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9 21:06:00

박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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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white> 박포
朴苞
이름 <colbgcolor=white,#191919> 박포(朴苞)
본관 죽산 박씨
호곡(壺谷)
출생 불명
불명
사망 1400년(정종 2년) 1월 22일
충청도 이산
(現 충청남도 논산시)

1. 개요2. 생애3. 여담4. 박포 일가족에 대한 실록의 처분 내용5. 대중매체
5.1. 드라마5.2. 막걸리 미스트
[clearfix]

1. 개요

여말선초의 인물. 조선의 개국공신. 본관은 죽산(竹山), 호는 호곡(壺谷).

2. 생애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대장군에 임명되고 죽성군[1]에 봉해졌으며 1393년 사헌중승으로 있다가 현빈 유씨(왕세자 이방석의 세자빈)의 일을 함부로 논했다고 해 여러 관리들과 함께 순군옥에 갇혔다가 공신이라 귀양은 면하는 대신에 사저에서 근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394년 변중량이회에게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이 병권을 장악한다고 비판했다. 이에 왕인 이성계가 변중량에게 물었는데 변중량이 사실대로 답하였고 박포가 이성계에게 "전하께서 국정을 잘못해 여러 번의 변고가 일어났습니다."라고 하자 박포는 변중량, 이회 등과 함께 문초됐다. 박포는 이들과 서로 따지면서 자신만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지만 결국 죽주에 유배되었다.

1396년 황주의 수령이 되었고 1398년 1차 왕자의 난 때 조전 절제사로 있다가 이방원에게 가담해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의 동정을 몰래 정탐했으며 이방원의 명령으로 민무질과 함께 조준을 부르려고 했다. 1398년 지중추원사 의흥 삼군부 우군 동지절제사에 임명되었지만 2등공신에 봉해진 논공행상에 불만을 토로했다가 죽주로 유배되었다.

이는 박포의 실책으로 본래 왕자의 난과 같은 정치 투쟁은 논공행상 역시 어느 정도 정치적인 안배를 하기 마련이다. 1차 왕자의 난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조준[2] 등의 원로 대신들이 1등공신에 봉해지고 실제로 일을 주도한 실세인 이숙번과 민씨 형제들이 2등공신에 봉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방원 입장에서는 건방진 놈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이숙번, 민씨 형제, 신극례 등의 다른 실세 2등공신들도 가만히 있는데 굳이 나서서 난리를 친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본인의 공이 실세 2등공신들 중에서도 월등하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실록에서는 그가 정도전 진영을 정탐했다고 하니 목숨 걸고 첩보 활동을 벌여 물밑작업 다 해놨더니 남이 깔아놓은 판에서 칼부림 좀 한 놈들이 같은 실세 2등공신이라고 자신을 말리는게 고까웠을지도 모른다.

1400년 이방간을 충동질하여 이방원과 싸우게 하면서 2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이방간이 개경 시내에서 이방원에게 패하자 박포는 붙잡혀 관직이 삭탈되고 장형 1백 대를 받아 청해로 유배되었다. 이후 공신녹권이 회수되었다가 이산으로 옮겨 유배되었으며 2월 25일 주살되었다. 사실 2차 왕자의 난은 말이 좋아 박포가 부추긴 것이지, 이방간 본인이 주도적으로 움직인 모습이 역력하며 미리 이방간의 거사를 전해들은 이성계와 이방과 역시 넷째가 철부지처럼 군다며 탐탁지 않게 여겨 말렸다. 이성계는 이 때 이방원을 증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데도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이를 알고 있던 이방원도 또 형제를 죽이기는 그랬는지 연극까지 펼쳐가면서 이방간 군대의 투항을 유도한 후 이방간을 살리기 위해 박포에게 모든 혐의를 뒤집어씌웠다고 볼 수 있다. 이방원이 무인정사 때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던 이유는 무인정사와 2차 왕자의 난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무인정사의 원인이던 세자 이방석은 이복동생으로 이방원과 사이가 좋지 않은 계모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2차 왕자의 난의 원인인 이방간은 동복형이었는데 이복형제를 죽인 것도 모자라 동복형제의 피까지 보게 된다면 아직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왕실의 정통성이 흔들릴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이방원의 대처가 지나칠 정도로 철저해서 '아예 처음부터 박포가 방간을 부추기도록 이방원이 판을 짠 건 아닐까?'라는 추측도 있다. 이에 대해선 2차 왕자의 난 문서 참조.

3. 여담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황희가 박포의 처와 간통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3] 해당 내용을 쓴 사관인 이호문이 악의적으로 황희를 비난한 사례가 많기 때문. 실록을 검토하던 정인지성삼문 등도 이 사건의 실체를 부정하며 이호문이 근거도 없이 써놓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나 실록을 고의로 고쳤다는 선례를 남길 수는 없다면서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4. 박포 일가족에 대한 실록의 처분 내용

* 1423년(세종 5) 7월 25일에는 맹종(孟宗)에게 연좌(緣坐)된 사람과, 박포(朴苞)의 자손들의 노비와 가재(家財)가 형률에 의하여 처벌을 받았다.
* 1428년(세종 10) 1월 23일에는 박포(朴苞)의 집이 의화궁주(義和宮主)에게 분배되었다.[4]
* 1464년(세조 10) 12월 26일에 이르러서야 난신(亂臣) 박포(朴苞)의 손자인 죽산 관노(竹山官奴) 박동량(朴同良)과 그의 자녀(子女)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 1471년(성종 2) 10월 16일에 죽산(竹山)의 관노비(官奴婢)로 정속(定屬)된 난신(亂臣) 박포(朴苞)의 손자 박덕상(朴德祥), 박시중(朴時中), 박덕윤(朴德閏)과 손녀 막비(莫非)가 풀려났다.
* 1472년(성종 3) 1월 5일 경기(京畿)의 죽산(竹山)에 정속(定屬)한 박포(朴苞)의 손녀(孫女) 소사(召史), 백견(白犬), 종생(從生)이 방면됐다.

5. 대중매체

5.1. 드라마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서영진이 연기했다. 왕자의 난 이전부터 대간으로서 정도전 일파에 맞서 여러 번 상소를 올리고 그 결과 유배에 처해지거나 투옥되기도 했으며 풀려난 뒤 정도전과 설전을 벌인다. 1차 왕자의 난이방원 측에 가담하였고 이 과정에서 원래 정도전 파였으나 거사 직전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이방원 측에 선 이무를 보고 "배신자이니 언제 배신할지 모른다며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훗날 배신은 자신이 한다. 이후 조준, 이무 등이 1등공신으로 올라서고 자신은 2등공신이 되자 불만을 품고 술자리에서 폭언을 퍼부었고[5] 이방원에 의해 하옥된 뒤 이방원에게 완전히 돌아서게 된다. 이후 이맹종의 중재로 이방간과 접촉하여 이방간을 도와 2차 왕자의 난을 주도하지만 난이 실패하며 붙잡힌다. 옥중에서는 "너희(공신들)도 이제 곧 화무십일홍의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다." 라고 상념한다. 그 다음날 이방원에게 직접 국문당한다. "자신이 죽는 건 당연하지만 동복형제끼리 죽여야 쓰겠냐"며 이방간은 살려달라 간청하고 자리에 모인 다른 신하들에게 "이방원이 다음은 당신들을 숙청할 거"라며 돌직구를 던진다. 이숙번에게 뒷처분을 맡기고 떠나던 이방원은 흠칫하여 이방간을 다시 보다가 "어차피 죽을 놈 실컷 헛소리하게 하라"고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방원의 행보를 생각하면 정확한 예측으로 조영무를 비롯해 이방원의 측근들이 "박포의 말이 맞았다"며 회상하는 장면도 있다.[6]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박포의 처와 황희의 간통 의혹 사건에서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박포가 막장 남편이어서 처가 학대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오자 황희가 자신의 집에서 보호해줬다가 간통 누명으로 변질했다는 해석으로 나온다.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전석찬이 연기했다. 이방간 옆에 항상 붙어다니는 무사로 등장하는데 가별초 출신의 무장이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주로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나오며 처음에는 별 존재감은 드러내지 않다가 이방간의 심복으로 무인정사에 참전하여 무휼과 함께 이름을 크게 외치고 돌진한다.
  • 2022년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안홍진이 연기했다. 9회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며 실제 역사대로 1차 왕자의 난에서도 이방원 측에 붙어 활약하고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태조의 부마 이제를 직접 죽이는데, 이 과정에서 이제를 지키려고 앞을 막아서면서 애원하는 경순공주를 천민 대하는 것처럼 막말을 내뱉으며 옆으로 밀치기까지 한다. 19화에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행패를 부리다 끌려나간 뒤 역사처럼 제2차 왕자의 난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박포가 방간을 부추겼다는 정사의 서술과는 대조적으로 방원에게 관직을 삭탈당한 후 불만에 차있는 상태에서 오히려 방간과 방의에게 설득당해 거사에 합류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정작 거사 당일 함께 하기로 한 방의가 돌연 같이 하지 않는 바람에 안 그래도 열세였던 방간군은 대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20화에서 난의 책임을 덮어씌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지목되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지만, 그대로 참살당한 채 퇴장한다.

5.2. 막걸리 미스트

박포.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1차 왕자의 난 때 방원을 도와 공신이 됐으나, 논공행상의 불만을 품고 이무 대감을 비방하다가 방원의 진노를 사, 유배됐다가, 방원의 특사로 복권됐다. 그러나 박포는 자신의 불안한 처지를 만회하기 위해 회안군 방간을 부추겨 난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바로 2차 왕자의 난이다. 하지만 난은 실패로 돌아가고 박포는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박포가 처형될 때 나오는 내레이션
  • 용의 눈물의 처형 장면 때 박포 역을 한 서영진이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연기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는 망나니 역을 한 문창근이 얼굴에 막걸리를 너무 많이 뿜었기 때문. 극 중 자신이 처형당하는 순간인데 자세히 보면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진지한 분위기와 내레이션, 막걸리를 내뿜고 박포를 노려보는 망나니의 표정 또한 상황과 배경음악의 부조화를 유발했다. 이 장면은 유튜브의 KBS Drama Classic 채널에서 연속 무료 스트리밍을 할 때 채팅창에서 상당히 화제가 되고 이 장면이 재연될 때마다 막걸리 미스트라는 말이 유행하며 극의 전개와 무관하게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 코미디빅리그의 브리지 코너인 개국공신에서 느닷없이 박포에 대한 내레이션과 함께 등장했다. 개그맨 김용명이 박포[7] 역을 맡았다. 바로 위 항목의 용의 눈물에서의 참수 장면, 이른바 막걸리 미스트 씬에 대한 패러디.



[1] 지금의 경기도 안성시며 뒤에 죽주에 유배되었다는 곳도 이 곳이다. 고향이 여기임을 짐작케 한다.[2] 1차 왕자의 난 당시 조준에 대한 기록은 두 가지로 나오는데, 하나는 집에 틀어박혀서 점을 치며 상황을 관망했다는 기록이며, 다른 하나는 가병들을 이끌고 난을 진압하기 위해 움직였으나, 이미 대세가 기운 상태에서 이방원에게 회유되었다는 기록이다.[3] 오히려 1417년에 장사정이라는 인물이 박포의 첩과 간통한 사유로 공신록을 박탈당한 기록이 있다. 이 사건이 와전되거나 왜곡된 듯하다.[4] 의화궁주는 전임 왕조 고려의 마지막 왕대비로, 장수한 덕에 온갖 기도 안 차는 꼴들을 다 보고 겪은 비극적인 인물이다. 박포의 집을 받은 이 해 6월에 사망했고, 세종은 부의로 쌀과 콩 각 100석을 보냈다.[5] 분노를 삭이려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는데 이 때문에 너무 취했고 이후 서로 술을 따르는 와중 이무의 얼굴을 보자 분노가 폭발해 폭언을 퍼붓고 말았다. 문제는 그 자리가 정종 즉위식 후의 술자리였다는 것으로 중요한 자리였기에 망쳐져서는 안되는 자리였다. 얼굴이 시뻘개진채 부들부들 떨며 1등공신으로 올라선 이들을 질타하다 기둥까지 붙잡고 할 말을 다 하며 끌려나간다.[6] 그래도 이방원은 귀양보낸 공신들을 다시 조정 원로로서 불러들여 대우해줬고 성격이 다혈질이고 욕심많은 이거이 한 사람만 숙청됐을 뿐 다른 대부분 공신들은 알아서 처신하여 천수를 누렸다.[7] 박포라는 명확한 언급은 없으나, 위의 박포 처형씬이나 코너 중 흘러나오는 나레이션을 감안하면 영락없는 박포다. 아예 박포라고 직접 이름이 언급[8]되는 에피소드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