 점령해두어서 당나라의 땅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천문령 전투 이후에는 발해의 군사력도 약화된 상태여서 요동 정벌에 실패하고 결국 당나라와의 화친을 통해 다시 안시성을 포함한 요동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나온다.
5.2. 안시성(영화)
2018년 개봉한 영화로 안시성에서 일어난 안시성 전투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5.3. 무미랑전기
해당 드라마에서 고구려는 북방반군(北方叛軍)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5] 안시성은 안암성(安巖城)으로 나오고 작은 성이면서도 함락시키지 못했다는 묘사를 통해 안시성 전투를 일부나마 묘사했다.그러나 싸움이 길어지면서 겨울이 다가오는데다 군량미도 부족해지면서 전투에 참여한 무미랑과 오왕[6]이 보기에도 이 전쟁을 더 이상 길게 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고는 당태종을 산책시킨다는 이유로 다친 병사들을 보여주며, 태종의 심기를 편하게 하기 위해 일부 전투에서 승리하고 7만 호를 장성 안으로 포함시키는 등의 성과를 얻었으니 승전했다고 말하는 등 사실상 설득력 없는 설득을 했지만 이미 승부를 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걸 알고 있던 당태종도 미랑과 오왕의 설득을 명분삼아 그냥 별탈없이 회군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족으로 태종이 항복한 적장 유백안(柳伯顔)과 그 휘하 3만 명을 포로로 잡고 유백안이 항복한 산 이름을 '학여산(鶴唳山)'으로 개명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장면이 등장하는 걸로 봐선 주필산 전투 또한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7]
민감한 역사적 사건은 두루뭉술하게 처리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6. 관련 문서
[1]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한다.[2] 백암성에서 백암도 뱀의 음차로, 조선 시대까지 계속 쓰였다고 기록했다.[3] 안시성은 여타 고구려 성들에 비해 규모가 굉장히 작았다. 게다가 성벽의 대부분이 흙벽이라 전쟁 중 재빨리 보수할 수 있었다. 이런 수성의 유리함 때문에, 아무리 당태종이 공격자라고 해도 안시성을 일반 성처럼 쉽게 공략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4] 이곡은 원나라에서 급제하여 관리를 지냈고, 이색은 원나라의 국자감에 유학을 했다. 이 때문에 원나라에서 이 일화를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5] 동북공정의 일환 내지는 한국과의 역사갈등을 피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황당한 건 대연회 당시에 같은 한반도의 국가인 신라는 잘도 언급이 된다는 점이다.[6] 무미랑이 부득불가겠다고 하자 오왕이 자신의 휘하에 있게 했다.[7] 주필산 전투에서도 고구려의 장수인 고연수와 고혜진이 항복했으며 그들이 데리고 항복한 병사의 수도 36,800명으로 드라마에서의 언급과 비슷한 규모이다. 또한 당태종이 올랐던 육산(六山) 역시 황제가 말을 매어두었다고 해서 주필산(駐蹕山)으로 개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