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24 08:54:11

천하통일


1. 개요2. 범위3. 어형4. 천하통일을 이룬 인물들
4.1. 한국4.2. 중국4.3. 일본4.4. 만주(퉁구스계)4.5. 몽골(몽골계)
5. 왜 주로 북쪽이 유리할까? (중국의 경우)6. 여담7. 창작물

1. 개요



천하를 한 국가로 합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2. 범위

천하(天下)라는 단어는 하늘 아래의 세계, 즉 세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천하를 통일한다는 것은 세계를 통일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오늘날까지도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은 있어도 문자 그대로의 천하통일(= 세계통일)을 이룬 국가는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때문에 밑에 서술될 천하통일 국가들도 어디까지나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세계 혹은 자신들이 속한 세력권이나 문화권을 통일한 케이스들이다.

예를들어 과거 중국에서는 중원이 세상의 중심이었으므로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본토의 통일이 곧 천하통일로 지칭되었다. 중국의 황제천자라 불릴 정도로 세력이 강력했기에 당시에는 중국의 황제가 곧 천하의 주인, 즉 세계의 주인을 의미했다. 또한 중국의 지리적 여건상 동쪽과 남쪽은 바다고, 북쪽은 황야, 서쪽은 산지와 사막이었으므로 전근대의 기술 수준에서 중원을 넘어서는 세력 투사는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했다.[1]

굳이 중국 뿐 아니라 한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통일도 천하통일에 비유되었다. 한국의 경우 삼한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문무왕의 삼국통일, 태조 왕건의 후삼국 통일을 천하통일로 여기고 있으며, 일본의 경우도 대륙과 분리되어 주로 일본 열도 내에서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고 살았던 특성상 센고쿠 시대를 다룬 시대물 등에서 천하통일이라는 관념이 엿보인다. 오다 노부나가의 깃발에 달린 문구에 '천하포무'[2]라는 단어가 있었던 일화 등을 보아 당시에도 이런 생각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군사 칸베에> 등 센고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일본의 대하드라마에서는 일본 통일을 으레 '천하통일'이라고 칭한다.

유럽에서는 지중해 권역에서 당대 주요 문명권을 장악한 알렉산드로스 3세헬레니즘 제국이나[3] 후대의 로마 제국[4]이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 혹은 세계 그 자체라는 관념이 있었다.

3. 어형

한국에선 '천하통일'이라고 많이 하지만, 중국에선 약간 순서가 다르게 '일통천하'(一統天下)라고도 하며,[5] 또 비슷한 표현으로는 '혼일사해'(混一四海)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중원을 중심으로 한 동해, 서해, 남해, 북해 네 바다에 이르는 광대한 강역을 하나로 엮는다는 뜻으로, 역시 천하를 통일한다는 의미이며 《삼국지연의》 등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 해당 문서로.

4. 천하통일을 이룬 인물들

묘호를 쓰는 곳에서는 주로 창업군주에게 붙는 태조가 많이 붙는다.

4.1. 한국

4.2. 중국

괄호 안은 고향의 현대 지명이다.

4.3. 일본

4.4. 만주(퉁구스계)

4.5. 몽골(몽골계)

5. 왜 주로 북쪽이 유리할까? (중국의 경우)

남조와 북조간의 싸움이 전장의 주 레퍼토리가 된 위진남북조시대 이후에는 명태조 주원장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난징 국민당 군벌 장제스를 제외하면 모두 북조를 중심으로 천하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나마 명나라 역시 홍무제 사후 영락제건문제가 제위를 놓고 싸운 정난의 변에서 베이징을 근거지로 삼은 영락제가 승리해 베이징으로 천도를 했으니 결국 최후의 승자는 북조라 하는 시각도 있으며, 장제스 역시 말은 천하통일 했다고 하지만 엄연히 북중국과 만주를 근거지로 한 마오쩌둥이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재기를 노리는 상황이었던지라, 결국 2차 국공내전에서 일제과의 싸움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은 장제스의 국민당을 몰아내고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마오쩌둥은 장시성 징강산에서 중화 소비에트 정권에 가담했지만, 대장정을 거쳐 제2차 국공내전이 일어날 때까지 그가 권력을 확립한 곳은 화북의 옌안이었다. 영락제와 마오쩌둥의 일은 이미 북송 이후 남조가 북조의 경제력을 넘어선 이후였는데, 건문제/장제스보다 세력 규모는 작았지만 난징을 노린 한타 러시/요심[13]전역에서 승리한 후 몰아치기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오늘날까지 북방의 베이징이 중국의 수도인 것 역시 이 연장선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의 원인이 무엇일지가 종종 논의되곤 한다. 삼국지 시대에야 남중국이 덜 개간되어 생산력도 낮고 반항적인 이민족과 밀림이 많았다지만 송나라를 즈음해서는 토지의 비옥도나 그에 따른 인구, 경제 수준을 봤을 때 남중국이 북중국보다 못할 것은 없고 오히려 더 능가하는 면도 많기 때문이다.[14]

이에 관하여 북방 주민과 남방 주민의 기질 차이로 설명하려는 관점이 있다. 북방 주민들은 거칠고 척박한 땅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억세고 전투적인 무인의 기질이 강한 반면, 남방 주민들은 환경도 온화하고 부촌이라[15] 전체적으로 글공부를 좋아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상대적으로 기질이 부드럽고, 그래서 전투에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6] 게다가 병사들만이 그런 게 아니고, 군주들도 안일한 생활에 젖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남송의 임승이라는 시인은
"따뜻한 봄바람에 취해서 항주변주도 구분 못하네."
라고 위정자들을 돌려까기도 했다.[17]

고대에는 순수 밀림이었던 남조와 달리 이미 개발된 북조가 더 경제력이 높기는 했지만, 황하는 20세기가 돼서야 근대식 치수로 방지하게 된 유역 변경 문제로 장강보다 훨씬 골때리는 곳이었고, 또 거침없는 북방 이민족들과 지겹도록 싸워왔기 때문에 딱히 호전성이 낮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의 연나라, 조나라 사람들은 흉노 등의 유목민족들과 싸운 역사가 길어서 호전적인 사람들이 많기로 유명했고, 특히 조나라는 아예 무령왕 대에 호복기사의 군사개혁까지 진행할 정도였다.

남방이 가지는 또 하나의 불리한 요소는 군마의 확보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중국 역대 왕조들은 지금의 간쑤성 일대의 목장 혹은 유목민족과의 무역 루트를 통하여 군마를 확보했는데 남방은 둘 다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기병대를 대규모로 편성할 수 없어서 전술, 전략의 폭이 제한받기도 했고, 물자 운송에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나마 본토에서는 장강을 이용한 수전 및 하천을 이용한 운송으로 커버가 되겠지만 천하통일을 노리고 북으로 진격하려면 어려웠다. 남방이 아무리 장강을 의지하여 잘 수비한다고 해도 결국 전략적으로는 수동적인 입장이라 언젠가는 뚫리거나, 아예 사천 일대로 우회하는 방식도 있었기 때문에 먹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6. 여담

  • 춘추전국시대부터 당나라때까지는 낙양장안을 양대 축으로 해서 천하통일이 이루어졌는데, 대운하 완공 이후 화북의 생산량을 뛰어넘어 천하의 창고 역할을 하게 된 장강 중•하류 지역과 너무 먼 관계로, 역사의 무대는 카이펑을 위시한 동쪽으로 옮겨갔다.
  •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SF 장르에서는 천하통일, 즉 행성 단위의 단일 정부 수립이 문명 발전의 기본적인 단계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 삼국지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는 대체로 게임의 최종 목표가 중원의 통일이다. 처음에는 땅 한 조각만 갖고 시작해서 점점 땅을 늘려나가면서 통일로 나아가게 된다.

7. 창작물


[1] 보통 '북적'으로 불리는 외부 세력이 중원에서 세력을 불리는 것도 어려워서, 정복왕조들도 끝내 중국 문명에 동화되거나, 약간의 영향력만 남긴 채 결국 축출되다가 10세기쯤 되어서야 비로소 완전히 동화되지 않는 정복왕조가 등장했다. 동쪽과 남쪽엔 각각 한국베트남이 있었는데 이들의 경우엔 대체로 조공책봉관계의 틀로 포섭하였다. 특히 한국은 직접지배 기간도 상당히 길었던 베트남과 달리 전체 영역이 직접지배 아래 놓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2] 천하를 무(武)로서 감싸안는다.[3] 당시 서유럽은 야만스러운 미지의 땅으로 여겨졌기에 주요 문명권인 그리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를 지배한 것이 곧 세계를 장악한 것으로 여겨졌다. 당연히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전에 이 일대를 지배하거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페르시아 제국 역시 세계를 장악한 국가라 여겨졌다.[4] 역사상 유일하게 지중해 권역의 모든 주요 국가들을 통일한 국가이다.[5]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한국에서 삼국통일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대 신라인들은 삼한일통으로 주로 표현했다.[6] 고구려백제를 순차적으로 멸망 시킨 통일신라의 문무왕이나 신라후백제를 병합한 고려의 왕건과 다르게 이성계는 기존의 정권을 군사정변의 형식으로 교체하였기 때문에 흔히 연상하는 무력으로 정복해서 통일하는 천하통일과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7] 원래 진나라의 수도는 함양(현재의 시안시)이지만 아버지 조이인이 조나라에 인질로 끌려왔을 때 태어났다.[8] 신나라를 부정하기에, 애초에 단절된 적이 없다고 보는 것이 한나라 당대인의 시각이었다.[9] 白旗大明神[10] 鹿苑院天山道義[11] 豊国大明神[12] 東照大権現[13] 요양+심양(랴오양+선양)[14] 통일 왕조였던 북송때는 화북이 화남보다 인구가 더 많았다. 그 후 여진족의 금나라가 화북을 초토화 시키고 북송이 멸망, 생존자들이 장강 이남으로 도망쳐 남송을 세우고 나서 화남이 화북보다 인구도 많아지게 되었다.[15] 취소선을 긋긴 했으나 남방의 대표적인 지역인 장쑤성저장성 일대는 당나라 말기 이래 지금까지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다. 흔히 말하는 강남이 이 지역이다.[16] 실제 명나라 홍무제 시절의 과거시험 중 회시 합격자들이 전부 남방 출신이라서 북방 출신들이 지역 차별이라며 반발했는데 조사해보니 북방 출신 선비들의 문장 수준이 확실히 낮았더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남방은 문인 기질이 더 강하다는 얘기도 된다.[17] 당시 변주는 정강의 변으로 금나라의 손에 넘어간 옛 북송의 수도 변량(개봉)을 말하는 것이었고, 항주는 남송의 명목상 임시 수도인 임안이었다. 그러니까 땅을 뺏기고 파천한 처지인데도 강남에 안주해서 고토수복은 생각도 안한다고 비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