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0 23:12:11

손문욱

1. 개요2. 생애
2.1. 임진왜란 시기2.2. 임진왜란 이후
3. 정체에 대한 논쟁들4. 다른 기록들5. 대중매체

1. 개요

손문욱(孫文彧)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시기 활약한 무신이다. 왜군에 잡힌 포로에서 대마도 세력의 측근으로 살다 조선으로 귀순해 장수가 되고, 외교관으로까지 활약하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인물이다.


2010년 KBS 신역사스페셜 38회에서 <이순신 대장선의 미스터리 손문욱>을 심층적으로 다뤘다.

2. 생애

2.1. 임진왜란 시기

손문욱은 고향이나 생몰년은 미상이며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나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나오지 않고 조선왕조실록과 일본 측 기록에만 남아있다. 실록에 따르면 그가 처음 등장한 건 정유재란이 발발하기 전인 1597년 4월 손문욱이 경상도 관찰사 이용순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귀순 의사를 밝힌 것이 조정에 보고되면서다. 당시는 이문욱이라는 이름을 썼다. 이문욱의 편지를 가져온 박계생에 따르면 두 사람은 임진왜란 발발 후 경산에서 왜군에 잡혀 부산포 왜군진영에서 만나 함께 일본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박계생은 편지를 전하면서 이문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문욱은 글을 잘하고 용맹이 있어서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재주를 시험해 보고 매우 사랑하여 곧바로 양아들이라 일컫고 국성(國姓)을 줌과 동시에 상으로 쌀 1천 석을 주었다.
그때 관두왜(館頭倭)가 마침 반역을 저질러 선봉이 되어 창을 가진 자 3백 명과 칼을 가진 자 2백여 명이 수길(秀吉)이 거처하는 곳으로 난입하는 것을 문욱이 곧바로 몸을 날려 두 장수와 군인 1백여 명을 죽이자 적왜(賊倭)가 크게 무너졌다.
수길이 매우 기뻐하며 양마(良馬) 3필, 은안(銀鞍) 5지(枝), 쌀 1천 석, 금의(錦衣) 50건(件), 저단의(苧單衣) 50건, 환갑(環甲) 50병(柄), 창 15병, 장검(長劍) 3병, 조총(鳥銃) 7지(枝), 종 3백 60명, 군관 34명을 상으로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총애가 더욱 두터워지자 여러 신하들이 시기하여 수길의 첩을 간통하였다고 무고하였는데, 풍신수길이 「비방을 일으킨 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겠으나 재주가 많고 공이 있어서 내가 차마 죽이지 못하겠다. 」 하고 드디어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의 부장을 삼아 공을 세우도록 하였으므로 중국 사신이 나올 적에 함께 부산에 왔다."
조선왕조실록 87권, 선조 30년 4월 25일 을유 5번째 기사 中 ㅡ
도요토미의 양자가 된 것이나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것은 큰 사건인데도 일본 측 기록에는 전혀 없다. 따라서 이 대목은 손문욱이 조선에 귀순하면서 다른 순왜들처럼 처벌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과장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인 학설이다. 다만 손문욱이 고니시 밑으로 들어간건 일본 측 기록에도 있어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문욱은 이중첩자로서 왜군 진영 상황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적정(賊情)은 20만의 병력을 시방 조발하여 5∼6월 경 바다를 건너 부산에서 합진(合陣)하고 7∼8월 경 싸우기로 계획이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조선)의 병력이 매우 훈련되어 있고 들녘을 말끔히 치워 양식을 없앴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모두들 매우 두려워하고 꺼려서 서로간에 「조선에서 죽을 바엔 우리 나라에서 죽는 것이 낫다. 」 하며, 서로 도피하는데 목을 베어도 금지시키지 못한다. 비록 30만이라 하지만 많이 조발(징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길(도요토미)이 여러 장수들에게 통지하기를 「조선의 병력이 조금 훈련되었으니, 진주(晉州)·경주(慶州)처럼 군사가 강한 곳은 함부로 먼저 침범하지 말고 반드시 병력이 약한 곳을 먼저 공격하여 아군의 군세를 확장하라. 공격할 수 없을 것 같으면 기필코 싸울 것 없다. 행장(고니시)과 청정(가토)이 선봉이 되어 서로 번갈아 드나들며 날마다 싸우라. 」고 하니, 행장은 전투를 싫어하여 군사를 조발한다는 말을 듣자 곧바로 심안돈오(시마즈 요시히로)를 보내어 「조선이 앞으로 호피(虎皮) 1천 영(領)과 쌀 10만 곡(斛)에 왕제(王弟)를 볼모로 보낼 것이다. 」고 거짓말을 만들어 군병을 막고자 하였다고 하니, 심안돈오가 돌아온 뒤에야 강화의 허락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부산포의 왜적은 1천여 명이지만 용맹스런 군사는 겨우 2백 명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쓸 수 없다. 군량은 추미(麤米)가 겨우 3백 석이고 정미(正米)는 2백 석이다. 청정의 군사도 날마다 도망쳐서 형세가 별로 확장되지 못하였으니, 수륙으로 공격하여 들어간다면 수고롭지 않게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명나라 심유경은 행장과 더불어 연락이 서로 통하여 우리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거조를 듣는 대로 반드시 통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87권, 선조 30년 4월 25일 을유 5번째 기사 中 ㅡ
이 정도면 이문욱은 왜군 상황을 전부 알려준 것이며 심지어 명나라 심유경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관찰사 이용순은 "이문욱과 박계상이 고니시 곁에 오래 있었으므로 동향을 반드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두 사람이)온천 목욕을 핑계로 6일을 한정하여 왔는데 시한이 지난다면 기밀이 누설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회보하기가 급하다고 하니, 이문욱에게 기미를 보아 일찌감치 (왜군 진영에서)나오고 혹시라도 오래 머물지 말 것으로 회답을 하고, 10일 이내에 나오도록 약정을 하여 돌려보내게 하소서"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국정 전반을 총괄한 최고의 기구인 비변사에서는 이문욱을 쉽게 믿지 않았고 선조에게 "이문욱이 통지한 것을 다 믿을 수도 없거니와 그가 왜적을 많이 죽였다는 말도 허황되고 부실한 일입니다. 대개 우리 나라 사람이 오래 적중에 있으면 반드시 저들의 사정을 자세히 알 것이니 귀순하여 도망쳐올 생각이 있다면 당연히 다반으로 유인하여 끌어내어 적정(賊情)을 정탐하여야 합니다. 따라서 박계생이 왕래한 뒤 다시 적정의 사실 여부를 살펴서 제때 나오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고 선조는 이용순에게 그렇게 지시하라고 명했다.

처음 편지를 보낸 이후에도 이문욱은 왜군 진영에 계속 남아 내부정보를 조선 조정에 넘겼다. 하루는 조정에서 명나라 사신들과 장수들의 안하무인한 태도에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 후 선조가 왜군에 대해 물어보면서 이문욱이 거론된다
"선조가 "적의 정세는 어떻다고 하였는가?"라고 묻자 좌의정 김응남이 ‘(이문욱이 보고하길)지금 군량이 모자라 걱정하며, 군대의 증원은 8∼9월에 있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점장이가 ‘예로부터 6∼7년 동안 조선에서 우리의 뜻을 펴본 때가 없었으니, 출병(出兵)은 불길하다.’고 하였기 때문에 군정(軍情)이 나오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믿을 수는 없지만 (이문욱이)이와 같이 말했습니다."라고 했다. 선조는 "이문욱(李文彧)191) 은 누구의 아들인가?"라고 하자 영의정 유성이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선조는 "(이문욱 같은)그런 사람은 유시(국민을 타일러 가르치는 것)해서 오게 해야 하는데 비록 그곳에 있으면서 적정을 통하게 하더라도 괜찮을 것이다"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89권, 선조 30년 6월 2일 신유 1번째 기사 中 ㅡ
김응남의 발언을 보면 조정에서는 이문욱에게서 정보를 계속 받고는 있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믿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록 외에도 당시 대마도에서 조선과 일본의 교류 관계를 기록한 조선통교대기에는 이문욱의 이름이 '손문식’, ‘손문혹’으로도 나온다. 이문욱에 대해 짧은 기록인데 "모두 미심쩍어하며 말하기를 순문욱은 예전에 왜인 중에 있으면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암살하려다가 발각되자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의존하여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하여 지금 손문욱이 비밀히 야나가와와 통하여 조선에 호의를 보이지만 사실은 귀순의 뜻이 없다고 소문들을 하고 있다"라고 했다. 이 때문에 당시 조선 조정을 비롯해 지금까지도 그가 이중스파이가 아닌지 의심 받기도 한다. 참고로 야나가와는 대마도주 바로 밑에 가신으로서 제일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손문욱은 야나가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고 그와 인연은 계속 이어진다.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으나 비슷한 시기 다른 기록에서도 이문욱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남원 지역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따르면 정유재란 직후 대마도 왜군이 손문욱을 남해 현감으로 임명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마도 세력의 2인자 야나가와가 남해로 진출해 왜성을 축조하여 주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문욱은 대마도 핵심 세력과 인연을 맺고 있었던 것. 다만 '남해현지'나 '환여승람' 등 남해의 여러 가지 기록에는 관련 내용이 없다. 난중잡록은 이어서 "문욱은 왜놈에게 사로잡혀가 다년간 왜국에 있었기 때문에 왜말을 잘했다. 남해에 있을 때에는 살생과 노략질을 엄금해 침해를 받은 사람이 많이 보전하여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조선으로 살아 돌아오니 (조정에서)포상하고 만호의 직을 제수했다"고 기록했다.

이후에도 이문욱의 귀순은 미뤄졌다. 중전의 강화 강화도 천도와 명나라군의 식량 운반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에서도 거론된다.
"판중추부사 윤두수가 "이문욱이 만약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반드시 조국에 돌아오려 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유성룡이 "사세를 살펴보건대 십분 자세히 상의하여 처리해야 마땅합니다. 중국인들이 항상 우리 나라 사람은 근본(根本)이 굳지 않다고 하는데, 이제 만약 이 일로 인하여 말을 지어낸다면 매우 좋지 않습니다. 반드시 탁마(琢磨)하고 계교(計較)하여 형세를 보아가며 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 89권, 선조 30년 6월 18일 정축 3번째 기사 中 ㅡ
같은 달에 김응남에 이어 윤두수까지 언급한 것으로 보면 이문욱에 대해 조정 대신들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약 1년 6개월 뒤 드디어 이문욱의 귀순이 받아들여진 것이 전라도 방어사 원신의 장계에 나온다.
"남해(南海)의 적에 빌붙은 유학(幼學) 이문욱(李文彧)이 적의 진중으로부터 나와서 말하기를 ‘순천(順天)의 적군은 1만 5천 명이고, 적 소굴의 형세는 3면이 바다로 둘러 있어 1면만 공격이 가능한데, 땅이 질어서 실로 진격하기가 어렵다. 남해의 왜적은 그 숫자가 8백∼9백 명으로 장수는 탐욕스럽고 사나운데 군사가 잔약(殘弱)하며, 거제(巨濟)의 적도 겨우 수백 명이니 이 두 곳의 소굴을 수병(水兵)으로 공격하면 썩은 나뭇가지를 꺾는 것처럼 쉬울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89권, 선조 31년 9월 23일 을사 13번째 기사 中 ㅡ
여기서 특이한 점은 원신이 이문욱을 '유학'이라고 적은 것이다. 유학은 관직에 아직 오르지 않았거나 과거를 준비하며 학교에 재학 중인 유생이거나 천거의 대상이라는 의미도 있다. 유생의 나이가 정해진건 아니나 통상 10대~20대였기 때문에 이문욱의 나이가 어렸다는 뜻일 수도 있다. 이 기록 이후로 이문욱은 대부분 실록에서 손문욱으로 불린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가 사망하면서 전남 순천에 주둔하던 고니시는 이렇다할 반격을 하지 않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명나라 장군 진린에게 뇌물을 바친다. 진린도 고니시를 공격하지 않고 자신의 진영을 통해 경상도에 주둔하던 왜군 진영으로 연락선을 통과시켜주고 만다. 이때 조선 조정과 이순신 장군은 고니시를 치기 위해 순천왜성 공격을 준비 중이었으나, 진린과 협의가 원할하지 못하고 상황에 진척이 없었는데 이때 손문욱이 다시 등장한다. 선조 31년(1598) 11월 실록에 좌의정 이덕형이 손문욱을 진린에게 은밀히 보내 고니시 공격이 이루어지도록 했다고 보고했다.

노량 해전 시작되기 전에 손문욱의 짧은 행적이 나오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 때 '회당 김기환'이 쓴 '이순신세공가'에 따르면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대장 진린 그리고 육군대장 유정이 고니시 공격을 감행한다.(왜교성 전투) 이때 진린이 지휘하던 명나라 병선이 조수가 빠져 갯벌에 갇히게 된 것이다. 연합작전을 펼치기로 했던 유정은 이를 방관하기만 하자 이순신 장군이 나서서 구해주게 된다. 군선을 정비한 진린이 상륙하는 것을 본 이순신 장군은 그가 또 실패할까봐 휘하 병사 700명과 승군 300명을 합친 '수군육전대'를 조직한다. 승군은 승장 자운과 혜희에게, 관군은 송희립, 임계형, 김대인, 손문욱 등 무용이 뛰어난 맹장들이 인솔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름만 한번 등장하지만 그가 무인으로서의 능력도 인정 받아 육전래를 이끄는 지휘관 중 한명이 되었다는 대목이다. 다만 김기환이 어떤 자료를 근거를 썼는지는 알려지지않아 진위 여부는 확인이 필요하다. 김기환의 기록이 맞다면 손문욱은 노량 해전이 시작되기 더 이전에 이순신 장군 진영으로 옮겨간 것으로 짐작된다.

손문욱이 진린 진영에 보내진 16일 뒤인 선조 31년(1598) 11월 18일 새벽 비로소 노량 해전이 일어난다. 이순신 장군의 배에 같이 타고 있던 손문욱은 조명연합군 양 진영을 조율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이순신 장군이 전사했을 때 직접 갑판 위에 올라 지휘를 대신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덕형이 올린 장계에 손문욱의 활약이 보고되었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이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이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07권, 선조 31년 11월 27일 무신 5번째 기사 中 ㅡ
뿐만 아니라 전투가 끝난 후 수습 과정에서도 손문욱의 역할은 중요했다고 이덕형의 장계에 나와있다.
"별장 변홍달이 말하기를 ‘남해의 왜노들이 왜교에서 운반하여 쌓아 놓은 양곡이 부지기수였고 소굴이 남아있던 미곡도 매우 많았는데, 중국 주사가 먼저 들어와 아무도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대부분의 양곡이 산실되었다. 또한 진린 도독은 수급을 참획하는 데 급급하여 갑자기 방옥(房屋)을 불태우게 하였으므로 3천여 석의 양곡이 소실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패전하여 배를 버리고 도망간 왜적이 대부분 본섬의 산이나 늪지대로 들어갔는데, 중국군이 산에 불을 놓아 참획하였으므로 본국인에까지도 화가 미처 그곳 백성들이 놀라 숨어버리고 한 사람도 산에서 내려와 안접하는 자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손문욱이 진 도독에게 자세히 말하자, 도독이 그제서야 영기(令旗)를 내보내 금지시켰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09권, 선조 31년 12월 7일 무오 6번째 기사 中 ㅡ
당시 품계는 겨우 만호로 추정되는 손문욱이었지만 진린을 설득할 정도로 명나라군에 영향력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도원수 권율 역시 손문욱의 공적을 보고한다.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전사한 뒤에 손문욱(孫文彧) 등이 임기 응변으로 잘 처리한 덕택에 죽음을 무릅쓰고 혈전하였습니다. 문욱이 직접 갑판 위에 올라가 적의 형세를 두루 살피며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진 도독이 함몰을 면한 것도 우리 주사의 공이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07권, 선조 31년 12월 18일 기사 4번째 기사 中 ㅡ
게다가 임진왜란 때 각 지방 의병들이 세운 무공을 조사하기 위하여 설치한 임시 관아인 군공청에서도 손문욱의 공을 장계에 올렸다. 위에 언급한 권율의 장계를 두둔하는 것으로 보아 조정 대신 중 일부가 손문욱의 공적에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보인다. 군공청은 순문욱을 두둔할 뿐만 아니라 그를 초고속 승진시켜야 된다고 까지 강조한다.
"도원수의 장계에 ‘주사(舟師)가 승첩을 올린 군공에 대해서 예사로운 전공과 같은 예로 논상하는 것은 불가한 듯하다.’ 하였기에 대신들에게 의논하였더니, 모두 말하기를 ‘원수의 논리적인 계사를 보고 안팎의 소문을 참작해 보건대, 이번의 전공은 다른 전공과 같지 않다. 그리고 손문욱이 군사를 지휘하여 싸움을 독려한 공은 당상직을 초수(超授)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고"
조선왕조실록 107권, 선조 31년 12월 25일 병자 4번째 기사 中 ㅡ
손문욱의 공적에 반대한 자세한 기록도 등장한다. 임진왜란 직후 형조 정랑 윤양이 조정에 손문욱의 공적에 이의를 제기했다.
"노량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싸워 이룬 것으로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 등 30여 인이 상인(喪人)의 입을 막아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영각(令角)을 불어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다.
저 손문욱은 일본에 붙잡혔던 하찮은 졸개로 우연히 한 배에 탔다가 자기의 공으로 가로챘으므로 온 군사의 마음이 모두 분격해 한다."
조선왕조실록 109권, 선조 32년 2월 8일 무오 2번째 기사 中 ㅡ
윤양의 장계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자 군사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여 전투의 승기를 가져온 것은 송희립인데 그 공을 손문욱이 가로챘다는 것이다. 손문욱은 임진왜란 말기인 1597년 6월에 귀순하여 이순신 장군 휘하 장수가 되었고, 임진왜란이 종결된 1598년 12월까지 1년 6개 월 가량 짧은 기간 동안 지휘관으로 있었기에 그의 공적은 주변으로부터 탐탁지 않게 여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손문욱의 공적은 변함없이 조정으로부터 인정 받아 절충장군이 되어 임진왜란 2등 공신이 되었다[1].

2.2. 임진왜란 이후

임진왜란 이후에도 손문욱의 활약은 계속된다. 선조 33년(1600) 7월에 지금의 함경북도인 북도 지역의 성을 개축하는 사업에 투입된다. 전쟁 후 성들을 개축하면서 남해안에 있던 왜성들을 참고해서 개축했는데, 손문욱을 포함한 왜군 포로 출신들이 왜성의 특성을 잘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북병사 군관에 임명해 축성을 가르치게 했다. 정유재란 때 왜성이 공성전에 특화된 것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개축 공사 외에도 손문욱은 외교관으로도 변신한다. 조선 조정은 일본 내부 동정을 파악하지 않은 결과를 뼈저리게 느꼈기에 일본에 밀정 파견을 계획한다. 선조 34년(1601) 4월에 추진하려고 했으나 순문욱을 포함한 일본 전문가들이 아직까지는 정세가 불안정한 것을 이유로 거부 의사를 표한다. 이에 조정은 일정을 미루다 이듬해 1월 17일, 대마도 정탐을 결정한다. 임진왜란 이후 첫 일본을 정탐하는 중요한 일이었기애 이덕형은 손문욱을 추천하면서 "말을 전달하는 사람이 반드시 기미를 분명히 살펴 중간에서 말을 잘하여야만 매수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문욱은 이미 귤지정(이데 야로쿠자에몬)과 두 차례 왕복하였으니 긴밀한 경보에 대해 시킬 만합니다. 만일 이 사람으로 하여금 말을 전달하게 하고 또 근실한 통사(통역사)로 하여금 함께 가게 하여 출입하거나 문답하는 사이에 반드시 그와 더불어 같이 행동하면서 왜적의 말과 얼굴빛을 살피도록 하면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상소하자 선조가 허락한다.

여기서 이데 야로쿠자에몬는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가신으로 임진왜란 이후 조일 국교회복을 위해 요시토시의 명을 받아 선조 33(1600년) 4월 조선에 강화사절로 파견되었으며, 조선인 포로를 송환하였다. 그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국교회복 교섭을 위해 조선에 건너와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으며, 1607년과 1608년에도 파견되어 기유약조(己酉約條)의 체결을 비롯하여 조선과 일본 간의 국교회복기에 중요한 교섭을 맡았다.

손문욱이 외교관으로 활약할 시점에 그의 행적을 기록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시발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 조직, 이몽학의 난 진압 등을 비롯해 류성룡을 도와 왜군을 무찌른 공신이었다. 선조 35년(1602) 12월, 당시 이시발은 경상도관찰였는데 손문욱이 명나라 북경에 가 있을 때 부산 왜관에 도착한 야로쿠자에몬을 만난다. 이 자리에서 이시발은 "손문욱이 아마도 전에 앓았던 음창(淫瘡)이 중도에 재발되어 이렇게 지체되는 것 같다. 문욱에게 병이 없다 하더라도 중국에 일이 많아 필시 이 일은 심상히 여겨 젖혀 두고 급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한다. 상술했듯히 이시발도 손문욱을 싫어하던 장수들 중 한사람으로 보인다.

이시발 뿐만 아니라 그를 모시는 아전도 손문욱을 험담한다. 같은 해 왜관에서 만난 야로쿠자에몬가 화친을 위해 애써줘 감사하다고 인사하자 이시발은 자신이 대마도에 갔을 때 정성껏 대접해주었다고 화답한다. 그런데 아전이 "손문욱이 대마도의 성의를 거짓으로 날조하여 찬양하였다"고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날을 기록한 실록에는 이시발이 '사람을 포용하는 도량(度量)과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편협하다'고 덧붙였다.

이후에도 손문욱은 선조 36년(1603) 3월에 야로쿠자에몬가 올 것을 대비해 통영에 보내 통제사와 방비하면서 사신이 도착하면 접대하도록 했다. 야로쿠자에몬이 예정대로 부산 왜관에 도착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손문욱을 내려보내려 한다. 그런데 제동이 걸린다. 비변사의 장계에 따르면 손문욱이 이미 군의 표하(標下)라는 지방군 관원이었는데 유생의 신분으로 왜군 진영을 왕래했기 때문에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는 '정거'라는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선조가 손문욱의 활동을 허가했는데도 출발조차 못한다고 보고했다. 이에 선조는 다시 허가를 내려 손문욱이 부산에 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조선 조정은 사신은 만나주었지만 일본의 진의를 믿을 수 없어 손문욱을 여러 차례 부산 왜관에 내려보내 진위를 파악하게 한다. 이 과정에서 손문욱은 조정을 대신해 일본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협상을 이어간다. 대면 협상 뿐만 아니라 조정의 의견을 손문욱의 이름으로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는 사실상 손문욱이 조일평화협상대표단장이라고 볼 수 있다.

손문욱은 일본 뿐만 명나라에도 파견된다. 당시 평화협상이 비밀스럽게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나 조선 조정이 숨기는게 있는지 의심을 사는 것을 방지하고 그를 보낸 것이다. 이렇듯 손문욱은 대표단장과도 같은 위치에 있었기에 사명대사 유정을 대마도에 정탐을 보내려던 계획도 그가 명나라에서 귀국하지 않아 연기되기도 했다. 선조도 손문욱만한 사람이 없다며 일본 사신이 오면 유정 등의 인원을 보내 접대만 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렇게 까지 손문욱을 기다린 이유가 있었는데 그가 명나라 조정의 입장을 일본에 전달하는 역할도 맡았기 때문이다.

이에 사명대사는 조정의 명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일본 사신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순문욱과 반드시 함께 일본으로 가 양국의 우호관계를 성립시키고자 한다고 전했다. 조정에서는 대마도에도 서신을 보내 유정과 손문욱이 일본에 갈 것이라고 알렸으며, 일본 측 협상대표인 야로쿠자에몬가도 반드시 손문욱을 기다린다고 답했다.

선조 37년(1604) 드디어 사명대사가 일본을 정탐하는 탐적사(耽謫使)로 가게 되는데 손문욱도 함께한다. 이후 두 사람은 대마도를 거쳐 교토에 도착한 후 도쿠가와를 만난다. 이 자리에서 도쿠가와는 자신은 임진왜란에 관여하지 않았고, 조선과 원한도 없다며 손문욱과 함께 포로 1,300여 명을 돌려보내면서 조선과 일본의 평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평화협상의 초석을 놓을 수 있었던건 손문욱의 역할이 컸는데 일본어가 가능했고 게다가 일본의 정세도 잘 알고 있었으며, 쓰시마번과 조선 조정, 나아가 명나라의 신뢰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조정은 일본을 정탐하기 위해 수차례 손문욱을 대마도에 보내거나 서신을 하도록 한다. 실록에 따르면 손문욱은 1601년 부터 1607년까지 외교관이자 평화협상단대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전후 처리와 양국의 국교회복이 실현될 수 있었다.

광해군 9년(1617년) 11월 25일, 손문욱은 "서궁의 변고는 천고에 없었던 일이니 신하와 백성의 의리로서는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수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묘당은 속히 공론을 따르소서"라며 인목대비 폐위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이 기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그의 행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최근에는 일본학계에서도 손문욱의 다양한 행적에 주목해 그를 '전쟁의 포로로 잡혔지만 전쟁을 증오하여 평화를 위해 선봉에 서서 활약한 당시에는 보기 드문 국제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3. 정체에 대한 논쟁들

국내 모든 손씨들이 속해있는 밀양 손씨 전국종친회 족보 어디에서도 손문욱이라는 이름을 쓴 인물은 없으며, ‘욱(彧)’자도 이름에 잘 쓰이지 않는다고 한다
경주 손씨 대동보에 따르면 손문욱이라는 이름이 경주 손씨 중시조이신 밀직공(고려말 판밀직사사, 정2품)의 11세손이며, 경주손가 초, 중기 융성을 이끌었던 손중돈의 셋째(막내) 아드님이신 손 창의 가계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파는 오포파이며, 1세조 손경원-현검-등-사성-소-중돈-창-광정-오-은환-문욱(오포파,양무공파 현 경기 광주시 오포읍 일원)으로 등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어 학계의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광해군 이후에 손문욱의 기록이 없는 건 당파 싸움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 실록에도 나오듯이 손문욱은 광해군 때 일어난 인목왕후 폐비 사건을 찬성한 광해군 지지파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적 노선도 대북 쪽이었을 것이다.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이 집권하면서 북인들을 숙청하고 기록을 지우거나 수정했는데 손문욱도 그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예로 인조반정 후 서인들이 주도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순신 장군 전사 후 전투를 지휘한 것이 손문욱이 아니라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라고 되어있는 것만 봐도 이 추측이 억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손문욱의 출생년도가 알려지지 않아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지만 임진왜란 동안에는 20대에서 30대 사이로 보인다. 순문욱이 정식 귀순했을 때 전라도 방어사 원신이 장계에 그를 유생을 뜻하는 '유학'이라고 적었기 때문이다. 유생의 나이가 정해진 건 아니지만 통상 10대에서 20대 사이인 걸 감안하면 손문욱은 귀순 당시 20대였을 걸로 추정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평화협상을 진행하던 시기에 일본 사신이 부산 왜관에 오는 걸 대비해 손문욱을 보내려는데, 누군가 손문욱이 유생의 신분으로 왜군 진영을 왕래했다고 투서해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는 '정거'라는 벌을 받아 발이 묶인 일이 있었다. 이건 그가 과거 시험을 보지 않은 유생의 신분으로 관직에 임명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명나라에 다녀오자마자 사명대사와 바로 일본으로 갔다는 부분도 그가 젋은 나이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중국에 가는 건 먼 거리는 물론이고 생명의 위협까지 감수해야 했다. 다른 왕들이 남긴 실록만 봐도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는 많은 대신들이 병을 얻어 요양을 하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손문욱은 한 해에 한양을 출발해 부산 왜관에 도착했다가 바로 중국 북경을 다녀와 대마도를 거쳐 일본 교토까지 간다. 실록을 보면 쉬는 기간도 거의 없었다. 만약 손문욱이 고령이었다면 소화하기 불가능한 살인적인 일정이었다.

손문욱은 노비 출신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오히려 손문욱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가 장수가 된 점을 비춰볼 때 문무적 소양이 있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고 노비 출신으로는 이러한 소양을 갖추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시대에 천민 출신이 양인(良人)으로 되는 것을 엄격히 통제해왔고, 문무 관료를 등용할 때 신분을 철저히 확인한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천민 출신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2]

손문욱은 조선왜국이중간첩이라는 설이 있다. 1725년 대마도에서 조선과 일본의 관례를 쓴 조선통교대기에서 손문욱의 소문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가 조선에 호의를 보이지만 야나가와 시게노부와 내통하고 있고 사실은 귀순의 뜻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중스파이 설도 이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손문욱은 조선에 정식 귀순을 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무찌르고 전쟁을 종결하는데 그치지 않고 전후 포로 송환에도 큰 공적을 세웠다.

이중간첩설의 연장선상에서 손문욱이 일본측의 밀명을 받고 이순신을 노량해전 중 암살했다는 설이 있다. 이 역시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조총의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다. 손문욱은 참모군관으로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과 한 배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판옥선 장대에 이순신과 손문욱만 있었던 게 아니고, 기록에 따르면 송희립, 이회, 이완 등이 함께 장대에 있었다. 그렇다면 손문욱이 전투 지휘 도중 이순신에게 조총을 겨누는 행동을 한다면 다른 군관들에게 발각되어 제지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어떻게 몰래 저격하여 조총을 발사했다고 치더라도 발사 폭음과 섬광을 주변에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조총은 발사하는데 1분이 넘을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 이 동안 멀뚱허니 바라보고만 있을 리도 없다. 그래서 손문욱 암살설을 진지하게 믿는 학자는 없으며, 일본 조총수가 쏜 탄환에 우연히 이순신 장군이 맞았다는 게 지배적인 설이다.

4. 다른 기록들

조선통교대기[3]에 의하면 '손문욱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암살[4]하려다 실패했지만 '야나가와 시게노부'[5]라는 사람의 구명으로 목숨을 건졌고, 이를 계기로 야나가와 시게노부를 통해서 조선과 내통하려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내통은 하려 했지만 이는 그냥 고니시 유키나가 암살 시도에 대한 처벌 회피용일 뿐 조선에 귀순할 생각은 없었다. 이후 손문욱은 야나가와 시게노부의 측근이 되었다#'라 기록되어 있다.

난중잡록에 의하면 손문욱은 조선 이남을 점령한 왜군에 의해 남해현감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역대 남해 현감들을 기록한 '남해 선생안'[6]이라는 책자에는 어디를 찾아봐도 손문욱은 없다. 다만 난중잡록에 의하면 왜쪽 남해현감으로 일할 당시 최대한 조선인의 편에 서 줬으며 약탈과 학살을 일절 금지 시키고 왜군이 조선인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막았다. 이를 인정받아 조선에서 전라도를 수복한 이후 손문욱은 왜쪽 관직이 아니라 조선으로부터 정식으로 만호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선무원종공신녹권에 의하면 손문욱은 원종2등공신이 되어 그 관직은 절충장군이라 하였다.

5. 대중매체

  • 소설 <하늘을 베라> 저자 박영식, 2012년 출판.
  • 소설 <손문욱> 저자 안지상, 2013년 출판 (마음세상 출판사).
  • 소설 <손문욱> 저자 안지상, 2015년 출판 (아티라노 출판사) : 한국콘텐츠진흥원 스토리움에서 추천스토리로 선정되기도 했다.
  • 소설 <남쪽 바다의 전언> 저자 허문재, 2017년 출판.


[1] 선조수정실록에는 이순신의 조카 이완이 이순신 장군 전사 후 전투를 지휘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고의로 수정한 것으로 추측된다[2] 하지만 임진왜란 시기에는 사기 진작을 위해 천민이 일본군의 수급을 가져오면 면천시켜주는 등 다른 시기처럼 통제가 엄격하지는 않았다. 한명련, 정충신처럼 원래 천민 출신이였으나 전공을 세워 등용된 사례들도 존재한다.[3] 대마도에서 집필한 조선과 대마도 간 교류를 기록한 서적.[4] 이미 여기서 손문욱이 일본과 척을 지려는 조짐이 보였다.[5] 조선통교대기에 의하면 소 요시토시의 가신으로, 대마도의 실무총책이었다고 한다.[6] 여기에는 조선시대 남해현감 뿐만 아니라 정현태 남해군수 등 현직 남해군수까지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