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 |||
咸 | 興 | 差 | 使 |
다 함 | 일 흥 | 다를 차 | 부릴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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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건국 초기에 있었던 야사에서 비롯된 사자성어이자 관용어구.사자성어의 풀이 자체는 '함흥에 가는 차사'라는 뜻이지만 속 뜻은 '뭔가를 하러 떠난 사람이 소식이 끊기다'는 의미이다.
다섯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의 행동에 분노한 태조 이성계는 고향인 함흥으로 떠나버렸는데 이때 옥새도 함께 가지고 가버렸다. 즉, "너 같은 놈은 내 자식도 아니고, 이 나라의 임금도 아니다!"라는 의사 표시였는데 이 때문에 명나라에서는 "옥새도 없으면서 무슨 왕? 옥새를 받아오든지 왕위에서 물러나든지 둘 중 하나를 골라라"면서 압력을 넣는다. 이에 상황이 난처해진 태종은 태상왕(太上王) 이성계에게 차사를 보내 옥새를 양도하고 한양으로 돌아오시라는 전갈을 보냈는데 태종을 미워했던 태조는 집 뜰에 초소를 설치해 태종이 보낸 차사들이 왔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직접 말을 타고 나가서[1] 활로 쏴 죽였다. 이 사신들의 직책이 차사라서 결국 "어디에 뭘 하러 갔는데 도통 소식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에 태종은 왕의 자질을 직접 보이고 인정받기 위해 사병을 없애 왕권을 강화시키거나, 호패법 등을 실시해 민생 체계를 정비하는 등 갖은 노력을 했고, 후에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찾아가 "지금 주상께서는 훌륭히 잘 하고 계십니다"라며 이성계를 설득했고, 끝없는 설득끝에 그는 결국 한양으로 돌아오게 된다. 태종은 이성계가 돌아오자 궁 밖까지 마중을 나가 아버지 앞에 엎드려 통곡했고, 그 모습을 본 이성계는 태종에게 옥새를 넘겨주었다. |
야사에 따르면 태종이 함흥으로 보내는 차사들마다 족족 이성계가 죽여서 소식이 끊겨버렸기 때문에 '뭘 시켜서 보냈는데 한참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 된 사람'을 지칭하는 사자성어다.
2. 진실
실제로 함흥차사 중 이성계에게 살해당한 이는 없다.[2]야사에서 특히 유명한 인물로는 박순과 성석린이 있다. 성석린은 자청해서 차사로 갔다가 이성계가 칼을 쥔 채 "자네도 차사로 왔는가?"라고 묻자 둘러대며 한다는 소리가 "신이 차사로 왔다면 신의 두 아들은 눈이 멀 것입니다"라고 말해서 목숨은 건졌지만, 나중에 정말로 아들 둘이 소경이 되었다고 전한다.[3] 박순은 망아지 딸린 어미말을 데려가 이성계를 설득하는데 성공했지만, 이성계의 신하들이 가만놔둘 수 없다며 죽이려 한다. 이성계는 그가 이미 용흥강을 건넜으면 살려두라고 했는데, 마침 병을 얻어 느릿느릿 이동하는 바람에 강을 앞에 두고 자객에게 암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이성계는 그 소식에 충격을 받고 무학대사가 찾아오자 그를 따라 이방원에게 돌아왔다는 거로 이야기가 끝이 나며 여기에 용의 눈물로 유명해진 화살과 기둥 이야기나 철퇴 이야기가 FLC로 추가되기도 한다.
실제로 송유와 박순이 함주에 가서 목숨을 잃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성계와 그의 죽음에는 관련성이 없으며 둘 다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목숨을 잃었다.[4] 특히 박순은 박만을 비롯한 반란군 장수 및 수령들에게 조사의를 따르지 말라고 설득하다가 숨졌다.[5] 성석린은 아예 차사로 간 적이 없는데, 큰아들 성지도와 그 아들 성귀수가 2대에 걸쳐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에 이게 엮여서 뒷말이 나온 모양이다. 물론 작은아들 성지도는 좀 일찍 죽긴 했어도 시각장애는 없이 참찬까지 지냈다. 성석린은 태조가 환궁한 후 태종이 문안인사 드릴 때 일부러 골라 보낼 정도로 태조의 총애를 받았기에 차사로 간 적이 없음에도 이런 설화가 나온 걸로 보인다.
그리고 중국에서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다. 사실 태종 즉위 당시 명나라는 정난의 변으로 시끌시끌했던 터라, 태종이 싫어서 인정해주지 않은 게 아니라 집안 문제가 급해서 타국에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영락제 즉위 축하 사절로 간 하륜이 금인과 고명을 내려줄 것을 청하자 순순히 내려주었다.
실제 이성계가 함흥으로 갔을 때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조사의의 난 문서에 나와 있다. 조사의의 난 자체가 이성계가 이방원을 몰아내고 왕위를 되찾으려고 벌인 역쿠데타 시도였다는 점을 보면 박순 등 함흥차사로 알려진 인물들이 태조에게 죽임당했다는 것 자체는 맞는 말이긴 하다.
무엇보다 태조 이성계는 함흥으로 바로 가지않고 소요산에 있었던 이태조 행궁에 머물렀다.
3. 여담
소설가 김진명은 작품 <하늘이여 땅이여>에서 등장인물 사도광탄의 대사를 빌려 함흥차사 속의 메시지 즉 "태조가 아들 태종이 미워서 한양을 떠나 함흥에 틀어박히고는, 태종이 아버지의 귀환을 요청하고자 함흥으로 보내 오는 차사들을 오는 족족 다 죽여버렸기 때문에, 함흥으로 가는 차사는 모두 돌아오지 못했다"는 줄거리를 비틀어, 태조의 옛 친구나 태조를 지지하는 조정의 고위 인사들이[6] 권좌에서 밀려난 태조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함흥으로 가는 차사들은 모두 태조가 보는 족족 활로 쏘아 죽여버리므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더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차사들을 죽인 주체는 실제로는 태조가 아니라 태종 자신이었다고 묘사했다.[7]한국 사극에서 조사의의 난을 그린 작품 중 하나인 용의 눈물에서는 이 야사를 거의 그대로 채용했고, 맨 처음 차사로 파견된 박석명은 살아 돌아왔지만 그 이후 속속 죽어나가다가 다섯 번째로 파견된 박순이 강을 건너기 전 조사의가 보낸 병력에 잡혀 살해당한다. 여섯 번째로 파견된 성석린은 자신이 차사로 온 게 아니라 말해 살아남았지만, 상술한 자식이 눈이 멀 거란 맹세 부분은 나레이션으로 카더라 정도로 언급된 정도. 이후 20여년이 지난 뒤 나온 태종 이방원에서도 조사의의 난을 그렸지만 차사가 살해당하는 묘사는 나오지 않았고, 대신 이성계가 자신은 함흥에 작은 궁궐을 짓고 여생을 마칠 생각이니 목재나 보내달라는 말을 전달해 병력을 준비 중인 것을 숨기고 이후 난이 터지자 태종이 상황 파악을 위해 동북면으로 보낸 관리들이 반란군에게 살해되는 전개로 나간다.
라디오 프로그램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에서는 진행 중에 실수로 함흥차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라는 말이 나왔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가 뒤늦게 청취자의 제보로 이를 정정한 적이 있다. 본래는 '평안감사'가 맞는 표현.
세븐나이츠에서는 세나 중 하나인 크리스의 추석 기간한정 코스튬으로 등장한다.
한국과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과 일본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다. 중국어로는 石沉大海(shíchéndàhǎi)라고 하고 일본어로는 鉄砲玉(てっぽうだま; teppodama)라고 한다. 각각 '바다에 가라앉아 떠오르지 않는 돌'과 '총에서 발사되어 돌아오지 않는 총알'에 비유한 말이다.
성종때에도 여자의 미모에 홀려서 생긴 말인 함안차사가 있다.출처
비슷한 말은 베이퍼웨어, 오리무중, 강원도 포수, 함안차사가 있다.
4. 관련 문서
[1] 다 이성계에게 죽은 것은 아니고 송류는 이성계를 만나보지도 못하고 이성계의 사병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마지막에 희생당한 박순은 이성계의 마음을 바꾸는 데 성공했지만 역시 돌아가는 길에 병이 나서 쉬던 중 이성계의 사병들에게 안살당한다. 이 일화들은 모두 사극 용의 눈물에 묘사된다.[2] 여담으로 옥새는 왕의 것인데, 당연히 태종에게 물려줄 이 때는 정종이 왕이었기 때문에 옥새는 당연히 정종이 갖고 있게 되므로 옥새를 태조가 갖고 간다는 것부터가 성립이 안 된다. 나라의 모든 권한은 기본적으로 왕의 것이다. 상왕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태종이 상왕 노릇을 제대로 한 예외 케이스. 다만 실제로 태종이 왕위를 물려받을 때 정종을 거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냐 마냐는 당연히 왕의 마음이니 옥새를 마음대로 가져가버리면 세자는 난처할 수밖에 없다.[3] 출처는 연려실기술.[4] 다만 이 조사의의 난이 이성계의 작품이라는 시각도 있으니 간접적인 관련은 있다 할 수 있을 듯.[5] 원래 태종은 조사의의 난이 터지자 이서와 설오대사를 보내 태상왕 설득, 박순은 각 수령들을 설득, 이천우는 반란 진압 임무를 맡겼다. 하지만 이서와 설오대사는 반란군에 막혀서 실패, 박순은 살해당해서 실패, 이천우는 패배해서 실패했고 결국 태종이 직접 친정을 나섰다.[6] 당연히 한 나라의 창업 군주이자 왕의 친아버지, 태상왕에게 귀환을 설득하고자 보내는 차사인데 미관말직이나 태조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보낼 리는 없을 테니까.[7] 같은 저자가 쓴 <김진명의 한국사 X파일>에서도 이러한 해석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