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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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40년(영조 16년) 전라 좌수사 전운상(田雲祥)이 제작한 특수 군선. 해골은 뼈를 뜻하는 해골(骸骨)이 아니라 바다매(海鶻)라는 뜻이다.조선 후기에 임진왜란 때의 판옥선보다 선체가 작으면서도 운용하기 편리한 중소형 군선이 출현하였는데, 해골선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임진왜란 때 많이 활용하였던 판옥선은 몸체가 크고 둔하여 풍랑을 만나면 침몰하기 쉬운 결점이 있었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전운상이 《무경절요》를 참고하여 개발한 것이 바로 해골선이다.
배의 형태는 앞이 크고 뒤가 작은 것이 마치 매와 같고, 외판 위 좌우편에 매의 두 날개 같은 부판(浮板)을 붙였기 때문에 바람을 타지 않고 행동이 매우 경쾌하고 빨랐다. 또, 그 구조가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노꾼이나 사수가 모두 몸을 숨기고 노를 저으며 활과 총을 쏠 수 있었다. 승무원은 선장 1명에 사부(射夫) 10명, 포수 10명, 타공(舵工) 1명, 능로(能櫓) 34명 등 모두 56명으로 당대의 방패선과 비슷한 크기의 중형 군선이었다.
조선의 해골선은 兵船을 기본으로 선수에 새머리 모양의 구조물을 부착하고, 지붕을 덮는 개판을 부착한 군함이다.또한 거북선처럼 돌격선으로 운용될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동일 갑판에 전투 요원과 노꾼이 동시에 근무한다는 점에서 전투 효율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740년 최초로 제작된 후 각 수영마다 최소한 1척씩 건조하도록 방침이 하달됐으나 1817년 시점에는 단 2척만 운용됐다. 다만 상당히 빨랐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조선 수군에서 계속해서 운영될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선, 병선, 거북선을 제외한 조선시대 군함의 경우 그림 자료가 뚜렷하게 남아있지 않아 그동안 조선 시대 군함 연구에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까지 해골선에 대한 연구(김용국, 장학근)도 그림 자료가 공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다가 2007년 12월 3일, 위에 나온 해골선 그림이 새롭게 공개되어 해골선의 특성과 그 기술적 계보를 추적할 수 있는 새로운 단서를 확인한 셈이다.
2. 문서상의 기록
조선 시대에 대한 기본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왕조 실록에는 해골선에 대해 극히 간략한 설명만 나온다.命統營及諸道水營造海鶻船。 時, 全羅左水使田雲祥造海鶻船, 體小而輕疾, 無畏風之慮。 在魯請令統營及諸水營依其制造之, 從之。
- 《조선왕조실록》 영조 52권, 16년 윤6월 18일
- 《조선왕조실록》 영조 52권, 16년 윤6월 18일
전라 좌수사 전운상이 새롭게 해골선을 건조했는데 크기가 작고 가벼워 속도가 빠르면서도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아 삼도 수군 통제사영과 각 도의 수영으로 하여금 제조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다.
같은 사건에 대한 승정원 일기의 기록은 좀 더 자세하다.
在魯曰, 此卽全羅左水使田雲祥狀啓也。 以新造海鶻船, 體小而輕疾, 無畏風之慮, 使統營及諸道水營兵船, 隨其限滿, 以此船樣, 折半措置事爲請矣。 觀其制樣, 似爲便益。 令統營及諸道水營, 待其兵船限滿, 各先造一隻以試之, 果爲便好, 則加造亦無妨, 以此, 分付, 何如? 上曰, 田雲祥爲國事之意可嘉, 令統營及諸水營, 各造一隻, 試之, 可也。
- 《승정원일기》 영조 16년 윤6월 18일
- 《승정원일기》 영조 16년 윤6월 18일
기본적으로 조선 왕조 실록과 같은 내용이지만 각 도의 병선(兵船)이 수명이 다했을 때 1척씩만 시험적으로 건조해 볼 것을 제안했고, 국왕이 이를 허용했다는 내용이다.
국조보감은 좀 더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흔히 국조보감은 조선 왕조 실록에 비해 사료적 가치가 거의 없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조선 후기의 경우 꼭 그렇지도 않음을 보여준다.
통영 및 각도의 수영에 명하여 해골선을 만들도록 하였다. 당초 우리 나라의 전선은 모두 3층의 판옥과 4면의 순창(楯窓)을 설치하여 몸체가 커 둔하기 때문에 바람을 만나면 파선하기 쉬웠다. 이때 이르러 전라 좌수사 전운상이 무경절요를 상고하여 해골선을 처음 만들었다. 그 제도는 앞이 크고 뒤가 작아 해골의 모양과 같고, 뱃전의 좌우에 부판(浮板)을 설치하여 송골매의 양쪽 날개 모양을 나타냈다. 이에 바람을 두려워할 것이 없는데다 또 매우 가볍고 빨랐다. 안에서는 밖을 엿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안을 엿볼 수 없어 노군과 사수가 모두 몸을 숨기고서 노를 젓고 총포를 쏠 수 있었다. 이에 연유를 갖추어 계문하니, 상이 따르고 마침내 각 수영에서도 따라 행하도록 명한 것이다.[1]
역시 같은 맥락의 자료지만 가) 무경절요를 참조해서 제작했다는 점, 나) 앞이 크고 뒤가 작아 해골 모양이고, 뱃전의 좌우에 부판을 날개 모양으로 설치했으며 다) 안에서는 밖을 엿볼 수 있지만 밖에서는 엿볼 수 없다는 세 가지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무경절요에 대한 언급을 제외하고 위 내용 중 나) 다)의 형태나 특성에 대한 기록은 만기요람 군정편 주사(舟師) 전라 우수영조에도 같은 내용이 확인된다. 나)의 경우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홍재전서에는 전운상이 해골선을 창제했다는 내용 외에는 추가적인 기록은 없다. 증보문헌비고 병고 주사조에서도 나) 다)의 내용은 확인되지만 가)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현재로서는 해골선에 대해 가장 자세한 기록이 국조보감에 남아있는 셈이다.
3. 중국의 해골선
국조보감에서 전운상이 해골선을 제작할 때 무경절요를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전운상이 참조했다는 무경절요는 무경총요전집과 기타 다른 병서를 요약한 것이므로 그 뿌리는 무경총요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무경총요는 송나라 증공량이 1044년에 집필 완료한 책이므로, 전운상의 해골선은 그 기술적 계보가 중국 고대 선박으로까지 연결되는 셈이다. 해골선은 앞이 크고 뒤가 작아 해골(바다새의 일종)의 모양이고 좌우로 날개 모양의 부판이 달려있다는 조선 시대 문헌의 설명은 무경총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조보감, 만기요람,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달려있는 해골선에 대한 설명은 결국 중국 문헌에서 차용한 셈이다. 해골선에 대한 이같은 설명은 송나라대의 무경총요 이전 당나라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766년부터 800년 사이에 작성된 통전, 940년에 작성된 호령경에도 이미 등장한다. 중국 문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해골선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海鶻,頭低尾高,前大後小,如鶻之狀。舷下左右置浮板,形如鶻技翼,以助其船,雖風濤漲天,免有傾側。覆背上,左右張生牛皮為城,牙旗金鼓如常法。
그 요지는 1) 선수가 낮고 선미가 높으며 2) 선수가 크고 선미가 작으며 3) 현측 좌우 아래에 날개 모양의 부판이 달려 있어 넘어지지 않고 거친 바다를 건너가기에 편리하며 4) 지붕을 덮고 좌우에는 생우피로 보호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설명은 이후 무경총요는 물론이고 무비지, 무비요람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적어도 문헌적 설명만으로 보자면 해골선은 당나라 이후 조선 철종대까지 거의 동일한 선형을 가진 배인 셈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림이다. 거의 모든 문헌에 해골선에 대해 동일한 설명을 함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무경총요에는 해골선의 그림도 나오지만 그 형태는 이번에 공개된 해골선 도본과 큰 차이가 있다. 무경총요의 명나라 판본은 완전한 전질을 가지고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으나 사고전서에 포함된 청나라 판본의 그림을 기준으로 할 경우 앞이 낮고 뒤가 높은 것이 특성이나 이번에 발견된 해골선 도본에 보이는 새머리 형태의 구조물은 나오지 않는다.
중국의 병법 서적에 등장하는 해골선 그림은 크게 세가지 계통으로 나눌수 있다. 우선 금탕차저십이주와 삼재도회의 해골선 그림은 특별한 특징이 없다. 문헌상의 설명과도 차이가 심해 신뢰도가 매우 낮아 보인다.
청나라 사고전서본의 무경총요와 무비지는 선수가 낮고 선미가 높은 특징이 뚜렷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같은 특성은 우리 나라의 무비요람에서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선수가 낮고 선미가 높은 배는 중국의 나팔호선 등 중국 남쪽 지방의 해양형 선박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것이 중국 해골선의 가장 큰 특징일 수는 없다. 가장 주목할 점은 오히려 현측에 날개 모양의 부판이 달려 있다는 문헌의 설명이다. 무경총요나 무비지의 그림에서 이같은 부판을 식별하기는 쉽지 않다. 부판과 관련해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이미 위에서 살펴본 금탕십이주 명나라 잔본에 나오는 해골선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현측에 무언가 이상한 구조물이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링크
4. 조선 해골선
공개된 해골선 도본의 조선 해골선은 이같은 중국의 해골선과 큰 차이가 있다. 우선 선수가 크고 낮다거나, 선미가 작고 높다는 중국 문헌의 설명은 조선 해골선 도본 그림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해골선 도본 그림은 판옥선과 마찬가지로 거의 수평에 가까운 현호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배 머리의 새모양 형태의 구조물도 중국 해골선에는 없는 것이다. 조선 해골선 도본의 새머리 형태의 구조물은 그 형태가 마치 현대 유원지에서 볼수 있는 레저용 보트와 유사해서 매우 어색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거북선에 익숙했던 조선 후기라면 이런 새머리 모양의 구조물을 달겠다는 발상을 할 수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거북선과 달리 해골선의 새머리 모양 구조물은 그 내부에서 화포를 발사하거나 연기를 내뿜는 등 실용적인 용도를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림상으로는 날개 모양의 부판도 식별할 수 없다. 전운상이 참조한 무경절요의 정확한 판본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부판이 뚜렷하게 묘사되지 않은 판본의 그림을 참조한 탓에 부판이 정확하게 어떤 구조물이 모르는 상태에서 해골선을 제작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것이다.
이 밖에 조선 해골선 도본 그림의 특징으로는 갑판에 거북선처럼 지붕을 덮는 개판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정확한 형태를 식별하기 어려우나 일단 그림상으로는 개판이 설치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림상으로도 개판이 설치되어 있음을 식별할수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적 근거도 존재한다. 구 일본 해군성 소장본 전라 우수영지에는 각급 조선 후기 군함을 제작할 때 소요되는 소나무 목재의 양을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이 기록을 보면 해골선을 제작할 때 중송(中松) 59주와 소송(小松) 36주가 필요한데 비해, 병선을 제작할 때는 중송 51주와 소송 9주가 필요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미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해골선과 병선은 크기가 유사한 배다. 중송의 소요량이 비슷한 것도 두 배의 크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방증한다. 그런데 비교적 작은 목재인 소송에서는 해골선이 36주, 병선이 9주로 거의 4배가 차이가 있다. 이처럼 해골선에 소송이 4배 가량 추가로 소요되는 이유는 지붕을 덮는 개판에 소송이 사용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앞에서도 반복적으로 언급했듯이 조선의 해골선은 병선(兵船)과 유사한 크기의 배였다. 결국 전운상의 해골선이란 것은 병선급 배의 선수에 새머리 모양의 구조물을 달고 거북선 개판 형태의 지붕을 장착한 배인 셈이다.
5. 조선 시대 해골선의 배치와 운용
전술했듯이 조선 시대 해골선은 병선을 부분 대체하는 용도로 만든 배였다. 조선 후기 각 지역별 수군은 전선(판옥선) 1척, 방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1척 ~ 3척을 하나의 전투 단위로 구성하거나 방선을 제외하고 전선 1척, 병선 1척, 2척 ~ 4척의 사후선을 하나의 전투 단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전선이 주력 1급 전투함이고 방패선과 병선은 전선을 지원하는 2급 전투함이며 나머지는 보조선으로 볼 수 있다.해골선은 병선을 부분적으로 대체하는 선박이란 점에서 주력이 아닌 2급 전투함에 해당하는 군함이라고 할 수 있다. 거북선은 전선과 동급의 주력 전투함이었다는 점에서 해골선을 놓고 거북선의 후속함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해골선은 거북선처럼 지붕을 덮는 개판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최선봉에서 돌격선으로 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군함이었고 그 점에서는 거북선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 배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해골선의 기본 뼈대가 된 병선 자체가 대구경의 함포를 탑재하기에 적합한 배는 아니었고, 2층 구조의 갑판을 가진 판옥선, 최소한 반 2층 내지 2층 구조의 갑판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는 거북선과 달리 단일 구조의 갑판을 가진 배였다는 점에서 이를 개조한 해골선도 동일한 한계가 있다. 같은 갑판에 노꾼과 사수는 물론이고 화포수까지 같이 서야하므로 전투 효율이 그렇게 좋았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약점이 있는데 비해 그림에 나타나는 구조라면 시야도 많이 제한될 것이 분명하므로 성능이 그렇게 우수한 배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영조 대에 각 수영마다 최소 1척씩의 병선을 제조하라는 지시가 하달됐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문헌상에 해골선이 그렇게 많이 식별되지 않는 것을 봐서도 해골선이 그렇게 우수한 배라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을 방증한다. 지시대로 각 수영마다 1척씩 건조할 경우 통영, 경상 좌수영, 전라 좌수영, 전라 우수영, 경기, 황해, 충청, 평안 등 총 8척이 존재해야하지만 실제 기록으로는 그보다 훨씬 적은 해골선만 나타난다.
순조 17년(1817년)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조선 군함 목록표인 선안(船案)에는 전라 우수영에 1척, 황해도 수영에 1척이 배치된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역시 순조 대에 작성된 만기요람에는 전라 우수영에만 1척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선안보다 더 적다. 선안과 만기요람에는 최초로 해골선을 제작한 전라 좌수영에도 단 1척의 해골선이 나타나지 않아, 해골선을 최초로 만들었던 지역에서조차 해골선이 사실상 폐기 상태였음을 보여 준다.
6. 기타
- 아무래도 시험적인 함선이다 보니 연구가 미비하다. 특이한 배였다는 특성상 한선 연구에서도 분량이 없다시피한 편.
- 그런데 조선중기 이후의 거북선의 후속으로 개발된 소형화 함선 중에선 가장 확실히 기록이 남아있고[2] 공개된 형태가 너무 큐트하기 때문에 인지도가 높아졌다. 오리배를 닮았다는 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