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10 23:04:55

이성계 여진족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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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교차검증
3.1. 조선왕조실록3.2. 이안사 관련3.3. 태조실록3.4. 이지란 관련3.5. 이안사의 고위직 관련3.6. 막내 양위는 몽골의 풍습?
4. 총론
4.1. 문헌 근거의 부재4.2. 지역적 특성 관련4.3. 여진의 상황4.4. 여진족의 관점4.5. 여진족의 범위4.6. 족보의 신뢰성 관련
4.6.1. 반론: 고려의 폐쇄적인 특징4.6.2. 반론: 고려의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의식4.6.3. 반론: 귀족 계급과의 혼인
4.7. 조선의 여진계 풍습 부재4.8. 논제의 핵심
5. 결론

1. 개요

이성계조선의 건국군주이므로 조선까들은 그 뿌리를 흔들기 위해서인지 이성계 출신에 대해 여진족설, 달단(몽골)족설, 화교설 등 갖가지 설을 만들어 주장하고 있다. 이성계 여진족설은 그러한 사이비 역사학 중의 하나다.

2. 상세

이성계 여진족설은 가장 많이 알려져서 한국의 조선까 뿐 아니라 외국의 혐한들, 그리고 이들에게 편승한 한국의 국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단골 소재(?)다. 심지어 미디어에 자주 회자되는 역사 강사인 설민석이 방송 중에 주장했을 정도로 널리 퍼진 오류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의 식민사관인 만선사관이 그 기원인데 만선사관은 한반도 및 한국계가 만주 세력에게 지배+종속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식민사관이다. 이 식민사관에 따르면 한반도계인 태조 이성계가 만주 세력인 여진족들을 지배한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대표적인 일본 역사학자로는 미야와키 준코(宮脇淳子)가 있다.

하지만 태조 이성계 이후에도 광해군 이전까지 여진족들은 조선에게 조공을 바치고 조상의 나라라고 칭하는 등 청나라를 건국하기 전까지 조선을 숭상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이 타 민족에게 상국 대우를 받았던 것은 애써 무시하고 조선이 타민족에게 상국 대우를 해준 것만 보고서 한민족은 열등한 민족으로 판단하는 편향된 역사관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계 여진족설 가운데에는 이성계의 어머니인 의혜왕후 최씨의 친정이 중국 등주 출신으로 현재 중국 산둥성 펑라이시에서 함경도로 이주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등주란 산둥성이 아닌 원나라 쌍성총관부 관할 안변군(案邊郡) 즉 등주(登州)를 말한다. 등주(登州)는 산둥성 등주와 쌍성총관부 등주 2곳이 있지만 안변군(案邊郡)은 이곳 밖에 없다. 즉 안변군의 이칭(異㛵)이 바로 등주(登州)이다. 안변군은 삭방도에 속했는데, 삭방도는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이다. 안변군은 위치가 함경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다보니, 1946년 9월 함경남도에서 강원도로 행정구역이 개편되었다.

의혜왕후 최씨의 부친의 원래 성씨는 조씨(趙氏)로 천수천호(宣授千戶) 조조(趙祚)이다. 이자춘이 조조의 집에 들렀는데 그 딸이 용꿈을 꾸자 이자춘에게 시집보내고, 그 복을 전부 받고자 자신도 조씨(趙氏)에서 외가의 성인 최씨(崔氏)로 바꾸고, 이름도 이자춘의 자(字)인 한기(閑奇)로 개명하였다.

고대 혈통 문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과학적으로 알아내기가 힘든 편이라 해결이 안 된 문제가 많으며, 역사와 소설을 구분 못하는 사이비들이나 제멋대로 역사를 왜곡날조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역사는 사실이고 사료나 과학, 논리 등을 이용하여 사실을 알아내거나 그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명확한 근거가 나올 때까지는 확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승자가 사서를 날조할 수 있을지언정 이미 발생한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오늘날의 역사학은 학문이고 과학적 방법론으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지 감정적으로 맘대로 날조해도 되는게 아니다.

일본 위키에 나오는 것처럼 혐한들이 대놓고 왜곡을 벌이기도 하지만 저런 걸 볼 때는 명확한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편이 좋다. 물론 저런 이상한 학자들이 일본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는 이상 확정적 정설이니 세계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것들은 다 헛소리에 불과하다. 일본에서도 제대로 된 학자나 학계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소리들을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학설에 반대하는 의견이 나와야 다른 사람들의 관심도 받을 수 있고 자신도 관련된 연구를 더 할 수가 있기 때문.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근거라며 들이대는 주장들도 보면 다 반박이 가능한 수준이라 신빙성이 꽤나 떨어진다.

3. 교차검증

3.1. 조선왕조실록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따르면 전주 이씨로, 본래 전주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근거하던 가문 출신이라지만 정작 전주에 있던 시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역대 선조로 기록된 인명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 교차검증이 제대로 안되는 것은 본디 본래 전주 이씨가 아니라는 근거는 될지 몰라도 이성계 일족이 여진족이라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여진족이 아니란 게 검증이 안되면 무조건 여진족? 게다가 족보를 구매해서 윤색할거라면 논란거리가 더 적은 집안들이 한둘이 아닌데 굳이 고려사 최악의 역적인 이의방 집안의 족보를 사놓고서는 어떻게든 이의방의 존재를 감추려 안달을 할 리가 없다.
      이의방은 직접적으로 의종을 시해하라고 교사한 전과가 있다.[1]꽤 임팩트있는 행적이라 그런지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이 장면이 강렬하게 나왔었다. 고려사를 통틀어 신하가 왕을 죽인 사례는 강조, 이의방, 홍륜의 3명(이의방의 사주를 받은 이의민까지 넣으면 4명) 뿐이다. 홍륜 사건은 이성계가 출사한 이후의 일이고, 강조는 목종을 시해하긴 했어도 현종을 세워 나라를 안정시켰고 이후 사정이 어찌되었건 외적에게 절개를 지키다 죽었다는 실드거리라도 있지만 이의방은 당대 고려사회에서 그야말로 탑클래스의 역신 중 역신이다. 이의방의 의종 시해교사는 사마소가충조모(삼국지)를 성제, 성쉬형제를 부추겨서 시해를 교사한 것과 똑같다.
      또 목조 이안사는 고려를 배신하고 원에 귀부한 정황이 실록에 명명백백히 실려 있는데 족보를 날조할거라면 굳이 이안사를 매국노로 만들고 변명하느라 애를 쓸 이유도 없다. 누구의 배신으로 원에게 패배하고 끌려갔는데 당당한 모습을 보여 원에서 감탄하며 벼슬을 어쩌구 하는 식으로 미담 꾸미는 건 일도 아니다. 어차피 원나라도 망하고 없는데 딴지 걸 사람도 없고 총서에서 한 번 언급하고 지나가는거라 승정원일기 같은 데 흔적이 남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그냥 원에서 꼬시니까 넘어갔다고 쿨하게 인정해버리고 들어간다.

3.2. 이안사 관련

  •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 그리고 또 동북면으로 이주할 때 그에 딸린 1백 70여 가(家)가 따라서 같이 이주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1가는 현대의 핵가족보다 훨씬 큰 집단이었고 이런 대규모 가구가 유력 세력가를 따라 한꺼번에 멀리까지 이동하는 것은 농경사회보다 유목사회의 모습에 가깝다?
    • 지금이야 거의 전국토가 개간되어서 농사 하면 그냥 원래 있는 논밭에 씨 뿌리고 일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지만 과거의 농사는 근세까지도 나대지나 삼림, 늪지에 대한 대대적인 개척과 개간작업이 필요했다. 전주 인근 호남평야의 개척이 산기슭에서 평원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 고려시대의 일이다. 즉 당시에는 사람이 사는 마을고을을 떠나면 지금처럼 어디나 넓은 농경지가 펼쳐지는 게 아니라, 그저 들판과 숲이 펼쳐질뿐이었다.
      특히 호남평야는 면적에 비해 하천의 유량이 매우 부족하다. 교과서에서는 만경강과 동진강이 있어 물이 풍부 운운하지만 전북지역에서는 이 대목에서 실소한다. 지금도 만경강은 금강 상류 용담댐의 물을 도수터널을 통해 공급받아 버티는 중이며 이 때문에 전북과 충남 간의 물 분쟁은 오래된 갈등 이슈이다.물 한줄기 안보이는 안주평야보다얀 낫다 때문에 저수지 축조 등의 토목관개사업이 수반되어야 했다. 그래서 강가나 산지가 먼저 개간된다. 산 근처는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농사지을 수 있지만, 평지는 그런거 없다.[2]
      그렇기 때문에 이런 대대적인 개척사업을 진두지휘할 지방 유력호족의 지위가 이후 시기에 비해 훨씬 강력했던 것이며, 다량의 노동력과 그 노동력을 통솔하는 유력자가 없이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개개인의 황무지 개간이라는 매우 고된 작업을 의미했다. 교과서에서 선사시대 쌀농사 연대를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바로 초기 쌀농사가 대량의 노동력을 요구하며 이런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체제, 정치체제의 등장 시기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지의 개간률과 이에 대한 정부의 통제력이 높아지면서 향리의 권력이 축소된 조선시대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한참 뒤인 일제강점기에도 저수지나 수로 등 관개시설 확충을 위해 지역마다 수리조합을 만들고 이것이 수탈의 도구였던 것을 보면 대체 쌀농사를 위한 노동력과 자본이 얼마나 필요한건지 대충 가늠할 수 있다.
      게다가 이 호족들은 사병을 통해 치안까지 제공했고, 지도자가 도망친 상황에서 이안사와 싸우던 안렴사나 별장이 남은 이들에게 정치적 보복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으니 지역민들도 그와 함께 이동할 동인은 충분했다. 이에 반해 유목민은 끊임없이 물과 풀을 찾아서 돌아다녀야 하니 오히려 흩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여기에서 바로 장자들을 빨리 독립시켜 내보내고자 말자상속이라는 특유의 상속시스템이 나온 것이다.
      이들은 거주를 집단으로 할 지언정 생업 목적의 이동을 대집단으로 하지는 않는다(물과 풀이 빨리 고갈되니까). 지도자를 따라 집단으로 이주하는 것이 모두 유목민이라면, 후한 말에 유비를 따라 피난간 형주인 10만은 사실 남중국에 살던 흉노족이었다는 식의 얘기가 된다. 게다가 동만주의 여진족들은 반농반수렵민들이지 유목민이 아니다.[3]

3.3. 태조실록

  • 태조실록 총서에서 이안사가 '석성(石城)을 쌓아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거나, 도조 이춘이 함주로 이주할 때 이주하는 이유로 목축(牧畜)하는 데 편리함을 언급했다는 점으로 농업보다 목축의 비중이 높았던 집단으로 보인다?
    • 우선 원사료 내용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원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斡東東南三十餘里, 有海島曰者考羅, 北連於陸。 穆祖築石城, 以放牛馬。

      알동의 동남쪽 30여리에 자고라라는 해도(섬)가 있는데 북쪽으로 육지에 닿았다. 목조가 석성을 쌓아 우마를 놓아 먹였다.

      즉 알동 본토에서 목축을 한 것도 아니고 따로 떨어진 섬을 목장으로 삼은 것이며, 이것은 고려시대부터 유구한 전통이었다. 만약 이안사가 정말 반농반목의 여진족이라면 바닷가 섬에 뚝 떨어진 목장을 만들 게 아니라 자신들의 생활터전 가까이에서 말을 기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동아시아 농업의 알파요 오메가인 소야 말 할 것도 없고, 말은 농경민족에게도 이동수단 혹은 군사자원으로서 매우 중요했다. 전술했듯이 13세기의 유력자들은 사병을 보유하여 집단의 안전을 도모했는데 전근대에 말은 군사력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가축이었다. 도조의 사례를 보면 알겠지만 천호직이라는 게 중앙집권국가의 지방관처럼 안정된 영역을 가진 지위가 아니라 다른 천호 및 부족들과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꽤 고달픈 신세라 충분한 기병이 없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당시 함흥 이북의 동북면은 미개척된 산림지대로 맹수가 우글거리는데다가 기후 문제로 토지의 생산성이 낮았다. 그러므로 농업과 수렵을 병행하는 것은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고, 같은 환경에 속한 여진족들과 생활양식이 겹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또한 이후 도조가 알동에서 쫓겨나 재기할 때는 등주(안변) 호장 최기열에게 장가를 들어 영업전을 경작하면서 알동에서 남하하여 합류한 주민들을 모아 함주로 북상한 것인데 이것만 봐도 농업보다 목축이 위주였다는 주장은 별 근거가 없다. 지역 호족 쯤 되는 사람이 (고려인 입장에서는)농사도 지을 줄 모르는 여진족놈에게 딸을 후처로 주어 경작을 맡길 수는 없다.

3.4. 이지란 관련

  • 이성계의 선조들을 보좌하는 장수들은 퉁두란을 비롯해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는데, 중세 사회에서 특별한 이유로 엮인 것도 아님에도 순수 농경지역 출신 지도자인 이성계 집안을 순순히 따랐다는 점이 역시 납득하기 힘든 점이다?
    • 여진족 데리고 다닌다고 다 여진족이라는 논리대로면 고려시대의 유금필도 여진족들에게 대추장으로 추대되었고 이징옥은 여진족과 함께 난을 일으키려 시도했으니 여진족이라는 논리가 성립된다. 야인들은 통일된 정치체제를 이룩한 역사와 경험이 일천한 탓에 일신의 무력에 경도되어 굴복하는 경향이 컸을 뿐이며, 이성계 개인의 무력은 충분히 여진 부족장들을 압도할 수준이었다. 어차피 사료상으로도 여진족들이 전주 이씨 일가를 동류로 여기지 않았고 심지어는 다구리까지 놓은데다가 그렇게 도망간 이춘을 알동 사람들이 따라 내려왔다는 대목으로 간단히 반박된다. 정작 그 동북면 여진족들 중에 이성계를 따라 한국계 왕조에 완전히 정착한 것은 이지란 하나였다.

3.5. 이안사의 고위직 관련

  • 순수 농경지역인 전주 출신의 목조가 북방으로 이주한 후 금방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지위를 원황제에게서 하사받는데 뜨내기에 불과한 목조에게 뜬금없이 고위직을 내린 것이고 이런 사실을 믿기 어렵다?
    • 다스리는 영지와 영민이 많은 세력가이자 실력자라서 그 영민들을 관리하라고 천호장 지위를 받는건 것이므로 농경이고 유목이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게다가 이 역시 사료의 서술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이안사는 삼척 시절부터 무리를 이끌고 왜구와 몽골의 침략을 막은 공적으로 고려 조정에서도 의주병마사 직함을 내릴 정도로 의주(원산)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래서 원에게서 줄기찬 러브콜을 받아 귀부하여 천호장과 다루가치직을 받은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덜컥 항복하고 천호장이 된 것이 아니다. 한양 조씨 집안은 아예 귀부하고 쌍성총관 자리를 먹었는데, 이런 논리면 한양 조씨도 여진족 집안이 된다. 어차피 정복자인 몽골의 입장에서는 고려인이건 여진족이건 한인이건 색목인이건 간에 자기들보다 아래인 것은 매한가지이며 그저 각자의 능력과 세력이 더 중요한 고려요소였을 뿐이다. 반면 터줏대감인 여진족들은 이 굴러온 뜨내기에 대해 분명히 보복을 가해 내쫓기까지 했다.

3.6. 막내 양위는 몽골의 풍습?

  • 몽골을 비롯한 중세 동북아의 유목부족들은 대개 자식들이 성년이 되면 각자의 상속분을 챙겨 분가한 이후에 막내가 아버지의 남은 재산 모두를 상속받았다. 그러므로 태조와 태종이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가 아닌 막내에게 양위한 점은 몽골 등 북방민족의 일반적 풍습과 같다?
    • 실록에 이미 답이 나와있다. 처음부터 막내인 의안대군을 책봉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유교국가에서 그럴 수도 없었고. 실록에서 태조가 먼저 세자로 밀었던 건 무안대군 이방번이고 그는 신덕왕후의 입장에서는 장자였다. 안변한씨를 왕후 시호도 주지 않을 정도로 홀대했던 당시 상황에서 이방번에 대해 '적장자' 대우를 시도했던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방번이 세자 경쟁에서 밀린 것은 기록상으로는 성격적 결함, 정치적으로는 고려왕실의 사위라는 입지상의 확실한 문제가 있다. 태종이 세종에게 승계한 것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부적격자라서 그랬단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위에서도 말자상속에 대해 잠깐 언급했듯이 말자상속이라는 건 오히려 말자보다 장자에게 무리와 가축과 새로운 땅이라는 더 큰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청나라 같은 경우는 특수한 사례였다. 이민족 정복왕조인데다가 만주+몽골+중화의 동군연합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혈통보다는 능력을 극단적으로 중시할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청나라도 순치제부터는 가급적 장남을 계승시키려고 했다. 이미 능력자인 도르곤(청태종의 동생이자 실질적인 누르하치의 적자.)이나 호우거(청태종의 장남이지만 서자.)같은 인물들도 있었음에도, 비록 밀당이지만 풀린(순치제)이 즉위했다. 비록 정치적 밀당의 경과긴 해도 순치제는 청태종의 적장자이고 강희제도 순치제의 적자이다.
      즉 유목민족도 정주왕조화 되면 가급적 장자상속을 하거나 장자에게 왕위 대신 인센티브를 주거나 했다. 진왕 보르지긴 카말라가 이런 케이스. 동생인 테무르와 황위 계승 경쟁을 벌였으나 "님은 영지에 칭기즈칸 무덤까지 있는 양반이 황위까지 필요함? 칭기즈칸 무덤이나 잘 관리하셈."라는 여론에 밀렸다.
      조선이 유목민식 말자상속 논리로 이방석을 책봉했다면 골수 반몽주의 사대부들이 이방석의 책봉을 용인했을 리 없다. 당시에도 이방석의 책봉은 사대부들에게 그리 탐탁치 않은 일이었다. 사대부들은 신의왕후 소생들도 이성계의 적자로 여겼고 조선왕조 건국에도 큰 공을 세웠던 반면 신덕왕후 소생은 나이도 어리고 공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성계와 신덕왕후가 방석을 밀었고 거기에 정도전 일파가 숟가락을 올린 덕에 방석이 세자가 되었던 거지 사대부들의 충의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당연하지만 이건 몽골식 말자상속제와는 거리가 먼, 그냥 신덕왕후 태생을 왕위에 올리고 싶어했던 태조 이성계의 고집이었다.

4. 총론

이런 점만 봐도 이성계 여진족설에 대해서는 그닥 신뢰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1. 문헌 근거의 부재

이성계의 혈통이 여진족이라는 주장에는 문헌 근거가 전혀 없다. 이성계의 혈통은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의 서두에 상당히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이안사에서 이성계로 이어지는 혈통은 심지어 외가의 외가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기록상 이성계의 혈통은 고려인 혈통으로만 이어졌다.

역으로 이성계 이전에도 금사, 송막기문 등에는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의 6대조는 완안함보라는 신라-고려 교체기 시절의 인물로 그 계보가 기록되어있는데, 이를 보면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일으킨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물론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이주한 세력이 있다고 해서 북방 세력이 전부 한반도 역사에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여진족들은 이성계 일족을 다른 족속으로 여기고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통두란의 예에서 보듯이 우호적인 교류도 했겠지만, 고려인과 여진족이 서로를 다르게 보았다는 문헌적 근거가 있다.

이성계가 정말 여진족 출신이라면 흔적 남길 곳은 고려 국내 말고도 많다. 명나라에서도 이성계를 이인임의 자손으로 기록했을지언정 여진족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애초에 여진족이라고 봤으면 명백한 고려인인 이인임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지는 않았을 것이며, 그 이전에 이성계를 무고한 윤이, 이초 일당 역시 이인임 자손 운운이 아니라 그보다 몇배는 치욕스러운 여진족 출신 운운하며 요동침공설을 부추겼을 것이다. 이성계가 여진족이라고 주장하면 그 연장선상에서 동만주 여진족들을 규합해 요동침공에 동원한다는 식으로 좀 더 그럴싸하게 말을 꾸며낼 수 있지만 안했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 일족의 이주는 달랑 한 가족이 혼자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만 천호이며, 이안사 휘하에 있던 고려인은 거의 수천호가 된다고 한다. 전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 중앙보다는 민족색이 얕아질지 몰라도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충분히 간직할 수 있다. 기록에 남은 전주이씨의 가계는 철저하게 함흥, 안변 일대 고려계 집안끼리의 통혼을 통해 이어져왔는데 당장 재외 한인커뮤니티만 봐도 줄기차게 한인집안끼리 결혼하며 버티는 경우가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의 고향인 고려는 바로 이웃에 있었으며, 비록 주권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춘의 동복형 이송이나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는 쌍성이 원나라 땅이던 시절에 고려 조정에 출사하기까지 했다.(고선지와는 이래서 다르다.) 고구려가 망하고 왕족 약광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유민들은 무려 500년간(!) 자기들끼리만 통혼하며 버텨왔으며 발해 멸망 이후 발해계 주민들도 금 조정이 적극적으로 한족화시키기 전까지 근 200년간 발해계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고작 조국과의 접경지대에서 4세대쯤 정체성을 고수하는 것 정도는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이런 이주는 당대 상황에서 이성계 일족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보면, 무신 정권을 전후로 해서 고려 사회의 막장화가 가속화하면서 백성들이 유망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성계의 선조처럼, 자기 동네 향리나 지방관과의 마찰이 이주의 원인인 경우도 심심찮게 존재한다. 고려 시대 자체가 주현이 따로 있고, 속현이 따로 있는 시대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영향력이 그렇게 강한 시절이 아니었다.

현대로 따지자면, 이성계 일족은 조선 말에 간도 이주, 개척 시기에 그쪽으로 흘러가 현재 중국의 중국조선족이 된 사람들과 비슷한 경우였다. 이들은 해방 후 60년이 지났지만 자치주를 유지하고 있으며, 장기간에 걸쳐 자신을 민족적으로 여전히 '조선계'인 중국인이라 생각하고 동화되는 중이다. 즉 국가귀속 의식은 중국이지만 민족귀속의식은 여전히 조선(Korea)민족이다. 의무교육을 비롯해 각종 정책으로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현대 중국에서도 이런데, 전근대의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여진 - 고려 관계에서는 그 속도가 더 느리고 영향력도 적을 수밖에 없다.

4.2. 지역적 특성 관련

여진족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의 근거는 고작 당시 정황상 이성계의 선조가 이주한 동북방에 여진족이 많이 살았다는 것 뿐이다. 쌍성총관부가 있는 동북 지역은 중부 지방과는 달리 여진족 역시 꽤 많이 살기는 했다. 사실 이 지역 함흥은 험한 산과 바다로 막혀 지리적 접근성은 떨어지는데, 그 지역 자체는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자연환경, 함흥 평야 지역이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여러 민족이 거쳐간 지역으로(옥저가 있었던 곳이 여기) 시대에 따라 옥저, 고구려, 여진, 고려 등이 경합하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처음부터 고구려 승계의식을 표방하며 일어섰다. 고려가 한반도 중남부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고려의 고구려 승계의식을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현대인들이 많지만, 고려의 중심지인 패서 일대는 광개토대왕 이래 확고한 고구려의 영토였을뿐더러 평양 천도 이후에는 황해도 재령 지역에 고구려 3경인 한성을 두었을 정도로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시되던 곳이다. 수도 평양이 고구려 멸망 이후 강제이주로 황폐화되고 (아마도 고구려화된 말갈계가 주도했을) 후계국인 발해는 고구려의 중심지에서 멀리, 옛 동부여에 가까운 동만주로 밀려난 상황에서 옛 고구려의 인적자원이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던 지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안승과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도 요동 지역과의 연계는 있었으나 중심 거점은 한성이었다. 아예 발해조차 제대로 손대지 못한 평양을 부흥시켰음은 말 할 것도 없다.

고려의 국조인 태조 왕건이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과거부터 이 지역의 여진족들을 회유하고 귀화시키거나, 다른 지역의 고려인들을 이주시킨다거나, 정 안되면 물리적으로 본때를 보이거나 하는 식으로 중요하게 여겨왔다. 공민왕이 함흥 지방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본래 고려 영토"임을 확실하게 선언한 것도 이런 상황탓이다.

이는 조선에 들어와서 마찬가지였는데, 조선 초기에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귀화를 받아들이고 조선인과 결혼시켜주는 등의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이안사가 인망을 얻고 무리를 이끌어 고려 조정으로부터 병마사 직함을 받았다는 대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북방으로의 고려인 이주는 정책적,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로 전혀 특수한 일이 아니다.

4.3. 여진의 상황

당시 여진족은 금나라의 멸망으로 완전히 몰락한 상태라 고려 이상으로 사정이 나빴다. 나라가 없고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가진 민족도 아니고, 문화적인 헤게모니도 상실했다. 그저 몽골의 지배 아래 있는 여러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심지어 고려 북방 지역에서도 야인(野人)이라 불리는 여러 종족 가운데 한 부족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여말선초의 문헌에서 이 지역의 부족들은 '여진'보다는 '야인'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부족 이름을 '여진족'으로 삼는 종족만 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금나라 같은 대제국을 세운 민족이니 역량은 어마어마했으리라는 환상 섞인 추측을 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작 금나라는 파탄국가 수준의 시스템으로 운좋게 화북을 먹었을 뿐이다. 송나라 이전 오대십국 시절 석경당이 중원을 지키는 요충지인 연운 16주를 요나라에게 갖다 바치는 바람에 송나라는 군사적으로 약해졌고 이후 요나라를 멸망시킨 금나라가 이 땅을 물려받아 다시 송나라를 압박했다. 참고로 연운 16주는 만리장성 남쪽이라 이곳을 빼앗긴 이후의 중국 왕조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금나라도 처음부터 화북 전역을 직접 통치할 생각은 아니었고 요나라후진을 세웠듯 장방창이나 유예(남송) 등을 이용해 괴뢰정권을 세우고 간접통치를 시도했으나 장방창은 도망쳐서 남송에 항복해버리고 유예는 막장짓을 일삼은 끝에 남송군에게도 쳐발리는 신세가 되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화북 통치를 떠안은 쪽에 가까웠다.[4] 이처럼 운좋게, 그러나 무리하게 화북을 쳐묵한 탓에 제대로 된 국가 체계가 전무하다보니 남송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세폐 없이는 국정 운영이 안 될 지경이었고 초원지역의 통제에도 실패해 대재앙에 직면하게 되었다.

금나라는 화북평원과 만주를 이어주는 연결고리 격인 오늘날의 북경을 빼앗기고, 이어 금 정부의 통제력이 사라진 만주를 먼저 몽골에게 빼앗긴다. 이후 개봉으로 천도하여 중원 내지 영토로 버티다가 개봉 근처의 채주를 마지막으로 멸망했기 때문에 금나라 시절의 그 막강한 역량은 이 시기 동만주 여진족들에게는 거의 계승된 것이 없었다. 그 결과 원말명초의 격변기에도 만주의 여진족은 나하추 등의 지도 아래 북원의 부용세력으로 동원되거나 부족별로 각자도생의 길을 걸었지 자체적으로 어떠한 통합적인 정치체 구축을 시도해본 바가 관찰되지 않는다. 북방 야인들이 '여진' - '만주'라는 정체성으로 통합하는 건 250년쯤 뒤 후금의 건국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나마도 서만주 건주위 중심의 통합이라 동만주 지역은 변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애초에 만주 국가의 진출방향은 언제나 일관되게 서쪽 방향이었으며 동만주는 동부여발해 정도를 제외하면 역사적으로 변방을 면해본 바가 손에 꼽을 수준이다. 발해 역시 중심지는 동부여 지역에 자리잡았지만 이후 꾸준히 서진하여 건국 초기부터 하북성 일대에서 당과 격전을 치르고 해로를 이용해 산동반도를 공격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조선 건국 직전 당시 동만주-동북면 지역에서 중심이 되는 문화는 원 제국으로서 패권을 잡고 있던 몽골 문화였다. 여진족도 몽골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청나라 시대까지 몽골어가 널리 쓰였고, 만주문자도 몽골문자를 개량해서 만들었을 정도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원 제국의 일부로써 원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생기지 문화적, 민족적 역량이나 색채가 약한 여진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가능성은 낮았다. 물론 이성계는 여진족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고, 그들을 통솔할 수 있는 배경에는 여진족과 문화, 민족 등에서 정체성의 공감&공유가 있겠지만, 그 정체성은 혈통적 정체성이 아니라 동북면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지역적 성격이었다.

만약 이성계 집안이 여진족이라는 혈통적 정체성을 가졌다면 여진족 통합에 나서는 게 이치에 맞다. 하지만 이자춘은 원과 고려 사이에서 고려에 귀순하고 지배층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이성계 가문이 가졌던 여진족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공감&공유과 교류는 지역 기반을 동북면에서 한반도 중심인 개성 - 한양으로 옮기자 단 1세대만에 사라졌다. 동북면 출신 어머니를 둔 정종, 태종조차 태조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본인들도 동북면 여진족과 연결을 강화하거나 과거 영향력을 복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진족 역시 자신들의 윗사람이었던 태조 이성계의 혈족에 전과 같은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여진족 부하라는 이들도 몇번째 얘기하지만 퉁두란 말고는 다들 참교육해서 무릎꿇리고 복종시킨 것이지 무슨 동족의 유대감으로 복속시킨 게 아니다.퉁두란도 쳐맞지만 않았지 사실상 참교육당한 수준 심지어 이원경 같은 경우는 항복할 때 아예 자신의 조상이 고려사람이라며 투항했지 여진족의 ㅇ자도 꺼내지 않았다.

이 점은 고구려-말갈 관계와도 비슷하다. 원래 말갈족은 숙신계열로, 예맥계열의 고구려와 문화도 언어도 달랐지만 고구려가 말갈족들을 무력으로 복속함으로서 말갈족들 중 일부가 고구려에 융화되며 "말갈계 고구려인"같은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인 대조영이 발해를 세웠지만 흑수말갈을 중심으로 한 다른 말갈족은 고구려의 영향이 적었고 정체성이 옅었다. 대조영 같은 경우가 전자고 여진족들은 후자에 속한다.

4.4. 여진족의 관점

만약 여진족 출신이 고려에 귀부해 왕이 될 수 있을 정도였다면 이성계 외에도 고려 중앙조정에서 한자리 차지한 여진족 출신 유력인사가 존재하고, 이성계의 세력형성 과정에서도 동족(?)인 여진족들이 힘을 보태줬어야 합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쪽에서는 정작 퉁두란 외에 딱히 쌍성에서부터 이성계를 따라왔거나, 혹은 이성계와 비슷한 케이스로 중앙에서까지 활동한 여진족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

여진족들 역시 이성계 일족을 자신과 같은 여진족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여진족들은 이성계의 조상 이행리가 고려인이었기에 죽이려 습격했고, 여진족들의 추격으로부터 탈출한 이행리는 이안사가 정착한 두만강 알동에서 쫓겨나 의주(현 원산)에 재정착했다. 퉁두란을 제외한 여진족들은 쌍성 수복 이후에도 줄기차게 고려를 건드렸고, 이성계에게 진압된 이후로는 고려라는 국가가 아닌 이성계라는 개인에게 충성을 바쳤을 뿐이다.

만약 조선왕조가 이성계가 여진족임을 숨기려 했다면 그와 평생을 함께한 퉁두란도 세트로 날조하는 것이 가장 안전했을 것이다. 이성계가 개경에 내려온지 얼마 안되는 여진족임에도 전주 이씨 족보를 구해서 날조할 수 있었다면, 한국사 사상 최강의 권신이 된 뒤엔 의형제인 이지란에게도 적당한 족보 하나 못 구해줬을 리 없다. 이성계를 적장자로 만들기 위해 어엿한 정실 소생의 이원계를 졸지에 서장자로 만든 것이 조선왕조인데 퉁두란을 고려인으로 윤색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은 일. 하지만 정작 조선왕조는 퉁두란의 여진족 집안 내력을 세세히 밝히고 있으며, 청해 이씨 집안도 자기 집안이 악비 후손이네 하면서 덧칠은 했을지언정 여진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감추지는 못했다.

이성계가 여진족이었다면 또한 동만주 여진족들 사이에서 이성계와 관련한 구전이 남았을 것이며, 그렇다면 조선왕조에게 왕가를 배출한 부족으로싀의 지분을 요구했을 것이다. 여진족 시절에야 조선에 비해 약소했으니 요구가 씹혔다 쳐도, 여진족 출신 만주족 왕조인 청나라에서 이걸 이용해먹었을 것이다. 대번에 "느그 왕 여진족이니까 이제 큰집인 우리한테 들어오는 건 당연 ㄳ" 하는 식으로 써먹고 오늘날 중국 측에서도 닳아서 가루가 되도록 우려먹고 있을 일이다.

심지어 이지란은 건주여진 출신으로 누르하치가 바로 그의 친척 아이신기오로 먼터무의 후손이다. 그렇다면 누르하치나 그 후손들이 자기네 친척어르신의 의형제라는 이성계에 대해서 알아봤을 것이며, 집안에서 이성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왔을 것이다.

심지어 청나라는 대청회전을 편찬하면서 대명회전 원본을 따를지(이인임 자손설) 수정본을 따를지(이인임 무관설)를 고민했을 뿐이다.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 본인들조차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생각 자체를 안 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지역의 고려인들과 여진인들은 서로를 혼동하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4.5. 여진족의 범위

색이 옅다는 것으로 따진다면 타국인과 교류하며 지냈던 국경 지방이나 외따로 떨어진 제주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고 하는 것, 경상도 해안지방에 왜관이 있었다고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성계 여진족설과 같은 논리로 보면 앞서 언급했듯이 쌍성총관부에서 99년이나 살았던 한양 조씨들도 여진족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이성계 여진족설을 밀며 조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숭상하는 고구려발해는 아예 백성 대다수가 여진족의 전신인 말갈인들로, 그들의 기준으로 따지자면 가장 한민족 계열의 색이 옅은 나라 중 하나다. 설마 이 시대에 예맥인과 말갈인의 통혼이 없었을거라고 하는건 지나친 희망사항이다. 고구려 인구 300~500만설을 미는 사람들조차도 그 인구가 전부 예맥 계열 한민족이라는 가정은 안할뿐더러, 할 수도 없다. 발해는 더더욱 말할것도 없고.

정확히는, 쌍성총관부를 몽골에 넘긴 반란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고 다시 고려에 귀화시킨 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할 때 도움을 줌으로써 고려 정부에 출사하게 된다. 조씨 가문이 저렇게 상반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세대가 흐르면서 쌍성총관부의 관직세습 때문에 가문이 분열하여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4.6. 족보의 신뢰성 관련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조선까의 주장을 대충 소개하자면 여진족이 만주 지역만이 아니라 한반도 북방에도 꽤 살았다는 것과 으레 나오는 과거 족보의 신뢰성을 걸고 넘어진다.

태조 총서의 기록에 태조의 6대조 이린의 한자가 李璘, 李隣 등으로 다르게 기록되는 혼선이 있다. 이린이 이의방의 친동생이기 때문에 이의방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다르게 기록한 걸로 보인다. 족보의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갑자기 동북면 쪽이 근거지가 되는 행적을 증명하는 증거의 신뢰성이 약하기 때문에 이씨 족보를 구매했을 거라는 주장을 한다. 당시 성씨는 그 가문의 봉토와 귀족의 증거라 성씨를 가진 고려인이 몽골에 귀화하면 반드시 자신의 성씨는 남겨 놓았다.

하지만 고려에서 여진족이 하루 아침에 족보를 사서 고려인 귀족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상상 자체가 역사적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억지일 뿐이다.

4.6.1. 반론: 고려의 폐쇄적인 특징

  • 첫째, 고려는 폐쇄적인 문벌에 기반한 세습 귀족 계층이 주도하는 국가였으며 철저한 계급 체제를 갖추고 있었므로 세습 문벌 외의 잡상인이 족보를 살 수도, 산다고 귀족 행세를 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가문의 방계나 인척, 지인들은 가짜 귀족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챌테니. 이 귀족이라는 건 악명높은 음서제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후대 조선의 양반과는 궤를 달리하는 극도의 폐쇄적 집단으로 혈통이 결여되면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진입이 불가능한 이너서클이다. 그런데 이성계의 집안은 이미 쌍성 시절부터 고려 조정에 음서로 출사를 해왔다. 도조 이춘의 동복형 이송,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 등. 사촌형 이천계 역시 이자춘 부자보다도 먼저 고려에 귀부했다. 이는 쌍성 시절에도 이성계 집안이 고려 조정과 연계를 완전히 끊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이성계 집안에 명예직 벼슬을 꾸준히 수여해왔기 때문이다. 여진족설은 여기서부터 이미 박살난다. 이너서클 귀족집단들이 고려인도 아닌 여진족에게 음서 자리를 내줄 리가 없다. 이지란의 아들들은 음서로 출사한 정황이 보이나 이는 이지란의 가계가 완전히 귀부한 이후의 일이다. 또한 이성계 집안의 계보에서는 목조의 할머니[5]가 의종~명종대의 명재상 문극겸의 딸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모계가 부계 못지 않게 중요했던 고려 사회 분위기에서 당대의 명문가인 남평 문씨 문중은 여진족이 자기 집안 외손이라고 주장하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족보의 매매나 위조는 활자와 인쇄술이 어느 정도 대중화되면서 족보의 간행이 활발해서 개나소나 돈만 있으면 족보를 한 질 뽑아낼 수 있게 된 조선후기의 이야기지, 이도 저도 해당되지 않는 고려시대에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때 최고의 권신이었던 정중부이의민, 김준, 이인임도 집안 내력을 뜯어고치지는 못했다. 이인임은 그래도 원간섭기 초기인 충렬왕대에 학문을 닦아 일어난 가문이라 그렇다 쳐도 정중부는 묶여서 개경에 보내졌다고 기록될 정도의 흙수저였고[6] 이의민이나 김준은 아예 천민이었으니 권력 잡으면 충분히 족보 뜯어고칠 만했다. 후에 정선 이씨 족보에서 베트남 왕족 출신이라고 기록해놓긴 했지만 이건 이의민이 죽고도 300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이성계 집안이 잠시 고려 중앙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순간은 있었으나, 그 기간이 그리 길지도 않았기에 몇촌만 거치면 충분히 족보의 교차검증이 가능한 상태였다.

4.6.2. 반론: 고려의 무시할 수 없는 민족의식

  • 둘째, 고려는 수백년동안 북방 야만족의 거듭된 침략에 저항하면서 확고한 민족 의식이 자리잡은 일종의 민족 국가다. 이 때문에 한국은 '민족은 근대의 발명'이라는 현대 서양 학계의 주류설을 완전히 뒤집는 사례로 엄청난 골칫거리다. 때문에 고려는 북방 야만족에게 개방적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야만족 출신이 주로 노비나 백정 계급으로서 천시되는 상황에서 여진족 나부랭이가 출신을 숨기고 귀족 행세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정도전은 모계가 노비 출신이라는 의혹만 제기되었음에도 정치 생명은 물론 일신의 생명까지 끝장날 뻔 했었다. 애초에 황제에게 천호장 직위를 받았다면 이미 원나라 조정에서도 그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거나 최소한 지역 유지로 인증한 것이다. 다만 세력이 커진 도적집단을 초무하여 관직을 내리는 경우는 존재했다.. 중국 역대왕조에서 군대로 쓰기 위해 도적집단을 사면하고 군벌로 들여 쓴 경우는 흔하다. 원나라에선 심지어 반란을 일으켰다 말았다를 반복한 장사성에게 태위라는 삼공(三公)의 벼슬까지 내린 바 있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는 초기의 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승계 문제로 계모와 다투면서 아예 직접 원 조정의 공인까지 받았다. 그렇다면 이미 고려 지배층들도 모두 알고있을 것을 속일 방법은 없다. 이것은 누구보다도 쌍성 총관부의 한양 조씨들이 증인이다. 이성계의 가문이 여진족이었다면 적어도 원나라 시절 쌍성 총관부에선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역사서 어디를 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이성계가 출사한 이래 즉위하기까지 그와 대립하던 이들이 이인임, 조민수, 정몽주 등 한둘이 아니었고, 반면에 이성계를 지지한 것이 반몽주의를 내세운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이성계의 혈통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면 반대세력들이 "저새끼 여진족" 한마디로 정치생명을 끝장낼 수 있었음에도 누구도 이를 이용해먹은 적이 없다. 또 이성계가 이 정도로 본인부터가 혈통에 약점을 지닌 상태라면 폐가입진이라며 감히 왕실의 혈통을 문제삼는 정치적 모험을 감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태조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이 사망하고 신도비를 세울때 조상의 이력을 명기하는 신도비문을 고려말 당대의 최고 석학인 목은 이색이 은쾌히 작성하고 자신의 문집에도 기록해 놓았다는 것도 참조할 필요가 있다.

4.6.3. 반론: 귀족 계급과의 혼인

  • 셋째,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신천 강씨(신덕왕후)나 성주 이씨(이인임 집안) 등의 귀족 신분과 혼사를 트려면 당연히 같은 고려인 귀족급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세력이 크다한들 당시에 전주 이씨 일가가 고려인인지도 확실치 않은 북방 군벌 나부랭이였다면 고려 중앙 정계의 귀족들과 가문대 가문으로 혼사를 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들어온지 오래된 오늘날의 일본에도 부라쿠민 집안에서 천황가나 정치인 가문과 가문대 가문으로 혼사를 트고 상류층으로 편입하는 것이 관습상 불가능에 가까운데, 수백년 전의 고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여진족 출신임이 확실한 이지란의 사례와 비교해보면 차이가 나는데, 그나마 개경에 따라와 출사한 이지란도 이미 시집을 두번이나 갔고 그나마도 한번은 시집갔다가 뭔가 사고를 쳐서 쫓겨난 여자를 선심쓰듯 넘겨받는 처지였다. '의를 상하게 해서' 쫓겨나 이인임에게 뇌물을 주고 무마했다는 것을 보면 어떠한 범죄적 사건일 가능성도 있다. 그나마 이지란은 처가 누구인지도 기록되어 있고 후에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을 후처로 맞이하기라도 했지, 명색이 검교직일지언정 문하부사까지 간 이원경 같은 경우는 아예 누구한테 장가갔는지 기록도 없다(...). 반면 이성계는 전통의 명문가인 신천 강씨 집안의 장녀를, 그것도 자기 아들보다도 어린 계처를 얻었으며, 그 숙부인 강윤충과 사촌 강우도 이자흥의 사위들로 이성계에게는 사촌매형이 되었다. 이는 신덕왕후의 친가인 곡산 강씨, 외가인 진주 강씨 모두 이성계를 비롯한 쌍성 전주이씨 가문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집안의 운명을 걸었다는 것으로서 이성계의 가계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신덕왕후는 일반적으로 곡산 강씨로 설명하는데, 곡산 강씨는 신덕왕후의 아버지인 강윤성 대에 신천 강씨에서 분적된 가문으로 현재는 다시 신천 강씨의 일원으로 합쳐졌기 때문에 그냥 신천 강씨 집안으로 봐도 무방하다. 신천 강씨는 무려 신라시대부터 이어지는 집안이며, 특히 고려 태조 왕건의 증조모 집안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즉 이성계를 비롯한 쌍성 전주이씨 가문은 비교적 최근에 흥한 신흥족벌을 운좋게 잡은 것도 아니고, 족히 수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깊은 진짜배기 명문가와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이성계의 형 이원계는 더욱 대단(?)해서, 개성 김씨[7], 경주 김씨, 남평 문씨 집안의 여식들을 줄줄이 처로 맞이했다. 심지어 삼배인 남평 문씨는 바로 문익점의 딸이다. 이복동생 이화 역시 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초부터 내려오는 명문가인 교하 노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다.

4.7. 조선의 여진계 풍습 부재

이성계의 가문이 여진족이었으며, 여진족이 자기들과 이질적인 고려를 뒤엎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만들었다면 '나라의 상부층에 침투한 이민족'을 통해 이민족의 풍습이 한반도에 전해졌어야 마땅하다. 가령 만주족이 중원을 지배하는 청나라를 세우자 여진족의 변발 풍습이 보편화되었고, 원 간섭기 시기에는 고려의 상류층들이 몽골식 복색을 하고 다녔다. 변발의 경우 만주족 정권이 한족들에게까지 강요한 것이지만 원 간섭기 시기 몽골 정권은 고려의 토착 풍습을 존중하며 건드리지 않겠다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상류층들이 몽골 양식을 흉내내고 다닌 것이다. 반대로 중원에서는 고려양이 유행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고려인과 구별되는 여진족이 조선 왕이 되었다면 여진족의 풍습이라 할 만한 것이 조선에 유입되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러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이성계가 여진인이 아니며 고려인의 풍습을 따르는 고려인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4.8. 논제의 핵심

특히 가장 중요한 점은, 이성계 일족은 자기들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점. 오히려 이성계가 무너뜨린 고려왕실은 본인들 조상이 당 숙종과 관련있다고 사기치고 다녔다는 점인데 조선까들은 이걸 갖고 아무도 고려 왕실이 혐오스러운 중국계 종자라는 것을 떠들고 다니지않는다. 일부의 편견과 달리 여진족과 한반도의 사람들은 고대부터 그 정체성이나 언어가 확실히 구분되는 별개의 민족이었다. 과거에야 만주어 자료를 일반인이 찾기 어려우니 단어 몇 개 가져다가 혹세무민하는 이들이 판을 쳤지만, 이제는 유투브나 구글에서 조금만 검색해보면 만주어 자료가 여럿 나오는 시대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 가족이 실제로는 여진족이라고 스스로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려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 애초에 이들이 여진족으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공민왕을 편들어 쌍성총관부를 고려에 바치느니 차라리 쌍성지역의 여진족을 규합하여 동만주를 제패해 아쿠타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또,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의 경우 멀쩡히 여진족이라고 기록하고 그의 여진족 가계도도 충실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성계 가계도만 지어냈을 거라는 주장은 더더욱 신빙성이 떨어진다.

물증도 없고, 심증도 없지만 그럼에도 모든게 조선왕조의 역사왜곡 조작이고, 유전적으로 이성계의 혈통에 정말 여진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해도[8], 더 중요한건 기록에 남아있는 이성계는 스스로도 항상 고려인이라 주장했을뿐 아니라 배극렴, 정도전, 조준, 남은 등등 고려인이 100% 확실한 사람들에게 고려인으로 인정받고 추대받아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 고려인이라 주장하고, 고려인으로써 행동하고, 주변에서 모두가 고려인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그냥 고려인이다.

게다가 유전자의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성계처럼 가문의 유명인의 혈통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로 이씨왕조는 근친상간을 한것도 아니고 조선의 명문 가문들과 두루두루 통혼을 했다. 설령 이성계가 여진족 아버지와 여진족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순도 100% 여진족이었다고 가정해도[9] 더이상 여진족과의 통혼을 멈추고 조선인 가문들하고만 통혼할 경우 겨우 몇대만 흘러도 여진족의 유전자는 금방 희석되어서 없어지는거나 마찬가지다.[10] 이성계의 혈통을 음해한 후에 '그러므로 조선은 사실 여진족이 조선인들을 다스리는 왕조였다' 따위로 이어지는 무식한 음모론자들의 주장은 이성계를 100% 여진족이라고 가정한 상황에서조차 무의미한 말이다. 몇대만 지나면 유전적으로 완전히 조선인이 지배하는 나라가 되니까.

그리고 이 이성계 여진족설을 미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금나라 황실이 한국계라는 명백한 공식 기록이 남아있는 것(금사, 완안함보는 고려인이다)은 이를 악물고 무시한다. 더구나 고려황실 어인족설같이 술작이 지극히 뻔하여 생물학적 신뢰성이 없다는 것과 달리 금사는 국가에서 편찬한 공식 정사이다. 즉 이성계 여진족 운운하는 이들은 이런 실제 기록에 집착하여 중세 북중국 유목사를 한국의 소유로 편입시키려는 소위 '환빠'들보다도 질이 떨어지는 역사왜곡세력인 셈이다.

5. 결론

따라서 여진족 설은 조선 왕조에 대한 어떤 감정적인 해석, 혹은 만주 지역에 대한 민족주의적 감상에 따른 해석에서 비롯된 낭설로 봐야 될 것이다. 사실은 고려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리는 상상에 불과하다.



[1] 이전 문서에는 이의방이 직접 의종을 시해했다고 나왔지만 시해를 한 건 이의민이고 시해 명령을 이의방이 한 것이다.[2] 이것도 강가보다는 산지가 먼저다. 전근대의 기술력으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연식 수로를 구성하는 쪽이 훨씬 난이도가 낮았고, 여기에 한반도의 극악한 하상계수 특성상 강가를 개간하려면 엄청난 제방 축조 및 배수시설 공사가 수반되어야 하며 그러고도 각종 수해 문제는 현대에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현대인들의 편견과 달리 강변지역들 중에 현대 양수기의 도입 이전까지 쌀밥 먹기 힘들었던 곳들이 부지기수다.[3] 일부 부족들은 반유목을 하기도 했지만 여진족 전체가 유목민은 아니었다.[4] 요 역시 태종(요) 시기 후진이 말 안들으며 엇나가자 카이펑을 점령하고 후진을 멸망시키며 중원을 통치할 뻔 했으나, 결국 한인들의 결사적인 저항에 연운 16주 이북으로 물러난 전력이 있었다. 나름 정주민 국가인 발해를 흡수하고 거의 반세기 가량 국력을 키웠던 요가 이랬는데, 금은 여진 통합 이후 정강의 변까지 고작 13년 걸렸다.[5] 이린의 아내[6] 다만 저기서 묶였다는게 실제로 죄인처럼 포박당해서 올려보내진게 아니라 정중부 본인은 원하지 않았던 개경으로의 징병을 당했다는 의미의 관용어일거라는 의견도 있다. 하여간 적어도 강제징병을 당할 정도의 흙수저인 건 맞다.[7] 의성 김씨에서 문종조에 분적한 집안. 의성 김씨는 경순왕의 후손들.[8] 만약 역사왜곡을 동원했다고 가정해도 대대손손 여진족이던 사람이 갑자기 고려인을 참칭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너무나도 빈약하고, 어쩌다 이성계 가문에 여진족이 한두명 통혼으로 섞여 들어왔는데 나중에 은폐당한 정도라면 가능할 수도 있다.[9] 가정을 위해서 한 말일뿐 당연히 가능성이 거의 없는 말이다.[10] 이성계를 100% 여진족으로 간주해도 겨우 100년후의 6대손인 연산군과 중종이 이미 1%대고 그후로는 0%대로 진입한다. 조선왕조는 이후로 400년을 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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