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의 8남이자 본 문서 인물의 조카에 대한 내용은 의안대군(이방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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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환조의 왕자 의안대군 | 義安大君 | |||
의안대군묘 전경 | |||
출생 | 1348년[1] | ||
쌍성총관부 화령 (現 함경남도 금야군) | |||
사망 | 1408년 11월 2일[2] (향년 60세)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 ||
재위기간 | 조선 의안백 | ||
1392년 8월 7일 ~ 1398년 10월 10일 | |||
조선 의안공 | |||
1398년 10월 10일 ~ 1401년 2월 8일 | |||
조선 의안대군 | |||
1401년 2월 8일 ~ 1408년 11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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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 화(和) | ||
부모 | 부왕 환조 모친 정빈 김씨 | ||
형제자매 | 부왕 기준 4남 2녀 중 4남 모친 기준 외아들 | ||
배우자 | |||
자녀 |
| ||
호 | 이요정(二樂亭) | ||
봉호 | 의안백(義安伯) → 의안공(義安公) → 의안대군(義安大君) | ||
시호 | 양소공(襄昭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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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자춘의 서자이자 조선 태조의 이복동생.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조카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 왕자의 난에 협력했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2. 생애
1348년(충목왕 4) 동북면 화주에서 이자춘의 3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훗날의 정빈 김씨로 본래 이자춘의 여종이었다. 이자춘이 죽자 이성계는 그녀를 개경으로 데려와 극진히 모셨으며, 심지어는 그녀의 노비 문서를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조선 개국 후 정안옹주(定安翁主)로 봉해졌고, 1404년(태종 4) 죽은 뒤 1872년 고종 대에 와서 정빈으로 추봉되었다.1차 왕자의 난에서 정안군을 도와서 정사공신이 되었다. 자신을 돌봐준 이복형 태조의 뒤통수를 친 셈. 물론 이화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종친들이 이성계의 이해할 수 없는 세자 책봉과 종친 견제에 불만을 품었다. 친자식들인 둘째 영안군, 셋째 익안군, 넷째 회안군, 첫째 진안군의 아들인 손자 이복근, 심지어 이방석과는 동복형제였던 무안군 역시 묵인 내지 방관할 정도로 이 결정은 태조와 신덕왕후 그리고 이방석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태조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던 것이기에 이화가 이방원을 도운건 이상한 것이 아니다.[5] 이후 2차 왕자의 난에서도 태종을 지지하고 좌명공신이 되었다.
종친의 국정 참여에 대한 기준이 모호했던 개국 초에는 신하로서의 대우를 받으며 국정에 참여했고, 그 지위가 정실 소생 왕자들과 동등해진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중량감 있는 명예직을 맡아 영의정에 오르기도 했다. 영의정일 때는 종친 어른의 입지를 활용해서 외척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 대한 탄핵을 주도하여 그들을 귀양보냈다.
죽은 후에는 태조의 배향공신으로 종묘에 모셔졌다. 그의 무덤은 실전되었다가 순조 대에 후손들이 다시 찾아냈다고 한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으며, 평내동에 있는 '의안로'라는 도로 이름은 여기서 유래한다.
3. 여담
- 나중에 조선의 제도가 정비되면서 확립된 규정에 따르면 이화는 환조 이자춘의 서자이므로 대군이 아닌 군으로 봉작되어야 하나, 개국 당시에는 왕족이 아닌 신하의 예에 따라 의안백이 되었고, 제1차 왕자의 난에 협력한 이후에는 이방원의 형제들인 친왕자들과 동급의 대우를 받게 되면서 의안공, 태종 즉위 후에는 작위 제도 개정에 따라 의안대군이 되었다. 따라서 서자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서자 대우를 받은 적이 없는 특이 케이스에 속한다.
- 태조의 동생인 이화와 태조의 막내아들인 이방석의 봉호 모두 한자만 다르고 발음은 같은 의안대군이기 때문에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 심지어 과거 의안대군 이방석 묘에 세워진 안내판에 ‘묘의 위치가 실전되었다가 순조 대에 후손들이 다시 찾아냈다.’라는 잘못된 내용이 있었던 적이 있다. 오늘날 의안대군이라 하면 흔히 이방석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의안대군으로 먼저 봉해진 사람은 이화이다. 이방석은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복권되어 의안대군으로 추봉되었다. 두 의안대군은 1차 왕자의 난에서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화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조카 이방원을 도왔으며 이방석은 난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이후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이방원은 태종으로 즉위하게 되었고, 자신을 도와준 작은아버지 이화를 의안대군으로 봉한다.
- 조선 초기 최고의 땅부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유는 공신으로 서훈되면서 받은 토지가 어마어마해서인데 이성계를 호종하는 과정에서 위화도 회군 참가를 통한 무진년 회군공신, 조선 개국공신 칭호를 얻고 이후 2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참여하면서 정사공신, 좌명공신의 칭호를 얻어 공신 칭호가 무려 4번이고 그에 따른 상급으로 공신전 토지를 매번 하사받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받은 토지가 대략 570결 정도.[6] 이화가 받은 공신전의 면적을 당시 1등전 한 결의 면적(대략 3천여 평)으로 환산하면 약 170만 평인데 이는 오늘날 여의도 면적의 2배 정도 되는 크기이다.[7] 이 때문에 공신들이 너무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후 공신록을 받은 당사자 사망 후에는 공신 칭호 수여 횟수와 등급에 따라서 자손에게 상속되는 토지에 제한이 생겼으며 당연히 남은 땅은 국가로 다시 귀속되었다.
- 나중에 정조 때 그의 후손들이 농민으로 전락하여 가난하게 살았는데, 안타깝께 여긴 정조가 그 후손에게 양반직을 복직시키고 세역과 노역을 면제하였다. 의안대군의 자손 16명이 계유정난으로 화를 입어서 인천 이씨,[8][9] 광산 이씨,[10] 홍주 이씨[11] 등과 같이 변관(變貫)해서 연좌제를 피하고 역적의 자손을 숨기고 살다가 숙종 때 신원되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4. 대중매체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원석연이 연기했다. 상당히 비중있는 조연인데 1회 위화도 회군 장면에서부터 이복형 이성계의 휘하에서 회군에 참여하는 모습으로 첫 등장한다. 개국 이후 정도전이 추진한 사병 혁파와 진법 훈련에 반발하면서도 이방원처럼 대립각을 세우지는 않고 이래저래 눈치를 본다. 이런 모습 때문에 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진법 훈련에 불참한 이지란에게 찾아가서 진법 훈련에 대해 볼맨소리를 할 때 "박쥐 노릇하지 말라"며 한 소리를 듣는다. 드라마 상에서 이화는, 이복형 이성계과 의형제 간인 이지란에게 대감이라고 호칭한다. 형님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후에는 이화는 1차 왕자의 난과 2차 왕자의 난 때 갑옷을 챙겨 입고 이방원의 편에 서는 모습과 민씨 형제가 탄핵당했을 때 태종의 의중에 따라[12] 충실하게 탄핵에 앞장서는 모습이 충실하게 그려졌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무장하고 삼군부로 찾아와 조카 방원에게 장하다고 칭찬한다. 조카인 세자 방석이 살해된 후 방간(김주영 배우 역), 방의(최동준 배우 역)와 함께 현장에 달려와 시신을 바라본다. 이화와 방의는 이렇게까지 할 것은... 라며 탄식하지만 방간은 당연한 수순이라고 차갑게 말한다. 그리고 방과(태민영 배우 역)와 김씨 부부도 현장에 달려와 슬퍼한다. 2차 왕자의 난 때는 이지란과 함께 방간을 살리려는 입장이었다.
같은 종친이며, 이화의 조카(이화의 이복형 이원계의 아들)인 이천우(김옥만 배우 역)와 더불어 민무구, 민무질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등 매우 강경한 입장이다. 민제의 사망을 앞두고 민씨 형제를 불러들이는 문제를 놓고 대신들 간에 갑론을박할 때 격렬하게 "민씨 형제를 불러와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다 심장마비로 급사한다.[13] 사망 소식을 들은 원경왕후에게 "하늘이 무심치 않다"는 고인드립을 당한다.
5. 관련 문서
[1] 음력 충목왕 4년[2] 음력 태종 8년 10월 6일[3] 안종기(安宗奇)의 딸.[4] 경원군(慶源君) 노은(盧訔)의 딸로, 질부(조카:태종의 부인) 원경왕후의 제부(여동생의 남편) 노한과 5촌(당고모)이다.[5] 친가족은 아니지만 의형제로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이지란 역시 이 결정을 묵과 내지 방관했다.[6] 1결은 농민 한 가구가 먹고 살만큼의 토지를 말한다. 시대에 따라 면적이 달라졌고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서도 면적이 차이가 났는데 비옥도가 떨어져서 척박하고 낮은 등급의 토지로 갈수록 더 넓어졌다.[7] 1등전 외에 비옥도가 떨어져 소출이 적은 하등전도 섞여 있었다면 200여 만 평 정도라고 볼 수도 있다.[8] 육종영(六宗英)의 한 사람이었던 하령군 이양은 인천 이씨 8세(또는 11세)로 나오며, 그의 아들인 여양군(礪陽君) 이승윤의 관직이 헌납(獻納)으로 나와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1982년판 인천이씨대동보에서는 언급되어 있지만 2009년판 인천이씨대동보에서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있다.[9] 의안대군의 손자인 한산군(韓山君) 이의산은 인천 이씨 14세로 나오며, 계유정난에 순절했다는 내용은 둘 다 나온다. 이의산에게는 해령군(海寧君) 이우경이 있는데 의안대군파보에서는 순절한 걸로 나오지만 인천이씨대동보에서는 이름을 순석(恂碩)으로 바꾸고 대구 수성으로 은거했다는 내용으로 나온다. 하지만 2009년판 인천이씨대동보에서는 이 부분도 삭제되어 있다.[10] 여양군 이승윤의 두 아들인 이소조와 이계조는 광산 이씨 상서공파 중시조 7세로 나오며, 계유정난에 화를 입었고 장릉(莊陵) 배식단에 모셔졌다는 내용이 양쪽 다 나온다.[11] 조선 개국 시기에 영의정을 지낸 이서의 본관이다. 광산 이씨와는 다르게 여양군의 두 아들들은 이서의 손자로 나와 있고 관직명도 적혀 있다. 더불어서 자손이 있다고 나오는데, 자손의 일부는 봉산 이씨와 겹치는 부분이 나타난다.[12] 태종이 양녕대군에게 왕위를 넘기겠다고 판을 벌였는데 모든 신료들과 양녕대군, 왕실 종친들이 말리는 와중에 민씨 형제들은 원경왕후의 처소에 가서 정국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이 발각되어 이방원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처음부터 외척을 경계하던 태종이 펼쳐놓은 덫에 완벽하게 걸려든 것이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일을 빌미로 벌할 생각이었다. 이를 실질적으로 추진하고자 좌의정 하륜, 우의정 조영무를 불러 의견을 물었으나, 정작 이들은 함께 이방원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싸웠던 공신들이다보니 의리와 후폭풍 문제로 민씨 형제를 탄핵하지 못했다. 결국 대신 탄핵하게 하려고 왕실의 종친으로써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이화를 영의정에 대신 앉히고 만다.[13] 늙고 쇠약해져 세상을 떠난 형 이성계와는 대조적이다. 이성계가 임종을 맞이할때도 여전히 정정한 모습인 터라 같은 해에 사망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차이가 있긴 하나 이성계와 이화 모두 1408년에 사망했다).[14] 이화에게는 이복 조카인 익안대군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