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과전법(科田法)은 기존에 전 국토를 대상으로 수조권을 분급하던 전시과 체제하의 사전을 혁파하고, 수조권 분급의 범위를 경기도로 한정하여 중앙 관료들에게 분급하고, 나머지는 백성들에게 나눠줘 자영농을 키우는 제도로, 1391년(공양왕 3년) 조준이 이성계를 등에 업고 만든 제도였다. 과전법의 시행을 통해 고려 왕조 내내 강력한 가문들이 독점하고, 종교 집단이 특권을 갖던 수조권적인 토지 지배질서가 무너지게 되었고, 결국 시행 이듬해(1392년)에 고려는 멸망하게 되었다.조선 초까지 관리에게 토지를 줬고, 이를 과전(科田)이라 불렀다. 이는 경기도 내의 토지로 한정되었으며, 나머지 조선 8도에 걸친 호족들의 토지는 뺏아서 백성들에게 분배했다.[1] 이를 통해 세금이 중앙 정부로 제대로 들어와 재정도 건실해지고, 조선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국난을 피함은 물론 강한 국력으로 영토도 확장시켰다.
다만 이 과전법도 마치 고려 말 전시과처럼 공급이 수요를 이겨내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세조 12년(1466년)에 현직 관료에 한정하여 과전을 부여하는 직전법이 시행되었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무리였고, 결국 성종 1년(1470년)에 나라가 직접 세금을 거두어 관료에게 배분하는 관수관급제가 시행되면서 과전 및 수조권의 개념은 소멸하게 되었다.
여말선초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반드시 나오는 토지개혁으로 <용의 눈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 등에서 과전법의 실시 과정이 주요 시나리오로 다뤄진다.
2. 도입 배경
과전법 이전에는 고려 건국부터 전시과를 시행해 문반과 무반은 물론 지방의 향리에 이르기까지 전국의 땅을 대상으로 생산된 것을 갖도록 했다.(수조권) 대신 나라에서 부르면 수조권을 보유한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들여 나랏일을 감당할 책임이 있었다. 그러나 소집 동원된 집단들은 말도 안 되는 비전문성으로 비효율의 극치를 달렸고, 공공 서비스 동원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피되기 때문에 열심히 하는 사람이 바보였다. 결국 고려의 국력은 말그대로 허약 그 자체가 되었다.물론 고려에도 과거 제도가 있었지만 유명무실했고, 결국 유력한 호족들이 관직을 나눠갖는 구조로, 고려 말이 되면 어떤 세력이냐의 문제일 뿐 서로 땅을 뺏고 뺏는 복마전이 되었다. 심지어 국교였던 불교 사찰들까지 토지 경쟁에 나섰을 정도였다. 동시에 여러 사람이 하나의 땅에 등기를 하고, 정부는 이를 눈감아주면서 결국 소작을 부쳐먹는 농민들만 여러 사람에게 번갈아가며 털리게 되었고, 심하면 노비가 되거나 야반도주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를 '겸병'이라고 한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등에 업고, 기득권의 토지를 몰수한 뒤 무상으로 백성들에게 균등 분배하는 계민수전을 하고자 생각했으나,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았던 이색 등의 고려파 사대부와 왕실 인척 등 귀족들의 방해에 시달렸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조준이 토지개혁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 차선책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그럼에도 이색과 권근을 비롯한 고려파 신진사대부들은 겸병 문제만 해결하면 사전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라며 자기들의 기득권만 고집했다.(일전일주론) 하지만 김저 사건으로 대다수의 고려파 사대부가 몰락하고 창왕이 폐위되어 과전법이 시행되었다.
과전법은 전시과와 달리 현직 및 전직 관료들에게 모두 수조권을 지급했다. 원래 전시과도 전•현직 모두에게 줬었지만 1076년 문종 때 현직으로 한정시켰다.(경정전시과) 관료들에게 줄 토지는 경기 지역에 국한시키고, 시지(산림)는 따로 주지 않았다.
3. 제도의 운영
과전법 하에서 토지는 국가가 사용료를 받는[2] 공전(公田)과 개인이 토지사용료를 받는[3] 사전(私田)으로 구분된다. 공전은 국가가 소유한 토지에 대하여 지세를 받는 토지이고, 사전은 관리에게 주는 과전과 공신에게 주는 공신전 등이 있다.3.1. 조세와 수조권
가질 권리를 조(租), 국가에 낼 의무를 세(稅)라고 해서 조세다. 이 중 조에 대한 권리를 수조권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해당 토지에서 조(租)를 걷을 수 있는 권리이다. 과전법의 시행으로 전호(田戶)[4]가 전주(田主)에게 수확의 50%의 조세를 바치던 병작반수제가 금지되고 수조자는 과전에서 나오는 소출의 1/10을 '조'로 받을 수 있었다. 조준이 책정한 당시의 1결당 생산량은 300두로, 공법 상의 수조율에 의거해 최대 30두까지 관리가 가져갈 수 있었다.수조권자는 경작지의 소유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객(田客)[A]으로부터 조(租)를 수취하며 국가에 세(稅)를 납부하는 권리와 의무를 국가(왕)로부터 받은 자를 의미하므로, 지주와 소작농의 관계와 다르다는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6]
사전(私田)의 경작자가 수조권자에게 조(租)를 납부하고, 수조권자는 경작자로부터 받은 전조(田租) 중 1결당 2두를 고정적으로 국가에 수납하는데, 이것이 세, 즉 전세(田稅)가 된다. 공전(公田)에 해당하는 능침(왕릉 비용 충당용), 궁사(궁궐 비용 충당용), 공해(公廨, 공공기관 충당용)는 조세가 면제되었고, 또한 특별히 사전(私田) 중에서도 공신전은 면세였다.
3.2. 세율 산정방식의 변화
'관직자들에 대한 수조지 분급 규정'이 과전법의 사전적 의미이나 이에 따른 수조권의 행사와 세율 기준에 대한 규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판단하여 본 문서 내에 포함하여 서술한다.====# 답험손실법 #====
수조권자가 국가에 세(稅)로서 납부하는 1결당 2두는 고정된 것과 달리,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전객(田客)[A]이 수조권자에게 납부하는 조(租)는 1결당 '최대' 30두이므로, 수확의 감수 정도를 반영하여 이를 감면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이 시행되었다.
고려 말 과전법의 제정과 동시에 제정되었는데, 손(損)과 실(實)을 각각 10분(分)으로 나누어 손재가 1분(分)에 이를 때마다 3두씩 감세하였으며, 손재가 8분(分)에 이르면 전액 감면하도록 하였다. 답험의 방식은 공전의 경우 수령이 관찰사에게 보고하면 관찰사가 관원을 보내 다시 심사하도록 하였고, 사전(私田)은 수조권자가 스스로 심사하도록 하였다.
이는 몇 차례 변하였는데, 1393년(태조 2년)에는 손실이 20% 이하인 경우 감면을 인정하지 않고 30두의 조(租)를 모두 납부하도록 수정하였고, 1405년(태종 5년)에는 전세가 면제되었던 80% 이상의 손실에 대해서도 비율대로 3두 내지 6두를 납부하도록 변경하는 한편, 20% 이하의 손실에 대해서는 비율대로 각각 24두, 27두를 각각 납입하도록 1393년 이전의 제도로 회귀하였다.
이처럼 경작상황에 따라 조(租)의 비율을 달리하는 제도는 합리적이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규정일 것 같으나, 수조권자 입장에서 국가에 납부할 세(稅)는 1결당 2두로 고정되어 있는 반면 자신의 몫인 조(租)는 감면할수록 자신이 손해볼 수 밖에 없는 구조인지라 사전(私田)에서 스스로 답험을 하는 수조권자에 의한 폐단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京畿敬差官上私田踏驗法。 上言: "科田、功臣田田主不於刈穫前使人踏驗, 或冬深、或改歲後遣人, 皆以實數收租, 佃客之怨尤甚, 有違聖上欽恤之意。 乞使田主, 禾稼未穫前遣人踏驗。" 從之。
경기 경차관(京畿敬差官)[8]이 사전(私田)을 답험(踏驗)하는 법을 올리었다. 상언(上言)하기를, "과전(科田)·공신전(功臣田)의 전주(田主)가 추수하여 거두기 전에 사람을 시켜 답험하지 않고, 혹은 겨울이 깊은 뒤에나, 혹은 해가 바뀐 뒤에 사람을 보내어 모두 실지 수확한 수로써 조(租)를 거두니, 경작하는 사람의 원망이 더욱 심하여, 성상의 흠휼(欽恤)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빌건대, 전주(田主)로 하여금 벼를 베기 전에 사람을 보내어 답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30권, 태종 15년(1415년) 9월 14일 무신(戊申) 1번째 기사
경기 경차관(京畿敬差官)[8]이 사전(私田)을 답험(踏驗)하는 법을 올리었다. 상언(上言)하기를, "과전(科田)·공신전(功臣田)의 전주(田主)가 추수하여 거두기 전에 사람을 시켜 답험하지 않고, 혹은 겨울이 깊은 뒤에나, 혹은 해가 바뀐 뒤에 사람을 보내어 모두 실지 수확한 수로써 조(租)를 거두니, 경작하는 사람의 원망이 더욱 심하여, 성상의 흠휼(欽恤)하는 뜻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빌건대, 전주(田主)로 하여금 벼를 베기 전에 사람을 보내어 답험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30권, 태종 15년(1415년) 9월 14일 무신(戊申) 1번째 기사
상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415년(태종 15년)부터 사전(私田)에 대해서도 관원이 직접 답험을 하는 관답험이 추진되었으나 전주들의 반발로 시행과 번복을 거듭하다 1419년(세종 1년)에 정착하게 된다.
====# 공법(貢法) #====
사전(私田)에 대해서까지 국가에서 답험을 실시하게 되자 답험을 담당하는 관원, 수령의 업무가 과중되었고 답험 실무를 감독하는 경차관의 파견 등에서 행정부담이 크게 늘며 동시에 관원의 부정행위와 역량 미비를 비롯한 문제가 발생하자 이에 대응할 만한 세제 변화가 필요했고 이에 세종은 1444년(세종 26년) 공법을 제정하면서 담헙손실법을 폐지한다.
戶曹啓: "每當禾穀踏驗之時, 或遣朝官, 或委監司, 欲以數多之田, 而及期畢審, 令鄕曲恒居品官爲委官, 委官書員等或所見不明, 或挾私任情, 增減損實, 又當磨勘之時, 文書汗漫, 官吏不能盡察, 姦吏乘間用謀, 換易施行, 非唯輕重失中, 其支待供億之費、奔走之勞, 爲弊不貲。 請自今依貢法, 每一結收租十斗, 唯平安、咸吉道, 一結收七斗, 以除舊弊, 以厚民生。 其因風霜水旱等災傷, 全失農者, 全免租稅。" 命自政府六曹各司及京中前銜各品, 各道監司守令品官, 以至閭閻小民, 悉訪可否以聞。
호조에서 아뢰기를,
"매양 벼농사를 답험(踏驗)할 때를 당하면, 혹은 조관(朝官)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감사(監司)에게 위임하기도 하며, 또 많은 전답(田畓)을 기한 안에 모두 조사하여 끝마치고자 하므로, 향곡(鄕曲)에 늘 거주하는 품관(品官)으로 위관(委官)을 삼았는데, 위관(委官)과 서원(書員) 등이 혹은 보는 바가 밝지 못하고 혹은 사정에 끌리어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며, 덜기도 하고 채우기도 하며, 또 마감(磨勘)할 때에 당하여는 문서(文書)가 호번(浩繁)하여 관리들이 이루 다 살필 수가 없는 틈을 타서 간활한 아전(姦吏)들이 꾀를 부려서 뒤바꾸어 시행하게 되오매, 비단 경중(輕重)이 적중(適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지대(支待)하는 비용과 분주(奔走)히 내왕하는 수고 등 폐단이 적지 않사오니, 청하건대 이제부터는 공법(貢法)에 의거하여 전답(田畓) 1결(結)마다 조(租) 10말(斗)을 거두게 하되, 다만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만은 1결(結)에 7말(斗)을 거두게 하여, 예전부터 내려오는 폐단을 덜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할 것이며, 그 풍재(風災)·상재(霜災)·수재(水災)·한재(旱災)로 인하여 농사를 완전히 그르친 사람에게는 조세(租稅)를 전부 면제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47권, 세종 12년(1430년) 3월 5일 을사 4번째기사
호조에서 아뢰기를,
"매양 벼농사를 답험(踏驗)할 때를 당하면, 혹은 조관(朝官)을 보내기도 하고, 혹은 감사(監司)에게 위임하기도 하며, 또 많은 전답(田畓)을 기한 안에 모두 조사하여 끝마치고자 하므로, 향곡(鄕曲)에 늘 거주하는 품관(品官)으로 위관(委官)을 삼았는데, 위관(委官)과 서원(書員) 등이 혹은 보는 바가 밝지 못하고 혹은 사정에 끌리어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며, 덜기도 하고 채우기도 하며, 또 마감(磨勘)할 때에 당하여는 문서(文書)가 호번(浩繁)하여 관리들이 이루 다 살필 수가 없는 틈을 타서 간활한 아전(姦吏)들이 꾀를 부려서 뒤바꾸어 시행하게 되오매, 비단 경중(輕重)이 적중(適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지대(支待)하는 비용과 분주(奔走)히 내왕하는 수고 등 폐단이 적지 않사오니, 청하건대 이제부터는 공법(貢法)에 의거하여 전답(田畓) 1결(結)마다 조(租) 10말(斗)을 거두게 하되, 다만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만은 1결(結)에 7말(斗)을 거두게 하여, 예전부터 내려오는 폐단을 덜게 하고,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할 것이며, 그 풍재(風災)·상재(霜災)·수재(水災)·한재(旱災)로 인하여 농사를 완전히 그르친 사람에게는 조세(租稅)를 전부 면제하게 하소서."
하니, 명하여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47권, 세종 12년(1430년) 3월 5일 을사 4번째기사
세종은 5개월 동안 중앙 관료부터 일반 백성까지 무려 17만명이 넘는 찬반 여론조사를 거쳐 본격적으로 공법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였다.[9]
이후 공법상정소(公法詳定所)와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전국 토지 등급 재조정 및 최고세액 조정 등 제도적 시행착오를 거쳐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정하고 등급에 따라 각기 다른 자를 사용해 1결당 면적을 달리하여 연분 등급이 같으면 1결당 동일한 조세를 부과하는 전분 6등법을, 농사의 풍흉에 따라 최고 상상년(上上年) 1결당 20두에서 최저 하하년(下下年) 1결당 4두까지 징수토록 하는 연분 9등법을 통해 세액을 정하는 공법이 확정되었다.[10]
공법의 시행으로 답험손실법보다 더욱 예측가능하고 효율적인 조세체계가 확립되었고 백성들의 실질적인 세부담도 줄어들게 되었다. 공법과 관련한 더욱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기사를 참조하자.
그러나 한편으로 공법 체계는 판정과 운영이 복잡하고 임진왜란 이후 황폐화된 국토 사정상 부담되는 세율로 인해 1결당 4두로 조세[11]의 부과를 고정시키는 정액세제 방식으로 전환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1635년 시행된 영정법이다.
3.2.1. 영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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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 비총법 #====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의 비옥도만을 반영하여 결당 4두로 조세를 고정키는 것은 공평한 조세로 평가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17세기 후반부터 대동법의 시행으로 토지에 부과되는 세의 규모가 대폭 확대됨에 따라 전반적인 조세제도의 재조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이앙법(移秧法)이 전국적으로 보급됨에 따라 생산력의 증대, 토지 소유 관계의 분해에 따른 향촌 사회 구성의 변동 등 여러 사회 경제적인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제도적 방안으로 비총법이 숙종 연간부터 시작되었으며, 1760년(영조 36)에 제도화되었다.
당해 연도 농사 풍흉을 고려하여 이를 이전의 유사한 연도와 비교하여 올해 징수할 총액을 결정하고 그 총액을 할당 징수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비총(比總)'은 총액을 당해 연도와 유사한 연도를 비교한다는 의미이다.
만기요람(萬機要覽), 대전통편(大典通編) 등의 법전에 조문으로 실린 비총법은 대동미, 삼수미 등 주요 전세 외에도 노비의 신공(身貢), 어세(漁稅), 선세(船稅) 등 잡세 징수에 광범위하게 적용되었다. 비총법은 이후 1894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시행되었다.
3.3. 수조권의 변화
3.3.1. 직전법
과전법은 현직 및 퇴직 관료들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수조권을 부여했다. 그래도 조선 초기는 관료의 수가 워낙 부족했고, 재산을 뺏겨 삐친 유력 집안들 역시 조정에 출사를 할 일이 없다보니 국유지가 충분했다. 그러나 유교적인 법도상, 혼자가 된 귀부인의 재혼이 힘들어 수신전[12]과 휼양전[13] 등을 내려주면서 조금씩 잠식되기 시작했다.革科田, 置職田。
과전(科田)을 혁파(革罷)하고 직전(職田)을 설치하였다.
세조실록39권, 세조 12년(1466년) 8월 25일 갑자 5번째기사
과전(科田)을 혁파(革罷)하고 직전(職田)을 설치하였다.
세조실록39권, 세조 12년(1466년) 8월 25일 갑자 5번째기사
1466년(세조 12년) 사망한 관리의 처와 자식에게 지급되어 과전을 승계하는데 활용되었던 수신전과 휼양전을 폐지하고 이를 몰수하여 직전(職田)으로 전환하였다. 또한 산관(散官)[14]을 토지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여 현직 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도록 하면서도, 각 관품(官品)에 대한 직전의 분급액과 지급 범위도 과전에 비하여 크게 축소하였다.
3.3.2. 관수관급제
직전법의 시행으로 관료들이 퇴직 후 또는 사망 이후 가족들의 생계가 보장되지 않게 되자 관료들이 재직 중 지급받은 직전(職田)에서 전조(田租)를 규정 이상으로 수탈하였다. 이에 1470년(성종 1년) 직전세(職田稅)로 전환하고, 국가가 경작자로부터 직접 수조하고 관료나 공신의 수조권을 폐지하였으며 수조권자분의 전조(田租)는 국가가 전주(田主)에게 지급하는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국가에서 토지 및 농민을 직접 지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3.3.3. 폐지
議政府啓曰: "勤勞王事, 臣子職分之當爲, 雖有安民定遠之功, 固無心於褒賞。 然賞罰, 人主之大權。 古昔聖帝明王, 亦未嘗偏廢, 其於行賞, 或以田民物貨, 或以官爵, 惟其輕重大小, 一用權衡而已。 今有小功, 輒賜田民, 恐違權衡。 今詳畿內各品科田元數, 不過六萬八千餘結, 而三功臣田外, 其他以一時功勞賞賜之田, 大槪已至三千餘結。 其臧獲始至五百, 幷許子孫相傳。 一時之功, 或輕或重, 無代無之, 自今至千萬世, 有功者必賞, 以畿內有限之田與有限公賤, 必將難繼。 高麗五百年間, 有功賜田民者數人, 亦未聞有傳于子孫者也。 且元從功臣回軍功臣, 皆自太祖潛邸, 積年服事, 或一心推戴, 或倡義回軍, 其功甚大, 非一時之功之比。 然其賞賜田民, 皆止其身, 不許子孫相傳。 乞自今功勞重大, 時議翕然者, 方許田民, 然亦止其身, 勿令世傳。 其他一時之功, 或官爵或廐馬錢帛, 隨宜行賞。"
從之。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왕사(王事)에 근로(勤勞)하는 것은 신자(臣子)의 직분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므로, 비록 백성을 편안히 하고 먼 곳을 평정한 공(功)이 있사와도 진실로 포상(褒賞)에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상벌(賞罰)은 인주(人主)의 큰 권한으로, 예전의 성제(聖帝)와 명왕(明王)들도 일찍이 한쪽만을 폐(廢)하지 아니하여, 그 행상(行賞)에 있어 전민(田民)과 물화(物貨)로써, 혹은 관작(官爵)으로써 오직 그 경중 대소(輕重大小)를 하나의 저울(權衡)처럼 썼을 뿐입니다. 지금에는 작은 공(功)이 있으면 문득 전민(田民)을 내려 주오니 권형(權衡)에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이제 기내(畿內)의 각품 과전(各品科田)의 원수(元數)를 자세히 살펴보면 6만 8천여 결(結)에 지나지 않사온데, 삼공신전(三功臣田) 외에 기타 일시(一時)의 공로(功勞)로 상사(賞賜)한 전지(田地)가 대개 이미 3천여 결에 이르고, 그 노비만도 거의 5백에 이르는데 모두 자손에게 전해 줄 것을 허가하였사오니, 한때의 공로가 혹 경(輕)하고 혹은 중(重)하기는 하지만 없는 대(代)가 없사오니, 이제부터 천만세(千萬世)에 이르도록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사(賞賜)하되, 기내(畿內)[15]의 유한(有限)한 전지(田地)와 유한(有限)한 공천(公賤)으로는 반드시 장차 잇대기 어려울 것입니다. 고려(高麗) 5백 년간에 공(功)이 있어서 전민(田民)을 하사한 자는 두어 사람이온데, 역시 자손에게 전(傳)한 자가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원종 공신(元從功臣)이나 회군 공신(回軍功臣)은 모두 태조(太祖)의 잠저(潛邸) 때부터 여러 해 동안 섬겨서 혹은 한마음으로 추대(推戴)하였삽고, 혹은 의(義)를 주창하고 회군(回軍)하였사와 그 공이 매우 크므로, 한때의 공로에 비교할 것이 아니오라, 그 상사(賞賜)한 전민(田民)은 모두 그 자신에 그쳤고, 자손에게 전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청하옵건대, 이제부터는 공로가 중대(重大)하여 시의(時議)가 흡연(翕然)한 자라야 전민(田民)을 주기를 허락하옵되, 역시 그 자신에 그치게 하여 세전(世傳)하지 말게 하옵고, 기타 일시(一時)의 공로는 관작(官爵)이나 혹은 구마(廐馬)·전백(錢帛)으로써 적당함에 따라 상을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88권, 세종 22년(1440년) 3월 21일 계해 2번째기사
從之。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왕사(王事)에 근로(勤勞)하는 것은 신자(臣子)의 직분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므로, 비록 백성을 편안히 하고 먼 곳을 평정한 공(功)이 있사와도 진실로 포상(褒賞)에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상벌(賞罰)은 인주(人主)의 큰 권한으로, 예전의 성제(聖帝)와 명왕(明王)들도 일찍이 한쪽만을 폐(廢)하지 아니하여, 그 행상(行賞)에 있어 전민(田民)과 물화(物貨)로써, 혹은 관작(官爵)으로써 오직 그 경중 대소(輕重大小)를 하나의 저울(權衡)처럼 썼을 뿐입니다. 지금에는 작은 공(功)이 있으면 문득 전민(田民)을 내려 주오니 권형(權衡)에 어긋날까 두렵습니다. 이제 기내(畿內)의 각품 과전(各品科田)의 원수(元數)를 자세히 살펴보면 6만 8천여 결(結)에 지나지 않사온데, 삼공신전(三功臣田) 외에 기타 일시(一時)의 공로(功勞)로 상사(賞賜)한 전지(田地)가 대개 이미 3천여 결에 이르고, 그 노비만도 거의 5백에 이르는데 모두 자손에게 전해 줄 것을 허가하였사오니, 한때의 공로가 혹 경(輕)하고 혹은 중(重)하기는 하지만 없는 대(代)가 없사오니, 이제부터 천만세(千萬世)에 이르도록 공이 있는 자는 반드시 상사(賞賜)하되, 기내(畿內)[15]의 유한(有限)한 전지(田地)와 유한(有限)한 공천(公賤)으로는 반드시 장차 잇대기 어려울 것입니다. 고려(高麗) 5백 년간에 공(功)이 있어서 전민(田民)을 하사한 자는 두어 사람이온데, 역시 자손에게 전(傳)한 자가 있었음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또 원종 공신(元從功臣)이나 회군 공신(回軍功臣)은 모두 태조(太祖)의 잠저(潛邸) 때부터 여러 해 동안 섬겨서 혹은 한마음으로 추대(推戴)하였삽고, 혹은 의(義)를 주창하고 회군(回軍)하였사와 그 공이 매우 크므로, 한때의 공로에 비교할 것이 아니오라, 그 상사(賞賜)한 전민(田民)은 모두 그 자신에 그쳤고, 자손에게 전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청하옵건대, 이제부터는 공로가 중대(重大)하여 시의(時議)가 흡연(翕然)한 자라야 전민(田民)을 주기를 허락하옵되, 역시 그 자신에 그치게 하여 세전(世傳)하지 말게 하옵고, 기타 일시(一時)의 공로는 관작(官爵)이나 혹은 구마(廐馬)·전백(錢帛)으로써 적당함에 따라 상을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88권, 세종 22년(1440년) 3월 21일 계해 2번째기사
위 실록 기록을 요약하자면, 과전으로 지급할 토지는 유한하고 더구나 많지도 않은데, 고려도 500년 동안 공신에게 공신전을 하사한 적이 거의 없고 심지어 소유권을 승계시킨 적이 없으므로 우리(조선) 조정에서도 공신전 상속은 못 하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이처럼 1440년(세종 22년) 공신전의 세습을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조 즉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공신이 책봉되는 과정에서 그러한 원칙이 유명무실해진 것으로 보인다.
단종 1년(1453)의 정난공신전(靖難功臣田) 1,720결, 세조 1년(1456)의 좌익공신전(佐翼功臣田) 4,190결, 세조 13년의 적개공신전(敵愾功臣田) 4,580결 등의 지급이 이어졌고, 똑같은 사람이 여러 번 공신에 오르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역적들의 땅과 재산을 뺏아 공신에게 주고, 심지어는 그 가족까지 노비로 만들어 공신에게 하사했지만 그래도 점점 줄 땅이 부족해졌다. 그래도 국왕은 감사의 의미로 더 얹어주기 십상이었고, 세(稅)의 납부가 면제되는 공신전은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될 뿐이었다. 16세기 이후 양반 지배계층이 사유한 토지가 경제적 기반으로 자리잡았고, 과전법은 더 이상 제도로서 유지될 필요조차 상실하였다.
16세기에 이르면 직전세의 지급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가 그 분급액도 줄어들고 연분(年分)도 거의 하하년(下下年)으로 고정되어 직전의 경제적 의미는 미미해졌다. 결국 1556년(명종 11)에 직전 분급의 중단을 공포한 후 이것이 장기간 계속됨으로써 직전은 유명무실해졌고,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직전법 폐지 이후 조선에서는 소유권에 입각한 지주전호제가 발달하게 되었다. 고려 말 수취제도의 혼란 역시 이 때문에 일어났는데, '지주전호제가 발달한다' 라는 말은 국가가 토지에 대한 독점적인 권리 및 이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어느 정도 포기했다는 말이다. 결국 양극화를 막지 못한 조선은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속에 안으로부터 무너져 가게 되었다.
4. 영향
고려 말 유력 호족들이 소유했던 다수의 농민들이 국가에 세금을 낼 자영농이 되면서 국가 재정이 크게 확대되었다. 면세의 범위가 엄청나게 줄어들고,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개별수조권을 국고수조지로 편입했기 때문이었다. 국가가 조세를 직접 거둬 국가 재정이 더욱 탄탄해졌고 호족들에게서 빼앗은 사병을 중앙군에 두고 운영할 수 있었다.고려시대의 수조권 개념에서 조선의 소유권 패러다임으로 전환 운운하는 견해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 토지와 소유권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그중에서도 수조권 개념은 국유지에서 나는 소출을 개인에게 수조권만 분리해 내려준다는 개념이다. 그러나 고려 때 토지 역시 민전 등 사유지가 대부분이었고, 소유자는 매매와 상속이 자유로웠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토지 제도의 차이를 수조권과 소유권 개념으로 단순화해 생각할 수 없다.
고려 때도 사전은 유력 집안의 소유로, 100년 동안 이어진 무신정권 때 나눠주던 녹과전도 말만 수조권이었지 소유권이 인정되었었고, 공민왕이 암살된 후 심화된 토지 겸병 역시 토지 소유의 양극화에서 오는 병폐였다. 과전법을 실행하면서 불태웠던 고려의 토지 문서는 물론, 염흥방이 조반을 때리고 토지를 빼았은 것도 전부 소유권 다툼이었다.
[1] 이로써 서민들도 쌀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아직도 쌀밥을 '이씨(李氏) 밥'이라는 뜻의 '이팝'이라 부르는 이유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는 민간 어원으로, '입쌀밥'이 줄어 이밥이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2] 수조권이 공공기관에 귀속[3] 수조권이 개인에게 귀속[4] 토지를 빌려 경작하고 소작료를 지불하는 농민[A] 전답의 소유권자[6] 쉽게 말해 공무원이 국가로부터 월급 대신 국가가 지정한 농지에서 경작하는 농부(소유자)로부터 직접 쌀을 월급 대신 받고, 자신 몫을 제외한 국가의 몫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 있다.[A] 전답의 소유권자[8] 조선시대 지방 실무에 관한 임무를 왕으로부터 부여받고 파견되던 직책. 수령에 대한 감독과 지방행정, 사법, 군사를 총괄하는 관찰사와 달리 왕명에 따른 특정 임무를 수행하고 중앙으로 복귀한다. 보임되는 품계도 당하 참상관.[9] 한편, 공법에 대해 일찍부터 세종과 그 뜻을 함께했던 정인지는 공법 시행 논의를 부활시키고 실제 실무책임자가 되어 삼남지방의 토지 등급을 정하는 등 공법 시행에 실무적 일익을 담당하였다.[10] 비육풍구로 외우면 쉽다[11] 관수관급제 이후 조(租)와 세(稅)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명종대 이후 실질적 의미의 과전법 제도가 붕괴되면서 임진왜란 이후에는 수조권자 몫의 조(租)와 국가에 납부할 세(稅)를 붙여 토지에 대하여 국가가 직접 부과하고 수취하는 오늘날의 세금 개념과 다를 바 없으므로 이와 같이 서술한다.[12] 관료인 남편이 죽은 뒤, 부인이 재가를 하지 않고 혼자 살면 50%를 물려 받았다. 미성년인 자식이 있으면 100%를 물려 받았다.[13] 부친이 관료인데 부모 모두가 죽으면, 아들이 20세가 될 때까지 100%를 물려받았다. 만일 20세 이전에 관리가 되었다고 해도 부친이 관직에 있었던 과전보다 적은 양이면 휼양전이 그대로 적용되었다.[14] 퇴직 관리 우대, 음서, 공명첩 등에 따른 업무가 없는 관직. 녹봉은 복무에 대한 반대급부이므로 지급받지 못하지만, 신분계급의 증명이나 군역 및 요역에서 제외되는 특권이 있다.[15] 경기도 내(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