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9 14:45:05

숙의 문씨(영조)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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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 | 淑儀 文氏
출생 1733년 추정
사망 1776년 9월 11일 (향년 43세)
능묘 미상
재위기간 조선 소원
1753년 3월 12일 ~ 1771년
조선 숙의
1771년 ~ 1776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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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미상
부모 부모님[1]
형제자매 오빠 - 문성국(文聖國)
배우자 영조
자녀
슬하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화령옹주(和寧翁主, 1753 ~ 1821)
차녀 - 화길옹주(和吉翁主, 1754 ~ 1772)
봉작 소원(昭嫒) → 숙의(淑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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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으로2.2. 부자(父子)의 불화를 부추기다2.3. 몰락과 죽음2.4. 사후
3. 평가4. 자녀5.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영조후궁으로 주로 문녀(文女)라고 불린다. 소생으론 화령옹주화길옹주가 있다.

2. 생애

2.1. 궁녀에서 후궁으로

영조의 맏아드님이신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궁이 죽었는데, 영조께서 효부를 잃으시고 애통하시어 상례에 친히 납시어 곡진히 정성을 다하시니라. 그런데 그곳에 소위 문녀(文女)라는 시녀나인이 있으니, 별감 문성국의 동생이라.
한중록
문씨는 본래 영조의 서장남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 조씨를 모시는 궁녀였다. 그런데 현빈 조씨의 장례를 치를 때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영조는 현빈 조씨가 지내던 창경궁 건극당 아래의 고서헌이라는 전각을 문씨에게 주어 살게 했다고 한다. 아끼던 며느리의 상중에 그 휘하 궁녀에게 승은을 내리는 건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 아니었지만, 영조는 한번 총애하기 시작한 사람에겐 물불 가리지 않고 특혜를 주었던 듯 하다.[2]

그러나 영조가 문씨를 정4품 소원으로 책봉할 때 승지 윤광의가 어명을 받들지 않자 다른 승지를 시킨 일이나,[3] "그 남매가(문씨와 그녀의 오빠 문성국) 아들을 못 낳아도 다른 자식이라도 들여서 아들을 낳았노라 하려 한다", "그 어미는 이 되었다가 딸의 해산에 환속하여 들어왔다" 등 괴이한 말이 낭자하였는데 이는 그만큼 당시에 문씨가 논란의 중심이었다는 증거도 된다.

2.2. 부자(父子)의 불화를 부추기다

10대 후반이었던 세자가 아버지형수의 장례식 중에 젊은 궁녀후궁으로 들이는 걸 좋게 생각했을 리도 없거니와[4][5] 문씨의 처신도 올바르지 않았다.

한중록》에 따르면 문씨의 오빠 문성국은 세자의 처소인 동궁전 별감들과 내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별감들은 동궁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듣는 족족 숙의 문씨에게 알려주었고, 문씨는 그 이야기를 그대로 영조한테 일러바치며 부자간의 사이를 악화시켰다.
영조께서 모르실 때도 의심하셨는데 날마다 들으시니 불쾌하신 마음에 부자 사이는 갈수록 갑갑해지니라. 국운이 불행하여 요녀(妖女)와 간적(奸賊)까지 나니 섧도다.
한중록
또한 정조는 즉위하자 "옛날 창경궁 낙선당에서 일어난 화재 원인도 문성국 때문"이라고 말했다.[6]창경궁 낙선당에서 일어난 화재란 과거에 낙선당에 화재가 일어났는데 영조는 이것도 사도세자의 잘못이라고 크게 꾸중했고, 잘못도 없이 불똥을 맞은 사도세자가 울분이 폭발해 저승전 앞뜰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 시도까지 했던 사건을 말한다. 정조의 언급은 문씨 남매가 사도세자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기 위해 일부러 화재를 일으켰다는 뜻이다.

숙의 문씨는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게 대들었다가 노한 대왕대비 인원왕후에게 회초리를 맞은 전력도 있었다. 그것도 사도세자가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았다. 아무리 문씨가 영조의 총애를 받았어도 이는 도의적으로나 예법상으로나 문씨가 내명부의 법도와 위계질서를 어긴 무개념 짓이었다. 문씨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품계도 높은 정1품 빈이자 세자의 생모인 영빈은 내명부에서 입지가 전혀 다르기에 인원왕후가 왕실의 어른으로서 나선 것이다.[7][8] [9] 그 후 영조가 삐졌는지 인원왕후에게 "나 양위하려는데 OK해 주시죠" 그리 말한 것을 인원왕후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러쇼 했던 것[10]이 영조의 양위 쇼로 번지고, 인원왕후는 자기가 귀가 먹어 잘못 대답한 죄라며 아래 거처로 이사가는 등 모자 간 기싸움까지 났다고 한다. 영조로서는 젊은 첩을 그렇게 팼다고 나서서 따지긴 창피한 걸 아니까 어떻게든 티를 내고 싶었던 모양.

다만 <한중록>에서는 이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고 석고대죄한 원인도 전혀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영조가 양위하겠다고 한 것은 숙의 문씨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 '사헌부 홍준해(노론)의 상소'로 영조가 진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종성(소론)이 영의정이 되자 홍준해가 이종성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영조는 당파싸움을 한다며 홍준해를 처벌했다.<대천록>이 타인의 기록과 당시 돌던 소문을 취합한 책이라는 점, 혜경궁 홍씨가 당시 궁중에서 생활하던 세자빈이라는 점, 그리고 숙의 문씨를 혜경궁이 매우 증오했다는 점등을 고려하면 <한중록>이 신빙성 있는 기록으로 보인다.[11]

"사가에서 몰래 사내아이를 들여와 왕자라고 속이려 했으나 영의정 이종성에게 발각되어 무산되었다"는 야사도 있다.[12]

2.3. 몰락과 죽음

문씨 남매는 영조의 생전에는 이렇게 위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영조가 승하하자 말 그대로 화무십일홍의 처지로 몰락하고 말았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그동안 문씨가 저질러온 죄악에 대해 포고했고, 문씨의 일가친척들은 하루아침에 죄인으로 전락해 고초를 겪어야 했다. 문씨 본인은 사도세자를 무고했다는 혐의로 유배 당한 뒤 끝내 사약을 받아 사망했다.

2.4. 사후

당시 실록을 보면 조정의 중론은 대부분 문녀를 하루라도 빨리 사형시키자는 쪽이었으며 문씨의 편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애초에 신분부터가 미천한 궁녀 출신이어서 조정과 궁 내에서 지지해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나마 겸손하고 적절하게 행동하면서 왕실 일가와 사이 좋게 지냈다면 좀 나았겠지만 그러기는 커녕, 상술한대로 영조의 총애만 믿고 거만하게 굴며 왕실 내 분란을 일으켰고 슬하에 두 딸만 있을 뿐 사도세자정조에게 대항할만한 왕자도 낳지 못해서 정조의 반대파도 문씨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지켜줄 이유가 하등 없었다.

결국 문씨의 어머니는 제주도의 관노비가 되고, 오빠 문성국도 노적(孥籍)[13]에 오르고 가산을 적몰당했다. 문성국의 아들 문경행(문씨의 조카)은 유배, 나중에 성 안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가 발견된 문성국의 처남 박도오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문씨의 장녀 화령옹주의 남편 청성위 심능건은 문씨의 집을 마음대로 처분했다고 처벌을 받았고,[14] 5년 전 일찍 요절한 화길옹주의 장례에 10만 냥이나 지출한 일도 화두에 올랐다.

아예 숙의 문씨의 두 딸 화령옹주화길옹주의 작위를 박탈해야 한다는 상소까지 올라왔는데, 정조는 "두 옹주는 영조의 골육이며 문씨가 흉계를 꾸밀 때는 강보에 싸인 아기였을 뿐"이라며 감싸주었다.[15]

그러나 정조가 이복고모 화유옹주의 사망 소식을 듣고 "선조의 옹주 가운데 궁중을 출입한 사람은 단지 이 옹주 하나 뿐이었는데" 라고[16] 말하는 걸 보면, 아마도 화령옹주는 작위만 삭탈당하지 않았을 뿐이지 궁궐 출입도 금지당하고 옹주로서 제대로 된 예우도 받지 못한 채 평민이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아간 듯하다. 그나마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정조가 그냥 놔둔 것일 뿐 아들로 태어났더라면 99% 아기고 자시고 간에 사약으로 죽여 없애는 더욱 끔찍하고 잔인한 결말이 나왔을 것이다. 당장 자신의 권좌에는 아무 위협이 되진 않는다 하더라도 아들이면 제2의 수양대군이 될 위험성이 컸고 딸이면 제2의 효명옹주가 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기 때문[17]이다.

거기다 문씨의 차녀 화길옹주는 안타깝게도 정조 즉위 3년 전에 향년 19세를 일기로 남편과 자식들만 남긴 채 병으로 요절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숙의 문씨의 살아남은 유일한 딸인 장녀 화령옹주는 어머니와 외삼촌의 죄로 인해 억울하게 궁중 출입까지 금지당했지만, 정조의 관용과 자비 하에 연좌제를 벗어나 목숨을 부지하고 옹주의 직첩도 유지한 채 조정의 피 말리는 암투와 권력다툼에 휘말리지 않는 평범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죄인의 딸이라는 자신의 불리한 처지와 입장을 생각해 별다른 사고나 잡음을 일으키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산 듯하다. 비록 하나뿐인 동복여동생은 요절하고 어머니는 죄인 신분으로 사사당한데다 외가 친척들도 모조리 패가망신당하는 비극을 겪었지만, 이미 정조 즉위 전에 남편과 혼인하여 사가로 나간 상태라 적어도 가정을 유지하며 꿋꿋하게 살아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운 좋게 살아남은 화령옹주는 정조보다 21년 더 오래 살았으며, 향년 69세를 일기로 이복 종손 순조의 치세까지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순조는 장생전[18]의 퇴판 1부를 보내주며, 화령옹주의 장례를 왕실 종친의 예우로 치러주었다.[19]

3. 평가

사도세자영조의 갈등을 부추기고 정조를 죽이려든 행적으로 인해 소현세자민회빈 강씨를 죽음으로 내몬 귀인 조씨와 더불어 조선사의 역대 후궁들 중 가장 대중적으로 이미지와 평가가 부정적인 전형적인 나쁜 후궁의 대명사이다.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와 공통점이 많다. 욕심만 많고 능력도 처신도 인품도 최악이면서 왕의 총애만 믿고 오만해져 안하무인으로 굴었다는 점, 상급자의 경고와 질책에도 후회나 반성은커녕 끊임없는 모함과 모욕, 이간질로 주변에 아군은커녕 적만 잔뜩 만드는 악독하고 간교한 성격, 그리고 자신의 뒷배가 되어주던 왕이 승하하자마자 그동안의 악행이 만천하에 폭로되어 원한을 산 수많은 이들[20][21]에게 그 업보를 그대로 되돌려받아 폐서인이 되어 사사당하고 자식도 연좌제로 인해 목숨과 작위를 빼앗길 뻔했던 것 등이 매우 닮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인성 나쁜 정부와 후궁들의 전형적인 클리셰와 파멸 테크(1. 국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아 막강한 지위의 정부/후궁이 됨 2. 악독한 성격을 숨기지 않고 상급자와 주변인들에게 나댐 3. 결국 반성 없이 패악질을 부리다가 아들을 낳지 못함 4. 뒷배인 왕이 승하하자마자 누구보다 가장 빠르게 몰락하고 궁에서 쫓겨나거나 처형당함)를 빠짐 없이 보여준 인물이자 전반적으로도 귀인 조씨의 하위호환인 셈.

차이점이라면 사사당했지만 적어도 2남 1녀를 낳아 인조의 총애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정적들인 소현세자민회빈 강씨마저 제거한 뒤 효종을 왕위에 올리는 목적을 달성하기라도 한 귀인 조씨와 달리, 숙의 문씨는 아들은커녕 딸만 둘을 낳아 사도세자정조의 대항마가 되지 못했고 결국 자업자득으로 영조의 관심에서도 멀어지다가 정조 즉위 후에는 집안째로 처참하게 몰락했다. 차녀 화길옹주는 이미 영조 시절 19세로 요절했으며 장녀 화령옹주만 남긴 채 어떤 욕망이나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누구 하나 자신을 옹호하거나 지켜주는 사람없이 잔인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특히 원수지간인 정조가 평생토록 가장 사랑했던 여인 의빈 성씨와는 말 그대로 거울처럼 대조되는 인생을 산 대척점이자 안티테제라고 할 수 있다. 둘다 궁녀 출신의 승은후궁인 건 똑같지만 권력욕만 앞서고 잔꾀와 이간질만 잘할 뿐 간악하고 멍청하기 그지없는 성격으로 주변에 적을 잔뜩 만들고 스스로의 죽음과 파멸을 자초한 숙의 문씨와 달리, 의빈 성씨는 언제 어디서든 현명하고 지혜로운 처세술로 타인을 먼저 배려하면서 본인의 삶을 살고 싶었던 굳은 의지와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며 한문 소설한글로 필사하는 총명한 지성까지 지닌 다재다능한 재색겸비엄친딸이자 팔방미인이었다. 덕분에 시어머니혜경궁 홍씨와 시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 시누이들인 청연공주청선공주, 그리고 정조의 정비이자 본인의 직속 상관인 효의왕후의 극진한 사랑과 환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렇게 정조와의 사이에서 문효세자와 옹주를 낳고 내명부에서의 정치적 입지도 나날이 높아졌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저주와 모함을 한 끝에 사방을 적으로 돌리며 안하무인으로 굴다가 사사당하고 현대에도 재평가없이 비판과 비난만 당하고, 매체에서도 기껏해봐야 납작하고 얄팍한 사연 없는 삼류 악역으로밖에 안 나오는 숙의 문씨와 달리 의빈은 누구든 적으로 돌리지 않고 현명하게 살면서 궐 내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비록 슬하의 자식들은 모두 죽고 의빈 본인도 셋째 아이를 임신한 채 지병을 앓다 안타깝게 사망했지만 의빈 성씨를 향한 정조의 사랑과 헌신은 사후에도 이어졌고, 죽은 지 수백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대중의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으며 본인을 원탑 주인공으로 한 명작 소설그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명작 드라마도 나올 정도로 인기가 많다.

한편 숙의 문씨를 일종의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해석도 있다. 정사에서 문씨의 행적이 나쁘게 묘사된 것과는 별개로 그녀가 사도세자를 참소했다는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임오화변 문서에 나오듯이 사도세자와 영조의 갈등은 일개 후궁이나, 신하들이 거짓으로 모함하는 수준으로는 절대 생길 수 없었다. 후대부터 현재까지 학자들도 이 사건의 근본은 사도세자와 영조 두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

허나 성격이 나빴더라도 이를 끝까지 숨기고 최소한 적정선에서 행동하거나 얌전하고 조용히 있는 식으로 대외적 평판과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했다면 사가로 나가는 선에서 끝났지, 사약을 받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숙의 문씨 자체가 내명부 일원들과 사도세자, 정조가 싫어하는 짓은 다했던 만큼 갈등의 근원이 아니더라도 이미 시작된 갈등을 악화시키는데 일조한 것 자체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그의 몰락과 최후 자체도 순전히 숙의 문씨의 자업자득, 인과응보이다. 애초에 승은을 입은 시기도 현빈 조씨의 상중이었는데 그런 처지임을 모르고 대왕대비 인원왕후와 영조의 정비이자 차기 왕대비인 정성왕후, 그리고 세손 정조의 생모로 입지를 굳힌 혜경궁 홍씨가 정정했을 때에도 다른 사람도 아닌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에게 대들다 못해 모욕을 퍼붓는 초대형 바보짓을 저지르다가 회초리를 맞은 것이다. 심지어 이때는 영조의 승은만 입었지 입지를 굳힐 수 있는 확실한 무기인 아들도 안 낳았고, 내명부에 갓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가장 서열이 낮은 막내이자 신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숙의 문씨는 멍청하게도 사리분별도 못한 채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영빈 이씨를 모욕한 것. 다른 걸 떠나서 인현왕후가 숙의 문씨를 죽이거나 쫓아내려 하지 않고 회초리형으로 끝낸 것만 해도 엄청나게 자비롭고 관대한 처분이라는 걸 숙의 문씨 스스로도 다른 누구보다 알고 있을 터였다. 허나 뼛속까지 간악하고 어리석은 숙의 문씨는 이 기회를 기회로 인지하지 못하고 되도 않는 아집을 부리며 반성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자기만 불쌍하고 억울하다는 듯이 헛된 자존심을 부리다 못해 주제넘게 부자의 갈등에 끼어들어 이간질을 하는 식으로 치졸한 분풀이를 했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본인의 파멸에 일조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정조가 즉위할 당시엔 임오화변이란 거대한 사건의 후폭풍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고 희생양을 만들어서라도 왕실과 조정 내 혼란을 무마시켜야 했다. 노론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었던 정조는 노론 주류와 큰 연관이 없는 문씨를 공격해서 그들을 안심시켜야 했고, 노론 입장에서도 문씨가 죄를 뒤집어쓰는 것이 임오화변의 책임에서 벗어나는데 유리했다. 게다가 궁녀 출신에 선왕의 일개 후궁에 불과한 문씨에겐 마땅한 권력과 지지세력도 없었다. 이러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정조와 조정 전체가 문씨를 임오화변의 범인으로 몰아간 것. 같은 예로 김상로가 있는데, 그는 영조가 문씨 남매와 함께 사도세자를 모함한 인물로 언급한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김상로는 이전부터 사도세자를 옹호했고 임오화변 당시에는 이 문제 때문에 파직당한 상태였다. 그리고 정조가 즉위했을 때는 이미 김상로는 사망했으므로 관작을 추탈하고 가족들을 유배형에 처하는 것으로 끝났다. 김상로가 한 때 노론의 영수이긴 했지만 이 과정에서 김상로 집안을 제외한 다른 노론 인사들의 처벌은 없었다. 결론을 내리면 숙의 문씨와 문성국을 비롯한 문씨 일가, 그리고 김상로를 희생양으로 삼은 대가로 정조와 노론은 임오화변의 원한을 끝내고 상호협력할 수 있게 된 것.

4. 자녀

5. 대중매체

  • 조선왕조 오백년 - 김혜선. 김혜선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작품이다. 여기에서는 사실상 영조를 꼬드겨서 좌지우지하는가 하면 같은 시기에 임신한 다른 산모의 아들을 궁으로 몰래 들여와 자신이 왕자를 낳은 것처럼 조작하려다가 실패하는 이야기도 나온다.[22]
  • 대왕의 길 - 윤손하. 어려운 집안 형편에 궁녀로 들어간다. 역사대로 현빈 조씨 궁에서 침방 나인을 한다. 꾀가 많아서 나인 시절부터 상궁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23] 영조와 사도세자간의 수상한 기운을 느끼고 한량인 자기 오라버니에게 돈을 쥐어 주고 궁궐 별감들과 어울리라고 이야기하며 정보 수집에 애를 쓴다. 현빈 조씨가 사망하자 찾아온 영조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는다.[24]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된 후로 계속 영조의 총애를 입었고,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질한다. 바라던 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둘 낳자 외부에서 남의 사내 아기를 몰래 데려 오려고 한다. 결국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뒤주에 못이 많이 박혀 뽑느라 장례에 차질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자, "못 뽑는 수고는 왜 하누? 뒤주채 묻으라지."라는 희대의 명대사를 날린다.
파일:사도.숙의 문씨.jpg}}}||
궁녀 출신으로 한밤중에 영조의 세숫물을 갖다바칠 때 영조가 첫눈에 반하고, 그날 밤에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고 곧 회임을 하고 영조의 총애로 위세가 대단해진다. 중전 서씨환갑에 대해 영조가 별 말이 없자 영빈 이씨가 중전마마의 환갑 하례연을 열어드리자고 건의하자, 영조를 두둔하는 척 영빈을 나무라면서 세자의 생모이자 자신보다 품계도 높은 영빈과 직속 상관인 중전까지 모욕하는 멍청한 만행을 저지른다. 결국 이 만행을 전해듣고 분노한 대왕대비 김씨에게 만삭의 몸으로 회초리를 맞는 수모를 당한다. 여기서 드러난 문씨의 간악하고 오만방자한 행태에 다른 내명부의 상관들[25]도 어지간히 이를 갈았는지, 거동도 불편한 임산부인 문씨가 회초리를 맞으며 괴로워하는데도 말리긴 커녕 일말의 동정심 없이 노려보기만 한다. 그러나 종아리에 여러 개의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정도로 회초리를 맞는 와중에도 자신은 잘못한 게 전혀 없다는 듯 고개를 뻣뻣히 들고 울음을 참기만 한다. 사과 한 마디 없이 계속 버티자 이를 더욱 괘씸하게 여긴 대왕대비 김씨가 상궁 대신 직접 회초리를 치기에 이른다. 그 순간 열 받은 영조가 들이닥쳐서 대왕대비에게 후궁 하나 제 맘대로 못한다고 양위 선언을 해버리고, 그걸 또 대왕대비가 "윤허하오~"하고 쿨하게 받아들여서 한바탕 난리가 난다. 나중에 장녀 화령옹주를 출산하면서[26] 영조의 총애도 사라지고 기세등등하던 위세도 꺾이고 비중도 0으로 추락한다. 결말부에서는 등장이 없는데 원 역사대로 즉위한 정조에 의해 폐서인되어 '문녀'(文女)로 격하되고 사사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위세를 입었던 문씨의 오빠인 문성국 일가도 패가망신한 것으로 보인다.[27]#
  • 소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영조가 사망한 후 정조에 의해 폐출되며 궐 밖으로 쫒겨나갈 때 정순왕후와 자신의 태생적인 신분 차이에 대해 한탄하고 결국 사약을 받고 사망한다.


[1] 성씨 등은 밝혀진 바 없으나 문씨가 폐출되면서 그 어머니는 제주도관노비가 되었다.[2] 영조는 형수인 왕대비 선의왕후의 상중에도 영빈 이씨를 봉작한 전례가 있다. 다만 이건 선의왕후가 기록에도 남을 정도로 영조와의 관계가 험악했던 탓도 있을 듯.#[3] 영조실록 79권, 영조 29년 2월 8일 갑오 4번째기사.#[4] 영조는 손자인 정조가 친형인 의소세손의 상중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들 사도세자처럼 총애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작 정조는 영조에게 매우 예쁨 받았었고 정조의 탄생은 의소세손이 사망하고 6달 반 뒤의 일이었으므로,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합궁은 의소세손의 사망보다 3달도 더 전이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 상중에 며느리의 시녀와 관계를 맺은 것과, 첫째가 죽기 거의 3달 전에 부부가 관계를 맺은 것 중 뭐가 더 부적절한지는 뻔한 이야기다.[5] 정작 영조는 세자가 대비 인원왕후(영조의 계모, 사도세자의 할머니)의 나인 경빈 박씨를 후궁으로 들였을 때도 노발대발했는데 자기 기준으로만 자식들 차별, 편애가 심각했다.[6]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5월 13일 계미 2번째 기사.#[7] 내명부의 수장이자 중전인 정성왕후가 아닌 대왕대비 인원왕후가 나선 이유는 영조가 정성왕후를 긴 시간 동안 왕비 대우조차 안 할 정도로 홀대하던 게 크다. 그런 영조의 성격상 정성왕후가 나섰다간 되려 영조가 정성왕후의 권위도 짓밟으면서까지 문씨를 대놓고 감쌀게 뻔하고 이렇게되면 인원왕후가 중시하는 내명부 질서와 법도가 크게 무너지게 된다. 이런 일을 아예 방지하기 위해 인원왕후는 영조의 큰 지원자이자 대왕대비인 자신만큼은 영조가 어찌할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정성왕후 대신 나선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영조는 인원왕후조차 예상 못할 정도로 치졸해서 이것을 핑계삼아 사도세자의 석고대죄까지 유도하고, 결국 사도세자를 아끼던 인원왕후가 백기를 들고 만다.[8] 다만 인원왕후경종에 대해서는 왕실의 어른으로서가 아닌 영조를 돕기 위해 간접적으로 노론의 편을 들었다. 이는 경종이 자신이 아닌 선대 왕비인 인현왕후의 자녀로 입적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9] 영빈 이씨에게 대들어 회초리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대천록>에서 나온다.다만 <한중록>에서는 이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혜경궁은 세자의 석고대죄를 당파싸움이 원인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대천록>특성상 당시 그런 소문이 돌았을 뿐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10] 사도(영화)에서는 영조가 그 나이에 생떼를 부리다시피 양위하겠다고 하자 인원왕후가 "어이구 그래 어디 주상 맘대로 해보십쇼"하는 태도로 OK 한 것으로 나온다.[11] 실제로 영조는 당쟁이 터질 때마다 양위파동, 감선 등으로 신하들의 기를 꺾는 경우가 잦았다.[12] 이게 그냥 카더라가 아닌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할 때 정조가 쓴 묘지문에도 어느정도 언급되니 반쯤 공인이긴 한데 문제는 이 묘지문이 워낙 실제역사와 다른점이 많아서 신뢰성을 보장할 수 없다.[13] 모역, 반역 등의 중죄에 대해 죄인은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의 적에 올리고 재산은 몰수하는 처벌을 말한다.[14]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윤5월 25일 정묘 1번째기사. #[15]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 5월 14일 갑신 1번째기사. #[16] 정조실록 3권, 정조 1년 5월 21일 을유 1번째기사.#[17] 순조가 즉위한 1800년에 순조 본인은 단종과 비슷하게 어린 나이인 10살이지만 화령옹주는 무려 47살이나 되었다.[18] 국상에 사용할 관곽을 미리 마련하여 보관하는 관청.[19] 자기 할아버지의 죽음에 어느 정도 일조한 증조부의 후궁의 딸이자 평생 만날 일도 없고 본인에게 있어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역적의 딸에 불과한 배다른 고모할머니의 존재도 잊지 않은 것도 모자라 꽤나 예의 있고 후하게 정성과 신경을 써줘서 장례식도 치러준 셈이다. 순조의 입장에서는 임오화변의 비극과 친조부 사도세자와 증조부 영조의 갈등, 여기에 주제넘게 끼어들어 부자 간의 싸움에 불을 붙인 숙의 문씨와 문성국 남매의 패악질 같은 건 어차피 자기가 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는 수십년 전의 과거 일이고 문씨 일가도 이미 아버지에 의해 재기의 여지 없이 몰락하고 패가망신당한 지 오래였다. 사건의 심각성을 머리로 인지할 수만 있었고 감정적인 공감과 아픔이야 느끼는 건 당연하지만, 결국 경험자가 아닌 이상 그것을 맨눈으로 겪어본 아버지가 느낀 사무친 분노와 통한에 비할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화령옹주 본인도 다른 걸 떠나서 엄연히 어머니와 외삼촌의 죄에 의해 하마터면 목숨과 옹주의 직첩까지 빼앗길 뻔하고 궁궐 밖으로 쫓겨나 고아로 전락하여 눈칫밥을 먹어가며 죽은 듯한 삶을 도모해야 했던 불쌍한 희생양이었다. 본인 스스로도 남은 가족들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신중한 처신과 은둔으로 살아왔기에 화령옹주를 왕실 종친이자 조선의 옹주로 인정하는 의미로 예의 전통에 따라 국상을 치러준 것으로 보인다. 다르게 보면 사도세자와 숙의 문씨의 대에서 시작된 갈등과 원한의 불씨를 종식시키고 화령옹주 일가와 화해한다는 의미와 상징성도 내포되어 있었을 것이다.[20] 특히 숙의 문씨 때문에 남편이 잔혹하게 살해당하고 소중한 아들까지 잃을 뻔한 최대 피해자인 혜경궁 홍씨는 문씨와 그녀의 일가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기며 죽일 듯이 증오했다. 훗날 보위에 오른 정조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숙의 문씨를 사사했을 때 혜경궁 홍씨는 말할 필요도 없고 대왕대비이자 의붓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와 정비인 효의왕후는 물론 노론 인사들을 포함한 조정 대신들까지 그 누구도 말리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방관했다. 그만큼 조정 및 내명부에서 숙의 문씨의 인간성과 평판은 영조가 거느린 그 많은 후궁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었다는 방증.[21] 특히 내명부의 일원들 중 혜경궁 홍씨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편 사도세자의 후궁들인 경빈 박씨숙빈 임씨마저 질투하지 않았다. 남편과 시아버지 영조에게 온갖 부당한 박대와 푸대접을 당할 때 외려 두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고 보살필 정도로 투기가 없고 선량한 대인배의 인품과 성격으로 유명하다. 이런 혜경궁 홍씨마저 일말의 연민이나 동정 없이 죽도록 증오했을 정도면 숙의 문씨의 성격과 패악질이 얼마나 나빴는지 알 수 있다.[22] 실제 야사에 나오는 이야기로 드라마 최초 방영 전에 연재된 윤승운 화백의 맹꽁이 서당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23] 처치 곤란한 오라버니의 비단을 잘 처분해 주었다.[24] 이때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이야기를 적절히 이용한다. 빈소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갑자기 영조가 들이닥쳤고 바느길감을 감추면서 손도 감췄다. 영조가 뭘 감췄냐고 묻자 부끄러움을 숨겼다고 하니 영조가 무엇이 부끄럽냐고 물으니 "거친 손, 곱지 못한 손이 부끄러워 숨겼을 뿐"이라고 답한다. 드라마 상에서 숙빈 최씨가 어릴 적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 손이 못 생긴 걸로 나오고 영조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무척 큰데 이걸 이용한 것이다.[25] 중전 서씨, 영빈 이씨, 세자빈 홍씨, 화완옹주. 이미 상급자들의 어그로를 끌고 찍힌 시점부터 숙의 문씨는 아주 단단히 사망 플래그를 꽂았다고 볼 수 있다.[26] 영조가 사도세자를 나무랄 때 "아들이 하나만 더 있었더라면..."하는 장면이 있다. 문씨에게서 아들을 보았다면 세자 등극까지는 어렵겠지만 광해군영창대군의 관계처럼 최소한의 견제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미 영조에게 단단히 밉보여 정신적 학대를 받고 있던 사도세자 입장에서는 이복 동생에게 편애가 쏠려서 마음고생을 더 했으면 더 했지 별 도움은 안 됐을 가능성이 높다.[27] KBS 단막극 드라마 붉은 달에서는 화완옹주 역을 맡은 적이 있다. 영조 입장에서는 후궁에서 딸이 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