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1:58:31

고종(대한제국)/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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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독살설3. 평양 천도계획4. 지맥을 끊어서 일본을 풍수로 공격한다?5. 상하이 독일은행 예치금 52만 마르크6. 집옥재7. 고려왕조의 고종과의 비교8. 군밤 야사9. 기타 여담

1. 개요

고종의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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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양 천도계획

고종은 평양서경(西京)으로 삼아 한양에서 서경으로 천도하려는 구상이 있었던듯 보인다. 실제로 이를 위해 어진을 평양으로 옮기고 수도이전을 위한 자금을 위해 세액을 증대하며 평양에 어느정도 공사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평양천도는 고종의 미군 20만 원병과 중국대륙 정벌 계획을 밝힌 이하영의 말에서도 고종의 의도로 확인 되는바이다. 풍경궁이 이 계획의 흔적이다. 고려 왕조에 이은 제2의 서경 천도 운동이라 할 수있다. 고려 왕조의 서경천도 역시도 고구려를 계승하여 북벌을 이루려는것과 큰 연관이 있었다.
고종, 왜 평양을 새 수도로 정했을까? 뉴스파워
"고종, 평양 천도 고려했을 수도" 연합뉴스

4. 지맥을 끊어서 일본을 풍수로 공격한다?

조선 말기의 시인이며 관리였던 황현은 1901년의 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기록해 남기고 있다. "지리산이 사흘을 우는데 그 소리가 수백 리까지 들렸다. 그 당시 안영중이라는 사람이 운봉 경계에서 지리산 산맥을 끊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지리산 산맥은 바다를 건너 왜국을 만들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산맥을 끊어 눌러주면 일본은 자멸할 것이라는 것이다. 임금은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하며 그를 '양남도시찰'로 임명하여 그 공사를 맡겼다. 그 지역 관찰사가 이를 중단시켜달라고 정부에 청했으니 무시하고 공사를 강행했는데...
한국과학사상사 박성래 292p 中

야사황현매천야록[1]에 따르면 풍수가인 안영중이라는 사람을 시켜 지리산의 맥을 끊어 풍수로 일본을 공격하려한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공사 도중에 산이 울어서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산을 파다보니 산사태가 일어나 공사를 그만두게되어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토목기술로는 산맥을 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고종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광산개발 등의 공사를 하다가 지진이 난 것을 민간에서 각색해 황현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천야록은 아무래도 야사집인 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많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냥 '당시 사람들 사이에는 이런 소문도 있었다'는 사회상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5. 상하이 독일은행 예치금 52만 마르크

조선시대에 국고금과 별개로 운용되어 국가의 회계에도 잡히지 않아서 그 누구도 간섭 할 수 없고 그 누구도 규모를 알 수 없었던 완전한 임금의 사유 재산인 내탕금은 고종의 시기에 내수사[2]가 내장원으로 승격되면서 급격히 증가하여 탁지부에서 관리하는 국고금에 비견될 정도로 어마어마 해졌다. 이렇게 된데는 명성황후와 민씨 척족도 한 몫 했다. 매관매직까지 하면서 긁어 모았다.[3]

이와 관련하여 유명한 사건이 상하이 독일 은행의 예치금 52만 마르크[4] 인데 당시 연금상태였던 고종이 헤이그 특사를 통하여 활동자금으로 사용하려 한 돈이었고 친한파였던 호머 헐버트를 통해 예치금을 찾으려 했으나 일본이 가짜 증서로 털어가 버렸다.

6. 집옥재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있었던 고종의 서재인 집옥재가 2016년 민간에게 개방되었는데 도서관과 찻집 형태로 개조되어 변했다. 보유 서적은 4만권.

7. 고려왕조의 고종과의 비교

고종황제와 고려 고종 두 군주는 묘호고종(高宗)으로 같은데 우연의 일치로 능호까지 홍릉(洪陵)으로 서로 똑같다.

이외에도 암군이였다면 암군이였지, 둘다 명군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험난한 생을 살다 갔으며, 실권을 갖지 못한 바지사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서로 비슷하다. 그나마 대한제국의 고종은 성인이 된 후 친정을 할 수 있었지만, 고려 쪽의 고종은 집권기 내내 무신정권의 꼭두각시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른 것도 똑같은데, 고려 고종은 자신이 유년기이던 시절에 태자이던 아버지 강종이 최충헌에 의해 할아버지 명종이 폐위되었을때 최충헌에 의해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5촌 당숙인 희종이 최충헌에 저항하다 폐위당하는 바람에 다시 왕으로 옹립되면서 이미 늙고 병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했고, 대한제국의 고종 역시 헌종 이후 방계 왕족에서 왕위를 찾을 수밖에 엇던 조선의 현실 때문에 그에게 차례가 와서 왕위를 이어받은 것이 비슷하다.

그리고 재위 기간 동안 외세에 시달린 것은 비슷하나 고려 고종의 경우는 아예 몽골의 침공으로 나라와 국토가 수십년 동안 전부 초토화되고 다음 대에 원나라의 속령으로 전락하여[5] 약 100년 동안 원의 속령으로서 원나라의 온갖 수탈과 지배를 받게되었는데 고종 황제는 그나마 전쟁으로 온 국토가 수십년 간 초토화되지는 않았지만 똑같이 다음 대에 나라가 외세에 의해서 망하고야 말았다.

심지어 재위기간도 양측이 비슷하다. 조선의 고종은 대한제국까지 합쳐서 44년이고[6] 고려의 고종은 46년이다. 엄밀히는 고려의 고종이 재위기간이 2년 더 길다. 붕어 당시 나이도 세는 나이로는 둘 다 68세이기도 하다.

8. 군밤 야사

어디까지나 야사이다 보니 군밤이 호떡으로 바뀐 경우도 있다.
  • 고종은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는데 즉위하자마자 뜬금없이 군밤 장수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죄목은 자기한테 공짜로 군밤을 주지 않아서였는데 물론 군밤 장수는 신하들이 크게 반대해서 사형은 면했다.[7] 매천야록에 실린 야담이므로 승정원일기 기록과는 많이 다르다.[8] 이 일화가 유명한 편이라 고종 하면 군밤이 자주 언급된다.
  • 고종과 군밤 이야기는 1900년 즈음에 궁에 출입하던 역술가인 정환덕이라는 사람이 쓴 남가몽에서 수록되어 있다. 궁에 직접 출입하던 사람이 남긴 이야기고 다른 곳에서 찾기 어려운 내용이기에 궁에서 떠돌던 소문을 기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다른 때보다 유독 고종 재위 당시 밤[9] 진상 기록이 많았다. 그래서 고종이 실제로 을 좋아하긴 한 것으로 여겨진다. 진상 기록에서 밤의 진상이 늦는 경우 유독 관찰사(대부분 경상도 관찰사)들이 대죄를 자주 청했는데 매번 봐줬다고 한다.
  • 경술국치 이후 순종창덕궁 후원에서 주운 밤[10]을 손수 구워다가 덕수궁에 기거하던 고종에게 자주 바쳤으며 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온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
  • 고종의 첫 아들이었던 완친왕이 죽자 조대비가 군밤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쩌면 아들인 완친왕도 아버지의 식성을 닮아 군밤을 좋아했던 듯 하다.

9. 기타 여담

  • 어린 시절부터 글씨나 문장에도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14세 때 의정부 청사가 중건되면 편액을 자신이 직접 쓰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고 오례편고가 완성되자 자신이 직접 서문을 쓰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고종의 어필은 많이 남아 있다.
    언문 글씨체는 잘 남아 있지 않으나, 고종의 주치의 올리버 에이비슨(Oliver R. Avison)에게 손수 써 준 족자에서 대강 확인할 수 있다. # 족자 본문의 내용은 "投良濟堯帝時巫咸(투양제요제시무함)"인데, 한문과 동아시아 역사에 익숙지 않고 한국어만 어느 정도 아는 서양 선교사를 위해 친절하게도 언문 풀이를 달아 둔 듯하다.[11]
    됴흔 약을 가지고 잘 쓰ᄂᆞᆫ 법은 팔쳔삼ᄇᆡᆨ팔십여 년 젼에 라는 황뎨 ᄯᅢ에 텬하에 뎨일되는 무함이라ᄂᆞᆫ 의원과 ᄀᆞᆺ도다[12]

    (좋은 약을 가지고 잘 쓰는 법은 8380여 년 전의 '요(堯)'라는 황제 때에 천하에 제일가는 '무함(巫咸)'이라는 의원과 같도다.)

    글에서 언급된 무함은 요 임금의 의원이었는데 사람의 생사와 존망까지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
  • 당시 선교사나 외교 사절들은 그의 교양이나 지식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키는 작지만 너그러운 얼굴에 상냥하고 이야기가 잘 통했다 한다. 또 암살의 위협으로 안색이 어둡고 두려워하는 인상이었다고 한다.[13] 사진 찍기를 좋아하고 외국 문물과 세계 정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 직접 상대국인 일본의 평에서는 '면전에서는 유약한 것처럼 보이지만 뒤로는 반항을 계속한 인물'이라는 식의 이야기가 많다. 고종이 벌인 헤이그 특사 사건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고종을 찾아가 "한 건 하셨더군요, 폐하. 그런데 앞으로 대일본 제국에게 맞서려면 좀 더 공공연하게 하시는 게 어떨까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후 한국 병합의 걸림돌로 판단한 고종을 폐위시켰다. 실제로 일본의 침략을 국제사회에 공표하는 게 고종의 대일본 전략이기도 했다.
  • 낮에는 일을 하지 않고 저녁 때부터 일을 해서 밤을 새었으며 아침이 돼서야 잠이 드는 올빼미족이었다고 한다. 부인인 명성황후도 밤을 샌후 새벽 5시쯤 잠들었다고 한다. 자연히 야식도 즐기게 되었다.
  • 양모인 신정왕후 조씨의 삼년상을 치를 때, 동구릉과 왕실 사이에 전신선을 놓고 3년간 전화로 곡을 했다. 아들도 일제의 감시 때문에 고종 자신과 아내의 삼년상을 치를 때 전화로 해야 했다.
  • 구한말 상궁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종은 매운 음식과 짠 음식을 잘 못 먹어서 와플, 카스텔라 등 달고 담백하며 깔끔한 음식을 선호했다고 한다. 음료로는 식혜, 사이다, 커피[14]를 주로 즐겼으며 술은 전혀 못 했다고 한다. 또 수라상에는 백반(白飯)과 홍반(紅飯, 팥물밥)이 함께 오르는데, 고종은 늘 백반만 먹었고 홍반은 밥 공기 뚜껑조차 안 열었다고. 여름에는 주로 칼국수, 잔치국수, 삼계탕, 추어탕 등이 올랐고 겨울에는 냉면, 아이스크림 등이 주로 수라상에 올랐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아 여름엔 따뜻한 것을 즐기고 겨울엔 차가운 것을 즐긴 듯하다. 유독 냉면을 먹을 때는 면치기를 했다는데, 원래 전통 예법상 음식을 먹을 때는 소리를 내지 않는 게 옳으나, 냉면만큼은 예외로 후루룩 소리를 내며 먹어야 더 맛있다고 상궁들에게 이야기했다 한다. # 이런 걸 보면 식사 시간에 그렇게 엄격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식사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고 상궁들을 불러 칭찬도 했다 한다. 반대로 순종은 식사 중에 전혀 말이 없었다고. #
  • 시대가 제국주의 시대였고 전통적인 반청 감정도 있었던 만큼, 청에 파병을 시도했다고 전한다. 8개국 연합군이 청나라 의화단 운동 진압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고종에게 파병을 제안하였고, 고종 역시 적극 검토했던 것. 이어 고종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를 통해 청으로의 파병 의사를 피력하였으나, 일본 공사는 대한제국군의 전력 부족을 이유로 만류한 후, 본국에는 사뭇 조롱하는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만약 파병이 성사되었다면 대한제국이라는 닉값(?)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 이 일화는 고종 역시 제국주의 시대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숟가락이나마 얹어 보려 시도했음을 의미한다. #


[1] 광무 5년 신축(1901) '33. 안영중의 방술' 편에 수록[2] 내시들이 관리한다.[3] 참고로 명나라의 말제였던 숭정제내탕금을 지나치게 모아서 비판 받기도 한다. 하지만 숭정제는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할 때쯤엔 돈이 안 나와서 약탈을 했다고 하는 만큼 내탕금은 국가를 위해 쓰였다고 보는 시각도 많은 반면 고종의 내탕금은 적재적소에 쓰일 새도 없이 나라가 망해버렸다.[4] 한화 3억 5천만원인데, 현재 가치는 더욱 높을것이다.[5] David O. Morgan(2007), 《The Mongols》; 김호동(2007), 《몽골제국과 고려》; (2016),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 p. 154~155; 森平雅彦(2008), "事元期高麗における在來王朝體制の保全問題", 《東北アジア硏究》 1;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4.[6] 사실 이것도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해서 44년이지 사망년도인 1919년까지 자리에 있었다면 56년에 달하는 재위기간을 기록하게 되어 52년을 재위했던 영조의 기록을 넘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만약 일제의 고종 독살설이 사실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재위 60년을 넘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7] 그런데 당시 인심이 박한 것은 사형까지는 아닐지라도 죄로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수원 지역에서는 인심이 각박한 자들을 잡아들여 매로 다스렸다는 기록도 있고 농부들끼리 돈이나 쌀을 빌려줄 때 이자를 지나치게 높게 잡으면 관에서 나서서 반강제로 깎는 경우도 있었다.[8] 맹꽁이 서당에서 나온 고종과 군밤 장수 이야기의 출처가 여기다. 그러나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는데 세도정치기를 지나면서 기록 왜곡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기였다. 게다가 애시당초 승정원일기는 시행된 왕명을 기록한 사료이기 때문에 시행도 되지 않은 왕명인 군밤 장수 어명 기록이 당연히 승정원일기에 기록될 리가 없다. 고종실록은 고종이 죽고 난 다음에 조선총독부가 실질적으로 작성했다.[9] 정확히는 황율(黃栗).[10] 창덕궁 후원의 언덕을 동산(東山)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밤나무가 많아서 가을에는 산책 중에 길에 떨어진 밤을 주울 수 있다고 한다.[11] 본문의 한문에도 "투량뎨요뎨시무함"이라고 각 한자마다 당대 기준 한자음 표기를 한글로 써 두었다.[12] 족자를 자세히 보면 '요', '무함' 등의 고유 명사에는 줄이 그여 있다. 원문이 우종서(오른쪽부터의 세로쓰기)라 글자 오른쪽에 그여 있다.[13] 반면에 뒤에 자주 서 있던 순종은 키는 크지만 어리어리하게 생겼다고 좀 디스하고 있다.[14] 고종은 커피를 좋아해서 매일 마셨다. 이를 안 김홍륙이 고종이 마실 커피에 아편을 집어넣어 독살을 시도했으나 고종은 하도 커피를 많이 마셨기 때문에 커피에 익숙해서 맛이 이상한 것을 간파하고 바로 뱉어버렸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던 황태자 시절의 순종은 이 커피를 마시고 피가 섞인 설사를 하는 등 고생했다. 이후 고종은 김홍륙을 교수형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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