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봉행 | ||||
| 사법 담당 | 행정 담당 | 토목 담당 | 재정 담당 | 종교 담당 |
| 아사노 나가마사 | 이시다 미츠나리 | 마시타 나가모리 | 나츠카 마사이에 | 마에다 겐이 |
| 増田 長盛 (생몰년도: 1545년 ~ 1615년) |
1. 개요
마시타 나가모리는 센고쿠 시대의 다이묘로, 오봉행의 일원이다.2. 생애
오와리 또는 오미에서 1545년 출생했다. 1573년부터 나가하마 성주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히데요시의 모리 가문 공격이나 우에스기 카게카츠와의 외교 교섭,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등에서 활약해 2만 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시코쿠 정벌로 복속된 쵸소카베 모토치카와 히데요시의 사이를 중재하였고[1], 오다와라 정벌에서도 사토미 요시야스의 영지를 검지[2]하고 간토 지역의 다이묘들과 히데요시를 중재하는 등 활약을 했다.임진왜란 때에도 벽제관 전투, 행주산성 전투에 참전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츠구 숙청 당시에도 나츠카 마사이에 등과 히데츠구의 가신들을 심문하기도 했다. 이후 야마토 20만 석을 받는다. 히데요시 사후 오봉행이 되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함께 도쿠가와 이에야스 탄핵서를 쓰고 거병하는 등 서군에서 핵심 인물로 활동하나, 뒤로는 서군의 움직임을 이에야스에게 밀고하는 등 의리없는 행동을 보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들에만 참여하고, 본 전투 당시에는 오사카 성을 모리 데루모토 등과 방비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영민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믿을 수 없는 인물‘으로 비쳐지게 된다. 그렇다고 전투의 다른 배신자들과 달리 전투에서의 실제 공적조차 없었기에, 불분명하거나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한 자는 가차 없이 개역시키는 이에야스의 눈밖에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전후 가이에키 되어 고야산에 몇 년간 칩거하게 된다. 이후 아들 마시타 모리츠구가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측에 가담했기 때문에 할복을 명받아 1615년에 할복하며 집안도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