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0-01-23 15:57:51

쵸소카베 모리치카


오사카 오인중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카츠나가 고토 마타베에 아카시 테루즈미 쵸소카베 모리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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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宗我部盛親
1575년 ~ 1615년 6월 11일(음력 5월 15일)


1. 소개2. 생애
2.1. 초기 생애2.2. 세키가하라 전투와 몰락2.3. 오사카 전투2.4. 최후
3. 기타

1. 소개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쵸소카베가 제22대 당주. 당시로서는 매우 큰 6척(180cm)의 키였다고 하며, 인상이 매우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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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1. 초기 생애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사남으로 어머니는 사이토 토시미츠의 누이로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유모인 카스가노 츠보네의 고모 된다. 큰형 노부치카가 죽자 위의 모토치카에 의해 어린 나이에 후계자로 정해졌다. 가신이자 모토치카의 사위인 키라 치카자네, 종제 히에야마 치카오키의 지지를 받던 차남인 카가와 치카카즈가 후계자로 가장 유력시 됐으나 모토치카는 치카자네와 치카오키를 죽이고 기어이 모리치카를 후계자로 밀었다. 모리치카가 원복하자 우에몬타로라 정하는 데 이 타로라는 게 원래 장남에게만 사용되는 이름으로 한마디로 치카카즈와 삼남인 츠노 치카타다는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단 소리. 결국 치카카즈는 울분으로 병사하고 만다. 일설에는 모토치카가 독살했다고도 한다.

부인인 도쿠코는 노부치카의 한 명 뿐인 자식으로 모리치카에게는 조카다. 장남 노부치카를 너무 사랑했던 아버지 모토치카가 쵸소카베 가에 노부치카의 피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결혼시켰다고 한다. 심지어 모리치카를 후계자로 정한 이유도 도쿠코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서라는 얘기까지 있다.

2.2. 세키가하라 전투와 몰락

1599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쵸소카베 가의 22대 당주가 되어 토사의 다이묘가 되었다.당주가 되고 나서 얼마 안있어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게 되자, 처음에는 동군에 참가하고자 하였으나, 진군길에 서군의 나츠카 마사이에에게 진로를 막히게 되어, 할 수 없이 서군에 속하게 되었다.

결국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지면서 카이에키[1], 다이묘의 신분에서 로닌(牢人)으로 전락하였다. 모리치카는 카이에키만은 피하기 위해 아버지 모토치카와 허물없이 지내던 이이 나오마사에게 탄원해줄것을 부탁했다. 이에야스도 4천왕중에서 가장 신임하는 나오마사의 청을 받고 그를 용서하려고 했으나 모리치카의 가신 히사다케 치카나오가 모리치카의 형인 치카타다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해 카이에키당하고[2] 도사는 도쿠가와 편에 섰던 야마노우치 가의 야마우치 카즈토요의 영지가 된다. 그 후 이름을 '타이간 유우무'로 바꾸고 교토에서 테라코야(서당)의 선생 노릇을 하면서 살았다. 여기까지라면 그냥 아버지가 물려준 가문 말아먹은 무능력자로 보이겠지만...

2.3. 오사카 전투

그러나 그의 진정한 재능은 오사카 전투에서 발휘되었다. 1614년에 모리치카는 히데요리의 부름을 받아 오사카에 입성하였는데, 이유는 도요토미의 천하가 찾아온다면 토사의 옛 영지를 되찾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모리치카는 사나다 노부시게, 고토 마타베에, 아카시 테루즈미, 모리 카츠나가와 함께 오사카 5인중 중 한 명으로, 오사카에서 유일한 다이묘 출신이었다. 참고로, 오사카 5인중 중 한 명인 모리 카츠나가는 쵸소카베가 쫓겨난 토사에 새로 들어온 야마노우치 가에 몸을 의탁한 과거가 있다.

오사카 겨울 전투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농성전이었던 바, 이렇다 할 전적이 없었다. 다만, 고토 마타베에의 측근이 남긴 기록에 사나다마루 전투에서 모리치카도 상당히 활약을 했는데 세상에는 사나다 노부시게만 기억한다고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있다.

오사카 여름 전투의 격전 중 하나인 야오, 와카에 전투(음력 5월 6일)에서 키무라 시게나리와 함께 도도 다카토라 군과 싸우며 다카토라의 조카인 도도 다카노리까지 쓰러뜨리고 도도대는 괴멸 직전에 몰렸으나, 이이 나오타카의 원군이 극적으로 도착하자 중과부적으로 시게나리는 전사, 모리치카 자신도 군이 괴멸되어 철수해야 했다.

2.4. 최후

오사카 성이 함락되자 재기를 노리고 도주했으나 6월 7일 교토에서 체포된다. 싸움에 패배하였음에도 할복하지 않고 사로잡힌 것을 도쿠가와 측에서 비난하자, '목숨은 아까운 법. 이 목숨과 오른손이 남아있만 한다면,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를 이 꼴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출가하여 중이 될테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고도 하나, 그의 재능과 간청 뒤에 숨겨진 뜻을 안 이에야스는 후환을 없애고자 이를 거부하였고 모리치카는 6월 11일 교토 로쿠죠가하라에서 자녀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였다고 하며, 이로서 쵸소카베 직계혈통은 완전히 멸족된다. 이후 모리치카의 사촌이자 방계혈족이었던 쵸소카베 지카후사가 성을 시마로 개명한 후 그의 후손들은 쵸소카베 대신 시마라는 성을 쓰며 도사번의 하급무사로 대대로 근무하였고 메이지 유신이후 다시 화족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게된다.

유이 쇼세츠의 난에 가담한 창술가 마루바시 츄야가 모리치카의 사생아라는 설이 있다. 실제 사생아라 하더라도 츄야 역시 처형됐으니 멸족은 기정사실이다. 다른 몇몇 무장과 같이 모리치카도 오사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의 경우는 혼간지 계열의 절에서 승려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3. 기타

모리치카가 죽은지 400년이 되는 2015년 5월에 고치시에 위령패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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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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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통솔, 무력만 높은 C급무장이다.


[1] 改易 - 영지를 몰수하고 평민으로 강등시키거나 영토를 대폭 줄임[2] 토도 다카토라는 치카타다와 친분이 있었고 이를 이에야스에게 참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