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垣見 一直? ~ 1600
카키미 카즈나오는 센고쿠 시대의 무장이자 다이묘이다.
2. 생애
오미국의 전국 다이묘 카키미 가문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확실하지 않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으로 히데요시가 직접 선별해 그의 군기를 맡긴 가신들 중 하나였다.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 오다와라 정벌 등에서 봉행을 맡아 활약했다. 오토모 요시무네가 임진왜란 도중 가이에키당하자 그의 영지였던 분고의 일부분을 받아 2만석의 다이묘가 되었다. 이후 군감으로써 임진왜란에도 참전하게 되었다.울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구원한 하치스카 이에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이 히데요시에게 전선 축소를 건의했으나 이 건의가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고, 이를 반대하고 히데요시의 지시를 따를 것을 주장한 카즈나오와 후쿠하라 나가타카, 쿠마가이 나오모리 등은 칭찬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후에 이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1599년에는 임진왜란 때의 실책으로 가이에키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가세해 오가키 성을 수비했으나, 서군이 패하자 함께 오가키 성을 지키던 사가라 요리후사가 가신 인도 요리모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타카하시 모토타네, 아키즈키 타네나가 등과 함께 동군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이때 같은 서군 키무라 요시노부, 쿠마가이 나오모리 등과 함께 카즈나오 역시 요리후사에게 모살되었다.
3. 일화
1597년 10월 사천성 보수를 맡고 있던 쵸소카베 모토치카와 말싸움이 있었다. 카즈나오는 성벽에 설치하는 텟포사마[1]를 높게 만들 것을 주문했는데 모토치카가 이를 보고 허리부터 가슴까지의 높이가 아니면 철포를 쏘기 힘들다고 말하며 직접 자세까지 잡으며 충고를 해주었다는 이야기다.[1] 鉄砲狭間, 성벽에서 적을 쏘기위해 뚫어놓는 구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