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19:50:41

태조(조선)/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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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성계의 가문
1.1. 가계1.2. 이안사의 동북면 이주1.3. 몽골 제국에 투항하다1.4. 천호장(千戶長: 밍간)과 다루가치가 되다1.5. 나얀의 반란1.6. 이행리충렬왕 알현1.7. 이춘의 이주1.8. 이자춘의 계승1.9. 원나라의 쇠퇴와 환조 이자춘의 고려 귀향
2. 무장 시절
2.1. 왕이 될 꿈2.2. 전투 목록2.3. 홍건적과의 전투2.4. 원나라 군벌 나하추 격파2.5. 원나라 군대 격파2.6. 제1차 요동정벌2.7. 황산대첩2.8. 여진족 장수 호발도(호바투: 胡拔都) 격파2.9.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2.10. 불세출의 신궁2.11. 무장 이성계의 세력
3. 군주 시절
3.1. 새 왕조의 창건자가 되다3.2. 2번의 참극과 쓸쓸한 말년
3.2.1. 성급한 후계 결정3.2.2. 책봉의 본질3.2.3. 기타 가설과 신덕왕후의 사망3.2.4. 분봉 조치와 반발3.2.5. 태조의 건강 상태
3.3. 최후와 건원릉

[clearfix]

1. 이성계의 가문

1.1. 가계

본관은 전주였다. 때문에 이성계 본인은 전주부에 연고가 사실상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실록을 보면 이성계를, 또한 본인이 고려인이자 '전주 사람'으로 칭하는 부분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태조실록》 1권 <총서> 첫 번째 기사에는 계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일단 실존이 확인되는 인물은 고려 중기 무신정권의 초대 집권자로 유명한 이의방의 동생 이린이다.# 이성계의 실제 출생지는 함경도 영흥이었지만, 조선은 왕조의 발상지를 전라도 전주(全州)로 하고, 그 곳을 풍패지향(豊沛之鄕)[1]으로 정했다.[2] 전한 태조 고황제 유방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패군(沛郡)의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면서 고향 사람들을 모아놓고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는데, 이성계 역시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전주(全州)에 들러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은 걸 보면 이성계 자신도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이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읊은 곳이 이안사(목조)가 태어난 곳의 지척이었으니, 그로서는 실로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이안사의 조부인 이린은 자신의 형이자 무인 집권자였던 이의방이 암살되었을 때(갑오정변) 죽지 않고 고향인 전주로 돌아갔다.[3] 이때 이린은 시중(侍中)이자 당대 조정의 최고 영수들 중 한 명이었던 남평 문씨 출신의 문벌귀족이었던 문극겸사위였는데, 장인어른의 도움을 받은 걸로 추측된다. 만약 이러한 문극겸의 막강한 영향력이 아니었다면[4], 이의방의 혈족이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문극겸은 이의방이 죽은 후에도 꾸준하게 활약했다.

이린이 문극겸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이양무(李陽茂)였다. 이양무의 아들이 이안사였고, 나중에 목조(穆祖)로 추존된 인물로서, 이때부터 다시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1.2. 이안사의 동북면 이주

조선 왕조가 전주 이씨였던 만큼, 당연히 이 가문도 본래 전라도 전주에 있었다. 그런데 이 곳과는 전혀 다른 북방의 함경도가 이성계의 근거지가 된 것에는 조금의 곡절이 있었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보면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산성별감과 관청에 딸린 기생의 문제로 트러블이 생겼다고 한다. 이는 관기(官妓)를 건드릴 수 있었을 만큼 이안사의 가문이 만만찮은 전주의 토호였다는 뜻도 된다. 당시는 몽골 제국과의 전쟁 중으로 물자 조달 등을 위해 중앙에서 각 지역에 관리를 파견했는데 전쟁이 길어지고 군사적인 열세가 현저해지면서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사적으로 수탈하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아 지역 토호들과 충돌이 잦았다.[5] 여자 문제 가지고 트러블이 생겼는지 그 내막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문제가 생긴 별감이 윗선에 연락했고 심지어 중앙에서 군사까지 동원해 이안사를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안사는 그 소식을 듣고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이주했다. 이때,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170여 가(家)나 되었다고 하는데, 이를 볼 때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전주에서 대대로 꽤 끗발을 날리던 호족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척으로 옮겨간 이안사 휘하의 전주 집단은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농사도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그들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안사 집단은 이때도 왜구에 대비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 정도로 경제적인 기반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이형우)

1.3. 몽골 제국에 투항하다

그렇게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었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원나라의 야고(也古)라는 인물이 쳐들어올 때는 몸을 피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대략 그 무렵에 새로운 지방관이 이 지역으로 오게 되었는데, 하필 전에 다툼이 생겼던 그 산성별감이었다.

얼른 자리를 털고 뜨는 게 나을 것으로 보였던 이안사는 동북면의 의주(宜州; 원산)로 이동했다. 이때도 170여 가가 따라 나섰다고 한다. 과장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안사가 상당한 수의 유이민 집단을 통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어느 정도의 자체적인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이안사는 의주에서도 곧 세력가가 되었다. 고려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한 상태에서 국경까지 방어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지역의 유력 호족들에게 국경의 방어를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런 이안사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해, 몽골의 군사를 막으라고 시켰다. 군권(軍權)을 맡은 자리에 임명한 걸 보면 이안사가 거느린 집단이 상당한 무력도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산길 대왕(散吉大王)이라는 원나라 장수가 두 차례나 항복을 권유하자, 싸워 봐야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몽골에 항복했다. 몇년 후 고려도 태자[6]가 몽골에 입조하여 강화를 맺으면서 사실상 항복했다.

산길 대왕으로부터 고려의 호족이자 의주병마사였던 이안사의 항복 소식을 보고받은 몽골의 대칸은 기뻐하면서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를 세우고, 이안사를 남경(南京) 지역을 망라한 알동천호의 수천호(首千戶) 즉, 천호장(千戶長: 밍간) 겸 다루가치(達魯花赤)로 임명했다.

1.4. 천호장(千戶長: 밍간)과 다루가치가 되다

어쨌든 이렇게 귀순한 이안사는 두만강변의 개원로 남경 오동[7]으로 이주했고 그렇게 오동(斡東) 지역에 자리잡은 뒤인 1255년 5,000호 천호장[8]다루가치[9]의 지위를 헌종 몽케 칸으로부터 하사받았는데 당시 천호장은 몽골족이 아닌 사람이 임명되는 일이 드문 고위 관리직으로, 이는 사실상 옷치긴 울루스로부터 승인을 받은 군벌 세력이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10]

윤은숙 강원대 교수에 따르면 이성계 가문이 몽골 제국 역사상 드문 고려인 출신의 천호장(千戶長: 밍간) 겸 다루가치 세습 가문이 된 데는 꽤나 복잡한 당대 사정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윤은숙 교수는 다루가치 직위를 상당히 높게 평가한데 비하여 청나라의 학자였던 조익(趙翼)이 저술한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11]에 따르면 다루가치는 사무를 처리하는 관청의 장을 총칭하는 자리로 문관과 무관을 가리지 않고, 관직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자리는 아니었으며, 지방의 행정을 보는 관청에는 모든 행정 단위에 다루가치 관직이 있었다고 한다. 《원사》(元史) <백관지>에 따르면 고급 관청에는 다루가치를 두지 않고, 예하 관청에 다루가치를 두었다고 하며, 지방 관청에서는 작은 행정 단위인 현까지도 다루가치를 두었다고 한다. 다루가치가 특정한 지위가 아닌 사무를 관리하는 장의 총칭으로, 갈수록 그 직명도 세분화되었으며, 다루가치가 총독이나 지사의 의미로도 널리 쓰였기 때문에 쌍성총관도 번역하면 다루가치로 볼 수 있다. 천호장(千戶長: 밍간)은 이안사가 유일한 고려인은 아니었고, 함경도 정주(定州) 출신이었던 탁청도 천호장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윤은숙 강원대 교수가 몽골로 유학을 가 몽골 역사연구소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몽골인 학자와 함께 논문을 쓰는 등 몽골 역사학계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몽골 입장에서는 조선을 세운 국조가 자신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윤은숙 강원대 교수에 따르면 13∼14세기 동북 만주지역을 장악했던 옷치긴 왕가는 이 방대한 경제 인프라를 기반으로 제왕들 중 최고의 경제력 및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대도의 대칸들은 고려의 개경과 만주의 심양에 각각 개성 왕씨 출신의 부마왕들을 분봉왕으로 세워 옷치긴 왕가의 과도한 비대화를 견제했는데, 이 옷치긴 왕가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면, 옷치긴(Otchigin) 즉 테무게 옷치긴(1168∼1246)은 칭기즈 칸의 막내 동생으로, 매우 용맹스러웠던 사람이었다. 그는 칭기즈 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현재의 아무르 강 일대에서 한반도 북부까지 다스린 제왕이었다. 칭기즈 칸은 자신의 막대 동생인 옷치긴에 대한 신뢰가 매우 커서 자신이 서방 원정(1219∼1225)을 떠날 때 국정의 운영을 맡길 정도로 신임했으며, 그 덕분에 옷치긴 왕가는 13세기에서 14세기까지 유목과 농경을 모두 할 수 있는 땅을 받음으로써 제왕들 가운데 가장 큰 경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옷치긴 사후 제2대 왕은 타가차르(塔察兒)였다. 타가차르는 쿠빌라이 칸의 최대 정적이었던 아리크부카를 격파하여 쿠빌라이가 대칸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쿠빌라이 칸의 명령에 따라 항상 원정에 나서는 등 원나라 조정내에서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타가차르는 쿠빌라이 칸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항상 쿠릴타이에 참석하여 중대한 국사(國事)를 논의했고, 매우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타가차르는 독자적으로 원나라 조정의 법도를 어겨가면서, 자신의 관할권이 있는 지역에 사신을 파견하고, 민호를 소집하기도 하는 등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점에서 옷치긴 울루스는 쿠빌라이 칸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우방인 동시에 가장 두려운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윤은숙 교수는 심양왕 제도도 옷치긴 제국의 남하(南下)를 방지하기 위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옷치긴 왕가가 원나라와 고려 사이에 위치하면서 고려까지 지배하려 했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에서 차단하기 위해 심양왕을 두어 서로 충돌시키면서 옷치긴 제국의 영향력을 통제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충선왕은 고려의 왕으로 재위한 기간보다 원나라의 심양에서 심양왕으로 재위한 기간이 더 길었다.

결국 쿠빌라이 칸이 우려했던 일이 터지는데 1287년 옷치긴 왕가의 제4대 제왕이었던 나얀(乃顔 : 타가차르의 손자)이 원세조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대항하여 동방의 다른 제왕들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쿠빌라이 칸은 고령(73세)에도 불구하고, 직접 정벌에 나서 1287년에 나얀을 처형했다.

1.5. 나얀의 반란

나얀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려의 충렬왕은 장인인 쿠빌라이 칸에게 즉시 지원군을 파견하여 동북 지역의 안전을 일부 담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얀의 잔당들이 상대적으로 허약한 고려로 몰려오면서 사태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카다안의 침입) 충렬왕은 다시 원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1291년에야 반란을 진압했고, 고려는 안정을 되찾았다.

이렇게 당시 북방의 상황은 혼란스러웠는데,[12] 카다안의 침입으로부터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종 45년(1258년) 동북면병마사 신집평(愼執平)은 몽골 군대가 대거 침략하자 15개 주의 백성들을 조그마한 섬에 몰아넣었다. 이로 인해 반발이 일어났고, 그 틈을 타서 조휘탁청이 반란을 일으켜 신집평을 살해하고 몽골에 투항했다. 이에 몽골에서는 화주 이북 15주를 관할하는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쌍성총관, 탁청을 천호장으로 임명했다. 쌍성총관부는 몽골의 개원로(開元路)에 속하게 되었고, 이곳은 산길 대왕(散吉大王)이라는 몽골 장수의 영역이 되었다.

이렇게 두만강변 오동(알동) 일대를 다스리는 관직인 오동천호 겸 다루가치에 임명된 이안사는 같은 전주 이씨 집안 사람을 옷치긴 울루스 휘하의 산길 대왕과 혼인시켜 서로 연줄을 만들어 놓고, 의주(원산)에서 더 북진하여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정착했다.[13] 이때 이안사의 집은 알동에 있었지만 거처가 일정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안사는 이렇게 알동의 천호장(千戶長: 밍간)이자 다루가치로서 20여 년간 이 일대의 고려인 및 여진인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 동북면에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 22년 동안 그 지위를 누리다가 원종 15년인 1274년에 죽었다.

1.6. 이행리충렬왕 알현

전라도 전주에서 두만강변의 오동까지 이주하여 개척했던 이안사가 사망한 뒤, 아들인 이행리(추존 익조)가 그 기반을 이어받았다. 1281년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대일본 원정을 위한 여원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된 이행리(李行里)는 수도인 개경을 방문하여 충렬왕을 알현하고, 원나라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충렬왕은 이행리의 품행을 보고,
"경은 원래 사족(士族) 가문의 출신이니 근본을 잊을리가 있겠느냐"
라며 칭찬하고,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14] 이때 충렬왕은 이행리를 눈여겨 보았고, 이 만남이 인연이 되어 훗날 손자인 이자춘은 공민왕의 쌍성총관부 공격에 내응하게 되었다. 1355년 이자춘이 입조하여 공민왕을 알현하자 왕이
"그대의 조부(이행리)와 부친(이춘)은 몸이 비록 원나라에 있었으나, 그 본심은 고려에 있었다는 것을 내 조부(충선왕)와 부친(충숙왕)도 알고 계셨으니 총애하고 칭찬하셨다."
라고 한 배경에는 이렇듯 이행리와 충렬왕의 만남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행리의 세력이 확대되고 위상도 제법 커지자, 근처에 있었던 여진족 천호(千戶)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
“이행리(李行里)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태조실록》 1권 <총서> 9번째 기사

이행리가 우연히 그 과정을 알게 되어 급히 가족들을 이끌며 달아났는데, 뒤를 보니 여진족이 무려 300여 명이나 되어 추격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건너는 곳의 강물이 열려 신속하게 돌파하고, 건넌 뒤에 다시 강물이 막혀 여진족은 추격해올 수 없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에는 과장이 있겠지만, 여하간에 도망친 이행리는 여러 섬에서 조금 지내다가, 아버지 이안사가 터를 일구었던 의주(宜州,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시)로 남하하여 다시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1300년, 쌍성 근처의 고려인들을 관리하는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

1.7. 이춘의 이주

그 후 이행리가 죽고, 아들인 이춘[15]이 이를 이어받았다. 이춘(李椿)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함주(咸州, 현 함경남도 함흥시)로 옮겼는데, 소나 말을 기르는데 편리해서 그랬다고 한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알동(오동)에서 전주 이씨 집안을 따라 이곳까지 이주한 사람들을 본래 자리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춘은 직접 원 조정에 글까지 올려 사정을 설명하고 이를 막아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이춘에게 있어서 그 주민들은 경제적 기반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지며, 동시에 원 조정에서도 알동 주민들을 동북면의 타 여진족들과 구분되는 집단으로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즉 지금의 함경남도 영흥군 일대에서 세력가로 자리잡은 이춘은 한양 조씨 출신의 쌍성총관(雙城摠管)이었던 조양기의 딸과 혼인했는데, 이로 볼 때 해당 지역에서도 인정을 받은 걸로 보인다. 이춘은 조양기의 딸 조씨로부터 2남 3녀를 얻었다. 고려 초기에 벼슬을 했던 한양 조씨 조지수의 아들 조휘는 몽골에 항복하여 쌍성총관부의 총관이 된 인물로 조휘의 아들이 조양기였다. 또한 조씨 휘하에는 탁씨가 있었다. 이춘은 처음에 오동 백호(百戶) 박광(朴光)의 딸 박씨와 혼인했는데, 사별하고 재혼한 인물이 조씨였다. 이춘이 박광의 딸과 혼인하여 낳은 아들들은 이자흥(李子興)과 이자춘(李子春)이었다. 쌍성총관부는 한양 조씨와 전주 이씨가 직위를 세습하면서 관하의 민호(民戶)를 지배했는데, 한양 조씨는 조휘, 조양기, 조림, 조소생 계보로 세습되었고, 전주 이씨는 이안사, 이행리, 이춘, 이자춘 계보로 세습되었다. 직위를 세습했기 때문에 이춘의 사후, 박씨 부인의 아들들과 조씨 부인의 아들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다.

1.8. 이자춘의 계승

이춘이 사망하고 난 뒤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내홍이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이춘의 큰아들인 이자흥(李子興) 즉 타스부카(塔思不花, 몽골식 이름)가 후계자가 되었으나 곧 죽고 말았다. 이자흥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한양 조씨 슬하의 아들들이 개입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자흥의 아들이었던 이천계 즉 교주(咬住, 몽골식 이름)는 나이가 너무 어렸고, 이때문에 이자흥의 동생이었던 이자춘이 직위를 세습했는데 이에 대해 둘째 부인이었던 한양 조씨의 아들들이었던 완자부카(完者不花)와 나하이(那海)가 반기를 들면서 다툼이 벌어졌다. 조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기 위해 친정인 조씨 가문을 끌어들이면서 이때부터 조씨와 이씨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초대 쌍성총관 조휘의 손자이자 제3대 쌍성총관 조림의 동생이었던 조돈과 그의 아들들인 조인벽 및 조인옥처럼 한양 조씨 가문에서 전주 이씨 가문에 귀부한 인물들도 있었는데, 장남이었던 조인벽은 이자춘의 사위가 되었다. 또한 동생인 조인옥은 조선 개국의 1등 공신이 되었으며, 조인벽은 홍건적과 왜구 격퇴에서 여러 군공(軍功)을 세워 4도 도지휘사(四道都指揮史)를 지냈고, 위화도 회군에도 가담했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 즉 '두 임금을 섬길 수는 없다'며 조선 왕조에서는 출사하지 않고 낙향하여 여생을 마쳤다. 조인벽의 아들 조온은 조선 개국 2등 공신이었으며, 제2대 정종이 격구를 즐겼을 때 정종의 격구 상대이기도 했다. 반면에 훗날 이성계의 군대와 일전을 벌인 나하추의 군대에 참전한 인물들 중에 제4대 쌍성총관이자 마지막 쌍성총관이었던 조소생이 있었는데, 조소생은 초대 총관 조휘의 증손자였다. 나하추가 이성계에게 참패하자 조소생은 도망갔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자춘은 직접 개원로(開元路)[16]에 가서 사정을 설명했다. 이에 개원로에서 원나라 조정에 보고하니 원나라에서는 첫번째 부인이었던 박씨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따라 이자춘이 어린 조카인 이천규 즉 교주가 장성할 때까지 임시로 직위를 세습하게 되었고, 차인사라는 절에 숨어있었던 조씨 소생의 나하이(那海)는 잡혀서 처형당했다. 이후 이천규 즉 교주의 나이가 차자, 그의 숙부였던 이자춘이 자리를 다시 넘겨주려고 했는데, 교주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지...

1.9. 원나라의 쇠퇴와 환조 이자춘의 고려 귀향

꽤 기민한 편이었던 이자춘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바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원나라의 국력이 쇠락해지고 있는 현실을 알아차리고, 고려의 공민왕이 반원자주정책을 시도하려 하는 것을 파악했다. 원나라에서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 즉 중서성, 요양성, 정동행중서성 3성의 원주민이주민을 각각 구분하는 호적을 작성해 원주민을 우대하는 폐쇄적인 정책을 실시하려 했던 것도 이주민 집단이었던 이자춘 일가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는 사안이었다.

1355년 12월 이자춘이 공민왕을 알현했을 때, 당연히 도움이 절실했던 공민왕은 이자춘을 크게 환영하고, 일단 기다리라는 교지를 내렸다. 1356년 이자춘은 공민왕의 밀지를 받고 쌍성총관부 공격에 동참했으며, 고려는 수십년만에 쌍성총관부 지역을 되찾았다. 이로 인해 이자춘은 당당하게 고려의 공신이 되어 '대중대부'의 품계와 '사복경'이라는 고위 관직을 하사받고, 고려의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개경에 저택까지 하사받게 되었다. 개경에 잠시 머물던 이자춘이 동북면으로 돌아가려 했을 때, 사실상 봉건 영주처럼 동북면 일대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자춘을 그냥 보내는 건 불안하고, 동북면도 안정시킬 겸 관직을 줘서 보내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는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의 지위에 임명했는데, 동북면(東北面)은 바로 구(舊) 쌍성총관부로 원래부터 이자춘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곳이었다. 동북면은 세금과 공납도 내지 않고, 자체적으로 전용하는 자치권이 있었는데 이에 더하여 군사력과 행정 권한까지 집중된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의 지위는 이자춘의 동북면 일대 통치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어사대에서 들고 일어났다. 그렇지만 결국 이자춘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 즉 '동북면 상만호(東北面 上萬戶)'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대신 고려에는 '기인(其人) 제도'라는 지방으로 파견된 관리의 아들을 수도 개경에 인질처럼 붙잡아 두는 제도가 있었는데, 동북면 상만호 이자춘의 아들 이성계가 여기에 적용되어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개경에서의 인질 생활은 이성계의 견문을 넓히고 특히 공민왕과의 친분을 쌓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356년 공민왕이 참관한 격구 대회에서 22세의 젊은 이성계는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발군의 격구 실력을 뽐내면서, 공민왕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훗날 이자춘이 병사하자 후임 동북면 상만호(東北面 上萬戶)로 이자춘의 아들들 중에서 누구를 임명하느냐는 결정을 해야 했을 때, 관례대로 하면 이자춘의 장남이었던 이원계가 되어야 했으나, 공민왕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이원계가 아닌 이성계를 임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후로도 이자춘은 왜구 격퇴에서 연달아 공을 세워 '통의대부'와 '정순대부'라는 품계를 하사받았고, 천우위 상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승진을 거듭하여 영록대부 장작감 판사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1361년 4월 이자춘이 병사하자, 그의 아들 이성계가 '통의대부' 품계, '금오위 상장군'의 중앙 무관직, 그리고 '동북면 상만호'의 지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이렇게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 공격에 참전했던 아들 이성계는 훗날 한반도와 한민족의 역사를 바꾸는 주역이 되었다.

2. 무장 시절

동문선》 제44권 / <표전>(表箋)

집현전 진 팔준도 전(集賢殿進八駿圖箋) / 성삼문(成三問)

하늘이 도와 임금을 내시니 성인은 1,000년의 운수를 맞추셨고, 땅에서 쓰이는 것은 말[馬] 같은 것이 없으며, 신물(神物)은 한 시대의 재능을 바쳤기로, 감히 새 그림을 만들어서 예감(睿鑑)에 올리옵니다.

그윽이 생각하오면, 왕자의 작흥(作興)에 있어어도 역시 축산(蓄産)에 힘입어 성공하였습니다. 촉한(蜀漢)의 왕[17]적로(的盧)를 타고서 능히 단계(檀溪)의 액을 면하였고, 금(金)나라 태조는 자백(赭白)을 타고서 곧장 흑수(黑水)의 깊은 물을 건너갔으니, 진실로 큰 업이란 돌아갈 데가 정해져 있사오매, 미물(微物)도 또한 그 힘을 분발하는 것이옵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옵서 용맹은 하늘에서 타고나시고 덕은 오직 날로 새로우시매, 고려의 운수가 끝날 무렵에 외부의 적이 자주 틈을 노리니 나라를 위하여 적개심을 품고 백성 보살피기를 상처입은 것을 대하듯 안쓰러워하셨습니다. 의기(義旗)를 한번 돌이키자 백성은 화난을 면하게 되었고, 신과(神戈)를 사방으로 휘두르매 삼한(三韓)은 청명한 세상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원근(遠近)이 지극한 인(仁)을 당적(當敵)할 길이 없었지만 근골(筋骨)은 먼저 크나큰 임무에 부지런하셔서,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시매, 몸은 상처에 피곤하였습니다.

이 시절을 당하여 세상에 이름난 인재만 용의 비늘에 붙어 절개를 다한 것이 아니오라, 기르는 짐승 같은 천물(賤物)까지도 제 몸을 바쳐 수고를 맡을 것을 알아서, 혹은 사냥터를 달리기도 하고, 혹은 싸우는 진중을 출입하여 주선(周旋)하는 데 힘을 다하고 걸음걸이는 사람을 따르는데, 그 크고 건장한 체격은 이미 익숙한 모습을 볼 만하고, 달리는 곳에는 앞설 놈이 없어 참으로 사생(死生)을 의탁할 만하더니, 마침내 그 장기를 발휘하여 큰 업을 이룩하는 데 도움되었으니, 어찌 영걸(英傑)만이 유독 능연각(凌煙閣)에 오르리오. 권기(權奇)로 소릉(昭陵)에 참열하게 된 것을 믿을 만하옵니다.

삼가 생각하오면, 도(道)는 생성(生成)에 흡족하시고, 공은 조화(造化)에 참예하시고, 선대의 뜻을 잘 계승하시고 선대의 일을 잘 기술하시어 삼가 수성(守成)만 하시고, 선대의 공을 계승하시고 선대의 정책을 드러내어 창업(創業)이 쉽지 않음을 생각하시며, 사랑은 견(犬)ㆍ마(馬)에게도 버리지 않으시고, 신의는 돈(豚)ㆍ어(魚)에까지 미치며, 특히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도찬(圖贊)을 지어 올리게 하셨습니다.

신 등은 모두 조전(雕篆)의 기술로써, 외람되게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온즉, 하물며 이 칭송이야. 바로 직분이옵기로 삼가 사적에 실린 것을 상고하고 겸하여 부로(父老)의 말을 채택하여, 화사(畵師)로 하여금 모형을 그리게 하고 졸한 글을 엮어서 공적을 기록했사오니, 터럭이 꼬부라진 한혈(汗血)은 완연히 당시의 용모와 같고, 늠름한 자태와 높은 공로는 거의 뒷사람의 안목을 놀라게 할 것이며, 상서로움은 하도(河圖)와 더불어 나란히 가고 노래를 지으면 천마가(天馬歌)를 누추하다며 차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한가한 틈이 나시오면 한 번 보아 주시옵소서. 그 덕을 칭찬하고 그 힘을 칭찬하지 않은 것은 선니[18]의 말씀을 따랐고, 아들에 전하고 손자에게 전하여 길이 성조(聖祖)의 공을 살필 수 있사옵니다.
(성삼문이 태조 이성계의 무용을 찬양하며 지은 찬시)
동문선》 제3권 / <부>(賦)

여덟 준마의 그림을 읊은 부[八駿圖賦] / 신숙주(申叔舟)

신(臣)이 듣잡건대, 아조(我朝)가 기업을 북방에서 비롯한 뒤 세 성인(聖人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이 서로 이어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전하고 위엄과 덕이 날로 성(盛)하였나이다. 그때가 고려(高麗)의 말기(末期)라 쇠란(衰亂)이 이미 극도에 달했사온데, 하늘이 동방을 돌보시와 우리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을 내시니, 대왕께서 조상의 업(業)을 이어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건지시려고 마음을 두사 분연(奮然)히 몸을 돌아보지 않으셨나이다.

그리하여 지정(至正) 22년 임인(壬寅) 봄에 홍건적을 평정하시고, 그해 가을에 나하추[納合出]를 동쪽으로 몰아내고, 홍무(洪武) 3년 경술에는 북쪽으로 원나라의 남은 무리를 동녕(東寧)에서 평정하시고, 10년 정사(丁巳) 여름에는 남쪽에서 왜구를 지리산에서 이겼사옵고, 그해 가을에 동정(東亭)에서 싸우시고, 13년 경신(庚申)에 인월역(引月驛)에서 싸우셨으며, 18년 을축(乙丑)에 토동(兎洞)에서 싸우시고, 21년 무진(戊辰)에 위화도에서 회군(回軍)하는 의거(義擧)를 하였사오니, 무릇 27년간에 전후 몇백 번의 싸움이었나이다. 그리하여 만사일생(萬死一生)으로 위난(危難)을 무릅써 마침내 도적을 평정하고 백성을 도탄(塗炭)에서 건지시와,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임금에게 돌아와 마침내 큰 업을 세우시고 덕택을 후세에 길이 끼쳤사옵니다.

그런데 적을 무찔러 함락시키고 나라를 깨끗이 맑힌 공적은 실로 말 위[馬上]에서 얻었사오니, 말의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음이 마땅하오이다. 그 중의 가장 준마(駿馬)로서 공이 있은 말이 여덟이 있었사온데, 이제 우리 전하(殿下 세종)께서 명하여 그림을 그리고 찬(贊)을 붙여 오래 전하게 하라 하옵시니, 그 선대(先代)의 공적을 추모하고 편안 중에서도 위험했던 일을 잊지 않으시와, 후손(後孫)을 위하여 교훈을 끼쳐 주시는 뜻이 참으로 간절하시옵니다. 성자(聖子)ㆍ신손(神孫)이 이로써 전조(前朝)의 나라 얻기는 어렵고, 나라 잃기는 쉬운 것을 거울삼고, 조종(祖宗)께서 그것을 어렵게 얻었음을 생각하시와, 그리하여 여덟 준마의 공을 잊지 않으시면 이는 곧 동방 억만세에 끝없는 다행이겠나이다. 신(臣)이 외람되게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어서 이 성사(盛事)를 보았사오니, 노래하여 기림[頌]이 제 구실이라, 삼가 절하옵고 머리를 조아려 부(賦)를 드리옵나이다
(신숙주가 태조 이성계의 전공을 찬양하며 지은 찬시)

성년이 되어 이자춘이 사망한 후, 이성계는 전주 이씨 가문의 수장으로서 가별초[19]라 불리는 가문 직속의 최정예 사병집단을 이끌고 요동에서 한반도 남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지역을 누비면서 꾸준하게 고려군의 장수로 맹활약했다. 이때의 활약은 가히 유금필척준경과 함께 한반도와 만주를 통틀어 고려 역사상 최강의 돌격형 무장이자 인간 공성병기로 불릴 만한 위업이었으며, 특히 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대 최고를 넘어 한국사에서도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주몽 정도밖에 비견되는 사람이 없다.

이성계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에 귀순했으며 귀순 후 왕의 호위직인 애마를 맡아서 했다. 공민왕이 보낸 고려군과 내응해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고려의 무장으로서 고려를 침략해 오는 원나라, 왜구, 홍건적, 여진족과 반란군들을 물리치면서 엄청난 공적을 세웠다. 가히 최영과 함께 고려의 양대 수호신으로 불렸다.

2.1. 왕이 될 꿈

이성계의 대표적인 일화 중 하나로, 야사에 따라 내용이 다종다양하다. 왕이 될 꿈을 꾸었고, 서까래 3장을 등에 이고 있었다는 것은 대체로 동일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 대체로 알려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젊어서 어느 절에서 쉬던 중 꿈에 무너지는 집의 서까래 세 개에 깔렸는데 깨어나 보니 등에 서까래에 눌린 상처가 있어 그 절의 중이던 무학대사가 이는 왕이 될 징조라고 말한다. 무학대사는 서까래 3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으니 석 삼(三)자 모양이 되고 이성계의 몸을 작대기(│)라고 하면, 둘이 합치면 임금 왕(王)자가 된다고 설명했다.[20]

좀 더 긴 버전도 있는데, 아래와 같다.
초가집 툇마루에 앉아있던 이성계는 나무 위에서 닭이 '꼬끼오' 하고 시끄럽게 우는 것을 보았다. 하도 시끄럽게 울어대는 통에 이성계는 자리에 일어서려 했는데 등에 서까래 세 장이 얹혀져 있었고, 이 서까래는 아무리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성계는 서까래를 떼어내기 위해 사람을 찾다가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는 꽃밭을 보았다. 꽃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있었는데 갑자기 꽃은 시들었고, 뒤에서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이 꿈에 대한 해몽을 무학대사가 해주었다고 하는 판본도 있고 동굴에 숨어살던 이름모를 노파가 해주었다는 판본도 있는데, 내용은 대충 이렇다.
  • 닭이 '꼬끼오'하고 움 : 꼬끼오를 한자로 음만 옮겨적으면 '고귀위'가 된다. 고귀위(高貴位)는 실제로 있는 단어로 뜻만 해석하면 '높고 귀한 자리'를 의미한다. 이성계가 높고 귀한 자리에 오를 것이라는 것을 의미.[21]
  • 서까래 3장 : 임금 왕이 될 것으로 이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 동일하다.
  • 아름다운 꽃이 있으나 시들어버림 : 꽃은 이성계가 고려를 위해 세운 군공과 업적들을 의미하고 꽃이 시들면 열매가 열리므로 이러한 업적들을 바탕으로 결실을 맺을 것을 의미한다.
  • 무언가 깨지는 소리 : 깨지는 소리가 나면 주변 사람들이 그 위치를 돌아보게 된다. 즉, 만백성이 이성계를 우러러 본다는 의미.

또 다른 일화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용한 점술가를 찾아가 파자 점을 봤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성계 앞에 한 사람이 먼저 와 있었는데, 옷을 멋지게 빼입고 있었다. 점술가가 한자를 하나 뽑아보라 하자 뽑은 한자는 물을 문(問). 그랬더니 점술가가 "문(門) 앞에 입(口)이 있으니 당신은 거지 팔자요"라고 하자 그는 "나 참 딱 걸렸네"하고 투덜대면서 쓸쓸히 퇴장했다. 거지가 옷을 얻어입고 찾아와봤던 것. 점술가가 이성계에게 한 글자 고르라 하자 그 또한 문(問)을 뽑았는데, 이번엔 점술가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임금 군(君)이니, 장차 이 나라의 군왕이 되실 분이십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판도 있는데, 여기선 이성계가 먼저 파자점 치는 점술가를 찾아가 물을 문(問)을 뽑았더니 점술가가 이성계에게 왕이 될 팔자라고 말해줬다. 그래서 이성계가 시험삼아 다음 날 근처에 있던 거지 하나를 멀쩡하게 변장시켜서 똑같이 해보라 했더니 이번엔 거지 팔자라고 말했다는 것. 별 상관은 없지만 이런 패턴은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만큼 그 점술가의 능력이 뛰어남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강하다.

또 다른 변주로 이성계 이후에 점을 본 사람이 거지가 아니라 이지란이며, 점쟁이의 거지 팔자 선언으로 날뛰는 이지란을(복채도 이성계의 2배나 냈다고 한다) 이성계가 말리면서 둘이 이때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 또한 있다.

목자득국(木子得國),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이왕도한양(李王都漢陽) 즉 이씨(李)가 왕이 된다는 도참이 전해져서, 고려 왕실에서는 오얏나무(李) 심고 베기를 반복하면서 이씨(李)의 기를 누른다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왕실의 문양을 같은 발음의 이화(梨花) 즉 배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오얏나무 이화(李花)이다.

2.2.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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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벌인 전투들. 이성계는 위로는 홍건적, 나하추, 여진족, 원나라와 맞붙었고, 아래로는 왜구, 그리고 위화도 회군으로 인한 고려의 중앙군까지 당대 동북아시아의 모든 군사집단과 싸웠으며 모든 전투에서 승전한 희대의 명장이었다. 그야말로 고려판 불패신화.

세세한 전공을 제외하고 굵직한 전공만 따져도 다음과 같다. 더 자세한 전공 기록은 태조실록 1권, 총서를 살펴보면 원문을 확인 할 수 있다.
  • 1361년 10월 독로강(禿魯江) 만호(萬戶)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박의를 죽였다.
  • 1361년 10월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파두반(破頭潘)이 이끄는 동계홍건군(東系紅巾軍) 중로군(中路軍) 20만 홍건적의 고려 침공.[22] 삭주(朔州)·이성(泥城)·무주(撫州)·안주가 함락되고, 흥의역(興義驛)에 이르러 개경(開京)까지 위협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광주(廣州)를 거쳐 복주(福州)로 파천(播遷)하고 수도 개경이 결국 홍건적들의 대군세에 함락되자 이성계가 2천으로 구성된 사병조직(가별초)으로 개경 탈환에 성공해서 가장 먼저 입성하고 홍건적 두목의 목을 베어 죽였다.
  •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친내 함흥 평야에서 적을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 1364년 최유가 원나라 황제에 의해 고려왕에 봉해진 덕흥군을 받들고,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평안도지방에 쳐들어오자 이에 최영과 함께 수주 달천에서 이들을 모두 섬멸했다. 이 때 압록강을 건너 도망간 자는 겨우 17기뿐이었다.
  • 1364년 여진족들이 삼선(三善)과 삼개(三介)[23]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하여 함주까지 함락당하자 이를 모두 물리치고 동북면이 평온을 되찾게 만들었다. 이후 밀직부사. 단성양절익대공신에 책봉되었고,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 화령부윤이 되었다.
  • 1370년 1월 기병 5천, 보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오녀산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서북쪽 하늘이 자주빛으로 물들어 남쪽으로 뻗으니 서운관(書雲館)에서 "맹장(猛將)의 기운입니다" 하자 공민왕이 "내가 이성계를 보냈기 때문이다"라며 기뻐하였다. 그해 11월 지용수 등과 함께 다시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하고,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제1차 요동정벌)
  • 1377년 우왕 3년 크게 창궐하던 왜구들을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했다.
  • 1378년 수도 개경을 위협하던 왜구의 대군에 맞서 최영이 싸우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직접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왜구의 대군을 격퇴하였다.
  • 1380년 양광-전라-경상 삼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발도가 지휘하는 왜구의 대군세를 운봉에서 섬멸했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황산대첩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24][25]
  • 1383년 여진인 호바투가 4만 기병을 이끌고 동북면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 동북면 도지휘사에 임명되어 이지란과 함께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어서 안변책을 건의했다.
  •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어 함주를 공격한 왜구를 대파했다.
  • 1388년 좌군도통사로 임명되어 요동정벌의 임무를 맡았으나, 위화도 회군을 통해 개성에서 고려 중앙군과 최영을 패배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 시기 이성계의 활약을 보면 그야말로 전쟁을 위해 태어난 남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준이다.[26] 고려 국내에 침입한 왜구, 여진족, 원나라 황제가 보낸 군대, 원나라 군벌, 홍건적 등과 싸워서 전승했으며,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공민왕 때의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요동성을 직접 함락시켜 점령하기도 했다. 고려조 이후의 한국사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다. 특히 이성계 최대의 전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황산대첩 때에는 왜구의 피로 바위가 피로 물들어 그 바위를 '피바위'라 했을 정도로 왜구를 모조리 전멸시켰다. 이 시기의 왜구들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냐 하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고려라는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수준이었다. 명장 이성계의 눈부신 전공 3

2.3. 홍건적과의 전투

1361년 음력 10월에 고려 조정의 부름을 받고 출전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차 침입 때의 5배 병력인 2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했다. 원나라 여름 수도 제나두를 함락시키기도 했던 동계홍건군(東系紅巾軍) 중로군(中路軍) 20만 홍건적 대군은 철기(鐵騎) 5천을 앞세워 고려가 구축한 절령(자비령) 방책(防柵)을 순식간에 돌파했다. 고려는 수도 개경을 지키려고 저항하였으나 삽시간에 개경까지 함락되었다. 다급한 고려 조정은 유생들에게는 벼슬을 주고, 노비들은 해방한다는 명분까지 내세워 20만 군사를 모았지만 급하게 징발한 군대이다 보니 쉽지 않았다.

이렇게 홍건적이 수도 개경에 머물며 남녀 백성들을 불에 태워 굽고 인육을 먹는 등[27]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사이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조직(가별초) 2,000명을 거느리고 적을 대파하였다. 이성계 군대가 선두에 서서 개경에 입성하자 따르던 군대들도 입성하여 홍건적 10만을 도륙하였다. 나머지 홍건적 10만 명은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이 때를 계기로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일개 변방의 장수가 아닌 인물로 주목하기 시작한다. 선봉에 서서 홍건적 두목[28] 사유, 관선생의 목을 베어버리며 용맹을 떨친 이성계가 그의 나이 26세에 최영, 이인임 등과 함께 경성수복공신(京城收復功臣) 1등 공신에 책봉된 것이다. 이성계의 이복 형 이원계 또한 경성수복공신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후 고려의 군권(軍權)은 경성수복공신들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에 여기에 이름을 올린 이성계가 중앙 정치세력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이 때 이성계가 보여준 무공은 그야말로 '항우의 재림'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
성을 공격하던 날, 적(홍건적)들은 궁지에 몰려 위축되기는 했으나, 보루를 쌓고 굳게 지키므로 모든 아군 부대들이 진격해 포위망을 좁혀들어 갔다. 태조는 길 가의 민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태조가 말을 달려 동문(東門)에 도달하였으나 성문에서 피아간에 마구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통에 문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뒤에서 적이 달려들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형세가 위급해졌다. 태조가 칼을 빼어 앞을 가로막는 적병 칠팔 명을 쳐서 죽이고 말을 몰아 성을 뛰어넘었는데도 말이 넘어지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고려사』 권113, 열전26 안우·김득배·이방실

2.4. 원나라 군벌 나하추 격파

그뿐만이 아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1362년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나하추를 격파했다. 당시 나하추는 휘하의 가장 뛰어난 장수에게 붉은 기를 주고 이성계에 맞서게 했으나 전사하고 패하였다. 이에 열 받은 나하추는 다음 날 장수 5명을 한꺼번에 출진시켜서 이성계를 공격했는데, 5명 모두 전사했다. 이는 원사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나하추의 부인이 나하추에게 이르기를 "공(公)이 세상에 두루 다닌 지가 오랜 세월이지만 저런 장수를 본 적이 있습니까? 어서 피하여 속히 돌아오십시오." 하였으나 나하추가 듣지 않았다. 나하추는 모든 병력을 함흥 평야로 이끌고 나왔으나, 이성계는 군을 삼군(三軍)으로 나누어 좌군(左軍), 우군(右軍)은 매복시키고, 자신은 중군(中軍)을 이끌고 나아가 나하추의 군대를 매복지로 유인하여 끌어들이니 나하추의 군대는 포위되어 완패한다.

결국 나하추는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나면서, 공민왕과 이성계에게 좋은 말(馬)을 각각 선물하며 예를 차렸다. 더하여 이성계에게는 '비고'라는 진군할 때 울리는 북을 선물하였다. 진중에서 이성계의 무공을 지켜본 나하추의 누이까지도 "이 사람은 세상에 둘도 없겠다"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1376년 우왕이 나하추에게 개성부윤 황숙경을 사신으로 보내었는데, 나하추가 말하길 당시 공민왕이 이성계를 보내어 거의 죽을 뻔했다며, 이성계는 군사를 부리는 재주가 신(神)과 같다면서 안부를 물으며 이성계는 장차 큰일을 할 것이라고 하였다. 엄연히 적장이었는데도 말이다![29]

2.5. 원나라 군대 격파

1364년에는 최유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쳐들어와 의주에서 고려군이 패하고 안주로 후퇴하자 공민왕은 최영을 도순무사로 삼고, 이성계에게도 동북면 출신의 기병 천 명을 이끌고 가서 최영을 돕게 하였다. 그런데 고려 공민왕을 폐하고 새로운 왕을 들이겠다는 폐왕입주(廢王入主)를 명분으로 원나라 황제가 직접 보낸 군대이다 보니 군세가 만만치 않았다. 이귀수, 지용수, 나세, 안우경, 이순, 우제, 박춘 등의 기라성 같은 고려의 장수들이 패전을 거듭하고 와서 전장에서 머뭇거리며 나아가려고 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들을 힐난하며 보란 듯이 나선다. 여타 장수들은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심보로 중앙, 좌, 우군 삼군의 모든 선봉을 이성계의 군대에게 맡겼다. 그런데 선봉에 선 이성계가 적장을 활로 쏴 말에서 떨어뜨리며 이성계 군대가 중앙 돌파에 성공하면서 덕흥군 주력 부대를 격파하자 나머지 군사들이 흩어진 덕흥군 좌우 군대를 공격하였다. 살아남은 덕흥군 군사는 17기뿐이었다. 결국 원나라는 공민왕에게 복귀 조서를 내리게 된다.

2.6. 제1차 요동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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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황산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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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여진족 장수 호발도(호바투: 胡拔都) 격파

1382년 이성계가 우왕의 부름을 받고 가별초를 이끌고 개경으로 가서 동북면을 비운 틈을 노려 1383년 여진인 호발도(호바투)가 전격적으로 동북면을 침공해 왔다. '이지란신도비'에서는 당시 호발도가 동원했던 병력이 무려 4만 기병이라는 언급을 하고 있다.[30] 이마저도 이성계는 길주에서 회전으로 대파한 뒤에 이어서 안변책(安邊策)을 건의했다. 겨우 목숨만 건진 호발도는 만주로 도망쳤고, 다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
太祖縱兵破之, 胡拔都僅以身遁去。 (태조가 군사를 놓아 크게 적군을 쳐부수니, 호바투는 겨우 몸을 피해 도망해 갔다.)
태조가 단주에 침입한 호발도를 격퇴하고 변방을 평안히 할 계책을 올리다
이성계가 호바투를 무찌르고 동북면을 구원해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양군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 길주 평야라는 점, 그리고 묘사되는 언급을 통해 보면 양군의 전투는 일대 회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회전에서 이성계는 호바투의 대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호바투는 패퇴하여 물러나고 만다.

이성계의 승리로 호바투의 위협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그러나 호바투가 그동안 동북면 지역에 끼친 위협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호바투가 당시 동북면 지역에 끼친 위험성이 부각되는 시기는 바로 조선 태종 시기, 만산 군인(漫散軍人) 문제로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 외교적 사건이 생겼을 무렵이다. 만산군인이란 바로 고려 말기 호바투에 의하여 붙잡혀 끌려갔던 동북면 주민들을 말함이다. 이들은 1402년 정난의 변 당시의 혼란을 이용해 대거 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후 영락제의 강력한 강압에 못 이긴 조선에서는 이들을 다시 명나라로 돌려보내게 된다. 이 당시 명나라로 돌아간 만산군인은 무려 17,414명에 이른다.

장장 2만여명에 가까운 인원도 대단한 숫자지만, 어디까지나 이는 '정난의 변의 혼란기에 조선에 들어왔던' 숫자만을 말함이다. 요동에는 더 많은 고려 출신의 사람들이 있었다.

"신(臣)이 《요동지(遼東志)》를 보건대, 동녕위(東寧衛)에 소속된 고려(高麗) 사람이 홍무(洪武)의 연간(年間)에 3만여 명이 되었으며, 영락(永樂)의 세대에 이르러서 만산군(漫散軍)이 또한 4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 요동(遼東)의 호구(戶口)에서 고려 사람이 10분의 3이 살고 있어 서쪽 지방 요양(遼陽)으로부터 동쪽 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남쪽 지방 해주(海州)·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聚落)이 서로 연속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에서 급급(汲汲)히 진려(軫慮)할 것입니다." ─ 세조 34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8월 1일(임오) 2번째기사

세조 무렵 양성지의 상서(上書)에서는 영락제 연간 요동의 만산군이 무려 4만여명에 달했다고 보고 하고 있다. 그 이전 홍무제 시기에는 3만여명의 고려 사람이 명나라에서 동녕위에 소속되어 있었고, 요동의 호구에서 대다수가 고려 출신 사람들이었으니 국가에서는 이들을 걱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수치가 조금 과장이 있을 수도 있으나, 앞서 말한 만산군인 송환 사례를 보면 최소 2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호바투에게 포로로 끌려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렇듯 여진족 장수 호바투는 인간 약탈을 자주 벌이던 인물이었는데 호바투의 '인간 약탈' 은 이성계와의 전투 그 이전부터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태종 18년인 1418년, 명나라 사신의 수행원이었던 소이옹불화(所伊雍不花)라는 사람이 사사로이 북청에 사는 자신의 숙부 아이불화(阿伊不花)에게 보냈던 편지가 중간에 조정으로 올라와 "이렇게 편지가 왕래되는것은 기밀을 누설할 수 있다" 는 말이 오간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편지의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갑인년에 호파두(胡波豆)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중국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여직(女直) 대인(大人)을 배종(陪從)하여 백두산 북쪽의 새 목책성(木柵城)에 왔는데, 내가 소문을 들으니, 숙부께서 종제(從弟) 강길(康吉) 등과 사이 좋게 잘 지낸다니, 내가 나가서 서로 만나 보고자 하나……"
태종 35권, 18년(1418 무술 / 명 영락(永樂) 16년) 2월 20일(신축) 2번째기사

호파두란 물론 호바투를 말함이다. 이 말에 의하면 이 소이옹불화라는 사람은 갑인년 무렵에 호바투에게 사로잡혀서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갑인년이라고 하면 1374년으로, 호바투가 이성계에게 격퇴되기 무려 10여년 전 무렵이다. 호바투는 최소 장장 10년이 넘게 북방을 교란하며 수만의 사람을 포로로 잡아갔던 것이다. 이성계가 적극적으로 호바투를 격퇴한 가장 큰 이유는 물론 호바투에게 자신의 인적 자원을 뺏기지 않고 기반을 지키려는 이유였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이성계의 활약으로 동북면 지역 역시 호바투의 위협에서 구원될 수 있었다.

호바투를 평정하러 나선 이성계의 승리를 기원하는 시가 함께 전해 내려온다.
松軒膽氣蓋戎臣 장군의 용맹함은 장수들 중 으뜸이니
萬里長城屬一身 만리장성이 장군의 한 몸에 맡겨졌네
奔走幾經多故日 바삐 다니며 어려웠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고
歸來同樂太平春 돌아오면 함께 태평한 봄을 즐겼으면 합니다
如今大勢關宗社 작금의 형세는 나라의 종묘와 사직이 걸려있는데
況是前鋒似鬼神 하물며 그 선봉장(호바투)는 귀신 같다고 합니다
聯袂兩朝情不淺 두 왕에 걸쳐서 정이 얕지 않으니
只將詩律送行塵 다만 시를 지어 장군의 가는 길을 전송합니다
목은 이색

2.9.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고려의 문하시중
최영 이성계 왕조 멸망
(영의정) 이서
작위 화령군 개국충의백
(和寧郡 開國忠義伯)
공신호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
(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
녹권호 중흥공신 녹권(中興功臣 錄券)

1388년 이성계는 선배 무장인 최영과 함께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고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31] 하지만 이어진 명나라의 도발에 그야말로 천생 군인답게 우직하게 대처하는 최영 때문에 제2차 요동정벌에 휘말리는 처지에 빠졌다. 이성계는 4불가론을 내세워 출정에 반대했지만 우왕이 최영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32] 야사(野史)인 <연려실기술>에는 이성계의 공명(功名)이 날로 높아가고 이씨(李氏)가 왕이 된다는 소문까지 퍼지자 최영이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던 차에 요동 정벌을 명분으로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하였다. 요동 정벌을 성공해도 이성계가 명나라와 적이 되게 만들고 실패해도 이성계의 사병 집단을 무력화시킬 기회로 봤다는 것이다. 정사(正史)인 <고려사>에서는 최영과 이성계의 친분이 두터웠다며 이를 부인하지만 일각에서는 최영이 요동 정벌을 계기로 이성계를 제거하려 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었다.

우왕은 최영을 총지휘관으로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로 삼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 이성계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삼아 요동 정벌을 단행하였다. 좌,우군도통사 휘하에는 도원수, 상원수, 조전원수 등 28명의 원수(元帥)가 각각의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니 원정군은 28원수들이 각각 거느린 부대를 단위 부대로 하고 있었다. 비록 최영이 총지휘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28원수들에게 절대적 통수권이 부여된 상태로 원정군 편성도 원수들 재량에 의해 조정될 수 있었고 단위 부대 차출도 원수가 주군(州郡)의 수령에게 공문을 보내 스스로 충원할 수 있었다. 즉 고려 중앙군이라고 해도 각 도의 병사들이 원수들에게 사적으로 예속되는 경향이 심해서 사병적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사실상 왕명으로 신하들의 사병 집단을 동원했다고 볼 수 있다.[33] 휘하 원수들도 이화, 이지란과 같이 이성계의 사적 통제를 받는 이들이 상당수였고 이성계가 거느린 동북면 군사들이 전력도 강하지만 가장 사병적 성격이 강했다. 게다가 최영은 우왕이 붙잡아서 가지도 못했으니 사실상 요동 정벌 원정군은 이성계 뜻대로 움직일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렇게 우왕의 명으로 제2차 요동 정벌을 위해 북상하다 압록강의 섬 위화도에서 회군한다. 친형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절명시를 남기고 자살했으며 고려의 신하로서의 충절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을 보면 정말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34] 이후 개경을 공격하여 최영과 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옹립하였다가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주장(폐가입진)을 하며 창왕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하는데 최영에 이어 우왕과 창왕도 참살된다.[35] 공양왕 시기에 본거지인 화령군의 백작(伯爵)으로 임명되었으며 공양왕파였던 정몽주가 공양왕과 결탁하여 이성계 무리를 견제하기도 했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참살되었다. 결국 왕대비 안씨는 공양왕을 폐위해 이성계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봉하는데 1392년 7월 17일 감록국사 이성계는 국새를 받고 수창궁에서 고려의 사직을 자신이 이어받았음을 선포한다. 실록에는 태조의 즉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관(百官)이 국새(國璽)를 받들어 왕대비전(王大妃殿)에 두고 모든 정무(政務)를 나아가 품명(稟命)하여 재결(裁決)하였다. 13일(임진)에 대비(大妃)가 교지를 선포하여 태조를 감록국사(監錄國事)로 삼았다. 16일(을미)에 배극렴과 조준이 정도전·김사형(金士衡)·이제(李濟)·이화(李和)·정희계(鄭熙啓)·이지란(李之蘭)·남은(南誾)·장사길(張思吉)·정총(鄭摠)·김인찬(金仁贊)·조인옥(趙仁沃)·남재(南在)·조박(趙璞)·오몽을(吳蒙乙)·정탁(鄭擢)·윤호(尹虎)·이민도(李敏道)·조견(趙狷)·박포(朴苞)·조영규(趙英珪)·조반(趙胖)·조온(趙溫)·조기(趙琦)·홍길민(洪吉旼)·유경(劉敬)·정용수(鄭龍壽)·장담(張湛)·안경공(安景恭)·김균(金稛)·유원정(柳爰廷)·이직(李稷)·이근(李懃)·오사충(吳思忠)·이서(李舒)·조영무(趙英茂)·이백유(李伯由)·이부(李敷)·김로(金輅)·손흥종(孫興宗)·심효생(沈孝生)·고여(高呂)·장지화(張至和)·함부림(咸傅霖)·한상경(韓尙敬)·황거정(黃居正)·임언충(任彦忠)·장사정(張思靖)·민여익(閔汝翼) 등 대소신료(大小臣僚)와 한량기로(閑良耆老) 등이 국새(國璽)를 받들고 태조의 저택(邸宅)에 나아가니 사람들이 마을의 골목에 꽉 메어 있었다. 대사헌(大司憲) 민개(閔開)가 홀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얼굴빛에 나타내고, 머리를 기울이고 말하지 않으므로 남은이 이를 쳐서 죽이고자 하니, 전하가 말하기를,

"의리상 죽일 수 없다."

하면서 힘써 이를 말리었다. 이날 마침 족친(族親)의 여러 부인들이 태조와 강비(康妃)를 알현하고, 물에 만 밥을 먹는데, 여러 부인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하여 북문으로 흩어져 가버렸다.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 질 무렵에 이르러 극렴(克廉)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國璽)를 청사(廳事)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거조(擧措)를 잃었다. 이천우(李天祐)를 붙잡고 겨우 침문(寢門) 밖으로 나오니 백관(百官)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萬歲)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합사(合辭)하여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중략)

태조는 굳이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의 일어남은 천명(天命)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다. 나는 실로 덕(德)이 없는 사람인데 어찌 감히 이를 감당하겠는가?"

하면서, 마침내 응답하지 아니하였다. 대소 신료(大小臣僚)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부축하여 호위하고 물러가지 않으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함이 더욱 간절하니,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하여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御座)를 피하고 기둥 안[楹內]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六曹)의 판서(判書) 이상의 관원에게 명하여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하였다. 이에 명하여 고려 왕조의 중앙과 지방의 대소 신료(大小臣僚)들에게 예전대로 정무(政務)를 보게 하고, 드디어 저택(邸宅)으로 돌아왔다.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7월 17일 병신 1번째기사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한 다음날 명나라 예부에 상행문서를 올려 종친이 아닌 타성의 문하시중 이성계를 권서국사로 추대할 것을 원한다고 밝혔다. 1달이 조금 지나자 이성계는 재차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36] 명의의 표문을 올려 권지군국사로 추대된 것을 홍무제가 재가해줄 것을 청하였다. 이성계를 추대한 급진 사대부들은 이를 통해 공민왕 사후 악화된 대명 관계를 회복하고 나아가 이례적인 방식을 통해 이념적으로 이성계의 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였다.[37] 사실 곧바로 국왕을 자칭하지 못한 것은 태조 왕건 이후부터 시작된 일종의 관례였는데 고려 이후로는 보통 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정식으로 알린 뒤 승인을 받아야 왕호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태조 왕건(王建)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칭호를 최초로 사용하여 이러한 관례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성계 또한 왕건과 고려의 이러한 사례를 그대로 따른 셈이었다.

명나라 홍무제는 위화도 회군이 아니었으면 조선을 결코 새로운 나라로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홍무제는 자신이 세운 왕조를 지키기 위함인지 역성혁명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지닌 인물이었다. 군주가 천명(天命)을 거스르면 방벌(放伐) 즉 무력으로 역성혁명을 주장한 맹자공자의 정배(亭配)에서 빼버리고 제사도 못지내게 한 인물이다. 형부상서 전당이 이를 반대하다가 화살형을 당하게 됐는데 전당이 "맹자를 위해 죽으면 영광입니다"하자 감동한 홍무제가 살려주고 맹자의 제사도 회복시켰으나 <맹자>에서 은나라(상나라) 마지막 왕 주왕(紂王)과 이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에 대한 부분은 빼버린 <맹자절요>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베트남에서 신하인 호계리진씨 왕조를 무너뜨리자 조공도 받지 않고 홍무제의 아들인 영락제는 이를 명분으로 대월(베트남)을 치러 20만 군대를 보낼 정도였다.[38]

2.10. 불세출의 신궁

공은 천재이므로 인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 이두란

전공도 전공이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는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자랑한다. 가히 궁술만으로 항우에 비견되는 한국사 최강의 보우마스터. 무섭게도 그 궁술이 야사뿐만 아니라 정사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 역사에 기록된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면, 멀리서 저격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마궁술, 즉 말 타고 돌격하면서 활로 적들을 갈아버린적도 꽤 된다.[39]

물론 정사인 고려사고려사절요가 조선에서 쓰였기에 극적인 표현이 있지만, 없던 일을 만들어 넣진 않는다.[40] 게다가 중국의 정사인 원사나 일본 측의 기록으로 일부 교차검증도 된다. 기록에 나타난 이성계의 궁술에 관한 일화들 몇 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젊었을 때에는 훗날 정빈 김씨로 추봉되는 이자춘의 첩이자 여종이었던 김씨(의안대군 이화의 어머니)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는 태조에게 활로 쏘아달라고 부탁했다. 태조가 한 번의 활을 쏘아 5마리를 동시에 맞히자,[41] 김씨는 태조에게 절대로 이러한 일을 아무 데에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출처는 태조실록 1권 총서.[42]
  • 보통 사람이 쓰는 것보다 훨씬 튼튼한 강궁을 썼는데, 이자춘이 이 활을 보고 인간이 쓸 물건이 아니다라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43]
  • 나하추의 휘하 장수가 온 몸에 철갑을 두르고 입은 벌릴 수 있게 턱에도 따로 철갑으로 무장하여 화살을 쏠 곳이 없으니 이성계가 적장의 말을 쏘아 말이 날뛰며 다루기가 힘들어지자 적장이 힘을 다해 고삐를 당기며 입을 벌리는 순간 화살을 적장의 입을 향해 쏘아 쓰러트렸다.
  •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당시 고려에서 이성계와 더불어 활을 잘 쏘기로 유명했는데, 원나라 황제가 어떻게 그렇게 활을 잘 쏘느냐며 팔을 만져보기도 한 명궁이였다. 세간의 화제는 이성계와 황상 둘중에 누가 최고의 명궁이냐였다. 드디어 개경에서 이성계와 황상의 활쏘기 겨루기가 열렸다. 둘이서 족히 수백 발을 쏘았다고 한다. 이때 50발까지는 둘 다 연달아 맞혔으나 50발을 넘어서자 황상은 맞히기도 하고 못 맞히기도 했으나 이성계는 단 한 발도 빗나간 것이 없었다.[44][45] 이를 전해들은 공민왕은 "이성계는 참으로 비상한 인물이다." 하였다.
  • 1차 요동정벌 당시 동녕부의 추장 고안위(高安慰)가 오녀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하자 이성계는 편전(애기살) 70발을 쏴 성벽 위에 있던 고안위의 부하 70명의 얼굴을 하나씩 쏘아 모두 맞혔다. 이를 보고 고안위는 기겁하여 도망갔으며, 나머지 적군들의 사기가 떨어져 곧 항복했다.이것을 보고 주위 여러 성들이 항복했는데 그 수가 1만여 호나 되었다. 출처는 태조대왕실록.[46]
  • 동녕부의 오녀산성을 점령한 후, 요동성 전투에서 처명이라는 적장을 사로잡기 위해서 한 발은 투구에, 한 발은 허벅지에 맞힌 후 "마지막 한 발은 네놈 얼굴에 맞히겠다!"라고 하자 용맹한 처명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항복한 처명은 이후 이성계 막하에서 부장으로 활약하여 황산대첩 때에도 참전했다.
  • 황산대첩 때 왜구 적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활로 맞혀 벗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이지란이 얼굴에 화살을 맞혀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기발도는 온몸을 감싸는 갑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는 구리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일본 투구에는 원래 얼굴을 가리는 철가면인 멘구(面具)라는 부품이 있다.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가 떨어지면 이지란이 쏘는 걸로 되어 있었다.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끈이 끊어져 투구가 기울어져 떨어지기 직전, 아기발도가 투구를 붙잡아서 고쳐 썼는데, 그러자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다시 맞혀서 마침내 투구를 떨어트리고 이지란이 얼굴을 쏴서 죽였다고 한다. 이런 무협소설에 나와도 욕먹을 먼치킨 스토리가 야사도 아니고, 정사인 고려사에 당당히 적혀있다. 일본 갑옷의 투구를 보면 이성계가 맞혔다는 정자 부위 자체는 제법 크다. 한국의 투구는 그 부분이 상당히 작으나 일본 투구에는 화려하고 너무 큰 장식이 달렸기 때문에 정자도 크다. 그렇다 해도 전투 중이라서 쉼없이 움직이고 있었을 상대를 2번이나 같은 위치에 맞혔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 이성계는 왜구와의 격전을 앞두고 150보 떨어진 곳에서 투구를 놓아두고 3번 쏴 3번 다 맞혀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1가 대략 1.2m니, 180m 거리를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실력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 사거리는 웬만한 초기 화약병기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또한 가지고 있던 화살 20개중 17개를 쏘아 모두 맞혔는데 모두 왼쪽 눈초리에 명중했다고 한다. 출처는 역시 태조대왕실록.
  •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백보(120m) 밖에 있는 배나무를 쏴서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떨어뜨려 그 배로 손님을 대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태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
태조가 일찍이 친한 친구를 많이 모아 술을 준비하고 과녁에 활을 쏘는데, 배나무가 백 보(步)밖에 서 있고, 나무 위에는 열매 수십 개가 서로 포개어 축 늘어져서 있었다. 여러 손님들이 태조에게 이를 쏘기를 청하므로, 한 번 쏘니 다 떨어졌다. 가져와서 손님을 접대하니, 여러 손님들이 탄복하면서 술잔을 들어 서로 하례(賀禮)하였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54번째기사 태조가 화살로 쏴 떨어뜨린 배를 가지고 손님을 대접하다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다.
5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비보(飛報)하기를, "나졸(邏卒)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 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했다.

이때 왜적이 있는 곳은 가득히 찼으므로, 태조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치게 했다.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흉흉하여 두려워했다. 인열(仁烈)의 비보(飛報)가 계속해 이르므로, 태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서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우는데, 서로의 거리가 2백여 보(步)나 되었다.

적 한 명이 등(背)을 세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면서 욕설을 하므로, 태조가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를 쏘아서 화살 한 개에 넘어뜨렸다. 이에 적군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이 쑥 빠졌으므로, 곧 크게 이를 부수었다. 적의 무리가 낭패를 당하여 산에 올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칼과 창을 고슴도치 털처럼 드리우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했다.

태조가 이를 꾸짖고, 또 상왕(上王, 정종 이방과)으로 하여금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누어 그와 함께 가게 했더니, 상왕도 돌아와서 아뢰기를 또한 비장(裨將)의 말과 같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친히 가서 보겠다" 하면서, 이에 휘하의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 말이 먼저 올라가면 너희들은 마땅히 뒤따라 올라올 것이다" 했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함께 달려가서 그 지세(地勢)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리니, 이때 해가 한낮이므로 칼빛이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혹은 밀고 혹은 더위잡아서 따랐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냅다 치니, 적군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남은 적군까지 쳐서 이들을 다 죽였다. 태조는 평소에 인심을 얻었고, 또 사졸들이 뛰어나게 날래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주군(州郡)에서 그를 구름과 무지개처럼 우러러보았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61번째기사 태조가 지리산의 험한 지세에서 왜적을 섬멸하다

이 이야기는 정도전(드라마)에서 황산대첩 직전에 각색이 가해져서 재현되었다. 사실은 황산대첩 3년 전에 있었던 일화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로 보인다.
  •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 기병의 말의 눈을 쏘아 넘어뜨리기도 했다.
  • 어느 날 신하들이 공민왕 앞에서 활을 내었는데 이성계가 100번을 쏴 다 맞히자, 공민왕은 "오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라며 감탄하였다.
공민왕이 경대부(卿大夫)들로 하여금 과녁에 활을 쏘게 하고 친히 이를 구경하는데, 태조가 백 번 쏘아 백 번 다 맞히니, 왕이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

하였다.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원(元)나라에 벼슬하여 활 잘 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는데, 순제(順帝)가 친히 그 팔을 당겨서 이를 관찰하였다. 태조가 동렬(同列)들을 모아 덕암(德巖)에서 과녁에 활을 쏘는데, 과녁을 1백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도 태조는 쏠 때마다 다 맞히었다. 해가 이미 정오(正午)가 되어 황상(黃裳)이 이르니, 여러 재상(宰相)들이 태조에게 홀로 황상과 더불어 쏘기를 청하였다. 무릇 수백 번 쏘았는데 황상은 연달아 50번을 맞힌 후에도 혹은 맞히기도 하고 혹은 맞히지 못하기도 했으나, 태조는 한번도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 왕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이성계(李成桂)는 진실로 비상한 사람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내부(內府)의 은(銀)으로 만든 거울 10개를 내어 80보(步) 밖에 두고, 공경(公卿)에게 명하여 이를 쏘게 하되, 맞힌 사람에게는 이 거울을 주기로 약속하였다. 태조가 열 번 쏘아 열 번 다 맞히니, 왕이 칭찬하며 감탄하였다. 태조는 항상 겸손(謙遜)으로 자처(自處)하면서 다른 사람보다 윗자리에 있고자 아니하여, 매양 과녁에 활을 쏠 때마다 다만 그 상대자의 잘하고 못함과 맞힌 살의 많고 적은 것을 보아서, 겨우 상대자와 서로 비등하게 할 뿐이고, 이기고 지고 한 것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비록 구경하기를 원하여 권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살 한 개만 더 맞히는 데 불과할 뿐이었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56번째기사 태조가 활을 쏜 것이 백발 백중하니 모두가 감탄하다
  • 심지어 호랑이개경에서 백성들과 가축들을 마구 해치자 직접 활로 쏘아 죽인적도 있었다.


    • 8월, 범이 서울에 들어와서 사람과 짐승을 많이 해치니, 태조가 이를 쏘아 죽였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65번째기사 태조가 서울의 많은 인명을 해친 범을 쏴 죽이다


      다만 자주 호랑이를 사냥하다보니 우왕이 이성계를 걱정했다는 기록도 함께 남아있다.

      10월, 태조는 나가 사냥하다가 을 쏘아 잡아서 우왕에게 바치니, 우왕은 의복을 내려 주면서 이내 유시(諭示)하였다.


      "흉악한 짐승은 마땅히 잡아야 되겠지마는, 그러나 또 위태한 일이니 후에는 그 일을 조심하오."





      참고로 이성계의 호랑이 사냥은 굉장히 젊은 시절부터 취미(...)로 이뤄졌었는데 한번은 호랑이가 이성계가 탄 말 궁둥이에 올라탈려고 하자 순간적으로 호랑이의 얼굴을 때려서 떨어뜨린 뒤에 호랑이가 정신을 못차리는 틈을 타서 곧바로 활로 쏴 죽인적도 있었다.

      태조가 소시(少時)에 산기슭에서 사냥을 하다가 멧돼지 한 마리를 쫓아 화살을 시위에 대어 쏘려고 했으나, 갑자기 백 길[仞]의 낭떠러지에 다다르니, 그 사이가 능히 한 자[尺]도 되지 않았다. 태조는 말 뒤로 몸을 빼어 섰고, 멧돼지와 말은 모두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졌다. 어느 사람이 고(告)하기를,


      "큰 범[虎]이 아무 숲속에 있습니다."


      하니, 태조는 활과 화살을 쥐고, 또 화살 한 개는 허리 사이에 꽂고 가서 숲 뒤의 고개에 오르고, 사람을 시켜 아래에서 몰이하게 하였다. 태조가 갑자기 보니, 범이 자기 곁에 있는데 매우 가까운지라, 즉시 말을 달려서 피하였다. 범이 태조를 쫓아와서 말 궁둥이에 올라 움켜채려고 하므로, 태조가 오른손으로 휘둘러 이를 치니, 범은 고개를 쳐들고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하는지라, 태조가 말을 돌이켜서 이를 쏘아 죽였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31번째기사 태조가 용맹스럽게 멧돼지·범 등을 사냥하다


      그 밖에 3마리를 죽이지 않고 떨어뜨리기만 한적도 있었다.

      우인열(禹仁烈)이 일찍이 태조를 저사(邸舍)에서 알현(謁見)할 적에, 태조가 서청(西廳)에서 마주 앉았었는데, 차양(遮陽)을 쳐다보니 쥐 세 마리가 문미(門楣)에 붙어 달아나는지라, 태조가 아이를 불러 활과 고도리(高刀里) 3개를 가져오게 하여 이를 기다리니, 쥐 한 마리가 돌아와서 문미(門楣)를 지나갔다. 태조는 말하기를,


      "이것을 맞히기만 할 뿐이요 상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면서 마침내 이를 쏘니, 쥐와 화살이 함께 떨어졌는데 과연 쥐는 죽지 않고 달아났으며, 남은 두 마리의 쥐도 또한 이와 같았다.




  • 우왕 시절에도 이성계의 활 실력은 여전히 백발백중 수준으로 이는 실록에서도 정확히 기록으로 남아있다.


    • 우왕이 일찍이 행궁(行宮)에서 여러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는데, 과녁[的]은 황색 종이로써 정곡(正鵠)을 만들어 크기가 주발만 하게 하고, 은(銀)으로써 작은 과녁[小的]을 만들어 그 복판에 붙였는데, 직경(直徑)이 겨우 2치[寸] 정도이었다. 50보(步) 밖에 설치했는데, 태조는 이를 쏘았으나 마침내 은 과녁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였다. 우왕은 즐거이 구경하기를 촛불을 밝힐 때까지 계속하였으며, 태조에게 좋은 말 3필을 내려 주었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71번째기사 태조가 자유 자재로 활을 쏘다
  • 거기다 배(梨)만한 나무공을 공중에서 쏘아 맞췄다는 기록도 실록에 남아있다.


    • 태조는 평상시에 나무공[木毬]을 만드니 크기가 배[梨]만 하였다. 사람을 시켜 5, 60보(步) 밖에서 위로 던지게 하고는 박두(樸頭)로 이를 쏘았는데 바로 맞혔다.



      - 태조실록 1권, 총서 75번째기사 나무공을 만들어 박두로 쏴 맞추다
  • 그 외에 의형제인 이지란을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47] 여진족과 싸울 때도 여진족들의 화살을 말 위에서 모두 피해 냈다고 한다. 또한 이지란이 길거리를 걷는 아낙네의 머리에 얹은 물동이에 구멍을 내자 솜을 끼운 화살을 쏴 그 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야사도 아니고 정사에 나온다.
  • 야사에는 화살 3발을 한 번에 쏴 모든 과녁에 명중, 그것도 마상에서 해냈다는 기절초풍할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인 만큼 반 정도는 깎아서 접수하도록 하자.

2.11. 무장 이성계의 세력

파일:이성계 휘하 여진부족2.png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의 벼슬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였으며, 그 뒤를 이은 이성계의 벼슬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겸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였다. 일단 금오위상장군은 고려군 2군6위 중 개경 방어를 담당하는 금오위의 수장으로 오늘날의 국군의 4성장군 7명에 해당되는 고려군 8대 상장군 중 하나인 최고위 중앙군직이고, 동북면상만호는 내무군인 순군만호부 소속으로서 동북면 방면의 수장이니, 대강 '4성장군 수도 방어군 총사령관 겸 내무군 동북관구 사령관' 정도 되겠다. 물론 이는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태종 시기에 남아 있던 이성계 직할 사병인 '가별초'가 5백호에 달했다는 기록을 보면 상징적으로라도 이런 최고위 군직을 줄수밖에 없을 정도로 동북면의 상당한 토지와 인구를 '봉건 영주'처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8]

그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개경 탈환에서 이성계가 동원한 사병2,000명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그 만한 사병을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성계의 사병 규모는 양적으로 상당한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정예였는데, 이성계는 외적과 싸울 때도 아낌없이 자신의 사병을 동원했었으며 이들은 이성계의 화려한 전공을 뒷받침하는 정예병이었다. 그냥 정예 보병 정도도 아니라 이성계의 개인 사병 집단 대부분은 수천 명의 정예 기병이었다. 또한 이성계는 동북면 - 동만주 지역의 수많은 여진족 세력을 거느린 일대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전장에 이성계의 최대 전공 중 하나인 황산대첩에서처럼 여진족이 포함된 기병[49]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이성계 휘하 무장들의 출신을 살펴보면 이성계가 적접 다스리던 고려인 농부, 평민들 뿐만 아니라 여진족, 몽골인들이 모두 잡다하게 섞인 다민족 혼성 부대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런 정예 사병인 이성계 군단은 전투전에 대라(大螺)를 부는것이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는데 적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 걸 알고 두려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이 고려 내에서 매우 드높았다. 자세한 내용은 이글을 참고하자

이성계의 정예 부대인 가별초는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왕자들에게 분배되었다가, 태종 시기에 완전히 혁파되어 관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성계의 가산은 조선 왕실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왕들의 비자금내탕금으로 사용되었다. 정도전 등은 이 재산도 국고로 귀속돼야 한다고 했으나 태종이 정도전을 제거한 후 이 가산은 왕의 개인 재산이라고 선포했다. 명목상으로 조선의 재산은 모두 왕의 재산이었으나 사실 세금 등을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50][51] 반면 이 가산은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왕들은 내탕금을 사용하여 개인적으로 절을 짓거나 잔치 등을 여는데 활용하였으며,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거나 땅을 사들여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 때 함경도 땅의 3분의 1이 이성계의 개인 재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그래도 함경도의 대부분이 길주분지를 제외하면 경작이 불가능한 개마고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성계가 대한민국 전도에서 보이는 함주평야나 영흥평야를 통째로 가지고 있었던 거나 다름이 없었으니 가히 대재벌이 따로 없었다 하겠다. 이는 나중에 별도의 내시 기관인 '내수사'가 관리하였다. 내수사에서는 이 땅을 소작하거나, 소출로 이자 놀이를 해 재산을 늘렸는데 소작료와 이자가 시중에 비하여 낮았으며[52]이 관료들의 수탈도 없었기에 백성들은 앞다투어 내수사에 소작을 하거나 돈을 빌리려 하였다.

또 그는 동만주 북방 여진족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일의 청 태조인 누르하치의 6대조인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도 이성계의 부하였을 정도. 당시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글을 참고하자. 단, 중간에 나오는 여진족 부족 지도는 링크된 본문에서도 조금 언급하지만 모두 이성계에게 완전히 복종한 부족들은 아니며, 지도에 나타난 지역이 모두 이성계의 땅인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영향력이 크든 작든 일단 미치기는 하는 지역을 뭉뚱그려서 모두 포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저 지도를 잘못 해석하면 마치 이성계가 현대의 간도 북부와 연해주 지역 일부까지 지배한 인물로 오해할 수 있다. 이성계가 당대 만주 최고의 용사이면서 여진족에게도 통크게 베풀었기 때문에 동만주 여진족 족장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큰형님 취급을 받은것일 뿐, 결국 이성계가 동족인것도 아니고 여진 부족들을 규합한 것도 아니었기에 만주 유목세계의 지존인 한(카간)으로는 대우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냥 '고려놈이긴 하지만 존나 짱쎈 양반이 더이상 개기지만 않으면 한턱 크게 쏴준다는데 받들어주고 떡고물이나 먹자' 정도 마음으로 따른 것 뿐이다.

3. 군주 시절

3.1. 새 왕조의 창건자가 되다

왕이 된 후의 평가는 업적은 많되 후계를 잘못 세우는 결정적인 실수를 한 왕으로 요약된다. 행정이나 국방 등 정책적으로는 정도전, 조준을 재상으로 세우고 고려 말 전시과의 붕괴와 재정파탄을 가져온 권문세족들의 토지겸병 문제 같은 여러 문제들을 과전법 같은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통해 해결하였고 국방에도 힘써 고려 말을 지옥으로 만든 왜구들의 대규모 침략대마도 정벌 등을 통해 사실상 대규모 침략은 조선 건국 이후로는 완전히 종식시킴으로서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

조선 개국을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일부 있는데,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 후 이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뜻을 드러낸 때는 1380년, 이성계가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임명된 때는 1383년,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서 처음 만났을 때는 1383년, 즉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는건 근거도 없고 억지스럽다. 이성계의 정치 스타일은 불도저처럼 유능한 주변 재상들을 자신의 막강한 권력으로 팍팍 밀어주는거지 바지사장이나 하는 스타일은 절대로 아니었다. 보스 기질도 충분했고 한 나라의 창업자답게 친화력과 포용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정몽주에 대한 처우도 그렇다. 태종이나 다른 가신들이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말했지만 태조는 정몽주와 인연으로 신진 사대부와 연결된 것이며 정몽주와 정치를 논하거나 술자리를 갖는 일등이 잦았고 그래서 끝까지 정몽주를 포용하려고 했다. 근데 그 정몽주는 이성계 주변 사람들 죽이려고 했다. 여러 기록이나 태조의 말로 미뤄 보면 정몽주 정도는 자신이 충분히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정몽주와 태조는 친밀한 관계여서 그런 탓도 있었겠지만.[53] 또한 자기 주관도 너무나 강한 나머지 한양 천도도 자신의 강력한 입김으로 강행했으며 1년 만에 도성의 공사를 완료했을 정도였다.

태조 치세 중에는 제3차 요동정벌이 제기되었던 적이 있다. 명 실록에는 주원장"조선의 20만 강군이 요동을 치면 맞설 방법이 없다"는 비관적인 보고를 받고 우려하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태조는 요동 정벌 자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요동 정벌을 반대한 조준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태조는 제1차 요동정벌에서 요동성 함락에는 성공하였지만 요동 공략 후에 식량 부족으로 후퇴하기도 했고, 제2차 요동정벌 때는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요동 정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또 당시 조선도 실제로 동원 가능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터이므로 학자들 가운데서도 진짜로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하려고 했다기보단 사병을 억제하고 중앙 군권을 강화하려 한 시도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실제 영토로 삼으려면 백성들이 거주해야 하는데, 세종 대에 4군 6진을 개척하며 백성들을 이주시키자, 춥고 척박한 곳이라며 안가려고 자해하는 이들까지 있었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당시 조선은 고려 말부터 홍건적, 왜구, 여진족 등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고, 주원장이 저 말을 하기 고작 7년 전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로 당시 조선이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명 정도에 불과했다. 제2차 요동정벌 즉 위화도 회군 당시 병력 5만명 중에서 보급병력이 2만이고, 실제 전투병력은 3만이다. 게다가 문제는 주원장이 저 말을 하는 당시에도 한반도 남부와 명나라 동남부는 왜구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 주원장 본인의 문서에도 나오지만 주원장 역시 조선을 칠 마음 같은 건 없이 그냥 협박질을 한 것에 불과했으며 당시 일본에도 조선이랑 비슷한 수준의 협박질을 했다가 반박을 받은 일이 있었다. 태조 시절 조선과 명의 대립은 양측 다 블러핑 성격이 강했다는 말.

3.2. 2번의 참극과 쓸쓸한 말년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태조실록(太祖實錄)』, 권14, 7년 8월 26일 기록 中. 정도전박위가 참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매핵기 증세를 호소하며.
하지만 말년에는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데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1차 왕자의 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킨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밀려나, 영락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3.2.1. 성급한 후계 결정

태조가 이렇게 후계 문제를 성급하게 결정하게 된 원인으로는 당시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 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맺은 자녀들의 혼인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맏이 방우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여기에 반이성계파의 거두가 되는 이색[54]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 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아들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55][56]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후실(숙의 지씨, 성빈 지씨)로 들였다. 3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 최씨로 바로 그 최영[57] 인척 관계에 있다. 4남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5남 방원과 6남 방연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들과 혼인했는데, 민선과 민제는 둘 다 황려 민씨(여흥 민씨)로 재상지종으로 꼽힌 유력 권문세가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혼인했고 방번공양왕의 조카사위이자 변안열의 사위이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 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58] 이러한 혼맥은 변방 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 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린 막내 아들 방석만이 고려 구 세력과의 혼맥이 없었기에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다.[59]

다만 이 구세력과의 결별설은 어디까지나 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아래에서도 다시 검토하겠지만 신의왕후 소생들이 권문세가에게 장가를 들었다면 이방석은 아예 권문세가의 외손이라 딱히 명분 면에서 우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곡산강씨의 원류인 신천강씨 집안은[60] 원 간섭기에 새롭게 일어난 권문세가도 아니라 무려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진짜배기 명문가였다.

게다가 바로 위에 나왔듯이 세자의 친위세력으로 이성계가 밀어준 이방번과 이제 역시 구세력 걸고 넘어지면 할 말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쪽은 공양왕의 조카사위고 한쪽은 이인임 조카다. 이방석이 설령 처가를 부유 심씨 집안으로 갈아치운들 여전히 구세력과 혼맥으로 얽혀있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일각에서 주장하는대로 유씨에게 누명을 씌워 폐출시키고 이방석의 처가를 갈아줌으로서 구세력과의 결별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고작 한 살 차이인 형 방번 역시 그리 할 수 있었다. 누나 경순공주도 마찬가지로 이혼시키고 다른 신흥 신진사대부 집안의 매형을 만들어주는 것이 이런 목적 설정에 훨씬 부합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움직임은 전무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먼저 태조가 신덕왕후의 첫 아들인 이방번의 세자 책봉을 밀고, 조준과 정도전을 포함한 신료들이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배극렴이 총대메고 나서서 이방번 대신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해 일이 마무리된다.[61][62] 태조의 머릿속에서는 애초에 고려왕실과의 연계성 문제는 고려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방번을 세자 후보에서 배제한 표면적 이유가 '성품이 경솔하고 방탕해서'였던 것을 보면 태조도 이 문제를 지적받고 약간은 당황했던 정황이 보인다. 만약 보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 하에 이방번을 배제시켰다면 이방우의 사례처럼 보다 그럴듯한 미담을 꾸며 이방석의 책봉 명분을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다.

3.2.2. 책봉의 본질

고려에서는 첫째 부인 소생이나 둘째 부인 소생이나 모두 다 적통이었다.[63] 먼저 들어온 사람이라고 적통, 어느 어머니의 신분이 더 높다고 적통 그런 거 없다. 게다가 이름을 보았을 때 '계'자 돌림임을 알 수 있다. 이원계와 이성계의 사촌의 이름을 보면 마찬가지로 '계'자 돌림인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치면 이화는 몰라도 최소한 이원계는 적자라는 말이다. 하지만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성계를 제외한 두 사람은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왜곡[64]이다. 아마도 고려 시기에는 원나라몽골 유목 민족의 풍습으로 여러 부인을 두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려 시대에 지방 호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호족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수도에 소환해서 생활하게 하는 제도 때문에 고향의 아내인 '향처'와 수도의 아내인 '경처'가 따로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것이 후일에 그런 제도들은 사라진 뒤에 이해 부족으로 그렇게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65][66]

결국 태조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성공을 뒷바라지해준 사랑하는 신덕왕후의 소생을 세자로 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북면 변방 출신인 이성계가 개경에 자리를 잡고 고려 최고의 권신에 이어 왕 자리까지 오르는데는 경족 처가인 곡산강씨 집안의 조력이 절대적이었을수밖에 없으며, 그 곡산강씨 집안은 이성계에게 귀한 딸을 내준것만이 아니라 이성계의 사촌누이들[67]에게도 연달아 장가를 드는 등 전주이씨 가문의 개경 진출에 그 누구보다도 큰 힘을 주었으니 적어도 신덕왕후가 살아있는 한은 차라리 큰왕자들을 숙청하면 숙청했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아달라는 신덕왕후, 나아가 곡산강씨 가문의 요구를 절대로 거절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방석은 태조 자신이 각별히 총애하던 현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 정도 예우하긴 하였으나 죽은 그녀의 권위가 살아있는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 부인들이 신덕왕후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68] 알 수 있듯 신덕왕후의 권위는 공인되어 있었다. 태조 입장에선 왕의 아들이자 살아 있는 왕비의 아들인 방석의 세자 책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 쪽이 진실이건, 중요한 것은 태조의 생각과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물론 다수의 여론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철저한 토사구팽이었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고, 즉위 과정까지 왕자들의 공이 매우 많았음에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문제는 왕자들과 혼인한 고려의 구세력들은 조선에서도 여전히 중추에 있었다는 것이다.[69]

애초에 다 떠나서 세자인 이방석이 책봉될 당시 10살이었다. 애를 낳을 수 있는 나이가 보통 15세부터, 성인은 20세부터임을 감안하면 10살짜리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다는건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더욱이 개국 초라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화에서는 더더욱 그랬다. 물론 결과적으로 태조가 1408년까지 살아 장수했기에 살아서 즉위했다면 20대 중반이라 안정적인 계승이 가능했지만 태조의 사망 당시 나이는 72세로 조선왕들 중 2번째로 장수했으며 그 때 기준으로 70이면 꽤나 장수한 나이라 태조가 70넘게 살아있을 줄 예상할 수 없다. 아무리 양보를 해줘도 태조가 10년을 재위할 보장이 있어야 고를 수 있는 선택지인데 태조는 즉위 당시 57세로 그럼 10년 재위하고 죽는다면 67세(...) 당시로선 60 넘으면 언제 죽어도 딱히 이상할 거 없는 나이니 태조의 선택지는 너무 안일했다.

3.2.3. 기타 가설과 신덕왕후의 사망

일각에서는 이성계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몽골, 여진족 등 북방 유목 민족에서는 큰 아들부터 재산의 일정 지분을 주고 차례로 독립시키고 막내가 끝까지 본가에 남아 부모를 모시다 부모님 사후 나머지 재산을 상속 받아 본가의 후계자가 되는 풍습이 있는데.[70] 동북면에서 성장한 태조가 그 지역의 여진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들의 풍속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태조가 세자로 책봉하려던 아들은 막내가 아닌 방번이었고, 배극렴의 간언을 받아들여 결정을 바꿨기 때문에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치적 이유 등으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을 배제한 후, 신덕왕후의 장남인 방번을 먼저 염두에 뒀다는 점에서 말자상속의 원칙으로 후계자를 세운 것은 아니다.[71] 더불어 태조는 다시 고려인으로 귀부하기 위하여 유목 민족에 영향을 받은 풍습을 완전히 끊어버린 인물인데 느닷없이 왕위 계승 문제에 유목민 풍습을 끌어들이는 것은 뜬금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반발속에서 1396년 6월 세자 이방석의 생모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뒷배가 부실해졌다. 태조는 세자 이방석의 권위를 위해 일부러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을 한양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빈으로 책봉하고 세자 이방석과 현빈 심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72]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군권과 조정 대권이 일부 종친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반대파 입장에선 세자와 왕손이 장성하고 기반이 완전히 날아가기 전에 거사해야 한다는 인식을 주게 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종친, 구 세력들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3.2.4. 분봉 조치와 반발

태조도 나름대로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이긴 했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방과, 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 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73][74]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중 이성계에게 있어 가장 상징적인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 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75] 방번이 넘겨받는다. (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등 급진 정책에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왕실 집안 싸움이 되다보니 병사들도 혼동이 왔고 아우 이화나 조카 조온, 의형제 이지란 등 친위 세력이 되어 줘야 할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되었다.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어도 세자의 동복형이니 세자의 편을 들어줄거라고 믿었던 방번은 세자 자리를 뺏긴 탓인지 친동생의 위기를 수수방관해 버렸고 이화의 교란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세자를 지키려 했던 이제까지 행동에 나서지 못하면서 방석을 지킬 방패는 한없이 얇아져 버렸다.[76]

그래도 태조 본인이 워낙에 무력 만렙인데다 현존 최고의 지휘관이었으며, 또 당시에도 전주 이씨 문중과 동북면 가별초의 최고 대빵이었던 태조의 힘은 당연히 막강했기 때문에, 태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왕자든 종친 나부랭이든 감히 태조의 결정에 반기를 들지 못할 것이었다. 아무리 태조의 나이가 많다고 해도 원체 강건한 무골이기 때문에 세자가 보위에 오를 때 까지만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원래 건국왕이라는 게 그 이름값이 어마어마하기에 본인만 멀쩡하다면 결코 덤빌 수 없는 권위를 갖는 법이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타이밍 좋게 태조가 병환으로 인해 거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두 아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난리는 이성계의 용상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하루아침에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해 자신의 수족 같던 사람들과 이방석과 이방번 두 어린 아들이 목숨을 잃는 광경을 그대로 접할 수밖에 없게 된다.

3.2.5. 태조의 건강 상태

병환설이 조작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작이 아니고, 실제로도 아닐 가능성이 높은 정황 증거들이 있다. 조선 건국부터 세자 책봉까지 행보를 보면 50대의 나이로 위화도 회군을 시작해 제대로 쉴 틈도 없이 달려왔다. 그 기간동안 태조가 겪은 일들을 보면 조선 건국 불과 10개월 전 첫 번째 아내인 신의왕후가 세상을 떠났다. 그 와중에 이성계는 여전히 정권을 장악하며 차근차근 조선을 건국하는 발판을 마련해갔지만 당연히 고려에 충성하거나 권력을 빼앗기고 싶지 않은 세력들이 계속 위협해왔고, 이성계는 그들의 도전을 물리쳐왔다. 마침내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 건국을 했지만 외부적으로는 고려 때부터 분쟁이 있던 명나라와의 대립, 내부적으로는 여전히 남은 고려충성파 잔당 소탕, 거기에 히스테릭을 일으켜 저지른 왕씨 몰살, 새로운 수도를 정하기 위한 지역 탐색, 명나라의 도발에 신경전을 펼치며 기어이 태조 본인과 정도전의 주도로 요동 정벌을 다시 재개 준비, 세자 책봉, 신덕왕후가 갑자기 사망하는 등 실로 굵직한 일들이 연속해서 터졌다.

그리고 난이 펼쳐진 시기는 음력 8월, 양력 10월의 가을인데 가을날씨의 쌀쌀함은 두 말하면 잔소리고, 설상가상으로 지속적인 폭우와 우박까지 내렸다. 이때 태조는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신덕왕후를 묻을 장지를 찾느라 수도권을 돌아다녔다. 이 무렵의 태조는 60대인데 그동안 겪은 일들로 적지 않게 심신이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은 60대 노인이 험한 날씨에 여기저기 다녔으면 병에 안 걸리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커다란 중병이 아니라 며칠 요양만 하면 완쾌될만큼 단순 감기에 걸렸거나 태조의 신체능력이 정정했기에 기적적으로 잔병에 걸린 정도였을 것이며, 국왕이 병에 걸렸는데 정도전 등이 느긋하게 술을 마셨다는 건 태조의 몸상태가 심각하지는 않았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분명 정도전 일파는 태조의 몸상태를 확인하러 문병왔을 테고, 태조가 직접 자신은 며칠만 쉬면 나을 거라고 안심시키고 돌려보냈을 확률이 높다. 몸상태가 심각했다면 오히려 정도전은 경계를 철저히 했을 것이다. 또한 태조가 멀쩡했다면 아무리 명분을 내세웠어도 엄연히 왕과 국가에 반역을 일으킨거다. 그리고 이렇게 반기를 들면 오히려 태조는 그렇지 않아도 그냥 놔두기 찜찜하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정리할 명분이 생겨 몸소 활을 챙겨들고 이방원 세력을 인간 과녁으로 삼아 모조리 꿰뚫어버리고도 남았다. 굳이 활을 쥘 필요도 없이 맨몸으로 멀쩡히 걸어나와있으면 과거에는 자신들을 지휘하던 장군이자 현재의 건국왕에게 감히 목숨걸고 개기려는 병사들보단 얼른 무릎을 꿇고 자비를 구하는 병사들이 대다수일 터이다. 그렇기 때문에 1차 왕자의 난은 감정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여 빈틈을 노리고 벌인 일인데 태조의 상태도 제대로 안 살피고 그냥 대뜸 들이닥쳤을 리는 없다.

3.3. 최후와 건원릉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오늘날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만 오래 살기를 원하였더니 이제 70이 지났는데도 아직 죽지 않는다."
- 태종실록 태종 6년(1406년) 4월 4일, 연회 중 태상왕 태조의 발언

아들을 둘이나 보내버리고[77]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꼴도 보기 싫었는지, 이성계는 1401년 11월 한양을 탈출하여 소요산에 위치한 이태조 행궁으로 행차한다.

참고로 이 1차 왕자의 난부터 태종 즉위 사이에 이성계가 완전히 몰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행보가 둘 보였다. 하나는 양위 반년만에 개경으로 재천도하게 되자 떠나기 전날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을 찾았다가 아무래도 고생고생해서 마련한 새 수도에 강씨가 묻혀있는 곳을 떠나기 싫었던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게 나만의 뜻이더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의논해서 내린 결정이었지 않느냐!" 라며 고함을 쳤는데 아무런 호응이 없었다는 기록, 다른 하나는 이것보다 이후로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이 세자가 된 이후인데 하루아침에 모든걸 잃다시피한 상황에서 권력이라도 자기 손에 있는걸 확인해보기 위함인지 아니면 그들이 괘씸했는지 대뜸 태종에게 "조영무, 조온, 이무를 두고 조영무와 조온은 아무것도 없던 녀석을 내가 키워주었는데 지난 난리 때 날 배신하고 네게 붙었지 않느냐? 이무 그 놈은 누가 이길지 간이나 보던 놈 아니냐? 그런데 이놈들이 날 배신했듯이 너도 배신하리란 보장이 없진 않겠지? 내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니 이놈들 얼렁 쫓아내라"고 말했는데 일단 태종이 태조의 체면을 챙겨주기 위해 정종에게 청하는 형식으로 셋 다 유배를 보내긴 했지만, 유배령을 내린 직후에 사면하고 모두 얼마 안가 관직에도 복귀함으로써 오히려 태조의 영향력이 미비함만 보여주고 말았다. 다만 이중에 이무는 민씨 형제들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나중에 태조가 죽고나서 1년 뒤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숙청될때 연루된 옥사를 겪고 처형당한다.

함흥차사라는 속담은 태조가 이태조 행궁에 머무르던 일에서 비롯되었다. 조사의의 난이 끝나고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기 전 이방원이 이성계를 모시기 위해 여러 사람을 함흥부에 차사로 보냈으나 이성계가 모두 활로 쏴서 죽여버려 돌아오지 못하자 무학대사를 보내 설득하였고, 무학대사는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이성계가 뜻을 꺾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야사에서 비롯되었으며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이지만 정사는 아니며 사실 함흥부에 차사로 갔다가 이성계의 활 맞아 죽은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 함흥차사로 갔다가 죽었다는 인물 중 송유나 박순은 조사의의 난에 휩쓸려서 죽었고, 성석린은 애초에 함흥부에 간 적이 없다. 이렇게 죽은 사람은 없는데, 반대로 차사로 갔다가 살아왔다는 사람은 무학대사 제외하고도 많다. 애초에 태종이 차사로 보낸 사람이 엄청나고, 이중 반란에 휩쓸린 사람 제외하고는 다 살아왔다. 아무리 태조가 태종에 대한 증오가 여전하던 시점이라도 감정적으로 아무나 막 죽여댈만큼 성격이 뒤틀렸거나 분노로 이성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을 리 없으며, 부자의 대립에 직접적으로 관여되지 않은 차사를 마구 죽여대면 여론이 불리해질 것이 뻔한데 스스로 궁지에 몰리는 짓은 하려 들지 않았을 터다.

다음해인 1402년 이성계의 묵인 하에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인 왕의 친정이기도 한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조사의의 난이라고 불리지만, 실질적 주동자는 이성계라는 게 중론이다. 건국왕인 이성계가 배후이니만큼 조사의의 반군의 기세는 컸지만 이미 자신의 기반을 다져놓은 이방원이 이끄는 관군은 숫자와 질 모두 앞서 결국 손쉬운 승리를 거둔다. 결국 허무하게 자신의 마지막 전쟁을 아들에게 패배한[78] 이성계는 그 해 12월 개경으로 돌아와 아들과 화해하게 되며, 그 뒤 절이나 온천을 유람하며 여생을 보내다가 풍질(뇌졸중)에 걸려 앓다가 결국 1408년 음력 5월 24일 파루시간[79] 얼마 뒤에 창덕궁에서 생을 마감했다.
태상왕(太上王)이 별전(別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임금이 항상 광연루(廣延樓) 아래에서 자면서 친히 진선(進膳)의 다소(多少)와 복약(服藥)에 있어서 선후(先後)의 마땅함을 보살폈는데, 이날 새벽에 이르러 파루(罷漏)가 되자, 태상왕께서 담(痰)이 성(盛)하여 부축해 일어나 앉아서 소합향원(蘇合香元)을 자시었다. 병(病)이 급하매 임금이 도보(徒步)로 빨리 달려와 청심원(淸心元)을 드렸으나, 태상이 삼키지 못하고 눈을 들어 두 번 쳐다보고 승하하였다. 상왕(上王)이 단기(單騎)로 빨리 달려오니, 임금이 가슴을 두드리고 몸부림을 치며 울부짖으니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치상(治喪)은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의하고, 봉녕군(奉寧君) 복근(福根)으로 하여금 전(奠)을 주장하게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삼가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 《동한지(東漢志)》의 국휼고사(國恤故事)를 상고하면, ‘백관(百官)이 5일에 한 번 회림(會臨)하고, 고리(故吏)·이천석(二千石)·자사(刺史)·경도(京都)에 머무르고 있는 각 지방의 상계 연리(上計掾吏)는 모두 5일에 한 번 회림(會臨)하고, 천하(天下) 이민(吏民)은 발상(發喪)하여 3일을 임(臨)한다.’ 하였고, 또 대명(大明) 영락(永樂) 5년 7월 초4일 황후(皇后) 붕서(崩逝) 때의 예부 상례 방문(禮部喪禮榜文)을 상고하면, ‘경사(京師)에 있는 문무 백관(文武百官)은 본월(本月) 초6일 아침에 각각 소복(素服)·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를 갖추고 사선문(思善門) 밖에 다다라,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봉위례(奉慰禮)를 행하고, 초8일 아침에 각 관원(官員)은 소복(素服)으로 띠[帶]와 효복(孝服)119) 을 가지고 우순문(右順門) 밖에 이르러 착용하고, 성복(成服)을 기다려서 사선문(思善門)에 들어와, 곡림례(哭臨禮)가 끝나면 효복(孝服)으로 바꾸어 입고 봉위례(奉慰禮)를 행하고, 이것이 끝나면 각각 효복(孝服)을 가지고 나간다. 초9일·초10일도 예(禮)가 같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대행 태상왕 전하(大行太上王殿下)께서 5월 24일에 승하하시었으니, 즉일(卽日)로 각사(各司)에서 소복(素服)·흑각대(黑角帶)·오사모(烏紗帽)를 갖추고 곡림 봉위(哭臨奉慰)하고, 26일에 이르러 각각 효복(孝服)을 착용하고 곡림 봉위하며, 28일 즉 승하하신 후 제5일에 이르러 시왕(時王)의 복제(服制)에 따라 삼차(三次)의 곡림 봉위례(哭臨奉慰禮)를 행하게 하소서."

하고, 예조(禮曹)에서 또 아뢰었다.

"경외(京外)의 음악(音樂)을 정지하고, 도살(屠殺)·가취(嫁娶)를 금하고, 대소례(大小禮)와 조시(朝市)120) 를 정지하고, 제3일에 이르러 대신(大臣)을 보내어 종묘(宗廟)에 고하소서."
- 태상왕이 별전에서 승하하시다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이방원이다.[80] 다른 아들인 이방과도 소식을 듣고는 단기(單騎)로 빨리 달려왔지만 이미 도착했을때는 아버지가 승하한 직후였다. 죽기 직전에 이성계는 이 심해서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이를 본 태종이 청심원을 직접 아버지에게 올렸지만 이성계의 기력이 다했는지 이를 삼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서는 '눈을 들어 왕(태종)을 다시 쳐다보더니 이에 승하했다'고 이성계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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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81] 이후 역대 조선 국왕들의 왕릉 봉분이 잘 정돈된 것에 비해 태조의 건원릉은 억새풀이 무성하여 매우 투박한데, 어떻게 보면 무덤 주인 이성계와 잘 부합한다. 건원릉의 상징이 되면서 억새풀 벌초는 1년에 딱 한 차례만 한다. 동구릉에 가면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 없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동구릉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라서 '건원릉은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이곳에서의 휴식은 자제해 주세요'라는 안내판까지 있다.

태조 이성계의 왕릉이니만큼 야사도 존재한다. 야사 내용들을 보면 태조가 내가 죽으면 고향 함흥부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아들이자 3대 임금인 태종은 나라의 창업자인 자기 아버지를 동북면에 위치한 함흥부에 묻는 것은 왕실의 위엄이 서지 않고 제사도 힘들다 생각해서 도성 근처에 모시고자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불효를 저지르게 되니 아예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태조의 능에 심어놓았다.' 부터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태종의 계모 신덕왕후를 그리워하여 신덕왕후의 묘가 있는 정릉에 합장되기를 원했으나 생전 신덕왕후와 사이가 나빴던 태종은 차마 그 말을 따를 수 없이 새로운 묏자리를 알아봤고,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죄책감에 평소 향수병이 있던 태조를 위해 함흥에서 자라나는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심었다는 내용 이렇게 존재한다. 사실 조선에서 왕릉은 왕이 궁궐에서 하루만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를 벗어나서 조성할 수 없으니 즉 왕은 궁궐을 비울 수가 없다. 그래서 왕릉이 아무리 멀어도 경기도 권역에 존재한다. 원칙은 그랬지만 외부에서 하루를 넘기는 일이 생기면 임시 궁궐인 행궁(行宮)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일단 어느 쪽 내용이던 한양(지금의 서울)과 함흥은 거리가 가까운 건 아니니 그냥 파서 가져오면 가져오는 시간동안 억새가 말라 죽으니 이를 고민하던 태종이 한양에서 함흥까지 사람들을 일렬로 줄줄이 세워 릴레이 형식으로 억새를 운반해 건원릉에 심었다고 전해진다.[82]

또 다른 야사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한양이 왜군에 의해 함락당했을 때 왜군은 건원릉에 불을 질렀으나 정자각에서 불어온 바람에 의해 불이 꺼지자 왜군이 몇 차례나 재방화를 펼쳤음에도 계속 실패하여 결국 방화를 단념했다는 야사를 비롯해서 여러 야사가 전해진다.

[1]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을 말한다.[2] 마찬가지로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부 역시 풍패지향으로 대접받았다.[3] 다만 이때 형들과 함께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다. 자세한 사항은 이린 문서 참고.[4] 알다시피 문극겸은 1170년에 일어난 무신정변의 참화속에서 살아남은 이후, 여러 요직을 꿰차며 조정에서 그 명망이 높아져갔다. 무신정변의 주동자들 중 한 명이었던 이의방의 추천을 받아 고위직에 올랐을 정도였다. 이를 보면 일찍부터 이의방의 전주 이씨 집안과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 현대인의 감각으로는 당연히 중앙정부에 대드는 토호가 문제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여몽전쟁 당시 우봉 최씨 정권의 행보는 그야말로 직무유기를 넘어서 이적 행위의 수준이었고, 대부분의 전쟁은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 치렀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중앙정부의 관리는 당연히 이중수탈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6] 훗날 고려 원종(元宗)[7] 斡東, 알동이라고도 읽는다.[8] 千戶長: 밍간[9] 원나라의 지방관리[10] 이렇게 부여받은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직위는 이후 1290년 옷치긴 울루스의 내분으로 이안사의 아들인 이행리(李行里·익조)가 오동의 기반을 상실하고, 함흥 평야로 이주한 이후에도 이행리의 증손자였던 이성계때까지 5대에 걸쳐 계속 세습되었고, 이후 전주 이씨 가문이 주변 지역들을 자신들의 영향권 안으로 흡수하고, 계속 군벌로서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11]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 교수가 제자들과 함께 11년에 걸쳐서 번역할 만큼 중국 고증사학의 명저로 꼽힌다.[12] 북방 뿐만 아니라 경주 황룡사의 9층 목탑이 불에 타 소실된 것도 이 시기였다. 즉 온 나라가 혼란에 휩싸였다.[13] 알동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 보인다.[14] 사실 고려 왕조가 원나라에 반(半)복속되고, 충렬왕 자신도 장인인 원세조에게 뭐라 끽소리 못하는 상황에서 과거 몽골에 항복한 고려인에 대해 무슨 소리를 할 수 있었겠는가. 후대의 폭군인 충혜왕은 원나라 사신에게 발로 마구 차이면서 맞기까지 했다.[15] '도조'로 추존된다.[16] 개원로(開元路)는 요녕성 개원현에 있었던 원나라의 행정단위 '로(路)'를 말한다. 개원로는 쌍성총관부 등을 관할했다. 북송(北宋)에서는 기존 주현제(州縣制)보다 더 효율적인 행정단위가 필요했고, 여러 주(州), 현(縣)을 관할하는 로(路)를 설치했는데, 원나라에서 더욱 발전시켜 주요 도시 여러 곳을 로(路)로 삼아 통치했다.[17] 황제가 아닌 왕이라고 하는 것도 엿보인다.[18] 宣尼. 공자(孔子)[19] 야별초, 삼별초 등 '별초'는 부대라는 명사니까, 가병, 가문병, 사병이란 뜻이다.[20] 혹은 더 노골적으로 무너지려는 집에서 상태가 뛰어나 몹시 탐이 나는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꿨다는 버전도 있다. 같은 원리로 이쪽도 임금 왕(王)자가 된다.[21] 닭울음소리에 대한 내용은 고려 현종이 꾸었다는 꿈에도 나온다.[22] 원나라에 남아있는 가족들에 대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이름 대신 선생(先生), 원수(元帥) 등의 호칭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파두반(破頭潘)도 적의 목을 잘 베었다는 뜻의 별칭으로 본명은 반성(潘誠)이다. 그래서 주원수(朱元帥)를 훗날 명(明) 태조가 되는 주원장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때 주원장은 동계홍건군(東系紅巾軍) 강회군(江淮軍) 소속으로 그럴 가능성은 낮다.[23] 삼선과 삼개는 이성계의 고종사촌이다. 태조실록 총서에 의하면 다루가치 김방괘가 도조의 딸과 혼인하여 삼선과 삼개를 낳았다고 하는데, 도조의 딸 중 김씨 성을 가진 다루가치와 혼인한 것은 차녀 문숙공주이므로 이들도 그들의 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는 삼선과 삼개를 무찌르기는 했으나 죽이지는 않았고, 이후 삼선과 삼개는 다시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다고 한다.[24] 기록을 보면 그 이성계도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길만큼 치열했다. 교전 중 한 왜구가 이성계의 배후에 접근해 공격을 시도함에도 눈치를 채지 못할만큼 정신이 없어서 의형제이자 심복 이지란이 그를 두 번이나 부르며 알려줬으나 깨닫지 못하자 직접 활을 쏴서 구해줬다.[25] 다산 정약용은 고려 왕조의 운명은 위화도 회군이 아니라 황산대첩에서 이미 결정됐다고 하였다.[26] 보통 동아시아권의 창업군주의 경우 유학의 도입 이래로는 국가를 세운 과정에서의 덕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에 배치되는 군사적인 업적은 축소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당의 고조당 고조 이연은 집안이 北周정권에서 군사권을 나눠가진 곳이기에 그렇지 무장으로써의 능력을 보여준적.... 이렇게 따지면 수 문제 양견도 무장출신이어야 한다. 심지어 양견은 北周에서 장군직까지 받은 사람이다.나 송 태조가 대표적인 경우. 비슷한 경우로, (촉한이 통일왕조도 아닌데다가 얼마 못 가서 당고조 및 송태조와 병칭하기에는 어색하지만) 삼국지의 유비도 실제 역사에 비해 연의에서는 유교적 의미의 덕이 강조되면서 일신의 무력이나 지휘력 등 군사적 능력이 묻혔다. 삼국지연의/피해자 참조.[27] 고려사 세가 39. 공민왕 10년 11월[28] 대송국(大宋國) 동계홍건군(東系紅巾軍) 중로군(中路軍) 대수령(大首領)[29] 사신을 통해 임금 앞에서 이렇게 일개 장수에 대한 극찬을 한다는 게 꼭 선의라 보긴 어렵다. 임금 입장에서 보면 타국까지 명성을 떨친 구국영웅의 존재는 지극히 껄끄러운 요소기 때문.[30] 이때 호발도 배후에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있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31] 이인임은 최영에게 이성계는 왕이 되려는 속셈이 가득하다며 없애라고 경고했지만 이간질로 여긴 최영은 듣지 않았다. 훗날 위화도 회군이 벌어진 뒤 최영은 "그때 이인임 말을 듣지 않아서 후회스럽다."라고 탄식한다.[32] 민족주의자들은 4불가론 중 소국이 대국을 함부로 치면 안 된다는 주장을 사대주의라며 비난했지만 이성계는 국력이 쇠약한 고려가 신흥 강대국인 명나라를 경솔하게 공격하면 고려가 망할 수 있다는 의미로 주장했다. 정말 이성계가 사대주의자였다면 조선을 건국한 뒤 명나라의 홍무제가 편지를 보내 위협을 가하거나 계속 명나라와의 전쟁도 불사하려는 정도전을 압송하라고 했을 때 굽신거려야 했겠지만 이성계는 홍무제와 신경전을 펼쳤고 정도전을 보호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애초에 세자 책봉 문제도 그렇고 정도전의 사병 혁파와 제3차 요동정벌 계획은 이성계가 적극적으로 밀어붙였기에 나왔다.[33] 때문에 위화도에서 더 이상 진군하지 않고 머무르자 지엄한 왕명으로 진군을 명하기 보다는 각 원수들에게 금과 비단을 하사하면서 진군하도록 회유하는 수 밖에 없었다.[34] 다만 아들들에게는 삼촌을 도우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래서인지 이원계의 차남인 이천우가 공신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35] 우왕과 창왕이 가짜라는 것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성계 스스로 왕이 되는 역성혁명의 주요 명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조선 500년 동안 우왕과 창왕은 당연하게 신돈의 아들로 취급당했고 의문을 가진 선비도 간혹 있었지만 나라와 왕가 정당성의 뿌리를 흔드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상 본격적으로 억울설을 제기하기는 어려웠다. <고려사>에서도 우왕과 창왕을 세가가 아닌 반역 열전에 신우, 신창으로 들어가 있다. 조선이 망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자유로워진 현대에 들어서는 어느 쪽이 맞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정황상 군사 정변의 부족한 정당성을 세우기 위한 모략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용의 눈물여말선초를 다룬 창작물에서도 왕씨 겨드랑이의 용의 비늘 야사를 통해 사실 우왕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희생된다는 식으로 연출하고 있다.[36] 사실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라는 용어 자체도 고려 성종 때 쓰인 호칭을 그대로 쓴 것인데 전례를 따라서 이전의 호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고려사[37] 최종석(2018), "태조대 대명 관계의 양상과 성격", 《한국의 대외관계와 외교사 - 조선편》.[38] 이때 명나라 군대는 삽시간에 대월을 평정하고 오늘날의 수마트라까지 진격했다고 하며 조선 조정에서도 소식을 듣고 영락제와 명나라 군대의 베트남 정벌을 칭송하는 글을 지어 올리기도 했다.[39] 애초에 말은 사람이 만든 기계가 아닌 짐승이라 기수가 원하는 대로 다루는 것만 해도 상당한 무예 실력을 요구하는데, 마상돌격을 하며 활로 사격을 했다 정도가 아니라 정확하고 강력한 위력을 냈다는 것 자체가 능히 초인이라 불릴 만 하다.[40] 최영이나 정몽주, 정도전의 기록도 말살하지 않고 정직하게 적어놓았다. 조선이라는 국가 자체가 기록에 집착하기 때문이다.[41] 참고로, 주몽 신화의 주몽이 화살 한 발을 쏘아 비둘기 2마리를 맞혔다.[42] 만약 일렬로 앉아있었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다. 일렬로 앉아있는 틈을 놓치지 않고 정확히 궤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믿기지 않는 실력이지만.[43] 화약을 이용하는 총과 달리 활은 화살이 날아갈 힘을 순수히 궁사로부터 내야하기 때문에 강한 화살을 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궁수의 근력과 실력, 집중력이 필요하며, 그리고 그런 강력한 사수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하려면 그에 걸맞는 튼튼하고 강력한 활이 필요한데, 그런 활은 "사용하는데 무지막지한 힘이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연습 혹은 놀이용 활보다 군사용 활은 몇 배나 더 많은 장력을 지녔다고 한다. 잘 맞추면 그만인 스포츠 양궁은 몰라도, 전투용 활은 적의 갑옷을 뚫어버려야 하니 강해야 하며, 이런 강궁은 전투 상황이 아닌 훈련 상황에서조차 수십발 이상 당기면 팔이 후들거리고 척추가 삐걱거리는 놈이다. 그런데 태조의 아버지인 환조 역시도 전장에서 강궁을 오래도록 다뤘을 사람인데 내린 평가다. 전투용을 전제로 만드는 활 자체가 기본적으로 강성이 엄청나기 때문에 이름난 명사수가 아닌 평범한 궁병들의 활이라 해도 현대인들은 몇 발 쏘기도 전에 힘이 빠질 정도인데 이성계의 활은 특별히 더 남달랐다는 얘기.[44] 게임의 엘프 궁사나 사극의 활쏘기 연기, 올림픽 양궁경기를 주로 접하는 현대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점이지만 각궁은 살상 내지 전투용이기 때문에 장력이 굉장히 강하며, 팔과 어깨와 등의 힘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현역 양궁 선수도 다루기 어려워할 정도이다. 실제로 국궁에 대해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장혜진이 각궁을 당겨보았는데 제대로 당기지 못해 끙끙대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활을 수백 발을 쏠 때의 완력, 지구력, 집중력을 갖추고 있다면 이미 인간이 아니라 괴물 수준이다. 그리고 사실 황상의 50발만으로도 충분히 무지막지하다. 현대 한국의 국궁체계에서 최고 등급 9단은 45발 중 39발을 맞추는 것이다. 정조도 50발 중 50발을 다 맞힐 수 있는 실력을 지녀 엄청난 명궁으로 손꼽히고 있다. 수백 발을 다 맞춘 게 비상식적인 수준인 것.[45] 찬성사 황상은 이성계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를 흠모하여 따르니 훗날 조선이 개국하자 그 지위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황상의 부친은 청주 상만호(靑州上萬戶) 황희석으로 그 역시 이성계 휘하에서 활약하며 조선 개국공신이 되었다.[46] 다만 전쟁 중에 이성계가 정확히 70명을 죽였다는 것은 극적인 표현일 것이다. 이성계 혼자만 활을 쏜 것이 아니고 부하들과 함께 쐈을텐데 적을 사살한 화살이 전부 이성계의 화살이라고 단정짓기는 무리가 있다.[47] 판본에 따라서는 이때 이지란은 처음 만난 사이이며, 이성계가 얼굴쪽으로 날아오는 이지란의 화살을 손으로 잡았고, 이성계가 화살을 쏠 차례가 되자 이지란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있다.[48] 고려가 원간섭시기가 되면서 사실상 중앙의 여러 조직들이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에 고려 후기에 조정은 사실상 원의 군대에 기생하며 살고 있는데, 공민왕이 각 지방의 토지와 사람들을 지배하던 토호들을 왕이 가지는 권위로써 복종시켜 국가체계를 다시 정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이 사망하면서 고려의 군사권은 소수의 근위부대 출신에 군원로 최영과 각 지방 토호들이 연합한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동북면일대의 사병들을 기반으로 국가의 명령으로 배속된 토호의 사병들을 이끌고 전쟁을 수행하였다.[49] 태조실록 1권 총서 76번째 기사에는 황산대첩은 아니지만 여진족이 전투에 참가한 기록이 있다. 왜구와 전투에서 이미 승기를 잡아 승세가 아군 측으로 기울었는데, 여진족 군인이 왜구를 마구 죽이자, 이성계가 적이 불쌍하니 이제 그만 죽이고, 생포하라고 한 기록이다. 다만 보병인지 기병인지는 확실치 않다.[50] 동서고금을 통하여 왕은 국고와는 별도로 개인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대통령 재산하고 국고하고 별개이듯) 즉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세금을 마음대로 쓰기는 부담스러웠다. 그러다가는 폭군으로 낙인 찍힌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나라를 대표하는 부자 화신이 죽은 뒤, 부정하게 모은 화신의 재산은 국고가 아닌 내탕금으로 귀속될 정도로 국고와 내탕금이 구분됐다. 물론 이때문에 청나라 황제 가경제는 비난받기도 했다.[51] 백성에게 거두는 세금의 제한이 없으면 임금이 쓰는 것에 한정이 없으니, 세금은 시기에 따라 가감하며 정한 법 이외에는 더 거두지 못하게 하라. 세종실록 세종 28년[52] 성종이 이에 대해서 신하들에게 변명한 기록도 있다.[53] 하지만 정몽주 역시 고려 말 명신답게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 태조가 부상으로 몸져 눕자 기회를 잡아 정도전, 조준 등 태조의 핵심 부하들을 전부 잡아 감금했고 이는 분명한 위기였다. 이때 다섯째 아들 방원이 다친 태조를 억지로 개경으로 데려오지 않았으면 정말로 위험할 뻔했다.[54] 이색은 고려 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55]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다고 나오며,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정식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건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받으면서도 후계자는 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56] 다만 그가 사신으로 간 직후, 이방원이 이색의 요청에 따라 이성계의 선택으로 서장관 자격으로 이색, 이숭인을 따라 간 적이 있는 만큼, 이방우의 사신행도 이와 같이 강제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이방우에 대한 바로 앞의 주석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반론이 가능한데, 진안대군 항목을 참조할 것을 추천한다.[57] 위화도 회군으로 제거된 이성계의 최대 정적[58]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59]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인물이 방석의 첫 부인인 폐세자빈 유씨. 그녀와 방석이 혼인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은데, 만약 조선 건국 이전에 혼인한 고려 구 세력의 딸이라면 그녀의 폐출 이유로 흔히 알려진 내시 이만과의 간통이 누명일 가능성이 생긴다.[60] 곡산강씨는 신덕왕후의 아버지 강윤성 대에 신천강씨에서 분관되어 지금은 다시 신천강씨에 합관되었다.[61] 그 배극렴도 처음에는 신덕왕후 소생의 책봉을 반대하다가 데꿀멍하고 전향하게 된다. 실록에서는 배극렴을 무식한 무장이라고 태조가 한마디 했다고 바로 우디르해버리는 위인이라고 까는데, 무인정사 이전까지 실록에서 세자책봉 문제로 직접 욕을 들어먹는 것은 그가 유일하다. 그런데 정작 이방원은 그에 대해 딱히 어떠한 보복을 가하지는 않았다. 죽은 사람이라도 부관참시니 시호박탈이니 보복할 방법은 무궁무진한데도.[62] 배극렴 이외에도 조준 역시 세자 책봉 문제와 연관된 정황이 있다. 다만 배극렴과 달리 확신할 수는 없는데, 조준이 이방번과 이방석에 대해 반대했다는 내용은 조준의 졸기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되려 정종실록에 따르면 조준은 이방석을 세웠다는 죄목으로 대간에 탄핵당하는 모습도 나온다. 단, 정종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탄핵을 무시했다.[63] 이런 이유는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둘 다 "부인"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부인은 이 아닌 정실이었다. 일부다처에서 일부일처다첩이 된 건 조선 태종조 부터였다. 고려가 처음부터 일부다처제였던 것은 아니고 고려 초~중기까진 일부일처 제도가 일반적이다가, 원 간섭기에 몽골의 영향으로 일부다처제가 받아들여졌다는 의견이 일반적이다.[64] 이방원이 벌인 짓이다.[65] '향처'는 사실 원래부터 혼례를 한 경우이고, '경처'는 뒤에 지방 출신자들이 개경에 진출하면서 가문의 위격과 관련되어서 혼례를 한 경우이다. 둘의 위치는 동등하다고 생각되지만. 생각해보면 '향처'가 혼례 시기가 더 빠르기에 윗서열이라고 봐야 한다.[66] 그러나 이성계가 개국 이전 사망한 향처를 사실상 박대하면서 향처 자녀들의 불만을 불러왔다. 하지만 사실 경처 쪽이 대부분 개경 귀족 가문이었을테니 지방 가문보다 더 빵빵했을테고 활동한 곳도 개경이었으니 실제로는 경처 쪽이 더 우대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한마디로 태조가 한 일이 불만을 가져왔기는 했지만 당시 상황으로 봐서 태조가 신덕왕후를 우대한 게 더 특별한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67] 이성계의 큰아버지 이자흥의 딸들.[68]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19일.[69] 애시당초 말이 좋아 고려의 구세력이지 이들 또한 신진사대부이다. 당연하겠지만 신진사대부들이 조선이 건국되었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질 리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즉, 엄밀히 말해서 고려의 구세대와 결별하기 위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토사구팽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고려 왕가와 깊숙히 연관되어 있는 이방우라면 모를까.(창왕이 즉위할 때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이방우이다.) 그리고 그렇게 따지면 정몽주 역시 고려의 구세력인데 이방원만 억울한 셈이다.[70] 이는 목초지 고갈 문제 때문에 항상 새로운 초지로 이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장성한 아들들은 빨리빨리 독립시켜 스스로 새로운 지역에서 목초지를 개척하면서 살도록 하는 생존 전략이다.[71] 그러나 방번이 누구의 사위인지 생각하면 고려 왕실의 피가 왕통에 섞으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게 아니라면 처음에 방번을 고려했다는 기록이 왜곡일 가능성도 있다. 승정원 일기가 남아있는 조선 후기의 기록들을 대조해보면 실록은 세간의 인식과 달리 왜곡과 짜깁기가 심한 사료다. 조선 전기 승정원 일기가 남아있지 않아 선택지가 없어서 선뜻 다른 의견 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72] 태종이 뒷날 정릉을 파버리고 석물을 청계천에 처박은 것도 아버지의 정치적 고려를 다 헤아리고 맞대응을 한 것이다.[73]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74] 군권 개편 후에도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된다.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이는 곧 방우의 맏이로서의 위상을 그 장자 이복근에게 계승시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75]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76]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화나 이지란 등은 아무리 방석을 지켜줘봐야 좋은 일만 해주는 것이 아니냐는 참소에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방원이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정씨의 나라입니까?"하고 설득하면 당연히 넘어갈 수밖에 없고 방번 또한 자기 자리를 방석이 빼앗아갔다고 생각할 것이 뻔한데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된다.[77] 이방원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친형 이방간만큼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유배를 보냈다.[78] 이성계에게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쟁(전투)에서 패배한 것이었다.[79] 5경3점 시간에 통행금지를 알리던 종소리 시간으로 현대시간으로 대략 새벽4시[80] 고려를 위해 함께 해왔던 정몽주와 자신의 원훈인 정도전을 죽이고 이복 형제인 이방석, 이방번까지 참살한 나쁜 놈이자 동시에 자신의 왕조 창건을 도운 일등 공신이자 명군으로 그 자질을 인정받은 애증이 교차했을 아들인 태종 이방원. 부자가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다. 오히려 태종의 젊은 시절 태종은 무관에 대한 멸시가 저변에 깔린 고려에서 무관 집안 출신임에도 과거에 응시하여 고작 10대 때 합격한 후 고려 정계에서 활동하며 문관들과 교류해 이성계의 정계 진출에 큰 도움을 줬다. 오죽하면 이성계가 이방원이 과거에 합격하자 "내가 손님과 즐겁게 보낼 수 있던 건 네 덕분이다."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81] 동구릉에는 태조의 왕릉 건원릉을 비롯해 다른 임금들 및 왕후들이 묻혀있다. 동구릉이라는 뜻 자체가 동쪽에 있는 아홉 능이라는 뜻. 동구릉은 2009년 2월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82] 물론 억새 이삭을 갖고와서 키우면 되니 의미 없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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